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테라와다 불교의범과 신행생활

시험문제 풀이, 테라와다의 가르침·진심·기준점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412-1

담마마-마까 2024. 11. 27. 17:27

https://youtu.be/D8li_n9pFBg?si=4mEPi7Ml3hZf9bQr

 

* 시험문제 풀이, 테라와다의 가르침·진심·기준점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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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없는 게 회향을 하지 않으면 자기 몫 밖엔 안 돼. 회향을 하지 않으면. 그런데 회향을 해버리면 살아있는 분과 돌아가신 분 모두에게 그 공덕이 전이가 되는 거라. 똑같이 뻥튀기가 돼버리는 형태라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이 조금 전에 법문을 듣든 아니면 수행을 하든 하고 나면 ‘아, 내가 이런 공덕들로 인해서 하루빨리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 되기를’ 아니면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행복하기를’ 아니면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하는 그런 회향 의식들을 한다는 거라.

 

그래서 테라와다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어떤 일이든지 나쁜 일 할 때는 회향하면 안 되겠지. 좋은 일을 할 때는, 좋은 일을 할 때는 반드시 회향을 하라.

그것이 일상생활화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겠죠. 회향할 것 같으면 나도 좋은 마음들이 일어난단 말이라. 선한 마음들이 일어날 것 같으면 내 그 마음이 흘러넘치게 되는 거고, 그리고 내 모습이나 내 생활 방식도 바뀌어지는 거고, 그리고 나로 인해서 살아있는 분들도 그 영향을 받게끔 되는 거라. 돌아가신 분 중에 아귀계에 태어난 분은 또 영향을 받게 되는 거라.

 

그런데 이승이든 저승이든 그 영향들을 그대로 골고루 나눌 수 있는 좋은 일들인데 왜 회향을 안 하느냐는 거라. 왜 욕심 많게 자기 것만 할라고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그 의식이 마지막에는 회향 게송들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 회향 게송이 그 대신에 돌아가신 분만을 위한 회향 게송은 또 따로 있어요. ‘내가 이런 것으로 인해서 당신이 행복하기를’, ‘이런 것으로 인해서 당신이 하루빨리 천상에 태어나기를’ 하는 게송을 하는 거고, 그렇지 않고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일 거 같으면 또 다른 게송들을 하게끔 되는 거고, 그 게송만 틀리다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가끔씩 그럽니다. 지금 현재 선원들에서는 어느 선원이라도 테라와다 선원 같은 경우에는 누가 돌아가신다 할 것 같으면 가서 한국말로 할 거 아니면 시다림(尸陀林) 조차도 안 합니다. 나는 왜 저러고 있느냐는 거라. 테라와다 스님들은 누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시다림에 가거든. 초청하면. 초청 안 하는데 가면 안 되겠지만은 “스님 좀 와주십시오” 하는데 왜 가서 이 좋은 일들을 갖다가 안 하느냐는 거라

그게 3일이면 어떻고, 그게 1주일이면 어떻고, 49재 하는 거면 어떻느냐는 거라. 그게 그 왜 형식에 자꾸 매여가지고 49재를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대승적이다, 뭐 어쩌다, 이런 걸 자꾸 매이느냐는 거라.

 

테라와다 스님들도 그걸 빨리 바꿔야 되는 거고, 그리고 한국 스님들도 안 내용들을 바꾸라는 거라. 안의 내용들을. 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거는 아주 협소한데 돌아가신 분 중에서도, 그거 돼도 안 하는 그걸 하고 있느냐라는 거라. 그러면서 자기도 잘 모르면서 뭐 돌아가신 분이 어디 좋은 데 태어났다고 이상한 소리나 자꾸 하고 그러느냐는 거라. 그렇게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들은 하지 말아라는 거라. 할 것 같으면 정확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게끔 바르게 하라는 거라.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아까 얘기했죠.

최고 먼저 해야 되는 건 돌아가시기 전에 스님을 초청할 것!

만약에 초청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 손을 꽉 잡아주십시오.

그러면서 자꾸 “한번 해봐.” 그러면서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깨끗한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어주는 것. 그렇게라도 못 할 것 같으면, 그것조차도 안 해본 사람이다 할 것 같으면 좋은 마음을 일으키게끔 계속 좋은 말들, 바른 말들을 자꾸 해주라는 거라. 그것조차도 안 되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한국에서 가장 많이 하는 게 뭡니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니면 지장보살, 관념이라도 거기에 매여가지고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않도록 만들어주면 되는 거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주라는 거라.

살아있을 때 다른 가족들이 해줘야 될 일이 그 일들이라는 거라. 그걸 먼저 신경을 써야 되는 거고.

 

두 번째 해야 되는 것은, 돌아가시고 나서는 내가 그것이 49재 형식이든 아니면 3일간이든 어떤 형식이든 아니면 기제사든 어떤 형식이든, 그 공덕들을 갖다가 그날만큼은 내가 공덕을 자꾸 쌓으려고 많이 하고, 그리고 그 공덕들을 돌아가신 분께 회향하는 마음들을 가져줄 것!

이 2가지는 반드시 해야 되는 것들이라. 됐습니까? (수행자 대답 : 예)

 

(Q 수행자 질문 : 스님 저도 연달아 질문드립니다. 아까 그거하고 연관된 질문인데요. 우리나라에도 지장경이 있잖아요. 거기 ... ... ... 그런 얘기를 굉장히 많이 들었거든요. 근데 어느날 책을 보다가 그 지옥에 사람이 딱 태어나서 그 지옥의 대왕이 죄가 있는지 나한테 누가 밝혔고 그다음 자기한테 공덕회향을 했는지를 보고 공덕회향을 했으면 다시 이렇게 태어나게 하는 그런 게 있다라는 걸 책에서 읽었는데요)

어느 책에서요?

(수행자 : 저기 보리수 선원에서 나온 책인데요. 그 강정미 님이 지은 건데,)

그건 아비담마에서 나오는 거고,

(수행자 : 아 그래서 그게 굉장히 태어나서 그 사람 그대로 가서 그렇게 한다라는 게 좀 신기했었고 그다음에 그렇게 해서 천신한테 공덕회향을 한다는 그거 회향의식이 있다는 것도 조금 신기하고, 그래서 좀 설명을 듣고 싶었습니다.)

