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붓다의 길따라 선원 신년 합동 법회 (20190223)
(떼짓사라 스님, 빤냐완따 스님의 법문에 이어서... 27:00~~ 이후부터 녹취했습니다.)
저번 목요일날 사람들이 와서 탁발을 올리고 했어요. 그때 처음 뵙는 분이 따라와서, 처음 만난 스님께 공양을 올리겠다 해가지고 준비를 해가지고 왔더라고. 그래서 마침 떼짓사라 스님도 같이 있고 해서 둘이서 맛있게 공양먹고 나누고 그렇게 했는데,
왜 처음 만난 스님한테 공양 올리겠다 하는 마음을 먹었냐 하면 원래 준비한 것들을 자신이 소속해있는 스님한테 드릴려고 했는데, 그 스님이 안 받을라 한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래서 준비는 했는데 안 받으니까 화가 이만큼 나가지고 이렇게 왔어. 그래서 그 이후로 처음 보는 스님한테 올리겠다 했는데, 마침 우리가 거기에 해당이 돼가지고 맛있게 먹었는데.
그리고 또 하나가 뭐냐면 와서 보니까 참 정리가 잘 돼있는데, 여기 선원 자체에 여성분들이 좀 적으니까 남자들이 썼으니까 얼마나 쓰레기통을 꽉꽉 재여 놓았겠어? 쓰레기통마다 이만큼씩 꽉꽉 재여져 있어. 그래서 그걸 싹 비워가지고 밖에 놔 놓았는데, 어떤 거는 쓰레기차가 와서 가져갔고, 어떤 거는 남아있고 그렇더라고.
쓰레기차가 가져간 거는 어디로 가져갔을까? 여러분 신경 안 쓰죠?
왜? 나하고는 관계없는 거기 때문에!
이미 나는 정당하게 쓰레기를 버렸고, 그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 하는 것은 나하고는 관계없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할 필요도 없고, 나에게 영향 미치는 것도 전혀 없습니다.
그게 견해라면 어떻게 될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인제 나에게 전혀 관계없는 것이 돼버릴 것 같으면 얼마나 홀가분할까? 신경 쓸 필요도 없는데.
'왜 저 스님은 나의 공양을 안 받았을까?' 그래서 화가 일어난다든지 그거로 인해가지고 또 다른 견해, '처음 만난 스님한테 내가 이 공양물 드려야지', 스님 안 만나면 우짤낀데? 그럼 또 뭔가 다른 견해를 내세우고.
쓰레기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참,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들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버리면 얼마나 조금 더 편안할까?
누군가 나를 이뻐해주지 않는다, 나를 대접해주지 않는다, 할 것 같으면 "내가 누군데" 하는 견해! 또는 누군가가 뭔가 있어가지고 화가 났다, 그럼 그 화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 그런 견해가 없으면 화가 일어난 것만 관찰하더라도 이미 그 화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화가 내가 만질 수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게 뭐냐면 오염원 중에서 '잠재적인 오염원, 아누사야 낄레사(anusaya kiles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누구든지 그렇게 오염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쓰레기통이 차면 찰수록 그것은 많이 오염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견해들을 버린다든지, 아니면 견해를 버리지는 못해도 적어도 "내 것만이 정답이야" 하는 견해는 바꿀 수는 있어야 되는데, 바꿀 수 있을까?
부처님이 출가하고 나서는 기존에 있던 수행법들이 최고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6년간 쭉 따라갔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본인이 스스로 해결을 해요. 그러면서 그 견해를 바꿉니다.
여러분이 수행을 하다 보면은 수행이 잘 될 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대상과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만이 오롯하게 있어가지고 그것만 분명하게 보여집니다. 지금 현재는 다른 것이 드러나지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잠재되어 있는 것이 안 드러난다고 보장을 못합니다.
