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열선보다 중선을, 중선보다 상선을 (20190601)

담마마-마까 2022. 4. 3. 09:00

https://youtu.be/hpcbfM3QkzY

* 열선보다 중선을, 중선보다 상선을 (20190601)

 

수행들은 하고 있어요?

왜 대답들을 안 해? (수행자 : 모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왜 수행하라고 그럴까?

여러분이 아라한이 될 조짐이 보여서 수행하라고 그럴까?

아니면 곧 도와 과에 이를 것 같아서 수행하라고 그럴까?

왜 그럴까? (수행자 :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행복하라고)

예. 그것도 맞기는 맞는 표현인데.

 

그러면 여러분은 왜 수행을 해요? 혹시나 깨달음에 이를까 싶어서?

꿈 깨!!! (수행자 : 용기를 주십시오.)

깨달음에 이른다는 거는 저번 서울법회 때도 얘기했지만은 "수행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하고 얘길 했습니다. "바라밀이 뒷받침이 돼야 된다"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수행으로 인과를 분명하게 아는 것도 힘이 드는데 도와 과에 이르는 건 더더욱 힘이 듭니다. 스님들이 "계속 수행하라" 하는 이유가 그걸 바라보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을 안 하면 마음이 자꾸 나쁜 데로 가니까 그런 겁니다.

일상적인 수행이든 아니면 집중적인 수행이든 자꾸 마음을 훈련하지 않으면 선한 행위 쪽으로 기우는 것이 아니라 자꾸 마음은 악한 행위 쪽으로 갑니다.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나쁜 방향으로 자꾸 가기 때문에, 그게 쌓아온 것이 더 많기 때문에 자꾸 수행하라 하는 거고, 뭘 자꾸 알아차릴려고 하고 그렇게 하라고 얘기합니다.

 

가끔씩 스님이, 지금도 마찬가진데 스님 귀에 문제가 좀 있습니다. 그래서 혈액이 원활하게 돌지 않으면 돌지 않는 게 느껴집니다. 그러면 금방 이런 고리 쪽에 두드러기가 올라온다든지 아니면 손이 저린다든지 이런 것들이 드러나지게 됩니다. 피가 잘 돌아야 조금 건강할 건데 밖에서 오래도록 있으면서 얻은 것이 그 혈액 부분에 대한 문제들이 항상 한국에 와서 생활하다 보면 걸립니다. 그렇다고 혈액을 싹 다 뽑아내고 다시 집어넣을 수도 없는 거고, 혈액하고 혈관들이 잘 돌아야 되는데, 수행도 그와 같습니다.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게 혈액순환들이 잘 돼야 만이 됩니다. 그게 어느 정도 돼야 만이 그다음에 장을 건강하게 하고 그다음에 뼈대들을 좀 더 건강하게 하고 하는 그런 것들이 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거꾸로 합니다. 뼈를 건강하게 하는 거, 아니면 뭐 눈을 건강하게 하는 것들, 밖으로 드러난 것들을 먼저 할려고 합니다. 꼭 그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은 근본적인 게 먼저 해결이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수행을 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선한 행위, 말을 할 때든 행동을 할 때든 아니면 마음에 의도를 가지는 것이든 그런 모든 것들이 선한 행위가 되기 위한 훈련들이 돼야 됩니다. 그런 훈련들이 되면은 자연스럽게, 설혹 내가 알아차림을 놓친다고 하더라도 선한 것들을 할 수 있는 계기들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기울어져 있으면.

 

수행을 통해서 그런 선한 행위들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면 당연히 설혹 나쁜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나쁜 마음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고 금방 선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설혹 자기 자신이 욕심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욕심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망상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이게 지금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할 거 같으면 망상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고 지금 하고 있는 데다가 마음을 기울이게 됩니다.

 

또 가끔 그럴 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말할 때 말하고 나서 무슨 말했는지 기억을 못하는 경우들이 있죠?