 

천신에게 공덕회향 하는 것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데와눗사띠라고 그러거든요. 그 천신에 대해서 쉽게 말하면 거듭거듭 생각해가지고 그것들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는 것들이 수행 방법에는 있습니다. 있는데, 공덕 회향하는 것은 천신에게만 해당이 되는 건 아니고 모든 중생들에게 해당이 됩니다. 그렇게 봤을 때는 꼭 천신에게만 공덕회향하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천신에게 하는 것은 공덕회향이라기 보다는, 천신에 대해서 깊이깊이 생각을 하고 나도 죽으면 쉽게 말하면 천상에 태어나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천신들의 일들을 갖다가 찬탄하고 하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건 공덕 회향이 아니고 아눗사띠(anussati)라고 그럽니다. 아눗사띠, 그러니까 붓다눗사띠 담마눗사띠 상가눗사띠와 마찬가지로 아눗사띠 중에 데와눗사띠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거는 천신에게만 해당이 되는 거고, 그거는 공덕회향이라기 보다는 그걸 거듭거듭 생각한다는 거, 그리고 수행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고.

 

그게 인제 경전에 나와 있고, 대신에 그 인연담이라는 그 경전들 소부경전에 보면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지옥에 태어난 것들을 거기서는 이제 염라대왕이라고는 얘기를 안 하고, 천신들이 너는 여기에 무슨 공덕으로 인해서 여기에 왔느냐? 하고 물어보니깐, 살아있는 분들이 공덕회향을 해줘가지고 여기에 태어났다, 아니면 내가 살아 있을 때 깨끗한 마음을 지녀가지고 여기에 태어났다, 하는 그런 것들은 인연담에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있지만은 그것이 체계적으로 발전돼가지고 지금같이 뭐 지옥에서 염라대왕이 심판하는 형식으로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거는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누가 누굴 심판할 수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자기의 공덕으로 인해서 거기에 태어난 것뿐이지, 단지 거기에 태어난 것이 무엇 때문에 왔는가 하는 것들을 돌이켜 생각할 수는 있지만은, 그것으로 인해서 다시, 아니면 너는 여기 있을 조건이 안 되니까 다른 데 가라 하고 염라대왕이 보낸다든지 이럴 수 있는 조건은 없습니다.

그거는 경뿐 아니라 어디 주석서를 보더라도 그런 것은 안 나옵니다. 그거는 인제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될 부분입니다. 됐습니까?

 

(수행자 : 그러면 그냥 그거는 아비담마에 나온)

주석서에 나오는데 주석서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걸 심판한다는 부분은 없습니다.

(수행자 : 심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선업이 있는지 찾아봐주고 그것으로 인해 기회를 주는)

그래서 내가 얘기를 안 합니까? 어떻게 해서 여기에 오게 됐는가? 하고 물어봤을 때, 그 사람이 그걸 생각해내가지고 나는 이런이런 공덕으로 인해서 여기에 태어났다 하는 걸 갖다가 얘기를 하게 되는 부분은 곳곳에 등장을 합니다. 그거는 아비담마가 아니라 경전 내에서도 곳곳에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있지만은 그걸 심판해 주고 하는 부분은 없다는 거라. 됐죠?

 

자, 그러면은 먼저 여러분 시험 친 거 답안지 안 낸 사람도 많대.

이번에는 그냥 용서를 하고 넘어가는데 다음에는 다 반드시 내야 됩니다. 여러분들 그거 시험 점수 매기기 위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내면 됩니다. 시험 못 쳤다고 스님이 뭐라 하지도 않을 거니까.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때 주의할 점 5가지를 기억해 적어보십시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때 주의할 점 5가지, 요거 아마 잘 못 쓴 사람들이 많더라고. 배울 때 주의할 것들이 뭐가 있어요? 부처님 가르침 뿐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죠.

내가 요걸 가지고 배워가지고 어디 다른 데 써먹기 위해서, 남한테 자랑하기 위해서 이런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별 의미가 없겠죠. 뭐 지식적으로 아 저 사람 참 많이 알고 있구나 하고 할지는 몰라도 실제로 그게 그 사람을 변화시켜주고 좋은 쪽으로 이끌어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아만심만 더 커지게끔 되는 거죠.

 

그래서 배울 때 주의해야 될 첫 번째가 '위깔라' 라고 그럽니다. 아, '막칼리, 마칼라'라고 이렇게 얘기하는 게 뭐냐면, 그걸 배워가지고 내가 바르게 내 자신을 바꾸고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목적 나의 이익을 위해서 배우는 거라.

혹시 여러분 중에 그런 사람도 있을지도 몰라. 요것도 한번 배워봐야지. 배워가지고 뭐 남한테 자랑하든 뭘 하든 간에 어쨌든 그런 목적으로. 그걸 갖다가 '위선(Makkha)'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위악'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건 바른 목적이 아니라는 거라. 그 목적으로 배우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가르침은 여러분들은 담마를 배우는 것은 담마다로(dhammadharo)가 되기 위한 겁니다. 그것을 배워서 실천하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잘 실천하려는 자가 돼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그걸 배워가지고 더욱더 노력하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 그냥 담마만 배워가지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라. 알겠죠? 그게 인제 첫 번째고.

 

두 번째는 겨룰 목적, 겨룬다고 하는 게 쉽게 말하면 내가 대승불교를 배웠다, 그러면 대승불교 약점을 다 알아놓고 싸움하기 위한 것, 쉽게 말하면. 또 저쪽에 수행 방법 배워와 가지고 저 수행 방법이 뭐가 잘못됐나? 이렇게 해서 트집 잡기 위한 것, 쉽게 말하면. 그걸 이제 ‘겨룬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겨룬다. 겨룬다, 다 못 알아들었어요? 제가 경상도 갱상도가 돼서 그렇습니다.

그걸 '우빠-람바(upārambha)'라고 이렇게 빨리어로 얘기하는데 겨룰 목적으로 남의 약점을 찾아내서 그것을 자기 것이 더 수승하다는 걸 갖다가 하기 위해서, 이렇게 겨루기 위해가지고 비교하기 위해서 그렇게 배울려고는 하지 말아라 하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담마데사까'라고 해가지고 가르치는 사람한테 쉽게 말하면 따끔하게 뭐라 하기 위해서. 내가 요만만큼 배워서 저 사람보다도 더 이제 많이 알고 있다 그럴 것 같으면 오히려 가르치는 사람한테 이제 가르칠려고 드는 거라.

