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무상을 아는 것이 인생을 아는 것이다. (20160826. 대구)

담마마-마까 2022. 3. 18. 09:00

https://youtu.be/K2CAkKc9RQM

* 무상을 아는 것이 인생을 아는 것이다. (20160826. 대구)

 

자! 오늘은 오전에 「무상을 아는 것이 인생을 아는 것이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십몇 년 전에 스님의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 삼일 동안 병원에서 장을 치뤘는데, 다 똑같이 그렇게 하죠? 3일 동안 스님이 직접 염불을 하고 3일 동안 있었어요. 모친 하고 스님하고는 참 정이 많았기 때문에 생각나는 것이 굉장히 많았었습니다. 그래서 태국에 있을 때도 모친이 위빳사나 수행을 배우고 공부할려고 하기 때문에 틈나는 대로 국제 우편물로 해서 유인물을 보내주고 이렇게 했었거든.

 

아마 스님이 출가를 해서 태국에서 그렇게 수행을 하면서 마라나눗사띠라고 하는 수행법을 몰랐을 거 같으면 아마 3일 동안 모친 앞에서 굉장히 울어가면서 꿋꿋하게 있지는 못했을 거라. 그런데 지금은 거의 이십년 가까이 되어가네. 돌아가신지가.

'마라나눗사띠(maraṇānussati)'라는 것이 뭐냐면 '마라나(maraṇa)'라고 하는 것은 죽음을 말하는 거고, '아눗사띠(anussati)'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을 주관적이거나 편견없이 그리고 개념화시키지 않고 그냥 있는 그래도 관찰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죽음은 어떤 겁니까? 피할 수 없는 거죠? 어떤 것이든 죽음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체일 거 같으면 반드시 죽음을 맞습니다. 생명체가 아닌 것들도 부서지게 되면 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이든 모든 것들은 반드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면 반드시 죽어야 되는 거고, 생성된 것이면 이런 컵이든 무엇이든 생성된 것이면 파괴되고 무너지게 돼있다는 거라. 그게 마라나눗사띠의 기본입니다.

그걸 꾸준하게 교육을 받고 실제로 죽은 사람의 모습, 죽은 지 하루 지나고 이틀 지나고 한 것들을 계속적으로 꾸준하게 해왔기 때문에, 크게 죽음에 대해서 동요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돼있었기 때문에,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도 내가 직접 모친을 닦고 옷을 입히고 이렇게 하는 과정들을 다 겪어보게 됐는데, 그렇게 하면서 꿋꿋하게 그냥 내 할 일만 하고 있으니까, 누가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페이스북 같은데 글을 올렸더라고. 뭐라 그랬냐면 "스님은 출가한 스님이라서 그런지 참 너무 냉정하다.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눈물 한방울 안 흘리고 그렇게 의연하게 그냥 있더라." 그런 글을 올린 적이 있더라고. 그래서 그걸 보면서 씨익 웃은 적이 있었는데.

 

여러분은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직접 나하고 가장 친한 이가 돌아가셨을 때 3일 동안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것도 계속, 요즘말로 할 것 같으면 염불, 그것도 빨리어로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한글로 표현하면 절절한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하면서 3일 동안 쭉 있으면서 지낸다는 것은 참 힘이 드는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도 부처님 공부가 참 좋은 게 뭐냐면 그런 수행을 꾸준하게 해왔기 때문에 그런 일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내가 할 일들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때 내가 할 일들은 뭐가 있겠어요? 돌아가셨을 때 씻기고, 안치하고 염불하고 그리고 사람들 문상오면 문상받고 그리고 내가 최선을 다해서 그 사람들에게 해줘야 될 거 하고, 그러고 나서 화장하고 그런 것까지 하는 것이 내가 할 일들이라는 거라. 운다고 해서 해결될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마라나눗사띠를 안 해온 사람들은 그걸 잘 못합니다. 실제로 출가한 스님들도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는 직접 잘 안 걸려고 그럽니다. 다른 스님을 보내든지 이렇게 합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봅시다.

