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아가 소멸되면 인과관계가 드러난다. (20190330)
경주로 오신 분들은 삼귀의 오계 처음 해봤죠? 해본 사람 있어요?
(수행자 대답 : 삼귀의는 했습니다.)
삼귀의만 했어요? 법회 때 삼귀의 삼창? (수행자 대답 : 예.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이 꼭 틀린 것은 아닙니다. 테라와다 불자의 의무사항인데, 기본조건이 경전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삼귀의 삼창만 하는 데도 있고, 어떤 경전은 오계까지 포함되는 것이 있고,
그런데 스님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지금 테라와다 어떤 곳에든지 삼귀의 삼창만 하고 끝나는 법은 없습니다. 테라와다 불교국가 어느 나라든지. 삼귀의 삼창을 하고 오계까지를 해야 법회가 시작이 됩니다. 그거는 스님 개인적으로도 그게 맞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경전에서 삼귀의만 했을 경우에는, 테라와다 불자의 조건이라 했을 경우에는 그거는 기본적으로 당연히 삼귀의에 대한 확신들이 있으면 오계는 당연히 지킨다는 전제조건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전제조건이 그 경전에서 생략이 된 것 뿐이지 실제로는 "삼귀의와 오계가 기본조건이다" 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다음에는 경주 갈 때, (수행자 대답 :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스님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수행자 대답 : 알겠습니다.)
단지 오계를 주는 방법이 각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습니다. 지금 스님이 하는 것은 아무래도 스님이 태국에서 공부를 했으니까 태국방식입니다. 그런데 오계가 다른 것은 없습니다. 오계를 하고 나서 스님이 게송하는 것들이 조금 차이가 나는 것뿐입니다. 재가자들이 삼귀의 오계 하는 것은 어느 나라 방식으로 하든지 무리는 없습니다.
조금 전에 테라와다 불교국가가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라오스 캄보디아 이런 나라들에 공통적일 뿐 아니라 테라와다가 들어가 있는 다른 나라 영국이나 미국이나 유럽들도 테라와다 스님이 지도하는 곳은 어떤 경우든지 마찬가지 방식을 취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도 그와 같다는 생각을 하면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형식적인 부분인데 그게 경전에도 부합되고 역사적으로도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자신이 정확하게 모르면 그냥 그 방식 따라가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봅시다.
수행을 했던 분들은 수행만 할려고 그럽니다. 집중수행을 하든지 아니면 수행처에 가든지 해서 수행을 할려고 그러지, 테라와다 방식으로 삼귀의 오계를 주고 법회 보고 하는 거 귀찮아합니다. 잘 안할려고 합니다.
경전공부 하는 사람들은 경전공부 할려고 그러지 또 다른 방식들은 안 할려고 그럽니다.
한국에 테라와다 불교가 들어와서 이로운 점도 있는데 폐단이 바로 그런 것이 있습니다. 자기의 방식들을 고수를 해나가는 것.
그런데 그게 맞은 것 같으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데,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스님 입장에서는 '아, 이건 뭔가 시정할 필요는 있다'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에 대구 법회에선가 꾸사 풀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꾸사 풀이라고 해서 우리말로 길상초,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를 때에도 그 길상초를 자리에 깔고 앉아서, 길상초를 베어다 준 농부가 베다가 손 베었다는 소리는 없죠? 그런데 여러분이 아마 베면 거의 베입니다. 왜 그럴까? (수행자 대답 : 너무 질겨서요) 예. 질긴데 생김새가 잎이 한 2센치에서 5센치는 되거든요. 이게 쭉 길게 한 50에서 1미터 정도 길이가 돼요. 그게 굉장히 가늘가늘 하기 때문에 대부분 댕기면 이게 부러질거라고 생각들을 하거든요.
