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ANz_fMisob0?si=3PydvslwYJdrXMId
* 「계를 청하는 방법」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419-1
오계는 조금 전에 스님한테 받았죠. 오계가 뭔지는 이해를 하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계를 지키는 게 쉬울까? 어려울까? (수행자: 쉽지 않습니다.) 어려워요? 그럼 우짜노?
어려우면 그러면 5계 중에 딱 매일 하나씩만 지킬까? 오늘은 거짓말 안 하는 거 지키고, 내일은 도둑질하지 않는 거 지키고, 이런 식으로 계율을 하루에 1가지씩만 하면 지킬 수 있겠어요? 조금 수월하겠어요? 아니면 이번 1달간은 거짓말하지 않는 거 그거 하나만 딱 지키고, 다음 달에는 도둑질하지 않는 거 하나만 지키고, 그리하면 좀 수월하겠어요?
(수행자: 5계가 다 이렇게 관련이 다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부분적으로 하나씩 따로 한다면, 저는 효과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거짓말 안 하는 것 하나만은 1달간 지킨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거짓말 안 하면 지키는 거 아니라. 관련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관련 있는 부분은 아니니까. 그리 해도 좋을 것 같은데 그지?
그런데 왜 다섯 가지를 다 지키라고 했을까?
그래서 그거는 기본적인 계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불자, 재가불자가 되면 이 5가지는 지켜라 하고, 그렇다고 안 지킨다 해가지고 뭐 부처님이 내려와 갖고 꿀밤 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죠? 누가 제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뭐 거짓말을 했다 할 거 같으면 “에잇, 저놈 거짓말쟁이” 하고 손가락질을 할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해도 감방에 가진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스님들은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냥 넘어가지질 않습니다. 반드시 거기에 합당한 참회를 해야만이 죄가 없어져 버립니다.
우스운 얘기로 태종사에 있을 때 태국 스님들이 한국에 왔는데, 내가 인제 태국에 있다 오니까 그래가지고 이제 왔어. 근데 한국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계를 범하는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에서는 보통 절에서 농사 채소 같은 거 키워서 먹습니다. 근데 채소를 키울라고 할 것 같으면 풀도 뽑아야 되는 거고, 그리고 땅도 이렇게 파야 되는 거고 그렇습니다. 그 다른 스님들이 다 하니깐, 할라니까 이거 좀 무쓱무쓱 하거든.
왜 그러냐면 출가한 스님들은 땅을 못 파게 돼 있습니다. 땅 하나도 이렇게 삽으로 파지 못하게 돼 있고, 더더구나 풀을 뽑는 거는 더더구나 할 수가 없는 거거든. 근데 그걸 하라니깐 어쩔 수 없이 큰 스님이 시키니까 하기는 했는데 ‘내가 죄를 범했다’ 하는 그런 생각이 딱 드니까 못 견디겠는 거야. 그래가지고 어느 날 간다꼬 가버렸어. 태국 가버렸어. 태국 가가지고 맨 먼저 한 게 뭔지 알아요? 참회하는 의식에 참여하는 거.
내가 그렇게 죄를 범한 기간이 일주일간 걸렸다 할 것 같으면 일주일에 곱하기 2를 해가지고 2주일 간 참회를 하는 거라. 그 죄 하나 가지고. 우리가 봤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건데 그렇게 되는 거라. 반드시 스님들은 그렇게 그 부분에 대해서 참회를 하고 넘어가지 않을 것 같으면 죄 부분에 대해서는, 출가 생활을 쭉 해나가면 그것이 계속 남아버리게 됩니다.
여러분들한테는 그렇게 하지는 않죠? 여러분들은 쉽게 말하면 뭐 풀 하나 뽑았다 해갖고 생명을 죽인 것이라고는 얘기를 안 하죠? 그 왜 그럴까? 그러면 출가한 스님들에게도 생명을 죽이지 마라 하는 계가 있어 가지고 그걸 못하게 돼 있단 말이라. 여러분들도 생명을 죽이지 마라 하는 계는 똑같은 계인데 왜 이렇게 틀려요?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수행자: 풀 뽑는 걸로요?)
그렇지 풀 뽑는 건 생명을 죽이는 건데, 여러분들에게는 생명을 죽이지 마라 하는 부분에서는 풀 뽑는 것에 대해서는 그거는 죄라고 여기질 않는단 말이라.
스님들에게는 해당이 되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해당이 안 되는 이유가 뭘까?
계를 가지는 의미 자체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스님들에게는 생명을 죽이지 마라 하는 계라고 하더라도 율의 의미로서 얘기를 합니다. "모든 생명을 사랑하라" 사랑할 것 같으면 풀을 뽑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풀을 뽑는 건 죽였다는 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고 사랑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되는 거라. 그러니깐 당연히 사랑하지 않은 만큼 니가 사랑을 2배로 곱빼기로 더 해야 돼.
근데 여러분들은 금해지는 것들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면 되는 거라. "죽이지 마라" 할 것 같으면 사랑 안 해도 돼. 안 죽이기만 하면 돼. 그 대신에 죽였다고 하더라도 제재가 없어.
그 차이가 뭐냐면 여러분들은 계의 항목에 저촉을 받지만,
스님들은 계의 항목이 아니고 율의 항목에 저촉을 받는다는 거라.
율은 반드시 어겼으면 제재가 있는 것이고,
계는 어겨도 우짤끼라, 그냥 넘어갈 수밖에. 자율적인 것으로서 할 수밖엔 없다는 거라.
그러다 보니깐 재가자들은 계가 어떨 때는 다섯 계를 받기도 하고 어떨 때는 여덟 계를 받기도 하고, 8계 받는 나라에서 “난 뭐 8계 못 받겠다. 난 5계만 받을란다” 하고 5계 받는다 할 것 같으면 그거 제재할 방법이 없어. 그럼 5계만 그날은 그 사람은 지키겠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불재일에 팔계 할 것 같으면 오후불식을 해야 되는데 “나 죽어도 오후불식 못하겠다. 저녁 먹어야 되겠다.” 이럴 것 같으면 어떡해 해요? 5계 받는 거라. 이거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그런 데다가 나는 이것은 조금 더 다른 것들을 적용해서 이 5계에 나는 쪼끔 더 더하겠다 할 같으면 뭐 8계가 되기도 하고 9계가 되기도 하고 10계가 되기도 하고 이렇게 되는 거라. 계를 그렇게 받는 사람들이 있죠.
그게 가능한 거라. 항목으로 승인하는 거기 때문에.
그래서 계의 항목을 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변경이 가능하다! 변경이 가능한데,
변경할 수 없는 거는 율의 부분에서는 변경할 수가 없다! 그거는 이미 확고하게 만들어서 정립이 딱 돼버린 형태들이라.
자 그러면은 여러분들은 계를 지키는 게 좋을까? 율을 지키는 게 좋을까?
예? 뭐 지키는 게 좋아요? (수행자: 계요) 계? 쉬운 거 할라고? 율하면 참회도 해야 되고 제재가 있다고 하니까. 그래요 그러면 다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할 거라.
그러니깐 부처님 당시 때도 그랬다고 그래요. 5명의 신도가 모여가지고 각각의 항목에 대해서 나는 이걸 평생 지키겠다. 나는 또 이걸 평생 지키겠다 하고 이렇게 했대. 그렇게 했는데 가만히 지나고 보니까 내가 최고 지키기 어려운 거를 가지고 지키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거든. 그래가지고 인제 다툼이 벌어졌어.
만약에 생명을 죽이지마라는 계율이 가장 그래도 지키기 어려운 거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또 훔치지 않는 걸 갖다가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게 어렵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자기가 다 어렵다고 생각해서 결국은 부처님한테 갔어요.
