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테라와다 불교의범과 신행생활

복습 및 시험, 참회서원의 게송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 1교시_130405-1

담마마-마까 2024. 11. 24. 14:37

https://youtu.be/IDBrlpa5W0Y?si=I7f6P_PT1VIoB0n4

 

 

담마스쿨 개강한 지도 인제 1달이 넘었습니다. 경전을 공부한다는 거는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꼭 경전은 공부에서만 그쳐버리면 안 됩니다. 경전은 반드시 내가 실천할 수 있는 도구로써 쓰여져야 됩니다. 배운 것을 그대로 수행이면 수행, 아니면 공덕 쌓는 거면 공덕 쌓는 거, 또 마음을 쓰는 거면 마음을 쓰는 것으로 이용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이 담마스쿨을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의범과 신행생활에서 지금 한 달 하면서 겨우 한 게 뭐 했는지 알아요?

'나모따사' 그 다음에 '붓당 사라낭 담망 사라낭 상강 사라낭 갓차-미' 요거 딱 2가지 했습니다. 근데 벌써 한달이 지났어요. 한 달이 지났으니까 어쨌든 이 부분은 그래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인제는 의미들을 파악을 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오는 환희심, 그것으로 오는 믿음들,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아 바르게 나아가야 되겠다 하는 마음들을 다잡을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자! 복습 및 시험 문제 되겠습니다.

오늘 시험을 쳐서 답안지를 사무국에다가 제출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점수 매기는 것은 아닙니다. 점수 매기는 것은 아니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수행의 기본이 뭡니까?

마음이 먼저 자유로워져야 된다. 어떤 것도 대상을 붙잡으려 하지도 말고 어떤 것이든 대상에 끄달려들어가서도 안된다. 그게 인제 먼저 기본입니다.

경전 공부에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먼저 기본이 돼야 되는 것은,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참회에서도 기본이 맨 첫 번째가 나의 허물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 해야 되는 것이 수행에서는 마음이 고요하고 맑게 돼있을 것 같으면 그것을 더욱더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선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지 않게끔 더욱더 만들어줘야 됩니다.

경전 공부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경전공부도 있는 그대로 드러냈을 것 같으면 나의 실력을, 그다음에는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 하고 있다, 어떤 걸 기억하고 어떤 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참회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을 드러냈을 것 같으면 그다음부터는 아 내가 이거 잘못했다는 걸 알아서 내가 스스로 그걸 받아들여야 됩니다. 못했으니까 아 내가 이건 참 잘못 했구나. 그리고 이러한 잘못들은 누구든지 저지를 수 있다. 잘잘한 잘못들 소소한 잘못들은 언제든지 내가 저지를 수 있다는 그런 경각심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수행해서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했을 것 같으면,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은 일어나는 대상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대상들이 변하는 속성들로써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수행의 3가지 원칙입니다.

 

경전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잘못한지까지를 알았을 것 같으면, 그다음에는 못 하는 것들은 자기가 보충을 해야 됩니다. 보충을 하고 그래서 어긋나지 않게끔 만들어야 되는 거라.

참회할 때도 마찬가지라. 그걸 내가 스스로 인식하고 잘못했다고 참회할 것 같으면 그다음에는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지 하고 분명하게 계를 다져야 되는 것들입니다.

어떤 것이든 비슷한 패턴들로 이어져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시험을 친다 해가지고 여러분들에게 해가 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한 단계 더 뛰어넘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했던 게 「완다나」 부분입니다. 처음 입재 할 때 한번 읽어봤었죠.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닷사"

이렇게 읽어 봤을 겁니다. 그래서 그걸 이렇게 쭉 읽어 보고 그것을 마음 깊이 자꾸 되새기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밑에 해석을 쭉 해놔 놨습니다. '나모'에 대한 것, '땃사'에 대한 것,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닷사' 이런 식으로 쭉 풀이를 해놨기 때문에 크게 여러분들이 그것만 읽어보면 의문나는 것은 없을 겁니다.

가장 문제되는 것이 '아라하따' '아라하또' 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일반적으로 왜 어떤 책을 보더라도 이 게송을 먼저 쓰게 될까? 테라와다 서적 나온 거 한번 보세요. '나모 땃사' 안 들어가고 책 쓰여져 있는 게 있는가. 맨 처음에 항상 이거 먼저 써집니다. 편지를 써도 이걸 먼저 쓰고, 뭐 이메일을 보내도 마찬가지고, 책을 출판해도 맨 앞에는 이걸 먼저 씁니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 책에는 이 부분에 대한 걸 갖다가 먼저 쓰는 법이 없습니다. 서론 먼저 쓰든지, 아니면 인사말 먼저, 머릿말 먼저 쓰지, 이걸 먼저 항상 기록해 두질 않습니다.

 

공덕을 쌓는 10가지 길이 있다고 저번에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게 뭡니까? 보시, 지계, 그다음에 수행!

보시·지계·수행이죠. 가장 중요한 것이 이 3가지입니다.

그래서 항상 남에게 베풀려고 하는 마음들은 내야 되는 거고, 그리고 몸이나 말이나 이런 쪽에서 나쁜 쪽으로 나아가는 걸 갖다가 계로써 자꾸 계를 지키면서 방어를 하려고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모든 것들은 배우는 것들은 실천하기 위한 거니까 자꾸 실천할려고 해야 되는 거고. 그래서 보시 지계 수행은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래서 이거는 끊임없이 해나가야 되는데 요거 3개를 빼고, 그다음에 공덕을 쌓는 네 번째 항목으로 잡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

아까 여러분들이 얘기했죠. 인욕 정진 지혜 결정심 자비심 평온한 마음? 뭐가 될까?

 

네 번째로, 거의 보통적으로 꼽는 것들이 뭐냐면 겸손과 존경 부분입니다.

이거는 겸손과 존경은 같이 연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보통 붙여갖고 얘기를 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날까? 안 일어납니다.

