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줄 수 있는 사람이 친구를 만들 수 있다. (20190302)

담마마-마까 2021. 11. 8. 23:06

https://youtu.be/ubEi5mPrhDw

* 줄 수 있는 사람이 친구를 만들 수 있다. (20190302)

(떼짓사라 스님의 법문에 이어서 10:00 ~~ 이후부터 녹취했습니다.)

 

호흡 한 번 쉬어보실래요? 들이쉬고 내쉬고, 눈을 감고 들이쉬고 내쉬고...

자! 눈 뜨고,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같습니까? 다르죠!

들이쉬는 숨을 알아차릴 때 내쉬는 숨을 알았습니까?

아니면 내쉬는 숨을 알아차릴 때 들이쉬는 숨을 알았습니까? 몰랐죠!

숨이 변화하고 있다는 걸 여러분들은 알고 있습니다.

보통 이걸 무상하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런 분이 아침에 한 일곱시 반 돼서 왔었어요.

“스님, 누구하고 관계들에서 괴롭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답을 한 것이 뭐냐면 “무상한 것은 알고 있는가?” 하니까 무상한 줄은 안대. 자기 생각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다른 사람 생각이나 말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어떨 때는 좋은 마음도 있을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싫어하는 마음 나쁜 마음들도 있을 수 있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줄은 알고 있는데, 단지 그것뿐이야.

 

무상을 알고 깨닫는다는 것은 변화를 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얘기합니다. 자기 삶으로 받아들였으면 변화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없어야 되는데, 계속 그게 생깁니다.

 

다른 비유를 한번 들어볼게요. 우리 선원에 오다 보면 전봇대들이 쭉 놓여져 있습니다. 저 앞에는 더 큰 볼트가 흐르고 있겠죠? 그게 전봇대를 타고 오면서 전압이 낮춰지고 또 여기 선원에 올 때는 또 마지막 전봇대에서 더 낮춰져갖고 들어와집니다. 제어장치가 없으면 아마 여기서는 감당하기가 힘들 겁니다. 그런데 그 제어장치 전봇대 위에 있는 것은 대부분은 보면 피뢰침이 설치가 돼있습니다. 제어는 해주는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상황들은 언제든지 있을 수가 있다는 거라. 번개가 치고, 벼락이 쳐서 그 전봇대를 태울 수가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사띠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는데, 그래서 남이 하는 얘기를 그대로 듣고 사띠 하면서 하니까, 그걸 화나 또는 싫어하는 마음이나 이런 걸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그냥 받아들여서 듣고는 있어가지고 자기는 화를 일으키지는 않는데, 관계는 보면 그렇게 썩 좋은 관계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거든.

뭐가 문제일까? 그 전봇대는 왜 피뢰침을 설치를 해둘까?

 

여러분이 사띠만 하고 있을 거 같으면 전혀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사띠는 전압을 바꿔주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여기서는 일정하게 이마만큼 필요하다 해서 그것들을 만들어 준 겁니다. 그런데도 그것으로도 부족해가지고 피뢰침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 됐을 때 그것을 제어해주고 할 수 있는 것은 피뢰침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사띠를 쭉 하면서 살아갑니다. 적어도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도 여러 가지 문제들에서 항상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피뢰침도 내가 공부를 해야 될 필요성이 있고, 또 이런 법문을 들으면서 생활에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것들도 필요하고, 또 자기 자신이 배우고 실천한 것들을 실제로 생활에서 유용하게 적용을 해보는 그런 것들도 필요하고, 그런 것들이 바로 피뢰침과 같습니다.

 

사람의 관계들에서 여러분들이 항상 유념해두어야 될 것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어느 천신이 부처님한테 와서 물어봅니다.

어떻게 하면 친구를 만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친구를 만들 수 있어요? 자기가 먼저 친구 만들려는 생각이 있어야 될 거 아니라. 그럼 그 친구한테 “야, 너 나하고 친구하자” 하고 좋은 말로 해야 친구가 되든지 말든지 하는데, 그냥 강제적으로 친구하자 해가지고 친구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친구하고 뭔가 서로 협력해가지고 자기가 원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양보할 건 양보하고 해가지고 같은 일을 해나가고 해서 그 속에서 좀 더 행복하고 기쁨이 일어나야만이 친구로서 계속 유지가 돼나갑니다.