“부처님 어떤 게 가장 지키기 어렵고 만약에 그것을 잘못했을 경우에는 어떤 것이 가장 무거운 죄가 되고 가벼운 죄가 됩니까? 하고 물어봤어.
자, 5가지 어떤 게 무거운 죄고 중죄고 어떤 게 경죄가 되겠어?
사회적으로 따지면 그 죄를 저지르면 감방에서 1달간 있어야 되는 게 있고, 그냥 감방에서 훈방 조치하고 풀려나는 게 있고 그런 게 있다, 그러면 어떤 게 그런 거야? 어떤 것이 중죄고 어떤 것이 경죄라?
(수행자: 사람의 생명을 해친다든지)
그게 중죄고? 그럼 경죄는 뭔데?
(수행자: 경죄는 뭐 살짝 다치게만 한다든지)
오계에서 말하는 거예요.
(수행자: 아, 오계에서요? 그것은 뭐 거짓말하는 이런 거는 경죄로, 그거는 교도소에도 안 가잖아요. 그러니까 교도소에 가는 것 중에요?)
아니 그 교도소를 비유는 얘기한 거고, 5가지 계 중에서 중한 죄가 있고 중하지 않는 죄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떤 것이 중한 것이고. 어떤 것이 중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거라.
(수행자: 사람을 해치는 게 제일 중한 생명을 해치는 게 제일 중죄고, 경죄는 뭐 거짓말이라든지 뭐 술을 먹는다든지 하는 거요)
지가 잘하는 거는 다 경죄에다 넣어놓고, 잘 안 하는 거는 이제 중죄에다 넣어놓고 이러죠?
(수행자: 사회적 제도상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이거 목이 탄다 진짜. 쎄가 빠지게 가르쳐줘도 이렇게 밖에 대답을 못 하니.
그 판단 기준을 분명하게 부처님이 두어놨을 거라. 그리고 계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지키기 어렵고 어떤 걸 지키기 쉽다는 것이 없습니다. 다 어렵습니다. 다 어렵습니다. 그걸 이제 분명하게 알아야 되고, 중죄 경죄에 대한 것들은 조금 있다가 어떤 경우에는 중죄가 되고 어떤 경우에는 경죄가 된다 하는 걸 갖다 얘기를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갑자기 한번 거짓말 탁 했다. 그러고 나서 ‘아이 내가 거짓말했는데’ 하고 마음을 이렇게 언짢은 마음으로 가지고 있다. 그럴 것 같으면 그거는 이제 중죄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근데 거짓말을 했는데 지가 거짓말했다는 사실을 속일려고 자꾸 한다. 그렇다면 그건 죄가 점점 더 불어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럴 경우에는 중죄가 될 가능성이 커지겠죠.
또 하나 예를 들어서 사람을 죽인 거하고 벌레를 죽인 거하고는 똑같은 경우에는 해당이 안 될 거다, 근데 생명은 다 동일하거든. 평등하기 때문에 죽이는 것은 똑같은데, 그런데 사회법에서는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는 10일간 살아야 되는데 벌레를 죽이면 훈방 조치한단 말이라. 불교에서도 꼭 마찬가지지 않을까?
쉽게 말해서 사람을 죽일 것 같으면 한번에 죽이는 것이 아니고 우발적이든 어쨌든 계획을 했던 그 차이도 있을 뿐 아니라, 의도를 강하게 내야 되는 것이고, 그 의도가 지속이 돼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죽임을 당한 당사자가 수행해서 깨달을 가능성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이고, 근데 벌레라고 하는 것은 한번 탁 의도 내버린다고. 의도가 일회성으로 끝나버린다고, 그리고 그 죽은 벌레한테는 미안하지만 깨달음 그 상태에서는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상태가 못 된단 말이라.
그럼 여러 가지를 비춰봤을 때 틀림없이 차이가 나게 돼있다는 거라. 중죄하고 경죄하고. 똑같은 생명은 평등하지만 어떤 것은 그래서 중죄가 되고 어떤 것은 경죄가 될 수 있다는 거라. 자 그러면 지금 대충 얘기했습니다.
중죄와 경죄의 판단 기준 뭐가 있을까?
(수행자: 의도가 강하느냐 약하느냐의 차이)
의도가 그것을 할 의도가 있었느냐? 죽일 의도 훔칠 의도 어떤어떤 의도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그 차이가 있겠죠. 또 뭐가 있을까?
(수행자: 이것을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계획하고 계속 생각하고 결국 행하는 거요)
지속성이 있는가, 없는가? 쉽게 말하면 의도가 그리고 그 행위가 한번으로 그친 것이냐 아니면 일정한 시간 동안 계속 지속을 한 것인가?
그럼 2가지가 나왔다. 2가지 더 있어 또 뭐가 있을까?
(수행자: 의도도 있고 강한 의도와 약한 의도 차이도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있는데, 예를 들어 봅시다. 실제 피해를 당한 사람이 그 피해를 당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 도둑질을 할 것 같으면 ‘아 내 도둑 맞았다’ 하는 마음이 계속적으로 일어난단 말이야. 근데 도둑을 맞았는데도 상대방이 내가 도둑맞은 줄조차도 몰라. 그럴 것 같으면 훔쳐간 것은 똑같은데, 이거는 뭔가 조금 경우가 틀려진다는 거라.
그러니까 상대방에서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가, 아닌가?의 차이가 또 있을 수가 있다는 거라. 요즘 돈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하죠. 실제 뭐 몰랐는지는 몰라도 “모른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실제는 그러진 않겠지만은.
(수행자: 피해를 당한 대상이 성인인지 아닌지 차이도 있나요?)
그거는 관계없습니다. 의식이 있는 존재일 것 같으면 그건 경우가 똑같습니다.
그다음에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는가 아닌가? 쉽게 말하면 미수에 그쳤는가?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 일어났는가? 도둑질을 할라고 했는데 쉽게 말하면 도둑질은 하지 못하고 내가 남을 상처 입히는 일만 했다 할 것 같으면, 도둑질은 미수에 그쳤기 때문에 미수에 그친 죄를 받아야 되는 것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혔으니까 그 상처 입힌 것은 실제 일어났으니까 그 상처 입힌 것에 대한 것은 또 따로 받아야 되는 것이고 그렇다는 거라. 그래서 미수냐 아니면 실제 일어났느냐에 따라서 차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이 4가지를 기준으로 했을 때 다 4가지가 다 해당이 된다 할 것 같으면 중죄가 돼 버리는 거고, 그렇지 않고 그 4가지가 점점 더 해당 사항이 없다 할 것 같으면 경죄에 해당이 돼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은 남을 죽이는 것이 중죄가 되고, 거짓말하는 것은 경죄가 된다고는 얘기를 할 수 없는 거겠죠? 어떤 항목이든 중죄가 될 수도 있고 경죄가 될 수도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모든 항목들은 다 그마만큼 중요하다는 거라.
자 그러면 두 번째 왜 하고 많은 계 중에서 이 5가지를 부처님은 기본적인 계라고 했을까?
다른 데는 다른 종교에서는 이렇게 5가지를 항목으로 안 잡아놓고, 다르게 뭐 십계라든지 아니면 다른 데 같으면 4계라 해가지고 4가지 계를 따로 다른 항목으로 잡아 놓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왜 이걸 다섯 계로 잡아놨을까? 왜 그랬을까? 다른 것과 불교의 차이점은 뭘까?
(수행자 : 신구의 삼업이잖아요. 말과 뜻과...) 뭔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해싸?
(수행자: 아 3가지 항목에..)
