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네 가지 성인_깨달음 (20160422. 대구)

담마마-마까 2022. 2. 10. 09:00

https://youtu.be/eOSysMnc_U8

* 네 가지 성인_깨달음 (20160422. 대구)

 

잠깐 묵념 좀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저번 주 토요일날(4월 16일) 우 빤디따 스님이 입멸하셨습니다. 우 빤디따 스님은 저한테도 참 중요한 스승이었습니다. 지금 수행법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또 그 방법대로 수행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 분이 우 빤디따 스님이었습니다. 80년도 말부터 90년도 초까지 스님 밑에서 수행을 했었는데...

내가 몸이 안 좋을 때가 보면 꼭 큰 스승 분들이 한 분씩 돌아가시더라고. 저번에도 우 자띨라 스님도 그러시더니 이번에 또 그러시더라고. 참 마음으로는 좀 허전한 부분이 있습니다. 살아계시는 모습이 참 좋았는데, 스님한테는 이제는 또 다른 스승 한 분이 또 이 세상을 떠나셨구나 하는 그런 마음이 듭니다.

잠깐 눈을 감고 '스님께서 행복하시기를' 하는 마음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 · ·

 

자! 바로 하고, 오늘 법문할 교재에 들어가겠습니다. 원래 교재를 다른 거로 작성을 했다가 이거는 여러분들한테 너무 어려운 거 같아가지고 그건 좀 유보를 해놓겠습니다.

오늘 할 것은 「네 가지 성인」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네 가지 얻기 어려운 것이 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하죠?

첫 번째가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다.

왜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어렵다고 그럴까? 선업의 의도들이 있어야지만이 사람으로 태어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들에 의도를 낼 때 항상 선한 마음을 내는 것들이 강해져서 그것들이 생을 좌우할 정도가 됐을 때 그런 분들이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고, 그다음에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그래서 일곱 가지 선처라고 그럽니다. 천상천과 인간세계 해서 일곱 가지 선처에 태어날 수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는 보시 아니면 수행 또 아니면 계를 지키는 것, 이것을 억지로 할 것 같으면 그런 선한 의도는 일어나지 않죠? 그런데 내가 그것들을 하려고 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서 선한 마음으로 그것을 하게 될 때, 그런 것들로 인해서 선한 업의 의도들이 쌓이게 되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고.

여러분들은 어쨌든 지금 현재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는 과거생부터 그런 선한 업을 쌓는 의도들을 잘 내고 있었다는 겁니다. 악한 것보다는 선한 것들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으로 올라가야 되지 그 이하로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좋고, 또 오늘 얘기할 것처럼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을 때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좋고, 그런 상태가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다고 하고 얘기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그 상태 내에서는 수다원밖에 없습니다. 불환과에 올라가지고 천상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생을 끝마쳐버리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또는 동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부처님 과거생의 이야기들을 보면 수다원에 이르는 경우는 없고 천상에 태어나는 경우들은 자주자주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다원에 이를 수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수다원부터 아라한까지 네 가지 성인의 단계는 어떠한 경우든지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났을 때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거기 때문에 선처 일곱 군데 중에서 가장 좋은 곳이 어찌 보면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들일 겁니다.

천상세계에 있는 천인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태어나기 원하는 곳이 천상이 아니라 인간계입니다. 가장 원하는 곳이. 그러니까 천인들도 부러워하는 곳이라는 뜻이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 상태 사람으로 태어난 것 이하로 떨어질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럴려면은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행위, 말을 할 때든, 생각을 할 때든, 아니면 행위를 할 때든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이것들을 행할려고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어려운 것이 오래 살기 어렵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기껏 해봐야 백 년이죠? 기껏해봐야 백 년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백 년 살아도 뭐할 거라? 그건 참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도 내가 바르게 살아서 오래도록 살아야 되는 것이지 바르게 살지 못하고 백 년 사는 것은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보면 됩니다.

명예롭게 살 것인지 아니면 부처님 가족으로서 살 것인지?

