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다. (20160902. 대구)

담마마-마까 2022. 3. 20. 09:00

https://youtu.be/nce-hbwVVXI

*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다. (20160902. 대구)

 

오늘은 오전에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다」 하는 제목으로 하겠습니다.

이거는 스님이 항상 강조하던 거죠? 자극이 없기만을 바란다고 할 거 같으면 아마 한국에 무문관에 들어가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다 깨달음을 이루어서 다 나올 거라. 무문관에는 아무런 자극이 없으니까. 밥때 되면 조그마한 문으로 그냥 밥 넣어주는 거 그거 외에는 없고. 그런데 무문관에 들어갔다 온 스님들은 대부분 삼년 결사를 하든 뭘 하든 대부분은 보면 수행에 큰 진척이 있다는 스님은 없습니다. 별로 만나 본 분들이 없습니다. 병이 들어 나오는 경우들이 많았지. 그래서 자극이 없는 것만이 꼭 바른 것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몇년 전에 테라와다 스님 한 분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뭐냐 하면 고요한 수행처에서 혼자 수행을 하는데, 아무도 안 오고 하는 곳이었는데, 그전까지는 그 스님은 파욱 수행을 해왔는데 파욱 수행은 여러분들 알다시피 사마타 수행을 위주로 합니다. 집중해서 수행하는 방법으로 하기 때문에 번뇌가 잘 안 일어나는 형태들입니다. 그래서 삼매를 어느 정도 경험하고 했던 스님인데, 그런데 고요한데 가서 수행하다 보니까 그렇게 성욕이 자꾸 올라 온다는 거라. 자기는 그게 없는 줄 알았는데. 10년 넘어 되었으니까 인제는 그건 다스렸겠지 히고 생각을 했는데 힘들어 죽겠다는 거라.

 

그래서 그때 스님이 얘기를 한 것이 “밥을 지금 어떻게 먹고 있느냐?” 하니까 아침 점심 그렇게 먹고 있다는 거라.

“그럼 아침 먹지 말고 점심도 지금 먹고 있는 걸 반으로 줄여라. 식사하고 성욕하고는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밥먹는 양을 많이 줄여봐라. 그렇게 해도 안 될 거 같으면 스님은 그 수행처를 떠나야 된다. 거기서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자극이 없어서 잠재돼있는 각각의 번뇌들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극이 원활하게 될 수 있는 곳, 대중 수행처에 들어가서 수행하라” 하고 얘기했어요.

결국엔 그 스님은 대중 수행처에 가서 수행을 하고 하다가 보니까 어느 정도 되고 아, 고요한 곳에서 수행하는 것이 꼭 바른 것만은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고 이해를 하게 되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테라와다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출가하고 나서 결제를 하고 해제를 합니다. 해제하고 나서 여러분들 잘 알고 있는 까티나 가사를 스님들한테 공양올리고 보시합니다. 그래서 가사를 받고 나면 그뒤로 짜릿따 기간이라 해서 유행하는 기간이 정해지게 됩니다.

유행하는 기간 중에 반드시 치뤄야 되는 것이 뭐냐면 '마낫따(mānatta), 압바나(abbhāna)' 라고 하는 참회하는 것을 치루어야 됩니다. 출가한 스님이 계율이 생명인데, 지금 현대 사회에서는 계율을 완전하게 다 지키며 사는 것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참회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해제가 끝나고 나면 가사를 받고 나면 반드시 그런 참회하는 곳에 가서 보름씩 아니면 한달씩 이렇게 참회하는 기간을 채웁니다.

 

그런데 그 참회하는 장소가 보통 어디냐면 지붕이 있는 곳은 참회하는 장소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반 노지에서 참회를 해야 됩니다. 사원 한쪽 구석이라든지 아니면 사원하고는 떨어진 다른 숲에 가서 참회하는 기간을 둬야 됩니다.

그 기간동안 아무것도 안 합니다. 하루 한차례 탁발 나가는 것, 그러고 와서는 내내 수행하는 것밖에 없어, 참회 기간 동안에는.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스님들한테 가서 참회하는 것, 참회게송만을 읊어버리면 되는 거라. 그러니까 모든 의무나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니까 정지한 상태가 됩니다.

