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집중수행] 상카라를 구분해 보자! (20190727)

담마마-마까 2022. 5. 18. 09:00

https://youtu.be/mqK4k9gTiog

* [집중수행] 상카라를 구분해 보자! (20190727)

<멈춤이 보일 때 의도가 드러나고, 의도를 볼 때 상카라를 구분할 수 있다.>

 

법문하려고 준비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보다도 수행 부분에 의문나는 것들이 있으면 질문을 받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나 여쭤볼게요?

 

수행을 하다가 오온에 대한 것을 경험해본 사람 있어요?

 

(수행자 대답 : 생각으로는 이게 색, 수, 상, 행, 식, 이렇게 생각은 되는데, 수행에서 실제적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장 구분하기가 쉬운 게 의도가 일어날 때, 의도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상카라는 분명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오온에서 마음의 부분 4부분들을 구분을 잘 못합니다.

어떤 게 느낌이고, 어떤 것을 내가 인식한 것이고, 어떤 것이 형성작용에 대한 것이고, 하는 구분을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좀 더 예리해지면 다른 것보다는 상카라는 분명하게 인식이 가능합니다.

 

처음에 수행할 때 지금 현재는 아마 접촉과 느낌을 구별을 잘 못하죠?

접촉 다음에 느낌이 일어나지는데, 어디 부분이 접촉이고 어디 부분이 느낌인지를 잘 구분을 못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수행할 때 마음이 뭉뚱그려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걸 세밀하게 구분을 못합니다.

 

구분하는 포인트가 뭐냐면 접촉과 느낌을 구분하는 포인트와

마음의 영역 중에서 상카라의 영역이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게

"의도가 분명히 일어나는 것들을 볼 수가 있을 때" 그게 가능합니다.

 

수행을 하다가 현상들이 '멈춤'이 있을 때 그걸 분명하게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 "멈춤 다음에 일어나는 마음이 뭔가?" 하는 것들을 자꾸 볼려고 노력을 해야만이 상카라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정도 예리해지면 수행이 굉장히 무르익어 가는 상태가 됩니다.

물론 그때도 용을 써야만이 사띠를 지속할 수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리해도 어떤 것에도 흐름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게 훈련이 되지 않으면 보통 일상생활에 대해서 접하는 것들에서 그것들이 변하고 있는 것들을 알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단지 그냥 흐름이고 변하는 것들이다 해서 그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는 것이 없어야 되는데,

대부분은 보면 자아가 거기에 딱 개입을 해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면은 비교하게 되고 또 여러 가지 일들에 일희일비하게 되고, 슬픔과 괴로움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물론 수행을 통해서 도와 과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와 과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흐름에 대한 이해들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을 거 같으면 일상생활하는데 크게 마음이 동요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 포인트가 뭐냐면 마음의 영역에서 상카라를 구분할 수 있는가?

그다음에 접촉과 느낌에 대한 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가?

이 상태가 될 때 일상생활할 때도 마음이 크게 동요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르게 됩니다.

 

이미 변화를 알고 있기 때문에, 끄달려는 들어갑니다.

누가 나에게 칭찬하고 나에게 조금 더 이익되는 것들이 있으면 좋아라 하고, 또 자기의 기준점을 세워놔놓고 기준점이 넘으면 좋고, 기준점이 낮으면 싫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에 크게 끄달려 들어가지는 않는 상태가 됩니다.

금방 본인이 알아차립니다.

'아, 내가 또 내 기준을 세워두고 내 자아를 드러냈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이빨을 드러낸 것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럼 자제를 하게끔 됩니다.

 

수행을 할 때 대상이 스무스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계속 본다고 해서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변하는 것들이 보이는 것들만 있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부분은 수행에서 "멈추는 것이 분명하게 보일 때",

"그때가 수행에서 하나의 터닝포인트다" 하는 생각을 분명하게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 의도들이 탁 드러날 때, 그 의도에서 상카라가 언제 탁 일어나는지를 보일 수가 있게 되면, 수행은 무르익고 또 여러 가지 세간사에서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상태에 된다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고.

 

집중수행에서 적어도 이번에는 상카라는 한번 보자! 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떨 때는 그게 보일 때 주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몸이 주체가 안 되고, 물론 마음이 주체가 안 되니까 몸이 주체가 안 되는 건데, 그럴 때는 반드시 스님한테 그것을 물어서 잡아나가야 됩니다.

그런 경우가 흔하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으니까,

그리해도 상카라를 보는 이익은 굉장히 큽니다.

그래서 집중수행에서 중점적으로 한번 볼 수 있도록 해보시기 바랍니다.

 

멈추는 걸 한번 보도록 해보십시요.

그런데 멈추는걸 볼려해도 마음이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는 게 먼저 보입니다.

내가 콘트롤 할 수 없을만큼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것이 먼저 보여야 됩니다. 보여야만이 멈추는 게 보여집니다.

그마만큼 멈추는게 보여지는 것은,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머물러있다는 상태들입니다. 그렇게 한번 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수행자 질문 : 의도도 상카라에 들어가는 거 아닙니까? 의도도 행선에서만 말고도, 좌선에서도 의도가 보여집니까?)

 

의도 마음에 약간의 떨림이 있는 상태로써 보여지거든요. 수행에서는.

상카라 그것보다도 폭이 큽니다. 진폭이.

그래서 마음을 구분하면 구분할수록 본인이 콘트롤이 안 될 정도로 진폭이 큰 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런 의도하고 상카라하고는 구분이 되어집니다.

해보십시요. 재미가 있을 겁니다.

 

(수행자 질문 : 그 상카라가 가슴의 느낌으로써 알 수도 있습니까?)

가슴에 느낌으로 먼저 아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몸 전체로 그냥 느껴집니다.

몸 전체로 느껴지다가 그 상카라에 대한 것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고 나면 인제 가슴으로 알아지게 됩니다.

그것조차도 나중에 되면 평온한 상태에서 그 상카라를 보게 됩니다.

자꾸 경험을 해보면 그렇게 바뀌어집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어떤 경우든지 가슴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몸이 그냥 압니다. 몸 전체가.

자! 오늘은 수행 한 번 열심히 해보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