되도록이면 부처님 가족으로서 사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거라. 아무리 명예롭게 아니면 건강하게 또 부유롭게 그렇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 재산을 지닌 채에서 부처님 가족이 되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겁니다.

 

자띨라 스님도 마찬가지고 빤디따 스님도 마찬가지고 그분들은 부처님 재산을 가지고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들이 살아갈 동안에도 우리가 참 존경을 했었고, 그분들이 없는 상태에서도 우리는 그분들이 그리워지고 그러는 겁니다. 만약에 그분들이 그냥 명예를 바라고 명예롭게 살고 조금 더 부유롭게 살았다고 할 거 같으면 우리는 그렇게 그리워하지는 않을 거라.

오래 산다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의 재산을 획득하는 부분에서 오래 살아야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일곱 가지 재산들을 반드시 가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어려운 것들이 뭐냐면 바른 법을 듣기가 어렵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네 가지 어려운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법을 듣지 않고 성인이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고 불가능합니다. 또 법을 듣지 않고 그분들이 바른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지금 바른 법을 들을래, 아니면 돈 백만원 줄테니까 요 백만 원 받는 곳으로 갈래 물으면 아마 백만 원 받는 곳으로 갈려고 할 겁니다.

 

경전에 그런 것이 있죠. 법이 여러분들을 보호하고, 여러분들이 법을 보호한다. 법이 여러분들을 보호할 때는 어떤 사람을 보호해줍니까? 법을 따라 하는 사람들, 법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그 법이 여러분들을 보호해줍니다.

경전 일화에도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집에 도둑이 들어왔다 하는데도 그 부인은 가지 않고 부처님 법을 듣습니다. "재산을 가져가도 관계없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부처님 법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라. 나중에는 그 도둑들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나 해가지고 와가지고 부처님 법을 듣고 그래서 그 부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러면서 그분들도 도와 과에 이르게 되고, 그 부인은 당연히 도와 과에 이르게 되고.

 

법을 듣는 것은 그런 이익들이 있다 하는 겁니다.

지금은 법을 듣는 것이 어찌 보면은 나에게 큰 이익이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 법을 듣지 않으면 마음이 청정해지지 않고 또 여러 가지 것들 흐름들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욕망에 흐르고 있는 흐름들 이것을 끊는 것은 법을 듣고 이해를 해야만이 끊을 수가 있습니다. 또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들 그 견해들을 바꿀 수 있는 것도 법을 들어야만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나」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들도 법을 들어야만이 그 「나」라고 하는 것들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흐름들을 바꿔줄 수 있는 것은 법을 듣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른 법을 항상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수행에서도 중요하고, 또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마음을 가지고 하는데도 참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법을 자주 들을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 네 번째 어려운 것이 어떤 경전에는 부처님이 출현하기 어렵다, 어떤 경전에는 부처님 법을 따라서 출가하기 어렵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뭣 때문에 출현하죠?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그래서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어디로 인도합니까? 닙바나로 인도합니다. 도와 과에 이르게 하고.

출가한 사람들은 뭣 때문에 출가하죠? 해탈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따라서 열반에 이르는 것, 해탈에 이르는 것이 어렵다" 하는 그런 뜻으로써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부처님 법을 아무리 듣고, 사람으로 태어났고, 또 오래도록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그 모든 것들은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생에서 도와 과에 이르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받기 어려운 이 몸을 받았을 때 또 지금 내가 계속적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또 이런 바른 법들을 들을 수 있을 때 빨리 해탈에 이르려고 하는 마음들 결정심들을 가지도록 자꾸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 것들이 통상적으로 네 가지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해탈에 이르는 데는 반드시 그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벗어나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의 단계는 부처님 당시 때부터 딱 네 단계로써 구분이 돼있습니다.

수다원 도와 과, 사다함 도와 과, 그다음에 아나함 도와 과, 아라한 도와 과.

이렇게 네 부류의 성인만 있습니다.

 

먼저 한 번 봅시다. 수다원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은 뭘까?

 

경전 곳곳을 보더라도 수다원에 이른 분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습니다. 그분들의 상태들을 가만히 한번 봅시다.

먼저 법을 들을려는 마음이 일어나야 됩니다.

