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아의 착각이 일으키는 번뇌 (20190406)
'프라이드가 세다' 하는 말 많이 들어봤죠? 자존감이나 자부심이 강하다고 하는 거, 그거하고 「자아」 하고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수행자 대답 : 같은 말 아닙니까? 내가 있으니까 자존감이 생기고 하는 거니까)
엄밀하게 얘기하면 다릅니다.
자아는 자신을 중심에 둘려고 하는 거고, 자존감이라고 하는 것은 그거하고는 조금 경우가 다릅니다.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자기주도적으로 뭔가를 하기는 할려고 그러는데, 두 가지 기본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나쁜 짓 할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는 것, 악행을 범할 때 악행 이걸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 그게 먼저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다음에 그걸 할려는 것에 대해서 무서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 두 가지는 항상 밑바탕에 깔려있는 상태에서 프라이드가 발휘가 되는 거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 자존감은 사람들이 인정을 해주지를 않습니다.
이런 자존감이 강한 사람들이 꼭 자아가 강하다고는 얘기를 못합니다.
부처님이 경전에서 자존감 부분에서는 크게 부정적으로 얘기를 하고 그걸 고치라고 얘기를 한 부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아 부분은 사람들이 착각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자아에 대한 착각이 번뇌를 불러오기 때문에 자아를 자꾸 없애도록 하라, 소멸을 하도록 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경전 곳곳에는 자아에 대한 얘기를 한 부분을 굉장히 많이 반복을 해놓고 있습니다. 또 자아하고 무아하고는 차원이 다른 얘깁니다. 그거는 다음에 시간이 되면 한번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자아의 착각이 일으키는 번뇌」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번뇌 많이 일어나죠? 경전에 그 일화를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라조 하라낭(rajoharaṇaṁ)" 이라고 하는 거 알죠? "먼지를 닦자" "먼지를 닦자" 쭐라빤타까 그 얘기는 여러분들이 잘 알 겁니다. 그렇게 해서 동생인 쭐라 빤타까가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스님들이 생각을 해보니까 저렇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인데, 왜 형인 마하빤타까는 쭐라 빤타까가에게 "너는 출가할 재목이 못되니까 환속해라든지, 공양청이 있어도 자기 동생을 쏙 빼버리고 간다든지 이렇게 하게 됐을까"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거는 형인 마하빤타까는 아라한에 이르렀기 때문에.
"아라한이 그것도 모르나?" "어, 아라한도 완전하지 않네?" 이렇게 판단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자기 자식에게 그런다고 해봅시다. 자기 자식이 지금 놀고 있다, 그럼 “너 인제 그만 놀아. 공부해.” 이렇게 얘기한다고 했을 때 어떤 마음으로 얘기하게 될까? 악한 마음으로 하게 될까 아니면 선한 마음으로 하게 될까?
(수행자 대답 : 선한 마음)
선한 마음? 왜 선한 마음이라?
(수행자 대답 : 잘되라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니까)
잘 되라는 생각으로? 그렇죠. 선한 마음으로 이렇게 하게 되죠.
그런데 그 이면을 가만히 보면 그게 못마땅한 거라. 놀고 있는 게. 그럼 본인에게 이미 성냄이 있는 거거든. 성냄이 있는 상태에서 말은 부드럽게 하겠지. “그만 놀아라. 공부해라” 이렇게 하지만 사실은 그것도 이 성냄의 굴레에 들어가게 됩니다.
똑같이 생각하면 "너는 출가할 재목이 안 되니까 집에 가" 당연히 일반인이 생각할 때 저것도 성냄의 영역에 속할 수 있다는 거라. “아라한도 성을 내나?” 하고 의문을 품게 되는 거라. 그래서 생각하는 게 "아라한이 번뇌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잠재해 있든지 억제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만 가능한 거지 그뒤에 아라한들은 가능하지 않구나" 하고 판단들을 하게 됩니다.
사고가 그렇게 바뀝니다.