그러면은 겸손하다는 것은 뭘 얘기할까? 무조건 뭐 다른 사람들에게 굽신굽신하는 걸 갖다가 겸손하다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걸 보통 겸손하다고 얘기를 하게 됩니까? (수행자 : 자기를 낮추는 거) 당연히 자기를 낮추는 거죠. 나라고 하는 생각 나라고 하는 사상들을 갖다가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게 겸손의 첫째 척도입니다.

 

여기 시험 문제에도 있죠. 무상 고 무아가 표면에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것. 왜 그럴까?

그러니까 무아 나라고 하는 것이 왜 불쑥 올라올까? 나라고 하는 생각이, 그리고 나라고 하는 자존심이 왜 팍 드러나게 될까?

그걸 경전에서는 '두께' 때문에 그렇다고 그럽니다. 이게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이게 강한 거라. 그래서 표면에 드러나는 거는 이 두께 때문에 그렇다고 그래요 경전에는.

 

그래서 최대한 이 두께를 얇게 얇게 만들어가지고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점점 더 견고하게 두께를 쌓아간다고 할 거 같으면 나라고 하는 것이 점점 더 견고해져 버리게 되는 거라. 겸손할 줄 안다고 하는 것은 이 두께를 자꾸 얇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나라고 하는 것들은 조건 지워진 것뿐인 것이지.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자꾸 가지게 될 때 그럴 때 겸손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해지게 되면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그러고, 정직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뿐 아니라 다른 생명체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마음들을 갖다 가지게끔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출가한 스님이나 아니면 부모님이나 이런 분들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인제 존경의 마음으로써 드러나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 스님이 아무것도 모르는 스님이다, 또는 나의 부모님이 나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를 낳아준 부모라는 것 때문에, 또 나를 그래도 이 법에 오도록 인도해 준 스님이란 생각 때문에 존경의 마음들을 내게끔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설혹 부모가 나에게 잘 못해주더라도 그것이 크게 허물이 되질 않아. 그 스님이 법을 잘못 설해주더라도 크게 허물되지를 않는 거라.

 

근데 이 겸손한 마음들이 없을 것 같으면 당연히 나라고 하는 것이 두께가 두꺼워지니까, 존경의 마음도 같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부모에 대해서도 고마워할 줄도 모르게 되는 거고, 스승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도 모르게 되는 거고, 이렇게 자꾸 바뀌게 되는 거라.

그래서 보시 지계 수행 다음에 그다음에 반드시 쌓아야 되는 것이 네 번째가 뭐냐면 이 겸손과 존경이라는 부분입니다.

 

겸손과 존경을 나타내기 가장 용이한 게 뭐가 있을까? 조금 전에 한 이겁니다. 이거 이상 가는 게 없습니다. 뭐 겸손하다 해가지고 내가 땅바닥에 가서 길 거야, 어떻게 할 거야? 존경한다고 말로써 존경한다고 열 번 하면 뭐 할 거라? 그 '행위 자체에서 드러나게 되게 될 때' 그걸 갖다가 보통 존경한다고 이렇게 얘기들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에 대해서 존경의 마음을 자꾸 내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은 부처님한테 절을 많이 하면 부처님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존경의 마음을 낼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겸손해지지 않으면 안 되니까, 나라고 하는 걸 점점 (없애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내 자신에게 내 나의 수행을 위해서 존경의 마음을 낸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부처님에 대한 존경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도 어떠한 책에도 항상 이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라는 걸 먼저 집어넣게 돼있습니다.

내가 직접 쓴 거지만은 이건 내 덕분에 쓴 게 아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고, 부처님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돈 많이 벌었지만 이건 내가 잘해서 번 게 아니고 부모님이 날 낳아주신 덕분입니다. 그래서 일반 스님뿐 아니라 재가자도 항상 글 맨 첫머리에 이걸 넣게끔 되는 겁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전에도 그런 게 있죠.

무슨 급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놀라면 “엄마야!” 하고 놀라는데 어떤 분은 “나모 땃사 바가와또!” 하고 이걸 외치거든. 그게 통상적인 겁니다. 통상적인 거.

보통 한국에는 그렇게는 잘 안 하죠. 위급한 상황이 될 것 같으면 정신이 조금 들면 ‘아이고 부처님!’ ‘아이고 부처님!’ 이래 할지는 몰라도 위급한 상황이 탁 닥쳤을 때 첫 번째 떠오르는 의식에서 ‘부처님!’하고 붙잡는 사람은 아마 잘 없을 거라. 근데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래서 급할 때 아 이 게송이 먼저 탁 떠오르게 될 때, 그러면은 그거 이상 가는 거는 사실은 없습니다.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이 게송에 대해서 저번 시간에 쭉 설명을 했는데 보충설명 뒤에다 이렇게 해놔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알겠죠?

 

이제 여러분들 공덕을 쌓는 것들 가장 손쉬운 게 뭐라고? 겸손과 존경의 마음을 내는 것!

얼마나 돈 안 들고 또 내 자신에게 이익됨이 있고 바라밀을 쌓을 수 있는 얼마나 좋은 거야. 여러분들 보고 뭐 오후불식을 하라 그래, 아니면 여기에 뭐 보시를 많이 하라고 그래, 맨날 알아차림 해가지고 수행하라고 그래? 그건 아니잖아.

적어도 이거는 바라밀을 쌓을 수 있는 가장 용이한 길이고, 그리고 3가지 중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가장 으뜸가는 거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반드시 이건 할 줄 알아야 됩니다.

 

누굴 위해서? (수행자 : 자신을 위해서) 부처님을 위해서 아니죠?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여러분 자신의 나라고 하는 것들을 점점 엷게 만들어주는 것. 그래서 결국에는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빨리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고, 빨리 공덕들을 쌓도록 하기 위한 것들이라 생각을 하시길 바랍니다.

 

자 그중에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했는데, '아라하또' 라고 하는 것은 보통 한국에서는 '응공'이라고 이렇게 풀이를 합니다.

