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비구와 친족과의 관계 (20160429. 대구)

담마마-마까 2022. 2. 12. 09:00

https://youtu.be/bWNmDyy6LeY

* 비구와 친족과의 관계 (20160429. 대구)

 

「비구와 친족과의 관계」에 대한 것을 얘기하겠습니다.

통상적으로 출가하면 가족하고 인연을 끊는다고 그러죠? 그래서 전혀 가족을 안 보고, 바로 옆에 있어도 안 보고 살려고 그렇게 하게 됩니다. 나도 처음에는 해인사에서 출가했을 때에는 그런 줄 알았었어요. 그런데 태국가서 다시 출가해서 계를 받고 나니까, 거기는 어떻게 하느냐면 출가자가 계를 받을 때는 반드시 후원인 그룹들이 형성된 상태에서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 같은 경우에는 외국인이니까 내가 거기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주지 스님이 임의로 사람들을 지정해가지고 후견인으로 지정해줍니다. 지정을 해주면서 뭐라고 하느냐면 “앞으로는 이분들이 네 가족이다. 가족이라 생각하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을 때는 항상 법을 설해주고 도움을 받기도 하고 그래라” 그러는 거라. 그래서 그 후견인들이 사실은 가사나 발우나 이런 것들을 다 마련해주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인제 태국 현지분들이 출가할 것 같으면 그 후견인들을 누가 하느냐면 가족들이 해주는 거라. 그래서 이 스님이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공부할 것 같으면 학비도 스님한테 대주고, 어디 인도 여행을 간다 할 거 같으면 인도 여행가는 경비도 대주고, 이런 식으로 처음에는 다 그렇게 하더라고. 나도 그런 식으로 처음에 도움을 많이 받았었어요.

한국하고는 좀 많이 다르죠? 한국은 출가하고 나면 가족하고는 땡 하는데 거기는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90년 말에 태종사에 잠깐 들어왔을 때, 그때 모친이 암으로 투병중이었거든. 그래서 부산에서 저녁 되면 진주까지 부모님 시봉하러 내가 가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새벽에 부산으로 돌아오고 이렇게 했거든. 그러니까 다른 스님들이 싫어하는 거라. 거 왜 가족하고 그렇게 계속 왔다갔다 하면서 지내느냐고, 아직 집에 대한 인연이 남아있느냐고, 이런 식으로 얘기들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지금 당장 아픈 사람이 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해야 될 거는 뭘까? 온 마음을 다해서 아픈 사람을 간호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아마 누구든지 가족 중에 그렇다 할 것 같으면 그럴 겁니다.

 

출가한 스님들도 마찬가집니다. 가족 친지 친척들이 아프다 할 것 같으면 아픈 분들을 출가자의 입장에서 돌봐줘야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마음이 괴롭고 할 때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역할들도 해야 되는 거고, 실질적으로 내가 경제적인 도움은 못줄 지언정 그렇다고 해가지고 법으로써 도움을 주는 것 그리고 고요하게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것 그것까지도 차단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하고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얘기합니다.

 

그래서 가족 친지들과 출가한 비구들의 관계는 어찌 보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재밌는 것이 태국에 있을 때 그렇게 후견인으로 정해진 사람들이 생일일 것 같으면 생일되면 반드시 나를 초청을 해. 초청해가지고 공양드시고 가라고 하는 거라. 공양 먹고 그러고 나면 여비 주고 그것 가지고 필요 한 것 사라고 얘기하면서. 그래서 집안에 무슨 대소사가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스님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다른 스님하고 같이 가는 경우도 있고 혼자 초청하는 경우도 있고 그런 경우들을 많이 겪어봤습니다.

 

그런데 출가자라고 얘기하면 빨리어로 보통 '빱빳자(pabbajjā)'라고 얘기합니다.

빱빳자라는 뜻이 뭐냐면 뭘 지니고 '가슴속에 뭔가를 지니고 나아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뭐겠어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들을 지니고 부처님 곁으로 나아간다는 거라. 부처님이 출가했으니까 당연히 자신도 머리깍고 가사를 입고 바리때를 들고 부처님과 같은 행동을 하도록 부처님 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출가자의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뭐냐면 믿음을 지니고 집에서 집이 없는 곳으로 나아간다는 그렇게 빱빳자의 의미를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디 다른 데 갔다가도 반드시 집에는 돌아가잖아요.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은 사실은 자기 소유가 없기 때문에 집이란 것이 없습니다. 여기 내가 머물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여기에서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내 소유도 아니고 내가 항상 평생 머무는 곳도 아니고 하기 때문에 집이라고 개념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집이 없는 곳으로 나아간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가장 대표적인 구분이, 경제적인 활동을 하느냐 경제활동을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살기 위해서 뭔가 경제적인 활동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출가자들은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 어떤 경제적인 활동도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이 선원의 유지를 위해서 어떤 경제적인 활동도 비구들이 나서서 할 수 없다는 거라. 기도를 한다든지 제사를 한다든지 뭘 한다든지 하면서 그걸 사람들에게 공고를 해가지고 뭔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없다는 거라.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게 출가자들이기 때문에,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출가와 재가자는 구분이 확실하게 돼있죠?