계는 어떠한 경우든지 신구의(身口意)가 아니고 신구(身口)입니다. 몸과 말로써 행하는 것이지, 마음(意)으로 행하는 것은 계의 항목에 들질 못합니다.
근데 아까 조금 전에 지적을 했는데 잘 지적을 잘하긴 했어요. 뚱딴지 같은 소리지만.
계를 정하는 데 가장 근본으로 삼은 것이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계가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쉽게 말하면 이 계를 지키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지? 아니면 이 계를 어기면 마음이 안 좋은 마음이 일어나고 불선한 업을 짓는 것들이 많아지는가? 그럼 부처님은 그걸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마음이 선한 마음이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악한 마음이 일어날 것인가?에 따라서 재정하고 안 하고의 차이가 난다는 거라. 그게 인제 첫 번째입니다. 다른 데서는 이것을 기준으로 하지를 않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 기준으로 다섯 계를 잡았을까?
뭐 십계 같은 경우에는 나 이외의 신을 믿지마라 이럽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통용이 안 되죠. 그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면. 그런데 불교는 불교의 오계는 불교를 믿고 있든 안 믿고 있든 다 통용되는 겁니다. 거짓말하면 나쁜 줄 알고 다 통용되는 것들이라. 사회법에서 인지하는 방향에서 그것이 정당한가 아니면 정당하지 못한가?를 판단 기준으로 합니다.
그래서 이 2가지, 이 2가지가 5계를 정하는 5가지 계율 항목을 이렇게 이렇게 잡은 근본적인 이유가 됩니다.
뭐라고? 가장 큰 것이?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다음에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부분.
자 하나 더 물어볼게요. 계가 없어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 항목이 없어도.
근데 왜 계를 이렇게 딱 정해 놓게 될까? 왜 그럴까?
계가 없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이 항목을 정해놨을까?
잘 살고는 있는데, 가끔 한번 탁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걸. 그런다고 해가지고 그 죄를 안 저질러져 버린 게 아닙니다. 저질러져 버리게 된다는 거라. 마음의 경향성이라 하는 것은 완전하게 방향이 잡혀가지고 그것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어져 버릴 거 같으면 문제가 없어지는데, 언제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언제든지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언제든지 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거라.
그래서 항목을 정해 놓은 겁니다. 낄레사(kilesa), 여러분들이 보통 번뇌라고 이렇게 얘기하죠. 번뇌가 일어날 근거를 만들어주지 않기 위한 것들이라는 거라.
그리고 선한 마음이 악한 마음을 대체해서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서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정착되도록 만들어주는 것!
그래야만이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수행을 해도 용이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고요하게 안정돼서 집중하는 힘이 생기면 지혜의 힘들도 일어나게끔 되고, 그래서 계정혜가 사이클을 이루게 되는 거라.
‘나는 오로지 수행만 하겠다. 계는 전혀 항목 안 받아도 된다.’ 되겠어요? 안된다는 거라.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끔 만들어주질 못하고, 그 선한 마음들이 안정되게끔 만들어 주질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계를 지키지 못하면 마음도 안정되지 못하고, 수행도 사실은 잘 못 하게 되는 거고, 부처님같이 모든 일들을 지혜롭게 판단해서 행하질 못하게 된다는 거라. 그리고 지혜로워지니까 더욱더 ‘아 내가 이 부분은 지켜야 되겠다’는 마음들이 일어나게끔 되는 거고. 이해하겠습니까? (예)
그래서 계라고 하는 것을 "브레이크와 같다"고 얘기합니다.
"선하지 않는 악한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딱 막아주는 그런 역할들을 한다. 그리고 마음이 반복해서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끔 해서 그것이 정착하는데 그 역할을 해준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자 그러면은 부처님이 재가자에게는 이렇게 5가지 계를 기본적인 계로써 얘기를 해 놨습니다. 그 목적이 뭘까? 출가자하고는 틀립니다.
출가자하고는 많이 좀 차이가 나는데, 계를 제정한 목적이 뭘까? 왜 재가자들은 반드시 이걸 지키라고 했을까?
근데 여러분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계의 시효는 얼마나 될까? 계를 지금 받았다. 스님이 조금 전에 빠나띠빠따 할 것 같으면 빠나띠빠따 하고 받았단 말이라. 그거는 시효가 얼마나 될까? (수행자: 깨뜨릴 때까지) 깨뜨릴 때까지? 또?
근데 여러분들은 빠나띠빠따 하고 받았는데 돌아서서 까먹어 버렸다, 그럼 시효가 10초밖에 안 돼. 10초일까?
하루 밤낮입니다. 하루 밤낮!
그러니까 동남아시아 신도들은 매번 스님 찾아가면 매번 행사 있으면 맨날 이거 받아. 그러니까 어떨 때는 한국 사람들이 이해가 안 돼. 그거 뭐하러 가서 저 골치 아픈 거 저거 귀찮게 또 받느냐? 조금 전에도 삼귀의하고 오계하고 하는 거, ‘그냥 적당하니 짧은 거 해버리고 적당하게 해버리자’ 그게 한국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탓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거 안 할려고 해. 그냥 빼먹고 넘어가버리는 거라.
근데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거라. 왜 하는 이유를 아는 거라. 이것이 마음을 성장을 시켜주고 이것이 선한 마음을 고정화시켜 주는 역할들을 하기 때문에!그걸 자꾸 내가 되돌리고 자꾸 기억해야 된다라는 사실로써 아는 거라.
그러니깐 예를 들어서 오전에 선원에 가서 오계를 받았다. 집에 가보니까 저녁에 무슨 행사에서 스님 초청을 해서 와서 법문한다. 그럼 또 오계 또 받아.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거라.
자, 그러면은 틀림없이 그런 목적이 있을 거라. 부처님이 제정한 목적이.
계를 잘 지키면 가장 잘하는 게 뭐가 있을까? 같은 끼리 모이게끔 됩니다. 쉽게 말하면 나쁜 마음 자꾸 가지는 사람은 요 무리에 잘 끼지 못해. 그 무리들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게 되고, 또 선한 마음들을 자꾸 일으키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끼리 또 이렇게 모여.
2가지 목적이 있죠. 악한 사람 가까이 하지 않는 목적, 선한 사람 내 주위로 자꾸 불러 모으는 목적, 목적일 뿐만 아니라 이익들입니다.
또 어떤 게 있을까? 계를 지키는 사람들 주위에 가면 대부분 보면 평화롭습니다. 크게 다툼들이 없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못할 경우는 반대적인 현상이 일어납니다.
화합할 수 있는 이익들이 있다는 거라. 다툼이 있어도 크게 문제들이 되지 않게끔 된다는 거라. 또 번뇌를 끊는 목적이 있다고 그럽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계를 지니면 마음의 성장을 돕는 것이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나는 것들을 막아준다는 거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번뇌만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에 일어날 번뇌도 막아줍니다.
다음 생에 대한 번뇌가 어떤 게 있겠어요? 좀 더 좋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거. 다음 생에 지금 죽고 나서의 다음 생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 강의를 듣고 나면 내가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불교 공부 잘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도 이것도 번뇌입니다.
쉽게 말하면 더 좋은 다음 결과를 바라는 것들이 다음 생에 대한 이익들을 바라는 마음들이라는 거라. 그런 마음조차도 없다는 거라. 생기고 안 생기고 하는 것은 내 지금 하는 것에 따라 달린 것이지. 내가 그걸 바란다고 해서 생겨지는 거고, 바란다고 해서 안 생겨지는 건가? 그게 아니라는 거라.