근데 빨리어 사전에는 보통 크게 3가지로 '아라하따'를 풀이를 합니다.

부처님은 비밀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아까는 수마나는 비밀이 많던데, 부처님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비밀스럽게 가르친 것도 없고 비밀스럽게 행하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의 뜻에는 '비밀이 없다'는 뜻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다음에 아라한의 뜻에는 또 뭐가 있을까? 아라한 할 것 같으면, '번뇌가 없다'는 것. 아주 청명하고 깨끗하고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다는 그런 의미, 번뇌를 라고 하는 적을 완전히 쳐부숴버렸다, 그래서 그 싹을 완전히 잘라버렸다.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아라한의 가장 대표적인 세 번째가 뭐냐면, 그런 분이기 때문에 내가 언제든지 그분만 보면 환희심이 일어나고 뭐든지 퍼다 주고 싶고 뭐든지 대접하고 싶고 이런 마음이 자꾸 솟아나는 거라.

그러니까 그분 입장에서는 '공양 받기에 적당한 분'이란 뜻이라. 번뇌가 하나도 없고 비밀스러운 것도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그냥 완전히 깨끗한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조건이 일어나더라도 변동이 없는 상태가 돼 있으니까 당연히 공양 받기 적당한 분이 되는 거라.

이 대표적인 게 그 3가지입니다.

 

물론 아라한의 뜻은 그것 말고도 더 많이 있습니다. 더 많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그걸 인제 마지막 '공양받기 적당한 분'이라는 뜻으로 '응공'이라고 풀이를 해놔 놨습니다.

근데 원래 의미 자체는 응공이라는 것보다는 번뇌와 관계된 것들이 더 강합니다.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번뇌들을 소멸했고 번뇌들로부터 벗어나고 떠나버렸다, 그 번뇌라고 하는 적을 물리쳐서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었다 하는 그런 의미들이 강합니다.

그리했기 때문에 당연히 공양받기 적당한 분이 되는 것이지, 그냥 스님이기 때문에 당연히 공양받기 적당한 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부모이기 때문에 공양받기 적당한 분이 되는 분이 아니라는 거라. 그마만한 자격 그마만한 조건을 갖추었을 때 공양받을 수 있는 분이 된다는 그런 의미라는 거라.

 

그래서 스님 같은 경우에는 공양받기 적당한 분이라는 용어보다는 "번뇌로부터 떠난 분"이라고 인제 풀이들을 그렇게 해놓은 겁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정답은 없는데 왜 이렇게 해놨느냐 하면, 나머지 '바가와또'하고 '삼마삼붓다'는 부처님에게만 붙일 수 있는 용어입니다. 그렇죠. 부처님 외에 어느 제자들에게도 붙일 수 없는 용어입니다. 근데 '아라한'은 부처님뿐 아니라 여러 제자들에게도 다 공용 공통적으로 쓰여지는 그런 용어입니다.

 

제가 한번 문제를 한번 내볼게요.

깨달음의 경지에서 어떤 게 깨달음의 경지에서 높을까?

부처님 그다음에 아라한, 그다음에 벽지불, 그다음에 한국에서 두루 쓰는 지장보살이든 무슨 보살이든 그 보살, 수행경지에서 어떻게 될까? 부처님이 최고 높아요? 맞아요? (수행자 : 네)

이의 제기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네. 수행 경지에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자꾸 착각하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 자리에 온 사람들 여러분들이 여기에 온 사람들은 내 같이 아침에 8시 돼서 우리 선원에서 출발해가지고 쎄가 빠지게 여기로 오는 먼 길을 오는 사람이 있고, 가까이 있는 사람은 2시니까 1시 반 돼서 화라락 걸어서 오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고 버스를 타고 온 사람도 있고, 아니면 편하게 자가용을 타고 온 사람도 있고, 근데 어쨌든 여기 들어와가지고 여러분 수업 듣는 건 다 똑같습니다. 그렇죠?

근데 온 것에 대해서 오는 과정들은 각각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멀리 돌아서 왔을 것 같으면 갈 때도 멀리 돌아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 집으로 갈 때는. 가까이 왔을 때는 금방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이 갖추어지는 것들이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겸손과 존경심이 갖춰진 상태에서 이 게송을 읽는 사람도 있을 거고, 그걸 갖추지 않고 이 게송을 읽는 사람도 있을 거고, 또 여러 가지 공덕들을 쌓아서 복 많이 받아가지고, 뭐 재산도 많고 뭐 해가지고 이 자리에 온 사람도 있을 거고, 근데 진짜 오늘 갈 때 차비가 딸랑딸랑딸랑 해가지고 여기 온 사람도 있을 거란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돌아갈 때는 어떻게 차이가 날까? 와서 경전 강의 듣는 거는 똑같습니다.

 

근데 돌아갈 때는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공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은, 모든 걸 다 갖춘 사람들은, 그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펼치는 것이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깨달음을 이뤘지만은 펼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는 게 없으니까. 또 내가 쌓은 덕이 없기 때문에, 그거는 차이가 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리고 시간이 많이 걸려서 깨달음을 이룬 사람도 있고 금방 깨달음에 이른 사람도 있다는 거라. 시간의 차이는 있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리고 자기가 쌓아온 공덕의 깊이도 차이가 날 수는 있다는 거라.

그런데 이 자리에 와서 법문 듣는 건 똑같다는 거라.

부처님이든 아라한이든 벽지불이든 깨달음은 똑같다는 거라. 보살은 조금 틀립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분이기 때문에.

 

근데 이걸 자꾸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거라. 그러니까 자꾸 이게 계급을 자꾸 만들어 놓으니까 부처님 아래에 아라한을 갖다가 만들어 놓으니까, 아라한은 열등한 것이다.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하는 거라. 실제 그렇습니까? (수행자 : 아니요) 그러면 부처님 자신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되는 거라.

왜? 부처님 자신이 선언했거든. “이 안에는 61명의 아라한이 존재한다.”