 

부처님이 한마디로 그걸 정의를 합니다.

줄 수 있는 사람이 친구를 만들 수 있다.”

 

참 현대사회에서는 힘드는 부분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라고 합니다. 줬으면 반드시 뭔가를 받아야 됩니다. 업의 논리와 같죠? 지었으면 반드시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기브 앤 리시브(give and receive) 라고 그럽니다. 줬으면 그것이 내가 받을 것이 있든지 없든지 그냥 받아들이는 겁니다. 친구가 내가 뭔가를 줬는데 나한테 주는 것이 없으면 그거 그냥 받아들여야 되는 거라. “너는 왜 안 줬노?” 할 것 같으면 친구가 안 된다는 거라. “난 너한테 이만큼 해줬는데, 너는 왜 안 해주느냐?” 할 것 같으면 그럼 불교적으로 친구가 성립되기 위한 첫째 조건이 아예 안 돼버리는 거라.

 

사람의 관계에서 좀 더 원활하고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첫째 조건이 "내 것을 먼저 주어라." 하고 부처님은 얘기합니다.

줘야만이 친구가 만들어진다는 거라. 좋은 사람이 내 옆에 생겨날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한 번 실험을 해보십시오. 아무 대가 없이 뭔가 막 주고 싶은 대상이 생겼을 때 그 사람이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지 아니면 불편하게 대하는지.

호의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받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주는 것보다는 받는 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관계, 특히 가까운 지인들 하고의 관계에서는 그걸 좋은 관계로써 돈독하게 유지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내 것을 먼저 주어라. 하고 얘기합니다.

주는 것은 꼭 물질적인 것만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을 해봤으면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게 있습니다. 저 사람이 화를 내더라도 내가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그 말을 그대로 받아만 줘도 화낸 사람은 점점 더 그 화가 수그러듭니다. 그러면서 그 화로 인해가지고 두 사람의 관계가 나빠지지는 않습니다.

 

뭘 줬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 사람에게 온화한 미소를 준 거라.

착한 마음을 지니고 '아, 그래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네가 괴로움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을 계속 내줬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걸 받아들인 거라. 그래서 자기 화도 없어지고, 결국은 그 친구 관계도 더욱 더 돈독해집니다.

 

사띠를 하고 있어도 마찬가집니다. 사띠는 자애와 마찬가지로 선한 마음입니다. 평온한 마음에서 고요하고 가볍게 그냥 그대로 그 말만 들어주는 사띠를 하고 있어도, 들어만 알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어만 줘도 그 말하는 사람의 문제의 반 이상은 해결해주게 됩니다.

실제로 그렇게 막 말하는 사람들은 답답하니까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자기가 문제해결 해줄 듯이 할 거 같으면 문제가 이미 틀어져버린다는 거라. 사띠를 지닌 채 잘 들어만 주더라도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거라. 그게 바로 내 것을 먼저 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입니다.

 

지금 스님이 얘기하는 것은 무상한 성품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서, 관계의 부분에서 얘기하는 겁니다.

그냥 '무상한 거' '아, 변하고 있구나' 수행할 땐 알고 있는데, 거기서 땡 그쳐버리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항상 사띠가 있어가지고 일상생활 속에서 사띠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행할 때 항상 변화되고 있는 성품들을 그대로 보면서 집착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서 갈등하지 않는 것도 아닌 거고.

 

두 번째가 주기는 주더라도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어야 됩니다.

