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 [집중수행] 대상을 가볍게, 가장 단순하게! (20181124)

담마마-마까 2021. 10. 21. 09:10

https://youtu.be/CVTjaOE6DJk

★ [집중수행] 대상을 가볍게, 가장 단순하게! (20181124)

<마음이 가벼워져야만이 사고하고 망상하는 것들을 밀쳐낼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성장하면 행복해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지금 행복한지 안 한지를 보면 '아, 수행으로 내가 마음이 많이 성장했구나' 하는 것들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탐·진·치가 일어나는 것은 금방 알 수가 있죠? 그래서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은 금방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그런다고 해가지고 지금 내가 행복이 다가와지고 행복해지는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성장했다고 인식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따릅니다.

마음은 항상 그 안에 것, 안에 있는 것들을 잘 다스리게 될 때 행복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수행에서 자애수행을 하고 있다. 그러면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행복하기를' 하고 자애수행을 하고 있다, 그런 마음을 낼 동안에는 탐·진·치가 없는 마음이 됩니다. 그런데 그럴 때 자신의 마음을 한 번 가만히 잘 돌아보십시요. 뭔가 욕심을 부리고 있는 마음은 없는지, 행복해지고 싶은 욕심, 괴로움이 없어지고 싶은 욕심, 그러니까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옳다고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특히 출가한 스님들한테 그런 경향이 많이 보입니다. “내가 옳아. 내가 옳으니까 너희들은 나를 따라와. 그러면은 너희들을 닙바나에 이르게 해주겠다, 행복하게 해주겠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자기 욕심이 개입돼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되고, 그걸 관찰하지 못하면 그것이 옳은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수행에서도 자애 수행할 때도 마찬가지고,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되지 않고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이렇게 해야 되는데 대부분은 그렇게 안 합니다.

 

단편적인 예를 들어서 호흡을 여러분이 관찰을 하고 있습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관찰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불러올 때는 불러오는 줄 알고 꺼지면 꺼지는 줄 알고.

··치가 없이는 잘해나가는데,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거라.

그럴 때 자세하게 한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요.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뭔가 내가 다른 마음의 작용이 거기에 개입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겁니다. 그냥 단순하게 불러오면 '불러오는구나' 하고 알고, 꺼지면 '꺼지는구나 '하고 알면서 '일어남' '사라짐' 하고 관찰하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쉬울 건데 대부분은 자기의 마음이 앞서갑니다.

조금 더 변하는 것들을 볼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을 조금 더 분명하게 알려고 한다, 하는 마음이 탁 들어갑니다. 그러면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만 계속 알아차려지게 됩니다. 그게 한시간 동안 수행하면서 계속적으로 '일어남' '사라짐'만 알아차리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보통 자신의 것을 잘 한번 관찰해 보십시요.

 

보통 그럴 때 지도하는 스님들이 어떤 식으로 지도하냐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중단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마음을 한번 관찰해봐라! 마음이 어떤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런데 마음을 관찰할 수 있는 상황이 됐을 때 그걸 관찰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은 그 방법이 또 안 통합니다. 그럴 때 보통 응용하는 것들이 "가볍게 마음에서 알아차리기만 해보라" 하고 합니다.

그래서 보통 '일어남' '사라짐'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앉음' '닿음'을 시킵니다.

그것도 안 되면 '닿아있는 것만' 관찰을 하라고 합니다.

손이 이렇게 닿아있습니다. 일어남 사라짐 할 동안에, 그냥 일어남 할 때 일어남을 안 하고 그냥 손이 닿아있는 것을 '어, 닿아있네' 또 사라짐 할 때도 마찬가지로 '닿아있네' 하고 알아차립니다. '닿음' '닿음' '닿음' 이렇게 마음이 가볍게 그 상태만 알아차릴려고 하면 됩니다.

닿아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으면 마음이 굉장히 가벼워집니다.

