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녹 (케마왕비 이야기) (20140603)
··· 안 되면 마는 것이지 뭐 그걸 가지고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어?
그래서 그걸 보면서 그런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녹! 얼마나 여러분들 몸 안에 녹이 있을 것 같애요? 대표적인 거 얘기해볼까요?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되게 짜증부리고 싫어하다가도 뭐 하나 맛있는 거라도 준다고 할 것 같으면 금방 이렇게 마음이 180도 바뀝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마음은 그렇게 금방 바뀝니까? 대부분 그렇게 안 바뀝니다. 서서히 바뀌든지 아니면 바뀌었다 하더라도 그게 마음속에 남아있든지 그럴 겁니다.
참 녹이 많이 슬어있는 거지. 그걸 다 닦아내야 되는데 이걸 못 닦아 내니까 깨끗한 물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녹이 그냥 묻어나오는 거라. 정수기 물도 필터를 새로 갈아 줬을 때는 물이 금방 빠집니다. 거를 게 별로 없으니까. 그런데 오래됐으면 갈아줄 때가 되면 물이 안 빠져.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필터를 갈아줘야 됩니다. 죽을 때 되면, 갈아 줄 때 되면 물이 잘 나올란가? 그때까지 언제 기다려?
몸에서 왜 이렇게 안 좋은 녹들이 많이 나올까? 안 좋은 녹들을 왜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을까? 없는 것 같아도 엄청 있습니다. 마음이 금방 바뀌어져야 되는데 이론적으론 다 알고 있는데 못 바꾸는 거라.
'항상 알아차림 하라 그러면 선한 마음이 일어난다.' 알긴 아는데 못 바꾸는 거라. '아무리 미워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그 사람이 나에게 욕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사람에게 자애의 마음을 가져라.' 알고는 있는데 그렇게 못하는 거라.
애들한테 가르쳐주면 금방 그렇게 합니다. 녹이 적고 없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 때 빔비사라 왕의 왕비가 케마 라고 하는 왕비가 있었습니다.
그 왕비는 부처님 말씀을 들을려고 하지를 안 해요. 부처님이 만날 가르치는 게 뭡니까? "참 무상한 것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 항상 모든 것들은 괴로운 것이다. 이 신체라고 하는 것은 깨끗하지 못하고 부정한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그말을 듣고 싶지가 않는 거라. 이렇게 즐겁고, 나는 항상 예쁘고 이렇게 아름답고 한데 안 맞는 거야, 자기하고는. 그러니까 부처님 말씀을 들을려고 하는 게 아니고 부처님조차도 볼려고 하질 않는 거라. 실제로는 그게 맞는 건데, 무상하지 않는 게 어딨고 변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나라고 집착할만한 어떤 것도 없는데도, 뭐 그거 이치적으론 알고 있을지 몰라도 그거는 나하고는 관계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거라.
빔비사라 왕이 저 왕비를 좀 제발 부처님 말씀을 듣게끔 해야 되겠는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왜 부처님 말씀을 듣게끔 하고 싶어 할까?
법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 법에 대해서 모르면은 그것에 대해서 측은한 마음이 생깁니다. 연민심이 일어나기 때문에, 인도해줄려고 그럽니다. 그 법으로!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이 항상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또 변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니까 그것은 문제가 안 생기겠어요?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예쁘다 생각할 것 같으면 예쁘지 않은 사람을 보면 추하다고 알게 됩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맛있다고 아는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맛없는 것은 안 먹을려고 그럽니다. 그거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더 맛있는 것을 찾게 되는 거라. 사실은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의 몸에 녹이 자꾸 생기게 됩니다. 분별을 하게끔 되는 거라.
실제로는 맛에 대해서 그냥 맛있다고 먹는 것이 아니고, 먹는다고 하고 먹을 것 같으면 맛있는 것에 그렇게 크게 집착하지 않고 맛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크게 거부하지 않고 먹을 수가 있는데, 그렇지 않고 ‘맛있다, 맛없다’ 하고 분별을 해서 먹게 되면 맛있는 것만 먹게 되고 맛없는 것은 안 먹게 돼있습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아, 이거 내가 먹는 것에 대해서 집착한다 해가지고 먹는 양을 확 줄여버린다, 아니면 먹는 것을 아예 안 먹는다, 이런다고 해서 해결이 됩니까? 해결은 안 됩니다.