 

대부분 그런 '마낫따 압바나'를 하는 곳에 가보면 그 자리가 대부분 보면은 노지 아니면 숲에 무덤 같은 그런 곳에 가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스님이 보면 그때 찍었던 사진들이 있습니다. 무덤 위에 올라타 가지고 등허리를 탁 대고 편안하게 사진 찍은 것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리 했겠어요? 처음에는 그 무덤 가까이 갈 생각도 안 나고 특히 밤 같은 때는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런데 조금 지나다 보면 익숙해 있으면 무덤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냥 편안하게 지내고 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보통 보름이나 한 달을 지내고 오면은, 그 뒤부터는 고요한 곳에서 혼자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번뇌들이 일어나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미 경험들을 다 해봤거든. 여러분도 아마 고요한 곳에서 혼자서 수행하라 할 것 같으면 그냥 별생각이 다 들 겁니다. 밤에 불빛 하나 없지 그런데 주변에 동물이 나타날지 아니면 혼불이라 하나 도깨비불이라 하나 그런 것이 나타날지 뭐 모르니까 까마득하게 뜬 눈으로 세우는 경우들이 아마 많을 거라.

 

그런데 그럴 때 보통 보면 번뇌들이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라든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생존욕구라든지 이런 것들이 일어나고, 그것들만 일어나면 좋은데 그와 동시에 마찬가지로 살고자 하는 것들 때문에 성욕들도 일어나게 거고, 뭔가 그 자리를 편안하게 만들려고 하는 그런 욕심들도 일어나게 되고 갖가지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번뇌 중에는 이렇게 보면 됩니다. 무의식이라고 하는 번뇌는 없습니다. 잠재돼있는 번뇌라고 하는 것은 있는데. 대승불교에는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번뇌 중에는 이렇게 보면 됩니다. 지금 현재 드러나 있는 번뇌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보니까 화가 일어났다. 화가 일어난 것은 드러난 번뇌입니다. 그런데 화가 일어나는 것은 그냥 자기 혼자서 화가 확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뭐 나에게 자극을 했다든지 뭘 했을 경우에는 그런 화가 확 일어나는데, 나는 화가 일어나는데 이 사람은 똑같은 경우인데 화가 안 일어나. 그럼 경우가 다르죠?

그건 왜 그러냐면 이 사람은 그런 습관들이 많이 길러져왔기 때문에 그 밑에 뿌리가 화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을 가지고 있는 번뇌가 밑에 잠재돼있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거라. 그러니까 쉽게 뭔 자극에 의해서 화가 확 일어나는데, 이 사람은 그런 성향이 적거든.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화가 확 일어나는 것이 거의 없는 경우들이 많다는 거라.

 

그래서 이렇게 잠재되어 있는 번뇌들을, 그것을 일으키게 하는 잠재돼 있는 것들을 '잠재돼 있는 번뇌'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번뇌는 드러나 있는 번뇌와, 잠재돼 있는 번뇌 2가지로 나누지, 무의식중에 의식없이, 그러니까 조건 없이 뭔가 생겨난다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교리적으로도 안 맞고, 무의식중에 뭔가 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이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것들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잠재돼있는 것들은 보통 어떤 때 많이 일어나느냐면 고요할 때 많이 일어납니다.

여러분들 망상하는 것들 수행을 할 때 일반적으로 수행을 할려는 마음이 열의가 가득했을 때는 번뇌가 잘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돼있으면 지속적으로 계속 번뇌가 일어나는 거라.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는 번뇌가 계속 일어나는 거라.

그래서 평소에 내가 마음을 선한 마음들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마음들이 없고 자애의 마음들을 지니지 않을 거 같으면 그러한 잠재되어있는 번뇌 망상은 계속적으로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하는데 굉장히 장애를 가져옵니다.

 

그와 같이 스님들도 그런 것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고요한 곳에서 수행하는 연습들을 자꾸 하게 됩니다. 그게 보통 출가하고 나서 1년 차부터 해서 지속적으로 계속하는데 많이 하는 게 1년차부터 10년차 안에서 보통 이것은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실시를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뒤에 10년이 너머 지나고 나서는 어디 가서 혼자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번뇌로 인해서, 번뇌가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도저히 여기서 못살겠다 할 정도가 되지는 않는다는 거라.

 

부처님 당시 때도 그렇게 했다고 그럽니다.