 

그렇게 한참 하고 나서 다시 '일어남' '사라짐'으로 들어갔을 때나, 또는 그러고 나서 자애수행으로써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했을 때는, 그전의 상태하고는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아, 이게 자애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되고, '아, 이것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사띠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사고하고 망상하는 것들을 줄여나가고, ''라고 하는 것들을 줄여나감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 이익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잠재되어 있는 경향들이 항상 있게 돼있습니다. 수행할려고 할 것 같으면 수행할려고 하는 마음이 잠재돼있는 거고,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마음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그 잠재되어 있는 것들이 대부분 망상이나 사고의 개념으로써 표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라고 하는 것이 딱 개입되면 '내가 좀 더 행복해지고, 내가 좀 더 수행 잘했으면' 하는 마음이 탁 드러나지게 됩니다.

 

탐·진·치가 없이 그것을 잘 제어한다고 해가지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망상하고 사고하고 하는 것을 줄여나가면 줄여나갈수록 행복은 '아. 이게 행복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것들이 커져나가게 됩니다.

마음의 성장은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말로 하는 것이나 몸으로 하는 것들을 아무리 제어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바르게 제어하지 못할 거 같으면 마음은 성장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망상하고 사고하는 것들을 자꾸 줄여나가는 패턴들을 만들어야 됩니다. 특히 수행자들은 수행하면서 그러한 경향들을 자꾸 줄일려고 해야 됩니다.

 

보통 수행을 할 때 수행하는 방법은 참 많습니다.

느낌을 관찰하기도 하고, 몸을 관찰하기도 하고, 마음을 관찰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방법들은 각각 다를지 몰라도 그것들은 대상으로써 내가 관찰해야 되는 것은 동일합니다. 느낌만 관찰한다고 해서 느낌만 계속 관찰하고 앉아있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을 관찰하고 있는다고 해가지고 마음만 관찰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져 있지 않으면 대상이 바뀔 때 바뀐 대상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일어남' '사라짐' 하고 관찰하면, 보통 바뀐 것들을 즉각즉각 알아차리지를 못하면 이게 그냥 자동적으로 되듯이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그냥 물결치듯이~~ 이렇게 이렇게 느껴집니다.

그냥 순조롭게 그걸 관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뒤따라가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이 탁탁 끊어집니다. 일어난 것이 탁 끊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알아차려져서 탁 끊어지고, 다시 또 일어나는 것이 보이고.

 

물결치듯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관찰되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의 마음에는 사고하고 망상하는 것이 반드시 뒤따라서 오게 돼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여운으로써 남아있기 때문에 그대로 그냥 곡선을 긋듯이 일어남과 동시에 일어나고 그게 끝나는 것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여져버리게 됩니다.

 

수행을 할 때 그런 식으로 계속 관찰하다 보면 대상으로 인해서 무상한 성품이 드러나지지를 않게 됩니다.

뭔가 끊어지고 멈추는 것이 있어야지만이 그다음 것이 시작되는 것이고, 그다음 것들을 알아야만이 앞에 거 하고 뒤에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이 변하는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되는데,

실타래 엮인 것처럼 계속 이어져서 엮여져나오듯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무상한 성품이 드러날 수 있는 조건이 안 됩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망상하고 사고하는 것들을 완전히 버린 상태에서 관찰을 해나가야 되는 거고, 되도록이면 그렇게 버리고 그냥 대상만 알아차린다고 생각을 한번 해보십시요.

 

내가 대상을 알아차린다고 생각을 내지 말고, 내가 조금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그냥 단순하게 '행복해지기를' 누가 행복해지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행복해지기를 하는 것,

누구의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지는 몰라도 불러오고 꺼지는 것들이 있으면 불러올 때 그냥 '일어남' 하고 알아차리고 꺼질 때 그냥 '사라짐' 하고 알아차리라는 거라.