법을 듣지 않을 거 같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법을 들을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그 법을 들을려고 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그 법을 실제로 내가 듣게 됩니다. 듣는 것은 누가 듣습니까? 자기 자신이 듣죠!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그리고 소리라고 하는 것이 들리는 귀를 통해서 듣게 됩니다. 몸과 마음을 통해서 실제로는 법을 들으면서 수행을 하는 형태가 돼버립니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동남아시아 같은 경우에는 법문하는 것이 타임이 참 많습니다. 일주일에 보통 서너 차례는 넘을 겁니다. 일반 대중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 그러다 보니까 큰스님 한 분이 계속 법문을 할 수가 없으니까 돌아가면서 법문을 합니다. 그러면 어떨 때는 보면 아주 어린 스님들이 법문할 때가 있습니다. 들을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법문을 왜 듣고 있나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은 이번에는 누가 법문한다 할 것 같으면 안 갈려고 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큰스님이 혼을 냅니다. 전원 참석해야 됩니다.

 

법을 들을려고 하는 것은 그 법문의 내용들을 들을려고 하는 것보다는, 법을 들으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들이 열리기 가장 쉬운 건데, 그 기회들을 왜 자꾸 놓칠려고 하느냐고 꾸지람을 많이 합니다.

실제로 법문을 할 때 보면은 장로스님들은 법문의 내용을 듣지 않습니다, 실제로. 소리가 와닿아서 귀에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현상들 그것만 관찰합니다. 소리들리는 것만 소리들린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들, 이것들을 관찰합니다.

 

부처님 당시 때부터 해가지고 지금까지도 꼭 마찬가집니다. 법을 듣는 사람이 법을 들을려고 하는 마음이 있고 나서, 몸과 마음을 통해서 듣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떻게 돼요? 그 법문 내용이 아무리 하잘것없든 좋은 것이든 그것에 관계없이 마음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마음은 어떻게 되겠어요?

마음은 깨끗해집니다. 청정한 상태가 유지됩니다.

 

그러면 법을 들으면 그다음에 생겨나는 것이 청정한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를 하게 되는 거라. 뭘 통해서 그렇게 되겠어요? 소리를 통해서!

실제로는 그 법문이 아니고 소리라고 하는 실재하는 것을 통해서 마음을 청정하게 만들 수가 있는 거라. 여러분들도 누군가가 말을 하고 있다, 그 소리를 분별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성냄이 일어나고 집착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그냥 소리로써 들을 거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탐진치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마음은 오히려 그 소리 들으면서 그대로 그냥 알아차리면서 마음은 고요해지고 청정해지게 됩니다.

실제로는 깨달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들을 저 화내는 사람이 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개념화시켜버리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화가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이 청정해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소리들리는 것이, 그 소리들리는 것을 이해하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거라. ‘들린다고만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럼 그 들리는 것이 무상··무아의 성품으로 들리게 됩니다.

 

한번 보십시오. 소리가 들리는데 어, 내가 지금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 하고 알아차리고 있을 동안에는 그 소리가 안 들립니다. 또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있을 동안에는 다른 어떤 소리들도 다른 어떤 보이는 것들도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게 됩니다.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그 대상은 그 대상이 사라지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사라져버리게 되고, 또 다른 대상으로 인해서 또 다른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끊임없이 알게 되는 거라.

실제로는 소리 듣고 법문을 들으면서 자기 자신은 무상한 성품으로써 분명하게 보고 있는 거라. 그래서 아주 짧은 부처님의 말씀 하나를 듣고도 그 자리에서 바로 수다원에 탁 이르렀다는 거라.

 

자! 여기에서 그러면 수다원이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될 조건들이 뭐가 있을까?