야사를 비롯한 55명이 깨달음을 아라한과에 이르고 나서 61명이라 그럽니다. 5명의 처음에 비구 5명, 그다음에 55명, 몇 명입니까? 60명이죠. 그럼 60명의 아라한이 존재한다고 해야지 61명이라 했을까? 부처님도, 부처님도 아라한이라. 똑같은 수행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거라. 근데 이걸 자꾸 인제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는 거라.

 

그 대신에 그 아라한들은 어떻게 해서 깨달음을 이뤘어요? 부처님 말씀을 듣고! 내가 지어놓은 게 요것밖에 안 되니까, 쉽게 말하면 내 스스로 그걸 도달할 상태가 못 돼. 그러니깐 남의 도움을 받아가지고 된 거라.

그리고 그 아라한들도 사리불이나 목련존자는 그래도 또 많이 갖췄으니까 상수제자가 되어서 여러 가지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을 설하고 하지만은, 처음에 부처님 제자가 됐던 앗사지 존자나 이런 분들은 거의 뭐 이름도 잘 없어. 나중에는 가면. 먼저 깨달음을 이루어서 똑같은 경지에 이르렀지만 펼칠 수 있는 양이 적은 거라. 그 차이가 나는 것뿐인 것이지.

깨달음의 경지는 어떠한 경우든 아라한이든 부처님이든 똑같습니다.

그렇게 볼 거 같으면 아라한을 목표로 하는 것이나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성불을 부처님을 목표로 하는 것이나 사실은 똑같다고 봐야 되는 거라. 깨달음이 경지를.

그런데 왜 그걸 아라한을 열등한 것이라고 하느냐는 거라. 그건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그 대신에 테라와다에서는 왜 그러면 부처님을 목표로 해서 나아가지 않고 아라한을 목표로 해서 나갈까? 100명을 물어보면 99명은 아라한을 목표로 해서 나갑니다. 한 사람은 목표가 없고. 왜 그럴까? 한국에서는 100명을 물어보면 다 성불을 해서 부처를 목표로 해서 나아갑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이 지금 현재 세상에서는 오직 한 분밖에 존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 두 분의 부처님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완전히 멸망해가지고 없어지고 나서 새로운 인류들이 출연하기 전에는 부처님이 탄생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새로운 부처님이. 그렇죠? 부처님이 두 분이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면 현실적으로 안 맞는 거라. 내가 지금 성불을 목표로 한다는 거는, 내가 부처가 된다는 거는 이 생에서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이생이 아니라 이 지구가 존재하는 상태 내에서는.

그럼 대안이 뭐라?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려고 할 것 같으면 아라한밖에 없는 거라.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아라한이 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거라. 부처님은 이미 이 세상에 나셔가지고 열반에 드셨지만 그 부처님의 법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현재는 부처님의 세상입니다. 부처님의 법이 영향을 미치는 세상이라. 그럴 것 같으면 다시 부처님으로 성불을 할 수가 없어. 누구든지. 근데 성불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진짜 먼 후에.

 

지금의 부처님도 그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굉장히 무한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10가지 바라밀을 쌓은 기간, 그다음에 내가 붓다가 되겠다 하고 마음을 낸 기간, 그다음에 그런 생각 없이 보낸 기간, 이게 한량이 없습니다. 그래가지고 겨우 인제 부처님이 됐는데, 지금 여러분들이 나는 붓다가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는다? 얼마만한 시간 후에 붓다가 될까?

왜 그러냐면 나는 붓다가 되겠다고 서원을 세운 사람은 이생에서 태어났을 때 과거생에서 내가 붓다가 되겠다고 서원을 세웠다, 내가 서원을 세운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근데 내가 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그 서원 안 세웠다는 얘기라.

 

생각으로 세웠든 아니면 바라밀을 행하면서 세웠든 아니면 그것조차도 없이 그냥 살아왔든 어쨌든 알게 되는데, 모르고 있다는 거라. 그러면 그런 서원을 안 세웠다는 얘기라.

그럼 지금부터 서원 세워가지고 언제 될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내가 쌓은 공덕은 요마만큼 밖에 안 되지만 이 공덕으로 인해서 그리고 지금 현재 부처님 법이 살아 있으니까 그 법으로 인해서 내가 지금 깨달음을 이루는 것도 아라한이 되는 것이 현실적인 조건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게 이제 테라와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복이 많았을 것 같으면 부처님 있을 때 태어났겠지. 실제 부처님 육성 듣고 탁 깨달을 수 있는 조건이 돼 가지고 탁 단번에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은 쎄가 빠지게 얘기해줘도 귀에 들릴동 말동 해. 나나 여러분들이나 복은 요만큼 밖에 안 타고 났어. 그러니까 이 세상 지금 태어난 거라. 그러면 옛날에 아라한이 됐던 분들하고도 이미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거라. 우리 뒤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아라한이 되더라도 우리보다 더 못하겠지.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현재 그 조건조차도 다 무시해버리고 내가 성불을 하겠다? 그거는 어불성설이라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앞으로 인사할 때 “성불하십시오” 하고 얘기를 하면 안 돼. 성불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는데 어떻게 성불을 할 거라. 성불하라는 얘기보다는 차라리 뭐 “수행하십시오.” “수행합시다.” 하든지 아니면 “행복하십시오.” 하든지 이렇게 해야 현실적인 것이 되는 것이지. 아니면 “아라한이 되십시오.” 하든지 이렇게 돼야 바른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이 문장에서는 나머지 게송들은 부처님을 지칭하는 용어지만, 아라한이라는 용어는 부처님과 또 부처님으로 인해서 깨달음을 똑같은 수행의 경지에 도달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들을 갖다가 지칭하는 용어가 아라한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적어도 아라한에 대한 용어들을 분명하게 정리만 해둬도 내가 나아갈 방향이 정해집니다.

