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위빳사나 수행과 알아차림

세 가지 갈애. 망상을 충동질하는 상카라. 오온.

담마마-마까 2021. 4. 12. 09:07

* 세 가지 갈애. 상카라와 쩨따나 (20200607) - 요약

 

보통 갈애는 뭐라고 얘기합니까? 감각적인 욕망, 그다음에 존재의 욕구, 그다음에 존재하지 않을려고 하는 욕구 이 세 가지를 얘기합니다.

감각적인 욕망(慾愛, kāma-taṇhā)은 알아차리기가 쉽죠! ‘아, 이게 갈애구나’ 하는 걸 알기는 쉽고.

비존재의 욕구(無有愛, vibhava-taṇhā)는 파괴하는 것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누구든 죽기 싫어하기 때문에 그것보다는 무기에 떨어지는 것이(...). 하기 싫어하는 것, 특히 수행에서 고요한 상태가 되면은 그냥 거기 머물려고 하는 것, 그래서 그 상태를 그냥 즐길려고 하는 것이 수행자들에 많이 해당이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의 생존 욕구(有愛, bhava-taṇhā)가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생존 욕구가 얼마만큼 있느냐에 따라서 수행 정도가 판가름이 납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수행은 더 열심히 해야 됩니다. 점점 떨어져나가서 하나씩 하나씩 없어져나가다가 마지막엔 그 생존 욕구 마지막까지도 '나'라고 하는 것들이 다 없어지고 나면 도와 과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숙제를 조금 내드릴께요.

스님 소리 들립니까? 들리는 걸 인식을 했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인식을 한 겁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귀에 뭔가가 와서 부딪쳤으니까 그 부딪친 것들이 느낌으로써 닿아서 인식을 하는 겁니까? 닿은 거는 어떻게 알았어요? 뭔가 그걸 알아차릴려고 하는 의도가 있어가지고 닿은 걸 알은 겁니까? 아니면 상카라가 그걸 인식하라고 했기 때문에 식(識)이 작동을 한 겁니까? 어떤 거라?

 

수행자는 분명히 그게 분리해서 보여야 됩니다.

이게 상카라(saṅkhāra, 行)구나. 이게 쩨따나(cetanā, 의도)구나. 이게 윈냐나(viññāṇa, 識)구나 하는 것들이 보여야 됩니다. 웨다나(vedanā)는 보기가 쉬운데 이 세 개가 분리해서 보이기는 참 힘이 듭니다.

그 세 개 중에 어떤 것이 지속적으로 계속 일어나는 거라?

쩨따나에는 상카라가 우선이 돼서 쩨따나가 일어나는 거라? 아니면 상카라에는 쩨따나가 우선이 돼가지고 상카라가 일어나는 거라? 윈냐나도 마찬가지.

이 부분을 분명하게 볼 수가 있을 때 ‘아, 이게 생존 욕구구나’ 하는, ‘생존 욕구가 이 부분을 가지고 얘기하는 구나’ 하는 것들이 드러나지게 됩니다.

 

숨을 쉴 때도 의도가 있어야지 숨을 쉬어질 거 아닙니까? 그 의도는 어디서 오는 거라? 누가 의도를 일으켜주는 거라? 호흡할 때 알아차림을 할 때 미세한 떨림이 있습니다. 그거는 뭘 의미하는 거라? 그게 상카라야, 쩨따나야?

 

그걸 한번 보라는 거라. 이걸 봤을 때 오온이 분해가 됩니다. 오온이 분해되는 게 보여야만이 ‘아, 내가 생존 욕구가 있구나’ 하는 것들이, ‘생존 욕구는 곧 무엇이 우두머리가 돼서 일어나는구나’ 하는 것들이 보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다음에 올 때 숙제가 그겁니다. 오온을 분해해서 봤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오온을 분명히 봤을 때 오온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실제 체험한 부분을 가지고 얘기를 해야 됩니다.