 

뭔가 부처님을 믿어야, 저 분의 말을 들어볼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될 거 아니라? 엉뚱한 사람이 와서 할 거 같으면 처음에 어떻게 돼요? 인식이 '아이고, 저 사람 나쁜 사람이다' 하고 인식이 될 거 같으면 그 사람이 뭔 말을 하든 안 듣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들이 있어야 된다는 거라. 스님이 법을 설할 거 같으면 스님에 대한 믿음들이 있어야 되는 거고. 그것이 전제조건입니다. 그것이 되고 나면 그 사람이 말하는 것들에 대해서 믿음이 있어집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 예류과에 이르는 전제조건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뭐냐면 말하는 대상에 대해서 개념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말을 그대로 듣게 될 때 그 사람은 예류과에 이를 수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조건은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 날뛰게 됩니다. 그걸 잡아둘 수 있는 것은 뭡니까? 자기 자신이 행해오는 것들입니다. 그래도 자기 자신이 그래도 내가 남들에게 해코지 안 하고 남의 것 탐내는 것 없이 잘 살아왔다 할 것 같으면, 그 마음이 있을 거 같으면 처음에 그 말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 들으면서 실천하는 것들이 유지가 돼나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순간에 탁 깨져버리는 것은 내가 행해온 것들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는 이게 탁 깨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불선한 마음이 탁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불선업을 이끄는 네 가지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후회하는 행위들이 많을 때, 그다음에 부끄러워하는 일들이 많이 있게 될 때, 그다음에 평상시에 마음이 널뛰기를 많이 하는 들뜨는 마음들이 많이 있게 될 때, 또 내가 하는 것들이 열심히 살려고 안 하고 게으름 짓는 것들이 많을 경우.

4가지들이 잘 돼나가는 수행의 상태에서 불선한 마음이 톡 튀어나와서 그것을 깨버리는 역할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4가지는 뭐로 방어해야 될까? 여러분들에게는 다른 거 없습니다.

계율입니다. 계율로 인해서 이 4가지는 방어를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다원에 이르기 위한 조건 중에 하나를 더 들으라고 할 것 같으면, 계율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계율을 잘 지켜라.

그래서 불··승 삼보에 대한 믿음과 계율!

어떤 경전에는 계율을 빼버리고 이 3가지만 들어있는 경우도 있고 그렇습니다.

 

이 얘기는 뭐냐면 수다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구태여 내가 열심히 앉아서 좌선수행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 또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나쁜 짓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일순간 내가 그 법을 청해 듣는 마음의 상태만 돼 있을 거 같으면 도달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게 경전 곳곳에서 증명하고 있는 그런 것들입니다.

여러분도 사실은 이런 법문의 자리가 여러분들에게는 어찌 보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좀 더 나은 사람의 형태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그런 계기들이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수다원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통찰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소리 듣는 것으로 인해서 어떻게 통찰지가 일어날까?

소리 들린다고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통찰지의 첫 번째가 일어납니다. 그 통찰지로 인해가지고 나는 그 소리들리는 것이 분명하게 인식이 돼나갑니다. 그래서 스님이 법을 설하고 있으면 스님이 설하는 법만 계속적으로 들립니다. 다른 거는 일체 안 들립니다. 그게 통찰지 첫 번째입니다.

 

그런데 통찰지 두 번째는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그 소리 들리는 것이 연속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마음을 거기에 집중하고 있으면 그 소리가 들리고 집중하지 않으면 그 소리가 들리지 않고, 그 소리들리는 것도 하나의 현상-소리에 하나의 마음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이것이 두 번째의 통찰지가 일어났다고 얘기합니다.

 

지금 예를 들어서 '깨 달 음'이라고 스님이 얘기를 했다, '깨'라고 하는 하나의 대상에 그것을 알아차리는 나의 마음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달'이라고 얘기할 때는 이미 '깨'라고 얘기했을 때의 대상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달'이라고 말하는 대상이 하나가 생겨났는데 내 마음도 마찬가지로 '달'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지, 앞에 '깨'를 알아차리는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럼 '달'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음'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그다음 대상이 일어나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분명하게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라. 그러면은 그 법을 알아차리는 것들이 좀 더 강화됩니다. 좀 더 집중하는 힘들이 강해져버립니다. 그게 두 번째 부분입니다.