케마왕비도 꼭 마찬가집니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고 부정한 것으로, 더러운 것들로 가득차 있는 오물 덩어리와 같다 하고 얘기할 것 같으면 그거 듣기 싫은 거라.
그러니까 자꾸 문제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궁중 안에서도.
그래서 빔비사라 왕이 꾀를 냅니다. 부처님이 계신 죽림정사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시를 짓게끔 합니다. 그래서 그 시를 계속 사람들이 부르게끔 합니다.
어느 날 케마왕비가 그 소리를 듣다 보니까 너무 그 소리가 좋은 거라. 아, 저렇게 아름답고 저렇게 좋은 곳이 있나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스님도 가끔씩 경전을 읽다 보면 그 경전 구절이 굉장히 마음에 드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스님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 뭐냐 하면, 처음에 부처님이 자자를 할 때 누군가가 읊었던 게송이 있습니다.
이렇게 환한 보름날에 저 보름달의 달빛이 비쳐가지고 스님들이 앉아있는 자리를 환하게 아주 아름답게 밝혀주고 있다는 거라. 꼭 여기만 이렇게 환하게 밝혀주는 것같이 보인다는 거라. 거기에 아름답게 잘 정돈된 잔디밭에 부처님도 앉아있고 사리불 존자도 앉아있고, 다른 여러 덕을 갖춘 스님들이 고요하게 앉아서 수행을 하고 있다는 거라. 그 수행을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고요하고 그 달빛을 받아가지고 더 빛나는 것같이 보인다는 거라. 그런데 그 둘러앉아 있는 모습이 어느 누가 뛰어나다고 말하지 않고 어느 누구가 열등하다고 말하지 않고 동그랗게 앉아가지고 원을 그리고 앉아가지고 고요하게 앉아있다는 거라.
그러면서 부처님이 거기서 아,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지적해다오. 그러면은 나는 그 잘못을 지적당한 것을 받아서 다시 그걸 고쳐나가겠다. 그러니 제발 나에게 내가 잘못한 것들 말이나 행동한 것이나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나 잘못한 것들 잘못 지도하는 것들이 있으면 지적해다오. 부처님이 어디에도 잘못된 부분이 아무것도 없는데 저렇게 말을 한다는 거라. 얼마나 이 아름다운 모습인가.
그런 구절들이 쭉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상상을 해봅니다. 그 보름달이 떠있는 상황에서 야외에서 쭉 앉아서 수행하면서, 수행 끝나고 또 잘잘못을 갖다가 서로를 참회하고 있는 모습들을 생각하면 어떨 땐 아, 진짜 좋은 모습이다. 저게 부처님과 제자들이 해나가는 실제의 모습이다 하는 그런 생각들을 처음에 많이 가졌어요.
이 케마 왕비도 아마 마찬가지였던 거 같애. 죽림정사가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라고, 대나무가 굉장히 많이 우거져있으니까 그걸 비유해 놓은 구절이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지겠어? 그러니까 케마왕비가 ‘아, 내가 참 가보고 싶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궁전에 있는 것은 좋은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지옥입니다. 답답하고 딱 갇혀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산들바람에 부딪치는 소리하고 대나무잎 하고 그리고 그사이로 달빛이 어른어른 하고 그리고 거기에 또 누군가가 고요하게 경행하면서 달빛을 받는 모습, 이런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비칠 거라? 나도 거기 한번 가보고 싶다. 부처님은 안 보고 싶고, 부처님 말씀은 듣고 싶지 않은데 거기는 가보고 싶은 거라.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죽림정사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죽림정사에 가게 되면 항상 부처님이 때가 되면 법문을 설합니다. 죽림정사에 가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가다가 보니까, 저 저쪽에 부처님이 법문을 설하고 사람들이 고요하게 앉아있는 모습들이 그대로 보입니다.