대부분 그렇게 해가지고 댕기면 손이 착 베입니다. 그 잎에는 보면 미세한 가시들이 전부 다 있는데 이 방향이 있습니다. 댕기는 방향으로 요렇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끝에서 잎끝을 잡고 요렇게 훑어내려와가지고 (뿌리쪽) 끝을 잡고 탁 댕기면 문제가 없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요렇게 잡아 댕깁니다. 방식에 문제가 있으니까 대부분 그렇게 베입니다. 손을 베인다는 것은 그래서 그런 겁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한 6년간 이 방법 저 방법을 동원을 해서 했습니다. 부처님의 개인적인 방법 아니죠? 인도 당시에 그냥 전통적으로 해왔던 방식 그대로 수행을 했습니다. 모를 때는 그냥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와 보니까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하거든. 어느 정도 선정은 깊어지고 할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았다 하고 분명하게 확신이 들 정도는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그게 어떤 거냐면 수행하다가 '아, 참 무상하다' 하고 느끼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이 변하고 있는 것들을 보기 때문에. 그런데 무상한 걸 체험한 사람이면 당연히 모든 현상에 대해서 무상한 것들을 적용을 해서 그렇게 대응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만약에 “너 진짜 무상한 거 체험한 거 맞아?” 할 거 같으면 벌컥 화가 납니다. 왜 그럴까? 수행에서 무상을 체험한 것은 진정한 무상을 체험한 것이 아니고, 비교해서 체험한 것들이라는 거라. 비교해서. '어, 조금 전에 호흡하고 지금 호흡하고 바뀌네' 하고 비교한 거거든. 무상한 것들을 알면 그것들에 대한 집착하는 마음들이 탁 떨어져 나가야 되는데, 그거는 떨어져 나가지 않고 무상한 성품만 보고 이해를 하는 거라.
부처님도 6년간 인도의 각각의 방법들을 동원을 해서 수행을 했는데 그와 같은 상태가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무상한 걸 이해하고 분명히 알겠는데, 이게 깨달음하고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독자적인 방법으로 수행을 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탁 깨달음에 이르고 나니까 자기보다도 더 진리에 뛰어난 사람이 없는 거라. 누구를 의지해야 돼? 경에서는 뭐라고 했어요? 난 누구를 의지하면 될까 했을 때 경에서는 뭐라고 얘기했어요? (수행자 대답 : 나를 의지하라.)
그렇지. 법을 의지하고. 그러니까 법을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한다는 그런 의미겠죠? 법이 스승이 됩니다. 깨달음을 이루신 분도 뭔가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던 거라.
여러분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뭔가 기준점이 있어야 됩니다.
기준점이 없으면 앞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자기 방식대로만 이해를 하고, 그 방식대로만 나아갈려고 그럽니다. 그게 잘됐는지 못됐는지 하는 것은 그건 차후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그냥 수행만 하면 되겠지'
경을 공부하는 사람은 '경전만 공부하면 되겠지'
테라와다 불교를 하면서 '뭐 그냥 의식도 대승불교 방식으로 하면 되겠지'
자기가 이해하는 수준에서만 그렇게만 쭉 할려고 그럽니다.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안 될까? 「자아」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아라고 하는 것이 존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방식, 나의 견해, 라고 하는 것들이 드러나지게 돼버립니다. 자기 거면 자기가 하는 것이 더 맞지. 그런데 그게 누구에게나 다 통용되는 것은 아니거든.
그러면 부처님은 스스로 노력해서 깨달음에 탁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왜 깨달은 사람도 뭔가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을까? 깨달음에 이르면 당연히 인제는 더 이상 의지할 대상이 필요 없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자아가 소멸된 자인데, 자아가 소멸된 자는 어떤 방식으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게 될까? 여러분 자아소멸이 안 돼봤죠?
자아가 소멸되면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들이 인과관계가 드러나집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누가 여러분들한테 험담을 했다, 자아가 소멸이 안 됐으면 화가 확 일어납니다. 자아가 소멸된 사람은 화가 일어나지 않죠. 왜 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저 사람이 왜 화를 냈을까?' 원인 결과가 드러나진 것들을 살펴보면은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자기가 그걸 바꾸면 되는 것이고, 아니면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저 화낸 사람이 화가 사라지게끔 만들어주면 되는 것이고, 자기의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원인·결과가 드러나기 때문에 자기가 해야 할 것이 탁 드러나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아가 소멸되면 그다음에 드러나는 것이 원인·결과들입니다.
수행에 한번 대비를 해보겠습니다.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이건 아주 사띠가 잘 될 때고, 처음에는 사띠가 안 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용을 씁니다. '대상을 놓치지 말아야지!' '내가 꼭 이 한시간 동안은 좌선할 때 꼼짝말고 해야 되지!'
뭔가 바램이 있을 때는 사실은 잘 안 됩니다.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걸 어느 정도 수행을 계속 훈련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준비됩니다.
앉아있으면 그냥 스님 방법대로, 먼저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 했으니까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몸이 긴장돼 있는가를 한번 살펴보고, 그러고 나니까 편안하니까 '어, 배가 숨을 쉬고 있네' 마음이 당연히 그렇게 그것들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숨이 들이쉬는구나' 알아차리게 됩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으니까 사띠가 아주 예리하게 바뀌어집니다.