출가자를 외호하고 보호해주는 것이 재가자들입니다. 그래서 출가자들은 경제적인 활동을 안 하니까 어쨌든 먹고 살아야 되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돼요? 재가자들이 후원을 해줘가지고 먹고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 출가자들은 재가자들한테 그대신에 법을 설해주게 됩니다.

그래서 법시와 재시라고 하는 관계로써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 관계로 연결돼있는 거니까 누가 가장 출가자들에게 후원을 잘해줄 수 있겠어요? 모른 사람이 해주는 건 참 힘듭니다. 대표적인 예로 여기도 인터넷에서 여기 선원이 카페로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공개되어 있어도 아마 모르긴 해도 일년 열두달 가도 십원 하나 후원해주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안 오고,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기는 이익은 취하기는 합니다. 스님 법문 다운받아서 듣기도 하고 글을 읽기도 하고 하지만 후원해주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출가한 스님을 모르는 사람이 후원해준다? 그건 참 드뭅니다. 물론 가끔 있습니다. 스님이 전철을 타고 간다고 할 거 같으면 와가지고 삼배드리면서 “스님 보시하겠습니다” 하면서 봉투에 아니면 그냥 손에다가 쥐어주는 경우들을 가끔 봅니다. 그거는 아주 드문 경우지 흔한 경우는 아니거든.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여기 선원 식구들은 여기 와서 직접 스님 얼굴도 보고 수행도 하고 법문도 듣고 하니까 식구 같은 입장이니까, 만약에 여기 운영자금이 모자란다 할 것 같으면 애가 타는 거라. 내가 직접 못내준다 해도.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애가 탈 이유가 없습니다. 이게 없어진다 하더라도 전혀 관계 없습니다. 또 다른데 가서 또 그러한 방식으로 법을 듣게 돼있습니다. 그게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가족·친지들은 든든한 후원자의 역할들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출가한 스님들이 가장 먼저 법을 설해야 되는 곳들도 가족·친지들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들은 '아주 잘 연결된 고리' 같은 역할들을 하는 그런 겁니다.

 

지금 프린트로 내준 이거는, 비구와 친족과의 관계를 뽑은 거는 어디서 뽑았냐면, 비구 스님들 바라이죄 중에 사람을 죽이지마라 하는 계율이 있습니다. 그게 세 번째 바라이죄에 해당이 되는 건데, 직접적으로 고의를 가지고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는 비구의 몸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산문출송 당한다고 그러죠? 옷을 벗겨서 내보낸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경우들이 해당이 되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사람을 죽였다고 해가지고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데, 나중에 복권할 수 있는 조건들은 또 따로 있습니다. 그거는 자세한 건 여러분들이 알 필요는 없는데, 거기에서 부처님이 설한 것들을 기준으로 잡아서 얘기를 적어 놓은 겁니다.

 

부처님 당시 때 언제 그런 것들이 있었느냐면,

부처님이 비구스님들한테 '아수바 바와나(asubhā bhāvanā)'라 해가지고 '부정관' "이 몸은 참 부정한 것이다" 하고 하는 수행을 가르쳤어요.

수바(subha)라고 하면 '예쁘다, 아름답다, 귀엽다' 그런 뜻인데, 그런데 아수바(asubha)의 아는(a) 부정형이니까 "이 몸은 예쁘고 귀여운 것이 아니고, 더러운 것이고, 그리고 깨끗하지 못한 것이고, 항상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찬 것이다" 하는 것들을 수행 주제로 삼는 것이 있습니다. 좀 꺼림칙하죠?

 

예를 들어봅시다. 누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셨는데 방부제 가지고 그 시신을 보호한다든지 아니면 몸을 깨끗이 씻긴다든지 아니면 옷을 새로 입힌다든지 옷매무새나 머리나 이런 걸 다듬지 않고 시신을 방치하는 경우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왜 그럴까? 왜 사람들은 그냥 돌아가셨으면 돌아가신 모습 그대로 놔두지 못하고 그럴까?