지금은 스님은 해가 뜬다든지 해가 지고 할 때 그것에 감상에 안 빠집니다. 그런데 내가 젊을 때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 출가하기 전에는 해뜨고 해지는 것이 너무 그렇게 좋았어요.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라. 해가 뜨고 지고 하는 걸. 거기다가 뭔가 감정을 넣게 돼있는 거라. 그거는 마라나눗사띠가 안 되겠죠? 그렇게 하면.

쥐가 죽어있다. 죽은 모습을 보고 ‘아, 저렇게 죽는구나’ 하고 알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면 혐오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치워주는 게 예의라고 알 것 같으면 그렇게 하는데, 사람들은 쥐가 죽은 것을 보고 거기에다가 감정을 넣습니다. 그리고 그걸 피할려고 하고 멀리 도망쳐버리게 됩니다. 마음도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을 못하게 되는 거고. 그렇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마트에 물건을 사러 갔는데 누가 지나가는데 뭘 건드렸던 모양이라. 그래서 상품이 몇개가 바닥에 떨어져있어요, 지나가는데 보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그걸 피해가면서 가지 넣어놓고 가지를 않는 거라. 그래서 저걸 보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도 있고 거슬릴 수도 있는데, 그냥 넣어놓고 가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무도 그렇게 하지를 않는 거라. 그래서 내가 가면서 이렇게 이렇게 넣고 간 거라.

그게 하나의 일이지만 올바르게 공부를 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감정에 빠지지 않고, 그리고 사고를 해서 망상을 하지를 않고 또 그것에 대해서 지금 해야 할 일들을 정확하게 해내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모를 거 같으면 대부분 보면 거기에 다가 괴로움이라든지 즐거움이라든지 이런 것에 빠져버리고, 그리고 괴롭고 즐겁고 하는 것이 내가 괴롭고 즐겁고 하는 주최자라고까지 그렇게 하게 된다는 거라. 또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형태를 띠게 됩니다.

 

오늘 주제가 무상한 것들입니다. 무상을 아는 것.

무상한 것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있는 그대로 관찰을 할 거 같으면 어차피 내가 죽어야 된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죽기 전에 내가 열심히 뭔가 할 일들을 할려고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무상한 것을 싫은 것이고 괴로운 것이라고 인식할 거 같으면 그걸 자꾸 피할려고 하게 됩니다. 안 죽을려고 자꾸 노력을 하게 되고, 그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그렇게 하는 주최자가 「나」라고 하는 인식을 더욱 더 강고하게 만들어주는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수행을 하면서 호흡이 무상하다는 것을 느껴본 사람들 많죠?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동일하지 않고 들이쉬는 호흡도 자꾸 끊어지면서 연결되는 것이 보이고, 그럴 것 같으면 ‘아, 이게 일정하지 않고 변하고 있구나, 호흡도 변하고 있구나’ 그래서 ‘아 이것은 참 무상한 것이구나’ 하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무상한 것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내 몸도 무상한 것이고 내 몸에서 쉬는 호흡도 무상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도,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느낌들도, 지각작용들도, 인식하는 것들도 다 무상한 것이고, 그것이 연속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무상하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러면 적어도 이 몸에 대해서 집착하고 하는 것이 적어져버립니다. 그래서 크게 무슨 일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리게 되고,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하고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지금 중요한 것들을 오히려 할려고 합니다.

그것이 수행이면 수행, 법을 전하는 것이면 법을 전하는 것, 다른 일이면 다른 일들 자기 할 일들을 분명하게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에는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선한 마음들이 계속 일어나게 되는 거고.

 

그래서 수행을 하면서 자꾸 위빳사나 수행을 하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면 그렇게 무상·고·무아 중에 어떤 것이라도 자꾸 이해하고 그것이 확신이 들게 되면 적어도 내 몸과 마음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지게 됩니다. 집착하는 것들이 없으면 번뇌들도 적게 일어나게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을 분명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말하자면 세속 일상생활에서라도 모든 일들을 무상한 성품으로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쥐가 죽든지 아니면 일출이나 일몰이든 이런 것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냥 자연의 성품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성질이다 하고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이지, 거기에다가 감정을 넣지는 않게 됩니다.