망상하고 사고하는 개념을 완전하게 줄여버리면 그 대상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보통 수행할 때 '환희심'이 일어나고 하는 것들이 이때 일어나지게 됩니다.

그 대상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될 때 환희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또 하나 더 예를 들면 부처님을 대상으로 해서 붓다눗사띠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처님에 대해서 열 가지 명호든지 아니면 하나의 명호든지 그걸 하면서 마음을 거기에다 딱 둡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할 때보다도 훨씬 더 수행이 잘 될 때들이 있습니다.

이미 마음에서 부처님을 염송할 때는 '아라항'이다, '번뇌를 여의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참 존경받는 분이구나' 하는 마음이 탁 들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마음으로 인해서 환희심이 확 일어납니다. '아, 그러한 부처님을 내가 믿고 있구나' 하는 마음 때문에.

오롯하게 부처님 명호를 하나 외우더라도 환희심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믿음으로 인해서 '아, 내가 부처님 가르침대로 한번 실천해봐야지' 하게 되고, 그 실천으로 인해서 좀 더 확신이 탁 들게 됩니다. 그래서 그 길을 계속 가게 되는 거고.

 

수행도 그와 같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이, 여기서 말하는 '나'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얘기할 때, 보통 몸이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의 개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까야(kāya)든 마나(māna)든 나마(nāma)든 이런 것들은 하나의 개체가 아닙니다. 여러 개체의 무더기입니다. 조건 따라서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조건 따라서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것은 다를 수가 있을지 몰라도 하나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몸도 호흡을 한다, 호흡할 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은 몸의 현상입니다. 배가 한번 쭉 불러온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것은 아니라는 뜻이라. 마음도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고 나서 다음 마음이 또 다른 마음이 일어나야 되는 거고, 그와 같이 호흡도 꼭 마찬가집니다. 느낌도 꼭 마찬가집니다. 하나라고 생각해버리면 거기에는 '나'가 개입이 돼버리게 됩니다. 사고를 하게 됩니다.

나의 생각에 딱 고정돼 있듯이, 그래서 내 것이 맞다고 생각하듯이, 몸도 마음도 하나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하나가 드러나기 위한 어떤 과정들이 분명하게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과정으로 인해서 만약에 위빳사나 할 때 「위」가 이응(ㅇ)에다가 우(ㅜ)에다가 이(ㅣ)가 써졌기 때문에 자판에 「위」라고 시스템으로써 탁 나타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자판에 드러난 「위」는 이응(ㅇ)하고 우(ㅜ) 하고 이(ㅣ)가 순차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위」라고 써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탁 드러난 것 때문에 「위」라고 하는 것처럼, 그게 그냥 「몸이다」 하고 생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이게 「느낌이다」 하고 생각을 해버리고, 이게 「마음이다」 하고 생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거기에는 이미 자신의 마음이, 사고하는 마음이 탁 개입돼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할 때 통상적으로 현상이 있는 그대로 보여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반복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대상을 가볍게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가장 단순하게! 가장 단순하게!

아무것도 개입시키지 말고 그냥 '행복하기를' 그냥 '괴로움이 없기를' 그냥 배가 불러오는 것들 또 사라지는 것들 그것들을 가볍게 그냥 알아차려 볼려고 한번 해보십시요.

 

마음이 가벼워져야만이 사고하고 망상하는 것들을 밀쳐낼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조금 더 수행이 향상되어나가게 됩니다.

 

마음도 밖으로 드러나는 마음들만 자꾸 제어할려다 보면 '내가 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되지' 하는 마음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그럴려면 용을 써야 되는 거고, 그럼 그것은 몸이나 마음에 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것도 물론 해야 되지만 밖으로 드러난 것 말고 마음 안에서 감추어져 있는 것들, 이러한 사고하고 망상하고 하는 것들을 자꾸 줄여나갈려고 했을 때 마음은 성장을 하게 됩니다.