그리고 그걸 갖다가 비난하고 뭐라 하기 위해서, 니는 왜 이것밖에 안 돼? 이때까지 자기 스승인데도 그것보다 높이 올라가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는 거라. 안 그러면 그렇게 안 하면 그걸 떠나버리든지. 그럴 목적으로 배우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걸 담마데사까라고 그럽니다. 그 담마를 가르키는 사람을 비난하고 그 사람을 타격을 주고 그 사람을 괴롭힐 목적으로 배우는 것.

 

그다음에 네 번째는 '두빤냐(du-paññā)'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둑카 할 때도 두(du)가 나오죠. 그래서 두빤냐 할 것 같으면 빤냐가 뭡니까? 지혜. 지혜하고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들입니다. 둑카라고 할 것 같으면 두(du)라고 하는 것은 반대 방향으로 이끌다는 그런 뜻이거든. 두빤냐가 되니까 어떻게 돼요? 지혜 쪽으로 이게 나아가지 않고 더 어리석게 이끄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쉽게 말하면 지 자랑 열심히 하고 뭐 ‘나는 이만만큼 배웠는데’ 하고 탁 앉아갖고 이래 있을라고 그러고, ‘난 출가스님인데’ 하면서 탁 이럴려고 하고,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어떤 경우든지 그럴 목적으로 배워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다나 냐따'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나쁘게 얘기하면 무식한 것들을 듣기 위해서, 무식한 것들을 듣기 위해서 배우려고 한다는 거라. 그걸 달리 얘기하면 그 다른 부분은 무지하다고 치자, 그러면 그 무지한 것들이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을 해버리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렇게 가끔씩 ‘괜찮아. 이거 안 배워도 내 살아가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어.’ 아니면 ‘수행 안 해도 뭐 괜찮아.’ 어쩔라고? 수행 안 해가지고 어쩔려고?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안 배워서 어떡 할려고? 사리분별할 판단 능력을 가질려고 할 것 같으면 배워야 됩니다. 그리고 나를 조금 더 높은 단계로 향상시키려면 수행을 실천 수행을 해야 되는 거라. 그런데도 그거 필요 없다고 자꾸 자기의 것들을 감추려고 하는 거라. 그걸 얘기하는 거라. 그 감추기 위한 용도로서 이걸 배우는 거라.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배울 때는 그래서 주의해야 될 게 이 5가지 입니다. 길게 설명은 안 할게요.

그게 아마 여러분들이 좀 아마 어려웠던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답을 쓴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다음에 또 좀 어렵게, 나머지는 뭐 그냥 대동소이 합니다. 틀려도 되고 맞아도 되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잖아. 그리고 뒤에 문제 낸 거 중에서,

 

네 번째 무엇을 해도 실수가 많은 사람은 무슨 이 빠져있는가?

실수 많이 하는 사람들은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뭐 잘못돼가지고 자꾸 실수해요? 뭘 잘못해가지고 그래요? 알아차림.

첫 번째가 알아차림이 없을 경우에는 실수를 합니다.

근데 알아차렸는데도 또 실수를 했다, 그럼 뭐가 부족해요?

그 알아차리는 것들이 지속하는 힘, 삼빠자나라고 그러죠. 그것이 부족하다는 거라.

이 2가지만 갖춰지면 적어도 실수는 안 한다는 거라.

요마만큼 화가 확 일어나도 ‘욱’하고 말지, 실수로 말이 팍 튀어나오지는 않는다는 거라. 나쁜 일 할라고 하더라도 탁 멈추게 되지, 그걸 저지르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자기자신이 그걸 반성을 해야 돼. 아 내가 자꾸 실수를 하고 한다 할 것 같으면 ‘평상시에 내가 알아차리고 그리고 그 알아차림을 계속 지속해 나갈려고 하는 그런 힘들이 부족하구나’ 하고 판단을 해야 되는 거라.

그게 이제 많이 틀린 부분이고, 그다음 밑에 있는 거,

 

무상 고 무아가 표면으로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무상 고 무아가 표면으로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러분들 수행하는 것은 무상 고 무아를 체험하기 위한 것들이라. 근데 왜 그게 체험이 안 될까? 배를 알아차리면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한 시간 내내 ‘일어남 사라짐’ 이것만 하는 거라. 경행을 해도 ‘왼발 오른쪽’ ‘왼발 오른쪽’ 그것만 한다는 거라. 하루 종일 그거 보고 있는 거라. 그 무상하다는 거 모르는 거라. 왼발이 끝났으면 그다음에 오른발이 바뀌니까 그것도 무상하다고 볼 수 있겠지. 근데 그거는 3살짜리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 정도의 무상은? 그렇죠? 어린애한테 물어봐 봐요. 1년 전의 모습하고 지금하고 틀린다고 하지, 똑같다고 얘기하는 애가 어딨어?

 

그런 것들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무상 고 무아가 드러나지 않을 땐 틀림없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라. 무상이 드러나지 않을 때? 무상은 뭡니까? 변하는 거죠. 항상 하지 않고 변하는 것으로, 아 내가 변하니까 이 변하는 것에 내가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그걸 붙잡지 않을려고 하는 마음들이 자꾸 일어나야 되는데, 그것만 자꾸 막 붙잡으려고 하고 그런 마음이 자꾸 생긴다 할 것 같으면 무상한 성품들을 이해를 못 하고 있다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해 표면에 딱 드러난다는 거라. 그러니까 내 돈 누가 뺏을 거 같으면 집착하는 마음이 있어서 아까워갖고 막 울고불고 하고, 누가 돌아가셔도 그러고 그렇게 되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무상한 상품을 모르기 때문에 그게 인제 표면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무상한 것은, 무상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항상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거기에는 있어요. 좋은 거면 항상 그대로 있기를 바라죠. 싫은 것도 안 그럴 거 같아요? 싫은 것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얼마나 게을러 빠진 거라. 얼마나 게을러 빠진 거라. 얼마나 공부할라는 마음이 안 일어나면 편한 것들을 좋아하느냐는 거라. 다리가 구부러져 있으면 아프기 때문에 편할려고 펴는 거라. 그런데 실제로 펴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있을 것 같으면 이게 편할 것 같아요? 또 구부려야 되는 거라!