그 사람에게 이익되는 것들을 줘야 됩니다. 그 사람에게 도움될 수 있는 것들을 줘야 되는 것이지, 필요 없는 것 줘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신던 신발 발 문수도 안 맞는데 그걸 다른 사람한테 주면 그게 쓰임새가 있습니까? 의미가 없다는 거라. 주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을 내려놨을 때 쓸모있는 것들을 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한번 잘 들여다보십시오. 줄려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인지? 자애의 마음인지, 아니면 아깝다는 마음인지, 아니면 이게 쓸모없다고 해서 주려고 하는 마음인지, 후자의 두 가지 일 거 같으면 그건 아예 주어서는 안 되는 상황입니다.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태국에 가면 처음 절에 오면 탁발 나가는 거 외에 절 안에서 공양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맨 처음 신도들이 물어보는 게 '망사윌랏'이냐? 하고 물어봅니다. 채식주의자냐 하는 겁니다. 그럼 "나는 채식주의자다" 할 것 같으면 그다음부터는 그 스님은 채식주의자 상으로 인도해가지고 앉혀가지고 드시도록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은 기름기 있고 고기 종류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채식주의자한테 소고기를 “아, 이거 맛있습니다. 스님 드십시요” 하는 거와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주는 것들을 분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선한 마음이 일어난 상태에서 주는 것이 아닐 것 같으면 그거는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여러분 탁발할 때 그럴 겁니다. 탁발공양물 만들 때 기쁨들이 잘 일어납니다. '오늘 스님한테 공양물 올려야지' 기분 좋게 왔습니다. 올릴 때 어떤 마음으로 줍니까?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면서 평온한 마음에서 공양물을 올립니다.

'내가 이거 만든 공이 얼만데? 스님 다 잡숴야 됩니다' 하는 마음으로 탁 주면 그거는 이미 나쁜 마음이 들어가 버리게 되고, 그러면 그거는 공덕이 배가되지 못한다는 거라.

 

공양을 올리고 나서 평온한 마음에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공양 올리고 나서는 공양 올린 것에 대해서 행복해합니다. '아, 내가 잘 수행하고 잘 법답게 살아가는 스님들께 공양물 올렸구나' 하는 생각이 미치면 행복해집니다. 기쁨과 평온함과 행복함이 조화롭게 유지가 되어나갈 때, 그것은 올린 보시물들이나 올린 자들은 공덕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비끄러지면 그에 대한 과보들은 반드시 또 새로 일어나게 됩니다. 어떤 것이 쎄가지고 보시 올린 것들을 덮어버릴지는 모릅니다.

 

여러분도 꼭 마찬가집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줄려고 할 때 '아, 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를 찾을려고 노력하는 마음들이 있고, 그리고 신심을 다해서 마음이 고요하고 청정한 상태에서 뭔가를 주게 되고, 그랬을 때 그것은 그 사람에게 쓸모있는 것들이 됩니다.

물질적인 것보다도 정신적인 것이 훨씬 빨리 변합니다. 물질적인 것보다도 정신적인 것들을 똑같은 시간에 줄 거 같으면 훨씬 더 많은 선한 과보들이 여러분들에게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세 번째, 내가 그렇게 해서 필요하고 쓸모 있는 것들을 사띠를 하면서 나눠주고 그게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했다고 해가지고, 그사람의 마음이 내마음 하고 같다고 착각해선 안됩니다. 여러분 마음은 여러분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물며 상대방의 마음을 여러분이 안다? 그거는 어불성설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분이라고 하더라도 특정한 대상을 향해서 마음을 기울일 때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가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은 아라한이 되기 전의 범부중생이라고 할 것 같으면 더더구나 불완전하고 더더구나 자신의 마음조차도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고 어떻게 남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내 마음과 똑같다고 판단들을 하느냐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상대방의 마음은 내 마음과 같지 않다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람이 어떤 반응을 하더라도 그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부터 한번 잘 관찰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뭔가를 쓸모있는 것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을 겁니다. 바른 방법으로 보시를 하더라도 기쁨이 일어나는 마음이 있고, 그것이 사라지고 나니까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이 생겨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나니까 행복한 마음이 일어나는 거고. 여러분의 마음도 끊임없이 그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상대방 마음의 어떤 것들이 같다고 여러분들이 그걸 딱 집착하고 매달리고 있습니까? 그렇게 될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상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불편하고 하는 기색이 있을 거 같으면 여러분이 다시 또 마음을 내면 됩니다. 평온한 마음을 다시 또 내주면 됩니다. 자애의 마음을. 그럼 상대의 마음은 또 바뀝니다.