다르게 설명하면 수행을 안 하는 사람이라도 화가 일어나면 '참아야지' 하면서 혀를 꽉 깨물고 참아서 화가 안 일어나게끔 합니다. 여러분이 수행 잘하고 있다는 것이 그와 마찬가집니다. 지금 드러나도록 하지 않는 것뿐이지 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거라. 쓰레기가 나하고 관계없는 상태가 돼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이 하신 수행법을 그대로 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6년간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결국은 잠재되어 있는 것까지는 제거를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제거를 했죠?
선정삼매에 들어서 1선정에서 뭘 제거하고, 2선정에서 뭘 제거하고 합니다.
화, 성냄이나 탐욕이나 아니면 명예나 망상이나 이런 거 안 일어나게 하는 것들을 할려고 하지 말고, 그것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전혀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아, 이게 변하는 거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변하는 걸 보면 이것은 내 어디에도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것을 관찰하는 순간 그것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 인식이 딱 되면 '이것은 내 것은 아니다' 하는 사실을 압니다.
쓰레기를 모아서 버리고 나면 그것이 어디로 가든지, 쓰레기는 어딘가에 또 가 있겠죠. 이미 그건 내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라. 그럼 나는 버린 것으로 인해가지고 홀가분함이 있고,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게 됩니다.
선정에 들든 그렇지 않으면 위빳사나 수행에서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든 그 대상에서 무상한 성품을 분명하게 봐가지고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탁 없어져 버리면 견해가 바뀌어버립니다.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그런 부분들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내 것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나는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준비를 했는데, 너는 왜 안 받느냐' 하는 생각, 그것으로 인해서 화는 내가 꾹 참아가지고 화를 일으키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생각에 매여 있으면 또 다른 방법들을 모색한다는 거라.
1선정에 들고 나면 대부분 하는 것이 1선정에서 자유롭게 자재하게 될 것 같으면 어떠한 마음이 일어나는지를 분명하게 봅니다.
화가 일어나면 화가 일어난다고 알고,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알아차린다는 마음이 분명히 일어나고, 마음이 강하게 어느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하면 그 기울어지는 마음을 알고, 뭔가 내가 의도가 있을 거 같으면 의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의도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때는 대상에 마음이 기울어졌다는 마음은 없습니다. 의도가 일어났다는 것뿐입니다. 실제 의도가 일어난 거하고 의도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하고는 또 다른 마음입니다. 앞에 걸 버리지 않으면 그것들을 분명하게 볼 수가 없습니다.
주석서에서는 물론 89가지 아니면 34가지 마음을 분명하게 본다고 하지만, 대표적인 것들을 보면 됩니다.
여러분들 수행하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것들, 망상, 고통·통증, 성냄, 뭔가 할려고 하는 욕심부리는 것, 그리고 하기 싫어하는 게을러지는 마음, 이런 5가지만 분명히 보더라도 성공을 한 겁니다.
그걸 분명하게 보는 순간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됩니다. 성품이 사라지는 것만 보더라도 그 사람은 그 수행에서는 성공을 한 겁니다.
선정에 들어도 선정에 든 마음에서 나오고 나면은 그렇게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더라도 그 대상이 변하는 것이 보이면 바로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볼 수가 있게 됩니다. 있게 됩니다.
성자와 범부의 차이는 바로 그 한 장 차이입니다. 그걸 봤을 때 '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구나' 하는 집착하는 마음이 탁 떨어져나가 버리면은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그 견해가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내가 성냄이 안 일어나고 욕심이 안 일어나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또 그것을 관찰함으로 인해가지고 사라지는 것이 보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아누사야 낄레사(anusaya kilesa) 같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아까 빤냐완따 스님이 지은 거는 반드시 결과가 있다고 그랬죠? 여러분이 지은 것이 지금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을 것들을 지었다고 누가 보장을 합니까?
그런데 그 보장을 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순간입니다! 유신견이 떨어져 나가버리고 나서는 다시는 내가 악한 행위를 짓지 않게 됩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없게 됩니다.
