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물을 넘기 위한 힘 (20140610)
오늘은 "장애물을 넘기 위한 힘"이라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저번 일요일날도 스님들 모임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고, 내일 또 있고, 금요일날 또 있고, 좀 바쁜데 어떨 때는 ‘아, 이런 일이 안 만들어지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까지 들어요. 몸이 바빠지니까. 그리해도 일이 있으면 오라하면 가야되는 거고, 내가 무슨 힘이 있나. 오라하면 가고 그런 거지 뭐.
그런데 가끔씩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예를 들면 이사장 새로 바뀌면 나는 상가모임 안 나옵니다. 이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바꾸지 말아라고 사기치는 놈들도 있고 그래요.
또는 어떤 재가자들 같은 경우에는 뭔가를 배우러 왔으면 그걸 그냥 배우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자기가 자기의 판단으로 생각해가지고 맞을 거 같으면 기분 좋고, 자기 판단에 뭔가 좀 안 맞는 게 있다 할 거 같으면 금방 마음에서 화가 일어납니다. 얘기를 하면서 보이거든, 그럼 인제는 그뒤부터는 할 얘기가 없습니다. 얘기해줘 봐야 저사람 좋은 마음을 일으키게 해주지 못하는데 그럼 뭐하러 하겠어.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게 있었습니다. 특히 비구니 스님들이 출가를 하게 됐을 때, 부처님이 비구니 스님들을 출가를 안 시킬라고 했던 이유들 중에 하나가 가장 큰 게 뭐냐면 비구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세속생활에서 뭘 했든 간에 그냥 그걸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출가 생활을 쭉 해나가게 됩니다. 보통 동등하게, 세속에서 장관이었든 또 세속에서 남의 집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일단 출가를 하게 되면 동등하게 하게 되는데, 비구니 스님들은 그게 참 그렇게 힘들거든.
물론 그중에 마하빠자빠띠 비구니 스님 같은 경우에는 그런 생각 완전히 끊어내버립니다. 내가 부처님의 양모였다, 부처님을 길렀던 어머니였다, 그런 생각조차도 가지지 않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 결혼했던 야소다라 비구니 같은 경우에는 내가 부처님의 부인이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 생각을 못 끊는 거라. 아무리 질책을 받아도 그게 안 되는 거라.
그러다가 사끼야 라고 하는 비구니가 하나 출가를 했는데 하녀 생활을 하다가 왔는데 처음에는 그 사끼야가 일반 비구니 스님들하고 같이 어울리질 못했어요. 이렇게 앉아가지고 밥을 먹을 때도 항상 맨 저 구석자리에 똑 하녀 때 생활하고 마찬가지로 구석자리에 가장 옆에 가서 먹고 뭐를 하더라도 남에게 방해 안 되게끔 저 저쪽에 구석에 가있고 이렇게 하거든.
그러니 야소다라 입장에서는 '아이고, 쟤는 출가하고 나서도 똑같이 저런 생각을 품고 있구나' 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자기는 안 품고 있는 것처럼. 똑같이 그렇게 품고 있으면서. 그런데 어느날 사끼야가 아주 당당해지는 거라. 모임이 있으면 다른 사람하고 같이 똑 동일하게 앉아있고 밥을 먹어도 동일하게 앉아서 조용하게 먹거든. 갑자기 사람이 바뀌어놓으니까 물어봅니다. 왜 이렇게 달라졌느냐? 하니까,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미소짓기만 합니다.
그때 부처님이 와서 야소다라 비구에게 물어봅니다. 저 사끼야 비구니가 왜 저렇게 달라진 것 같이 보이느냐? 하고 물어보니까 아직도 야소다라는 그걸 못 깨닫는 거라. 부처님이 더 좀 잘 가르쳐줬겠죠. 나한테는 가르쳐주지도 안 하드만 사끼야 한테는 잘 가르쳐줬겠죠. 다른 핑계들을 대는 거라. 자기가 뭐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안 하고 다른 핑계를 계속 대는 거라. 그러면서 뭐 좀 더 좋은 조건을 만들어줬다 어쨌다 이런 얘기들을 합니다.