 

그게 인제 일반적으로 공부를 하면 진행돼나가는 방향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꾸 그걸 피할려고 합니다.

죽음도 불행한 일이다. 그래서 그것도 피할려고 하고, 그런데 사실은 죽음은 피할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적인 사실과 본인은 등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등을 돌리고 있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사실과 맞닥뜨려지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거라. 똑바로 그걸 보고 있어야 내가 뭔가 대처를 할 건데 안 보고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에서는 뒤통수에 대고 뭐가 일어나고 있는지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뒤통수를 맞으면 뭘 어떻게 해야 될 지를 모르는 거라. 그러면 우왕좌왕 하게 돼있는 거고, 또는 자기 함정에 그냥 빠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죽음은 확실하게 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언젠가는 방문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실이라는 것을 항상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항상 자꾸 생각을 해야 되는 거라.

언제 내가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지금 내가 뭔가를 빨리빨리 해야 될 거를 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남에게 언제 그렇게 나쁜 말을 하고 나쁜 행동을 할 여유가 있어요? 바르게 해도 모자라는데. 그래서 남에게 피해 입히고 하는 것들은 하지 않고 자기 할 일들을 하게 되고, 그리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만 자꾸 할려고 하게 되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죽음에 대해서 자꾸 맞닥뜨려가지고 그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살아가는 것이 효율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피해야 될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알고 있어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두 번째 줄에 보면은 "인간은 괴로움을 당할 때 자아를 괴로움의 주재자로 여긴다" 하고 적어놨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괴로움, 죽음을 괴로움으로 인식하는 것들은 피해야 될 것들이고 불행한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에 괴로움으로 보는 거라. 그렇게 되면 누구에게 괴로움이 일어나는 거라? 자기 자신이 괴로워진다는 거라. 그러니 내가 괴롭다고 자꾸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 괴로움을 느끼는 실체가 나라고 자꾸 생각을 해버리는 거라.

죽은 것은 내가 아니고 다른 것인데 내가 고통을 받고 있는 거라. 이건 뭐가 잘못됐다는 거라. 밖에 대상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밖의 대상을 맞닥뜨리지 않을려고 자꾸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걸 피해버리는 형태를 띠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이런 악순환을 자꾸 겪게 되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경전에 보면 랏타빨라 스님이라고 하는 분이 출가할 때 그런 얘기를 합니다.

“참 세상은 무상한 것이다. 참 덧없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내가 흥미를 느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또는 이 몸은, 오온이라고 하는 이 몸은 항상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그 어디에도 없다. 실체하는 것이 없다 하는 거라. 그리고 언제든지 나에게는 죽음이 닥쳐오기 때문에 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걸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그걸 절실하게 깨달으니까 당연히 출가를 하게 되는 거라.

그걸 뛰어넘는 방법을 찾다가 보니까 출가를 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출가를 하고 나서도 그러한 사실을 자꾸자꾸 수행을 통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런 것들과 맞닥뜨리면 본인은 그것을 자꾸 피할려고 하게 됩니다.

 

기생 시리마라고 하는 경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렇게 아름다운 기생을 사람들이 자꾸 차지할려고 그럽니다. 많은 돈을 주고. 그런데 그 기생이 탁 죽고 나니까 아무도 거들떠 안 볼려고 하는 거라.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전에는 만냥을 주고 기생을 차지할려고 했는데, 인제는 만냥 필요없다 백냥만 주고 기생을 차지해라 해도 누가 죽은 기생을 백냥을 주고 차지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공짜로 차지하라고 해도 안 한다는 거라.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직접 부처님이 보여주면서 출가한 스님들한테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와 같은 것이다. 태어났으면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인데, 그걸 뭘 항상 할 것처럼 그렇게 집착하고 좋아하고 또 싫어하고 하느냐는 거라.

그게 우리 생이라는 겁니다. 그걸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그래서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밝게 살 수 없을 뿐아니라 죽음을 맞이했을 때도 밝게 죽을 수가 없게끔 됩니다.