그러면서 아, 이게 변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하는 것들을 점차 알아가지게는 됩니다.
거기서 끝나버릴 것 같으면, 크게 수행한 것과 안 한 것과 별 차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수행이 아주 잘 돼나가면 아주 사띠가 예리하게 되어나가질 때는, 그다음에 탁 일어나는 것이 사띠가 자동적으로 되고 나면 원인·결과가 착 드러나집니다.
칠각지를 여러분들이 배웠습니다. 사띠삼보장가 다음에는 뭐가 나옵니까? 담마위짜야삼보장가(택법각지)입니다. 분명하게 원인·결과에 대해서 아는 상태가 됩니다.
자아라고 하는 것이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아도 사실은 그게 가능해집니다.
원인·결과는 분명하게 고요한 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만 알아차리고 있어도, 그게 사마타 방법으로 하든 위빳사나 방법으로 하든 마찬가집니다. 단지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을 것 같으면 그것들이 사마타로 하더라도 위빳사나로 전환이 되면서 택법각지로 넘어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택법각지가 분명하게 될 것 같으면 원인·결과에 대해서 인과관계에 대해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면 그 인과관계 대로 자기가 하면 됩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집니다.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탁 보니까 마음이 공허해서 불안함이 있어가지고 뭔가 의지할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고, 내가 깨달음에 이르렀으면 내가 의지하고 다른 사람들이 의지할 것들이 뭔가 하고를 분명하게 원인·결과로써 찾게 되는 거라. 그럴 때 드러나는 것이 「내가 깨달은 이 법이다」 하는 것이 탁 확신이 듭니다.
가끔씩 옛날 스승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설혹 사띠를 몰라도 설혹 네가 하는 방법이 잘됐는지 잘못됐는지를 확신하지 못하더라도, 진리를 알고자 할 것 같으면 원인·결과를 살펴보아라."
예를 들어봅시다.
수행만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칩시다. 그러면 수행을 잘하고 있을 거 같으면 당연히 그게 일상에서 그대로 구현돼나가야 됩니다. 수행에서는 할 때는 아주 기분이 좋고 너무 좋은데, 이게 집에 오면은 어떤 사람은 하루 간다, 어떤 사람은 일주일 간다, 그게 뭔 의미가 있어? 일주일 가면 뭐 할 거고, 하루 가면 뭐 할 거라?
수행했던 마음이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구현돼나가야 됩니다.
경에서 배웠던 것을 그대로 일상에서 배워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원인·결과가 드러나지 않으니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를 못하는 거라.
스님의 경우에 태국에 갔을 때 태국 음식이 참 안 맞았습니다. 그마나 그래도 맞는 게 기름진 것을 스님은 잘 못먹는 편입니다. 그런데 거기는 전부 기름지거든.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출가한 스님들 중에 채식만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아, 나도 인제부터는 채식해야 되겠다' 채식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이제부터 망사윌라다" 하고 산언을 하는 거라. “나는 채식주의자니까 탁발을 하든지 아니면 공양초대를 하든지 채식만 나에게 도.”
공양 올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게 힘들지. 저 스님이 채식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따로해서 따로 준비를 해야 되니까. 그거는 차후로 치고, 그렇게 해가지고 나는 내 자신을 거기에 도피해버리는 거라. 피해버리는 거라.
한참 지나고 나니까 아닌 거라. 나는 지금 채식을 한다는 것에 딱 빠져가지고 다른 것들을 외면을 하고 있는 거라.
부처님이 채식이 맞을 거 같으면 출가한 스님들은 채식을 하라 하고 분명히 얘기를 했을 건데, 경전 어디를 보더라도 그런 건 없어요. 그럼 그게 부처님 말이 진리이고 그대로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드러나야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채식을 하면 안 되는 거라. 나는 지금 채식을 하고 있는 거라. 내 방식대로 나에게 좋은 것만 취사선택을 하고 있는 거라.
여러분들에게 수행이 맞고 여러분에게 경전이 맞다, 그건 여러분들에게 맞는 것이고 여러분들이 취사선택을 한 것이지 그것이 진리일 수는 없다는 거라. 왜 고집을 하느냐는 거라.
수행하는 사람도 나는 심념처 한다, 그건 자기한테 맞을 수는 있지만, 그게 진리일 수는 없다는 거라. 심념처가 진리일 것 같으면 부처님이 심념처만 얘기를 해놓아야 되는 거지 왜 다른 것들을 다 얘기해놓았느냐는 거라.