그때 인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너는 장애물을 넘기 위해서는 어떻게 넘어야 되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 여기 수행자는 앉아서 좌선만하면 조불어. 딱 앉아서 10분도 안가. 앉으면 딱 조불어. 그럼 조불지마 그러면 탁 깼다가 좀 있으면 또 조불어. 뭐라 할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이. 쉽게 말하면 졸음이 내 수행하는데 장애물이 되는 거라.
그러면은 수행을 잘하는 사람일 거 같으면 '아, 이게 장애물이다' 하고 먼저 판단을 해야 된다는 거라. '아, 졸음이 오고 있다' 그러면 졸음을 몰아내기 위해서 어떤어떤 방법을 써야 된다는 것을 경을 통해서든 아니면 수행을 통해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그 졸음을 몰아낼려고 해야만이 졸음이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야 앉아있어도 "조불지마" 해도 그래도 한 삼십분 안 조불고 있어지는데 조불지마 하고 하는 순간 또 조불어. 그걸 장애물이라고 생각을 못하는 거라. 이게 나를 좀 더 향상된 방향으로 이끌어준다는 생각을 이걸 극복해서 넘어서야만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건데 생각을 못하는 거라.
뭐 여러분들은 안 그럴 거 같애요? 씨익 씨익 웃지 말아요. 똑같습니다. 자기가 다니고 오래도록 있어놓으니까 만만하니까 그런 얘기해도 별로 기분 안 나빠할 거라 보고 얘기를 하는 거라.
그걸 한번 가만히 한번 봅시다.
아까 야소다라와 사끼야 비구니가 그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 그것도 하나의 장애물입니다. 어쨌든 사끼야도 내가 하녀였다는 생각 때문에 자꾸 구석자리에 있게 되고 피하게 되고, 야소다라도 내가 부처님의 부인이었다는 생각 때문에.
모임의 스님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조건이 달라지는 것들을 가지고 '그 조건이 달라지면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하고 판단들을 합니다. 또는 법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딱 가지고 있으면서 그 생각이 맞으면 좋고 틀리면 화를 내게 됩니다. 그건 사실은 그것들이 앞에 얘기한 장애물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거라. 왜 스스로 자기가 그걸 만들고 있느냐는 거라. 조건이라는 걸 가지고 있지 않으면은 그 얘기해 준 것을 가지고 좋고 싫다는 마음을 일으키지도 않는 거고 조건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 거 같으면 누가 이사장이 되었든 누가 어떤 조건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할 일 하게 되는 거라. 스님들이 모임이 있으면 모임에 그냥 가는 거고. 그런데 자기 스스로 그걸 자꾸 만들어서 그럽니다.
다른 장애물들도 많아서 그것에 걸려갖고 만날 넘지못하고 있는 판에 자기 스스로도 더 만들고 있는 거라. 졸음이라고 하는 것도 외부적인 장애입니다. 또는 내가 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우는 것도 하나의 장애, 또 성냄이 일어나는 것도 하나의 장애, 이런 장애들이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일어나는데 그거 넘기도 힘드는 판에 없는 장애조차도 자기가 만들고 있는 거라.
아까 졸음의 얘기를 들었으니까 졸음의 예를 들어서 그 '장애를 넘는 것들'에 대한 걸 한번 봅시다. 아까 뭐라고 했어요?
