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깜맛사까따 냐나(업은 자신의 것이라는 지혜) (20140529)

담마마-마까 2021. 5. 30. 08:49

https://youtu.be/mXngk1kHJRA

* 깜맛사까따 냐나(업은 자신의 것이라는 지혜) (20140529)

 

깜맛사까따 냐나도 모르고 수행의 발전은 좀 힘이 듭니다.

보통 불교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두 가지를 갖춰라 하고 얘기합니다. 지혜와 자비! 그렇죠?

 

자비는 뭐로 얻을 수가 있습니까? 자비는?

보통 그거는 내가 행하는 것들을 잘 행하고 그러면은 자비는 어느 정도 가지게끔 됩니다. 그래서 바르게 배운 불자 치고 자비롭지 못한 일들은 잘 안 할려고 그러죠?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고 나쁜 짓 하는 사람들은 나쁜 짓 하겠지만, 그래도 바르게 잘 배운 부처님 제자들은 대부분 보면 자비롭습니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남에 대한 배려들을 하고 남을 위해서 봉사도 할려고 하고, 그리고 항상 마음에 자비로운 마음들을 가지게끔 됩니다. 그래서 해칠려고 하는 마음들이나 화를 내려고 하는 마음들은 되도록이면 가지지 않고 살아가게끔 됩니다.

 

수행에서도 자비심을 기르기 위한 수행들이 있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 밑바탕이 되고 나면 그다음에 하는 것이 그것으로 인해서, 그 밑바탕으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도록 하는 일들을 합니다.

그런데 지혜는 내가 배운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세상적인 지혜는 배울 수가 있습니다. 선생님을 통해서나 아니면 여러 가지 사회를 통해서 그런 지혜들, 그리고 일을 하기 위한 지혜들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얻을 수가 있는데 불교의 지혜는 그렇게 해서 쉽게 얻어지지는 않죠?

 

사리뿟따 존자한테 우빠와나가 그렇게 물어보는 경전이 있습니다.

'윗자' 보통 윗자를 풀이할 때 지혜라고도 표현들을 합니다. 윗자-지혜를 가지면 좋은가 하고 물어봅니다. 그다음에 '짜라나' 보통 덕행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여기엔 자비덕행이라 해서 자비도 포함이 될 것이고 또 덕행-짜라나의 무리에는 삼매-선정도 포함되는 겁니다. 그래서 선정을 가지는 것도 좋은가?

그러니까 지혜를 가지는 사람을 해탈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다음에 자비나 선정력이 있는 사람들을 해탈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는 지혜와 자비, 선정력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해탈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물어봅니다.

 

그런데 사리뿟따 존자는 도반한테 다 아니라고 합니다.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해탈한 사람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그 지혜와 자비 다 가지고 있는 사람도 해탈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은 지혜와 자비가 다 없는 사람을 해탈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거는 전혀 아니죠? 그것도 해탈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빠와나가 사리뿟따 존자한테 물어봅니다. 그럼 뭐 가지고 해탈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냐? 여기에 걸리지 않은 게 없거든. 아무리 경우의 수를 따져봐도.

 

그때 사리뿟따 존자가 얘기합니다. 지혜는 그렇게 지혜가 있는 사람이 해탈한 사람인가 해서 물어봤을 때 그걸 해탈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할 경우에는 '지혜를 가진 자'를 상정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나'를 상정을 하게 되는 거고, 그 존재를. 존재를 인정하는 상태에서는 그거는 해탈한 사람이 될 수가 없다는 거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라고 하는 것들을 버려버린 상태에 있는 사람이 그게 진짜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게 해탈한 사람인 것이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면서 ''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해탈하고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자비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꼭 마찬가집니다. 지혜·자비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라고 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은 그걸 빨리어 명칭으로 '지나'라고 하든 뭐라고 하든 간에 그것이 있다고 관념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그 사람이 지혜가 있고 자비가 있고 선정력이 뛰어나더라도 그건 해탈하고는 관계가 없다, 거리가 멀다 그런 얘기입니다.