더 크게 볼 것 같으면 내가 계를 잘 지키고 선한 일을 많이 할 것 같으면 죽고 나서 다음 생에 인간이나 천상으로 태어나게 된다는 거라. 내가 바란다고 해서 거기에 태어나지는 게 아니고. 그래서 그런 번뇌들이 일어나질 않는다는 거라.
그리고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은 믿음들을 주게끔 됩니다. 참 믿을 만한 사람이다. 그리고 저 사람을 의지할 만한 사람이다 하는 그런 마음들을 갖다 가지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게 계를 제정한 목적이고 또 계를 지님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이익들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수행하는 것 못지않게 얻어지는 것들이 많죠? (예) 보충 관계에 있는 겁니다.
자, 그렇게 이제 얘기를 했으면 대충 이해가 됐을 거라고 봅니다.
(수행자 질문: 저, 천상에 태어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번뇌라고 하면 왜 그 보시의 공덕에서 그 보시의 공덕을 생각하면서 보시하라고 그럴 때나 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원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번뇌에 들어가는 거에요?)
그렇죠. 번뇌에 들어가긴 하는데,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은 좋은 일을 함으로 인해서 천상에 태어나는 그 낙을 얻을 것이다’ 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일으킴으로 해서 나는 선한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 효과를 위한 것이지, 쉽게 말하면 ‘내가 보시를 함으로 인해서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하고 그거 천상을 바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지, 여러분들이 뭐 보시했다 해가지고 다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내가 지금 보시를 함으로 인해서 보시한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들이 어떤 마음들을 일으킬 것인가?
선한 마음들을 일으킨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선한 공덕들을 받게끔 된다는 거라. 그리고 보시를 할 때 내가 이런 보시공덕으로 인해가지고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하는 믿음을 가지게 될 것 같으면 그 과보들은 다시 받게끔 된다는 거라. 그게 천상에 태어나는 과보든 아니면 다른 과보든 과보들을 받게끔 된다는 거라. 그런 이익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보시를 할 때 보시하는 대상, 그 대상으로 인해서 공덕이 요마만큼 커지는 경우도 있고, 그 대상으로 해서 공덕이 요마만큼밖에 안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보시할 때 어떻게 합니까? '상가 다나'를 합니다.
상가는 아무래도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고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도 무수하게 형성될 출가할 사람들까지 다 포함하는 거기 때문에 굉장히 큰 영역이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거기서 오는 공덕들은 더 커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만약에 내가 아는 스님이라 해서 저 스님에게 보시한다는 마음을 일으킬 것 같으면 이 스님이 가지고 있는 역할의 영역밖에는 내가 받지를 못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보시하는 자를 어떤 대상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그 받는 과보들도 틀려질 수밖에 없고, 또 두 번째가 보시하는 사람이 일으키는 마음, 조금 전에 얘기했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지금 보시할 때 선한 마음을 일으킬 것 같으면 선한 과보를 받게 되는데, 선한 과보를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선한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는 거라. 억지로 보시를 하게 될 때 아니면 보시했다는 생각조차도 일으키지 못하게 될 때, 이럴 것 같으면 그 결과들은 없다는 거라.
그러면 보시하는 사람은 마음을 어떻게 내야 되겠어요?
내가 이 좋은 결과가 있다는 마음을 일으키게끔 단어들을 설정을 하는 것이 좋다는 거라. 그래서 '이 보시하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천상에 태어나기를' 하는 선한 마음들을 갖다가 일으키라는 거라. 그러면 그 선한 마음에 선한 결과들이 있다는 거라.
그런 의미에서 '이 보시로 인해서 내가 천상에 태어나는 결과 있기를' 하고 발원하라는 것이지, 실제로 내가 이 보시하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천상에 태어난다고 확정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그렇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지. 그걸 보시하는 것으로 인해서 천상에 태어나는 마음을 전부 낄레사 부분으로써만 생각해 버릴 거 같으면은, 그러면 내가 발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무것도 없어져 버립니다. 천상에 태어나길 바란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낄레사 부분에 해당이 돼 버립니다.
내가 요마만큼의 결과밖에는 낼 상황이 안 되는데 그것밖에는 내가 짓지를 못했는데 그거보다 더 큰 결과를 낳기를 바란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낄레사(kilesa)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지은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것은 그마만한 상응하는 결과가 온다고 알 것 같으면 그거는 낄레사가 되지 않습니다. 그거는 선한 마음을 일으킨 결과일 뿐인 것이지. 그렇게 돼요.
그래서 모든 공덕들을 지을 때 항상 내가 이 공덕으로 인해서 천상에 태어나길 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면 그것을 이것에서도 일으키고 저것에서도 일으키고 이렇게 계속적으로 일으키면서 온단 말이라. 그렇다면 그게 굳건하게 돼서 진짜 천상에 태어나는 결과들이 있게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도 공덕을 지을 때마다 나무 밑에다가 물을 뿌리면서 내가 이렇게 지은 공덕들이 흔들림이 없게 되기를 하는 마음들을 계속 가졌다는 거라. 그래서 나중에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룰 때 마라(māra)가 와서 그렇게 유혹하고 흔들어도 땅을 이렇게 딛고 있었던 이유는 내가 지은 공덕들을 이 지신이 증명할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을 갖다가 그렇게 해왔다는 거라. 그것이 단단하게 굳어졌다는 거라.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된다는 거라. 됐습니까?
자 그래서 인제 오계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5계는 어떤 것이 중요하고 어떤 것이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리고 선택해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오계는 어떠한 경우든지 5가지를 다 지켜야 되는 것이고,그리고 그 항목 수를 갖다가 늘려갔으면 늘려갔지 잘못 그걸 갖다가 빼먹으려고 자꾸 하면 안 된다는 거라.
근데 그 항목을 늘려 가는 것도 부처님의 방법에서 항목을 늘려가야 되는 것이지, 자기 잣대로 항목을 늘려가면 안 됩니다. 세속적인 방법으로 그 항목을 늘려가서는 안 된다는 거라. 세속적으로 잡은 계의 항목이라고 하는 것은 편협되고 그것이 진리에 이르게 하지를 못합니다.
근데 부처님이 설정한 항목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항목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깨달음에 이르게끔 만들어준다는 거라. 그것이 또 사회의 관습하고 적절하게 맞아떨어지고. 그래서 그 항목들도 여러분들이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다는 거라. 그래서 계율의 항목들은 바꿀 수가 없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마만큼 부처님이 만들어놓은 것들을 지금의 실정에 맞게끔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없다는 거라.
왜 그런 얘기를 하느냐면 가끔씩 오계라고 하는 걸 갖다가 인터넷에 쳐보면 오계 항목이 다르게 설정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또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그 항목들을 설정해 놓은 경우들을 봅니다. 근데 그걸 보면서 참 위험한 발상이다 하는 그런 생각들 해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 몫도 아니고 그분들 몫도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그냥 여러분 테라와다 불교도들은 해야 될 것들은 그걸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대로 따라 하는 것밖에 없다는 거라. 따라해 보면 아 그게 맞다는 사실을 알게끔 된다는 거라.
자, 그러면은 계를 받을 때는 삼귀의 삼창도 어떻게 한다고 그랬어요?
자발적으로 한다고 그랬죠! 자발적으로 내가 마음이 우러나서 ‘아 내가 부처님한테 귀의합니다. 담마에 귀의합니다. 상가에 귀의합니다.’ 하는 마음들을 일으키게끔 되는 거라.
오계도 그럴까? 오계도 뭐 자발적으로 ‘나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마음이 일어나야 될까? 그렇습니다. 오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계도 어떤 경우든지 자발적입니다. 근데 사실은 자발적이질 않죠? 강제적으로, 보통 보면 스님이 오계를 줍니다.
