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위빳사나 수행과 알아차림 76

수행에서 칠각지와 팔정도의 상태와 체험

https://youtu.be/x4YA7hfBhOE (48:07 이후의 법문입니다.) ​ 보통 여러분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일곱 가지 요소」 그렇게 얘기합니다. 「칠각지」 라고 얘기하죠. 삼보장가(sambojjhaṅgā)라 해서 그것도 큰 맥락에서 보면 거의 이런 일상적인 수행과 별반 다른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경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48:07) 자, 고요하게 앉아서 눈을 감고 호흡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편안한 자세로써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을 알아차려 나갈 때 '아, 이것이 호흡이구나' 하는 걸 내가 알고,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배가 팽창되고 수축되고 하는 그런 느낌'들..

확신(saddhā)으로 인해서 마음이 넓어져야

수행이 잘 되어나갈 때 수행을 하다 보면 확신이 딱 들어가지고 다른 것들은 일체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은 위빳사나 수행외에는 다른 것들은 안 보이게 됩니다. 또 자기가 수행하고 있으면 그 수행이외에는 다른 것들은 눈에 안 보이게 됩니다. 맞긴 맞는 건데, 이것도 장애라는 생각을 못하는 거라.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불교에 대한 확신이 들 거 같으면, 그 확신(saddhā)으로 인해서 마음이 넓어져야 되는 것이지, 좁혀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면 '아디목카(adhimokkha)'라고 합니다. 수행에 대해서 확신이 딱 들었을 때는 그 이외에는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수행에서 어느 정도 성취감이 있고나면 이런 상태에 이르르게 됩니다..

닙빠리야-야 데-사나-(nippariyāya-desanā) - "진리 그 자체를 직접 말하는 것"

「이 법(담마)은 지혜가 있는 자의 것이지, 무지한 자의 것이 아니다.」 Paññāvato ayaṁ dhammo, nāyaṁ dhammo duppaññassa; (빤냐-와또- 아양 담모-, 나-양 담모- 둡빤냣사.) 지혜가 있는 자! 사실은 성인의 경지에 이른 자만이 지혜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무지한 자들입니다. 부처님의 법대로 할 거 같으면. 여기서 조심해야 되는 것은 지식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지혜를 착각을 한다는 겁니다. 지식은 아무리 모이더라도 그것은 지혜를 대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일정 부분에서는 오히려 지혜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해서 지혜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특정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은 그거는 잘할지 몰라도 다른 것은 젬병일 수..

바른 삼매(Samādhi)를 개발하려면

「이 법은 마음이 통일된 자의 것이지, 마음이 혼란스러운 자의 것이 아니다.」 Samāhit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asamāhitassa; (사마-히땃사-양 담모-, 나-양 담모- 아사마-히땃사.) 사마디(samādhi)는 삼매를 얘기하죠? 마음 집중하는 것들.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행하고 있는 것에 기쁨을 수반한 집중력이 있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 '나의 것'이 있다 하는 것마저도 버려버리고 집중되는 것들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나와 나의 것이 왜 버려지겠습니까? 기쁨으로 인해서 사라져버립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잘 경험하기 힘드는 거죠.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집중력이 생깁니다. 그 집중력이 잘못된 집중이냐..

아침에 일어날 때

아침에 일어날 때 이 네 가지만 딱 명심을 하면 그날 말하는 것도 조심하게 되고 행동하는 것도 조심하게 됩니다. 첫 번째, 깨자마자 먼저 미소를 짓자! 두 번째가, 나에게 새로운 시간, 24시간이 있다 하고 먼저 받아들여라!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라? 24시간이라는 것이! 어떤 것도 경험하지 않은 깨끗한 24시간입니다. 세 번째가, 그 순간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자! 하고 다짐을 합니다. 네 번째가, 모든 것들을 자비로운 눈으로 보겠다! 내 자신도 자비로운 눈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이 네 가지를 명심을 하면 올바른 말을 해 나가는데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어떤 것이 올바른 말이냐 하면, 이 다섯 가지를 명심하면 됩니다. 첫 번째, 바른 시간에 말하고 있는가? 올바른 시간에 말하고 있는가? 시간을 맞춰가지..

그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알려고 마음 먹으면...