 

여기 일화에 나와있는 빠따짜라(Patācārā)라고 하는 분도 보면 아마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하인과 눈이 맞아서 멀리 도망을 갔다가 아이를 두 명을 낳습니다. 첫 번째 아이를 낳고 두 번째 아이를 낳을 때도 밖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인도에는 관습이 있습니다. 친정이 있는 곳에 가서 아이를 낳는 관습이 있는데, 친정에 가지 못하고 가는 중간에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 아이를 낳고 나서, 남편이 찾아와서 아이와 산모가 비에 젖고 있는 것을 보고, 비를 가려줄려고 나뭇가지를 구하러 갔다가 독사에 물려서 죽어버리게 됩니다.

밤새 산모는 어린애 하나와 인제 갓 태어난 애기와 함께 비를 흠뻑 맞고 아침이 되어서 보니까 남편이 저쪽에 죽어있거든. 얼마나 두려움이 찼을 거라. 아, 내가 저 사람 하나만 바라보고 집을 뛰쳐나갔는데 그 사람이 죽어버렸으니까 나는 거기 살아갈 이유가 없다 싶어가지고 친정으로 다시 돌아갈려고 합니다.

 

친정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강물을 건너는데 두 명을 다 안고 건널 수가 없으니까 첫째 아이를 안아가지고 강물을 건너 내려놓고, 다시 또 둘째 아이를 데리러 돌아가는 사이에 독수리가 나타납니다. 독수리를 피하라고, 독수리야 저리가라 하고 손짓을 하니까 첫째 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 엄마가 나를 부르는구나 생각하고 강물이 있는데 가다가 빠져 죽어버립니다. 눈앞에서 아이가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는 거라.

그래서 급히 갓난 아기가 있는 쪽으로 건너갈려고 하는데 독수리는 이미 그 갓난아기를 또 채어가버리는 거라. 하룻밤 사이에 두 아이와 남편까지 모든 걸 다 잃게 되는 거라.

그래서 반 실성한 채로 집에 가보니까 그날 비가 오던 날 번개가 치고 하면서 집이 번개를 맞아 불에 타버리면서 안에 있던 가족들이 전부 다 불에 타 죽어버렸다는 거라. 친정 식구들이건 아니면 자기가 결혼해서 같이 보냈던 가족이든 모두가 다 죽은 모습을 보고 그냥 미쳐버린 거라.

 

만약에 마라나눗사띠를 조금만이라도 공부를 했을 거 같으면 이런 상태까지는 안 커지게 되겠죠. 본인이 해야 될 일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조금 더 이성적으로 ‘아, 언제든 죽음은 올 수 있다’ 하고 생각하고 차분하게 대응했을 거 같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건데, 그걸 자꾸 등을 돌릴려고 하다 보니까 우왕좌왕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반미치광이가 되어 돌아다니고 있는 걸 어느 누군가가 부처님이 있는 데에다 데리고 간 거라. 옷은 다 해져가지고 발가벗다시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이 빠따짜라를 부처님이 있는 곳에 못가게끔 제지를 합니다. 멀리서 부처님이 보고 있다가 이 빠따짜라를 부릅니다. '바기니(bhaginī)'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딸'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딸아, 이리 오너라!” 쉽게 말하면 "아이고, 사랑스러운 내 딸아! 이리 오너라." 이렇게 하고 부릅니다. 부처님 딸도 아닌데 부처님은 그렇게 부르는 거라.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이 “내 딸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겠어. ‘아, 아버지가 부르는 갑다’ 이렇게 착각을 하는 거라.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은 뭔가를 의지할려고 그럽니다. 실제로는 의지할만한 대상이 아닌데도 그렇게 찾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부처님이 그렇게 안 부르고 '바기니(bhaginī)'라고 하는 “내 딸아!” 하고 부르지를 않고 그냥 “이리 오시오” “들어오시오” 이렇게 했을 거 같으면 아마 이 빠따짜라가 그 목소리를 듣고 따라가지를 못했을 거라. 반미치광이가 됐는데도 “사랑스러운 내 딸아! 이리 오너라!” 그렇게 하니까 그냥 그 소리에 끌려서 이때까지 죽은 이들에 대한 것은 전부 잊고 그냥 편안하게 끌려가는 거라. 아버지 앞에 가서 털썩 앉듯이 부처님이 있는 앞자리에 가서 사람들이 있는데도 앞에 가서 철썩 앉는 거라. 의지할 대상이 생겼으니까 ‘아이고, 이 괴로운 거를 좀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는 거라.