자기가 보기 싫거든 그런 모습이! 그런 모습 보기 싫습니다. 부정하다는 것, 더럽다는 걸 보기가 싫은 거라. 누구든지 자신은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과 같이 나도 죽는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그걸 부정하고 싶은 거라. 이 죽은 것이 괜히 나한테 뭔가 해코지가 될까 봐서. 그리고 이게 죽고 나면 반드시 부패하고 썩고 냄새나고 그리고 구더기 생기고 나중에는 뼈만 남게 되고 흩어진다는 사실을 누구든지 알고는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거 볼려고 안 한다는 거라.

 

태국에서는 인도 가기가 참 쉬워가지고, 스님이 있을 때는 거의 왕복 비행기표가 100달러니까, 한 십만원 정도 하면 인도 왕복을 했어요. 그래서 가끔씩 갔는데, 인도에 가면 화장장이 있습니다. 화장장은 사람이 돌아가시고 나면 입은 옷 해가지고 장작 위에다가 아무런 방부제나 아무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시신을 올려가지고 불에 태웁니다.

그러면 옆에 서 있으면 그 시신 타는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그리고 시신 타는 모습이 그대로 보입니다. 필요한 사람들은 내가 가서 사진 찍어놓은 것이 있으니까 보여드릴게요. 내장이 막 터지고 이런 것들, 그런데다가 돈 없는 사람들은 장작을 많이 구하지 못하니까 팔다리가 밖으로 삐져나와 툭 떨어집니다. 그럼 개가 달려들어가지고 그걸 서로 먹을라고 싸우고 막 이럽니다. 그 모습들을 자주 볼려고 그럽니다.

 

처음에 한 번 봤을 때는 나도 싫어. 그 냄새도 싫고 광경도 싫고 되게 싫어. 나도 그렇게 죽는 건데도 나도 그렇게 죽기 싫고 저 모습 보기 싫다는 게 되기 때문에, 그 시체를 아무리 봐도 부정관 수행을 할 수가 없는 거라. 마음이 청정하게 되면서 있는 그대로를 볼려고 하는 선한 마음으로 돼야만이 부정관이 될 건데, 우선 그게 싫은데 어떡할 거라. 안 되는 거야.

 

또 마찬가지로 의사가 있다고 치자. 그 사람들은 매번 실제 하는 시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처음에 수련생일 때는 비슷한 거 놔놔놓고 만날 째고 이렇게 하는 훈련들을 합니다. 또 실제 그렇게 훈련이 되고 나면, 실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부해갖고 뭐 제거할 건 제거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아마 일반인들이 처음에 그리할 것 같으면 섬뜩하겠지만 그사람들은 그렇게 섬뜩한 마음이 안 듭니다. 그냥 일로써 직업으로써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할 일들만 하게 됩니다. 마음은 나쁜 마음은 안 들고 그냥 있는 그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상태인데도 시체와 다름없는데도 그것들에 대해서 부정한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런 사람들은 부정관을 할 수가 없는 거라.

 

부정관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누가 부정관 수행을 할 수 있을까?

이게 중요한 게 뭐냐면 부처님은 대중들 전체한테 이 얘기를 했거든. "야, 부정관이 이리 좋다, 이렇게 하면은 초선정에 들고 자기 몸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도 없어지고 참 좋다." 왜 그러냐면 부처님이 그전에 설명한 것들이 있습니다.

"세 가지에서 골수를 빼도록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재산에서 골수를 빼내고, 골수라는 게 뭐라? 진짜배기를 얘기합니다. 몸에서도 진짜배기를 빼내도록 하고, 마음에서도 진짜배기를 빼내라 하고 얘기합니다. 조금 있다 그 애기를 할게요.

 

그래서 어쨌든 이 몸에서 진짜배기를 뽑아낼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쉽게 얘기하면 이 몸은 부정한 것이다 생각해서 이 몸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없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조건인데, 전에 예를 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은 부정관을 할 수가 없는 거라. 그런 사람들은 부정관 아무리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동남아시아 이쪽에 있는 데서는 부정관 수행을 거의 잘 안 시킵니다. 특수한 경우에 있는 사람들만 부정관을 좀 시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적합할까? 욕심 많은 사람인데, 그냥 욕심 많은 사람이라도 그냥 일반적으로 욕심많은 사람이 아니고 욕심에 딱 갇혀가지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

예를 들어서, 여자들이니까 화장품 누가 샀다, 그럼 자기는 살 형편이 안 되는데도 그 화장품에 딱 매여있는 거라. 어쨌든 그 화장품을 구해야 되는 거라. 빚을 내서 구하든지 아니면 나쁘게 얘기하면 훔쳐서라도 그 화장품을 구할려는 욕심이 있는 경우, 그 대상에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꾸미는데 딱 매여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부정관 하기 참 좋습니다.