졸음이 오면 졸음이 온다고 일단 알아야 뭔가 대책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몰라 버리면 방법이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졸음이라는 걸 인식을 못하고 졸음이 온다는 사실을 모르면 그걸 극복할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게 부처님이 하신 수행이다 하는 걸 모르면은 그걸 따라갈 방법이 없습니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하는 걸 알아야만이 그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길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졸음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졸음이 온다는 걸 알 것 같으면 그 졸음을 몰아내기 위해서 이런이런 방법들을 쓰게 됩니다. 눈을 깜박이든 아니면 졸음이 온다고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든 그렇지 않으면 정 안되면 경행을 하든, 그러다가 정 몸이 졸음을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이 못된다 할 것 같으면 마음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땐 잠깐 옆으로 누워가지고 잠을 청해야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 방법들은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하게끔 됩니다. 그러다 보면 다음에 오는 졸음들은 크게 영향을 안 미칩니다. 어떨 때는 또 졸음에 떨어지기도 하지만 금방 그렇게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도 시간을 조금 더 지체를 하다가 졸음에 떨어지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졸음을 분명하게 볼 것 같으면 아. 이게 참 빠르게 변하고 있는 현상일 뿐이구나 하고 알게 되면 졸음을 극복해버립니다. 그뒤부터는 보면 수행을 할 때 졸음 하고는 싸우지 않는다는 거라. 장애물을 하나 넘었다는 거라.
먼저 졸음이 온다고 아는 것입니다. 졸음을 예로 들었는데 쉽게 말하면 일반적으로 수행할 때 여러분들 장애들이 열 가지 장애들이 있습니다. 그 열 가지 장애들도 똑 마찬가집니다. 똑같은 경우들입니다.
먼저 졸음이라고 알 수 있는 것, 그거는 뭐냐면 내가 마음이 그 대상을 알아차릴 만큼 안정돼있지 않으면 그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마음이 안정되고 침착해 있는 것이 선결 요건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아, 이게 졸음이구나 하고 분명하게 안다는 것은 그 졸음은 나의 수행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럼 졸음을 극복해야 된다는 생각이, 졸음을 막아내야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하게끔 됩니다. 그게 '확신'입니다.
'법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으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 대상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대상이 극복해야 될 대상인지 아니면 더 증장해야 될 대상인지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확신이 있을 거 같으면 극복해야 될 대상일 거 같으면 없애버려야 되는 것이고, 증장해야 될 대상일 것 같으면 더 노력해야 될 길들을 찾게끔 된다는 거라.
그 법이 소중한 걸 알 것 같으면 그 법을 더욱 더 공부할려고 하는 거라.
그 확신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마나시까라(manasikāra)' 라고 하는 '마음이 어떤 대상으로 향하는 것', 그래서 나쁜 대상으로 향해버리면 나쁜 마음이 일어날 것이고 좋은 대상으로 마음이 향할 것 같으면 좋은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 아요니소 마나시까라(ayoniso manasikāra)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마음이 좋은 곳으로 향하도록 해주는 것'을 '요니소 마나시까라' 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좋은 곳으로 향할 수 있게끔 마음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졸음을 몰아내야 되겠다는 확신이 들면 그걸 하기 위해서 내가 끊임없이 그걸 알아차리는 마음을 끊임없이 일어나게끔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경을 반복해서 독송하는 마음을 계속적으로 일으키든지, 졸음을 몰아내질 때까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경행을 하면 졸음을 극복하겠다 싶으면 경행을 계속할려는 마음을 일으킨다든지, 이게 반복적으로 돼야만이 그 뒤부터는 졸음이 적어집니다.
그런데 안 해. 처음부터 이게 졸음이라는 마음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졸음을 몰아내야 되겠다는 생각도 안 하고, 그러니 졸음이 오면 그냥 빠지는 거라. 또 깜빡하고 '어! 졸음이 왔네' 하고는 알지만 그걸 몰아내야 되는 대상이라는 생각을 안 하니까 또 좀 있으면 또 졸리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어떨 때는 아이고, 저렇게까지 인식을 못할 거 같으면 내가 가가지고 고마 일으켜 세워갖고 손잡고 경행을 시키면 그래도 졸지는 않을 건데.
