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 [집중수행 인터뷰] 경험하는 순간과 사띠하는 순간을 분명히 구별하라 - 사띠의 기본1 (20190629)

담마마-마까 2022. 4. 17. 20:17

https://youtu.be/9A2dpVgLI-o

★ [집중수행 인터뷰] 경험하는 순간과 사띠하는 순간을 분명히 구별하라 - 사띠의 기본1 (20190629)

<구별은 하더라도 그것을 분석하고 판단하지는 말아라>

 

집중수행을 하면...

힘이 드는 거 말고, 뭔가 결과들은 있어야 될 거 아니라? 막히는 부분이 어디 부분에서 막히는데?

(수행자1 : 저는 마음의 흐름이라든가 물질하고 두 갈래로는 대충 구분이 되는데, 거기서 마음의 생멸 흐름이라든가, 생멸은 아직 잘 안 보여요. 어떨 때는 조금 보일락 말락 하다가...)

마음의 흐름은 지금 분명하게 인식을 하고 있다는 거네.

(수행자1 : 대충 따라가고 있습니다. 감각이 일어날 때 그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계속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럼 물질적인 것은? 호흡이든지?

(수행자1 : 호흡요? 저는 지금 호흡은 안 보고, 배에서 일어나는 감각은 보고 있습니다.)

 

한번 봅시다 이.

집중수행에서 항상 조심해야 되는 사띠의 기본!

첫 번째가 뭐냐 하면 경험하는 순간과 사띠하는 순간을 구분하는 것!

구분이 돼요? 예를 들어봅시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있다. 감각을 본다고 했죠? 그러면 배에서 불러올 때 따뜻한 느낌이 있든 아니면 배가 불러올 때 팽창하는 느낌이 있든, 그걸 사띠하고 있단 말입니다.

 

어떻게 구분해요? 경험되는 순간은 어떤 거고, 사띠하는 순간은 어떤 거라?

(수행자1 : 사대들이 일어나고, 팽창되고 할 때, 배가 불러올 때는 점점점점 딱딱한 느낌으로 변해간다든가 하고 또 배가 수축할 때는 그러한 느낌이 갑자기 없어지고 사라지면서 텅빈 느낌으로 수축이 된다든가...)

 

지금 얘기하는 것은 경험하는 순간을 계속적으로 아는 것뿐인 거고, 그럼 사띠하는 순간은 어떤 거라?

(수행자1 : 그거 일어났다는 감각을 보고 아는 거죠. 딱딱해지는 팽창되어 가는 과정을..)

 

어떤 게 먼저라? 팽창되는 게 있으면 팽창되는 게 먼저였어요?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띠가 먼저였어요? 아니면 동시에 일어나고 있어요? 아니면 사띠하는 순간이 앞서고 있어요?

(수행자1 : 팽창되는 것이 사실은 보이지는 않고, 감각으로 아는 것이고...)

 

그러니까 감각으로. 그걸 구분할 수 있는 능력들을 집중수행할 때 키워야 됩니다. 그게 구분이 안 되면 항상 오토매틱 되고 사띠 자체가 그냥 몰입이 되지 않고 항상 비슷한 힘으로 그냥 존재를 해버리게 됩니다.

수행자들이 특히 출가한 수행자들이 얘기하는 것이 뭐냐면 "대충 사띠하고 있다"는 거라. "대충 사띠"

 

그래서 "경행을 할 때 아주 빠르게 걸어봐라" 하고 가끔씩 스님이 얘기를 합니다. 왜 그런지 알아요? 지금 분명히 인식을 하고 있는데 사띠를 하고 있는데, 사띠하고 있는 순간하고 지금 진행되면서 그것들이 일어나는 현상들을 인식하는 거하고 이게 뒤따라 오는 건지, 아니면 딱 붙어있는 건지, 그런 걸 구분하기 가장 쉬운 게 뭐냐면 많이 움직여지고 할 때 그것들을 구분하기가 쉬워집니다.

 

그걸 구분을 못하면 어떠한 경우든지 거기에는 자아가 존재를 해가지고 항상 그것들을 조작할려고 그럽니다.