좀 더 젊어지고 싶다. 어쨌든 땡기는 수술해가지고 남한테 보여야만, 그렇게 되지 않으면 대중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상태가 돼있다, 연예인 계통에 그런 경우들이 많겠죠? 그런 사람들이 부정관 하기 참 좋습니다.

 

또 어떤 경우가 부정관 하기 좋을까? 정신이 생각하는 게 많아가지고 온통 근심·걱정거리가 머리속에 가득 있는 거라. 자식 걱정 하기 전에 그것이 채 사라지기 전에 뭐 또 다른 걱정, 무슨 걱정 해가지고 걱정들로 인해가지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애. 스트레스 받는 건 둘째치고. 그래서 이게 근심·걱정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도 부정관 하기엔 적합한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그렇게 심한 경우들은 아니죠? 욕심이 있어도 조금 있다가 아이고 난 그냥 다른 화장품 바르고 말지, 아니면 근심·걱정 있어도 아이고 나 힘들어서 머릿속이 터질것 같아서 힘들어서 못하겠다 하면서 뭐 그냥 놔버리든지 다른 것들로 대체한다든지 이렇게 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게 지나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부정관 수행을 좀 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부정관 수행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처음에 한 번 탁 보고 나면 싫은 마음이 들기 때문에 부정관 수행이 안 돼!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자주자주 봐야 됩니다. 자주자주!

태국에서는 매번 안거가 끝나고 나면 시체실로 전부 스님들이 다 이동을 합니다. 해마다. 하루 지난 시체, 이틀 지난 시체, 삼일 지난 시체 해가지고 쫘악 종합병원마다 진열을 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럼 한시간 동안 그 안에 갇혀있어야 돼. 그러니까 매번 그걸 봐야 돼. 처음에는 그거 봤을 때는 싫은 느낌이 들다가도 자꾸 보니까, 그리고 내가 직업으로써 그런 거는 아니잖아. 그런데도 매번 보니까 그다음부터는 그냥 평온한 상태에서 그걸 보게 되는 거라.

 

어? 하루 지나고 나니까 죽은 사람이 이렇게 바뀌네, 이틀 지나고 나니까 요렇게 바뀌네, 그렇게 되는 거라. 그러면서 경각심이 일어나는 거라. ‘어? 나도 죽는데 나도 죽으면 저렇게 되는가?’ 그래서 하루 지나고 이틀 지나고 해가지고 뼈가 보여지고 살이 흩어지고 뼈가 뒹굴게 되고, 나중에는 뼈까지 다 부서지는 것들이 쭉 전시된 것들을 해마다 보다 보면, 한 5년차 6년차 정도 지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부정관을 해도 평온한 상태에서 부정관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부정관을 할 때, 부정관은 아까 어디까지 된다고 했어요? 1선정 이외에는 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 부정관은 잘 해봐야 초선정 밖에 안 들어. 싫은 마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뭐 때문에 부정관 수행을 하라고 그럴까? 자신의 견해를 바꾸기 위한 것들입니다. 부정관 수행의 가장 큰 목적은 "나도 저와 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각인시키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 부정관 수행해가지고 무슨 선정? 1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초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선정수행을 실제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선정의 영역에 속하질 않습니다. 단지 마음이 선한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들이 1선정입니다.

그럼 목적이 뭐라? "나도 죽는다!"는 사실을, 자신의 견해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라고 하는 것들은 참 저렇게 하찮은 것이구나, 마음이 떠나고 남은 몸은 저렇게 썩은 나무토막과 마찬가지고 저렇게 부패하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해서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도구로써 부정관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관념적으로 빠져놓으면 이 몸은 부정한 것이다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부정한 이 몸을 가지고 있으면 뭐할 거라? 이 몸은 더럽고 추악하고 오물덩어리와 마찬가지다 할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이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혐오하게 됩니다.