이게 무상한 건데도, 그 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자꾸 편할라고만 하는 거라. 어떠한 경우도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법은 없다는 거라.

 

처음에 해인사 갔을 때 옛날에는 해인사 출가를 하면 뭐했냐 하면 1주일 동안 부엌 딱 입구에 합장하고 이렇게 가만히,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요래 있어야 돼요. 디게 편할 것 같죠? 인사하는 것도 아니고, 죽어요 죽어. 하루 지나고 나면 바들바들바들 떨리는 거라. 제발 움직이게끔 해주라는 거라. 변화할 수 있게끔. 그게 실재하는 거라. 그런데도 우리는 실재하는 건 놔두고 변하지 않게끔만 할려고 하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무상한 성품을 드러나지 않게끔 한다는 거라. 여러분들 빨리 마음을 바꿔야 되는 거라. 변하고 있다는 사실로서!

 

아무리 편한 거라 하더라도 마음을 탁 내야 되는 거고, 이것도 언젠가는 나에게서 없어지는 거고, 사라지는 거고, 변해가는 것과 같다는 사실로써 자꾸 받아들여야만이 그것에서 집착하는 마음들이 없어지게 되는 거라.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이것도 변해가는 거니까 내가 더 열심히 할 것 같으면 이 상태를 넘어선다 해서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려고 하는 것이지, 거기 빠져가 울고불고 하진 않는다는 거라. 그리해야만이 여러분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무상을 배운 의미가 있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고() 괴로움이죠.

그걸 위의(威儀)라고 그러는데, 처신하는 방법에서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괴로움은 우리는 보통 육체적인 괴로움, 보통 경전상으로 얘기하는 거거든요. 괴로움은 육체적인 괴로움이 있고, 정신적인 괴로움이 있고, 그다음에 괴롭지 않을려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오는 괴로움이 있고, 그다음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 일어나는 괴로움이 있고, 이렇게 4가지로 보통 얘기를 합니다.

 

근데 딱 짚어가지고 얘기해 봅시다 육체가 지가 괴로운 걸 알아요? (수행자 : 모릅니다.)

모르죠. 그럼 1번은 그거는 경전에만 있는 거지 여러분들에게 해당이 되는 게 아니라.

그러면 두 번째 정신적인 괴로움은 있다고 치자. 오늘은 일단 놔두고.

그럼 세 번째가 뭐라고 그랬어요? 괴롭지 않으려고 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

세상에 그런 법이 있어요? 괴로운 건데, 모든 것들은 변해갈 거 같으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괴롭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밥도 안 먹고 움직이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근데 왜 밥을 먹고 자꾸 움직이게 되는 거라?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근데 사람들은 자꾸 이걸 잊어먹는다는 거라.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질 않으니까, 안 괴로우려고 자꾸 지가 더 괴롭게 만들어지는 거라. 이게 또 쉽게 말하면 정신적인 두 번째에 해당이 되는 부분이라.

 

그리고 네 번째 뭐라고 그랬어요? 지나고 나서 ‘아이, 참 내가 그리할 걸 갖다가’ 잘못했다고 땅을 치고 통곡하는 거라. 알아차리지 못해가지고 무언가 일이 잘못됐을 때 일어나는 괴로움들. 결과가 좋게 나타났을 것 같으면 그러지도 않을 거라. 나쁘게 나타나면 지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자기를 질책하고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한탄하든지 이렇게 하는 거라. 지나고 난 거는 별 의미가 없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도 지나고 나서 일으키는 후회라든지 괴로움은 오히려 그것들을 가중시키는 것뿐입니다.

그럼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그런 것들은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도 쉽게 말하면 실재하는 것들이 아니고 내가 일으키는 마음에서 일으키는 부분입니다.

 

그럼 모든 괴로움은 뭐로 와요? 마음으로 인해서 오게 되는 거라 실제로는.

그러면 마음이 괴롭지만 않게끔 할 것 같으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마음이 괴롭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당연히 알아차려야 되는 거지.

 

사람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뭐냐 하면 수행할려고 할 것 같으면 알아차리려고 먼저 합니다.

수행하려고 할 것 같으면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은 마음을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공덕을 쌓으려고 하더라도 공덕을 쌓을려고 집중하지 말고, 먼저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나서 공덕을 쌓아야 됩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마음을 맑고 고요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들이 우선이 돼야 됩니다. 그것이 안 되면 알아차리는 것도 안 되는 거고, 공덕 쌓아놓은 그거 순 엉터리 공덕을 쌓게 되고, 공덕도 자기 것이 되지도 못하고 그러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은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깨끗하게 해주는 것이 맞습니다. 그럴 거 같으면 괴로운 것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걸 그냥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거라. 즐거운 것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지나치게 뭐 좋아하고 이러지는 않는다는 거라.

이게 바른 위의(威儀)라는 거라. 근데 대부분은 그렇게 위의를 가지지 못한다는 거라. 대부분 거기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고가 괴롭다고 하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마음에서 위의들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괴로움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 같으면 당연히 괴로운 거라. 사랑하는 것 자체가 안 괴로운 사람이 어딨어? 모든 것은 괴로운 거라. 그러면 빨리 마음을 내서 이 괴로운 것들은 윤회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이 윤회로부터 벗어나려고 크게 마음을 내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게 이리야빠타(iriyāpatha)라고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무아(無我, anattā) 무아라는 게 뭡니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실체가 없다. 다 조건 지워져서 일어난 것인 것뿐이지 그리고 조건 따라서 사라지는 것이지. 그게 특정한 개체 불변하는 바뀌지 않는 뭔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들이 이제 무아입니다. 비아(非我)하고 무아(無我)하고는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럼 이건 왜 그럴까? 실체가 없는 건데 우리는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는 거라. 돈, 돈을 갖다가 한 10장 할 것 같으면 요 정도 두께가 있죠. 우리는 돈이 있다고 압니다. 그런데 실체가 없이 돈이 10장 있다, 이걸 생각으로 할 것 같으면 그건 두께로써 알아차리질 않습니다. 그냥 돈이 있다 하고 알고, 만약에 그 돈이 없어지더라도 크게 그것 가지고 원래 없던 거니까 마음에 두질 않습니다.