그러면 더 인제 한 세기나 두 세기나 흐르고 나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아라한은 도와 과의 지위에서 성문지(聲聞地) 밖에는 못 이루는 거고, 붓다가 되는 것은 성문지를 넘어서야 된다. 그래서 아라한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하고 판단을 하게 되는 거고, 그게 더 후대로 내려오면 "아라한도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룬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직 번뇌가 남아있기 때문에 뭔가 여래의 말씀을 듣던지, 아니면 여래의 부촉을 받아가지고 붓다의 깨달음에 이르른다" 하고 이렇게 발전을 하게 됩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론들이죠? 쭉 연결되는 것들이. 맞습니까?
(수행자 대답 : 저도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걸 그렇게 느껴진다 할 때에 전통적인 테라와다 방식이 아닌 거라. 그건 대승적인 방식이지. 여러분들이 착각하는 부분들이 그런 부분들입니다.
사실은 오늘은 스님이 힘은 좀 없습니다. 죽을 한 이틀 계속 먹고, 하루는 그냥 단식을 하고 해가지고 힘은 없는데, 그 부분만이라도 간단하게 한번 짚어볼게요.
부처님과 아라한은 차이가 있을까? (수행자 대답 : 있습니다.)
있습니까? (수행자 대답 : 예)
대구에서 스님 법문 듣고 하면서 뭐 배웠어요? "수행의 과위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분명히 얘기를 했을 건데. 단지 '능력의 차이' 때문에 법을 설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사람, 아니면 제자들을 많이 거느릴 수 있는 조건이 있는 사람, 그런 조건의 차이가 생겨날 수는 있는데,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번뇌가 탁 끊어져야만이 깨달음에 이르기 때문에, 그래서 수행의 과위나 수행의 단계들은 이 단계에서는 이것의 번뇌가 떨어져나가고, 이 단계에서는 이것의 번뇌가 떨어져나가고, 하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부처님이 떨어트린 번뇌도 아라한이 똑같이 떨어트렸습니다. 그 단계를 똑같이 밟아나갔습니다. 그러면 수행의 과위에서는 부처님이나 아라한들의 차이가 없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사람들은 부처님과 아라한을 수행의 과위에서 자꾸 레벨을 둘려고 하는 걸까?
이게 조금 전에도 '어, 아라한도 화를 낼 수 있나?' '아라한도 완전히 번뇌가 끊어지지 않고 잠재돼있는 것이 있나?' 하고 의문을 품게 돼있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하게 그것에 대해서 이해를 못했기 때문에, 그런 작용들을 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거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탐심, 보통 여러분들이 가지는 탐심은 뭐가 있습니까? (수행자 대답 : 감각적인 욕망)
'감각적인 욕망, 오욕락'이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뭐로 가지고?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이것 가지고. '보면 좋으면 가지고 싶고, 싫으면 안 보고 싶고' 그게 번뇌들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보면 보여지기는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어떤 애착도 가지지 않습니다. 번뇌가 없기 때문에! 들으면 들릴 뿐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좋고 싫음이 일어나지 않고, 애착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럼 적어도 번뇌를 없앤 아라한들 입장에서는 오욕락에 물들 일은 없어집니다. 그건 틀림없죠?
탐심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는데 그중에 '오욕락'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존재욕구'입니다.
그럼 존재욕구는 있을까? 한번 살펴보십시요. 존재욕구는 어떤 겁니까? 살고 싶다는 거, 살아가고 싶다는 거, 거기에는 '아이, 살기 싫어' 하는 마음도 그속에는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전에서는 세 부류로 분류를 해놓기도 합니다. 게으름 부릴려고 하는 마음도 거기에 포함이 되고.