 

통찰지의 마지막 부분은 그렇게 알아차릴 때 거기에는 어떠한 것도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과 대상만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두 번째에서 알고 나면 그것에 대해서 세 번째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아, 이때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 참 잘못된 것이구나. 뭔가를 내가 알아차린다는 생각도 없고 그냥 대상도 조건따라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나」에 대한 존재에 대한 관념들이 싹 떨어져나가버리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들었을 때는 그 듣는 것으로 인해서 나는 수다원에 탁 이르르게 됩니다.

 

그래서 수다원에 이르면 뭐가 생긴다고? 라고 하는 견해가 먼저 탁 떨어집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수다원에서 없어지는 것 세 가지 계금취 의심 유신견을 얘기했지만 실제로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라고 하는 견해가 탁 바뀌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뀌어버리면 당연히 의심하는 것들도 떨어지게 되는 거고, 내가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그 사람이 말을 잘하는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 말하는 것이든 그것에 관계없이 그대로 듣기만 하게 된다는 거라.

그게 계금취입니다.

계금취가 무슨 의례의식에 매여있는 것들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대상에도 매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대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만 있게 될까? 유신견, 계금취, 의심, 수다원에서?

(수행자 : 다섯 가지 장애...) 다섯 가지 장애? 당연히 수행을 하다 보면 그 다섯 가지 장애는 안 일어나겠죠?

이렇게 보면 됩니다.

질투하는 성향- 질투하는 성향은 열 가지 장애가 떨어져나가는 것에는 속하지 않지만 수다원에 이르고 나면 질투하는 성향은 싹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누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그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또는 내가 어떠한 상태에 놓여있다고 하더라도 개의치를 않게 됩니다. 누가 나를 명예롭게 봐주든 아니면 이 법문 하는 자리에 사람이 많이 있든 적게 있든.

나에 대한 견해가 없는데 어떻게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할 수 있어요? 비교하는 것들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질투하는 것들은 그뒤부터는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어떤 성향들이 있느냐면 인색한 것 - 물질적으로 인색한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인색한 것들이 없어져버립니다. 내가 설혹 그 사람을 돕지 못하더라도 마음으로는 도울려고 하는 마음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조건에 구애되지를 않게 된다는 거라.

부처님이 전도를 보낼 때 그런 얘기를 합니다.

네가 이런 조건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개의치 않습니다!

이런 조건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개의치 않습니다!

 

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법을 설하게 되는 조건을 얘기할 때 상카루뻭카냐나에 이르르게 된 것이나, 아니면 테라담마 열 가지 조건들이 충족된 것들이나, 아니면 적어도 예류과 이상이 되는 사람들이 법을 설하게끔 할까? 그게 바로 이 인색함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는 부분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원하는 부분이 상충 될 거 같으면 딱 인색한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상충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원하는 쪽으로 마음이 쏠리게 될 때는 인색한 부분들이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다섯 가지는 적어도 수다원에 이른 자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조금 전에 수다원에 이르는 것에 대한 것에서, 법을 통해서 듣는 것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수행을 통해서 수다원에 이를 수 있을까? 당연히 있겠죠!

수행을 통해서 수다원에 이르는 경우가 있고, 법을 들음으로 인해서 수다원에 이르는 것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수다원에 이르는 길은 이런 방법들이 동원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법을 통해서 법을 듣는 것으로 인해서 수다원에 이르는 것도 실질적으로는 보면 수행하는 겁니다.

법이라는 대상을 통해서 법을 듣는 것을 통해서 수행을 하는 것들입니다. 당연히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대상으로 해서 수행해서 수다원에 이르는 것은, 그것도 수행을 하는 겁니다.

 

가끔씩 그걸 오해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꼭 수행이 아니라도, 뭔가를 잘 이해하는 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가능합니까? 잘 이해된 것으로만? 그렇게 될 방법이 없습니다!

이해는 자기 자신이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해가지고 ‘아, 이것이 맞구나’ 하는 것들이 딱 정립이 돼야 됩니다.

그런데 그 확인하는 것은 그것은 이해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체험하는 겁니다!