그러면은 선정은 둘째치고 견해가 안 바껴버릴 것 같으면 이 몸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이 확 일어나게 됩니다. 이 몸을 싫어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아이고, 나 이 몸 지니고 안 살란다 하는 마음이 탁 드는 거라. 그럼 어떻게 되겠어? 죽어버릴려고 하는 거라.

 

부처님이 부정관이 이렇게 좋은 수행이다 하고 얘기하니까, 그런데 아마 여러분들한테 부처님이 직접 얘기했다 할 거 같으면 그렇게까지 자살을 안 할 거라. 부처님 당시 때나 지금의 동남아시아도 마찬가집니다.

왜 그 사람들은 부정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을까? 이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스님이 재가자한테 심부름을 시켰어요. “야, 너 어디 가니까 뭐 있다던데 그거 좀 사가지고 나한테 갖다줘. 몇 번 버스타면 거기 갈 수 있으니까 그 버스 타고 갔다가 버스 타고 돌아와” 그렇게 얘길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떠날려고 하는데 “누가 너 어디가?” “나 뭐 사러 가” “오 그래? 내 차 타. 내가 거기 데려다줄게” 그런데 이 사람은 거부하는 거라. “아니야, 스님이 몇번 버스 타고 가라고 그랬어.”

 

참 어리석어 보이죠? 어리석어 보일 겁니다. 그러면서 그 차 안 타. 그러니까 스님이 말한 거 그대로 그냥 믿게 되는 거라. 몇번 버스 타면 당연히 거기 가는 거지. 그런데도 더 빠른 길이 있고 더 편안하게 가는 길이 있는데도 그리 안 하고 스님 말을 믿는 거라.

어떤 마음일까? 스님이 그렇게 얘기했을 거 같으면 자신을 보호해준다는 믿음이 있는 거라. 몇번 버스를 타고 갈 거 같으면, 나는 적어도 스님 말을 그대로 믿고 선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나는 어떤 나쁜 해로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그 버스 타고 갔다가 누가 또 데려다준다 하더라도 그거 안 타. 그냥 또 그 버스 타고 그대로 오는 거라. 누군가 차를 태워준다고 하더라도 어, 저거는 스님 얘기한 것이 아닌데 할 것 같으면 의심을 하게 되는 거라. 저기 가다가 저 사람이 거기 나를 안 내려주면 어떡하냐? 아니면 사고 나면 어떡하냐?

 

여러분들은 아마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좀 불합리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게 부처님 당시 때부터 부처님에 대한 그리고 법에 대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성입니다.

그러니까 부정관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얘기하니까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니까, 그런데 부처님도 "부정관은 자신의 견해를 바꾸기 위한 것이다" 하는 걸 설명을 해주고 해야 되는데, 무조건 부정관이 좋다고만 얘기해놓으니까 부정관을 하게 되면 전부 자살할려고 하는 마음을 강하게 가져버리는 거라.

 

부정관을 할 때 부정관은 열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고나서부터 해가지고 나중에 뼈가 완전히 흩어질 때까지 열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를 건너뛰어서도 안 되고, 또 빼먹어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처음에 죽고 나서 변하는 모습들을 첫째부터 둘째까지 해가지고 쭉 열 가지를 다 해야 됩니다.

자! 그렇게 하면서 매번 계속 하다 보면 "나의 목숨도 이와 같이 죽음에 이른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부정관 할 때 게송이 있습니다. '야타 에땅' 그럽니다.

이 시체가 돼있는 상태, 하루면 하루가 돼있는 시체의 상태, 이틀이면 이틀이 돼있는 시체의 상태, 삼일이면 삼일이 돼있는 시체의 상태, 그 시체의 상태가 '따타 이당' 자신의 몸에서도 일어난다. 이렇게 돼있는 시체의 상태가 자신의 몸에서도 그대로 일어난다는 거라. [ "Yathā idaṃ tathā etaṃ, yathā etaṃ tathā idaṃ" ]

'야타 에땅 따타 이당' 그러면서 그 부정관을 하는 거라. 시체 첫째 날에 되는 것들을 보고 아, 나도 이와 같이 되는구나. 둘째 날에 돼 있는 것을 보고 나도 이와 같이 되는구나. 그래서 열가지를 쭉 다 그렇게 합니다.

 

계속적으로 반복하다 보면은 그래서 자주자주 그 모습을 회상하다 보면은 마음이 싫다는 마음에서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자신의 견해가 바뀌어 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정관하는 정확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때 이 계율을 제정했던 것이 그렇게 안 하고 다 자살할려고 하는 거라. 날 좀 죽여주시오. 날 죽여주면 너는 이로운 것이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사하고 바리때 이런 것을 너가 가질 수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제발 부정한 이 몸을 좀 죽여달라.