물론 졸음이 다 나쁜 건 아닙니다. 어떨 때는 발란스가 깨졌을 때는 그 발란스를 메꿔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그거보다 더 나쁜 거는 앉아서 수행도 안 하면서 '망상'만 하고 있다는 거라. 머리만 복잡해지고 수행하고 나도 오히려 더 힘들고 피곤해. 망상만 계속하고 있으니까. 차라리 그것 보다는 한 시간 동안 조불면 발란스라도 맞춰지니까 오히려 그것보다 낫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거는 이익이 없는 거라.
그것이 장애물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극복해야 될 대상인 줄을 모르는 거라.
지혜라고 하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에 내가 일으키는 생각들이 뭘 일으켜야 되는가 하는 것들을 알고 거기에 맞게끔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신통을 부리기 위한 마음을 일으킨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들을 지혜라고 얘길하지 않습니다.
아, 지금 내가 여기서는 고요한 마음을 일으켜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으면 그 고요한 마음을 끊임없이 계속 일으켜주는 노력을 해나가는 것, 그걸 보통 '칸띠(khanti)'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칸띠(khanti)'는 '지혜'라고 그럽니다.
신통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면 삼매에 드는 것, 사마디 이런 것들을 지혜라고 얘기 안 한다는 거라.
마음이 반드시 지금 대상이 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리고 그 알아차린 대상들을 가지고 이게 내가 어떤 일을 해야 될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알고 나면 그것들을 실행하는 힘들을 가지는 것. 이 단계들을 자꾸 밟아 나가도록 해야 만이 그것을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맨 처음에 얘기한 것들을 보통 경전에서는 칸띠(khanti)라고 그렇게 용어를 씁니다.
'칸띠'라고 하는 것들은 한국말로 '인내'라고 하는데 참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으면 그 분노를 잠재워서 평온한 마음이 유지해주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나가는 것, 그래서 평온한 마음이 유지되도록 해주는 것, 이것을 '칸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참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에 대해서 고요한 마음을 유지해 주는 힘들을 '칸띠'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다리가 아프다. 그걸 그냥 '끄응' 하면서 참아내는 것 이걸 인내라고 안 한다는 거라. 다리가 아프면 다리가 아픈 것을 분명하게 보고 '다리가 아픔' '다리가 아픔' '다리가 아픔' 하면서 계속적으로 관찰하다 보면 다리가 아프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다리가 안 아프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가지는 것, 그래서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해 나가는 것 이걸 '인내'라고 합니다.
어떤 대상이든 그 대상을 피할려고도 하지 않고 그 장애물을 건너가지 않고 딱 앞에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거라. 그걸 인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인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못 미치게끔 만들어줍니다.
다리 아프면 다리가 아프다고 분명하게 알고 그래서 '다리가 아픔' 아니면 '다리가 쑤심' '쑤심'하고 분명하게 알아서 한참 동안 관찰하다 보면 다리 쑤시는 것이 스르르 하게 변해갑니다. 그걸 빠르게 쑤시는 것이 쑤시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따가움도 있고 묵직한 느낌도 있고 아주 고통스러운 통증도 있고 아, 이게 자꾸 바뀌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에 둔탁해지는 느낌도 있고, 그럼 어느 순간에 이것은 뭔가 바람이 확 불듯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어갑니다. 이 다리의 아픔은 극복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 뒤로는 이 다리가 아픈 것이 실제로는 아픈 느낌이 있더라도 '다리가 아픔' 하고 관찰만 하더라도 그 현상들이 그대로 보여버립니다. 그러면 금방 다리 아픈 것이 사라져버립니다. 장애물을 넘어서버립니다.
일어나는 대상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그것을 알고 그 현상들이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을 갖다가 보게 됨으로 인해서 그 대상을 넘어서버리는 겁니다. 이걸 '칸띠'라고 그럽니다. 그마음을 지속해주는 것.