계는 자발적으로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고, 받아지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받아지니도록 해주는 대상은 꼭 출가한 스님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해당이 될까?
누가 해당이 될까? 출가한 스님 아니면? (수행자: 재가불자) 재가불자? 그거는 출가하지 않으면 재가자겠지 당연히. 천신이 와서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닐 거고.
재가자 중에 어떤 재가자? '아이예'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말로 표현할 것 같으면 '청정자'가 됩니다. 그 버마나 태국 같은 데에서 '딸라신'이라고 있죠. '매치' 뭐 이런 부분을 청정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브라흐마짜리니'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청정자는 계를 줄 수가 있습니다. 그분에게 받아도 됩니다.
그래서 빨리어 용어에서 용어를 구분합니다. '반떼' 라고 쓸 경우에는 출가한 스님에게만 해당이 됩니다. 근데 그분들에게 받을 때는 반떼라고 안 하고 '아이예'라고 용어를 씁니다.
그러니까 "마양 반떼 띠사라네나 사하" 그거 인제 출가 스님한테 "마양 반떼" 하는 거고, 그러면 그 청정자한테 받을 경우엔 어떻게 해야 돼요? "마양 아이예"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구분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출가한 비구 비구니에게 받든지 아니면 출가와 다름없는 청정자에게 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고,
근데 그분들에게 “나 계 받을랍니다.” 하고 얘기를 하고 계를 받으면 됩니다. 그것도 어쨌든 내가 "내가 계를 받겠습니다." 하고 청하는 거기 때문에 자발적이 되는 형태입니다.
근데 만약에 그 자리에 그런 분들이 없을 경우는 어떻게 할까? 없을 경우는 어떨까? 여러분들이 만날 이런 사찰에 오고 이런 법회에 동참하는 것도 아니고, 보통 평상시는 집에 있습니다. 아까 계는 유효기간이 얼마라고 그랬어요? (수행자: 하루 밤낮) 음 그럼 오늘 끝나고 오늘 지나고 나면 이제 땡인데, 내일은 내가 또 받아야 되는데 만날 절에 갈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돼? 자기 스스로! 그래서 자기 스스로 이 계의 항목들을 떠올려서 이걸 지키겠다는 발로의 마음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계를 받는 것은 이렇게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인제 자꾸 발로 하는 것이 자꾸 발전되면 계를 자기 마음대로 받는 것으로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어느 날 되면 지금 머리 싹 깎고 나서 난 지금부터는 출가한 스님인데 이름을 누구라 한다 하고 지금 얘기를 한다는 거라. 누가 계를 주었어요? 그러면 부처님이 줬대. 부처님이 뚝딱! 이런 게 가능해져 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계라고 하는 것은 딱 정해져버립니다.
우빠삼빠다의 과정을 겪지 않은 경우에는 계로서 인정을 하질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출가의 조건을 갖추지 않을 경우에는 계로서는 인정하질 않습니다. 그게 인제 출가자들에게는 해당이 그렇게 되는 거라. 그래서 에히 빅쿠부터 해서 띠사라나 빅쿠로 해서 그다음에 우빠삼빠다 빅쿠로 이렇게 발전돼 나갑니다. 계를 주는 과정들이.
똑같이 출가하고자 하는 사람이 “나 출가하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는 것이지만은, 여러분들이 “나 교육받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청하는 거지만, 이미 출가자의 집단에서는 이것이 딱 정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10명 이상의 스님이 갖춰지지 않으면 안 되고, 3명의 10년 이상 된 스님이 갖춰지지 않으면 안 되고, 하는 여러 가지 규정들을 다 지켜가지고, 그 계단 시마홀이 있는 데서 계를 받아야만 인정됩니다. 하나라도 어긋나 버릴 것 같으면 계로써 인정 안 해줍니다.
한국에서 가끔씩 테라와다 계를 받았다 아니면 무슨 계를 받았다는 스님들이 있는데, 인정 못 받는 경우가 뭐냐 하면, 다 이렇게 갖춰지는데 10년 이상 된 스님이 3명 이상 존재해야 되는데 그게 안 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시마홀이 존재해가 있는데 시마홀도 없는 데서 그냥 막 아무 데서나 그냥 법당이면 다 되는 줄 알고, 뭐 이런 여러 가지 조건 때문에 “아, 저거는 인정 못한다” 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게 인제 출가자가 계를 받는 형식이라.
근데 재가자는 그럴 필요가 없는 거죠. 왜? 출가자는 계의 항목들은 어떤 경우든지 강제적이고 거기에 대한 제재가 있는데, 재가자는 그게 없습니다. 자율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계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5계 8계 10계 까지는 자기 스스로 내가 오늘은 십계를 지키겠다 할 것 같으면 오늘 10계를 갖다가 내가 마음속으로 하고 그날 하루 동안 십계 쭉 지키면 됩니다.
그다음 날 되면 효력이 다 돼버려. 그럼 그다음날 또 하면 됩니다.
그게 인제 오계나 재가팔계를 받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나라 별로 계를 청하는 방식이 각각 틀립니다.
그래서 가끔씩 사람들이 이걸 인제 헷갈려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버마 같은 경우에는 "오-까사 오-까사 오-까사" 3번 먼저 합니다. 그러고 나서 "마양 반떼 띠사라네나 사하" 하고 이렇게 쭉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오-까-사"는 "허가를 청합니다." 하는 겁니다. 내가 계를 받기를 요청합니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허가를 청하는 게 오까사(okāsa)라고 해가지고 한번 먼저 합니다.
그러고 나면 그다음에 다시 또 마양 반떼 띠사라네나 사하, 존경하는 스님 내가 계를 받기를 바라오니 계를 청합니다. 하고 또 1번 더 하는 거라. 이렇게 허가를 요청하는 것이 이중으로 하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래서 버마에서는 그렇게 하는데, 스리랑카의 하나의 종파 라만냐 니까야라고 해서 버마에서 넘어간 종파가 스리랑카에 있는데 거기서도 이 방식을 그래도 따릅니다.
그런데 나머지 나라에서는 이 방식을 안 따릅니다. 이건 낭비다라는 거라. 허가를 구하는 거 1번만 하면 되지 2번을 뭐하러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오까사라는 용어를 아예 안 해버립니다. 그냥 바로 "마양 반떼 띠사라네나 사하" 라고 이렇게 쭉 해버립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나라들은 허가를 1번 청하는 것으로써 규정이 돼 있습니다.
근데 이제 허가를 1번 청하는 데, 그 청하는 데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스님 내가 오계 받고자 하니 오계를 내려 주십시오.” 할 때가 있는 거고,
또 어떨 때는 “스님 오계를 차례대로 하나씩 하나씩 순서를 정해가지고 내려주십시오.” 하고 허가를 청할 때가 있는 거고, 청하는 방식이 조금씩 차이 나는 거라.
"마양 반떼 위숭위숭 락카낫타야 띠사라네나 사하" 이런 식으로 하는 거라.
"위숭위숭 락카낫타야"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차례대로" 그러니까 5계를 할 때 1번에 빠나띠빠따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아딘나 다나~ 이렇게 5계를 쭉 얘기하고 나서 따라 읽으라곤 얘기를 안 하죠. 대부분 어떻게 해요. 빠나띠빠따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하고 탁 하나 딱 끝내면 어떻게 해요? 여러분들이 그거 하나를 탁 받는 거라. 그러고 나면 그다음 항목으로. 이게 차례대로 순서에 맞게끔 그렇게 인제 해주라 하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고 그냥 가장 대중적인 것은 “스님 나 지금 오계 받고 싶으니깐 오계를 내려주십시오.” 하고 하는 것이 가장 대중적인 것입니다.