 

부처님이 보름만에 선정삼매에서 깨어나가지고 보니까 자기 옆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없는 거라. 그래서 아난다한테 물어봅니다. 야, 비구스님들 다 어디 갔느냐? 하니까 다 죽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가지고. 그때 인제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바라이죄에 해당이 된다."

"또 남을 내가 죽일 의도를 갖고 죽여버리는 것도 바라이죄에 해당이 된다."

 

그러면서 이 계율에 대한 것들을 보완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와가지고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부처님 누가 배가 아프다고 해가지고 내가 약을 줬는데 고마 그 사람이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 그것도 바라이죄입니까? 네가 그사람 죽일 의도를 가지고 그 약 줬느냐? 아닙니다.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 그거는 바라이죄는 아닌데 그거는 악작죄에 해당이 된다. 악한 행위를 간접적으로 한 것에 해당이 된다. 그래서 너는 그것을 참회를 해야 되는 것이지 옷을 벗고 나가라는 것은 아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스님 내가 아기를 가졌는데 이 아이를 도저히 낳으면 안됩니다. 이 아이를 뗄 수 있는 약 좀 주십시오. 아이 떼는 약을 줬어. 그래가지고 아이는 떨어졌어.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것도 죽이는 것에 해당이 되는데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 이것도 바라이죄에 해당이 됩니까? 당연히 바라이죄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네가 직접 죽이지는 않아도 죽일려는 의도가 있었지 않느냐는 거라. 그런데 만약에 태아는 안 죽고 어머니가 죽어버렸다, 태아는 살고, 그런데 그렇게 될 수는 없지. 엄마가 죽으면 태아도 죽지. 그러니까 해산일이 다가왔다고 쳤을 경우에는 아이는 살아있을 수 있겠지. 아이는 죽지 않고 산모만 죽었다고 할 것 같으면 나도 산모를 죽일 의도는 없었다는 거라. 태아를 죽일려고 했지. 그런데 태아는 살아났기 때문에 바라이죄에는 해당이 안 되도 그거는 악작죄에 해당이 된다는 거라. 이런 식으로 점점 더 부처님이 죽이는 것에 대해서 비구들에게 설명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설명을 하는 것이, 그러면 선한 의도로 누가 아프다고 했을 때 약을 주는 것은 어느 범위까지 줄 수가 있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약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스님, 이거 어디 아플 때 드십시요” 하면서 약을 줬다고 했을 경우에 그 약을 누가 아픈 사람이 있으면 줄 수가 있습니다.

어느 범위까지 줄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하고 만약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아프다 할 것 같으면, 내가 전철을 타고 가는데 누가 배를 잡고 아프다 하고 있다, 그러면 내 호주머니 속에 배 아픈 약을 갖고 있는데 주어도 괜찮을까?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거라.

 

왜 그럴까? 이 사람이 배가 아픈 것이 어떤 상태에서 아픈 건지 전혀 모르는 상태라는 거라. 그런데 내가 만약에 그 약을 줬을 경우에 그게 거기에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악화되는 경우들도 있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렇게 하면 어떻게 돼요? 그 아픈 사람이 자칫 잘못되면 생명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라. 아니면 더 악화될 가능성도 있다는 거라.

그럴 때는 빨리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상책인 것이지, 자기가 배아픈 약이 있다 해가지고 모르는 사람한테 약을 줄 수는 없다는 거라. 하물며 그러는 건데 누가 배 아픈 사람이 있다 해가지고 그걸 돈을 주고 팔았다? 그건 더더구나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부적도 꼭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들 액운이 있다, 그럼 이 부적 가져가서 써라. 공짜로 주는 것도 안 되는 건데 돈을 주고 팔았다? 그건 더더구나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그걸 딱 규정을 해놓았습니다.

친족, 가족과 친지들 이외에는 그리고 같이 머물고 있는, 여기 같으면 선원에서 생활하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이외에는 어떠한 경우도 그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것으로 인해서 도움을 줘가지고 뭘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거라. 당연히 그것을 파는 행위는 더더구나 있을 수가 없는 거고.