부처님이 법문을 설할 때 대중들의 모습들은 아무리 많이 있어도 수천명이 있어도 숨소리 하나도 안 들린다고 그럽니다. 그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자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 법문만 듣고 있든지 하겠지. 일부는 자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일부는 법문을 듣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 딴짓하고 있는 사람들도 틀림없이 있을 거고, 그리하더라도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하다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 옆에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부처님이 더울까 봐서 부채질을 해주고 있거든. 그런데 보니까 자기보다도 더 아름다운 여인인 거라. 거 이상한 거야. 부처님은 맨날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되게 별로 안 좋게 생각했거든. 이 몸은 부정한 것이다 더러운 것이다 했는데, 실제로 부처님 옆에 보니까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자기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여인이 부채질하고 있는 거라.
그런데도 그 케마왕비는 부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질 않습니다. 왜 그럴까?
법을 들을려고 할 것 같으면 법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열려야만이 법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아무리 있다고 하더라도 법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내가 아무리 법을 설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에게 맞는 말만, 자기에게 필요한 말만 가져갑니다. 그러니 내가 의도했던 내용하고는 영 딴판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귀가 안 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법을 있는 그대로, 그대로 다 들을려고 하지 않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들을려고 합니다.
케마 왕비는 아예 귀가 닫혀져 있는 상태라. 귀가 닫혀져 있어도 보이는 것은 보이기 때문에 그 여인이 보인다는 거라. 부처님 옆에서 부채질하고 있는 여인이. 그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그 여인들이 변하도록 만듭니다. 실제로는 그 여인은 실재하는 여인이 아니고 케마 왕비에게만 보이는 대상이라. 열여섯살짜리 아름다운 소녀에서 스무살로 서른살로 육십살로 이렇게 쭉 진행되면서 늙어가고 변해가고 추하게 변하는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여러분들 늙어가는 모습들하고 똑같습니다. 지금 아마 오십대 분들은 그럴 겁니다. “나도 옛날에 예뻤어” 누가 예쁜 줄 몰라서 뭐, 그런데 지금은 안 예쁘다는 얘기지. 그거 어쩔 수가 없어. 세월이 변하니까 그렇게 바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런데 '옛날에 예뻤어' 하고 그것만 생각하고 있는 다고 해가지고 내가 실제로 예뻐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너 안 예뻐!" 할 것 같으면 성질을 바락 냅니다. 실제로는 안 예쁜데. 그냥 안 예쁘면 안 예쁘다고 받아들이면 될 건데 안 받아들이는 거라. 옛날에 예쁜 모습만 자기는 생각하고 있는 거라.
세월은 그렇게 사람을 변하게끔 합니다. 그렇게 변했으면 변한 거 그냥 받아들이면 됩니다.
부처님 옆에 있는 여인이 점점 변해서 딱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러면서 죽고나서 시체가 시커멓게 변하고 멍이 들고 고름이 나오고 구더기가 나오고, 그러다가 뼈마디만 남게 되고 그 뼈마디도 점점 변해가서 한줌 재로 싸악 없어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때사 케마왕비가 아, 부처님이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참 부정한 것이다. 더러운 것이다 하는 말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몸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도 이 몸이 부정한 것이다 하는 생각을 떨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서 이 몸에 대한 집착이 있으니까 거기서 녹들이 자꾸 스는 거라. 자기 자신이 그 녹을 그대로 먹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이 몸이 무상한 것이고 깨끗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자꾸 깨끗하게 만들려고 할 생각을 안 하고 있고, 옛날에는 깨끗했다는 생각에 딱 붙잡혀있고, 그리고 나는 깨끗하다는 생각에 딱 붙잡혀있을 거 같으면 그건 당연히 녹이 슬게 돼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자꾸 괴로움을 받습니다. 거기 집착하고 있으니까. 눈으로 보는 대상들은 아름다운 걸 자꾸 볼려고 하고, 맛보는 대상들은 맛있는 거 먹을려고 그러고, 누가 말하는 소리 들으면 자기 귀에 좋은 소리만 자꾸 들을려고 하고,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은 전부다 그럴려고 합니다. 좋은 것들만 받아들일려고 하고, 그러면서 싫은 것들은 자꾸 배척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안 좋은 소리 들으면은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좋은 것들을 보면 더 집착할려고 하게 되고, 욕심내게 되고. 그러면서 자꾸 녹이 스는 거라. 그 녹이 많으면 많을수록 벗겨내기가 힘들어지는 거라.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한 것이다 하는 생각을 딱 가져버릴 것 같으면, 그리고 이 몸은 무상한 것이다 하는 생각을 딱 가져버리면 집착할 것이 없어져버리는데 그러지를 못한다는 거라.