그때 한번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한번 돌아보십시오. 대부분은 보면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에서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는 자신이 말을 할 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든지 그런 것들은 안중에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쭉 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지만은 그런 것들이 섞여버리면은 말을 하고 나서도 뭔 말을 했는지를 자신도 잘 모릅니다. 요점을 벗어나버리는 겁니다.

 

가끔씩 스님도 다른 스님이 하는 법문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 저 스님이 뭘 얘기하지?' 하는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을 할 때도 그게 선행이 되도록 해야 되듯이 스님들도 법문을 할 때는 그것이 선행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있고 행복이 있도록, 그리고 실천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보면 남의 잘못을 꼬집도록만 합니다. '너 그거 잘못했어.' '아니야, 그거 틀렸어.'

받을 그릇이 돼야 되는 거고, 받을 준비가 돼야 만이 그것들을 들을 수가 있는데, 계속 그 얘기만 합니다.

 

설법이 오히려 알아차리는 데는 굉장한 효과를 가져옵니다.

두 배의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냥 일상적인 알아차림보다는. 마음으로 생각도 해야 되고, 또 입을 통해서 말도 해야 되고,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뭔 말을 했는지도 분명히 기억을 해야 되고, 모든 것들이 다 존재를 해야만이 바른 법을 설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5년 차가 넘어가면은 아직 실력이 안 갖춰져도 자꾸 법을 설하는 훈련들을 시킵니다. 많은 대중들이 있는 데서 하는 것이 아니고 조그만 조그만 그룹들을 형성하도록 해서 자꾸 법을 설하도록 만듭니다. 하다 보면 나중에 자신이 느낍니다. '아, 내가 진짜 이 법을 설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법을 설하므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참 따뜻해지고, 그리고 그 법의 소중함을 이해할 수 있게끔 되는 거고, 그게 먼저다' 라고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선행(善行)은 혈액을 순환시켜줘서 몸을 따뜻하게 하는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멧따 수행 하시죠? 멧따 수행 하면 멧따 수행의 가장 근본적인 게 뭡니까? '모든 이들이 괴로움 없이 행복하기를' 하는 그런 마음들입니다. 자신의 따뜻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역할들을 할 때 그게 가능하게 됩니다. 본인이 따뜻해있지 않으면은 그 따뜻함은 전달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몸이 혈액이 잘 돌아서 몸이 따뜻해졌을 때 손을 건네서 다른 사람이 그 손을 만졌을 때 아, 따뜻하게 느끼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자신이 차가워져 있는 상태에서는 손을 내밀어봐야 그 사람은 따뜻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법을 설할 때도 꼭 그와 마찬가집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말을 하고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자신이 말하는 것들이 선한 행위로 인해서 말을 하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고 따뜻해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몸으로 행하는 것, 꼭 마찬가집니다. 선한 행위로 하는 몸으로 행하는 것일 때 본인도 따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따뜻해집니다. 그런 것들이 선한 행위들입니다. 수행을 통한 것이든, 말을 통한 것이든 아니면 여러분들이 몸을 통해서 하는 것이든.

 

조금 전에 여기에 보시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몸과 마음을 통해서 행동으로 보시를 합니다. 여러분이 진짜 따뜻한 마음을 지닌 채 보시를 했을 거 같으면 자기 자신도 이미 따뜻해져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럼 보시를 하고 나서도 본인의 몸과 마음은 따뜻해져 있습니다. 설혹 스님이 '이러한 공덕으로 행복해지기를, 건강해지기를' 하는 얘기를 안 해도 본인은 이미 그게 가능해진다는 얘깁니다. 이런 것들을 보통 일러서 '선한 행위들을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선한 행위들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내일 손흥민이 축구 하죠? 몰라요? 내일 한다고 그러던데, 축구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수행자 : 골을 넣어야지요.)

골을 넣어야되지요. 골을 안 먹고 골을 넣어야지요. 그런데 항상 이길 순 없죠? 그런데 경기에 최선을 다했으면 그 사람은 만족합니다. 설혹 자신이 골을 넣지 못해도 동료들이 이겼을 경우에는 또 만족을 합니다.