무상한 성품을 본 자면 존재욕구가 있을까? 존재욕구라고 하는 것은 뭔가 이 몸이 있다든지 이 마음이 있다고 했을 때 성립되는 겁니다. 몸도 자기 것이 아니고 변하는 것이고, 마음도 조건 따라 생겨나고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뿐이라고 분명히 아는 자일 것 같으면, 그런 존재욕구가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지금 현재 존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몸을 유지하고 이 마음을 쓰는 거고, 그래서 이왕이면 좀 더 많은 것들 좋은 것들을 많이 할 수 있는 것이 뭔가를 판단해가지고 그것들을 행할 뿐입니다.
그러면 탐욕이라고 하는 욕구 부분이라고 하는 것, 라가(rāga 欲) 부분에서는 아라한들이 어떤 것도 갖지 않습니다. 오욕락에 대한 것도 존재욕구에 대한 것도.
그러면 두 번째 분노 부분에 대해서 한번 볼까요?
아까 아이에게 “인제 그만 놀고 공부해” 하고 얘기했을 때, 스님이 "거기에는 성냄이 미세하게라도 존재를 한다"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대부분은 그렇게 됩니다. 왜 그러냐면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 것에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느낍니다. 그것들을 받아들이면서 그것들이 지지를 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간다고 느끼고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싫은 기분이 드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싫은 기분'은 성냄에 기인을 하게 되는 거고, 계속 노는 것이 싫기 때문에, 너는 인제 그만 놀고 공부해라 하고 얘길하는 겁니다.
오늘 점심 공양을 준비해왔습니다. 스님이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음식은 안 먹겠죠. 그런데, 하기야 스님은 비벼먹으니까 좋고 싫고도 없지. 그런데 만약에 따로따로 돼있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 그래서 어떤 거는 많이 먹고 어떤 거는 적게 먹고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스님들은 그걸 안 합니다.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받아먹습니다.
일반 스님들도 그러는데 아라한들은 좋고 싫은 것에 따라서 그걸 먹겠다? 그럴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들어오는 대상을 그냥 그대로 인식하고 알아차릴 뿐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습니다. '아, 이사람은 나에게 매일 공양을 갖다 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든지, 아니면 '이 사람은 악한 마음으로 떠보기 위해서 온 사람이 가지고 온 공양'이라든지 이런 판단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하는 겁니다.
대상을 인식할 때 판단하지 않으면 거기에는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에 판단하지를 않습니다. 그대로 그냥 인식할 뿐입니다. 그 어디에도 분노가 들어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공간이 없습니다.
성냄을 또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그런 부류 말고 또 하나는 뭐냐면, '공포감(두려움)'입니다. 그것도 분노의 영역에 속합니다.
왜 공포감이 일어나죠? '혹시 죽을까봐, 혹시 병들까봐, 혹시 장래에 무슨 일이 생길까봐' 불안하기 때문에 공포감이 드는 겁니다. 그런데 안 죽는 사람 있어요? 사실은 여러분이 공포감을 가져야 되는 것들은 있을 수 없는 희망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공포감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아까도 떼짓사라 스님하고 얘기를 하면서, “우리 앞에 땅을 몇사람이 좀 보시를 해줘가지고 땅을 구입해가지고, 꾸띠들을 짓기로 그렇게 결정을 했다” 그렇게 얘기하니까,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 그럼 이제 토목도 경지정리도 하고 꾸띠도 짓고 그래야 되겠네요” 그런데 스님은 전혀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되면 하는 거고 내가 못하면 누군가 다음 세대에 또 다음 후임들이 누가 만들면 되는 거지 꼭 내가 해야 될 이유가 뭐 있어? 안 하고 죽음을 맞는다 해가지고 뭐 '아이고야, 할 일을 못해놓고 갔네' 하고 할 거가, 뭐 할 거고? 그건 내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라. 마음을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하고 관계없는 것이라고 마음을 먹고 나면 두려워하고 공포를 가져야 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라한은 어떨까? 존재욕구가 없는데 두려워할 게 뭐가 있어? 죽음이 오면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 몸을 버리게 해줘서' 오히려 감사할 뿐입니다. 단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든지 이런 일은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이 몸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조금 더 건강하게 될려고 노력을 하는 거고, 병이 생기면 치료를 하는 거고, 그래서 아직 법을 설할 수 있고 수행지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될 거 같으면 할려고 노력을 하는 거고, 단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변해가서 사라지는 것들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헛된 희망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나 공포감은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성냄이라고 하는 것도 아라한에게는 이와 같이 없습니다.