여기에 기록돼 있듯이 출가한 목적은 딱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공덕을 더 많이 쌓기 위해서!

여러분보다 스님이 훨씬 더 공덕을 많이 쌓고 있습니다. 거짓말일 거 같죠? 여러분들은 스님한테 보시물들도 올리고 해서 공덕을 많이 쌓는다고 생각하지만 스님들은 훨씬 많이 쌓습니다. 옷을 하나 입을 때, 그리고 걸음걸이 하나 할 때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는 법은 없도록 만들어나갑니다. 물을 하나 마실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냥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고 아, 참 소중한 것이고, 그리고 이것은 내가 먹고 있지만 이것을 만든 사람들을 위해서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고, 그래서 서로 공존하는 것들을 항상 마음에 염두에 둡니다. 그래서 다툼들이 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하고. 선한 마음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출가의 첫 번째 목적이 공덕을 더 많이 쌓기 위해서입니다.

 

출가를 해서 만약에 도와 과를 얻지 못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다음 생애라도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시 또 출가해서 좀 더 열심히 수행할 수 있는 조건들을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속 생활을 할 것 같으면 그러기가 참 어렵습니다. 지속적으로 선한 마음만 지속적으로 계속 일어나게끔 하는 것들이.

그마만큼 부딪치는 것들이 많고 필요없는 것들이 수행하고는 관계없이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것은 참 힘이 듭니다.

그래서 출가의 첫 번째 목적이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많이 일으켜서 공덕을 더 많이 쌓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목적이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어서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출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조금 삼매를 닦았다, 또는 내가 수행해서 지혜의 맛을 봤다. 해가지고 그것에 들떠 있어가지고 그리고 그것에 만족해 있어가지고는, 몇년 전에 나한테, “도저히 힘들어서 못살겠다” 하는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거와 꼭 마찬가지라.

삼매를 해서 삼매 경험들을 다했는데, 그거 하나 고요하게 있으면서 일어나는 성욕 하나 다스리지 못해가지고 도저히 못살겠다 할 정도가 되어서 왔을 거 같으면 뭔 의미가 있느냐는 거라.

 

지혜를 개발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조건들을 분명하게 알고, 숨이 보니까 들이쉬었으면 반드시 사라지는 것을 알고, 그리고 일어나는 것들은 반드시 그냥 사라지는 것들만 계속적으로 보이는 상태, 그 숨에 대한 것들을 알고 그래서 집착하는 것들이 없는 상태가 어느 정도는 됐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어떠한 경우도 물건이든 아니면 자신의 몸이든 마음이든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엷어졌다 해가지고, 그런 지혜를 얻었다고 해서, 그분이 다른 경계에 부딪쳤을 때 똑같이 그렇게 될 수 있느냐는 거라.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성냄을 다스리지 못했고 아니면 욕심을 다스리지 못했으면 그 부분에 탁 부딪치면은 소멸되는 현상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욕심이 탁 드러나는 거라. 또는 성냄이 탁 일어나는 거라. 무명의 뿌리를 완전하게 잘라버리기 전에는 아라한의 과정에서 그 지혜에 도달했다고 해가지고 모든 것들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살아가면서 그러한 문제들이 안 나타나리라고 어떻게 보장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거기에 자꾸 머물지를 말아라는 거라.

오늘 계를 지켰다, 계를 지켰다고 해서 거기서 머물러서도 안 되는 거고, 수다원에 이르러서도 거기에 머물러서도 안 되고, 마지막 아라한이 되었을 때 그때야만이 이제는 완전하게 안심을 할 수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도와 과를 더 빨리 얻기 위해서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보통 출가를 하게 됩니다.

출가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지 몰라도 출가의 목적은 그 이외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때 많은 무리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한꺼번에 출가를 했는데, 숲에서 여러 명이 같이 수행을 하다 보니까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거든. 사람들이 와서 귀찮게 하지도 않고, 누구든지 다 마음이 안정이 되어 있어요. 어떠한 상태에서도 고요한 거라. 같은 스님들끼리 얘기할 때도 그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들을 먼저 지니고 항상 평온한 상태에서 말을 하게 되고. 그래서 본인들이 ‘아, 이게 수행의 끝인가?’ 하고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 거라.

 

가끔 수행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그런 때가 있습니다.