 

그게 비구와 친족과의 관계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테라와다 스님들한테 실수하는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인데 처음 찾아갔는데도 “스님, 우리 가족이 뭐가 참 안 됩니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기도 좀 해주십시오” 하면서 부탁하는 경우들도 있어요. 그런 부탁드리면 그 스님은 어떻겠어? 그거 들어줄 수도 없고 안 들어줄 수도 없고. 들어주면은 부처님이 규정한 범위를 벗어나는 악작죄를 저지르는 것이고, 또 자칫 잘못하면 내가 승단에서 축출되는 바라이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고.

고마 안 들어주면 어떻게 돼요? 그 사람은 스님한테 부탁을 했는데, 스님이 안 들어줬다 해서 악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스님만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불교 전체를 미워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거라.

그래서 재가자들도 그 부분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부탁할 수 있는 범위가 있고 부탁할 수 없는 범위가 있습니다.

 

또 다르게 얘기해볼까요? 오늘 부산에서 스님이 대구 왔습니다. 만약에 예를 들면 “스님, 대구 가는 길에 어디 가면 커피 맛있는 데가 있는데 커피 하나 사주시겠습니까?” 하면서 커피값을 줬어요. 그거 들어줘야 돼? 안 들어줘야 돼? 들어주기도 뭐하고 안 들어 주기도 뭐하고, 아예 그런 것을 하면 안 됩니다. 스님한테 가는 길이라 해가지고 뭔가를 부탁해서도 안 되는 거라. 재가자들이 명심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어떠한 경우들이라도 스님이 계율을 위반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면 안 되는 거라. 그거 지금 당장 급한 거라? 그럴 것 같으면 자기가 시간을 내가지고 가서 그걸 사와야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물색해가지고 보내야 되는 것이지, 경제생활을 하지 않는 출가자들을 거기에 이용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거라.

마찬가지로 스님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재가자들한테 뭔가를 부탁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라.

 

얼마 전에 스님이 속이 좀 많이 거북했어요. 그리고 많이 좀 불편했어요. 그래서 뭘 먹기만 해도 체해. 여기 딱 받치는게 있어가지고, 그러니까 뭘 먹어도 딱 체하는 거라. 그런데 매번 밥상차려주는 사람은 내 의견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자기들이 하고 싶은 거 막 해놓고 갖다 놓습니다. 그럼 스님은 불만없이 그냥 먹어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체하는 게 낫질 않는 거라.

그런데 쉽게 얘기하면 "나 지금 속이 좀 안 좋으니까 죽 좀 해도" 이 소리만 하면 간단할 건데, 그 소리를 할 수가 없는 거라. 왜 그럴까? 그 사람도 그리할 거 같으면 “아, 예!” 하고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데도. 왜 그 소리를 할 수 없느냐면, 그것으로 오는 불편들이 간혹 있을 수가 있다는 거라. ‘내가 오늘 쎄가빠지게 준비해왔는데 스님이 죽 해주라고 하네’ 싫은 마음이 들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얘기를 못하는 거라. 그래가지고 스님이 일주일 동안 고생했어요. 이 속 때문에.

 

그런데 여기서 갖다주는 걸 좀 적게 먹었어요. “스님 왜 이렇게 적어요?” 항상 먹는 양이 똑같은데, 왜 이렇게 적게 먹어요? “응, 오늘은 그냥 좀 적게 먹었어” 실제로는 내가 좀 편해질려고.

적게 먹고 많이 먹고 하는 것은 그것은 스님이 선택하는 거기 때문에. 그건 가능하거든. 내가 적게 먹는 것은. 그래가지고 일주일 동안 고생하면서 결국은 나았어요. 스님이 취해야 될 것은 그런 것들이라는 거라.

재가자들한테 뭔가를 부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져온 것들, 먹는 것도 그렇게 부탁할 수 없는 건데, 다른 것들을 부탁한다? 그건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도 이 예를 들어서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다 되가는데, 그래도 세 가지 엑기스! 뽑는 것을 얘기하겠습니다.

 

먼저 아까 재산이라고 얘기했죠? 재산에서 뭘 뽑아야 되겠어요? 재산은 어떠한 경우든지 경전에는 다섯 가지로 나옵니다. 갑자기 집이 폭삭 망하기도 할 거고, 벼락 맞아가지고 아니면 쓰나미에 쓸려가지고, 그런 것은 거의 없다고 치더라도 아들놈이 재산 홀라당 말아먹을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내가 흥청망청 쓰다 보니까 재산이 홀라당 없어지기도 하는 거고, 뭐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나한테도 이익이 있어야 되는 거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익이 있어야 되는 거라. 그런 의미에서는 재산에서 엑기스를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이 뭐에요?