 

태국에 있으면서 가끔 외국인들을 만나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너는 왜 보시를 안 하냐?” “너는 왜 스님들께 탁발을 안 하냐?”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본인은 보시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좋은 마음이 아니라서 그게 싫어서 본인은 안 한대요. “그럼 어떤 마음들을 네가 봤었는데 그러느냐?” 그랬더니 보시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것을 보시하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뭔가 이익이 있기를' 그게 꼴보기 싫다는 거라. '우리 아이가 수능에 합격하기를' 하는 거와 꼭 마찬가지 마음들을 가진다는 거라.

 

그러면 “너는 그리 안 해도 선한 마음을 항상 지니고 있냐?”

자신은 수행하기 때문에 항상 선한 마음을 지니고 있대.

그래서 스님이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런 선한 마음 지닌 놈이 남들 꼭 안 좋은 마음만 그렇게 보이냐? 그 사람은 그렇게라도 자기 이익을 바라면서도 선한 행위를 몸으로 행하지 않느냐? 너는 선한 행위를 몸으로 행하지도 않고, 마음은 오히려 선한 마음을 일으키지도 않고, 말을 해도 선한 말을 하지도 않고, 뭐 네가 잘났다고 그것 때문에 너는 안 한다고 하느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선한 행위의 기본 원칙 첫 번째가 그렇습니다.

본인이 선한 행위, 그게 수행이든 뭐든 보시든 말을 하는 것이든 무엇을 통해서 하더라도 그 행위들은 수승한 선행이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보통 "바라밀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열 가지 바라밀인데 그걸 세 가지 등분으로 나누면 삼십 가지 바라밀이 된다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선한 행위는 선한 행위인데 자신의 이익만 가져오는 선한 행위, 선한 행위라도 자신의 이익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한테도 이익을 가져오는 행위, 선한 행위라도 그것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행위.

 

여러분이 행하는 선한 행위들은 어디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사람들은 뭔가를 행했으면 본인이 행한 것을 압니다. 그러면은 마음으로 '아, 이러한 공덕으로 내가 뭐가 되기를, 어떻게 하기를' 하는 마음들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러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되나? 그거는 아니라는 거라. 조금 더 그 선한 행위들을 끌어올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본인이 행한 것들이 선한 행위 중에서도 조금 더 수승한 행위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할 것!

 

며칠 전에 서울에 홍은사에 있는 스님이 한 분 내려왔어요. 여쭤볼 것도 있고 해서 내려왔어요. 그런데 그 스님이 가져온 게 뭐냐면 스님이 안 먹는 걸 가져왔어요. 녹차. 스님이 녹차를 못 먹거든. 녹차를 먹으면 속이 많이 부대껴, 쓰리고.

만약에 그걸 가져왔는데 내가 '어, 나 그거 안 먹는 건데' 했으면 가져온 사람이 되게 무안했을 거라. 그래서 가지고 온 건데 그냥 우리 이거 가지고 차 한 잔 먹자 하면서 얘기를 하면서 녹차를 먹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오후가 돼서는 속이 많이 아립니다. 속이 좀 많이 안 좋아. 그래도 내색 안 하고 그냥 맛있다 하고 먹었어요.

 

그러고 나서 법에 대한 얘기, 여러 가지 수행에 대한 질문들을 하기에 그것들을 쭉 얘기를 하고, 그러고 나서 그 스님이 떠날 때까지 두 시간 한 세 시간 정도 얘기를 했는데, 그 서울에서 내려오는 시간, 왔다 갔다 하는 시간보다도 여기 있는 시간이 훨씬 짧습니다. 짧은데도 “스님, 제가 오기를 참 잘했습니다.”

 

그게 중선이라. 중간선! 자신을 먼저 돌아보지 않고, 남에 대한 배려들이나 남이 조금 더 이익이 되는 것들을 배려해주는 것들.