 

아라한이 될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저번에 그 공덕을 쌓고 나서 회향하는 게송을 얘기를 해줬죠. 그 게송에는 뭐라고 나와 있어요? 이 공덕들로 인해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아니면 내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남에게 베푸는 마음을 가지기를, 이런 게송들을 얘기해 줬죠. 근데 여러분들 공덕 쌓일 때마다 게송 하긴 하나?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수행만 열심히 해가지고 아라한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단언을 합니다. 그 정도 여러분들 힘은 없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럼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수행의 힘뿐 아니라 갖춰야 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데 이걸 안 갖추려고 그러는 거라.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갖춰야 될 게 뭐가 있을까? (수행자 : 공덕을 쌓아야 됩니다.) 예. 그게 정답입니다. 근데 바라밀이 아라한이 되기 위한 바라밀의 조건하고 그다음에 공덕을 많이 쌓기 위한 바라밀 조건하고 조금 차이가 납니다. 어디에다 비중을 둬야 되는가? 하는 것이 차이가 납니다.

아라한이 되기 위한 바라밀의 가장 큰 덕목, 스님들은 세속 일에 대해서 일절 타치를 하지 마라. 일체 관여하지 마라. 그럽니다 그래서 비록 내 출가 하기 전에 내 가족이 있다고 해도 내 자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출가하고 나서는 이 가족에 대해서 신경 쓸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에 재가자들은 출가자의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지마라. 그게 기본 룰입니다.

여러분들 가끔 뒷담화 많이 하죠. 어느 스님은 어쩌고 저쩌고 저 스님은 어쩌고 저쩌고 사실은 굉장히 위험한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출가자 일들에 대해서는 재가자들은 일절 비난하는 마음들을 내면 안 됩니다.

 

비난을 하면 어느 쪽이 더 손해일까? 비난받는 쪽이 손해일까? 아니면 비난하는 쪽이 손해일까? 당연히 비난하는 쪽이 손해입니다. 직접 대놔 놓고 이 사람한테 비난을 하더라도 그 행위 자체는 이미 이 사람이 받게끔 돼 있는 겁니다. 내가 비난하든 안 하든 간에. 근데 나는 그것으로 인해서 비난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과보는 어떻게 할 거라? 그건 저 사람이 받는 게 아니고 내가 받는 거라.

 

그럼 비난하는 과보가 클까? 아니면 뭐 이 만약에 이분이 거짓말 했다 그러면 거짓말 하는 것에 대한 과보가 클까? 오역죄를 저지르기 전에는 비난하는 과보가 훨씬 큽니다.

쉽게 말하면 큰 잘못을 저지른 거, 큰 잘못 저지른 것 외에는 비난하는 것이 더 훨씬 큽니다. 왜? 그건 오래도록 가고 그거는 반드시 결과를 갖다 미치게끔 되는 거라.

나머지 죄들은 쉽게 말하면 더 좋은 조건을 만들어서 이게 일어나지 못하게끔 덮어둘 수는 있는데, 그래서 그 업의 결과가 드러나지 않게끔 만들 수 있는데, 비난하는 것에 대한 것은 그게 잘 안 됩니다. 그러니깐 결과적으로 볼 것 같으면 비난하는 것이 훨씬 죄의 경중으로 봤을 때는 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근데 여러분들은 만약에 어느 스님 비난하고 어느 스님이 비난했다, 그거 우짤끼라 다?

 

그래서 "재가자들은 출가한 스님들의 일에 대해서는 관여를 하지 말아라." 스님들도 마찬가지예요. "재가자의 일들에 대해서는 일절 그것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말고 관여를 하지 말아라." 그게 인제 불문율입니다.

그러는 이유가 뭘까? 왜 그럴까? 왜 그렇게 비난하는 걸 갖다 못 하게 하고 자기 할 일들만 하도록 할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차피 스님은 여러분들이 주는 여러 가지 보시로 인해서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은 또 스님으로 인해서 법을 듣고 그것으로 인해서 법을 따라가는 거고, 불가분의 관계인데 이 관계 설정이 깨어져 버릴 것 같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그래서 아라한이 되기 위한 제1의 조건 화합을 해치는 비난하는 행위는 일체 하지 말아라. 그게 첫 번째입니다. 비난하지 않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첫 번째의 조건.

 

그다음에 또 큰 조건들이 뭐가 있을까? ‘오늘은 담마스쿨 하는 날이니까 가야 되겠다’ 탁 마음을 먹었다. 근데 무슨 일이 생겼어. 그럼 못 와. 근데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이 생겼는데도 ‘에이 난 그래도 가야 돼’ 하고 담마스쿨 왔어. 왜 차이가 나게 될까? 이게 결정심의 차이라는 거라. 결정심의 차이. 강하게 결정심을 낸 사람은 똑같은 조건의 오지 못하는 조건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게끔 되고, 그 결정심이 강하지 못하면 못 오게 돼버리는 거라.

여러분이 아라한이 될려면 이와 같은 결정심을 키워야 됩니다. 그것이 선한 일이고, 그것이 나를 수행에서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주는 것이고, 나의 마음을 조금 더 증장시켜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할 거 같으면 이것은 반드시 한다고 결정을 딱 해버려야 됩니다. 그 결정심이 있어야만이 나아가지게 됩니다.

 

당연히 수행은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되는 겁니다. 이 조건들이 무르익었을 때 수행을 통해서 사마디도 형성이 되고 지혜도 개발되고 이렇게 해가지고 3가지 특성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게 되고 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이지, 이 조건을 갖추지 않고 지 혼자서 수행 열심히 한다? 허공에 떠버리는 거라. 안되는 거라.

근데 아무리 수행해도 1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못 넘어간다 할 것 같으면 다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거라. 뭐가 부족한가? 틀림없이 조금 전에 얘기한 것들을 못 갖추고 있다는 거라, 그럼 빨리 그걸 갖춰야만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집니다.