 

여러분도 그렇게 주변에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 괴로운 사람이 뭐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를 알 거 같으면 그것이 (재가자들에 의지처가) 되어주는 거라. 그래야만이 그 사람이 다시 그걸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내가 아무리 얘기하더라도 남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부처님이 뛰어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런 바기니(bhaginī)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데, 이 빠따짜라에게는 그렇게 씁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출가한 스님이 아파가지고 이렇게 누워있을 거 같으면 병문안을 갑니다. 병문안을 가면 대부분 사람들은 “아, 어느 스님 많이 아프십니까?”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큰 스님들은 대부분 뭐라고 그러느냐면 “아이고, 나와 도를 나눈 도반님! 얼마나 아플꼬!”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럼 아파 누워있는 스님이 그 말에 그냥 전정이 됩니다. ‘아이고, 큰스님이 나를 도반이라고 부르네. 큰스님은 저마만큼 도가 높아져 있는데 나는 이거 하나 병 하나 이겨내지 못하고 요렇게 있는구나’ 하는 생각이 탁 들면은 빨리 병으로부터 회복할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여러번 보면서 ‘아, 저게 부처님이 진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방법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와 같이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2페이지에 보면 그렇게 극딘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의지처가 되어주는 것들로 인해서 이 빠따짜라는 다시 제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아, 죽음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는 얘기를 부처님한테 듣고 ‘그래’ 하고 그때사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러분은 친한 이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걸 받아들이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마음이 안정될 때! 그 죽음을 떠올려서 애석하다든지 아니면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아, 나도 이렇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구나’ ‘죽음은 누구에게든지 찾아올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나는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하루 빨리 더 해탈·열반을 향해 나아가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내고, 마음을 단속할 수 있을 때가 언제든지 찾아옵니다.

그게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거라. 직접 그 당사자를 보고 바로 그런 마음이 들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좋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최대한 짧게 되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왜 그러냐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면 일은 자꾸 해야 할 일들도 못하게 되는 거고, 또 그걸 피할려고 술을 마시든 뭘 하든지 자꾸 하다 보면 일은 더 꼬이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의지할 대상과 의지하지 않아야 될 대상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하라."

의지하지 않아야 될 대상들을 의지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사라지고 날 것 같으면 괴로움을 받는다는 거라.

재산에 의지하고 있으면 재산이 없어지고 나면 괴로워지는 거라. 가족을 의지하고 있으면 가족이 죽음을 맞고 나면 괴로워지는 거라.

그것은 변하는 것들을 가지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못 된다는 거라. 이런 것은 의지할 대상은 못 된다는 거라.

 

뭘 그럼 의지해야 될까? 어떠한 상태에서든지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곧 닙바나라고 하는 열반의 상태가 여러분이 의지해야 될 대상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만나더라도 그 대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항상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그대로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 상태의 마음을 자꾸 만들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계속 이어질 것 같으면 그러한 열반의 상태가 현세에서 그냥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걸 경전의 주석서에서는 뭐라고 했느냐면 "변하는 물건들은 꼭 사자와 독사 등을 애완동물로 기르는 거와 같다" 하는 거라.

언제 내가 물려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걸 귀여워하고 애착을 갖는다는 거라.