그렇게 보니까 어떤 현상이 일어나더라 하는 것들이 보여야 된다는 거라. 그게 인제 여러분들에게 내는 첫 번째 숙제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수행이 안 될 때는 여러 가지 장애들이 일어나서 그 장애들을 알아차리면은 수행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와집니다. 인제는 여러분들도 한참 수행했기 때문에 ‘이게 장애구나’ 하는 것들은 알아차리고 있을 겁니다.

근데 수행이 잘될 때가 문제입니다. 수행이 잘될 때 장애들이 틀림없이 일어나는데 대부분은 수행이 잘될 때 좋아하는 마음이 먼저 일어나집니다. 그래서 거기에 머물고자 해버리게 됩니다. 고요하면 고요한데 머물려고 하고, 빛이 보이면 빛이 보이는데 머물려고 합니다.

수행이 잘되다 보면 호흡도 자연스러워집니다. 점점 느려지고 고요해지지(?) 않습니다. 그까지는 잘했는데 그다음에는 거의 그 상태에서 머물려고 합니다. 그러면 시간이 훌딱 지나가 버립니다. 대상이 변하는 것들은 전혀 보지 못하고 수행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리고, 몸은 개운해지고 마음도 개운해지고 하니까 수행 잘한 것처럼 보이는데 무엇이 여러분들에게 그와 같은 작용을 일으켰을까? 그게 바로 두 번째 숙제입니다.

 

무유애(vibhava-taṇhā)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사띠를 없애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지속적으로 사띠가 일어나야 되는데 그 사띠가 일어나지 않고 그냥 고요하게 머물려고 합니다. 수행 중에서 진척이 잘 돼가지고 자동적으로 사띠가 되는 상태가 될 거 같으면 그렇게 되지 않는데 그런 상태가 되기 전에는 어떤 대상이든 대상으로 인해서 평온한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이 상태에 항상 머물르게 됩니다. 거기에 빠지고 다시 또 돌아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게 바로 ‘무유애’구나 하는 것들을 경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숙제가 두 가지가 나왔습니다.

 

 

* 망상을 충동질하는 상카라(20200704) - 요약

 

저번 달 숙제 내줬는데 숙제 해왔어요?

어떤 게 우두머리고 어떤 게 먼저에요? 어떤 것이 항상 있는 거에요?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지금 선원에 꽃이 많이 피고 있죠? 꽃이 피는 거는 물론 햇볕도 받고 물도 적당하고 바람도 있어야 되고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을 겁니다.

그리해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뭐라? 지가 피고자 하는 의지일 거라. 피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은, 그런 감각이 없으면 안 피어나게 되겠죠.

피고자 하는 것, 이는 어떻게 보면 에너지 같은 거라. 에너지! 태양도 어떤 면에서는 에너지일 거고, 우리가 지금 끊임없이 살아있는 것도 뭔가 살고자 하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거죠.

 

오온(五蘊)도 그런 에너지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상카라(saṅkhāra, 行) 라고 하는 것들이라. 끊임없이 상카라가 충동질하고, 상카라가 끄잡아다 줍니다. 다른 것들을...

수행할 때 망상 많이 하죠? 망상할 때 탁 관찰하기가 쉽습니다. 이 상카라(saṅkhāra)를! 이게 충동질하는 것이 일시에 보여진다는 거라. 망상할려고 하는 것들이!

 

경전 상으로는 물론 망상할 때는 육근(六根)이라는 것이 있고, 외부적인 대상이 있어 가지고, 그것을 순간적으로 인식할려고 하는 것이 합해져가지고, 삼상이 합해져가지고 접촉이 일어나지고, 그 접촉으로 인해가지고 느낌들이 탁 일어나지고, 그 느낌들로 인해가지고 ‘안다’, 그냥 안다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안다는 거하고는 틀립니다이. 순간적인 인식하는 것이 산자나 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 산자나(sañjānā, 想)라는 것이 일어남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인제는 지 스스로 의(意)기능을 작동하는 거라. 순간적으로 탁 생각을 하게 되는 그걸 이제 위딱까(vitakka, 尋)라고 하는 거라. 순간적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그다음에 일어나지게 되는 것이 빠빤짜(papañca, 분별망상)라 해서 망상으로 넘어가지게 되고, 그런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근데 문제가 뭐냐 하면 망상할 때는 망상할려는 에너지가 틀림없이 있게 되는 거라. 망상은 한 번으로 안 그치죠?