 

그런데 실재하는 두께로서 10장 가지고 있는 걸 누가 없애버렸다 할 것 같으면 '나'라고 하는 것이 확 일어난다는 거라. “내 건데이래 버립니다. '두께(ghana)'라는 거라. 두께로서 느껴버리면 나라고 하는 것이 탁 드러나 버린다는 거라. ‘나의 견해, 나의 것, 나의 생각’이라는 것은 이 두께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여러분들은 이 두께를 얇게 만들어야 됩니다. 얇게 만들어서 아예 없애버리면 여러분들 아라한이 되는 거고, 점점 더 두께가 두꺼워진다 그럴 것 같으면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라.

누가 무슨 문제에 탁 부딪쳤다, 나라고 하는 것이 자꾸 일어난다, 그렇다면 두께가 있는 거라. 지 고집 자꾸 내세우려고 그런다, 예를 들어서, 부처님 말씀은 배우면 배울수록 지 고집을 세우는 것이 자꾸 없어지는데 더 고집만 세지고, 더 내가 잘났다고 드러낼려고 하고, 공부하지 마. 아예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익이라는 거라. 그러니까 만날 큰 절에 있는 대보살들 욕을 먹는 거라. 다른 보살들은 그러는 거라. 저거는 만날 공부한다고 하면서 지 아만심만 자꾸 높아져 가지고 대접만 받을라고 그런다. 자꾸 이 두께를 두껍게 만들어버리는 거라. 여러분들은 이 두께를 자꾸 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뭔가 외부적인 대상이든 아무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든 대상하고 탁 부딪쳤을 때, 탁 부딪치는 게 있는데 그것이 견고해진다 할 것 같으면 그거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라. 그럼 빨리 알아차리고 그걸 내려놓도록 해야 되는 거라. 아무리 옳은 거라고 하더라도 내가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어서 아라한이 되기 전에 일으키는 것들은 전부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잘못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그것을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도 잘한 것도 있고 잘못 할 수도 있다는 거라. 그럼 그걸 갖다 이해할 줄 알아야 되는데 이 두께가 자꾸 두꺼워지면 그것도 이해가 안 되고, 내 자신도 자꾸 드러낼려고 그러고, 이렇게 되는 거라. 그걸 자꾸 없앨려고 노력들을 해야 되는 거라.

 

이 3가지가 쉽게 말하면 무상 고 무아가 드러나지 않게끔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끔 하는 것들입니다. 그걸 빨리어로 산따띠(santati), 이리야빠타(iriyāpatha) 그다음에 가나산냐(ghana saññā)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3가지 때문에 그렇다 하고 얘기합니다.

나머지는 크게 중요한 부분은 없습니다.

 

사람이 수행하는 이유는?

수행하는 이유는 각자 알아서 쓰면 되고,

··론의 삼장에 대해 그 내용의 요점을 하나의 (빨리어)로 나타내면? 또 그 말(빨리어)이 들어가는 문장은?

경전에서 요점이 되는 말 지가 판단해가지고 그게 요점이다 할 것 같으면 그 요점을 쓰고 그거 요점이 경의 어디 어디에 나오는가 하는 걸 갖다가 그냥 쓰면 되는 거고,

경전만을 학습하는 사람, 경전을 학습해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 이 두 명에 대해 부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그다음에 경전만을 학습하는 사람 경전학습해서 이거 실천하는 사람, 그 비유로 한 거 지가 알아서 쓰면 됩니다. 뭐 ‘넘의 소를 세는 거다’ 아니면 ‘지 소 세고 있는 거다’ 뭐를 쓰든지 아니면 다른 걸 하든지 그건 알아서 쓰면 되는 거라.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부분 이걸 자기 실정에서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서 쓰면 되는 것들이라.

그걸 갖다가 성적 받을라고 또 이걸 어떻게 하면 좀 잘 쓸까 하는 생각으로 쓸 것 같으면 그건 잘못된 거라. 가장 정확한 것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게 허물이 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라.

다음 시험 볼 때는 반드시 그렇게 하십시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게송 하나 얘기를 해드릴게요.

빨리어로 하면 여러분은 못 알아들을 건데, "아디쩨따소" 하면서 이렇게 하는 게송인데, 여러분들도 좋아하는 게송 하나씩 있는 게 좋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면 초월한 마음을 가지라는 거라. 초월한 마음들을 가질려고 자꾸 노력하라는 거라. 그러니까 세속에서 일반적으로 부딪치는 오온을 통해서 부딪치는 모든 것들, 그것에 대해서 너무 연연해하지 말아라는 거라. 남이 뭐라 하든 아니면 눈에 보이는 게 잘났고 못났든 그거 너무 연연해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걸 갖다 '초월한 마음'이라고 그럽니다.

 

삼매에 들면 어떻게 돼요?

오온에 대해서 지각을 하는 것들이 수준이 딱 틀려져 버립니다. 뭔가 내가 지각을 하기는 합니다. 알아차리긴 알아차려.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지금 오온을 통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일으키는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대상들을 알아차립니다. 그게 기쁨이면 기쁨을 알아차리는 거고, 행복한 것이면 행복한 것을 알아차리는 거고, 열반이면 열반을 알아차리는 것들이라.

아니 내가 알아차리는 것들이 그 좋은 것들이 있는데, 왜 시시하게 이렇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맛보고 하는 이거 가지고 성질내고 그러느냐는 거라. 물론 밥도 먹고 보기도 봐야 되고 하는데, 크게 너무 그것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말아라는 거라. 남들이 나를 보고 뭐라 하든 아니면 나에게 보이는 대상들이 아니면 들리는 대상들이 뭐가 어찌 됐든 간에 너무 크게 영향받지 말아라는 거라. 그게 인제 첫 번째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이 시간 나면 자꾸 그럽니다. 누가 보면 ‘아이고 저 참 공부도 안 하고 이런다’ 하는, 그 대상을 보고 인자 그런 마음이 일어나. 그러면 요 게송을 딱 외웁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왜 오온에 끄달려가지고 거기에 그 마음을 내고 있느냐는 거라. 그러면 탁 정상적으로 돌아옵니다. 여러분도 그 마음을 자꾸 가지라는 거라. 이거보다도 훨씬 좋은 것들이 있는데, 왜 그거 안 하고 이걸 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성자가 되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부처님과 같은 그런 성인이 되는 것들이라. 내가 지금 그 성인의 길을 가고 있는가 하고 판단하는 거라. 이게 두 번째입니다.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것, 이 길 내가 하고 있는 거 이게 부처님이라면 했을까? 부처님이 가고 있는 길을 내가 지금 가고 있나?