그래서 이런 대상 저런 대상 어떤 대상이 나타나더라도 그 대상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이 항상 고요한 상태로써, 그리고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으면 수행하는 마음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또는 여러 가지 공덕 짓고 있으면 공덕 짓는 마음들이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들, 이걸 '칸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대상을 알지 못하면 대상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칸띠만 있어가지고는 문제 해결을 못합니다. 대상을 알면 대상이 극복이 돼버립니다. 그러면은 점점 더 일어나는 대상은 적어져 버립니다. 그럼 마음은 오롯이 수행할 거 같죠? 호흡을 관찰하고 있으면 호흡을 오롯이 관찰할 것 같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관찰을 안 합니다.
그 뒤부터는 수행하는 힘이 딱 그와 비례해서 떨어져버립니다. 그러니까 일어나는 대상들도 외부적인 대상이나 내부적인 대상들도 없고 호흡을 순일하게 관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힘이 떨어져버리기 때문에 호흡을 관찰하고 있어도 호흡이 변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냥 알고 있을 뿐입니다. 한 시간을 하든 두 시간을 하든 하루종일을 하든 그냥 그 상태로 하는 거라. 물론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순일해져서 하나의 대상만 오롯이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럴 것 같으면 그렇게 하나의 대상만 알 것 같으면 거기에 따라서 또 뭔가의 현상들이 일어나게 되고 그것을 알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대상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변하는 현상들을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분명하게 알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는 해야 되는데 두 가지 다를 못하고 있는 거라.
그속에서 니밋따가 일어나지도 않고 그래서 선정삼매에 들지도 못하고 또는 그 대상들에 대해서 무상·고·무아의 성품들을 분명하게 철견해서 알지도 못하고, 그냥 하루종일 그 대상만 그냥.
외부적인 대상이나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대상들이 장애물이 없을 거 같으면 수행하는 힘이 딱 떨어져버리는 거라. 그러니 그냥 대상만 아는 수준이 되는 거라.
보통 수행을 바로 시작하는 사람들, 또는 법을 들을려고 하지 않고 수행만 자꾸 하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러니 법을 들을 자리나 아니면 경전을 읽는 것이 재미가 없어.
법이 자기 자신에게서 딱 확립이 돼서 서있지 않으면 그 대상을 순일하게 보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 뿐이라는 거라. 흔들림이 없게끔 딱 서있어야 되는데 그래서 지금 현재 대상이 오롯이 보이고 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고 있다 할 것 같으면 내가 해야 될 방향이 분명하게 서야 됩니다.
들이쉬는 호흡에서 그리고 내쉬는 호흡에서 무상한 성품이 보이도록 마음이 가야 되는데 거기 가질 못하는 거라. 또는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데서 오롯하게 그것만 하고 있을 것 같으면 삼매에 들어야 되는데 삼매에 들지를 못하는 거라. 또는 삼매에 들어도 내가 언제든지 삼매를 깰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도 못하는 거라.
법이 확립이 안 돼서 그렇습니다.
법에 대한 확립은 다른 길로써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이지만은, 법에 대한 확립은 어떠한 경우든지 법을 잘 듣고 법을 잘 이해하는 능력들을 키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거기에 딱 기둥으로써 박혀버려야 됩니다.
다른 것들은 들으면 "아, 이것은 내가 따라가야 될 길이고, 그리고 이것은 따라가지 않아야 될 길이다" 하는 것이 분명하게 딱 서버립니다.
누가 아무리 윤회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누가 아무리 지금 현재 열심히 잘 살기만 하면 된다. 죽고 나서 니가 뭐가 되는지 어떻게 알 것이냐, 그냥 지금 현재 선한 마음하고 복짓고 열심히 잘 살아라. 그리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법에 대한 확립이 돼있기 때문에!
그것은 수행에서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담마 하소'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법에 대해서 잘 이해된 사람들'.