자기가 실천해가지고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은 수행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단지 밑바탕이 그것들에 대한 이해를 확립할 수 있는 것들이 여러 가지 조건들이 같이 모여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렇게 봤을 때는 수다원에 이르는 것은 자기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 더 물어보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수행은 무상··무아를 알아차리는 위빳사나 수행만 통해서 가능한 겁니까? 아니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도 가능한 겁니까? 어떤 경우들이라?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도 가능하고,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단, 사마타 수행을 통한 것은 전제조건이 그 사람이 1선정에 이르르고 2선정에 이르르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선정을 자재롭게 할 수 있는 상태가 돼있는 자들에 한해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선정에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할 수가 있고, 다시 위빳사나 수행에서 그다음 선정으로 갈 수 있는 상태가 가능하게 돼있는 자들에 한해서 선정을 통해서 수다원에 이르르게 됩니다. 아주 찰나 간에.

 

그런데 그걸 착각을 해버릴 것 같으면 사마타 수행을 통해가지고 1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을 체험한 사람들은 수다원에 이르를 수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1선정에 이르른 사람도 수다원에 이를 수가 있고 2선정에 이른 사람도 수다원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단지 그 조건은 그 선정에서 자재롭게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 선정에 들고자 할 때 들 수가 있고 내가 그 선정에서 나오고자 할 때 나올 수가 있고, 내가 어떠한 상태 어떠한 조건에서 그 선정에서 깨어난다고 했을 때 그거 외에는 다른 조건에서는 깨어나지 않게 되고, 이런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자유롭게 되는 사람들에 한해서 가능한 겁니다.

 

그렇게 되지 못했을 경우에는 아무리 선정력이 뛰어나고 그 선정에 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와 과에 이르기가 힘들어져 버립니다. 선정은 삼매는 선정삼매는 어떠한 경우든지 거기에 몰입돼있는 상태입니다. 마음에 청정함은 그대로 유지해나가게 될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번뇌를 부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착각해버려서는 안됩니다.

 

단지 어떠한 경우에 수다원에 빨리 이를 수 있느냐? 순수한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 아니면 순수하게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깨달음에 이른 분들을 쭉 조사를 해보면 7할 이상이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병행한 자입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집중하는 힘으로 인해서 번뇌가 잠재워지고 그것을 눌러지는 힘들이 있는 사람들은, 그리고 그 선정에서 자유롭게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자들이 알아차리는 힘은 훨씬 강합니다. 알아차림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대상을 볼 때 무상한 성품으로 고의 성품으로 무아의 성품으로 즉시 볼 수가 있게끔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사념처 수행을 통해서 네 가지 성인의 단계에는 도달할 수 있지만 좀 더 빠르게 도달할려고 할 거 같으면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힘들을 키워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겁니다. 고집해서 그 한쪽만 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또는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사마타 수행에 자재하는 상태가 될 때까지 몇십년을 쭉 해가지고 수다원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효율적인 것들은 병행하는 것들이 훨씬 효율적인 것이라는 거라.

집중하는 힘들이 강하면 알아차리는 힘들도 강해지고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지면 집중하는 것도 훨씬 강해집니다. 그래서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들이 생겨납니다. 조절하지 못할 경우에는 삼매도 근접삼매에서 대상을 끊임없이 무상·고·무아로써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낭 폭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게 첫 단계 수다원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일래과와 불환과.

 

수다원하고 이 두 가지 성인의 단계하고 다른 것이 뭐냐면, 악행의 흐름이 바뀌어버립니다. 수다원에 이르러도 악행 짓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런데 그 위의 두 가지 부류의 성인들은 악행짓는 일이 할려고 하더라도 거의 힘들어져 버립니다. 흐름 자체가 바뀌어버립니다.

물이 여기 쭉 내려가는데 요쪽에서 물꼬를 탁 틔워줘 버리고 이쪽을 막아버릴 거 같으면 그 물은 요쪽 방향으로 흘러가게 돼있는 것이지 이쪽으로 안 가는 거거든.

일래과에서 이쪽 물꼬를 탁 막아서 악행이라는 물꼬를 탁 막아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이후의 상태에서는 물은 그쪽으로 안 흐르게 되는 겁니다. 조금씩 새는 부분은 있을지 몰라도 물이 흐른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거라. 이쪽으로 가는 거라.