 

경전에 그런 부분이 있는데 어찌 보면 참 어려운 부분같이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보통 부처님의 제자들은 계정혜를 닦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계와 정을 닦기는 참 쉽습니다. 계율은 부처님 말한 것을 열심히 지키고 어긋나지 않게끔 하면 되고, 정은 수행 열심히 할려고 하고, 그리고 마음 고요하게 자꾸 할려고 하고 이러면 닦아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는 좀처럼 해서는 닦기가 힘듭니다. 가끔씩 스님이 법문을 통해서 어떤 것들이든 대상을 만났을 때 그것에 인해서 반응하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지혜롭게 행동하는 법들을 가끔씩 얘기를 하곤 합니다. 그거는 자기가 그걸 체험 해가지고 가슴에 딱 가지고 있는 상태가 아니면 그렇게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판단하질 잘 못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계와 정을 닦기는 쉬운데, 혜를 닦는 것은 보통 팔정도에서는 대상에 대해서 부지런히 알아차리는 것 그거 딱 하나 하고, 그다음에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 이 두 가지만이 혜에 해당이 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알아차리는 것은 열심히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렇게 알아차림이 있다고 하면 거기에는 '나'라고 하는 것들은 없습니다. 일어난 대상만 일어났으면 일어났다고 알아차리고 사라졌으면 사라졌다고 알아차리고, 그래서 대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만 알아차리고 나가면 되니까, 그래서 어느 정도는 '나'라고 하는 것을 없앨 수 있는 조건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 쭉 한다 해가지고 빨리 지혜를 획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른 견해를 빨리 가지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부처님이 말하는 바른 견해가 어떤 것이 있을까?

예를 들어봅시다. 악한 일 하면 괴롭죠? 그런데 그걸 탁 알아야 되는데 '악한 일 해도 안 괴로울 수 있다, 아니면 즐거울 수 있다' 하고 알 것 같으면 그건 참 어리석은 사람이지. 악한 일 할 거 같으면 어떤 경우든지 괴롭습니다. 악한 일 할 때도 괴로운 거고 나중에 돌아오는 결과도 괴로운 일인 것이지 그게 좋은 결과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할 동안에 그거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악한 일을 할 것 같으면 괴로움이 따른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자꾸 인식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걸 하지 못하면 악한 일을 자꾸 하게끔 된다는 거라. 의도해서라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자기가 조금의 이익이나 조금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악한 일을 하게끔 자꾸 된다는 거라. 안 그래도 가만히 놔둬도 이 마음이란 놈은 자꾸 악한 쪽으로 흐르게 돼 있는데 지가 스스로 의도해가지고 더 악한 일을 할 것 같으면 그건 더 안 좋은 결과들을 낳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바른 견해를 가질려고 할 것 같으면

첫 번째로 먼저 머릿속에 넣어둬야 되는 것이 뭐냐하면 악한 것, 악한 일을 하는 것 그것은 반드시 괴로움을 낳는다. 그것이 첫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해야 되는 것은 선하고 악하고 하는 것들을 판단하는 것들은 자기가 가진 믿음으로 판단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건 다 선이다. 이건 좋은 일이다. 또 세상 사람들이 이것은 다 악한 일이다. 이런다고 해서 그것을 판단 기준으로 하지 말아라는 거라. 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은 좋은 것이라고 따르는 것이라고 해서 그것도 판단하지 말아라는 거라. 조상들이 쭉 그렇게 해왔던 것이라도, 또 법률적으로 그렇게 관습적으로 해왔고 정해진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선하고 악한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러한 것들은 믿음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거라.

탁 판단해야 될 것은 자기 자신이 맛을 보고 '아, 이것은 짜다'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짠 것이 될 것이고, '이것은 달다' 할 것 같으면 단 것이 될 것이고 자기가 경험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선과 악을 판단할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이것이 두 번째 해야 되는 거라.

 

확인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선과 악의 판단의 기준으로 잡지 말아라는 거라.