아닐 것 같으면 빨리 놔버려야 되는 거라. 화들짝 놀래버리는 거라.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진절머리를 내야 돼. 안 할려고 자꾸 해야 되는 것이지 그거 그냥 그대로 따라가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가는 길은 어떠한 경우든지 성인의 길 성자의 길이 돼야 됩니다. 내가 그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걸 갖다가 자꾸 생각을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지금 지혜롭게 하고 있는 것들이 알아차림으로 인한 것인가?

내가 판단하고 그리고 내가 뭔가를 선택해야 되고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것들이 분명한 알아차림 바른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들인가? 쉽게 말하면 탐 진 치가 있는 상태에서 행하고 있는가? 탐 진 치가 없이 알아차리면서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걸 갖다 분명하게 자꾸 기억을 할려고 해야 되는 거라.

그 3가지. 그래서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에게는 어떠한 경우도 슬픔이나 비탄이나 괴로움들은 여러분들에게 침입하지 않는다는 거라. 평화롭게 잘 지내. 아주 행복하게. 살지 말라는 게 아니고, 출가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못해? 그래서 이 게송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는 여러분들에게 맞는 게송들을 반드시 기억해서 자꾸자꾸 자기를 단련을 시켜야 됩니다.

 

오늘 해야 되는 것은 하나도 못하고 엉뚱한 것만 갖고 했습니다.

「테라와다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가끔 ... 예?

(수행자 질문 : 스님께서 설명은 해주셨는데 그 게송을 정확하게 말씀해주시지 않아서..)

빨리어로 해주라는 거라?

(수행자 : 초월하는 게송이 있는가 싶어서 그렇게,,, 그 게송을 생각을 하라고 하셔서)

그 앞에 3가지를 얘기했잖아.

(수행자 : 그 3가지 설명은 해 주셨는데 그 게송이,,, 빨리어로 게송이 있는 줄 알고는 그렇게,,, 그렇게 있는데 거기에 대한 의미가 이렇게 3가지로 크게 부여가 됐다는...)

그렇죠. 그래서 첫 번째는 뭐라고 그랬어요?

초월한 마음을 가질려고 열심히 노력하라 하고 얘기를 했고,

그다음에 두 번째 뭐라고 그랬어요?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성자의 길 성인들이 가는 길인가, 성자의 길인가?

그다음 세 번째 뭐라고 그랬어요?

지혜롭게 지금 지혜를 가지고 내가 지금 알아차리고 있는가?

(수행자 : 어떤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이게 빨리어 게송이 있다는 말씀이시죠.)

예. 빨리어 게송은 "아디쩨따소 압빠맛자또" 못 알아듣잖아. (수행자 : 게송이 있는 줄 알고)

게송이 있죠. 게송을 한글로 풀이를 한 거지.

 

Adhicetaso appamajjato, 아디쩨-따소- 압빠맛자또-,

Munino monapathesu sikkhato; 무니노- -나빠테-수 식카또-;

Sokā na bhavanti tādino, -- 나 바완띠 따-디노-,

Upasantassa sadā satīmato. 우빠산땃사 사다- 사띠-마또-.

초월한 마음 상태를 가지고 불방일하고,

적묵의 길을 걸어 묵자(성자)가 되어 있네;

평안에 이르러 항상 알아차리고(sati) 있는,

그러한 사람에게 슬픔은 없다.

 

「테라와다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프린트물 많이 나갔는데 중요한 것만 딱 하겠습니다.

자꾸 이제 사람들이 테라와다를 하면 테라와다의 정체성이 뭔가 하는 얘기들을 합니다. 근데 기준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을 제시들을 잘 안 하니까 잘 모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테라와다는 뭔가 하는 부분이 앞에 쭉 있습니다. 읽어보시면 됩니다.

저기 쭉 넘겨가지고 14페이지 한번 보십시오.

 

「테라와다의 진심」은 뭔가 하는 것은

테라와다가 높은 자리에 있다고 장자로서 존경받기 위한 것들은 없습니다. 여러분들 그걸 자꾸 착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테라와다 불교도가 됐다 하더라도 여러분들 잘난 거 아닙니다. 대승불교보다 잘났다, 뭐 아니면 뭐 나는 바른길을 가고 있다, 뭐 바른 수행하고 있다, 그런, 나쁘게 이야기하면 그런 짓거리 하라고 하는 것이 테라와다의 진심은 아닐 거라는 거라.

 

딱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은 부처님입니다.

어떠한 경우도 여러분들의 스승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에게 잣대를 맞춰야 됩니다.

부처님이 여러분들의 스승이 되는 거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따라가는 것이 여러분들이 나아가야 될 길들입니다. 그것이 기준이 돼야 됩니다. 아무리 테라와다 불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나 버릴 것 같으면 그건 이미 소승이 돼버립니다. 그 사람은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의 제자라고 부르질 못하게 된다는 거라.

가르치는 스승들이 각각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스승이 되었지만 그 스승은 무슨 역할을 해줍니까? 부처님에게 연결해 주는 역할밖에는 못 합니다. 내 의견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 그냥 그대로 전해주는 거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된다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목조목 다 이해하다 보니까 의문이 생겼다, 그러면은 그 의문을 갖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를 합니다.

 

쉽게 예를 들게요. ‘부처님 가르침은 윤회하는 것이 없다고 했다’ 누군가 이렇게 얘기했다, 테라와다 승복을 입은 스님이. 굉장히 그건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은 이렇게 조목조목 얘기해갖고 그리고 옛날 2500년 쭉 내려오면서 윤회라고 하는 것들을 인정을 하고 윤회의 테두리를 갖다가 가지고 있습니다. 테라와다 자체는. 그리고 부처님도 그렇게 얘기했고.

그런데 어느 경구 어느 금구를 떼가지고 그것만 가지고 짜집기 해가지고 ‘윤회가 없다’ 이렇게 얘기해버립니다. 누가 부처님 제자들이 자기 자신의 견해를 천명하고 내세운 적이 있습니까? 그건 대승불교에서 하는 겁니다. 조사들이 하는 것들이지, 그래서 조사들은 자기의 가풍을 세워야 되는 거고, 자기 제자들을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만 이렇게 비밀스럽게 전하는 것들이 있어야 되는 거고.