그래서 말과 행위와 생각에서 악한 의도들을 내는 것들은 힘들어져 버립니다. 그것들이 탁 끊어지는 상태가 불환과 입니다.

 

그래서 불환과에 이르면 뭐가 된다고? 뭐가 두 가지 떨어진다고?

감각적인 욕망과 성냄! 탐심과 진심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끊어져버립니다. 이미 물꼬가 막혔기 때문에 악한 의도를 낼 수 있는 것들은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또 하나 차이가 뭐가 있을까? 번뇌의 흐름입니다.

번뇌의 흐름이 물꼬가 탁 막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막혀버리게 됩니다. 번뇌가 일어나기는 하더라도 그 번뇌는 존재욕구에 대한 번뇌들 뿐이지 다른 것들로 인해서 번뇌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내가 무슨 욕심 부리고 성내고 하는 그런 번뇌, 이런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없어져버립니다. 이미 막혀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완전하게 그것들이 사라져버리는 상태가 불환과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그 불환과와 아라한과의 차이는 뭘까? 무명의 흐름입니다.

 

무명의 흐름이 바뀌어버립니다. 이때까지 일어난 악행이라든지 견해라든지 번뇌라든지 이런 것들은 뭐로 인해서 그런 거라? 무명이 근본입니다.

그 무명은 무엇 때문에 무명이 일어나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들 때문에 일어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 나의 영혼이 있다, 하는 것들이라.

그것 때문에 망상의 부산물로써 영혼이 있게 되는 거고, 그 망상의 부산물로써 뭔가 실재하는 나라고 하는 진아(眞我)라는 것이 있다고 착각들을 하게 됩니다.

 

무명의 흐름이 탁 끊어져버리는 상태가 바로 아라한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생존욕구가 없습니다. 불환과까지는 아직 내가 도달할 것이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 도달할 때까지는 내가 살아야 됩니다. 살아야 된다는 마음들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때까지 내가 죽으면 안 돼. 그런데도 어떨 때는 게으름 피우는 마음들도 일어나기도 해. 그런데 도달할 데까지 다 도달하고 나면 인제 나는 죽어도 관계없어.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열심히 자기 할 일들을 가지고 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거라.

그 무명의 흐름이 탁 단절돼버리는 것은 바로 존재욕구 부분입니다.

존재욕구 부분이 탁 사라져버리는 상태. 그게 인제 아라한이 되는 부분입니다.

 

실제로는 이렇게 네 가지 성인을 구분할 수 있는데, 여러분들이 그것들에 이르게 될 때는 참 시간이 많이 걸리는 부분입니다.

단지 계기가 있습니다. 하나의 계기가 있어서 그 계기로 인해서 단계들이 탁탁 진행이 되는 것이지, 그 계기가 없이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님의 경험으로 봤을 때는 가장 좋은 계기가 뭐냐 하면 바로 법을 듣는 겁니다.

법을 내가 어떤 식으로 듣는가? 그것에 따라서 한 단계가 확 성숙 돼버립니다.

출가자들은 좀 더 그런 계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출가의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법을 자주자주 듣는 조건들이 성숙돼있어야 된다 하는 것들입니다.

 

또는 일반 재가자들의 입장에서 열 가지 선행을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보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법을 보시하는 것들, 선행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법을 듣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재가자든 출가자든 법을 듣는 것만큼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조건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법을 듣는데 자꾸 익숙해지도록 하고 그것들을 빼먹는 일들은 되도록이면 없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법을 듣는데 오늘 탁발 있으면 탁발 안 가져왔다고 내가 뭐라 하길 해? 아니면 앉아있는 것들 불충하게 앉아있다고 뭐라 하길 해? 뭘 어떻게 하기를 해?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법을 듣는 데는 어떠한 경우든지 조건이 없습니다. 사람이 많든 적든 내 상태가 어떻든, 그것은 법을 듣는 조건이 아닙니다.

법을 듣는 조건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을 자주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시간이 돼서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