어떠한 것에도 집착함이 없는 마음들을 자꾸 가질려고 해야 됩니다. 수행에서는 마음은 대상을 떨어뜨려놓아야만이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관찰을 해야되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뭔가를 관찰하려고 한다. 아니면 그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알려고 마음을 먹으면 이미 그 대상은 집착의 대상인 것이지 실제적인 수행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럴 때는 딱 수행을 중단하고 가볍게 그 대상으로부터 벗어나서 다른 대상, 손이 닿아있으면 ‘음, 닿아있네’ 하면서 가볍게 닿아있다고 알아야 됩니다. 집착함이 없이 그냥 그대로 보게 될 때 마음은 고요해지고 평온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또 주대상에게 돌아가더라도 그 수행 대상이 집착함의 대상이 아니라 알아차릴 대상, 사띠..

세 가지 갈애. 망상을 충동질하는 상카라. 오온.

* 세 가지 갈애. 상카라와 쩨따나 (20200607) - 요약 보통 갈애는 뭐라고 얘기합니까? 감각적인 욕망, 그다음에 존재의 욕구, 그다음에 존재하지 않을려고 하는 욕구 이 세 가지를 얘기합니다. 감각적인 욕망(慾愛, kāma-taṇhā)은 알아차리기가 쉽죠! ‘아, 이게 갈애구나’ 하는 걸 알기는 쉽고. 비존재의 욕구(無有愛, vibhava-taṇhā)는 파괴하는 것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누구든 죽기 싫어하기 때문에 그것보다는 무기에 떨어지는 것이(...). 하기 싫어하는 것, 특히 수행에서 고요한 상태가 되면은 그냥 거기 머물려고 하는 것, 그래서 그 상태를 그냥 즐길려고 하는 것이 수행자들에 많이 해당이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의 생존 욕구(有愛, bhava-taṇhā)가 가장 어려..

호흡 관찰하는 데서 일어나는 두 가지 잘못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 호흡 관찰하는 데서 일어나는 두 가지 잘못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호흡의 전체 길이를 따라가지 마라. 코에서부터 해서 배까지 쭉 따라가고 또 따라나오고 하는 것은 일절 하지마라. 두 번째는 대상을 인위적으로 해서도 안되지만 또 마음을 인위적으로 옮겨서도 안됩니다. 수행이 잘 안된다 해서 또 인위적이라 해서 그 대상을 놓아버리고 호흡이 일어나는 다른 곳에다가 집중할려고 하지마라. 호흡은 여러분들에게 가장 알아차리기 쉬운 대상 중에 하납니다. 근데 이 호흡을 전체 이동 경로를 따라서 코에서 일어나서 가슴이나 배에까지 가는 길을 알아차리는 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또 여기 한 지점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호흡의 길이, 호흡의 시작과 끝을 인위적으로 맞추고 있는 거라. 맞추고 있으니까 꼭 마찬가..

아나빠나 사띠(Ānāpānasati). 상카라를 고요하게 가라앉히려면

* 아나빠나 사띠(Ānāpānasati). 상카라를 고요하게 가라앉히려면 몸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신념처)도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것이 있고, 몸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 있고, 몸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있고, 몸에서 담마를 관찰하는 것이 있고. 그렇게 네 개씩 항목이니까 16개가 되게 됩니다.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느낌 4가지,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네 가지,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담마라고 하는 네 가지를 관찰하는 것이 있습니다. 몸에 대한 관찰은 마음으로 아는 겁니다. 마음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느낌으로 압니다. 현상들도 꼭 마찬가지로 느낌으로써 내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현상은 느낌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아-나-빠-나 사띠(Ā..

개념에 붙잡혀있을 때

수행이 잘 돼나갑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져가고 하면은 ‘일어남’ ‘사라짐’ 하는 것이 분명하게 알아집니다. 그것도 그냥 움직임이 분명한 것이 아니고 불러올 때 여러 가지 느낌들, 또 꺼질 때 여러 가지 느낌들을 그대로 그냥 알아차려 나가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멍해져 버려. 분명히 일어나고 사라지는 건 아는데도 그냥 움직임만 알고 있고 어떤 느낌들이 변하는 것들이 없어. 사라질 때도 꼭 마찬가지라. 왜 그렇게 바뀌어버렸을까? 마음이 붙잡혀버리니까! 자기는 인식을 못했지만 그 느낌들이 좋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딱 붙잡히는 아주 짧은 순간에 그 현상들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마음은 깨어있으니까 움직임만 알아가는 거라. 배가 불러오는 것만 알고 꺼지는 것만 알게 되고, 한 시간 동안 내 그러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