인제 조금 어렵게 들어가지죠?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지혜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지금 스님이 쉽게 할려고 하는 중입니다. 못 알아들으니까 어떨 때는 좀 답답하긴 한데 그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경전에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깔라마인들에게 한 경이 있죠? 일곱 가지 예를 들면서 그것으로 인해서 따르지 말아라. 네가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것이 너에게 이로움을 가져오고 행복을 가져올 것 같으면 그것을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따르지 말아라.

 

역사가 바뀌어 오고 한 것들도 어찌 보면 세상 사람들의 믿음하고는 반대되게 자기 자신이 '아, 이것이 옳다' 하고 판단한 사람들이 자기를 희생해가면서 한 결과로 인해서 역사가 바뀌어 오고 했습니다. 또는 지금 문명이 발달하고 또 문자를 사용하게 되고 하는 것도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것들로서 자기가 만들어나가면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게 되고 해서 그것이 바른길로써 형성되고 이렇게 되어져 와지는 것들인데,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덧붙여서 부처님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믿음을 근거로 해서 선과 악을 판단하지 말아라. 자신이 확인된 것만으로써 선과 악을 판단하라. 그렇지 못할 경우 그럴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일단 유보하라. 차라리 성스러운 침묵을 유지하든지 알아차림을 그냥 하라는 거라. 지금 그걸 가지고 내가 지혜롭다, 어떻다 하고 그것을 판단하지 말아라는 거라.

 

부처님에 대해서 믿음을 가집니까? 이것이 바른 일입니까?

이것을 부처님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고 가르침을 듣고 내가 또 수행해보니까 좋다 하니까 부처님에 대해서 믿음을 가진다고 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이거 믿으라고 해가지고 믿어가지고는 아무런 이익이 없는 거라. 그 사람은 안 바뀐다는 거라.

마음도 이것을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고 부처님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그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는 거라. 마음이 안 바뀌면 여기에 대해서 믿음도 확립될 수가 없고, 그 이상의 단계로 넘어갈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리하니까 무조건 믿게 되니까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도 마음이 안 바뀌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나쁜 짓도 더 많이 해. 점점 더 선한 쪽으로 이동을 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야 되는데 거꾸로 가고 있다는 거라.

 

믿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들입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잡을 때는 그것을 내가 확인해가지고 바른 것이다 아니다 하고 확립이 될 때만 그게 가능한 것들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이것조차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거라. 부처님조차도. 하물며 다른 것들은 더 할 필요가 없다는 거라. 그게 바른 견해를 가지는 두 번째 일입니다.

조금 어려워도 크게 어려운 건 아니죠?

 

그다음에 세 번째,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거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어요? 뭐를 가지고 알아요?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거를 알 거 같으면 지가 마음이 일어났을 때 '아, 이게 선한 마음이다 악한 마음이다 '하는 건 알겠죠?

이게 이런 마음이 자비로운 마음이다, 아니면 남을 해칠려고 하는 마음이다 하는 걸 알아요?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거 같으면 그건 알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이 다 똑같을 수는 없잖아? 마음이 여기 하나라? 아니잖아. 마음이 불변하는 건 아니잖아. 마음이 끊임없이 다르게 일어나고 있는 거라. 찰나 찰나에.

 

그런데 왜 마음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느냐는 거라. 일심(一心)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불변하는 마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조건 따라서 끊임없이 다른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거라.

그럼 그거는 알아야 될 거 아니라?

아, 내가 지금 나쁜 마음이 일어났네. 또는 좋은 마음이 일어났네. 또 어떤 마음이 일어났네. 그거는 적어도 알 수가 있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일어나도 그게 금방 사라지고 금방 또 다른 마음이 일어난다는 걸 분명하게 압니다.

