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2019년 붓다의 날_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 (20190512)

담마마-마까 2022. 3. 3. 09:00

https://youtu.be/W4rnWMIqEqM

* 2019년 붓다의 날_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 (20190512)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부처님을 스승으로 여기고 따른다는 의미이다」

 

한국 사찰에는 오늘이 사월 초파일이라고 큰 행사를 가지는데, 우리 선원은 예전과 다름없이 그냥 탁발을 하고 합니다.

테라와다에서는 부처님 태어나신 날과 성도하신 날과 열반하신 날을 한 날로 묶어서 기념을 합니다. 가끔씩 그걸 물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한 날에 합니까?” 그렇게 물어봅니다. 그냥 한국 사찰같이 성도일 따로 하고, 열반일 따로 하고, 그다음에 부처님 탄신일 따로 하고, 이러면 자주 모이고 사람들이 부처님을 회상하기도 좋고, 그럴 건데 왜 한 날 합니까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실은 사월 보름에 부처님 태어나시고 성도하시고 열반하시고 한 것은 빨리어 경전에 근거한 것이지, 다른 경전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않거든. 그래서 객관적으로 보면 어떤 것이 맞다, 어떤 것이 틀리다 하고 얘기할 부분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 왜 세 날을 한 번에 그냥 해버릴까?

깨달음을 이루신 아라한들의 입장에서는 축제라고 하는 것이 번거롭습니다. 각자 근기에 맞게끔 법문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법문을 하는 거고, 수행을 지도할 능력이 되는 사람은 등급에 따라서 각각 나누어서 지도를 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고요하게 열반의 즐거움을 누리고, 그렇게 지내게 되는데, 아무래도 성자의 범주에 들지 않는 일반인들이 모이면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후대에 아라한들이 결집을 하면서, 그런 소란스러움보다는 중요한 부분을 생각을 했을 거라고 봅니다.

 

부처님은 왜 태어났죠? 해탈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들이 왜 수행하죠?

부처님이 성도하신 것은 뭘 의미하는 거죠?

열반하신 것은 뭘 의미하는 거죠?

세 가지는 사실은 하나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면 인도의 풍습이나 아라한들의 습성으로 봤을 때 날짜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번잡스러운 것보다는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지 말아라 하는 의미에서 하나로 묶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개인적인 생각도 해봅니다.

 

마찬가집니다. 원래 다음주에 우리 테라와다 불교 교단에서는 붓다의 날 웨사카 뿌자라고 해서 웨삭데이(vesak day)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새겨들어야 되는 것들은 왜 그런 날을 할까 하는 것들을 잘 생각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공양을 올리고, 또 조금 전같이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하고, 하는 목적이 무엇에 있는가 하는 것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오늘 같은 날은 아, 이런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 부처님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마음들을 일으킬 줄 알아야 됩니다.

 

어느 천신이 부처님한테 와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 만약 사람들이 부처님께 귀의하면은 그 사람은 절대 악취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몸을 버리기 위해 죽고 나서 반드시 천상에 태어납니다.” 본인이 그렇게 했으니까. 그 얘기에 부처님이 “그렇다” 하고 대답을 합니다.

부처님한테 귀의만 해도 천상에 태어난다는데, 뭐 굳이 다른 거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고성에 스님이 누가 돌아가셨다고 해가지고 문상을 드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하고는 크게 인연은 없었던 분인데, 그 자식이 아는 분이 되어가지고 가서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스님 법문도 많이 듣고 불교를 참 많이 공부를 하고 했는데, 아프고 나니까 교회 사람들하고 해가지고 종교를 바꿨다고 하면서, 그날은 목사님들 하고 전도사님들 하고 많이 와서 예배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냥 그대로 인사하고 그랬는데. 단순하게 생각해서 부처님한테 귀의만 하면 천상에 태어나는 건데, 왜 굳이 그럴까? 하는 그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한테 귀의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부처님을 스승으로서 여기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외에 다른 스승을 찾을 방법이 없다 하는 뜻입니다.

가끔 스님들 간에 농담할 때도 있습니다. 다른 종교인들하고 얘기할 때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왜 불교 믿습니까? 왜 출가했습니까?” “부처님보다 더 크신 분이 없었어요! 지금이라도 부처님보다 더 훨씬 위대하고 더 크신 분이 있으면 난 그에 따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스승은 과연 누굴까? 여기 앞에 있는 스님일까? 아니면 여러분들이 믿고 따르는 부처님의 가르침일까? 아니면 그런 생각을 안 해봤을까?