수행이 진행해서 , 내가 어디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의심이 들 경우에는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겁니다. 거기에 도달한 사람들은 거기에 도달했다는 분명한 확신이 탁 일어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탁 알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산을 이렇게 쭉 오르다가 계단이 탁 있다, 그럼 산을 오를 동안에는 그런 의심이 들 경우에는 거기서 멈춰버리면 다시 밑으로 떨어져버리게 되는데, 미끄러져버리는데, 그 산을 다 올라가지고 계단이 있는 평평한데 탁 도달하고 나면, 그러고 나서 돌아볼 거 같으면, 거기서 멈춰있다 하더라도 다시 자기는 거기서 밑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다는 걸 분명하게 압니다.

 

그런 상태가 되어야 되는데, 이분들은 ‘어, 내가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가 되고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을 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있으니 이게 수행이 끝난 게 아닌가?’ 의심이 들게 되는 거라. 사실은 의심이 든다는 것은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한테 여쭤볼려고 가게 됩니다. 부처님이 보니까 아직 저 스님들은 그러한 상태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거라. 단지 고요하니까, 자극이 없으니까 거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거기에 도달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뿐이라는 거라.

 

여러분들에게 만약에 자극이 없이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럴 것 같으면 화가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화가 안 일어난다고 해가지고 자신에게 화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못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한 조건이 계속 지속되면 화가 없는 것처럼 착각을 해버리게 되는 거라. '나에게는 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좀 더 좋은 조건이었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착각한 것이었기 때문에,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얘기합니다. 저 스님들 나한테 와봐야 소용이 없다는 거라. 오기 전에 숲에 공동묘지가 있는데 공동묘지에 좀 머물고 있으라고 얘기하라고 합니다.

 

지금은 우리도 1년에 한차례씩 '압바나 마낫따' 라고 해서 공동묘지에서 수행을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체가 드러난 것이 없습니다. 단지 매년 병원에 가면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전시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보면서 부정관 수행을 하고, 죽음에 대한 수행을 하고, 이렇게 하긴 하는데, 공동묘지에 가보면 요즘은 그렇지 않은데 옛날에는 그냥 다 파헤쳐져 있다시피 했어요.

특히 인도 같은 경우에는 무덤을 써가지고 사후세계를 대비하고 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버려버립니다. 태울만한 능력이 안 되면, 쉽게 말해서 장작값이 비싸기 때문에 장작을 살 능력이 안 될 것 같으면 태워버리지 못하는 거라. 태워버릴 능력이 안 되면 그냥 집밖에 마을밖에 가서 버려버리는 거라. 그럼 그게 자연스럽게 썩게 되는 거라. 그래서 썩어서 없어지게 되는 그렇게 되는 형태들을 취하게 됩니다.

 

공동묘지라는 것은 그런 개념들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야 태워버립니다. 태워버려가지고 그 재를 물에다 뿌려버립니다. 그러면 흔적도 없이 돼버리게 되는데, 돈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공동묘지에 버려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니 거기 가면 온갖 악취가 풍기고 부패되어 가지고 내장이 터져나와있고 이런 모습들을 보면 혐오스럽습니다.

그러면 거기를 지나가려면 대부분 사람들은 다 발걸음이 빨라져버립니다.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그걸 안 볼려고 고개도 싹 돌리고 하면서 거길 빨리 지나갈려고 해버립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무리의 스님들이 다 같이 그렇게 걸음이 빨라져서 빨리 거기를 지나가는 거라.

거기를 벗어나고 나니까 저 저쪽 끝자락에 가니까 인제 막 죽은 사람을 내던져놓은 것이 있어. 그런데 아름다운 여인이었거든.

 

지금은 그런 의식이 없는데 옛날에는 출가한 스님들은 가사를 만들기 위해서 공동묘지에 가서 죽은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을 벗겨와가지고 그걸 재단해가지고 염색해가지고 이런 가사로 만들어서 입었어요. 그걸 '빵수꿀라 찌와라'라고 해서 '분소의 가사'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시체에 옷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여인인데 죽은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아직 생기있고 몸의 모습이 그대로 갖춰져 있습니다. 가슴도 그대로 드러나 있고, 그런데 거기서는 그 비구스님들이 피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걸 즐기고 있는 거라. 더 뚜렷하게, 욕망이 확 일어나는 거라.

