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어른이 되는 길 (20160930. 대구)

담마마-마까 2022. 3. 24. 09:00

https://youtu.be/qLn9ANnx6nA

* 어른이 되는 길 (20160930. 대구)

 

오늘은 「어른이 되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첫 마디에 「탐·진·치를 지닌 아이인 채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성장이나 나이가 먹어가는 것과 함께 마음도 어른이 되어야 된다.」 하고 적어놓았습니다.

 

아이일 때는 귀엽고 예쁘죠? 그런데 아이일 때는 그렇게 귀엽고 예쁜데, 만약 그 아이의 마음을 그대로 지닌 채 몸만 성장해 있는 사람을 봤을 땐 어떻게 될까? 별로 그렇게 귀엽고 예쁘다고 생각은 들지 않죠?

그리고 불교 공부를 하면 나이가 먹어가면 먹어갈수록 계속 그 사람이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보는 것만해도 행복하고 좋아. 그렇게 바뀌어져나가야 되는데, 그것은 마음이 성장하지 않으면 그렇게 바뀌어질 수가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아마 한 십몇년 전으로 기억을 하는데, 유럽의 어느 개가 사람을 물었어요. 그래서 사람이 크게 다치게 되었어요. 그래가지고 이 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가지고 법원에서 논쟁이 붙은 적이 있었어요. 어떻게 판결이 났을까요? 거기 법원에서는 그 개를 사형시키라 하고 판결이 났습니다.

그때 스님이 들은 의문은 뭐냐면 개는 개가 할 일들을 한 것이고 그것이 자기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는 어떤 것이든 무는 것이 개가 할 일인데, 그걸 왜 사람의 기준으로 잡아가지고 그 개를 죽게 만들까 하는 그런 의문이 든 적이 있습니다.

 

가까운 예를 봅시다. 개미가 여러분을 물었다, 여러분은 개미를 어떻게 할까? 탁 찍어가지고 죽여버릴 거라. 왜 그래야 되는데?

그게 인제 몸은 성장을 하고 나이는 먹어가는데, 자기에게 해로움을 주는 거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분노가 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죽여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일 때는 그것이 화를 내든 욕심을 부리든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아이일 때는 보면 어떨 때는 진짜 엉뚱한 것을 가지고 생떼를 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그것을 다 봐줍니다. 그냥 그럴 수 있지 하고. 아이니까. 그런데 이게 어른이 그랬다고 할 거 같으면 문제가 커져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른이 되어있는 데도 왜 아이 때의 사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느냐는 거라. 분노가 일어나면 분노를 그대로 표출하고, 욕심이 일어나면 욕심을 그대로 표출하고, 게으름 피울려면 얼마든지 게으름 피우고, 그게 인제 바르게 어른이 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가장 좋은 거는 육체적인 성장이나 나이를 먹는 것과 동시에 마음도 탐··치가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좋겠죠!

그대신에 탐··치 대신에 다른 마음으로 대체시켜 주고. 탐심이 일어났을 때는 베풀려는 마음으로 대체해주고, 진심이 일어났을 때는 자애의 마음으로 대체해주고, 게으름이 일어났을 때는 열심히 바른 일을 노력하고 법을 지켜나갈려고 하는 마음들을 자꾸 대체시키고, 이런 식으로 대체시켜 주는 것들이 참 좋고, 그것이 두 번째이고.

 

세 번째는 뭐냐면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를 지어서 살아가야 됩니다. 그럴 것 같으면 우리는 똑같은 생명체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가끔씩 스님이 길을 걷다가 레코드 가게 있는 곳에서 노래를 틀어놓으면 노래가사를 들어보면, 멈춰서가지고 듣고 있으면 참 엉토당토 않는 노래가사들이 굉장히 많다 하는 그런 마음이 듭니다. 자기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거나,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으니까 그 사람을 미워하는 가사라든지, 이런 것들을 그냥 아무런 비판없이 그냥 그대로 듣고 있는 것이 참 어찌 보면 저런 가사들은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는데 좋은 것은 아닌데 하는 마음까지 있었어요.