 

적어도 그걸 아는 사람들은 좋은 마음이 일어났으면 다른 좋은 마음들이 자꾸 더 일어날려고 할 것이고, 나쁜 마음이 일어났으면 그거 안 일으킬려고 열심히 노력할 거라.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면 그렇게 바뀌어나간다는 거라.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만 알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 방법이 없습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 항상 마음은 좋은 마음이 일어났으면 더 좋은 마음을 일으킬려고 하고 나쁜 마음은 안 일으키도록, 그리고 안 일어난 나쁜 마음들은 아예 일어나지 않게 만들려고 노력을 하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 할 것 같으면 이것은 그 이상의 방법은 없습니다. 자기를 증장시킬 수 있는 방법 아니면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바른 견해를 가지려면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알아야 됩니다. 그럴려면 지금 내 마음이 일어난 게 뭔 마음인지를 분명하게 자꾸 알도록 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그 마음을 알아야만이 바른 노력들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게 세 번째입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기 위한 것.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들은 예비적인 단계들입니다. 지혜의 예비적인 단계.

 

그다음에 네 번째, 그리해도 다 좋은 일만 할 수 없고 선한 마음만 낼 수가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또는 나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남한테 싫은 소리도 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때마다 적어도 앞에 1번 2번 3번을 끊임없이 계속해오면은 빨리 고칠려고 합니다. '어, 이게 아니지' 하면서 바꿀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해도 어쨌든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르게 돼 있다는 거라. 왜 그럴까? 왜 그렇게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들이 일어날까? 안 하고 싶은데, 그거 제발 끊고 싶은데. 그래서 그거 다 끊어지고 나면 참 좋겠는데 이 놈이 안 끊어지는 거라.

 

뿌리가 있기 때문에. 무명이라고 하는 뿌리! , 이것 참 진짜 끊기 힘든 거다 하는 거를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무명-어리석지 않으면은 아, 왜 금방금방 알아차려가지고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도록 하지 못하는가? 이만큼 선한 마음을 지속하다가도 또 잠깐이라도 착칵 나쁜 쪽으로, 이거 안 했으면 좋겠는데 끊임없이 쭉 갔으면 좋겠는데 안되는 거라.

이 뿌리를 잘라야 되겠다는 마음이 일어나야 됩니다. 악의 근원은 무명이구나 하고 분명하게 인식해야 됩니다.

 

이걸 내가 끊기 전에는 해탈이고 뭐고 없다. 될 방법이 없다는 거라.

바른 견해를 딱 확립한다? 어느 정도는 확립할지 몰라도 이것이 견고하게 되어가지고 뿌리를 딱 바꿀 수 있을 정도는 될 방법이 없는 거라. 그러니까 끊임없이 윤회를 하는 거라. 생각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생각 안 일어나는 사람 있습니까? 부처님 외에는 없습니다. 일으키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생각도 일어나고 뭔가 나쁜 일들도 자꾸 하게끔 되고 한다는 거라. 끊을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이 무명의 뿌리를 빨리 끊을려고 하라는 거라. 모든 악의 근원은 이 무명이라고 하는 뿌리가 있다 하고 자꾸 바라보라는 거라. 그래서 이걸 끊기 위해서 자꾸 노력하라.

이게 네 가지입니다.

 

적어도 이 네 가지를 할 줄 알게 되면 그래도 바른 견해를 가지기 위한 단추는 일단은 열지는 못해도 단추는 어디 있는지는 알고 그것을 잡을 수는 있습니다.

 

요걸 잡아야 그다음에 오늘 여러분들에게 프린트물 내준 깜맛사까따냐나, 가장 쉬운 겁니다. 지혜의 가장 쉬운 거라. 요걸 그래도 할 건데 이거조차도 안되는 거라. 단추가 어딨는지를 모르는데 뭘 어떻게 그걸 넣을 거라?

"지혜는 금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끊어내야 될 것은 싹둑 잘라내버려야 됩니다. 그게 나쁜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잘라야 되는 거라. 나쁜 행위라고 할 거 같으면 잘라야 되는 거고. 그것이 무명이라고 할 거 같으면 그것도 뿌리부터 도려서 잘라내버려야 된다는 거라.

 

자! 그렇게 해서 문을 잡았다고 하면은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훈련.