그 대신에 5계를 받고자 할 때가 있고 8계를 받고자 할 때가 있고 10계를 받고자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스님 내가 8계를 받고 싶습니다. 8계를 내려 주십시오.” 하게 되는 거고, 5계를 받고 싶으면 5계를 내려주십시오. 하게 되는 거고,
그 대신에 불재일 날은 불재일에서 1주일에 1번씩 절에 가서 계를 받아 지니고 보시도 하고 수행도 하고 하는 그런 날입니다. 그 불재일 날은 팔계를 받게끔 돼 있습니다.
왜 불재일 날은 팔계를 받게끔 만들어 왔을까?
그날 적어도 하루 동안은 하룻동안은 그래도 청정하게 하는 걸 갖다 익혀라는 거라. 그렇게 익혀도 나머지 6일은 안 익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런 청정한 마음이나 선한 마음을 익혀가지고 고정시켜가지고 그것이 계속되도록 하기에는 부족한데, 그래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그래야 되지 않느냐 해가지고,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여러분들이 반드시 8계를 지킵니다. 그럼 오늘 우뽀사타 날이니까, "나는 우뽀사타 8계를 지키겠다." 그것이 우선이 돼야 되는 거라.
그런데 우뽀사타 불재일 날은 계를 받기 전에 뭐부터 해요?
뭐부터 해야 돼요? (수행자: 참회부터) 그렇지 참회 먼저 해야 되는 거라.
"내가 입으로 말로 마음으로 지은 잘못된 행위들이 소소한 잘못들이 있으니까 나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참회 먼저 해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참회하고 나서 계를 받아야만이 그게 청정해진다는 거라.
스님들도 꼭 마찬가지 형식을 취합니다. 단지 그 참회하는 것은 게송 자체가 조금 틀립니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계를 받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이 참회하는 것들입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수행처에 가면 아침 저녁 예불을 안 합니다. 그냥 수행만 주로 합니다. 근데 어느 나라를 가든지 수행처에 가더라도 아침저녁 예불은 합니다. 간단하게 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조금 길게 하는 경우도 있고 합니다.
수행하는 수행자들도 아침저녁 예불을 한다는 거라. 왜 그럴까?
아침저녁 예불뿐 아니라 거기서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참회하는 거! 참회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참회하고 저녁에 참회하는 형식을 반드시 취하게끔 됩니다.
계를 받을 때 그래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이 참회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오늘 행사가 있어가지고 그 행사의 자리에 간다 할 것 같으면 테라와다 신자들은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뭐냐면 자기가 잘 아는 스님한테 가서 엎드려 가지고 절 3번하면서 참회게송 합니다. 오계는 전체 대중들 모아놔 놓고 큰 스님이 하는데 그거 하기 전에 그것부터 한다는 거라.
"마하테레 빠마데나 드와라따예나 까땅 삽방 아빠라당 카마타메 반떼"
이렇게 하면서 게송을 합니다. 그 스님에 따라서 큰스님이면 "큰스님" 부르면서 참회하고, 아니면 스승님이다 할 것 같으면 "아짜리예" 라고 하면서 "스승님" 하면서 하고, 아니면 내가 모르는 스님이다 할 것 같으면 "상가스님" 하고 뭐 "상케" 하면서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그 스님한테 가서 먼저 참회 먼저 하는 거라. 그게 일반적인 거라. 그러고 나서 계를 받는다는 거라.
참회를 먼저 하고, 계를 청하는 게송을 그 뒤에 하게끔 되는 거라.
그런데 매일 선원에 가는 사람일 것 같으면 사실은 따로 이 참회 게송을 하질 않습니다. 그건 왜 그럴까? 죄를 안 저질러서 그럴까? 아닙니다.
아까 얘기했죠. 아침저녁으로 예불한다고 그랬죠. 예불하고 나면 반드시 참회게송을 합니다. 부처님한테 삼보에 대한 예경해서 부처님에 대해서 예경을 한다. 예경하고 나면 어떻게 해요?엎드려가지고 "까예나 와짜야" 하면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한 잘못된 것을 부처님께 참회합니다. 하고 다시 일어나고 앉습니다. 어떠한 절을 하더라도 그 참회게송이 딱 들어가 있다는 거라.
아침 저녁 예불을 할 것 같으면 굳이 스님한테 가서 참회게송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예불을 할 때 이미 참회를 다 한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그 게송을 안 하는 것뿐이라.
근데 이걸 잘못 오해할 것 같으면 그냥 바로 계를 받을려고 그럽니다.
그것도 그냥 받을려고 하는 게, 스스로 계를 원한다고 계를 내려주십시오 하는 거 없이 바로 계를 받으려고 그럽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대부분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냥 가서 스님한테 빠나띠빠따 하면 빠나띠빠따하고 바로 받습니다. 그 방식이 물론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근데 계의 근본적인 의미하고는 틀린다는 거라.
스스로 청정해지고 나서 참회를 통해서, 그다음에 내가 청정해져서 아 이게 좋은 것을 알아서 내가 계를 받겠다는 마음이 일어났으면 "내가 계를 받겠습니다. 계를 내려주십시오." 하고 계를 청해야만이 스님들은 계를 내릴 수가 있는 거라.
여러분들이 법을 청하지 않으면 그 스님은 가서 법을 설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무한테나 가서 이 좋은 법 믿어보라고 이렇게 하지 않는다는 거라. 요즘 서울역에 있듯이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하고 이렇게 하지를 않는다는 거라. 왜 불교에서 그거 안 하겠어요? 할 줄 몰라서 안 하겠어요? 청하지 않으면 못하게끔 돼있다는 거라.
계도 마찬가지로 청하지 않으면 내려줄 수가 없는 거라. 알겠습니까? (예)
자, 계는 3가지 단계가 있다 하고 51페이지에 써놨습니다.
목표로 하는 것, 그다음에 두 번째는 맹세하는 것, 세 번째는 방법.
여러분들이 계를 지키는 '목표'가 뭡니까? 목적이 뭡니까? 뭐 하기 위해서 계를 지켜요?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거라.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청정하게 해서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계를 지키는 것들이라. 몸으로도 지켜야 되는 거고, 말로써도 지켜야 되는 거고, 그래서 마음이 그렇게 순화되고 만들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들이라. 그게 '목표'라는 거라.
그럼 그 목표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돼요? (수행자: 실천해야 됩니다.) 실천해야 되는 거라. 그 실천하는 것이 바로 두 번째, 아 두 번째가 아니고,
세 번째, 그 목표를 위해서 내가 살생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굳게 마음을 딱 가지게 되는 거라. 그걸 이제 '맹세'하는 것이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계를 받게끔 되는 거라.
그럼 살생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계를 받기는 받았는데 어떻게 해야 돼요? 살생할 일이 생기면 그걸 떠올려가지고 살생하지 않는 실제 행위들이 있어야 된다는 거라. 그걸 '방법'이라고 하는 거라.
계는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사는가 하는 방법들을 가르켜 주는 겁니다.
계는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할 것 같으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모습들이 어떨 것인가? 하는 걸 얘기해 줍니다. 그래서 그걸 뭐라고 그래요? '계향'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계의 향기가 난다는 거라. 계에는 향기가 난다는 거라.
꽃은 요즘 벚꽃 많이 피죠. 벚꽃은 꽃이 맺히면서부터 그 향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그래서 펴지면서 그 향기가 점점 더 밖으로 나오게끔 되는 거라. 독사는 새끼 때부터 독을 머금고 있습니다. 커가면 커갈수록 독이 더 강해집니다. 여러분들이 향기를 품을지 독을 품을지는, 계를 지킬지 계를 지키지 않을지의 차이입니다. 계를 지키는 마음들을 계속 가지고 그 방법대로 살아갔을 거 같으면 향기를 점점 품게 되는 거라. 그래서 계를 지키는 사람들은 온화해. 그 향기가 난다는 거라.