차라리 그것보다는 "위 아더 월드(We are the world)" 같은 거라든지 뭐 그런 가사들을 보면 "우리는 똑같은 세계인이다. 우리는 똑같은 어린아이들이다. 이런 식으로 얘길하면서 누구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누구든지 용서하고 화해해야 된다" 하는 그런 가사는 참 좋은데, 왜 저런 거는 널리 안 부를까?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집니다. 사회를 살아가는 데는 어떠한 경우든지 서로 공존하는 법을 모를 것 같으면 항상 다툼은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모든 생명체는 동등하다 평등하다 하는 생각을 항상 같이 해야 됩니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들, 아니면 아주 미세한 미생물이라고 하더라도 생명을 지닌 존재들은 누구든지 살아갈 권리가 있고 또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지하성전이라고 하는 것들도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은 합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IS 조직이라는 이런 조직에서 테러를 한다든지 할 경우에는 그 사람들은 성전을 위해서 합니다. 그런데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성스러운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은 천국에 갈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천국은 그런 분들을 위해서 마련된 곳은 절대 아닐 거라고 스님은 믿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누구든지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아가야 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을 해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도 그 사람의 행복을 빼앗는 말들이나 행동들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항상 명심을 해야 됩니다.

내 자신이 불행하게 되지 않고 내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듯이, 다른 생명들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이런 것들을 적어도 마음속에 자꾸 가지고 있으면 어른이 되는 길은 마음의 성장이 되어나갑니다. 마음은 점점 더 탐·진·치가 없이 탐·진·치에 반대적인 마음의 작용을 대입을 하고, 또 우리는 똑같은 평등한 생명체다 하는 생각들을 가질 거 같으면 적어도 마음이 성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게 밑바탕이 되어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밑바탕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그다음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첫 번째가 뭐냐 하면, 마음의 평안

고요해 있는 사람들을 보면 참 기분 좋습니다. 저도 태국 가서 스승을 만날 때 그 스승을 딱 한 눈에 보고 '아, 저 분이 내 스승이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뭐를 가지고 했겠어요? 말 한마디 하지도 않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 상태인데. 그런데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나 좋아. 너무나 평화로워 보이고 그냥 고요한 상태인 거라.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진짜 위대한 스승인 거라.

그와 같습니다. 한 사람이 그런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있을 거 같으면 주변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굉장히 위로를 받습니다. 위안을 받습니다.

 

지금 한국의 테라와다 불교를 다니는 분들이 재가자분들이나 출가자분들이나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진짜 숫적으로 볼 거 같으면 출가자 겨우 해봐야 오롯이 이 길만 가는 분들을 말하는 겁니다. 대승승복 입고 있으면서 테라와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서 중노릇 하고 있는 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테라와다 적으로 살아가는 분들은 겨우 손가락 꼽을 정도입니다. 열 분 내외 정도입니다. 외국 분들을 제외하고 한국 사람들 중에서.

 

그런데 그분들이 한국 불교에 미치는 영향은 굉장히 큽니다. 오히려 대승불교의 수많은 몇천명되는 스님들보다도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봅니다.

왜 그럴까? 왜 그분들이 그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까?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갈려고 하고, 또 그분들은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되도록 자꾸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라.

그래서 욕심내지 않고, 좀 더 평화롭게 살려고 하고, 좀 더 성냄없이 살려고 하고, 그리고 어쨌든 출가자는 출가자의 본분대로, 재가자는 재가자의 본분대로 자꾸 살려고 하고 있다는 거라.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래도 그 종교가 좀 더 평화로워지고 청정해지는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서울 불교TV에서 방송을 좀 해보고 싶다고 건의가 왔더라고. 그러면서 그 불교방송 이사장 스님이 하는 얘기가 자기가 예견하건데 아마 한국은 20년 아니면 30년 내에 전부 테라와다로 바뀌지 않으면 불교가 망해버린다. 아마 자기 자신은 틀림없이 2~30년 지나면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전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또 많은 출가자들이 테라와다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는 그런 얘기를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할려고 하느냐 하고 물어보니까 어쨌든 그런 귀중한 가르침을 좀 남기고 싶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남기는 건 좋기는 좋은데 스님은 그렇게 해가지고 유명하고 싶은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몸이 좋지 못하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상황이 못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합시다 하고 거절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은 한국불교에서도 그렇게 위험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거라. 지금 한국불교에는. 그게 뭐냐면 마음의 어른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돼있어서 그냥 자기 욕심부리지 않고 그냥 청정하게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조언해줄 수 있는 어른들이 없다는 거라.