특히 우리 나이 드신 분들은 인제는 수행을 할려해도 마음대로 잘 안됩니다. 힘이 딸리니까,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달리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제 먹은 밥 지금 먹을 수 있습니까? 못 먹죠. 내일 먹을 밥 지금 먹을 수 있습니까? 못 먹습니다. 지금 먹을 수 있는 것은 지금 것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 하더라도 지금이 가장 좋을 때라는 뜻입니다. '지금 내가 몸이 아파서', '형편이 안 돼서',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지금보다도 더 좋은 때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수행을 할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이 여러분들이 죽음으로부터 가장 멀리 와있는 시점입니다. 지금이 여러분들이 가장 젊은 때입니다. 지금이 여러분들에게 가장 건강할 때입니다. 언제 때를 기다릴 건데?

 

그것을 가르쳐주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란 뜻입니다.

단지 여기 있는 스님들은 그것들을 다시 리바이벌해서 전해주는 역할밖에는 못 하는 겁니다. 여러분 마음에 진정으로 부처님을 스승으로 여기고 귀의하게 될 것 같으면,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더 알려고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그것에 더욱 더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바른 법을 전해주는 곳이 있으면 가서 들을려고 하게 되는 거고, 그런 가르침이 있는 책이면 한자라도 더 볼려고 하게 되는 거고, 거기에 쓰여진 대로 내가 실천해보니까 참 나에게 좋으니까 나는 더욱더 그것을 실천하게 되는 거고, 그게 부처님의 힘입니다.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의 힘, 그걸 느끼고 이해하고 알려고 하면, 부처님을 스승으로 여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에게 생기는 괴로움, 고민들이 없어지기를 바라고, 좀 더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그런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들을 그 힘들을 느껴봐야 됩니다. 그것은 부처님을 스승으로 해서 그 가르침을 알려고 하고 그것들을 실천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지금 현재 내가 실천해야 될 것들을 분명하게 압니다. 지금 해야 될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어제 밥을 먹을려고도 하지 않고, 내일 밥을 먹을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은 당연히 죽고 나서 악처에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부처님은 그와 같은 일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하는 것을 잘 유념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 더, 빨리어 게송을 하겠습니다.

"다나와 이디 까뜨와 삼보딩 짜 랍반띠 떼" 그럽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은 보시를 시작으로 해서, 계율, 출가, 선정, 자비, 지혜, 결정심, 인내 등을 실천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그 모든 과거의 부처님들은 일체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하고 얘기합니다.

 

가끔씩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바라밀을 자꾸 닦을려고 하라" 하는 얘기를 합니다. 수행에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수행의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수행만 하면 되지” 하고 얘기합니다.

 

경전에는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바라밀만 닦을려고 하고 수행은 하지 않는 사람,

바라밀은 닦지 않고 수행만 하려고 하는 사람,

바라밀도 닦지 않고 수행도 하지 않을려고 하는 사람,

바라밀도 닦고 수행도 하는 사람.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고 경전에서는 설명을 합니다.

그 각각의 바라밀을 다 대입을 시킵니다.

 

보시만 하고 수행이나 법문 안 듣고 빨리 집으로 도망가는 사람,

보시는 하지 않고 와서 자기 수행만 하려고 하는 사람,

보시도 하지 않고 수행도 하지 않고 그냥 즐기기 위해서 오는 사람,

보시도 하고 수행도 하고 가는 사람.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면 수행에서 일정한 단계에서 진척이 없을 때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됩니다. 틀림없이 바라밀 중에 뭐가 문제가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나이 드신 분 중에 “게을러서 인제 못합니다.” 결정심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반드시 내가 이걸 해결해야 되겠다"는 굳은 마음들을 내지 못하니까 그런 거라. 그 바라밀이 부족하니까 수행의 단계에서 어떤 단계에 오더라도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지 못하는 거라.

수행을 해도 계속적으로 '나'라고 하는 것이 떨어지지 않고, 남들이 수행하는 것이 거슬리는 것만 자꾸 보인다, 제대로 수행은 하고 있지만 보시바라밀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인색하고 집착하고 갈애를 가지는 것들이 계속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그것들을 넘어서지 못하는 거라.

 

여러분은 바라밀을 닦을 때 그 바라밀을 열 개를 닦았으면 열 개의 바라밀만 성취된다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번뇌들이 열 개가 떨어져나갑니다.

거기에 맞는 각각의 번뇌들이 떨어져나갑니다.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 번뇌, 어떤 것들이라도 내 것이라고 하는 번뇌, 이런 각각의 번뇌들이 각각의 바라밀에 맞게끔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그러한 것들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겼을 때 그 사람은 수행을 하면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과거의 부처님들도 똑 마찬가지로 보시바라밀을 시작해서 각각의 바라밀을 실천하고 나서 완전한 지혜를 얻었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부처님에 대해서 항상 스승으로 생각하고 따를 수 있는 마음들을 가지고, 본인에게 중요한 해탈로 가기 위해서 필요한 수행에서 내가 부족한 바라밀이 뭔가 하는 것들을 자꾸 체크를 해서, 그것들을 자꾸 채워줄 수 있는 시간들을 가지시기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