망상이 일어나기 전에 여러 단계를 거치고 왔죠? 접촉부터 해가지고 팟사(phassa, 觸)로 해서 웨다나(vedanā, 受)로 해서, 웨다나에서 다시 산자나(sañjānā, 想)로 넘어갔다가, 산자나로 해서 다시 위딱까(vitakka, 尋)로 넘어갔다가, 다시 빠빤짜(papañca, 망상)로 누가 이걸, 에너지를 계속 공급을 해주는 거라?

뭐가 공급을 해주기 때문에 망상이 일어나는 것이 또 다른 망상으로 바뀌어나가서 계속적으로 일으켜주는 거라?

 

수행에서 장애가 일어났을 때 이 오온의 구조를 이해하기가 참 수월합니다.

수상행식(受想行識)을 분명하게 보면은 그건 마음의 작용들이라. 마음의 작용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면은 망상하는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 대신에 망상하지는 않고 사고는 하겠죠!

망상하는 거는 여러분들이 막 생각을 굴려가지고 계속적으로 증폭하는 겁니다. 좋아하지 않으면 망상은 끊어져버리는데 끊임없이 좋아하기 때문에 계속 망상을 하게 되는 구조를 지니게끔 됩니다. 안이비설신의로 인해서 일어나는 내 마음이 망상을 일으키는 것이지 다른 것이 망상을 일으켜주지 않는다는 거라.

 

자아(自我)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착각하면서 망상이 될 토대가 마련된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오온을 좀 더 뿌리 깊게 자꾸 볼려고 하는 것들을 하다가 보면은 수행에서 여러 가지 장애들이 일어나는 거라. 그 장애들이 따로따로 떨어져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은 아닙니다. 다 붙어서 일어나는 겁니다.

감각에서 집착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망상은 떨어져 나가버리는 거라. 직접적으로 망상이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뭔가 느낌이 있을 때 그게 좋고 싫음의 느낌이 탁 있을 때 그걸 떨어트려 보는 훈련들을 해보라는 거라. 좋고 싫음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딱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은 수행할 때 망상하는 것은 많이 줄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집착하는 것을 대부분 나(我)라고 착각을 합니다. ‘내가 느꼈다’고 그러지, ‘내가 안다’고 그러지 ‘나’를 배제하고 느꼈다, 안다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망상은 이렇게 착각을 하면서 그 착각이 자꾸 쌓이면은 망상은 더욱더 일어나게 되는 거라. 착각이 연속해서 일어나면은 망상은 집약된다 하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대부분 이런 과정들이 지속되다 보니까 수행에서 망상을 관찰을 하지도 못하고 일상생활에서도 망상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진짜 해야 될 것은 놔두고 다른 것들을 하게 돼버리는 거라. 뭘 하게 됩니까?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게 됩니다. 여기 자기 자신이라는 것들은 자기와 관계된 것들이라.

살아가는 목적이 분명히 있는데 그 목적은 놔둬버리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데 무장을 하는 거라. 지금 해야 될 일이 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자기가 판단들을 해야 되는 거라.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지금 미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망상들을. 어떻게 버릴꺼라? 그래서 사띠하라는 거라!

언제 망상이 일어나는지, 망상이 일어나는 에너지가 되는 것들이 증폭시켜 주는 것이 뭔지를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아까 상카라가 충동질하는 에너지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끊임없이 뭔가를 일으키게 하고, 끊임없이 다른 심소들을 일어나게끔 만들어주고, 우두머리 역할들을 한다는 얘기했습니다.

망상이 탁 끊어질 때 어떤 것이 끊어지겠냐는 거라?

음, 사띠해서 분명하게 그것을 알아차릴려고 하지 않으면 수행에서도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사실은 의미 없는 생각들이나 망상들이 끊임없이 반복하게끔 됩니다. 적어도 수행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 부분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라는 거라.