 

그때사 그 스님들이 깨닫습니다. 아, 우리가 마음이 항상 청정한 상태에서 고요하게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는 거라. 공동묘지에 와보니까 싫은 것은 피할려고 하고 좋은 거는 그걸 더 볼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라. 그때사 느끼는 거라. 부처님이 왜 우리에게 여기에서 며칠간 머물르라고 했을까!

패닉상태에 빠지는 거라. 부처님한테 가서 수행점검 할 자신도 없어지는 거라. 그렇다고 해서 다시 자극이 없는 고요한 숲속에 들어가서 수행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고, 어디로 가야 될지를 지금 모르는 거라.

 

그때 부처님이 나타나서 얘기합니다. 거기 2페이지에 중간 정도에 보면

「너희들은 썩어 버려져 쭈그려든 호박과 같이 되어 있는 이 몸을 보고 욕망을 일으켰구나!」

여러분 몸은 죽고 나면 썩고 죽을 몸이라. 당연히 수분은 빠져나가고 하니까 피부가 쭈그러들게 돼있고 그것도 변색되게 돼있는 거고 그래서 거기에서 구더기도 나오는 거고, 그거하고 별반 차이나는 것이 없습니다. 똑같은 상태라.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욕망을 일으킨다는 거라. 싫어하는 욕망과 좋아하는 욕망들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거라.

「아름답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이 몸을 만드는 것은 이 뼈일 뿐이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 몸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뼈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뼈에다가 살이 붙어있는 거고, 가죽이 붙어있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런데 그걸 예쁘다고 맨날 쓰다듬고 씻고 닦고 하고 있다는 거라.

「망가져 부서지고 흩어져 뒹굴고 있는 이 뼈가 그렇게도 욕정을 일으키는 것인가?」

 

몇 년 전에 우리 선원에 식구 하나가 매장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생각이 드니까 그걸 꺼내가지고 화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자신들은 그런 민간속담이 있는가 뭐 직계가족들은 무덤을 파헤칠 때 가면 안 된다는 게 있는지 도저히 못 가겠는지, “스님이 가서 좀 대신해주십시오” 그러는 거라. 그게 안동이었는데 부산에서 안동까지 가서 인부들을 시켜가지고 직접 무덤을 팠어요.

팠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래된 무덤들은 뼈조차도 거의 변색돼가지고, 뼈가 다 흩어져 있고, 그대로 있을 거 같죠?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밑에 들쥐라고 그러나? 들쥐들이 와가지고 그걸 갉아먹고 하는데, 사람 뼈도 별로 없고 오래된 것 같으면 그대로 머리가 여기에 있고 갈비뼈가 있고 그렇게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보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대로 해가지고 열어보면 그것도 거의 막 뒹굴고 있습니다. 그곳도 뼈가 대부분이 보면 변색돼가지고 변색된 뼈를 보고 여자 남자를 구분하게 됩니다. 잿빛 같이 돼있고 이런 뼈의 부피들도 다르고, 그런데 매장한 지 그렇게 몇 년 안 된 건데 물이 찼던 데는 가보면, 그걸 발골을 해보면 거의 대부분은 보면 몸은 그대로 있습니다. 몸 상태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돼있습니다. 아주 기기묘묘하게 바뀌어져 있습니다. 죽으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죽고 나서 아니면 또 화장한다고 해가지고 뭐가 남아 있을 거 같아요? 전혀 그런 게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여러분들이 살아있다고 해가지고 그 뼈에다가 살 붙이고 가죽을 붙인 건데 그거 그냥 귀하다고 여기고 있느냐는 거라.

마음이 떠나버린 상태에서 이 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라. 오히려 나무토막 같은 거는 불쏘시개라도 할 수 있지만 그 몸뚱이는 어디에도 쓸데가 없는 거라.

그러한 이 뼈에 부처님은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느냐 그럽니다.

 

지금은 여기 젊은 분들이 있지만 젊을 동안에는 좋아 죽겠지. 뼈 붙잡고 좋아서 죽고 못 사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만이, 그렇다고 해서 해야 될 일을 하지 말고,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아라는 것이 아니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걸 '뻬마(pema)'라고 그럽니다. 애정이 애착으로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니 내거다" 애착을 가지게 된다는 거라. 구속을 할려고 한다는 거라. 실제로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타인일 뿐인데도.