(수행자1 : 그게 한데 같이 붙어가지고 안 일어납니까?)

 

상황마다 틀립니다.

(수행자1 : 틀립니까?)

 

빠르게 움직일 때는 그 사띠하는 마음이 바로 뒤따라서 붙어서 가는 것처럼, 그러니까 앞에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마음이 순간인데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이 바로 뒤따라서 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건 빠를 때이고.

천천히 갈 때는 어떨 때는 마음이 앞서가지고 있는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수행을 하면서 그 포인트를 항상 유념을 해야 됩니다. 그걸 구분할줄 알아야만이 그냥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는 거라.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수행을 잘하는 사람들은 일년 전에 자기가 뭐했는지를 잘 기억을 못합니다. 일년 전이 아니라 한달 전에 자기가 한 것도 자기가 기억을 못합니다. 어떨 때는 하루 전에 것도 기억을 못합니다. 기억을 못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에, 바로바로 인식을 하고 그대로 버려버리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거라.

 

(수행자1 : 사띠만 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그런 뜻입니까?)

사띠를 자꾸 생각하고 같은 범주에 넣으면 안 됩니다.

사띠를 분명하게 하면 분명히 그걸 기억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능력이 생기더라도 그걸 저장하는 공간으로 담지를 않기 때문에, 그것은 담아져 있는데 그것을 끄집어내지지를 않는 거라.

 

그래서 보통 여러분들이 문제가 되는 게 뭐냐면 과거의 생각들이나 기억들을 끄집어내기 때문에 항상 문제가 되는 거라.

그런데 끄집어내더라도 있는 그대로 끄집어내면 되는데 그게 자신하고 관계된 것하고 결합해가지고 끄집어내져서 문제를 일으키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래서 수행에서 포인트가 바로 지금 얘기하는 그 2가지를 구분하는 걸 자꾸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그게 마음에 대한 것을 알아차리든 물질적인 것을 알아차리든 감각적인 것을 알아차리든, 그 감각적이든 마음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과 그것을 사띠하는 순간을 구분하는 능력들을 자꾸 한번 키워보라는 거라.

 

그럴려면 스님이 계속 강조하는데도 안 되는게 뭐냐면 경행을 많이 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경행을 많이 해야지, 좌선 많이 해가지고는 계속 그냥, 나쁘게 얘기하면 그냥 '어중간한 사띠'만 계속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좌선 많이 하지마라는 거라. 좌선은 그리 안 해도 언젠가는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많이 하게끔 돼있는 거라. 그래서 일부러 많이 앉을려고 하지 말고 경행을 되도록이면 많이 하라는 거라.

경행을 하더라도 천천히만 걷지 말고, 좀 빠르게도 걸어보고 그래서 이번 타임에는 좀 빠르게 한번 해본다 할 것 같으면 빠르게 하면서 그것들을 자꾸 할려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경행하는 길을 아주 길게 해가지고 한다든지, 밖에 나가서 해도 괜찮으니까 그렇게 자꾸 하도록 해보십시오.

 

집중수행 할 때 항상 이게 사띠의 기본입니다.

첫 번째 경험하는 순간과 사띠하는 순간이 다른 것들을 분명히 발견하라.

그걸 발견해야만이 수행은 자연스럽게 잘 돼나갑니다.

 

그다음에 집중수행 할 때 또 유념해야 될 게 한 가지가,

어떠한 경우든지 분석하고 판단내릴려고 하지 말아라.

보통 수행을 하다가 보면 경험되어지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니밋따가 일어나기도 하고 아주 고요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많은 게 일어나는데, 대부분 여기서 실패하는 것이 뭐냐면 그것을 분석할려고 합니다.

그건 여러분 몫이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분석하고 판단내릴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구분할 필요는 있습니다.

'아, 이게 일어나는 현상이구나' '아, 내가 분명히 사띠를 했구나' '그래서 이걸 하고나면 요렇게 바뀌는구나' 그런 구분을 할지는 몰라도 '아, 이게 무엇이다' 하고 자기 스스로 판단내리지는 말아라는 거라.