여러분이 공양 올렸으면 '이 공양 올린 것으로 인해서 내가 행복해지기를' 할 거 같으면 '열선'이 되는 거고, '이 공양 올린 것으로 인해서 스님이 조금 더 건강해지고 행복해져서 좋은 법 많이 펼쳐주기를' 할 거 같으면 그게 '중선'이라는 거라.

적어도 중선까지만 되어도 남들한테는 지탄받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 외국인같이 '저 마음이 저래가지고 내가 저렇기 때문에 내가 아예 탁발할 때 탁발도 안 한다.' 그런 마음이 들도록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남에게 선한 행위를 하도록 하지는 못할망정 선한 행위를 막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거라. 내가 선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그래서 가끔 수행처 같은 데서는 그걸 달리 하기도 합니다.

수행하는데 뭐 집중수행이 있다, 집중수행 보시금을 딱 정해서 하는 데가 있고, 그 보시금을 정하지 않고 하는 데도 있습니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 입장은 “그거 정하지 말아라.” 그럽니다.

선한 마음을 일으키도록은 하더라도 그 선한 마음이 남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언뜻 이해가 안 가죠? 나중에 여러분들이 그것을 이해할 때가 있을 겁니다. 적어도 내가 행한 선한 행위가 다른 사람들의 선행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본인이 돌아볼 줄 알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선한 행위를 하더라도 상선이 되는 것은, 최상선이 되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알아차림이 분명한 상태에서 행하게 될 때입니다.

탁발을 할 때도 걸어오면서 걸어오는 것을 그대로 알아차리고, 보시를 하면 보시를 하는 행위를 그대로 알아차리고 그때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고, 순간적으로 본인이 행한 선한 행위는 무수하게 많아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행한 행위는 보시라는 딱 하나의 선한 행위지만은 그게 깨달음 하고 연결될 때는 그 선한 행위는 끊임없이 여러 가지들을 낳게 되고 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보시를 하는 중간에도 분명하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 생겨날 수도 있고, 보시를 하고 돌아가면서도 그런 조건들이 되는 겁니다. 어떠한 조건에서도 그것은 성립될 수가 있는데 본인은 선한 행위 하나만을 자꾸 생각해버리게 됩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바뀝니다. 끊임없이 마음은 좋은 마음으로 됐다가 악한 마음으로 됐다가, 조금 전과 같이 개인의 이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났다가도,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바라는 마음으로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하면서 하는 행위들은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버립니다.

 

선한 행위의 첫 번째 포인트가 그 행위가 좀 더 수승한 선한 행위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본인이 행하고 나서 아, 내가 어떠한 상태로써 보시를 행했는가? 어떠한 상태로써 선한 행위를 행했는가? 하는 걸 자꾸 돌아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선행의 포인트 두 번째는, 자신이 행한 선행의 인과를 분명하게 알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인과가 다음 세대에 나타나는 게 아니고 금방금방 나타나죠! 아마 요즘 사회는 더 빨라지기 때문에 인과가 금방금방 나타나지게 되고, 훨씬 빠르게 나타나지게 됩니다. 안 무서워요? (수행자 : 무섭습니다.)

자신이 하는 게 금방금방 그대로 나타나는데! 선행의 결과가 금방금방 나타난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행위는 업(業)이 되죠! 업은 쩨따나(cetanā)-의지입니다.

자신이 일으키는 의지가 어떠한 경우든지 업이 되고, 그 업은 선한 거면 선한 행위와 그 과보를 낳게 되고, 악한 거면 악한 행위와 악한 과보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더더구나 선한 행위들을 많이 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금방금방 나타나기 때문에, 악한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더욱더 일으켜야 됩니다.

 

인과(因果)를 보라고 하는 것은

첫 번째가 뭐냐면 그 선행의 의지를 강화시켜주는 역할들을 한다는 겁니다.