자 그것이 계의 3가지로 구분한 겁니다.
그리하더라도 엄격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어쨌든 수시로 내가 아 내가 살생하지 않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내가 실천해야 되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렇게 함으로인 해서 내가 밖으로 좋은 모습들로써 그리고 안정된 마음들을 지니게끔 되는 거고, 이거는 분리하지 않아도 한 덩어리가 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가끔 사람들은 이 오계를 ‘요 근래에 만든 것이다’ 하고 이제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부처님 때 부처님이 있을 때부터 이 오계는 확립되게끔 됩니다. 그래서 경전 곳곳에 이런 항목들이 나타납니다. 출가자들은 출가 인원이 점점 더 불어나면서 위나야(vinaya)가 우선이 되게 됩니다. 율(律)이. 그래서 율이 자꾸 추가가 됩니다.
쉽게 말하면 뭐 "탁발할 때 쌀을 받지마라" 하고 계율을 정했단 말이라. 쌀은 생명체죠.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다시 싹터서 하나의 생명으로 자랄 권리가 있는데, 쌀을 받아 가서 쌀을 먹어버릴 것 같으면 뭐 생식으로 먹든 아니면 화식으로 먹든 그냥 먹어버릴 것 같으면 그걸 죽여버리는 경우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생 것으로 된 생쌀은 받지마라 라고 인제 계율을 정했단 말이라. 여러분 중에 전혀 관계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스님들은 점점 더 계율이 강화됩니다.
그러면서 딱 227계로써 저렇게 정립이 딱 돼버립니다.
그러면서 요 부분은 중요한 거니깐 중죄에 해당이 되고 요거는 경죄에 해당 되고, 이런 식으로 아예 구분을 딱 해버립니다. 아까 중죄하고 경죄 구분하는 법을 얘기를 했습니다. 그 방법으로 해서 이렇게 구분이 돼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출가자들은 그게 가능해져서 부처님 때부터 그 방법으로 인해서 계를 주게끔 되고 그 방법으로 출가하고 살아가게끔 되는데,
재가자들은 그 규제가 없거든. 전혀 그게 없는 거라. 근데 재가자도 뭔가 하나의 형태로서 조직할 필요성이 있다는 거라. 그래서 만들어진 게 뭐냐 하면 오계의 형식입니다.
그래서 오계를 받으면 재가불자로써 인정을 받게끔 되는 거라.
가끔씩 "나는 불자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때나 지금까지 형태들을 봐가지고 불자라고 할 것 같으면 삼귀의 오계를 한 사람을 불자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지, 내가 정기적으로 보시를 하는 사람을 불자라고 하진 않습니다. 내가 부처님 수행법에 따라서 수행하는 사람을 불자라고 얘기를 안 한다는 거라. 그거는 그 수행을 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그 보시하는 사람인 것이지, 불제자라고는 얘기를 안 한다는 거라.
「불제자」라고 명칭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삼귀의와 오계」를 하는 자! 그것으로 딱 정해져 버립니다. 여러분들은 그럼 불제자 맞습니까? (예)
요 왔을 때 하루는 불제자지. (수행자 : 집에서도 합니다.)
그래서 오계를 지키지 않는 자는 불제자가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해도 맞습니다.
그래서 그게 처음에는 5계의 항목이 지금 같은 순서로써 배열이 안 되고 바뀌지는 경우도 있고 합니다. 그래서 그게 경전에도 나타납니다. 근데 나중에 되면 될수록 이게 아예 딱 정해져 버립니다. 정해져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써 분명하게 정형화되게끔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미 부처님 살아계실 때 재가자는 이 방법으로서 재가자임을 증명하고 재가자로서 표방해오는 형식을 취했다는 거라.
근데 왜 여러분들 안 할라고 하느냐는 거라. 시간만 있으면 요거 빼먹고 그냥 바로 할라고 하느냐는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예를 들어 봅시다. 보시한 공덕이 크겠어요, 계를 지킨 공덕이 크겠어요?
(수행자: 계를 지킨 공덕) 당연히 계에 대해서 얘기하니까 계를 지킨 공덕들이 크겠지.
진짜입니다. 계를 지키는 공덕이 훨씬 큽니다. 공덕의 값어치는 똑같다고 할지 몰라도, 그 값어치로 인해서 일어나는 부수적인 효과는 보시한 것과 계를 지키는 것은 차이가 납니다.
보시한 것은 그 결과를 받으면 끝입니다. 그 이상 늘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근데 계를 지키는 것은 그 결과는 결과대로 나타나지만은,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청정하게 되기 때문에 수행도 더 잘되는 거고, 그리고 닙바나를 이룰 수 있는 조건들이 되는 거고, 그래서 그렇게 봤을 경우는 계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보시한 공덕보다도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라는 거라. 수행하는 것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수행하는 공덕 그리고 계를 지키는 공덕 어떤 것이 더 클 것 같아요?
계를 지키는 공덕이 훨씬 큽니다. 근데 이걸 자꾸 잊어버리고 계는 그냥 놔둬 버리고 수행하려고 하고, 그냥 ‘나는 내 의무, 보시한다’ 이것만 할려고 하는 거라. 절대 그건 잘못된 방법들이라는 거라. 계를 먼저 지키고, 그래서 계를 지키고 나야만이 보시를 하더라도 올바른 보시가 되고, 수행을 하더라도 올바른 수행이 되고, 지혜롭게 살아갈려고 하더라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된다 하는 얘기를 하는 거라. 5가지 지킬 수 있겠죠? (예)
오늘부터는 거짓말해서도 안 되고, 또 특히 남자들 술 먹어서도 안 됩니다. 취하지 않게끔 먹으면 되겠지, 절대 안됩니다. 술 자체가 안되는 겁니다. 근데 이걸 잘못 오해해가지고 취하지 않게끔 먹으면 괜찮다, 또는 거짓말을 하더라도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선의로 하는 거짓말은 괜찮다, 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거짓말은 괜찮다, 또는 조그마한 생명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저 생명이 일으키는 병균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막아내기 때문에 그거 죽이는 것도 괜찮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럴까요? (수행자: 아니오) 절대 여러분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계의 항목들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조금 더 공부를 할 필요성이 있는 겁니다.
자, 「계를 청하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계의 항목」에 대한 얘기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질문하십시오.
[질의응답]
Q. 수행자 질문: 계를 받으면 하루 낮밤동안에 받을 수 있는데, 24시간이잖아요. 하루, 그날 하루가 끝날 때까지...
A. 스님 답변: 오늘 받았으면 내일 동트기 전까지 시간을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시와 비시의 개념이거든요.
불교에서 시(時)의 개념은 비시(非時) 비(非) 바른 시간이 아닌 거는 어떤 때를 얘기하느냐면, 오후부터 그러니까 '정오부터 그다음날 새벽까지, 손을 이렇게 폈을 때 손금이 보이는 시간까지, 이 손가락 사이로 햇살이 들어와가지고 이 손금이 보이는 시간 요때까지를 적절치 않은 시간'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이 '손금이 보이는 시간부터 해가지고 정오까지는 적절한 시간'이라.
쉽게 말하면 '낮과 밤'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개념을 얘기합니다. 그러니깐 오늘 받았다. 그럼 만약에 오후에 받았다. 그럴 거 같으면 언제까지가 되겠어요? 내일 새벽시간까지 되는 거고, 오늘 오전에 받았다 하더라도 내일 새벽 시간까지 되는 거고, 그걸 '낮과 밤'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됐습니까? (예)
Q. 수행자 질문 : 생명체의 범위가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예를 들면 미생물 같은 경우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같은 경우는 어떻게 봐야 되는지?