이게 '담마 와짜나'이니, 내가 사띠가 조금 더 잘되는 것이니, '니밋따'이니 그걸 왜 하고 있느냐는 거라.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아이를 잘 키우는 사람들을 보면 아이의 행동거지를 가만히 봅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공부를 하고 있다면 얘가 잘하는 게 뭔지를 분명하게 압니다. 알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공부를 시켜줍니다.

그런데 애를 망치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먼저 판단을 내립니다. “너는 서울대 가야돼” “너는 의사 돼야 돼”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틀을 끼워맞춥니다.

판단하고 그다음에 그걸 분석한다는 것은 후자라.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거 하지 말고 구별이 되면 구별되는 것만 인식만 하면 돼. 인식만 하고 놓아버려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떤 상황이다 하는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끔씩 오면 “스님, 저 니밋따 경험했습니다.” 아니면 “스님, 저는 어떤 상태에 이르는 걸 이번 수행에서 경험했습니다.”

자기가 왜 판단을 내리느냐는 거라.

그것은 수행에서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지 말아라는 거라. 구별은 할지 몰라도 그것을 분석하고 판단하지는 말아라는 거라. 그것만 안 하고 그냥 지금 현재 보이는 데에만 알아차리도록 그렇게 자꾸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집중수행 할 때의 두 가지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이 두 가지는 잊어버리지 말고 항상 머리속에 자꾸 끼워놓아라. 그래서 수행하다가 걸리면 '어, 내가 지금 이걸 1번에 해당되는 걸 하고 있는지 아니면 2번에 해당되는 걸 하고 있는지'를 딱 판단내려서 그걸 하고 있으면 탁 버려버리고 다시 또 시작을 하도록 하고.

그러니까 집중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 하면 됩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오고 또 막히면 또다시 처음으로 다시 돌아오고, 잘 될 때는 그냥 쭉 밀고 나가면 되는 거고,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되는 거지,

수행시간이 많이 늘어났다 해가지고 수행이 꼭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본만 잊어버리지 않고 다시 돌아갈 수 있으면 집중수행 할 때는 결과들은 조금씩은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수행자2 : 분석하고 구분하고는 어떻게 틀립니까? 구분하다 보면 분석되는 거 아닙니까?)

대부분 분석하고 나면 바로 구분을 합니다. 아, 구분을 하고 나면 보통 분석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걸 하지 말아라는 거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두 가지 패턴으로 합니다. 구별하고 나서 분석하는 경우가 있고 그건 판단한다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판단하고 나서 다시 구별하는 경우가 있고, 두 가지 패턴이 일상생활에서는 통상적으로 쓰입니다.

그런데 수행에서는 절대 그렇게 하지 마라는 거라. 수행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구분하고 분석하는 것은 아,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지 말고, 구별이 되면 구별만 하면 됩니다. '구별이구나' 하고 '다르구나' 하고만 알면 됩니다. 그것만.

 

(수행자2 : 이게 그거네요. 구별하고 보니 '아. 이게 그거네' 하면서 판단하는 거!)

그러니까 그 판단을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걸 하지 말아라는 거라.

 

(수행자1 : 그런데 배를 관찰할 때, 배에서 마음을 띄워서(떨어뜨려서) 이렇게 바라볼 때와 그때는 개념이 자꾸 개입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어떨 때는 마음이 살포시 배에 올라앉는다는 느낌에 있을 때에는 배가 팽창할 때도 띄워가는 그런 느낌이 느껴지고, 그전에 스님이 한 30센치 띄워가지고 배를 지켜보라 해서 그걸 하니까 자꾸 개념이 일어나더라구요. 그러니까 배가 일어나는 것이 있고 실제로 상상으로 배가 하는 팽창하는 것 두 가지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더라구요.)

 

뭐 잘못 이해를 한 것 같습니다.