그러면서 그걸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밖에 걸 자꾸 찾습니다. 내가 저 소리 안 들으면 되지. 그래서 깊은 산속이나 수행처 가서 수행할려고 그럽니다. 내가 저거 안 먹으면 되지. 하니까 고기 안 먹고 채소만 먹을려고 하고. 내가 말을 안 듣고 말을 안 하면 되지 해서 묵언하게 되고.
그걸 부처님이 뭐라 그러느냐면 실랍바따빠라마사 라고 얘기합니다.
계금취(sīlabbataparāmāsa), 의식과 의례에 딱 매여버리는 것. 밖에 것들이 원인이라는 생각을 가져버리니까 거기에 매여서 그것만 끊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라.
가끔씩 어떤데 법회에 가면 그럽니다. 스님은 삼귀의·오계를 주는 게 기본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스님은 되게 싫어합니다. 자기들 방식대로 안 한다고, 내 방식대로 한다고. 그럼 다음에 가서는 삼귀의·오계를 안 주고 합니다. 그럼 그 스님은 되게 좋아합니다. 딱 거기에 매여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 그 의식에 딱 매여있어서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좋고 싫어하는 걸 금방 드러낸다는 거라. 거기 매여있으니까.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데? 밖에 것들 의식이라고 하는 것들, 의례라고 하는 것들이 뭘 여러분들을 구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왜 거기에 매여있느냐는 거라.
소리 안 들으면 된다고 해가지고 소리 안 나는 곳에 가서 수행한다고 해서 그게 깨달음을 이루어? 말 안 하고 있을 거 같으면, 삼년 묵언 정진한다고 할 것 같으면 깨달음을 이룰 수가 있느냐는 거라. 그런 법은 없다는 거라. 밖에 것들이 대상이 원인이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건 문제를 잘못 보는 것들이라.
자기 몸 자기 자신이 원인이라는 생각을 해야지, 자기 자신한테서 녹이 나오고 자기 자신한테서 부정한 것이 나오는데, 밖에 것들을 자꾸 깨끗하게 해가지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라.
경전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악을 짓는 가장 기본적인 축은 이 육체의 감각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나쁜 행위를 하고 하는 악을 짓는 기본적인 주축은 이 몸이라는 거라. 이 육체, 육체에서 느끼는 감각, 맛보고 보고 냄새맡고 하는 이 감각, 이것들이 악을 짓게끔 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악을 짓고 선을 행하고 하는 것은 이 몸이 하는 것이지 밖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라. 수행하는 것도 이 몸이 하는 것이지 밖에 것들을 차단한다고 해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이 몸이 주축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 몸이 아, 참 무상하다 하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거라.
아이들은 무상한 줄 알기 때문에 싫은 마음이 일어났다가도 금방 그걸 놓아버리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기쁜 마음을 일으킨다는 거라. 그런데 어른은 그걸 놓지를 못하니까, 집착하고 있으니까 금방 마음이 안 바뀌는 거라. 문을 열 때 삐걱거리는 것하고 마찬가지라. 문이 열리기는 열리더라도 안 좋은 소리와 같이 열리는 거라.