음, 괴로움이 있습니까? 괴로움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것이 괴로움이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말은 받아들인다고 그러지. 그런데 그거 받아들이기 쉬운 거 아닙니다.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니까 부처님이 그다음 단계로 쉬운 거를 얘기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옆에 있고 싶은데 항상 가까이 옆에 없다. 그건 괴로움입니다. 그건 알기 쉽다는 거라. 저 원수 저거 하고 같이 안 살고 싶은데 만날 같이 있어야 되는 거라. 그것도 괴로운 거라. 아, 이것 좀 내 것이 되고 내가 가지고 싶은데 내가 아직 그런 상태가 못 돼. 그것도 괴로운 거라.

뭔가 이렇게 닿으면 괴로운 느낌이 있다. 그러면은 이거 닿은 것이 항상 괴로운 것이 아니고 즐겁고 좋은 것이 되어야 되는데, 내 몸을 이렇게 만드는 괴로운 느낌이라는 거라. 안 그러고 싶은데.

색수상행식 이라고 하는 오온, 오온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괴로움이라는 거라. 느낌도 괴롭고, 즐거울려고 하는데도 괴로운 것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내가 뭔가 생각하는 것도 항상 즐거운 것들이 생각이 되어야 하는데 괴로운 것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오온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괴로움이다.

 

앞에 세 개는 이해하기 쉬워도, 처음에 말한 네 가지 하고 마지막에 말한 한 가지는 어렵게 느껴질 겁니다. 그리해도 '이것은 괴로움이다' 하는 걸 이해를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거는 이해할 수 있겠어요? 아마 차차 될 겁니다. 괴로움이 있고 이 괴로움이 왜? 왜 생기는가 하는 걸 이해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왜 괴로움이 생기는 거라? 왜 내가 늙어가야 되는 거라? 안 늙고 항상 젊어가지고 있고 싶은데. 왜 내가 병에 걸리는 거라? 항상 건강하고 싶은데. 왜 그런 거라?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그런 거지! 태어났으면 당연히 나이가 먹어가게 돼있는 건 자연의 이치라. 변하지 않는 게 어딨어?

그런데 안 변하고 싶어 하는 거라. 나이 안 먹고 싶어 하는 거라. 항상 젊고 싶어 하는 거라. 살아가면 기관이 고장 나는 거니까 당연한 거라. 안 그런 게 어딨어? 다 그렇게 부패되고 바뀌게 돼있는 건데 자기 몸이라고 뭐 다를 거 같애? 자기 몸도 바뀌어나가고 그리고 고장이 나게 돼있는 거라. 그럼 아프게 돼있는 거는 틀림없는 사실인데 안 아플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라.

 

그냥 그거 받아들여 버리고 '응, 아픈 것이다' 하고 받아들일 거 같으면 적어도 몸에 괴로움은 있을지언정 마음의 괴로움은 없다는 거라. 몸은 늙어갈지는 몰라도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해. 그런데 그걸 못하는 거라.

왜? 안 아플려고 하고 또 안 늙어 갈려고 하니까 그런 거라. 갈망한다는 거라. 자꾸 그걸 갖다가. 그게 원인이라는 거라. 그냥 받아들이면 돼. 부처님도 열반했는데 뭔 여러분들이 통뼈가 있다고 그걸 안 늙고, 병 안 들고, 안 죽을라고 해? 그냥 받아들여. 갈애 일으키지 말고.

이런 식으로 부처님이 바른 견해를 세우는 법들을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그걸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른 견해도 세워야 되는 거고, 바른말도 해야 되는 거고, 바르게 알아차림도 해야 되는 거고, 그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자꾸 따르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아, 내가 이것으로부터 벗어났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났구나. 늙음으로부터 벗어났구나. 실제로는 늙어가고 있고 실제로는 죽음에 이르는데도 전혀 그것이 나한테 영향을 못 미치는 거라. 영향을 못 미치면 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거라.