 

근데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건 테라와다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나의 견해가 없어. 부처님에게 다 맞춰지게 되는 거라. 설혹 내가 의문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의문이 풀릴 때까지 자기 스스로 해결하든지 아니면 부단하게 노력해 가지고 그걸 갖다 답을 찾아야 되는 것이지, 찾고 나면 나중에 결국에는 아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맞구나 하고 인정을 하게끔 됩니다.

 

근데 감히 나의 견해를 내세운다? 그럼 여러분들은 ‘그건 아니다’ 하고 쳐버려야 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스승이라고 하든 아니면 역대 조사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테라와다에서는 스승이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 외에는 스승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돼. 그게 테라와다의 진심이라는 거라. 테라와다적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테라와다 불교의 기준점」

그러면 여러분들이 기준을 잡고 나아가야 되는 것은 어떤 걸 기준을 잡을 것인가? 하는 겁니다.

첫 번째 뭐라고 적어놨어요? "스스로 확인하라." 확인되지 않은 것은 여러분들 것도 아니고 또한 확인되지 않는 것들을 남에게 공포하거나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확인 안 하고 할 수 있어요? 어떠한 경우도 확인된 것들이어야 됩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기준점은 내가 이걸 갖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게 뭐 부처님 말씀이다. 아니면 이렇게 하니까 뭐 욕심이 좀 적어지더라, 지가 확인하고 나서 해야 된다는 거라. 확인되지 않은 것들을 얘기하고 그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거라.

그래서 테라와다의 첫 번째 기준점이 뭐냐 하면 모든 것들은 스스로 자기 스스로 확인할려고 자꾸 하라. 확인해 보니까 사실은 부처님 당신이 참 뛰어난 분입니다 하고, 그리고 그 가르침은 정확한 겁니다. 하고 이해를 하게끔 된다는 거라. 알겠죠?

 

그다음에 두 번째 몇 페이지입니까? 18페이지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가라."

경전을 배우고 수행을 하고 하는 목적 2가지가 뭐라 그랬어요? 딱 2가지입니다.

공덕 많이 쌓는 거 많이 쌓으려고 하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해탈에 이를려고 하는 것, 그 2가지입니다. 나머지는 부차적인 겁니다. 부차적인 거. 어떻게 하면 여러분들이 공덕을 더 많이 쌓을 수 있는 방법이 뭔가 하는 거 쫓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에 이르는가 하는 거 그거 쫓아가면 됩니다. 그게 테라와다적인 거라.

 

그럼 여러분들이 지향해야 될 것은 해탈에 이르는 길을 그냥 가면 됩니다.

그러면서 공덕 쌓을 거 있으면 열심히 쌓고, 공덕 쌓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보시 지게 어쩌고 저쩌고 하겠지. 선한 마음 내면 됩니다. 나쁜 마음 안 내고, 선한 마음 자꾸 낼려고 하면 됩니다. 그게 알아차리면서 선한 마음이 일어나든, 아니면 남보고 아이고 당신 참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든, 뭘 하든 간에 선한 마음만 자꾸 일으키면 됩니다. 그걸 자꾸 일으킬려고 노력을 하고, 그리고 자기가 가는 길에서 다른 것들 해탈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되도록이면 자꾸 없애도록 하는 게 좋습니다.

 

왜? 사람들이 조금 공부하다가 출가할려고 마음을 먹을까?

그게 거추장스러우니까 그런 거라. 거추장스러우니까. 아니면 출가하기 전에 내가 아라한이 돼도 이게 거추장스럽기 때문에 거기 살 수가 없어. 그러니까 당연히 출가를 하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 출가를 안 하고 일상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되도록이면 자꾸 하지마. 안 하는 것이 최고 좋습니다. 뭐 좋다고 그걸 자꾸 할려고 해싸? 그래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도록 하라. 공덕을 쌓으려고 자꾸 노력하고 마음을 자꾸 깨끗하게 하라. 그게 인제 해탈에 이르는 길들입니다.

그래서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가면 테라와다적으로 사는 거고, 그렇지 않고 하면 우짠다고?

 

그다음에 세 번째 "실천 수행하라" 어떠한 경우든지 실천하지 않는 것들은 그것은 소용이 없는 죽은 것들이다.

그게 칸띠(khanti)와 띠띡카(titikkhā)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침착한 것, 보통 칸띠(khanti)를 우리 한글에서는 인욕이라고 그러는데 인욕은 참는 걸 인욕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인욕의 빨리어가 칸띠 입니다.

칸띠(khanti)는 뭐냐면 외부적인 대상이 어떤 것이 나에게 부딪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는 영향을 안 받고 내가 항상 고요한 마음을 유지해 주는 걸 칸띠·인욕이라고 그럽니다. 고통스러운 거 참아내는 거 이걸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남이 나에게 뺨을 때려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칸띠 하고 있는 겁니다. 아픈 걸 참으라는 게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인욕하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을 고요한 상태에 만들어라. 외부적인 자극 어떤 자극이 오더라도, 살아가면 전부 자극입니다. 그 자극에 우뻭카(upekkhā)의 마음들을 자꾸 만들도록 노력하라.

 

수행하라는 것은 그겁니다. 그걸 뭐 폼잡기 위해서 1시간 좌선하고 1시간 경행하고 만날 요거 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거는 형태입니다. 형태. '형태들을 잘 유지했다' 해가지고 그 사람을 수행 잘 했다고 얘기를 안 합니다. 오는 자극에 대해서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면 그 사람은 수행한 겁니다.

 

그래서 수행한다는 것은, 침착(khanti)과 인내(titikkhā) 2가지를 하면 수행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외부적인 자극에 대해서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좋고 싫은 것에 따라서 그것들을 갖다가 견디면서 계속 내가 해탈의 길을 나아갈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보자. 오늘 내가 바쁜 일이 있다. 그러면 담마스쿨 안 오고 그 바쁜 일을 했다. 그럼 그 사람은 뭐가 빠진 거예요? 뭐가 빠진 거라? 이게 바른 거고 좋은 거라고 할 것 같으면 묵묵하게 참고 나가야 됩니다. 띠띡카(titikkhā)라고 하는 것이 빠졌다는 거라.