그냥 녹을 싹 제거해버리면 문 열릴 때는 나쁜 소리는 안 난다는 거라. 몸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을 딱 버려버리고 나면 그냥 바로 소리 안 나고 문이 열린다는 거라. 문을 안 열고 살 수는 없다는 거라. 물을 안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필터를 갈아줘야 되는 것이고, 저 문에 생긴 녹을 제거해줘야 되는 것이지 다른 것들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통째로 간다? 그럼 그건 또 녹이 안 생기나?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이 몸은 죽을 때까지 어쨌든 여러분들이 써야 되는 것들입니다. 이 몸을 좀 더 젊게 만들려고 하고 이 몸이 병들지 않게끔 만들려고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물론 그것도 해야 되지만, 늙었으면 늙었다고 인정을 해야 되는 것이고 병이 들었으면 병이 들었다고 인정하고 그걸 받아들여야 되는 거라. 받아들이는 순간에 그 병은 낫게 되는 것이고 그 늙음의 속도는 늦추어지게 되는 거라.
수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질병을 다스린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그 병과 싸우는 것이 아니고 병을 받아들여버립니다.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냥 그 병을 받아들여버립니다. 이 몸이 무상해서 이 몸도 변한다고 알듯이, 저 병도 변하겠지 하고 변하는 것을 그냥 받아들여버립니다. 그래서 그 변하는 모습을 그냥 지켜봅니다. 그럼 그 병은 낫습니다. 간단한 위장병 이런 것들은 금방 낫고 몸 안에 생긴 암조차도 그렇게 낫습니다. 그런 실례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왜 수행할 때 여러분 호흡을 알아차립니까? 호흡 봐서 뭐 하게? 호흡이 변하는 것들을 보라는 겁니다. 들이쉬니까 내쉬어지는 거고, 들이쉬는 숨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변하는 모습들을 보라는 거라. 변하는 것들을 보지 않을 거 같으면 무상한 줄을 몰라. 무상한 줄 알아야만이 집착하는 것들을 떨어뜨릴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그것만 알려고 합니다. 왼발 오른발 할 때는 왼발 오른발 디디는 그것만 알려고 그럽니다. 뭐가 무상한지를 모릅니다. 뭐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모른다는 거라.
변하는 것을 알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집착을 안 합니다. 그거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집착할 대상이 아니고, 내가 거기에 머물 생각이나 모든 것이 머물고 있을 대상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변하는데 내가 거기에 있어야 될 이유가 없잖아. 내가 거기에 있는다고 해서 거기에 그대로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변하기 때문에! 집착해야 될 대상도 아니고 머물러 있어야 될 대상도 아니라는 거라.
스스로 자기 자신이 자신의 몸에 대해서 자승자박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됩니다.
경전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스스로 만든 거미줄, 그 거미줄은 그 거미가 자기 자신에게서 뽑은 겁니다. 거기에 딱 갇혀버린다는 거라. 다른 대상들도 와서 그 거미줄에 갇혀서 죽음을 당하지만 그 거미도 꼭 마찬가지로 거미줄에 갇혀 삽니다. 자신이 뽑은 거미줄에. 그 거미줄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욕망에 빠진 자들은 갈애의 흐름에 빠져버린다. 현명한 사람들은 그것을 끊고 집착을 버려버리면 괴로움은 소멸된다.
괴로움은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녹물과 같습니다.
자신이 괴로움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가 내 몸에 녹이 많이 끼어있다고 알아야 됩니다. 녹을 벗겨내야 되는 것이지 몸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로 돌릴 수도 없고 다시 이 몸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몸에 있는 녹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녹이라고 하는 것은 엉겨붙지 않도록만 해주면 그 녹은 떨어져버립니다.
그것을 딱 붙잡고 집착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것은 떨어져버립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무상한 것이고 변하는 것이라고만 알 것 같으면 그 녹은 자연스럽게 떨어져버립니다. 결합하지 않으면 그 녹은 떨어져버립니다.
그 녹은 자신이 만든 겁니다.
그 그물에 자신이 걸리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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