또 '마나(māna) 자아'라고 하는 것, '자신이 있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 라고 하는 자아라고 하는 것들도 한번 봅시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은 인연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지금 스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목소리'라고 하는 것이 인연이 돼가지고 나에게는 '들린다'고 하는 것이 생겨나는 겁니다. 스님이 말을 안 하면 그거는 당연히 없습니다. 조건 따라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뿐이라는 거라. 들리는 것도 마찬가지고 여러분이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그리고 여러분들 몸, 몸의 세포도 꼭 마찬가집니다.
색·수·상·행·식이라고 하는 것들은 '나'라고 하는 것들이 존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따라 생겨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그걸 분명하게 아라한에 이른 분들은 알고 있습니다. 마나라고 하는 것이 '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울만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자아가 사라진 자냐, 아닌 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들은 빨리어 용어로 '막카(makkh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엠 에이 케이 케이 에이치 에이 makkha. '은폐한다'는 뜻입니다. 여기 기업하는 분들이 있죠? 기업하는 분들은 은폐하는 기능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회사가 잘되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하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보다도 더 부풀릴려고 하지 축소시킬려고 잘 안 한다는 거라.
빨리어 용어에서 막카(makkha)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기능들입니다.
'자신이 가진 기능들보다도 더 과장되게 보여줄려고 하는 것'
법을 설할 재능이 안 되면 법을 설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아라한이 되면 법을 설할 재능이 있겠지" 하고 판단을 하니까, 본인이 법을 설한다? 아라한은 그런 기능을 할 재간이 없습니다. "어, 나는 법을 설할 재간이 없어" 자신이 가진 조건이 그게 아니라는 걸 압니다. 그럼 "나는 그것 말고 다른 거 할 수 있어" 하고 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그럴 수가 있습니다. 아라한을 차제하고 라도,
스님이 법납이 얼마가 되고 나면 “왜 부처님 말씀 하나도 전해주지 못하느냐?”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분심이 나가지고 '내가 못 할게 뭐 있어' 하면서 합니다. 본인의 능력이 되든, 안 되든. 그러면서 능력이 안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잘못되게 전해줄 수밖에 없는 거라.
테라와다의 예를 들어도 외국에 몇년 나갔다 오면은 그 사람이 아짜리야 자격을 받았든 안 받았든 한국에 오면 법을 설합니다. 굉장히 위험한 방식입니다.
왜 그럴까? 왜 그런 마음이 들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칭찬해주고 공경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아라한에게는 이런 것들이 아예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걸 막카 라고 그럽니다. 자아가 없는 자는 이런 것들 은폐하는 기능들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니야, 나는 수행은 어느 정도 됐을지라도 아직은 법을 설할 능력이 안 돼. 그거는 따로 또 공부를 좀 더 해가지고 그 자격을 분명히 받고 나서 법을 설해줄게" 각각의 나라에서는 그래서 무슨 시험, 무슨 시험, 시험을 계속 치도록 하는 것이 그런 이유들입니다.
또 하나 은폐하는 것의 다른 기능은 반대작용입니다. '업신여기는 것'
"저거 별로야, 저 사람이 아무리 뭘 잘해놓아도 저거 뭐 별거 없어, 별로야, 내가 더 잘해, 내가 더 잘났어" 본인은 그런 능력이 안 되더라도 또 그것을 따라갈려고 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집니다.
오늘 오신 분들은 전부다 탁발을 합니다. 탁발 준비 안 하고, 준비할 능력이 안 되면 안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는 거라. 남에게 뒤쳐지기 싫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 싫어가지고. 그것도 자신을 은폐시키는 겁니다.