A. 스님 답변: 여기서 생명체라고 하는 거는 출가자와 재가자는 틀립니다. 죽이지 마라는 것도 일반 재가자에게 죽이지 마라 하는 거하고 출가자에게 죽이지 마라 하는 개념은 틀립니다.
출가자는 모든 생명체, 의식이 있든 없든! 그런데 재가자는 의식이 있는 생명체! 쉽게 말하면 지가 자의로 인해서 다닐 수 있고 뭘 할 수 있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동물이 거의 해당이 되겠죠. 일부 식물에 해당이 되긴 하는데 거의 대부분 식물은 여기에 해당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계를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절에 풀 뽑을 일이 있으면 스님들이 “어, 저 많이 더럽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지는 못 뽑으니까. 그럼 재가자가 가서 뽑는 거라. 그렇게 돼요. 재가자는 그게 죄가 안되고 출가자는 죄가 되니까. 됐습니까?
Q. 수행자 질문: 거짓말은 그러면 선의의 거짓말 같은 거는 아니면은
A. 스님 답변: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Q. 누가 이제 암에 걸렸는데 암에 걸렸다는 소리를 하면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A. 그래도 거짓말은 거짓말입니다.
Q. 그걸 하지 않는 게 좋다는 얘기입니까?
A. 그렇죠.
Q. 말하지 않고 있으면 거짓말은 아니니까...
A.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건 괜찮은데, 암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면 이미 그거는 거짓말을 범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그거는 항목별로 하면서 그 부분은 좀 자세하게 4가지로 구분해 가지고 하거든요. 그거는 얘기를 해 드릴게요.
Q. 수행자 질문: 스님 혼자서 계를 받으려고 하면은요, 매일 시간을 정해서 꼭 소리를 내서 해야지만 되나요?
A. 스님 답변: 아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Q. 수행자 질문: 그러면 마음속으로 생계에서부터, 이 실라 계는 상상을 하지는 않지만 항상 계를 지키려는 마음으로 살고, 수행을 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계를 받는다 안 받는다. 라고 생각을 안 하고 있었고, 어겼을 때만 새로 이렇게 청해서 받고 그런 생활을 했었는데,
이제는 꼭 계를 시간을 정해서 받는 게 중요한가요?
A. 스님 답변: 그렇죠. 마음속으로 하더라도 계의 항목은 받아지녀야 되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이걸 ‘안 하면 되지’라고 생각해버리면 안 됩니다.
아까 얘기했지만, ‘안 하면 되지’ 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견고해지지 못했고 청정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라는 거라. 그래서 이걸 자꾸 두고두고 자꾸 되새기면서 그걸 지키려고 노력을 할 것 같으면 더 빨리 견고해질 수 있다는 거라.
왜 더 빠른 길을 놔두고 왜 느리게 가는 길을 택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되도록이면은 받아 지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Q. 수행자 질문: 두 번째로는 혼자 이렇게 받는 것에 있어서 특별하게 이렇게 정화하고 씻고 뭐하고 이렇게 앉아서 하고...
A. 스님 답변: 그건 필요 없습니다.
Q. 누워서 그냥 해도..
A. 예. 눈꼽재기 안 떼도 되고 누워서 해도 되고 전혀 관계없습니다. 계를 받는 이유가 뭐라고 그랬어요? 마음을 선심쪽으로 기울게 하기 위해서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서 청정한 마음을 지니기 위한 겁니다. 근데 위의가 뭐가 중요하다고 그래싸? 그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라.
Q. 수행자 질문: 요새는 다른 곳으로 수행 갔다가 오시는 분들이 많아서 단기출가를 하고서 이곳에서 그거를 계속하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많다 보니까,
그러한 청정한 생활을 단기출가 상태를 유지를 할려고 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다 보니까, 저희가 그분들을 어떻게 대해야 될지를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되거든요.
A. 스님 답변: 단기출가자도 출가를 해있는데 비구계를 받았다, 아니면 사미계를 받았다든지 그러면 출가자는 출가자입니다. 그럼 출가자로서 대하면 됩니다.
Q. 수행자 질문: 그런데 그 이 테라와다 불교에서의 어떤 그런 분들을 뵙게 되면은 어떤 계율에 대해서 굉장히 엄하셔가지고요, 그쪽 나라들 쪽에서는 뭐 조금만 이렇게 해도 “스님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표현을 하는 거를 제가 가끔 경험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돈이라든지 아주 굉장히 많아서, 그래서 저희나라 상식으로는 저희 현재 이 조계종 스님들을 대했을 때 와 여기 이 테라와다 스님들을 대했을 때가 굉장히 다른 부분이 있거든요.
A. 스님 답변: 어떠한 경우든 그 계율을 어겼든 안 어겼든 간에 출가자들은 남을 비방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비방했다 할 것 같으면 자기가 아무리 청정하게 계를 지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출가자로서 지녀야 될 덕목이 못 됩니다.
설혹 대승불교 한국에 있는 스님들이 계를 지키지 않는다 해서 “출가자가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하고 비방을 할 것 같으면 그건 테라와다 스님이 지녀야 될 덕목이 못 됩니다. 예 그건 분명한 것이고.
단지 출가자는 출가자의 위의에 맞게끔 살아야 되는데 그걸 못한다고 해가지고 그걸 비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리고 테라와다 스님들이 한국에 와서 수행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그 청정한 계율을 지켜 나가고 하는 건 참 좋습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면 그렇게 자기가 하면 되는 것이지 남에 대해서 왜 비교를 하고 남을 왜 비방을 하느냐는 거라. 그럴 필요성은 없다는 거라.
Q. 수행자: 그 분을 바라보는 다른 분들께서 이제 그분이 안 계실 때 이렇게 나오는 말씀들이..
A.스님: 단지 그런 건 있어요. 계를 위반했다 해가지고 출가자의 계를 위반하기는 했지만, 그 출가자의 계가 그 위반한 계가 참회로서 되는 계인가, 아니면 옷을 벗어야 되는 계인가, 아니면 20인이 스님 밑에서 별주 생활 해야 되는 계인가, 그거는 경우에 따라 틀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재가자가 판단할 부분이 아닙니다.
Q. 수행자 : 아 그러면 앞으로는 그렇게 이제 옷을 입으신 분들에 대해서는 그냥 저희 재가자들은 그냥 스님으로서의 예의로만 대하면 될까요?
A. 스님: 그럼. 그게 단기출가자든 뭐 장기출가자든 뭘 했든 간에 출가자는 출가자로서 대하면 됩니다.
그래서 내가 저번 시간에도 그렇게 얘기했잖아요. 출가자에 관한 일들은 재가자들이 관여하려고 하지 말아라. 왜 여러분들이 그 마음을 일으키느냐는 거라. 싫은 마음들을.
설혹 그 스님이 그 계를 범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계가 어디에 해당되는지를 그거는 스님들끼리 상가 회의에서 상가 깜마를 해가지고 의논해 가지고 거기에 맞는 적당한 벌칙이 있으면 벌을 가하면 되는 것인 것이지, 여러분들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은 나중에 이 죄가 어디에 해당되는지 애매모호 할 때 그때는 재가자 중에 위의가 뛰어나고 계율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초청해가지고 그것에 대한 중재를 맡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출가자 계에 대해서도 여러분들이 알아둘 필요성은 있죠.
그렇지만 알아둬야 되는 거하고, 관여해라는 거하고는 틀린 겁니다. 됐습니까?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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