 

그래서 그 밑에 보면 「산비둘기의 색과 같이 회색으로 변색되고 있지 않는가! 이 뼈가 기분 나쁘다고 생각한다면 살아있는 사람의 뼈도 기분나빠 해야 할 것이다.」

죽어있는 뼈가 기분 나쁘면 똑같은 뼈인데 살아있는 사람 뼈도 기분 나빠해야 됩니다.

「악취를 풍기고 고름이 흘러내리고 있는 그 시체를 보고 더럽고 추악하다고 느끼는가?」

살아있는 너희들도 항상 악취풍기고 고름이 흐르고 있다는 거라. 악취 풍기지 않고 고름이 흐르지 않는 경우가 어딨어요? 악취가 끊임없이 흐르는 거라.

특히 스님은 여기 편도선이 안 좋기 때문에 그래서 염증들이 있기 때문에 양치질을 하고 나도 입에서 냄새가 올라옵니다. 그럼 양치를 자주 해줘야 되는 거라.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있을 때는 양치질 안 합니다.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기본적인 거 외에는 안 하는데, 어디 법회를 간다든지 할 거 같으면 말을 밖에 내뱉어야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악취를 풍기는 게 싫은 마음들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양치질을 하는 거라. 그리 안 하면 이게 유지가 안 되는 거라.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씻고 닦고 하지 않으면 악취가 풍기고 해서 이 몸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거라.

살아있는 거나 죽어있는 몸이나 별반 차이나는 것이 사실은 없습니다. 속도가 다르다는 것뿐이라. 악취 풍기는 속도 부패하는 속도가 차이나는 거뿐이지 별반 차이나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렇기에 매일 씻거나 향수를 뿌리며 다만 어리석은 자들을 속이고 있지 않는가!」

자신은 깨끗한 척 속이고 있는 거라.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거라.

「나는 깨끗하고, 더럽지 않다면서 추악한 시체를 보고 빠른 걸음으로 달아난 너희들이, 부패하지 않고 탄력이 있는 시체가 있는 곳에서는 다리도 눈도 멈추고 마는구나.

있는 그대로를 보는 능력은 그 어디에도 없구나!

비록 눈에는 예쁘게 비치는 시신도 내일이 되면 악취의 바다를 풍기게 되는 것을 왜 모르는가! 살아 있는 것이라도 씻거나 돌보지 않으면 몸은 악취를 풍기는 추악한 것이 되는 것이지, 욕구의 대상이 될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멋대로 자신의 편리한 대로 대상을 보거나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방식이다.」

 

여러분이 견해를 가지고 또 생각하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방식으로 그걸 판단하고 견해를 가지는 것이지, 그것은 아라한이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아라한은 어떠한 경우든지 판단을 하지 않고 그리고 견해들을 가지지 않습니다.

일단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해서 판단한다 하는 것은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다는 거라. 그럼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고 바뀌게 돼있는 것이라는 거라.

 

스님이 지금 목 협착증이 있어가지고 목에 이렇게 바늘로 해서 거기다가 약물을 주입하는 시술을 지금 두 번 했습니다. 두 번 했는데 아직도 마비되는 건지 이렇게 움직이면 이렇게 통증이 있는 거 보면 좀 안 맞는 모양이라. 그런데 전에는 목에 조금만 이상이 있을 거 같으면 디스크든 협착증이든 목 수술을 그냥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수술을 안 하고 지금과 같이 그런 방식으로 하는 거라. 그래서 그게 약물을 주입하는 것이든, 아니면 풍선 같이 확장하는 확장술을 하는 것이든, 이런 방법으로 하면 표가 안 납니다.

그런데 그전에는 전부 째가지고 디스크 수술을 했다고. 갈아 끼우고 거기다가 뭘 집어넣고 이렇게 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그 방법을 안 쓰는 것은 그 방법이 구태의연하고 틀렸다는 거라. 그럼 지금 쓰는 방법은 언제 또 바뀔 줄 알아서? 이게 또 다른 방법이 생겨나면은 이 방법을 또 안 씁니다. 이 방법이 지금은 최고인 줄 알고 있는데 그 방법을 안 쓰게 되는 거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견해들이나 생각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계속적으로 바뀌게 돼있는 겁니다. 한번 돌아보십시요. 많이 바뀌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견해들과 부딪쳤다 해가지고 그걸 내세울 이유가 있느냐는 거라. 뭐가 완전하다고 그것이 사실인 양 아니면 진실인 양 그렇게 하느냐는 거라.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견해를 내세우지도 않고 가지지도 않게끔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멋대로 대상을 보거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대상은 항상 있는 그대로!