무조건 남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고 트집 잡고 하는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도 자기 자신에게 맞게끔 행하면 됩니다.
자아가 강해지면 이 막카 기능의 두 가지가 도드라지게 드러나집니다.
그런데 아라한들은 여러분도 알고 있다시피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모든 아라한들이 법을 설한 것도 아니고, 모든 아라한들이 상가를 꾸려가지고 존재를 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냥 조용하게 혼자 그 법의 기쁨을 즐기다가 열반에 드신 분들도 무수하게 많고, 제자 한명 없이 열반에 드는 분들도 무수하게 많고. 자신이 존재한다는 자신이라는 착각이 없기 때문에 은폐할려고 하는 기능 두 가지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은 일반적으로 번뇌라고 하는 부류에 속하는 것들은, 어떤 것을 살펴보아도 아라한에게는 일어나지지를 않습니다.
뭐를 가지고 '아라한이 아직 번뇌가 완전하게 소멸 안 된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라한도 성냄이나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가 있다' 이렇게 추정을 하는 겁니까? 실제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그걸 모르는데도 본인이 스스로 아라한이 되기 전인데도 추측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사실인 양 계속 발전을 시켜나갑니다.
뭐가 잘못된 패턴 아닌가요?
테라와다의 기준점 원칙의 첫 번째가 스스로 확인하라! 스스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그것은 자기 것도 될 수가 없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믿어서도 안 되는 거고.
그래서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개념들은 새롭게 정돈할 필요는 있습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어릴 때 저도 그런 걸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내 방에 유령이 있는 것 같았어요. 가끔 동네 사람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다른 데는 몰라도 여기 선원에만 오면 참 편안합니다. 자기 집에는 뭔가 뭐가 있는 것 같아가지고 그런데 여기만 오면 편안합니다.
그건 자기 느낌이지 그걸 확인도 안 했으면서 그러는 거라. 어릴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뭔가 집에 유령이 있는 것 같다' 어리석음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리고 지혜가 밝아진다는 것은 나중에 크고 나니까 '어, 그런 거 없었네' 하고 분명히 아는 거라. 지금 누군가가 “어, 너 옛날 방에 유령이 있다” 그럴 것 같으면 코웃음 칠 거라.
번뇌는 사라지고 나면 다시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환상이 깨지고 나면 그 환상을 이어 붙일 방법은, 다시 생기게 할 방법은 없습니다. 지금 누구든지 얘기합니다. “산타 있습니까?” 하면 어른들은 말은 안 하지만 없다는 걸 압니다. 단지 동심을 깨고 싶지 않아서 말을 안 하는 것뿐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싹이 잘려져 나가버리기 때문에 다시는 일어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 "아라한도 화를 낼 수가 있다, 남을 미워할 수 있다" 그런 것은 성립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우리 선원에 꽃 많죠? 나무 많습니다. 아마 에시니가 가다가 꽃 핀 것을 모르고 탁 밟았다, 그러면 아마 사람들이 그럴 겁니다. “야야, 그거 왜 밟아 죽이노” 그럴 겁니다. 그런데 에시미가 저 앞에 숲에 가가지고 꽃을 밟고 왔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이 다르죠? 아무 소리 안 합니다. '남의 수목'이라는 거라. 여기는 '선원 수목'이고. 왜 저기는 신경 안 쓰고, 여기는 신경 쓰는데?
그걸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바늘 끝에 겨자씨를 올려놓는 것과 같다" 아무리 해도 이건 균형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겨자씨를 올려 놓을려고 자꾸 그렇게 애를 씁니다. 올릴 수가 없습니다.