견해가 바뀌는 것도 이 순간에 견해가 바뀌어버립니다. "내 것이 옳다, 나의 세계는 이러이러 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길을 가야 된다", 그럴 게 어딨어 범부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스님이라 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이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목요일날 우리는 공양을 맛있게 먹고 용돈도 받고 했지만, 그분은 과연 가면서 어떤 마음으로 갔을까? 과연 자신의 마음을 바꾸어가지고 갔을까? 하는 겁니다. 공양 올렸다는 기쁜 마음으로 가기는 하겠죠. 그런데 또 다른 견해가 또 생겨요. 여러분이 조금 더 행복해지고 지금 이생에서 그래도 악업을 짓지 않고, 또 다음생에서 사악처에 빠지지 않는 길은 바로 그런 견해를 바꾸는 것들입니다.
부처님은 딱 그 순간에 자신의 견해가 틀렸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견해가 싹 바뀌어버립니다.
다툼이 많은 곳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지금 현재 내가 그러한 상태에 있기 전에는 시시비비를 가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그래도 여기 왔으니까 조금씩 버리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지혜라는 것은 그러한 순간에 일어나집니다.
지혜의 조건을 언젠가 세 단계로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이 확립돼 있어야 되는 것, 대상이 있어야 됩니다.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마음이 없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지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띠하고 있으면 사띠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행하고 있으면 행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알 동안에는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악한 마음은 바로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됩니다. 그걸 아왓티따(avatthita) 라고 그럽니다. 그걸 먼저 세워야 됩니다.
경전에 그런 얘기 많이 있죠? "사띠를 전면에 확립하라."
눈앞에 여기에다가 사띠를 세워두라는 것이 아니고, 지금 있는 대상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탁 세워가지고 확립하듯이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그걸 알 동안에는 다른 것이 없게 됩니다. 선한 마음 사띠가 있는 마음에서는 다른 어떠한 불선한 마음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훈련들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강제적으로라도 명칭을 붙이든지, 아니면 지금 현재 어떠한 마음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아, 이것도 변해가는구나' 하는 사실로 알든지 어떠한 방법을 쓰든지 간에 대상을 분명하게 확립해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다음이 바른 담마-삿담마를 자꾸 듣고 이해하고 자기 것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적어도 "아, 이것은 부처님이 하지 마라 한 것인데", "아, 이거는 더욱 열심히 하라 한 건데" 그거는 알고 있어야 될 거 아니라? 짬뽕이 돼가지고 이게 부처님이 말한 건지, 그날 목요일 날도 그랬습니다. 뭐뭐 이렇게 얘기하는데, 개차법이 어쩌고, 그건 대승에서 얘기하는 건데 본인은 몰라. 그게 바른 건지 안 바른 건지조차 구분을 못하는 거라. 적어도 그거는 바르게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바른 스승이 있고, 바른 담마가 있으면 자주 가서 듣고, 자주 그것을 자기가 실천해가지고 자기 것이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이 2가지가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바르게 자신이 나아갈 길이 확립이 됩니다. 믿음이 확립이 됩니다.
붓다·담마·상가 그리고 업의 법칙,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철썩 같이 믿게 되는 거라.
그러한 상태가 됐을 때 지혜는 일어납니다. 지혜는 그냥 불현듯이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유신견이라고 하는 지혜가 일어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러한 것들을 여러분들이 꾸준하게 노력을 해와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에서 그것이 분명하게 확립됐을 때 유신견이 탁 떨어지는 것이 보여집니다. 사띠를 해서 대상이 분명하게 변하고 무상한 성품이 보이고, 그 사띠를 알아차리는 것이 부처님이 얘기한 방법대로 내가 알아차리고 있을 경우에 '아, 이게 진짜 진리구나' 하는 것이 탁 드러나질 때 견해는 확립이 되고, 유신견은 떨어져나가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쓸데없는 생각, 쓸데없는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지 말고 빨리 그 울타리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은 쓰레기통에 가득 들어있는 오염물들이 많은 거와 마찬가지 입니다. 그걸 빨리 조금씩이라도, 오늘 이만큼 버려내고, 내일은 저만큼 버려내고 하듯이 자꾸 버릴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버린다는 것은 그걸 그냥 던져 없앤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시는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어떠한 마음들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얘기하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 > 2018~2022 일상수행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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