띄워라고 얘기할 때는 그게 실재하는 대상이 아닐 때 띄우는 것이 맞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애수행을 한다든지 아니면 불수념을 한다든지 사수념을 한다든지 실재하는 대상이 아닐 때는 띄워야 됩니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띄워서 떨어져서 볼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실재하는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스님이 그걸 띄우라고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 실재하는 대상은 만약에 배가 있다. 그럼 배 위에다가 마음을 올린다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30센치 앞에 띄워놔 놓고 이걸 바라보라고 제가 그렇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수행자1 : 옛날에 한 번 들은 것 같아가지고, 두 가지 가지고 자꾸 실험을 해봤거든요.)

그래서 실재하는 것은 거기에다가 마음을 두라는 거라. 실재하는 것이 아닐 때에는 거기에 두지 말고 마음을 띄워놔 놓고 그것을 대상을 봐라.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수행자3 : 호흡이 힘들어서요, 복식호흡 하는데 그게 자꾸 신경이 쓰여서 집중이 잘 안되요.)

호흡이 힘들다구요? 복식호흡을 배웠었어요? (수행자3 : 아닙니다.)

복식호흡하고 나서 상기가 일어나고 하는 것은 없습니까?

(수행자3 : 그게 집중이 잘 안되니까 정신이 산만해지고 집중이 잘 안돼요...)

배를 놓을 때 허리를 자꾸 곧추 세울려고 하다보면 배까지 곧추세워지거든요. 배가 긴장이 돼가지고 빳빳한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배는 물풍선과 같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물풍선을 앞에다 살풋하게 톡 떨어뜨려 놓으면 생긴 형태가 그대로 있는 게 아니고 물이 들어간 것에 따라서 약간 느슨하게 바뀐단 말이라. 배를 그렇게 놓는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요.

허리 부분은 되도록이면 편편하게 척추 하나하나가 쌓이듯이 착착착 쌓이는 것처럼 인식이 되더라도, 앞에 있는 배는 그냥 살포시 내려놓는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리 해가지고 손을 배 위에다 대놓고 호흡을 해보라고.

그럼 호흡이 인식이 돼야 돼. 어떠한 경우든지.

그럼 '호흡이 되는 것이 인식이 되고 그게 자연스럽게 되면서 그걸 30분 했다, 그래도 상기가 안 일어나고 편안하다' 그러면 그 방식으로 쭉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호흡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되는 거지, 이때까지 했던 복식호흡이라 해가지고 그 방법으로 할 거 같으면 수행은 잘 안됩니다. 그래서 호흡하는 법부터 먼저 배우도록 하고,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 알려면 1분에 호흡을 몇번 하고 있는지를 체크를 하라는 거라.

타이머 있을 거 아니에요. 타이머 있으면 1분을 맞춰가지고 가장 편안할 때, 그러니까 경행하고 나서나 밥 먹고 나서나 이럴 때는 빼고, 조금 시간 지나고 나서 조금 편안할 때, 그리고 좌선을 한 시간도 좀 10분 정도 지나고 나서, 한번 체크를 해보라는 거라.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한 번으로 했을 때 1분 동안에 몇 번 하는가? 그걸 이번에도 한 번 재보고, 좀 있다 또 한번 재보고, 해가지고 그걸 분명히 본인이 한번 생각을 해보라고.

어떤 때가 가장 편한가? 그럼 그 호흡을 자꾸 기억을 해야 돼.

만약에 1분에 16번 하는 것이 가장 편한 상태고 내가 호흡을 관찰하기가 수월하다, 할 것 같으면 그렇게 자꾸 만들도록 자꾸 하라는 거라.

 

그리고 호흡은 동일한 수준으로 똑같이 가는 것이, 한 시간 한다면 한 시간 동안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게 익숙해지면 나중에 그게 느려지고 엷어지고 거의 안 쉬게 되고 이렇게 스스로 바뀌어나가는데, 그렇게 되기 전에는 패턴을 동일하게 가져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한번 조금조금 체크를 한번 해보십시요.

자연스러운 호흡을, 긴장되지 않고, 수행에서 피곤하고 하면 안되거든.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이번 집중수행에서는 만들려고 해보십시요.