그것이 찰나 간에 일어나는 마음일 뿐인것이지,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자꾸 착각을 하지 말아라는 거라. 특히 부모와 자식 간에는 이걸 잘 범합니다. “내가 너 때문에 뭔가를 하는데 너는 왜 엄마 마음을 몰라주느냐” 마음이 같지 않은데 어떻게 마음을 알 거라? 왜 그걸 바라느냐는 거라.

 

네 번째, 조금 전까지는 관계에서 마음을 기울이는 것들이었습니다. 실제로 밖으로 크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크게 드러나는 것이 뭐냐면 말입니다. 흉기가 돼서 그 사람을 찌르는 것.

네 번째가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의 말이 흉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말에 대한 4가지는 참 많이 설명들을 했기 때문에 따로 안 하겠습니다. 거짓말 하는 것, 남을 이간질 시키려고 하는 것, 다툼을 일으킬려고 하는 것들, 그것보다도 더 안 좋은 것이 쓸데없는 말입니다. 필요하지 않는 말들을 괜히 자꾸 하는 거라. 거의 대부분 여러분들 시간에서 정신적인 고통을 가져오고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것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것인데도 계속 얘기한다는 거라.

살아있음을 그렇게 해서 증명할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그거 아니라도 여러분은 얼마든지 살아있는 것들이 증명이 돼나가고 있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내가 숨을 쉬고 있구나' 하고만 알아차리더라도 '내가 살아있네' 하고 알게 됩니다.

 

그게 습관화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그냥 일상적으로 하는 얘긴데도, 그게 상대방에게는 흉기가 돼버립니다. 이 사람에게 얘기할 것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말인데, 똑같은 말을 이 사람에게 하면 이 사람에게는 흉기가 돼버린다는 거라. 본인은 모른다는 거라. 그런 쓸데없는 말을 자꾸 하는 습관들을 들여서 하는 습관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본인이 말을 하면서 알아차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잘못된 줄을 모른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의 말이 흉기가 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말을 할 때는 여러분이 말하는 소리를 귀로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선한 소리, 그리고 편안한 느낌들이 오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즉시 말은 중단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들로 인해서 여러분의 가슴이 따뜻해지고 편안한 느낌이 들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즉시 중단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로 인해서 입술이 달싹거려질 때 입술이 달싹거려지는 것이 침이 마른다든지 딱딱해진다든지 할 것 같으면, 그 즉시 말을 중단을 해야 됩니다.

 

입술이나 귀나 가슴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하는 말들을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게 흉기가 될 말인지 아니면 위로가 될 말인지.

수행을 하고 있다면 적어도 그것 정도는 가려내고 중지할 줄을 알고 되돌릴 줄을 알아야 됩니다. 수행을 안 하고 있더라도 머릿속에 항상 명심하십시요. "흉기가 되는 말은 하지 말자! 그 흉기는 빼내면 그만이라는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 상처는 두고두고 남습니다."

 

저도 처음에 출가하고 나서 모든 걸 알듯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하면 그게 다 보입니다. '저게 길이 아닌데' 그럼 그 사람이 아무리 얘기해도 그 소리가 내 귀에는 안 들어와요. 나는 이미 길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럼 그 사람에게 말합니다. "그 길로 가지마! 저 길로 가!" 맞기는 맞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그 사람에게는 흉기가 되는 거라. 왜 그런 오류를 범했을까? 왜 스님인데도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을까?

 

자신의 마음도 변하고 있는 상황인데, 변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을 못하고 있는 거라. 내가 아직 완전하지 않는데 그것이 옳다고 집착하고 있는 거라.

무상한 성품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변화를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갈등이 생기기 때문에 무상한 것들을 모르는 겁니다.

여기 있는 스님도 그렇게 해가지고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남에게 원망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아니야. 나는 바르게 했어. 그것이 옳은 길이야' 그러고 있었습니다.

 

뭐가 옳을까? 그 사람이 설혹 그길로 안 가면 어때? 자기 스스로 길을 찾을 수도 있는 거고, 또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물어서 바른 길로 갈 수도 있는데 꼭 내가 해야 될 이유가 뭐 있었는데? 오히려 나는 그 사람에게 상처 준 것밖에 없는데.