 

왜 오온을 자꾸 분해해서 볼려고 노력을 하고, 또 망상을 끊임없이 관찰하라고 할까? 윤회는 인정합니까? 그냥 말로만 인정하지. ‘죽고 나서 태어난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게 윤회입니다. 원인·결과 원인·결과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윤회입니다. 흘러간 것들은 내 것이 아닌 줄을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라. 원인·결과 원인·결과로써 이어지는 것이지, 고정된 것은 없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 일상에서 굳어져야 된다는 거라. 그래야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아, 이것이 상카라구나 하고 그 상카라를 딱 집착하고 있으면 그게 상카랍니까? 아, 이게 망상이구나 하고 망상하는 걸 집착하고 있으면 그게 망상입니까? 아니라는 거라. 집착하고 머물게 되면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은 본연의 것들이 아니고, 다른 것으로 이미 바뀌어버린 상태라는 거라.

윤회를 인정한다는 것은 지나간 것들에 대해서는 집착하는 것이 없어진 상태라는 거라. 왜 그럴까?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나의 재산도 나의 가족도 나의 젊음도 나의 생각도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근데 망상이라는 것은 처음에 뭐라고 그랬어요? 나를 전제로 해야 망상이 일어나집니다. 나는 윤회하고 있고 원인·결과로써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 본인에게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은 윤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거라.

복잡하게 얽혀져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집착과 애착이 일어나서 망상이 일어나는데, 그런 집착과 애착은 복잡한 구조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만 물려가지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망상의 속성을 들여다보면은 그 속에는 감각적인 욕망도 있고 게으름도 있고 의심하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들이 복잡하게 되어있습니다.

 

장애는 어떤 것이든 오온에 대해서 분명하게 관찰하게 될 때 다섯 가지 장애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립니다. 연결된 구조니까! 그 대신에 그런 망상이나 욕망이나 의심하는 것들이 사라져도 살아가게 됩니다. 살아가는 사람은 그런 망상이나 이런 거는 하지 않지만은, 사고들은 합니다.

 

문답: 감정적인 충동은 상카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오온에서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되고 나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상카라는 그 훨씬 전입니다. 그 훨씬 전에 이미 일어나서 그것들을 증폭시키는 과정들이 있습니다. 아까 얘기했죠? 삼상이 화합함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상카랍니다. 그 상카라가 일어나고 또 다른 것들의 작용들이, 접촉하는 것이 일어나지게 되는 겁니다. 접촉도 상카라가 없으면 접촉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의도는 끊임없이 일어나집니다. 같은 의도가 아니고 다른 의도들입니다. 그것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해주는 것이 뭐라는 거라?

 

그마만큼 상카라는, 충동질이라는 것은 에너지라는 거라. 아까 예를 들어서 얘기했었죠. 햇빛이라는 거는 내가 원하는 원하지 않든 비치게 됩니다. 상카라는 쉽게 말하면 생존욕구와 마찬가집니다.

갈애는 내가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항상 일어나게 됩니다. 그 갈애는 왜, 어떻게 해서 일어나느냐는 거라. 나는 안 일으키고 싶은데, 일으키는 원인이 있으니까 일어날 거 아니라. 윤회를 만드는 원인이 있을 거 아니라. 그게 오온에 답이 있다는 거라. 이해가 됐습니까?

 

조건지어진 몸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상카라 입니다.

닙바나라고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조건지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사라져버린 상태를 닙바나 라고 합니다.

 

‘아, 이것이 조건지어지지 않는 것이구나’ 하는 상태를 인식을 해야 됩니다. 아, 이것이 참 그렇게 평화롭고 고요한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상카라가 없는 상태에서 있다가 빠져나오기도 합니다.

근데 보통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그냥 깊은 삼매쪽으로 쭉 들어가 버립니다. 이런 상태를 명확하게 모르면 그 이전에 이미 삼매쪽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지금은 계속적으로 알아차림을 유지를 해왔기 때문에 이 상태까지 와 진겁니다. 이럴 때는 분명하게 자기 스스로 알아야 되는 거라.