관찰을, 사띠를 안 해도 자연스럽게 호흡만 하고 하는 법만 알아도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 확 듭니다. 그렇게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수행자 4 : 저는 아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마음으로 집중수행에 참여했습니다. 요즘은 집에서 좌선하고 집중하고 그럴 여력이 잘 안되기 때문에, 여기 오면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힘을 얻어가고, 그래서 그걸 목적으로 사실은 참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결정심이라. 수행이 안 될 때는 결정심의 다섯 가지 조건이 있거든요. 그중에 하나가 조금 전에 얘기한 "처음으로 돌아갈려고 하는 마음을 딱 가지는 것", 그거 내는 것이 수행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수행이 잘될 때 지혜가 탁 일어날 때, 일어나는 마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순간에 다른 마음들이 일어나는데, 그중에 하나가 뭐냐면 조금 전에 처음으로 돌아갈려고 하는 결정심의 마음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거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 부분은 본인도 스스로 자꾸 키울려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잘했습니다.

 

이번 수행에서도 수행이 잘 되는 사람은 그걸 한번 체크를 해봐요.

잘될 때 어떤 마음, 어떤 마음이 있었는지를 한번 구분을 해봐요.

몇 개의 마음이 있었는지.

그거 알아내면 내가 상을 줄게요. 중요한 부분입니다.

(수행자2 : 잘될 때는 마음도 가볍고 몸도 가볍고...)

 

순간에 일어나는 마음, 쉽게 말하면 결정심의 마음이 있고, 대상을 향해 겨냥하는 마음이 있고, 집중되는 마음이 있고 여러 가지 마음들이 있는데, 그걸 구분할 수 있는 능력들이 생겨나야 됩니다.

이게 구분이 안 되면 도와 과에는 못 들어요.

 

(수행자2 : 도와 과에는 생각도 안 하겠지만)

포기했어요?

(수행자2 : 포기 안 했습니다. 일단 하다가 보면 ‘이게 진짜 집중력의 마음이다, 이게 진짜 적멸에 든 마음이다’ 하는 그런 비슷한 마음이 드는데요, ‘이게 고요에 빠진 마음이다, 고요해진 마음이다’...)

 

그렇게 '고요해진 마음이다' '집중된 마음이다' 하고 알 때 그때 일어나는 마음들이 순간적으로 몇 개가 탁 있다니까. 그걸 볼 줄 알아야 되는 거라.

(수행자1 : 그럼 그때 일어나는 마음을 관찰해야 됩니까?)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아주 예리해지면 그게 보여집니다.

(수행자2 : 아, 잘될 때 그것이 의욕이 느낄 때 일어나는 마음이라는 말씀인데...)

(수행자1 : 그런데 그럴 때 어떤 때는 보면은 생각도 못했던 어떠한 지혜로운 생각들 하나가 떠오르는 그거는?)

그런 거 말고.

 

(수행자4 : 저는 예전에 수행할 때 경험했던 일 중에 하나가, 어떤 일로 갑자기 삐띠가 생기고 집중력이 굉장히 예리해지는 게 느껴졌고, 그때는 다른 집중수행처에서 한참 얘기들을 하는 담마토크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 내내 집중하다가, 소리도 귀에 탁탁 닿는 것이 느껴지고, 형상들도 보이는 것들이 탁탁 눈에 닿는 것들이 느껴지고, 그러면서 그 토크 시간이 끝나니까, '내가 조용한 곳으로 가야되겠다' 그 순간에 그런 마음이 일어나고,

그래서 숲길로 천천히 걸어가다가 '아, 여기가 적당하겠다' 해서 적당한 곳에 앉고, 걸어가는 동안에도 들리는 것, 보이는 것들이 계속 탁탁 닿는 것들이 느껴지고, 걸어가면서 '아, 여기가 좋겠다' 그러면서 적당한 곳에 앉고, '앉아서 눈을 감고 집중해야지' 그런 마음이 일어나고,

그래서 앉아서 잠깐 집중하는데 뭔가 몸에 쓱 스치듯 지나가는(닿는) 것을 알고, 뭔가가 일어나고, 저는 그것을 물질이라고 인식을 했습니다만, 물질이 일어나는 그 순간마다 그것을 아는 마음이 탁탁 바로 붙어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걸 보라는 거라.