 

사리뿟따 존자가 앗사지 존자를 만났을 때 바로 앗사지 존자에게 한마디 말을 듣고 불교로 전향했습니다. 예류과를 얻고. 그거 한마디 말 때문에 그랬을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앗사지 존자가 탁발을 하면서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게 보이는 거라. 걸음걸이가 저렇게 평화롭고 고요한데 마음은 당연히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롭겠느냐는 거라.

스님이 가끔씩 테라와다 스님들한테 지적하는 것이 뭐냐면 가삿자락 펄럭거리면서 가는 것, 네가 얼마나 마음의 안정이 안 되어 있으면 그 가삿자락이 펄럭이는 것조차도 모르고 걸어가고 있느냐는 거라.

물론 변명을 합니다. 발을 알아차리다 보니까 그거 펄럭이는 줄 몰랐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긴 하는데, 걷기 전에 옷부터 먼저 단단히 여미고 나서 걷지 그걸 왜 걸어가면서 펄럭이는 걸 모른다는 것은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고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앗사지 존자에게 감명을 받고 했던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빈틈도 없이 한 상태에서 누가 좋은 것을 주든 주지 않든 뭘 하든 관계없이 그대로 고요한 마음들을 지닌 채 탁발을 해서 걸어가는 모습! 거기에서 이미 마음이 열려버린 상태가 된 거라. ‘아, 저렇게 고요한 분이면 틀림없이 법을 지니고 있는 분이다.’ 그래서 성자의 지위에 오른 분이다 확신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들지 않으면 앗사지 존자를 따라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앗사지 존자에게 한마디 만이라도 들려달라고 애걸복걸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 사리뿟따 존자는 그 시대에 엘리트였거든. 앗사지 존자는 그런 엘리트가 아니라. 그냥 일반 대중과 마찬가집니다. 인도의 계급사회에서는 그런 엘리트 계층이 일반 대중들의 말을 듣고 따른다는 것은 상상을 못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열려있기 때문에 그 평온한 모습을 보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을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마음의 평안이 가져오는 것은 그것은 크나큰 일이라는 거라. 다른 어떤 것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여러분은 과연 지금 어른이 돼있는 상태에서 그런 마음은 평화의 상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느냐는 거라. 다른 누구에게도 ‘아, 참 저 사람은 고요하고 평온하고 참 잘 살아간다’, ‘저 사람이 내 옆에만 있어도 나는 참 좋다’ 하는 마음이 들 수 있느냐는 거라.

 

앞에 3가지는 기본적인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했을 때 거기에 덧붙여가지고,

하나 더 여러분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것은 마음의 고요함 어떠한 상태에서든 유지를 해나가라.

그것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주위에 미치는 영향들은 굉장히 크다 하는 거라.

 

아소까 대왕도 마찬가지 마찬가집니다. 일곱 살짜리 사미스님을 보고 그 대왕이 전쟁하는 것을 멈췄다고 그럽니다. 궁전에서 이리 보니까 일곱 살짜리 사미스님이 탁발하면서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은 거라. 어떻게 저 어린아이가 저런 모습으로 걸어갈 수 있을까? 불러가지고 물어봤어요.

“뭘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평온한 모습을 보일 수가 있느냐?”

“부처님의 가르침!” 이미 그때만 하더라도 불교가 많이 변질 될 기미들이 보이고, 각각의 견해들을 내세우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진짜 부처님 가르침이 뭔지 하는 것들이 모를 정도가 돼있는 상태라. 그런데 이 아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배우고 실천하고 해가지고 그대로 성자의 지위에 오른 거라. 그러니 당연히 평온한 모습이 그대로 딱 드러나지는 거라.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미워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를 정복한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정복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거라. 이때까지 아소까 대왕은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어쨌든 사람을 죽이고 그 민족들을 핍박하고 했다는 거라. 그런데 이게 답이 아니다는 거라.

그래서 이 아소까 대왕이 이 일곱 살짜리 사미스님을 보고 ‘아, 이제부터는 전쟁하지 않겠다’ 하고 선언을 하게 됩니다. 한 나라를, 인도라고 하는 큰 대륙을, 그것도 인도 역사에서 처음으로 통일한 왕이지만 일곱 살짜리한테 물어보고 바뀌게 됐다는 거라.