더욱더 선한 것들을 행해야 되겠다는 의지를 강화시켜줄 수 있게 됩니다.

 

수행할 때 호흡을 관찰할 때 호흡이 아주 미세해지고 할 거 같으면 사람들이 떨어지는 잘못이 뭐냐면, 잠에 떨어지든지 아니면 망상이 일어나든지 하게 됩니다. 호흡이 아주 미세해지고 하는데.

그걸 탈출하는 방법이 뭘까? 아무리 봐도 지금 내 호흡이 미세해가지고 호흡을 하고 있는지 안 하고 있는지, 이게 시작과 끝이 어떻게 돼있는지 잘 모릅니다. 아주 미세해지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냥 툭 잠에 떨어지든지 아니면 그때 대상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금방 망상들이 일어나지게 됩니다.

 

호흡이 미세해지면은 의지를 강화시켜줘야 됩니다.

내가 더욱더 수행을 열심히 해서 이 대상을 알아차리겠다 하는 마음을 강하게 해주지 않으면은, 미세해진 호흡을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실제적으로는 호흡도 미세해질 뿐 아니라, 그걸 알아차리는 의지력도 더 약해져 있습니다. 의지를 강하게 해줄 때 호흡이 다시 살아납니다. 실제 호흡이 살아나는 게 아니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분명하게 대상과 일치가 되기 때문에 그게 살아나는 것처럼 보여질 뿐입니다.

 

선행과 악행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과를 이해를 하고 알 거 같으면, 무섭고 두려움을 알 거 같으면 선한 행위를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과를 자꾸 보라고 그럽니다.

 

두 번째, 사띠를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왜 하지? 선한 행위를 왜 하죠?

조금 전 같이 첫 번째 같이 열선이 되는지, 중선이 되는지, 상선이 되는지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 거 같으면 본인이 더욱 노력해서 상선이 되도록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 거 같으면 의지력이 더욱더 강화됩니다. 뭐가 있어 가능합니까? 사띠가 있어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선행의 인과를 본다고 하는 것은 의지력을 강화시켜줄뿐 아니라 사띠도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게 선행의 인과를 아는 두 번째고,

 

세 번째는 선행의 인과를 알면 수행에서는 원인·결과를 알게 되면 수행에서는 지혜가 일어나는 계기가 됩니다. 조건들입니다.

사띠 열심히 하면 나중에는, 호흡 한번 봅시다. 일어났음을 알고 사라짐을 안다, 그럼 일어났음이 끝나는 게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사라짐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원인·결과, 원인·결과입니다. 조건지워지고 그다음 조건지워지는 것.

호흡이 시작되는 것을 알고 진행되는 것을 알고 호흡이 끝나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호흡이 끝나고 나서는 호흡이 다시 안 됩니까? 또 호흡이 시작됩니다. 시작과 중간과 끝을 알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인과를 아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원인 결과입니다. 호흡이 끝나는 원인이 있으니까 다시 호흡이 시작되는 결과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수행에서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앞에 것과 다음 것이 다른 것을 알고 앞에 것과 뒤에 것이 조건지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수행에서 굉장히 중요한 하나의 포인트일뿐 아니라, 지혜에서도 그것이 지혜가 열리는 포인트입니다.

 

선행의 인과를 안다는 것의 세 번째 포인트는, 바로 지혜가 열릴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행의 첫 번째가 좀 더 나은 선행이 되도록 하는 것이 되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 선행이 인과를 분명하게 알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선행의 포인트 세 번째는, 자애수행의 마지막에는 뭐하죠?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합니다.

수행이 잘 되면 어떻게 하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됩니다.

나쁜 방향으로 나아갈 거 같으면 신통이 열려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는 상태가 되겠지만 그래서 그걸 나쁘게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본인이 완벽해지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열립니다. 여러분의 선행이 조금 더 완벽해지면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들이나 이해심들이 더욱더 깊어지게 됩니다.