그럼 물리면 괴로워하고 죽음을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사자가 옆에 있고 독사가 옆에 있는 것들을 그냥 두라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건 우리를 만들어가지고 잘 관리해야되는 것이지 그것을 물려죽을 만큼 가까이 접근해가지고 딱 붙어있어서는 안 된다 하는 거라. 잘 지어진 동물원 같은데 그런 데는 시설을 잘해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사자나 독사를 볼 수 있고, 그걸 구경할 수가 있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이 인생을 목적으로 해야 되는 것들이 뭔가 하는 것들을 잘 한번 돌아봐야 됩니다. 변하는 것들을 의지하는 대상으로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꼭 수류탄의 안전핀을 빼고 수류탄을 쥐고 있는 폭탄과 같다는 거라.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거라. 수류탄은 안전핀이 꽂혀져 있어야만이 그 값어치를 하는 것이지, 그리고 그것이 안전하고 그것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것이지, 핀을 뽑아놓으면 그것은 자신이 죽게 돼있는 것이지, 한순간에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행복하다' '불행하다' 하는 것도 무상한 성품입니다. 행복한 것도 항상 할 수가 없고, 불행한 것도 항상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꼭 붙잡고 있어야 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때 더 조심해야 되는 것이고, 불행할 것 같으면 오히려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아, 이것도 빨리 지나가는 것이다’ 생각해서 빨리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에서, 느낌이 일어났을 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은 어떻게 관찰해요? 또는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어떻게 관찰해요? 즐거운 느낌은 아, 이것은 즐거움이 항상 하는 것이 아니고 괴로움이 따라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즐거움으로부터 빨리 빠져나오도록 해야 됩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것 같으면 ‘아, 이것은 무상한 것이다 해서 화살과 같이 빠른 것이다’ 해서 거기서 빠져나와야 되는 거라.

일상생활에서도 똑같습니다. 수행에서 일어나는 느낌도 그와 같듯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행복과 불행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거는 무상한 성품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딱 매달려버릴 것 같으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오지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3페이지에 보면 "불교는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과 행복하게 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하고 나와 있습니다.

그 가르침의 기준은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이지, 그 가르치는 분이 설령 스님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스님을 기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옆에 조사스님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때 조사스님이 기준점이 돼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 기준점은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다고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게 테라와다 불자라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반드시 조사·확인해서 자기 스스로 그것들을 완전하게 몸으로 익혀서 확신이 들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그것을 더욱 더 실천하게 될 때 ‘아, 이게 부처님 가르침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고,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들을 일러가지고 '삼마닥카-또-(Sammadakkhāto)'라고 얘기합니다. 불교를 알고 있고 불교를 말하는 걸 삼마닥카또 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불교를 실천해나가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것을 삼마닥카또라고 그럽니다. 불교는 실천되지 않을 거 같으면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실천할 수 있는 기준점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이지 뛰어난 스승이나 아니면 조사스님이 될 수가 없는 거라. 이 기준점을 분명하게 알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제자들이 돼야 됩니다. 부처님이 무상한 것이다 할 것 같으면 그 무상한 것들이 ‘왜 무상한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내가 이해하고 확신이 들도록 그것을 실천해서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번 포인트를 보면

대상이라고 하는 물건이나 사람, 이것은 태어났으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고, 만들어진 것이면 부서지게 돼있는 거라. 그래서 그러한 것에 의존해 있는 것은 폭탄 놀이와 같다. 수류탄을 손에 쥐고 안전핀을 뽑은 것과 같이 그렇게 위험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희망하는 행복은,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행복하다고 알고 있는 것은 목마른 사람이 한 방울의 이슬을 핥고 기뻐하는 것과 같다 하고 적어놓았습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 먹었다고 해서 기뻐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으로 인해서 갈증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갈증을 해소하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그 이슬 한방울 핥았다고 해서 기뻐하고 좋아해야 될 일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무상을 이해해서 해탈하는 사람만이 진짜 인생에서 성공한 자이다. 닙바나를 체험하는 것이 인생에서 성공한 자이다. 그럴려면 무상을 분명하게 알고 체험해서 확신하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인생을 아는 자가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무상·고·무아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 자신이 ‘아, 참 무상한 것이구나’ 하고 확신이 들도록, ‘참 괴로운 것이구나’ 하고 확신이 들도록,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이구나’ 하고 확신이 들도록 자꾸 만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 사람은 인생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되고, 그래서 그마만큼 살아가는방법을 알기 때문에 해탈에 이를 수가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