 

다섯 번째, 인제는 상대방이 말하는 것들입니다. 상대방이 말하는 것들은 가려서 들어야 됩니다.

그냥 그대로 다 듣고 쌓아두면 화병 생겨서 터져버립니다.

아까 전봇대를 통해서 오는 것들에서 피뢰침 얘기를 했습니다.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피뢰침이 해결해주는 거고, 또 전압이 볼트가 점점 약해져서 여기에서 적당한 양이 쓰여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변압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그냥 그대로 다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 여기에서 전기를 못쓰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변압기가 없이 들어와버리고 피뢰침 없이 급작스러운 상황을 닥쳐서 받아버리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서 듣기만 하더라도 본인이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흘려버려야 될 것, 그렇지 않고 이것은 기록하고 기억해두어야 될 것을 가릴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누군가가 화를 확 내면서 나에게 뭔가 하소연을 한다. 나는 그거 흘려버려야 될까요? 아니면 그 말도 맞으니까 내가 기억해 두어야 될까요? 흘려버려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상대방이 탐··치에 물들은 상태에서 그때 하는 말들은, 듣기는 하더라도 들을 때의 조건은 내가 평온한 마음, 선한 마음을 지닌 채 들어야 됩니다.

그것은 전제조건입니다. 듣더라도 그대로 흘려버립니다. 어, 지금 저 사람이 화가 나있기 때문에 그것을 내가 받아들여야 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왜 그걸 받아들여서 그것을 쌓아둘려고 합니까? 조금 있으면 상황이 지나서 그 사람의 상황은 다른 말을 하게 되고 다른 상황이 되게 되는데, 나는 그 사람이 화를 낸 것은 잊어버리고 한 말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이 말 했는데' 듣는 걸 상대의 말을 귀 기울이더라도 가려서 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피뢰침 역할을 하는 것들을 간략하게 얘길하겠습니다.

첫 번째 여러분의 관점을 버리십시오. 가지고 있는 견해든 생각이든 아니면 방향이든 어떠한 경우든지 개념화되어 있는 것들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는 그 개념화되어 있는 것들을 버려야 됩니다.

 

두 번째는 지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상대방이 화가 나있는 상황인지, 내가 화가 나있는 상황인지, 욕심을 부리는 상황인지, 사띠를 지닌 채 하고 있는 상황인지, 그걸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능력도 여러분들에게 피뢰침 역할을 합니다.

수행도 선한 마음에서 고요한 상태에서 사띠를 하지 않으면 그 사띠는 잘못된 사띠입니다. 움켜쥐거나 밀쳐낼려고 하는 사띠이기 때문에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를 못합니다. 듣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있는 그대로 사띠를 가지고 들어야 되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는 그 능력을 키워야 됩니다.

 

세 번째가 어떠한 경우든지 이리 들었든 저리 들었든, 그 사람이 성냄을 지닌 채 말하고 있든 아니면 내가 성냄을 지니고 있든,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먼저 내 입에서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네 번째 모든 생명에게 갖는 다정함 따뜻함 그런 웃음을 항상 지니고 듣고 말하라.

 

이 4가지가 여러분들에게는 피뢰침 역할을 해줄 겁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다섯 번째는 송전탑에 피뢰침이 있어서 급작스러운 상황을 막아내듯이, 여러분들에게도 안 좋은 상황에서 하는 말들을 가려낼 수 있는 힘들을 반드시 길러야 됩니다.

 

여섯 번째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는 훈련들을 하라는 겁니다.

강물을 따라 흐르는 배가 강물을 바꾸거나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배가 좌초되지 않고 아니면 뺑뺑이 돌지 않고, 잘 바다로 흘러갈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의 조종술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상황을 잘 대처할 수 있는 응용력이 생겼을 때 바다에 바르게 나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사띠만 하면 또는 수행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더더구나 여러분은 출가자가 아닙니다. 일상 생활들을 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직접 부처님의 가르침을 경험하고 한 것들을 반영하지 못하면, 그 배는 좌초되고 맙니다. 무상한 성품은 변화되는 것을 아는 것에서 그치지 마십시오. 실제 생활에서 그대로 반영하도록 해야 됩니다.

저는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