 

사라짐만을 아는 단계. 무상, 고, 무아를 알게 되는 상태. 이 방가냐나가 탁 오고 나면 그다음에 하는 것이 뭐냐면 이게 무너지는 현상을 볼 거 같으면 두려워집니다. 겁이 난다는 거라. 그래서 이것으로부터 피하려고 하는 마음이 굉장히 강해집니다. 이 대상 자체가 무너지는 것으로부터 내가 피하려고 합니다.

현상들이 계속적으로 붕괴돼서 사라지고 소멸되는 것들을 볼 거 같으면 그것으로부터 피하게 돼있습니다. 그것이 내한테 직접 닥쳐오기 때문에. 이걸 뭐라고 하냐면 ‘상카라를 봤다’고 얘기를 합니다.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항상 원인·결과라는 인과관계 속에서 생겼다가 사라진다! 그것도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천천히 생겼다가 천천히 사라지는 게 아니고, 아주 짧은 찰나 찰나에 생겼다가 사라지고 생겼다가 사라지고 반복한다는 거라. 그게 ‘상카라’라는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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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五蘊, Pañcakkhandha)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자가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알아차릴 때,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몸의 현상입니다. 색온(色蘊, rūpakkhandha)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할 동안에 느껴지는 좋고 싫고 하는 느낌들은 수온(受蘊, vedanākkhandha)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상온(想蘊, saññākkhandha)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알아차릴려고 노력하고 의도를 내는 것들은 행온(行蘊, saṅkhārakkhandha)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식온(識蘊, viññāṇakkhandha)입니다.

이렇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이 다섯 가지가 오온(五蘊, Pañcakkhandha)입니다.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어느 정도, 스님이 서너 단계로 나눠서 하고 있는 겁니다.

우선 첫 번째는 느낌(vedanā)과 상(saññā) 이것을 관찰대상으로 한다 하고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 단계를 거치고 날 것 같으면 의도(sankhāra)를 관찰하도록 그렇게 하시면 되고, 어떤 행위든 의도 없이 행위가 일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산냐칸다(saññākkhandhā), 상온(想蘊)입니다.

산냐(想)는 지식과 같은 것으로 일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아는 기능입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아침이다, 낮이다, 이것은 책상이다, 의자다, 고양이다, 나는 학생이다’하고 생각할 것도 없이 매우 많은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차 운전할 때 빨간 신호를 보면 브레이크를 밟고, 커브가 있으면 핸들을 꺽는 것, 그것도 모두 산냐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교육은 산냐를 늘리는 역할을 해줍니다.

이런 상(想)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조건지어진대로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다음 네 번째가, 상카라칸다(saṅkhārakkhandhā), 행온(行蘊) 입니다. 조금만 자신을 관찰해보면 마음속에서 ‘뭔가 하고 싶다’라고 하는 기분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상카라(行) 입니다.

어떤 것을 하는 것과 동시에 그래서 다음은 이것을 하고 싶다, 또 다음은 이것을 하고 싶다라고 끝이 없이, 침착해지지 않은 상태를 계속하여 만들어 나갑니다.

사람은 찰나 간에도 생각하지 않고 머리를 텅 비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한 일들도 자꾸자꾸 복잡하게 해야 됩니다. 다만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고 한 것뿐인데, 거기에 통상적으로 과잉의미를 부여해서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상카라, 행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 순간의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마음의 의지작용일 뿐입니다. ‘무엇인가 하고 싶다’라는 에너지가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그 이전 상태로부터 일어난 것인데, 지금은 그 일어난 것은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는 것에 의해서 다음 행동을 하고 싶다 라는 에너지가 나오는 단지 그것뿐입니다. 가고 싶다 라고 해서 목적지에 가서 도착하면 돌아오고 싶다 라고 하는 에너지가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그것을 ‘내가...’ 라는 망상개념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의 의지작용인 행(行)은 그래서 일으키는 즉시 선업이나 불선업의 행위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과보를 만들어내면서 살아지게 돼있습니다. 탐욕, 화냄, 혐오, 후회, 인색함 등의 마음의 작용은 불선업을 일으키는 행온입니다. 상카라칸다 입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윈냐나칸다(viññānakkhandhā), 식온(識蘊)입니다.