대상은 변하게 돼있습니다. 나의 견해도 변하게 돼있습니다.

「마음에 욕구가 있으면 어리석은 자는 뭐든지 '예쁘다, 좋아한다, 귀엽다'라고 하는 눈으로 본다. 그때에는 추악한 측면이나 싫은 측면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마음에 분노가 있으면 뭐든지 '싫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안 된다, 좋지 않다, 나쁘다'라고 하는 척도로밖에 보지 않는다. 그때에는 좋은 측면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하는 것입니다.

 

「출가한 너희들은 속세의 사람들의 이런 견해를 넘지 못했다.」

세속인들이 갖는 견해들 여덟 가지 세속적인 견해에 그냥 그대로 매여있다는 거라. 삼매를 체험했으면 무슨 소용이 있고, 또 어느 정도 지혜를 얻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라. 이런 견해에 매인 게 별반 차이나는 것이 없는데.

그래서 「멋대로 자신이 편리한 대로 시체를 보았을 뿐이다.」 라는 거라. 분노로 보기도 하고 욕구로 보기도 하고, 마음껏 그것을 보고 그대로 마음에 나타났다는 거라. 외부적인 대상으로 인해서 자극으로 인해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훈련을 하는 것만이 깨달음의 길이다. 돌아가서 다시 수행하라.」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그걸 무상한 성품으로 본다든지, 고의 성품으로 본다든지, 무아의 성품으로 본다든지 얘기하는 것이지 그외에 다른 것으로써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반응들은 전부 여러분들이 은폐하고 있는 거라. 있는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하고 하는 상태에서는.

 

이게 인제 이 일화입니다. 이 일화는 참 시사하는 것들이 큽니다.

성자인 것처럼 하는 것, 그다음에 신통력을 갖추는 것, 자신이 최고가 되어서 리더가 될려고 하는 것, 그다음에 다른 사람들과 다른 어떤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이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돼있는 것과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다르다는 거라. 자극이 있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은 드러나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어떠한 자극에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평온한 상태에서 고요한 상태에서 선한 마음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상태를 자꾸 만들어나가라는 거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고요한 곳에서 수행한다든지 아니면 어떤 자극에 부딪치면 경험되지 않고 다른 것들일 거 같으면 반응들을 하게끔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이 공부하기에는 참으로 좋은 조건들을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세속에서는 얼마나 다이나믹하게 자극들이 있어요? 그 자극들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들을 줄여버리도록 하라는 거라.

오늘은 먹는 것 하나 가지고만 그런 자극으로부터 내가 반응하는 마음을 고요한 상태에서 그대로 유지해보겠다. 내일은 누군가와 말하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그것을 들으면서 마음을 고요한 상태를 계속적으로 유지해보겠다. 할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많이 있다는 거라.

 

하나씩 하나씩 다스려나갔을 때, 그것들을 완전하게 뛰어넘었을 경우에는 본인은 확신이 들게 됩니다. 탁 확신이 들어서 그것으로 인한 것은 더 이상 나는 반응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리할 것 같으면 다른 것들도 당연히 들여다보면 약해져 있습니다. 그전에는 성냄이 있어서 성냄을 다스렸다고 분명히 확신이 들고나면, 내가 탐욕 부분을 볼 것 같으면 탐욕 부분도 당연히 약해져 있습니다.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다른 번뇌들도 약해져 있습니다. 연결고리와 같습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자극이 있다 해서 그것을 싫어하지 말고 하나의 대상으로써 자꾸 여기도록 해야 됩니다.

 

이번 포인트는 보면

• 적절한 자극이 없으면 침착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에 의해서만 마음의 상태를 이해할 수가 있다.

• 맑고 깨끗한 마음은 어떠한 자극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수행은 이런 마음의 상태가 돼있을 때 수행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 수행도 진척이 빨라지는 것이고, 설혹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맑고 깨끗한 마음을 지속해나가는 것은 큰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해서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아, 내가 아직도 해야 될 일이 많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