 

수행도 수행대상이 가장 단순하게 가볍게 알아차려지게 될 때, 수행은 향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상을 너무 무겁게 자꾸 알려고 하지 말고, 특히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계속 알아차렸는데 진도가 없다 싶은 사람들은 '일어남' '사라짐'을 딱 멈추고, 손이 닿아있을 것 같으면 그 닿아있는 것만 가볍게 '닿아있네' 하고 알아차리고 또 '닿아있네' 하고 알아차리고, 그러면서 자꾸 마음을 가볍게 하는 훈련들을 해보십시요.

 

그렇게 할 때 사고들은 떨어져 나간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렇게 했을 때 마음이 향상되는구나, 그래서 대상을 ', 가볍게 알아차려도 분명하게 그것이 드러나는구나' 하는 걸 알게 되면은, 그때사 수행에서 환희심들이 확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들을 그 방법대로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해나가는데 진도가 빨라질 겁니다.

 

이번 집중수행에서는 좀 더 가볍게 자꾸 대상을 알아차려서 그것들에 대해서 성과들이 좀 있도록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Q 수행자 질문 : 스님, 저의 경우는 일단 앉으면 마음부터 망상이 일어나는가, 생각이 일어나는가, 그것만 꾸준히 보고 있으면 차츰차츰 생각과 망상이 사라지고 고요해지면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그냥 가볍게 드러나고 있는 것을 바라볼 수가 있는데, 그렇게 하니까 좀 집착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데, 그게 바른 방법인지...?

 

스님 답변 : 예. 그리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보통 그런 것들을 예비수행으로 해서 예비수행의 4가지 패턴들을 정형화시켜 놓은 겁니다. 그걸 꼭 그 방법이 아니라도 자기만의 방법으로 망상하지 않고 사고하지 않는 상태, 마음이 가벼운 상태를 만들어 줄 수 있으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보통 예비수행은 본수행에 들어가기 위해서 마음을 고요하고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이지, 그것만 쭉 다해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예비수행은 꼭 그 4가지 방법에만 한정하지 말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사고하지 않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뭐냐면 그렇게 해가지고 본수행에 들어간다고 해가지고 항상 마음이 동일한 상태·조건에서 고요하고 가벼운 상태에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는 그때는 다시 또 중단을 해야 됩니다. 그 대상을 계속 그걸 알아차릴려고 하지 말고 딱 중단하고, '어' 뭐가 잘못됐는지를 분명하게 보고 마음을 다시 가볍게 하고 나서, 다시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해서 중간중간에 자꾸 본인의 마음에서 망상하고 사고하는 것이 없이 마음이 가벼워져 있는지, 그래서 항상 스님이 강조하는 것이 "마음은 가벼워야 되고, 마음은 고요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질 못합니다. 그러한 상태를 만들고 나서 대상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게 마음을 가만히 있도록 한다든지, 마음을 그냥 알아차릴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거는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 마음을 알아차리면 '아, 마음이 고요해있지 못하구나, 마음이 가볍지 못하구나' 하고 알아차리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걸 모릅니다.

그럴 때는 하나의 대상을 정하라는 거라. 하나의 대상을!

하나의 대상을 정해가지고 그걸 가볍게 알아차릴려고 했을 때 마음은 더불어서 가벼워진다는 거라. 그런 방법을 중간중간에 자꾸 응용하면서 대상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고,

 

그리고 마음만 먼저 앞서가서는 안됩니다. '어, 무상한 성품이 드러나야 된다고 그러던데' 대상이 빨리 변하는 것이 보여야 된다든지, 그거 전혀 신경쓸 필요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사고이고 망상입니다.

자기의 상태에서 그냥 가볍게 알아차려지면 가볍게 알아차린다고 그냥 알면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변하는 것이 자기는 요만큼 보였으면 그만큼만 알면 됩니다.

그런데 그 이상을 자꾸 알려고 할 것 같으면 다시 마음은 무거워져 버립니다. 그래서 그 부분만 조심하면 관계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