불교에서의 수다원이든 아니면 지혜의 단계든 그것은 단계라고 얘기하지 에스컬레이터라고 얘기를 안 합니다. 이게 쭉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1단계 올라갔다가 그다음에 딱 1단계 올라가 가고 하는 겁니다.

 

이 단계를 어떻게 넘어갈 거라? 이걸. 이거 어떻게 넘어갈 거라? 수행으로 넘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이거는. 그 공덕들 그 바라밀들이 이것을 차고 올릴 수 있게 되는 거라. 못 올라갈 때는 그걸 자기가 자꾸 확인해 봐야 된다는 거라.

이러다가, 어쨌든 아라한에 대한 이해가 됐죠? 그래서 아라한이라는 걸 분명하게 이해하고,

여러분들도 경전을 배우는 근본적인 목적과 수행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뭡니까?

공덕 더 많이 쌓기 위한 것, 또 여러분들에게는 깨달음을 이루는 겁니다. 아라한이 되는 겁니다. 그 2가지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 생각을 항상 잊어버리면 안 돼.

 

 

그다음에 뒤에 하는 게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라고 하는 것입니다.

붓다 담마 상가 얼마나 소중할까? 굉장히 소중합니다. 굉장히 소중합니다. 언제까지 소중하게 될까 ? '앗따 히 앗따노 나토(Attā hi attano nātho)' 자기자신을 의지처로 하기 전까지는! 이것이 여러분들의 중심이 돼야 됩니다. 그것이 중심이 돼야만이 결국에는 나 자신을 의지처로 해서 나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열반할 때 뭘 의지하라고 그랬어요? 예? (수행자 : 법에) 담마와 위나야.

그렇죠. 담마와 위나야가 여러분들을 열반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에 담마와 위나야가 의지처가 될 때까지는 어떻게 해야 된다고? 삼보를 의지처로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왜? 저번 시간에 다 설명했습니다. 그마만큼 그마만한 가치를 지닌 거기 때문에. 그래서 저번에 10가지 대한 얘기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붓다 담마 상가를 의지처로 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이거 다음에 이제 오계 팔계 하고 나서 나중에, 그 붓다눗사띠, 담마눗사띠, 상가눗사띠에 대한 걸 갖다가 간추려가지고 합니다. 그 붓다 담마 상가눗사띠에 대한 것은 우리 홈페이지 「글로 보는 법문」 입니까? 거기 옛날에 제가 올려놓은 게 있습니다. 그걸 우선 참고를 하도록 그렇게 하고.

 

부처님한테 삼배를 드릴 때 보통의 분들은 삼배를 드릴 때 그냥 삼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근데 대부분의 테라와다 스님들 특히 10년 이상 된 스님들은 삼배를 드릴 때 머리를 땅에 이렇게 붙이고 나서 잠깐이라도 마음에서 자신의 잘잘못에 대해서 참회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이 몸을 일으킵니다.

왜 그렇게 할까? 그리고 또 일반적으로 스님들 간에 서로 만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참회 먼저 합니다. 스님 앞에 내놓고 스님한테 인사하면서 "아짜리예 빠마데나 드와랏따예나 까땅 삽방 아빠라당 까마타메 반떼" 이런 식으로 빨리어 게송을 독송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절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참회의 게송을 합니다.

 

왜 그렇게 하게 될까? 그걸 했을 때의 효과들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을 할 때 존경의 마음만 내고 절을 하게 됩니다.

존경의 마음과 더불어 참회의 마음을 갖다가 낼 것 같으면 더 상승 작용을 가지게 됩니다.

존경의 마음은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나의 겸손으로 인해서 일으키는 것들입니다. 근데 참회의 마음은 그거 하고는 정반대되는 겁니다. 나도 언제든지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잘못을 저질렀다 저지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다는 거라. 그러니까 내가 참 못난 놈이다 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되는 거라. 그러면서 똑같이 저 사람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거라.

 

내가 조금 잘못했을 거 같으면 남이 뭐라 할 것 같으면 난 싫어합니다. 저 상대방도 조금 조그마한 잘못으로 인해서 누가 뭐라 할 거 같으면 싫어하게끔 돼 있다는 거라. 그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나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상대방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것들에 대해서 용서해주는 마음들을 가져야 된다는 거라.

그게 들지 않을 것 같으면 남에 대해서 만날 비판적이 됩니다.

그리고 남에 대해서 인정을 안 할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법을 잘 설하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무리 뭘 잘한다고 하더라도 인정을 안 할려고 한다는 거라.

 

참회의 기본은 내가 이러한 잘못들은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다 하고 굳게 마음을 먹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거라.

그래서 절을 할 때 대부분의 법랍이 된 스님들은 절을 하면서 잠깐이라도 그 참회의 마음을 냅니다. 그래서 자신의 겸손과 남을 용서하려는 마음들을 동시에 일으키게 되는 거라. 대부분의 큰스님들이 보면 한국 불교에 대해서 물어 보면, “아, 예 훌륭합니다. 근데 나는 그 부분에 잘 모릅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근데 어줍잖은 사람들이 보면 “한국 불교 틀렸다. 부처님의 수행법이 아니다. 테라와다가 최고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 차이가 뭐냐면 이 절 하나에도 용서할려는 마음들이 있지 않을 경우에, 그리고 겸손해질려고 하는 마음들이 없을 경우에는 그렇게 돼버린다는 거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그겁니다.

어떻게 하면 서로 조화롭게 행복하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그게 출가와 재가의 관계든 아니면 가족의 관계든 사회의 관계든. 그래서 예경에는 이 2가지 부분을 갖다 항상 빼버리면 안 됩니다. 겸손해지는 것, 그리고 용서하는 마음들 이 2가지를 항상 같이 하도록 해야 됩니다.

 

「참회의 게송」을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릴게요.

나중에 또 시험 나올지도 모릅니다. 잘 적어놓으십시오.

어리석게 몸과 말과 마음으로 범해버린 잘못이 나에게 있습니다.

스스로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러한 잘못을 마음 깊이 참회합니다.