 

남이 아무리 내 앞에 맛있는 상을 차려줘도 내가 안 먹으면 그거는 내하고는 아무런 관계없는 거라. 내 것이 아니라는 거라. 내가 먹은 것도 아니고, 이게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거라. 내 앞에 죽음이 있고 내 앞에 늙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거 하고는 관계가 없을 거 같으면은 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버립니다.

 

자!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맨 처음 해야 되는 것이 이 깜맛사까따 냐나 라고 하는 것입니다. 뜻이 뭐라고요? 깜맛사까따 냐나가? 무슨 뜻이라? 깜마가 뭐라?

'깜맛사까따' '업을 자기 자신으로 한다.' 쉽게 말하면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다 받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지은 걸 내가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은 거는 내가 받는다는 거라.

 

자! 첫 번째 업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변할 수 없는 법칙이 있습니다.

업은 소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도 없습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업을 어떻게 소멸할 거라?

 

앞에 있는 초가 있으면 초 저거는 파라핀이 다 없어지고 불이 꺼지고 이럴 거 같으면 초의 기능은 못합니다. 그리고 파라핀이 다 닳고 심지가 다 타버리면 초는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업도 그와 같이 될까? 그렇게 없앨 수 있는 걸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업은 그럴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업은 어떠한 경우든지 소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단지 초의 파라핀이 있고 심지가 있고 촛불이 켜져 있다고 하더라도 이거 꺼도 이 전등불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큰 영향을 못 미칩니다. 우리를 밝혀주는 데는. 더 큰 전등불이 있을 경우에는 이것이 영향을 못 미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은 이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촛불은 그대로 켜져 있습니다. 단지 전등불이 더 강하니까 이것이 이걸 밝혀주는 영향을 그렇게 못한다는 거뿐이라.

 

아무리 착한 일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악한 일을 많이 할 거 같으면 착한 일이 드러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드러날려고 하더라도 이것에 가려가지고 영향을 못 미쳐. 반대로 악한 일 하더라도 착한 일을 많이 할 것 같으면 이것이 악한 일을 드러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있어. 그렇다고 해가지고 이것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기도를 많이 해가지고 좋은 일을 한다, 그러면 내가 지은 잘못들은 소멸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영향을 못 미치게끔 하는 것뿐인 것이지, 언젠가는 이게 조건이 되면 이게 터지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게 업의 법칙이라는 거라. 분명한 겁니다. 그거는 이생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다음생에도 영향을 미치는 거고, 언젠가는 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거라. 또는 지금 당장 영향을 미쳐가지고 결과가 드러나기도 한다는 거라. 그게 분명한 업의 법칙이라는 거라. 그거는 어떠한 경우든 업이 아무리 복잡하고 하더라도 변할 수 없는 법칙은 그겁니다.

그러니까 업을 쌓지 않으면 가장 좋은데, 여러분들이 지금은 깜맛사까따 냐나도 모르는데 업을 쌓지 않는 방법이 있다? 없어! 어떠한 경우도 없어요.

 

선과 악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이 여러분들은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할 일은 여러분들은 선한 일로써 선한 업을 지을려고 해야되는 것이지 악한 업을 지을려고 해서는 안되는 거라.

업이 자기 자신과 마찬가진데 자기 자신을 만들고 자기 자신을 윤회하게 하고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모든 것들을 관여를 하게끔 돼있는데, 왜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들을 왜 할려고 그러느냐는 거라.

깜맛사까따냐나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을 "업이 자기 자신이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를 얘기합니다. 그걸 첫 번째 지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왕 짓는 거, 이왕 업 짓는 거 그러면은 나는 선한 일로써 하겠다 하고 마음을 먹으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깜맛사까따 냐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손쉬운 방법.

첫 번째 나보다도 더 뛰어난 스승, 나보다도 더 훨씬 뛰어난 스님들 스승들 이런 분들한테 자꾸 가서 바른 법을 자꾸 들을려고 해야 됩니다.

부처님 말씀하고 관계없는 자꾸 거꾸로 된 것들을 들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바른 것들을 자꾸 들을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을 지속적으로 계속 해나가야 됩니다.