식(viññāna)이라고 인식하는 것이지만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식(識)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 이 윈냐나(viññāna) 입니다.

살아있는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윈냐나는 살아있는 생명, 살아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냐나는 마음이 하는 것들,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그러한 기능입니다.

 

장미를 보고서, 그 장미를 보는 시각으로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은 웨다나(受)이고,

예쁘다, 장미다 라고 인식하는 것은 윈냐나(識)입니다.

그 예쁘다, 장미다, 예쁜 장미라고 하는 구별․판단을 하기 위한 정보나 가치 기준이 산냐(想)이고, 이 산냐를 사용해서 윈냐나(識)가 식별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오직 대상을 받아들여 ‘아는 기능’만 합니다.

그런데도 이 식온을 오온의 작용을 알아차리는 주체구나, 이 마음을 ‘나’로구나, ‘나’라고 집착하는 그런 유신견, 이런 유신견이 있는 한은 괴로움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똑같이 순간순간 변화하고 소멸합니다. 계속하여 변화해 나갑니다. 거기에는 ‘나’라고 하는 실체, 영혼이라고 하는 보물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찰나찰나를 꿰뚫어보는 알아차림이 없고, 원인·결과를 통찰하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내 것이다’ ‘나 다’ ‘나의 영혼이다’하고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행한다’라고 하는 행온이 일어나게 되고,

‘이 몸이 내 것이다’ 하는 색온이 일어나게 되고,

‘내가 느낀다’ 하는 수온이 일어나게 되고,

‘내가 무엇이다’하는 상온이 일어나게 되고,

‘내가 안다’라고 하는 식온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것에 집착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색수상행식은 이렇게 ‘이 몸이 내 것이다’ ‘내가 행한다’ ‘내가 느낀다’ ‘내가 무엇이다’ ‘내가 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안다’하고 판단할 때는 ‘아, 아니다. 단지 식온의 덩어리가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하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이런 다섯 개의 덩어리에 ‘나’라고 집착하는 한은 한없는 괴로움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런 오온은 ‘나’라고 하는 집착에 의해서 말과 몸으로 행위를 하고, 또 그 행위로 인해서 새로운 일어남과 죽음이라는 윤회를 반복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올바르게 관찰하여서 그런 악순환으로부터 제발 탈출하라 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만약 ‘나’라고 하는 것이 뭔가 하고 정말로 이해할 수 있으면 삶의 방법이 바뀝니다. 마음에 평온이 가져와지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목표로 해야 될 것이 뭔가? 열반이구나! 궁극적인 지혜를 얻어야겠구나! 하고 그것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명을 탈출하는 길이고 세상을 초월하는 길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자, 그러면 어쨌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수상행(受想行)을 거느리고 일어나게 됩니다. 느낌만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까? 느낌이 일어났으면 뭉뚱그려서 생각해봅시다. 어쨌든 내가 느낌(受, vedanā)을 안다고 생각을 할 거 같으면 마음이 일어나야겠죠! 아, 이것이 아픈 느낌이다 하는 걸 갖다가 아는 것은 뭡니까? 아, 내가 과거에는 요런 경험으로 인해서 요런 다리가 아픈 것이다 하고 알 거 같으면 이것은 상(想, saññā)입니다. 상(想)은 뭡니까?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무언데, 어쩐데..’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일어난 것들 행위 자체는 행(行, saṅkhāra)입니다.

 

그러면 느낌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어차피 수상행식(受想行識)이 같이 일어난 겁니다. 같이 일어나고 그걸 알아차리면 느낌이 사라져버리니까, 그러면 수상행식도 같이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수상행식은 따로 구분될 수가 없는 겁니다. 같이 일어났다가 같이 사라집니다.