뭔가 자기 방식을 하면서 오히려 다툼이 없는지, 오히려 화합되고 조화롭게 잘하고 있는지, 그게 일상생활에서 구현이 되는지를 살펴볼 생각은 안 하고 자기 방식만 계속적으로 해나가고 있다는 거라.
여러분이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틀림없이 궤도수정을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어, 내가 이 방식대로 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아니면 수행이 아니고 일상 테라와다 불교를 하더라도 내가 이것만 해가 될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여러분이 딱 살펴봐야 되는 것이 지금 내가 부처님 가르침에서 인과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고 있는가? 하는 거라. '나'라고 하는 생각없이 나에게 좋은 것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들이라는 생각을 아예 빼버리고, 지금 원인·결과를 살펴보라는 거라.
수행은 지금 즉시 결과가 드러나집니다.
그것이 바른 수행입니다. 먼 후일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 즉시 '나'라고 하는 생각이나 모든 것들은, 나에게 맞는 것이고 나에게 해당이 되는 것이지 그것이 진리일 수는 없다 하고 버려버리고 나면 원인·결과는 드러나지게 되는 거라.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 가치관, 여러분 몸, 재산, 또 견해, 또 자기가 가지고 있는 테라와다를 공부하고 있는 어떤 방법들, 그것들이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여기 선원 앞에 보면 숲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계속적으로 소나무 재선충병인가? 거기에서 계속 베고 있습니다. 숲이 소나무가 많이 잘려져 나갔어요. 숲에 있는 나무들은 잘려져 나간 것에 대해서 뭐라 할까? 왜 내 옆에 친구 자르냐? 그럴까? 그런 생각 없습니다. 설혹 자기 자신이 잘린다 하더라도 그냥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오온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변하는 것들이고, 여러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인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욕심부리는 것 통제할 수 있다?
성내는 것 통제할 수 있다?
게으름 부리는 것 통제할 수 있다?
못합니다!
통제도 못하는 것들을 가지고 왜 여러분 거라고 자꾸 집착을 하느냐는 거라. 여러분 몸 하나도 통제를 할 수 없는 건데, 그 여러분들 몸과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들로 인해가지고 견해나 여러 가지 것들 그것이 어떻게 여러분들 것이고, 그것이 진리라고 할 수 있느냐는 거라.
며칠간 계속 우리 송천님이 뒤에 물 흐르는 거 작업한다고 되게 고생했어요. 무거운 거 들어올려가지고 위에서 하고, 아마 되게 힘들었을 거라.
그런데 스님도 가끔씩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들이 뭐냐면 그거 일할 땐 힘듭니다. 돌 하나 놓는 것도 그거 들어가지고 할려면 되게 힘이 들거든. 그런데 그걸 땅에다 탁 놓는 순간 그렇게 좋습니다. 내려놔버리면 이렇게 편안한 걸 왜 내려놓지 못했을까?
여러분도 내려놓지 못해가지고 힘드는 것이 있으면 한번 내려놔보십시요.
내려놓는다고 해가지고 여러분이 금방 바뀐다든지 뭔가 큰일이 생긴다든지 하는 것도 아닌데도 그걸 잡고 있느냐는 거라.
그게 뭐라? 그게 진리인 것도 아니고, 그게 맞는 것도 아닌데도, 맞는지 안 맞는지도 모르고 그냥 들고 있습니다.
그냥 탁 내려놔버리십시요.
그러면은 원인·결과가 탁 드러나집니다.
원인·결과가 드러나는 사람들은 문제가 닥쳤을 때 자신이 할 일들을 분명하게 압니다.
여러분은 이생에서 여러분들이 진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까?
자신이 진짜 해야 될 일들 그게 드러나져야 됩니다. 그냥 여기 같으면 일주일에 두 번씩 와서 스님 공양 올리고, 간혹 스님 법문 듣고, 수행 쪼매 하고, 집에 가고, 그게 여러분들 할 일입니까? 그것도 할 일은 맞습니다. 그런데 진짜 해야 될 일들을 자꾸 놓쳐버린다는 거라.
자신의 방법이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됐을 때
그걸 궤도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은 원인·결과가 드러나도록 분명하게 하십시요.
그러면 그 길은 여러분들이 앞으로 가야 될 길들이 드러나지게 됩니다.
오늘은 그냥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럴려면 더욱 더 그냥 목표가 정해졌으면, 원인·결과가 드러났으면 그냥 다니면 됩니다. 뒤돌아보지 말고! 쓸데없이 다른 길로 벗어날려고 한다든지 그렇게 하지 말고 그냥 그 길을 가도록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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