 

두 번째, 선한 일들 선한 행위 그리고 바른말 그리고 청정한 마음을 가지려고 하는 것.

그거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행위하는 것들도 선한 행위들을 해야 되고, 말하는 것들도 부드럽고 온화하고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얘기들을 해야 되고, 마음도 항상 고요하고 청정해지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되고.

그런 사람들은 뭐가 표가 나는지 알아요? 우선 주변에 있는 만나는 사람들이 나하고 비슷한 부류들을 만납니다. 나쁜 놈들이 없어. 그리고 엉뚱하게 놀기 좋아하고 노름하기 좋아하고 이런 사람들도 없어. 사람만 그럴 것 같애요? 내 주변에 내가 살고 있는 거주공간도 꼭 마찬가지라. 항상 보면 이렇게 정리정돈이 잘 돼있습니다. 막 이렇게 복잡하게 돼있다고 하더라도, 그거 보고 '아이고! 내가 이거 정신 사납다'는 생각은 안난다는 거라.

 

그다음 세 번째 깜맛사까따 냐나를 알기 위한 세 번째는, 오력을 자꾸 키우도록 해야 됩니다.

알아차림을 끊임없이 할려고 하고,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자꾸 노력을 할려고 하고, 또 선정을 자꾸 개발할려고 하고, 끊임없이 자꾸 바른 것들 바른 수행 바른 노력들을 자꾸 할려고 하고, 그래서 내가 조금 더 뭔가 행하고 하는 것들이 조금 더 지혜롭게 되기위해 자꾸 노력을 하고, 이 오력을 자꾸 키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오력이 균형이 맞아지도록 하꾸 해야 됩니다. 다 하기는 참 힘이 듭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갖춰야 될 것 믿음에 대한 확립! 이게 안 되면 다른 것들도 균형이 안맞아집니다. 확립하는 거 일순간에 딱 확립이 됩니다. 막 방황하고 찾아다니고 하더라도 일순간에 확립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한 확립을 딱 하고 나면 다른 것들은 순차적으로 풀려나갑니다.

오력의 힘을 키워야 되지만 이것이 균형 잡히는 것이 깨달음으로 나가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오력이 균형이 맞아지고 힘이 키워져야지만이 칠각지가 개발되게 됩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길은 그것은 끊임없이 개발해가지고 그것을 확립을 해나가야 되는데 오력이 안되면 이것이 안됩니다.

그래서 칠각지와 오력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아직은 여러분이 이해가 잘 안 되죠? 다음에 프린트물로 두 가지 관계에 대한 것들도 정리를 해드릴께요.

 

그다음에 네 번째, 마음이 진리를 탐구하려는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진리를 알려고 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뭐가 진리인 줄도 모르면은 그냥 남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내가 끊임없이 노력할 때 드러나집니다. 내가 그걸 쫓아간다 해서 그 진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진리는 그래서 드러나지게 됩니다. 내가 진리 따라 살아갈 때 그것은 드러나집니다. 진리를 못 찾았다, 그거는 그 사람 잘못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못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다섯 번째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선한 사람들 하고 가까이 있을려고 하고, 악한 사람들은 멀리 떨어질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에 선우가 전부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바른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사람, 나를 법으로 인도해 줄 수 있는 사람 가까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 그것과 떨어져서 나쁜 사람들하고 어울릴 것 같으면 그거는 점점 더 멀어져버립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이 업이라는 것들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됩니다. '아, 참 이게 겁나는 거구나.' 다른 거는 다 죽고 나서 내버리고 가는 거지만, 이거는 죽고 나서도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거라. 굉장히 무서운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은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을 보호할려고 더욱 노력을 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업을 지어야 될 것 같으면 나를 보호해 줄 수 있고 나를 더 나은 조건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업을 지을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이생에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해도 다음생을 바라볼 수는 있을 거 아니라.

깜맛사까따 냐나에 대한 얘기를 간단하게 했습니다.

한번 읽어보고 질문 있는 사람들은 다음에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