아라한은 번뇌를 올려놓을려고 해도 올려놓을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나」라고 하는 것들이 존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어떤 번뇌도 일어날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런데 자아가 존재하는 사람에게는 남의 꽃 밟는 것은 문제 삼지 않고, 자기 것만 문제 삼게 됩니다. 왜 그래야 돼? 연경이 꽃하나 또 사다 놓겠지 뭐. 자기가 밟았으니까. 크게 마음 두지 않아도 될 건데도 그런 개념에 자꾸 사로잡혀 버리는 거라.
여러분이 그런 자아라는 착각을 분명하게 알고, 그리고 개념들을 분명하게 정립을 하게 될 때 번뇌가 사라질 수 있는 시발점이 된다 하는 걸 항상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 뒷 부분은 못하고, 다음에 자아와 무아에 대한 것은 다음 시간에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Q 수행자 질문 : 아까 인식만 일어난다 하셨는데, 그러면 오식만 일어나고 수·상·행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그러한 의미가 됩니까?
스님 답변 : 그게 안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일어나집니다. 수·상·행·식은 일어나집니다. 단지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번뇌들은 일어나지를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프면 아픈 걸 압니다. 아픈 걸 모르는 아라한이 어디 있습니까? 아프면 아픔은 알지만 그것이 정신적으로 발전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자꾸 그걸 아라한이 되니까 수·상·행·식 중에 수·상 까지만 있고 나머지는 없는 것으로, 수·상·행·식은 동시에 일어나지는 겁니다.
그렇게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Q 수행자 질문 : 아까 전에 아라한들은 자살을 하지 않는다 하고 말씀을 해주셨는데, 제가 어디서 법구경에도 보니까 아라한도 알고 자살을 한다 이런 걸 본것 같아서, 제가 잘못봤나 싶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스님 답변 : 뭘 알고 자살을 해요?
수행자 질문 : 자신을 알아차리고 자살을 한다는 것, 그렇게 본 것 같은데
스님 답변 : 자신을 알아차리고 관찰해가지고 아라한에 이르러서 그것은 죽음을 맞는 순간에 그냥 죽는 것뿐인 거고, 그거는 이해가 되는데,
자신이 이러하면 자살하면 죽는다 하는 걸 알고 자살을 한다? 그걸 알아차린다? 아라한은 당연히 죽는 순간에 알아차림을 하는 거니까 그런 법은 없습니다.
스스로 자살할려는 것은 존재욕구가 요만큼이라도 남아있기 때문에, 살고 싶지 않은 욕망 그것도 욕망입니다. 번뇌가 존재욕구가 있기 때문에 자살을 하게 되는 겁니다. 아라한은 그런 존재욕구가 없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행위가 일어나지지를 않습니다.
옛날에 부처님 당시 때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난 것은 그것은 일반 수행자, 출가 수행자를 얘기한 것이지 아라한을 이른 얘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경전 곳곳에 자살을 하는 경우들은 그 상황을 알아차리면서 아라한이 된 거고, 되고 나서 죽음을 맞는 거고, 그거하고는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말씀 법문 중에서 상수제자인 사리불이 자살하셨다는 그 상황하고 지금 보살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걸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스님 답변 : 사리불이 자살한 것은 아니고 사리불은 과거 전생에 악업으로 인해서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단지 그걸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그거는 두들겨맞아서 나중에 죽음을 맞게 되는 결과가 됐지만 그거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은 아닙니다.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그거는 아라한이 되기 전이라도 누구든지 마찬가집니다. 어느 정도 수행에 이르고 나면 받아들일 건 그냥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이고 그게 설혹 죽음이 오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죽으면 되지 뭐 대단한 거라고 그걸 붙잡고 있겠어요?
사리불 존자도 마찬가지고 몇몇 큰 제자들도 그렇게 해가지고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안타깝게 죽음을 맞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살하는 경우하고는 경우가 다릅니다.
업이라고 하는 것은 아라한도 피해갈 수가 없는 겁니다. 이숙업(異熟業)이 드러나게 될 때는 아라한도 그걸 받아들여야 되는 거라.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해야 됩니다.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 > 2018~2022 일상수행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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