다른 게 다른 줄은 알고 아주 빠르게 순간적으로 탁 탁 탁 일어나는데, 만약에 일곱 개가 일어나면 일곱 개가 다 보입니다. 그걸 보라는 거라.

 

(수행자4 : 뭔가 닿는 느낌이 일어나니까 스르르륵 일어나는 것이 보이고, 착 일어나니까 또 착 보이고, 그러다가 문득 '아, 바람이구나' 생각이 일어나니까 (집중이) 탁 깨져버렸어요)

 

그게 관념, 판단해버리니까 그렇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걸 하지 말아라는 거라. 구별은 했는데 거기서 그냥 끝내고 놔버려야 되는데 그걸.

 

(수행자4 : 그전까지는 그냥 '물질이다', '아는 마음이다'를 알았는데 '바람이다' 생각이 드는 순간에 그냥 집중이 깨져버리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수행이 잘될 때 오히려 마음이 고요해지고 하나에 확 몰입돼 있을 거 같지만,

실제로 마음은 알아차림이 더 훨씬 많아집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고요하게 선정에 들어있듯이 되고.

그 상태들을 빨리 경험들을 하라는 거라.

 

(수행자2 : 그런데 아까 스님 말씀이 진짜 참 수승하고 ...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앎들이 올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진짜 수행이 고맙다 해가지고 혼자 마음이 막 눈물을 흘리고 그럴 때도 있습니다.)

 

대상에 대한 반응하는 마음을 보면 지금 현재 얼마나 고요한 상태의 마음인지를 알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대상에 대해서 반응하는데 눈물흘렸다" 그러면 이미 내가 반은 오바 하고 있다는 얘기라.

(수행자2 : 오바입니까, 그게?)

 

이렇게 보면 됩니다. 판단하는 기준을.

''라고 하는 것을 얼마만큼 대상에서 떨어뜨려 놓고 있는가?

그다음에 자극, 외부적이든 내부적이든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마음이 얼마나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에 있는가 아닌가, 이런 것들 보통 대여섯 개를 가지고 판단을 하는데 그런 것 가지고 판단하면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급격하게 좋은 상태로 확 휩쓸린다든지 이런 것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경험은 했는데 거기서 자기가 자기 스스로의 마음을 콘트롤 못하니까 그쪽으로 넘어가버리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런 것은 자제를 하고 다시 또 돌아오도록 하고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수행자4 : 그때 경험했을 때는 삐띠, 수카, 빳삿디 이런 것들이 순차적으로 연결이 되더라구요 계속.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그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니까 그때 '순수하게 무아의 상태였구나.' '내가 나를 전혀 의식을 안 하고 단지 집중만 알아차리기만 했었구나.'

그 삐띠가 일어나게 된 계기가 스님께 공양청을 신청하고 나서, 공양을 올리기도 전에 신청하고 나서 너무 기뻐서 '아, 내가 어쩌다 이런 복을 짓게 됐을까' 하는 그 마음에서 시작이 됐습니다.

그때 삐띠가 일어나고 다음 날까지도 순차적으로 수카로 이어지고 다시 빳삿디로 연결이 되면서 아까 처음에 얘기했던 그렇게 깊은 몰입을 하는 경험들을 하게 됐는데, 나중에 그걸 돌아보니까 삐띠가 일어나는 과정에서도 '나'가 전혀 개입이 안 된 상태였다는 거를 그 당시는 그것까지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고,

요즘은 '나'가 개입이 안 되는 게 사실상 어렵습니다. 그때는 뭣도 모르고 그러한 참 귀한 시간을 얻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알고 나니까 그걸 떨어뜨리는 게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래도 다시 또 자꾸 예전으로 돌아가고 돌아가고 그렇게 만들어봐 봐요.

다른 질문들은?

그러면은 담마토크들 더 하고 수행들을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