내가 행한 선행에서 얼마만큼 상대방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들, 자기 자신이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지를 자꾸 알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본인이 자신을 내세울려고 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본인이 상대방에 대해서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늘어날수록 선행은 더 깊어지는 상태가 됩니다.

 

수행에서 조금 더 진척이 된다는 포인트는 라고 하는 것이 얼마만큼 떨어져나갔느냐에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그 얘기는 자신에 대해서 좀 더 겸손하고 겸허한 마음을 가짐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들은 더욱더 커진다는 뜻입니다.

본인의 선행이 어느 정도인지는 그것으로도 측정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세 가지 선행의 포인트입니다.

 

첫 번째가 이왕하는 선행이면 좀 더 나은 선행이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두 번째는 본인이 하는 선행에 대해서 인과를 분명하게 이해를 할려고 하는 것,

세 번째는 본인이 하는 선행으로 인해서 좀 더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들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 세 가지가 여러분들이 수행을 통하든, 보시를 통하든, 아니면 결정심을 내는 것이든 어떠한 바라밀이든 그 선한 행위들을 할 때 공통되는 그러한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자꾸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수행자 질문 : 스님 아까 법문에 질문을 한가지 드리고 싶습니다.

아까 숨이 미약해서 관찰이 잘 안될 때에 의지력을 키워주라 하셨는데, 혹시 의지력을 가졌을 때에 대상을 붙잡아버릴 위험성이 높습니까?

 

스님 답변 : 의지력하고 대상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의지력 자체가 대상이 됩니다. 숨이 미세해진 것들을 숨을 강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숨하고는 관계없이 마음을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아, 내가 좀 더 수행을 열심히 해야 되겠다, 내가 도와 과에 이르러야 되겠다, 내가 지금 이렇게 그냥 허송세월 보낼 수 없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들입니다.

 

수행자 : 그 의지력을 말씀하신 겁니까? 저는 대상을 보고자 하는 의지력을...

스님 : 그게 대상을 보고자 하는 의지력입니다.

수행자 : 관찰이 안 되는 것을 관찰하고자 하는 의지력...

스님 : 아닙니다. 그 부분이 아닙니다. 그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게 숨이 미약할 때 부분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걸 착각을 해버립니다. 수행 잘하고 있다고 착각을 해버립니다. 허송세월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하고.

가끔씩 잠에 떨어지면 나중에 가면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조차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버리는 경우도 있다는 거라. 그거는 알아차리는 마음이 약해져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에 그렇게 지나가버리게 되는 거라.

 

가끔씩 나이 드신 분들한테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나이 드신 분한테는 죄송하지만 “여러분은 도와 과에 이르기 틀렸습니다. 그냥 그거는 포기하십시요.”

여기 있는 분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뭔가를 할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되짚어 보라는 겁니다. 왜 그럴까? 의지력을 키워도 키워지지가 않기 때문에. 몸이 따라줘야 의지력도 키워지는 건데, 지금 여러분은 아직은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마음 먹은 대로 될 수가 있습니다. 그때 해야 되는 겁니다. 나중에는 진짜 뭔가를 할려고 했을 때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가끔 나이 드신 분은 그런 상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수행하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주는 경우 수행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안됩니다. 이 시간에는 요마만큼 앉아서 좌선을 하면 뭔가가 될 거 같은데 할 재간이 없는 거라. 몸이 안 따라주니까. 틀렸다는 겁니다. 그 방법으로 안 되고 다른 방법으로 해야 된다고 하는데도 억지로 지금 하는 거라. 그거는 의지력을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고집을 오히려 더 강화시켜 주는 거라.

 

의지력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그 의지력은 대상을 붙잡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숨이 미약해졌다, 미약해진 것을 숨을 확인할려고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탁 붙잡고 들어가버리면 이미 마음은 그것을 끌어당깁니다. 그러면 그 숨은 조작을 하게 됩니다. 그거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거하고 관계없이 바른 방법으로 의지력을 강화시켜주는 역할로써 키워나가야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