그 잘못을 내가 받아들여서 참회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는 이러한 잘못을 범하지 않겠습니다. 굳게 결심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또한 다른 사람이 범한 잘못도 마음으로 받아들여 용서합니다.

똑같이 그 사람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용서한다는 거라.

그래서 이후로는 작은 잘못도 범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행하겠습니다.

이게 일반적인 참회 서원의 게송입니다.

 

근데 수행하는 사람은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조금 더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뭐냐면 내가 힘써 해야 할 일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순간순간 변화해 가는 이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 진정한 행복을 얻는 일입니다. 그 일이 지금 내가 해야 될 일인데 엉뚱한 거 내가 지금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해탈에 이를 때까지 바르게 노력할 것을 서원합니다. 하고 이 참회 게송 문장을 마칩니다.

앞에 부분만 해도 되고 뒤에 부분까지 같이 해도 관계가 없습니다. 근데 어쨌든 예경을 하면서 이 2가지는 항상 마음에 담고 예경을 하시기 바랍니다. 알겠죠?

 

참회 서원의 게송

어리석게 몸과 말과 마음으로 범해버린 잘못이 나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을 마음 깊이 참회합니다.

다시는 이러한 잘못을 범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범한 잘못도 마음으로 받아들여 용서합니다.

이후로는 작은 잘못도 범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행하겠습니다.

내가 힘써 해야 할 일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순간순간 변화해 가는 이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 진정한 행복을 얻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해탈에 이를 때까지 바르게 노력할 것을 서원합니다.

 

자! 그다음에 인제 시험 문제 되겠습니다.

이제는 빨리어 독송하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죠? 그래도 처음보다는 조금 많이 나은 것 같아요. 독송하는 것도 좀 잘 할 수 있도록 하고, 여기서 그 시험 문제 중에서 설명을 안 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얘기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근데 아마 그걸 구분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걸 해야 되고 어떤 걸 하지 말아야 되는 걸 갖다가 잘 모를 경우가 있습니다. 근데 그걸 떠나버려 보면 압니다. 그것을 버려버리고 나면 ‘아 저게 내가 해야 될 일이었나’ 그전에는 그걸 모르고 그냥 그 속에서 막 지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쓸데없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해야 될 일이 아니었는데 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걸 탁 떠나버려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봐야만이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아니다. 하는 거를 분명하게 압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다시는 그거 그런 상태로 안 돌아가집니다. 다시는 똑같은 일들을 갖다가 하질 않게끔 되는 거라.

그게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걸 갖다가 이해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 돼 봤어요? (수행자 : 근데 그 반대의 경우에는 또 어떻게 되는 건지요?) 어떤 걸?

(수행자 : 막상 딱 떨어져 봤는데 ‘아 했어야 좋을 건데’ 이렇게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럼 그거는 자유로워지지 못한 거고, 그거는 그 일을 해야 되는 건데 안 한 것들에 대한 후회인 거고, 후회는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그런 거고, 벗어나 버려 봤을 때 오는 즐거움들이 훨씬 큽니다.

그래서 가끔씩 여러분들이 해탈하기 위한 것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또는 부처님 말씀을 따라서 조금 더 향상된 마음들을 가질려고 할 거 같으면, 다 중요한 부분이지만은 어떤 것 하나라도 한번 탁 놓아 봐봐요.

그러면은 그 부분은 누군가 또 하게끔 되고 메꾸게끔 돼 있는데, 그걸 내가 안 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번뇌·망상이 처음엔 있겠지만, 그걸 완전히 떠나고 나서 그 자유로워지고 나서 그것을 바라보게 됐을 때 일어나는 마음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큽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됐을 때 그 자유로움은 거기서 하면서 일어나는 행복보다 훨씬 큽니다. 그래서 버려버린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행복은 내가 집착하고 많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크다고 얘기를 하는 것들입니다.

하물며 그러는데 일상생활에 대한 것도 그렇게 버려버림으로써 일어나는 행복이 훨씬 큰데, 그보다도 더 삼매를 경험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일어나는 행복은 그보다도 훨씬 더 크겠죠.

그것보다도 아 내가 열반을 한순간이라도 탁 체험하고 이젠 다시는 이 길로부터 흔들림이 없게 됐을 때 일어나는 행복 자유로움 그건 더 큰 거고, 그래서 점점 나아가서 아라한이 되었을 때는 더 큰 거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자! 그러면은 여러분들이 그런 자유로움을 1단계 1단계라도 나아가기 위해서 해야 되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그 순서가 있습니다. 무조건 탁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첫번째, 어떤 일을 하든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라. 말을 할 때든 행할 때든 뭘 할 때든 마음이 맑고 깨끗하고 가볍고 고요해지지 않으면 일단 중지해 버려야 됩니다. 그걸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행하는 것들은 대부분 번뇌에 오염돼 있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견해를 그렇게 해서 견해를 가지더라도 그거는 바르게 가지지 못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어떤 것들을 하든지 먼저 내가 지금 ‘이 마음이 얼마만큼 고요하고 얼마만큼 가벼운가.’

가볍다고 하는 것은 즉시즉시 대상들이 나타난다는 얘기입니다. 대상이 일어나면 그냥 그대로 알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걸 가볍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이 고요하다고 하는 것은 외부적인 대상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라. 어떤 대상이 됐든지 어떤 조건이 됐든 간에 마음은 흔들림 없이 그냥 그대로 그냥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은 먼저 어떤 것이든지 간에 마음을 맑고 고요하고 가볍게 만들어라. 그것이 인제 첫 번째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이 3단계로 이렇게 자유로워지기 위한 순서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갖추어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가장 위험한 것들, 가장 위험한 것들을 먼저 자르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어떤 자극을 받으면 화가 금방 확 잘 일어난다, 그럼 자기한테 가장 위험한 것은 성냄입니다.