 

재산을 사용함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공덕! 공덕이 낳아지지 않는 행위들은 하지 말아라는 거라, 재산을 가지고.

그래서 만약에 예를 들어서 아들래미가 재산을 가져가서 홀라당 다 소비해가지고 없애버렸다, 그리하더라도 여러분들한테 공덕이 되도록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주고 나서 줬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 사람이 잘 되기를 하는 마음을 지속적으로 가져줄 거 같으면, 적어도 여러분들한테 재산은 없어졌지만 공덕은 남게 되는 거라.

자기가 먹는 거 하나를 먹었을 거 같으면 다른 사람한테 하나를 줄 거 같으면 적어도 하나를 주면서 내가 아, 저사람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 하는 마음을 가질 거 같으면, 그게 공덕이 되어서 적어도 그 공덕은 하나 생긴다는 거라.

그래서 재산에서 뽑을 수 있는 엑기스는 공덕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래서 공덕을 낳을 수 있는 행위들을 항상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몸에서 뽑을 수 있는 엑기스는 뭘까? 몸은 병들고 죽게 돼있는 겁니다. 몸은 자기가 아무리 피부를 땡기고 뭘 어쩌고 저쩌고 해도 그거 그대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몸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병들고 늙게 돼있으니까 고통스러운 것들입니다. 그리고 무상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여러분들이? 뭐 설거지 하는 거? 아니면 몸으로 열심히 돈 버는 거?

그거는 세속적인 것이지 불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몸으로 계율을 지키는 것들입니다.

몸으로 하는 계율들을 잘 지키게 됐을 때 그것이 남는 겁니다. 그런데 몸으로 하는 계율들을 지키지 못했다? 그럴 것 같으면 몸은 어차피 무상한 것이고 변하는 것들인데 그것으로 올 수 있는 엑기스들을 여러분들은 취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계의 향기는 멀리까지 퍼져나간다는 거라. 몸으로 하는 여러 가지 선한 행위들은 멀리까지도 퍼져나간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죽고 나서도 그것은 그 향기는 그대로 간직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몸으로 하는 엑기스들을 반드시 뽑아낼려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몸이 청정하고 깨끗하다? 그건 말도 안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부정관 같은 것들, 또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내가 몸으로 하는 행위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들, 그런 것들입니다.

계율이 밑바탕이 된 상태에서 그것들을 해야 됩니다. 선한 마음이 밑바탕이 된 상태에서 그런 것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 몸으로 인해서, 몸을 움직이면서 마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실제 몸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몸은 스스로 자기가 계율을 지킬 수도 없고, 몸 스스로 자기가 뭔가 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릴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몸은 그와 같이 참 하잘 것 없는 것이고, 부질없는 것이고, 무상한 것이다 하는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거라. 그래서 몸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내가 정신이 있을 때 반드시 할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마음!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마음을 증장시켜줘야 돼!

그걸 경전에서는 목숨이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목숨이 있는 동안에 뽑아내는 엑기스! 그거는 다른 게 없습니다.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들은 나를 살아있게끔 해줍니다. 그런데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상·고·무아의 이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까? 몸이든 마음이든? 그리고 그것에 만족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들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까? 없다는 거라.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몸과 마음에서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엑기스를 뽑아낼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마음을 더욱더 청청히 할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거고, 마음을 더욱더 높은 증상심, 더욱더 높은 지혜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죽고 나서 그걸 아무리 할려해도 할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해탈에 이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들이 거기서 뽑을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살아있는 동안에 그걸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언제 할 거라?

 

이 세 가지는 반드시 여러분들이 엑기스를 뽑을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몸을 대상으로 할 때는 계를 지키는데 힘써야 되는 거고, 행하는 행위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이 몸은 부정한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나도 반드시 그와 같이 된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고 재산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거기에 대한 엑기스를 뽑을 수 있게 됐을 때 ‘아, 내가 그래도 이생에서 해야 될 일들을 참 잘했다’ 하고 마음을 가지게 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이 비구와 친족간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지만, 분명한 경계선은 있다는 거라.

그 경계선들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가지고, 내가 스님한테 할 일과 또 뽑아내야 될 일들이 분명하게 있다는 거라. 아까 법시와 재시의 관계일 거 같으면 스님한테 스님이 살 수 있는 수단을 내가 제공 해줘야 되는 거고, 그 대신에 여러분들은 스님으로부터 엑기스를 뽑아야 됩니다. 법을 뽑아내고 수행하는 방법을 뽑아내서 내가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야 된다는 거라.

그게 재가와 출가자의 관계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