여러분도 그마만큼 마음의 평온함이 평안이 가져오는 힘들은 굉장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을 놓치지 않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진리에 정직하고 완고하게 살아라

정직하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성장하지 않는 정직은 그것은 거짓입니다.

마음이 성장하지 않으면 정직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성장하기 전에는, 그래서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다른 탓으로 하게 됩니다. 아니면 게으름 부린다든지, 아니면 누군가가 해주길 바라게 돼있다는 거라.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지를 못하게 됩니다.

 

가끔씩 스님들하고 얘기하다 보면 그분의 수행의 상태가 탁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뭔 얘기를 하다 보면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걸 볼 때가 있습니다. 똑같은 걸 보는 데도 아, 이거는 나 때문에 이런 경우 잘됐다든지 이런 식으로, 아니면 내가 원인을 제공해가지고 이렇게 됐다든지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걸 보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보면 ‘아, 이분은 아직 공부가 덜 익었구나’ 하고 눈치를 챕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를 못하고 있는 거라. 자신이 못하는 부분은 못하는 부분대로, 자기 상태는 자기 상태대로 그대로 드러낼 수가 있어야 되는데,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거라.

 

범어사에 있는 스님 한 분이 하루는 와가지고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어느 보살님 한 분이 와서 500만원을 보시를 했다는 거라. 그런데 자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분은 500만원을 보시할 능력이 없는 분이라는 거라. 그런데 500만원을 보시를 한 거라. 그러니 500만원을 받고 나서도 마음이 좀 찝찝하다고 그러는 거라. 왜 그런 마음을 가졌느냐고 물어보니까, 범어사에는 각각의 신도회가 있어요. '무슨회', '무슨회' 하면서. 거기서는 그 무슨 회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큰스님이나 어느 특정한 스님한테 보시하는 것들을 많이 하면 자기 자신이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라. 그래서 막 그렇게 보시를 하는 거라. 그 모습을 보고 자기도 그 무리에 끼고 싶어가지고 500만원을 보시를 한 거라.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다는 거라. 자신의 능력이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을 좀 더 내세우고 싶어하는 거라.

 

진리를 모르면 그렇게 됩니다.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렇게 하질 않습니다. 자신에게 맞게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게 됩니다.

여기 붓다야나 선원도 선원을 보시로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보시금 정해놓은 거 없죠? 각각의 형편대로 합니다. 돈 많은 사람이나 이번에 좀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좀 많이 낼 것이고,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보시 안 해도 여기 와서 얼마든지 법회하고 수행을 할 수가 있게 돼있습니다. 그게 불교의 기본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상태를 누군가가 비난하고 그리고 여기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서 오지마라 하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게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 진리에 대해서 제약이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은 진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할 거 같으면 진리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맞게끔 자기가 정직하게 그대로 드러내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진리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정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진리에 대해서 더 이상의 의심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의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의 잘잘못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분명하게 압니다.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대로 그대로 고백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다시는 그걸 안 할려고 하게 되는 거고, 잘하는 부분이 있으면 더욱더 잘 할려고 하게 되는 거고, 그게 진리의 힘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정직하고 진리에 어긋나지 않게끔 살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이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진리에 정직할려고 하는 것이 참 힘이 듭니다. 왜 그러냐면 여러분은 너무나 많은 마음의 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독이 빠질 때까지는 참 힘이 듭니다. 계속 이때까지 자신을 드러내고, 아니면 남을 속이고, 아니면 나를 내세우고 하는 것들로써 계속 살아왔습니다. 그걸 한꺼번에 바꿀려고 하는 것은 참 힘이 들어갑니다.

독이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힘이 드는 것은 알지만 그렇지만 힘이 든다고 해가지고 그걸 안 할 수는 없다는 거라. 안 하면 마음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에! 단호하게 해야 됩니다. 그걸 ‘언제 하겠지’ 하고 생각을 해버릴 것 같으면 못합니다. 오늘 당장 ‘내가 이렇게 잘못했다’ 하고 확신이 들면 당장 그걸 다 끊어버려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진리 따라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에 정직해야 되는 거고, 진리 따라서 완고하게 그것을 지키고 살려고 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울면서도 선한 일을 행하라하는 것입니다.