뭘 이렇게 보면 뭐 그리고 만날 정신은 쇼핑하는데 이런 데 막 뺏겨져 있다, 그러면 탐욕이 자기가 먼저 커트해야 되는 잘라야 되는 분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날 해나가는데 활기차질 않고 그냥 이거해도 그만 저거해도 그만,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들을 잘라야 되는 것들이라. 가장 급한 것이 뭔가 하는 걸 자기가 먼저 파악을 해야 됩니다. 근데 이걸 다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안 돼. 하나씩 짜르려고 해야 돼. 가장 급한 것!

 

스님도 태국 가서 그런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태국에 딱 갔는데 마음에 안들어요. 수행을 해도 한국 스님들보다도 더 훨씬 못합니다. 뭐 그냥 대충 하는 것 같고, 조금 앉아있다가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일어나고 막 이럽니다. 성질이 확 올라오는 거라. 내가 처음에는 한국 스님 복장으로 갔으니까 내가 한국 스님의 본때를 한번 보여주겠다 해가지고 한 번 앉으면 보통 한 너댓 시간씩 앉아있다가 일어나고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와” 잘한다고 그러는데, 실제로는 보면 나는 성질을 부리면서 거기에 앉아있는 거라. 성질을 부리면서.

남들은 “와” 잘한다고 그러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한다고 그러는데, 큰스님이 딱 그러는 거라. “화부터 먼저 다스리라!” 정신이 번쩍 드는 거라.

 

지는 수행을 안 하고 있으면서 수행을 하는 것처럼 보여주고 있는 거라. 자기는 화가 나있으면서도 남 조그마한 거 못 참고 뭐 화난 것에 대해서 그것에 대해서 관여하고 뭘 하고 있는 거라. 근데 큰스님의 그 말을 딱 듣고 나서 정신이 번쩍 들음과 동시에 딱 맹세를 했어요.

“이후부터는 절대 화를 일으키지 않겠다.” 그것부터 먼저 끊을려고 한 거라.

그것만 있겠어? 가면 뭐 오만 거 맛있는 것들 있지, 보이는 건 새로운 거지, 그러니까 처음에는 가면 돈 좀 있겠다, 막 사려고 그러지 안 할라고 하겠어? 다 그런 것도 있어 있는데, 그건 우선 두 번째인 거라.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게 성냄 먼저 다스리는 거라.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큰 걸 먼저 탁 짜르지 않고는 두리뭉실하게 다 넘어가 버립니다. 근데 큰 걸 자르면 다른 것들도 연속해서 자르기가 쉬워집니다. 가장 큰 거 먼저 자를려고 해 보십시오. 그것들을 자르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근데 그걸 자르지 못하면 마음을 어떤 때라도 먼저 맑고 고요하고 깨끗하고 가볍게 만드는 거는 불가능해진다는 거라.

자기의 특성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걸 먼저 하라.

 

그다음에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데 두 번째 해야 될 것이, 참 여러분들이 하기 힘든 것든 것들인데 생각하는 것. 아마 생각들은 많이 할 거라. 생각하는 거. 근데 한번 생각 없이 한번 해봐요. 예를 들어봅시다. 가끔씩 스님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가, 아니면 대상을 만났을 때 사유하는 생각하는 것들이 일어나는가 하는 걸 갖다가 판단할 때가 있어요.

걸어가다가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경행을 할 때 요리요리 가잖아. 그러면은 걸어가는 동작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을 것 같으면 벽이 있을 거 같으면 벽에 가서 그냥 탁 부딪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경행을 하면서 벽이 있을 것 같으면 벽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멈추게 됩니다. 이미 사유의 작용이 들어가 버립니다.

 

또 두 갈래 길이 이렇게 가다가 이렇게 있으면 그러면 보인다고 알아차리고 나서 어느 한 길로 그냥 갑니다. 보인다 하고 알아차리고 왼발 오른발 하면서 그냥 가버립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도 모릅니다. 그게 2갈래 길 중에 내가 바르게 선택한 길일 수도 있고 잘못 선택한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바르게 선택했든 그리고 잘못 선택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상태에서 생각이 일어나는가 아닌가 판단을, 가끔씩 그렇게 해봐요. 과연 가능할까? 여러분들, 2갈래 길에서 '어, 어느 길로 가야 될까' 생각 안 하고 갈 수 있을까? 두 갈래 길이 보인 것에 대해서? 또는 뭔가 대상을 만났을 때 그 대상을 만나고 나서 '아, 대상이 있구나' 하고 알게 될까?

 

망상하는 것들이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걸 갖다가 일상생활에서 자꾸 알아야 됩니다. 거의 대부분은 생각하고 망상하는 것들입니다. 그거 수행에서 전혀 필요 없습니다. 완전히 싹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생각하고 망상하는 걸 끊는 연습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실제로 그 생각하고 망상하는 것들만 없을 거 같으면 수행 반은 무르익어 갑니다. 중요한 부분이 뭔가 하는 걸 자꾸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내가 바르게 선택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가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가다가 죽든 뭘 하든 간에, 그게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것에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내가 조금 더 빨리 도착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두 번째 해야 되는 것이 생각하고 망상하는 것을 멈춰라. 그것도 그냥 일반적인 생각이나 망상이면 좋은데 대부분의 생각이나 망상은 어떻게 돼요? 새끼를 자꾸 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자꾸 더 만들어낸다는 거라. 한번 일으킨 생각도 그마만큼 해로운데 그거 새끼쳐가지고 자꾸 더 만들어내면 그게 얼마나 위험하겠어? 그래서 그 부분을 갖다가 먼저 하라는 거라.

 

시간이 너무 됐습니다. 이건 다음 시간에 요거는 제가 정리해가지고 「글로 보는 법문」에다가 올려놓든지 아니면 또 시간 나면 한번씩 해주든지 그렇게 할게요

https://blog.naver.com/keh6843/222324840868

 

테라와다 이야기. 1~5 복습 및 문제

※ 1~5 복습 및 시험문제 (1) Vandanā(귀경게)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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