그 얘기는 알아차리는 것을 느낌을 알아차리든 아니면 상(想)을 알아차리든 의도(行)를 알아차리든 하나를 알아차리면 다른 것들도 같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같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리하더라도 그 마음에는 그 수상행(受想行)이 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식(識)이 일어난 상태입니다. 그럼 그 식(識)이 탐진치의 식이냐 아니면 탐진치가 없는 식이냐를 구분 짓는 거는 수상행(受想行)으로써 구분 지을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이해가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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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망상인지 아닌지를 체크하는 기준점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지금 일어나는 망상이든 생각이든 이것이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만약에 도움이 안 된다면 그건 놓아버려야 되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하고 있는 것이 결론이 있는 건지 아닌지?

망상은 대부분 결론이 없이 계속적으로 회전을 하게 됩니다. 계획을 세우고 하는 것은 분명하게 결론이 있습니다. 결론이 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지금 생각하고 망상하는 것이 지금 내가 생활하는데 방해를 하는지? 방해를 하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아니라는 거라.

네 번째가, 지금 일어나는 생각이나 망상들이 내 감정을 휘젓는 것, 아니면 내 감정들을 제압해가지고 다른 어떤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가?

감정을 휘저어버리면은 스스로 괴로웁게 되는 거고, 제압당해버릴 것 같으면 다른 행동으로 표출되고, 다른 말이나 다른 생각으로 표출되겠고, 그래서 이 네 가지가 기준점이다 하는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네 가지에 해당이 된다면 그건 버려버려야 되는 것들이라.

 

기준점을 얘기를 하겠습니다.

세상에 있는 다양한 견해, 의견들 그리고 무얼 믿든지 그런 믿음이라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에 끄달려 들어가지 마라라는 거라.

누가 이렇다 하면 그건 그 사람 생각일 뿐이고 그 사람 의견일 뿐이라. 그것이 설혹 나와 다르다 해서 그것으로 다툴 이유는 없습니다. 끄달려 들어가면 다투게 됩니다. 왜?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다음에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을 하면서 확신감이 들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오직 유일한 길이다’ 하는 확신감이 들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어영부영 따라올려고 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그런 확신감이 딱 들도록 ‘아, 이거 외에는 없구나’ 하는 것들이 딱 확립이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수행법문을 끊임없이 듣든지 책을 읽든지, 아니면 도반들과 토론을 하든지 뭘 하든지 진리에 대한 것들을 끊임없이 자꾸 탐구를 해나가야 되는 거고, 그에 맞춰서 수행하는 것!

 

수행하는 마음이 없으면은 아무리 탐구를 해도 그것은 개인적인 것일 뿐입니다. 오히려 나(我)라고 하는 것만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 뿐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수행이다 하는 생각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법문을 들을 때도 수행인 거고 일상생활할 때도 수행인 거고, 서로 주제에 대해서 얘기할 때도 수행인 것이지, 수행 아닌 것이 없다는 거라.

 

그 수행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탐진치(貪瞋癡)가 없어야 된다는 거라. 성이 일어나고, 자기 것 자꾸 고집할려고 하고 (그것은) 수행 안 하고 있다는 거라. 사는 것이 그냥 얼렁뚱땅 대충 살려고 하고 (그것은) 수행 안 하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확신이 들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 확신은 다른 것들 법문이나 이런 것들로 인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진 몰라도, 수행은 여러분 스스로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거라. 어려울 거 같죠? 가능해집니다. 생각하는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두 갈래 길이 있으면은 생각하지 말고, 어떤 것이 옳은가 생각하지 말고, ‘먼저 보이는 길로 그냥 가라.’ 그게 큰 길이든 작은 길이든 가는 길이 올바르고, 올바르게 가면은 그것이 바른 길이 되는 거라.

생각하면서 시간을 다 버려버리는 거라. 자기도 가보지 않은 길인데도! 자기 자신이 가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조언이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그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그 길을 가지 않고 그 길에서 게으름 부리면 끝까지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습관들을 되도록 가지지 말라는 거라. 실행하는 습관, 행하는 습관을 자꾸 가지도록 자기 자신이 만들어야 됩니다. 망상은 자기 자신을 자꾸 관찰하는 것으로 인해서 없애나갈 수가 있습니다.

 

-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 내용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