왜 울면서도 선한 일을 행하라고 할까?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아이에게 공부를 시킨다. 하기 싫어도 어떻게 해? 해야 됩니다. 내일 시험이면 오늘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해야 됩니다. 안 하면 내일 시험 망쳐버립니다.

여러분은 안 그럴 것 같습니까? 선한 일을 할 때 언젠가 선한 일을 하겠지? 이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울면서도 그걸 행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좋은 결과로써 돌아오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냥 내가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뭔가 선한 일을 한다? 그런 법은 없습니다.

마음에 자애를 지닐려고 부단하게 노력을 해야만이 마음에 자애를 지니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순간을 놓쳐버리면 자애는 떠나버리게 됩니다. 자애가 없는 상태에서 그냥 불쑥불쑥 얘기를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 이 구절을 보면서 참 스님이 감동을 받은 게 있어요. 그냥 선한 일을 행하라 하는 것이 아니고, 울면서도 선한 일을 행하라.

하기 싫고 울음이 나오고 괴롭다고 하더라도 그 일을 해야 된다는 거라.

수행하다가 통증이 있습니다. 그럼 고통스럽습니다. 고통스럽다고 해서 발을 탁 뻗어버릴 겁니까? 그렇게 하진 않잖아. 괴롭고 힘들어도 그거 관찰해야 되는 거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찰을 해서 이 괴로움의 원인을 알아낼 수가 없기 때문에.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할 거 같으면 언제든지 또 똑같은 그런 괴로움이 경우를 달리 해가지고 또 나타나게 된다는 거라. 계속 괴로움을 받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그것을 관찰한다는 거라.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그냥 놔둬버리면 선한 일을 행할 재간이 없어져 버립니다.

선한 일이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울면서도 해야 된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악한 일이다 할 거 같으면 그거는 혀를 깨물고서라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설혹 자신이 선한 일을 위해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선한 일을 하라는 거라.

설혹 자신이 악한 일을 안 할려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악한 일을 하지 않을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왜 그러냐 하면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냥 주어지는 걸 좋아하는 거고, 그냥 공짜로 얻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고, 누군가가 나를 해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지, 내가 남을 위해서 해주는 것이라든지 내걸 다른 사람에게 준다든지 이런 것을 좋아하는 법은 없다는 거라. 필요하면 사기를 치든지 빼앗든지 해가지고 가질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거라. 누가 나를 비난할 거 같으면 나도 비난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거라. 왜? 다 관념화돼있기 때문에.

대상을 만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걸 전부다 자기에게 맞는 옷으로써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그거는 어쩔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혀를 물고 울면서라도 선한 일들을 자꾸 행하고 나쁜 일들을 행하지 않을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적어도 이 세 가지가 더 덧붙여지면은 어른이 되는 길은 한층 더 수월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하게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른이 되는 길인 것뿐이지, 그 길에 도달해가지고 목표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걸 반복적으로 해나가지 않을 거 같으면 그 길에서 벗어나버립니다. 벗어나버리면, 방향을 잃어버리면 돌아올 길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길을 잃었을 때 항상 이걸 자꾸 되새겨보라는 거라.

내가 울면서도 선한 일을 하고 있는지, 진리따라 정직하고 있는지, 하는 이런 것들을자꾸 되새겨보라는 거라. 그래서 ‘아, 내가 나이가 먹어가고 또 몸이 성장한만큼 마음도 지금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자꾸 돌아봐야 됩니다.

 

거기 마지막에 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가지고 「어떤 생명을 보았을 때에도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고 느껴지게 되면 꾸밈없는 삶의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불행도 찾아오지 않는다.」 모든 존재들은 그와 같이 살아가야 되는 것이고 또 그 길을 따라가야 되는 것이고,

그래서 「지극히 훌륭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만날 수 있는 길이다.」 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는 길은 그와 같은 거라. 행복하고 훌륭한 길이라는 거라. 그리고 성스러운 길이다 하는 거라.

 

그래서 이번 포인트를 보면

• 나이를 먹어갈수록 마음의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의 나이가 몇살 정도 돼있는가? 한번 깊이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 마음의 평안이 가지는 힘은 참 위대하다.

• 탐·진·치라고 하는 삼독심을 버려버리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도록 하라. 마지막으로

• 울면서도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용기 있는 삶이다.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부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