테라와다 불교신자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될 열 가지 중에서 맨 처음이 '담마하소' 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불교신자들은 처음부터 바로 수행하는 법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일주일에 한번 되면 그냥 절에 갑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스님들 아침에 탁발 나오면 그거 공양 올릴려고 그럽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스님들한테 법문 청해 듣고, 오계 받아 지니고 그것도 자꾸 되새길려고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도 그러면서 계속 법에 대한 확립들을 해나갑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어느 순간에 '아, 내가 수행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탁 일어납니다. 그때 인제 수행에 뛰어드는 거라.
그래서 장애물을 넘기 위해서 두 번째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 법에 대한 확신들을 자꾸 가지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내가 아무리 법에 대한 확립도 열심히 잘했다고 하더라도 장애물을 완전하게 극복하기에는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지금 살아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마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마음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수행하고 있으면 수행대상으로 향할 것이고, 뭔가를 보고 있으면 보는 대상으로 향할 것이고, 끊임없이 마음은 그렇게 뭔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은 죽기 전에는 그 마음이 항상 선한 쪽으로 만들어가야 됩니다. 조불지마 이.
죽을 때까지 항상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나쁜 마음을 쉽게 일으키질 못합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아, 내가 저사람을 위해서 뭘 해줘야 되겠는가 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사람들, 그 사람도 꼭 마찬가지로 나쁜 마음이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배려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사람들도 나쁜 마음이 쉽게 침투 해오지를 못합니다.
끊임없이 존경할 분들에게 존경의 마음들을 일으키는 것 그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나쁜 마음으로 쉽게 물들지는 않습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내가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인해서 다른 것들의 도움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 항상 고마운 마음들을 가지고 그 은혜들을 항상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도 악한 마음들을 일으키지를 않습니다.
이게 세 번째 여러분들이 갖추어야 될 것들입니다.
마음이 선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도록, 그리고 그 마음이 항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자애에 대해서 항상하든, 아니면 남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이 일어나든, 너그러운 마음들이 일어나든, 아니면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든, 아니면 존경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든, 어떤 식으로든 그 마음들 중에 한두개씩은 항상 이 마음속에서 일으켜나가야 됩니다.
자애의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 대상을 관찰할 것 같으면 대상을 떨어뜨려서 보게 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연민심의 마음을 가지고서 대상을 봐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연민심의 마음이 있고, 그 대상을 보는 마음이 있고 그 두 가지를 하라는 게 아닙니다. 항상 자애의 마음이나 연민심이 항상 밑바탕이 돼있는 상태에서 그 대상을 보라는 겁니다. 그래야만이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떨어뜨려서 볼 수 있게끔 됩니다.
순수하게 대상으로써만 인지를 하게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 대상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삼매에 드는 대상으로써 보이게도 됩니다.
그게 장애물을 넘는 힘들입니다.
이 훈련들이 끊임없이 반복돼야만이 장애물들을 넘을 수가 있습니다.
장애물들은 많이 있습니다. 나를 내세우는 것들, 성내는 마음들, 악한 마음들, 남을 비하하는 마음들, 또는 내가 삼매에 들려고 하는 마음들, 무색계에 들려고 하는 마음들, 삼매에 들고 싶다 해서 삼매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삼매에 들도록 바른 방법으로 노력만 하면 삼매에 듭니다.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보려고 하는 마음으로써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방법으로 무상·고·무아를 볼 수 있게끔 대상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각각의 장애물들은 수행에서 굉장히 많이 일어납니다.
의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졸음, 망상, 여러 가지들은 그것들은 반드시 내가 넘어서야 될 장애물이라고 인식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장애물을 넘기 위해서 어떤 힘들을 내가 키워야 된다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자기가 칸띠의 힘이 부족하면 칸띠의 힘을 키워줘야 되는 것이고, 마나시까라의 힘이 부족하면 마나시까라의 힘을 키워줘야 되는 것이고, 자기에게 부족한 것들이 뭔지를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더욱 더 증장시켜서 그 세 가지들이 고루 키워질 때 장애물은 넘기 수월해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아, 장애물은 하나의 좋은 대상일 뿐이지 그것이 나에게는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고 분명하게 알게끔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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