그것이 마땅한 것 같으면 그게 내가 지금 해야 되는 일이 당장 급하고 죽을 만큼 급한 일이 아닐 것 같으면 좀 미루든지 다른 데로 융통성을 부리고, 이것이 나에게 선한 공덕을 짓고 실천하는데 도움이 된다 할 것 같으면 그냥 나와야 되는 거라. 묵묵하게. 오히려 그걸로 인해서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외부적인 자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욕한다고 하는 것은 고요한 마음을 유지해 나가는 거라.

그래서 이 2가지를 실천 수행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해나갈 경우에는 실천수행하는 자가 돼서 테라와다적으로 사는 겁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출가자·수행자처럼 살아라" 출가자처럼 살 수 있습니까?

(수행자 : 잘 안 됩니다.)

출가한 스님들도 그렇게 안 살고 살기 힘드는데, 재가자들이야 오죽하겠어?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여러분들은 여기서는 그냥 일반적으로 수행자라고 지칭할게요. 수행자처럼 살아야 됩니다. 수행자처럼. 그런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나쁜 일들을 저지르기 쉽다는 거라.

출가 수행자들은 어떻게 하게 돼 있어요? 어떠한 경우도 남을 해치는 일들을 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바른 걸 하더라도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한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거라. 죽이는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상처 주는 것들! 내가 이 말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저 사람이 상처를 입을 거 같다 할 거 같으면 하지 말아야 되는 거라 그게 아무리 바른 거라 하더라도.

 

그건 출가한 스님이 아니라도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 참 출가한 스님들도 이거 잘 못합니다. 그래서 지 고집 세우면서 끝끝내 합니다. 고집은 또 출가한 스님들이 얼마나 또 쎄? 두께가 자꾸 두꺼워지는 거라.
이것도 참 잘못된 방법인데, 그리하더라도 여러분들은 그 방법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모든 생명에 대해서 해를 주는 행위들은, 그리 해를 주는 일들은 만들지도 말고 행하려고도 하지 말아라. 조그마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그마한 벌레조차도 그 살 권리가 있고 행복할 권리가 있는 겁니다. 그걸 왜 내가 없애고 파괴하고 영향을 줄려고 하느냐는 거라. 얼마나 그게 나쁜 짓인데.

가끔씩 보면 남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났다 하면 그걸 어째 그러는지 몰라. 단점만 보이는지 몰라. 좋은 점만 보여도 뭐 할 판에 보면 이게 하여튼 안 좋은 것만 자꾸 눈에 보이는 거라. 근데 그마만큼 자기가 이미 마음에서 남에게 해를 주려는 마음들이 강하다는 거라. 만약 남에게 비난하는 것들이 굉장히 큰 악업을 짓는 거라고 하면 하겠어요? 얼마나 큰 건지 모르죠? 여러분들은.

 

한번 예를 들어 봅시다. 나 말고 다른 사람, 내가 만약에 비난을 했다. 그럼 비난받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겠어요? 악한 마음을 당연히 가지겠죠.

그러면 1차적으로 내 비난으로 인해서 나는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내 비난으로 인해서 저 사람에게 큰 악업을 짓게끔 하게 됩니다. 내가 원인을 지었어. 그럼 이거는 저 악업 지은 거는 내가 안 받을 것 같아요? 저건 여러분하고 관계없는 것 같아요?

업의 법칙은 그런 게 아닙니다. 업의 법칙은. 요걸 지었으니까 요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조건에 인해서 이런 결과들이 나오는 거고, 하나의 조건에 의해서 여러 결과들이 나오는 것들입니다. 업의 법칙은 절대 1대1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은 여기 이 사람이 지은 게, 쉽게 말하면 그냥 성질만 내고 말았다, 그럴 거 같으면 요만큼 내가 결과를 받겠지. 근데 이 사람이 그로 인해서 자기 목숨을 탁 끊어버렸다, 그럼 나는 어떤 결과를 받아요? 더 큰 결과를 받는 거라.

 

남의 것만 보더라도 내가 남을 비난하는 것으로 인해서 받는 것은 굉장히 큽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뭐라고 그랬어요? "남을 비난하는 것은 오역죄를 짓는 거 다음으로 큰일이다." 그럽니나. 오역죄는 여러분들이 거의 이생에서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여러들분 어머니 죽인 사람 있어요? 실제 살인해서, 아버지 죽인 사람 있어요? 지금 부처님 안 계시니까 부처님한테 상처 입히고 이런 것도 없습니다. 겨우 여러분들이 하는 거는 상가를 비방해서 그걸 갖다가 이간질시키는 거, 그거나 할까 나머지는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재가자들한테 상가에 대해서 관여하지 마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건데, 어쨌든 그걸 제외하고는 비난하는 죄가 그마만큼 크다는 거라.

그럼 나에게는, 나는 나는 비난하고 내는 마음이 좋아요? 그 싫어하는 마음들 또 그리고 비난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일으켰는데 그것들은 다 어떻게 할 건데? 이것들은 어떻게 발전돼 나갈 건데? 그래서 어떠한 경우도 남을 해치려고 하고 비난할려고 하는 것들은 하면 안되는 거라. 요마만큼 차도 딱 가라앉히라는 거라. 그게 출가자 같이 사는 것들이라. 그거 못하면 안 돼.

 

그다음에 또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이 여기는 이제 식사 부분으로 나오는데,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한 것들은 최소화 하라" 최소화. 출가한 스님들은 최소 조건이 뭡니까?

옷 세 벌입니다. 옷 세 벌 외에는 못 가지게 돼 있어요. 물론 여러 개가 있습니다. 근데 명목상으로는 내 것이 아니라. 넘의 거라. 그래서 옷 3벌 외에 다른 옷이 하나 생기면, 이 옷을 가 내한테 만약에 옷을 가사를 한 벌 줬다, 그러면 그 옷을 받고 입고 있던 이 옷을 상가에게 바쳐야 돼. 그러고 나서 상가에서는 그럼 니가 이걸 갖다가 관리하고 이걸 가지고 있어라 하면서 다시 또 줘요. 실제로는 사실은 지가 가지고 있는 건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놨을까?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 최소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먹는 거 입는 거 생활하는 것 모든 것들을 최소화시킬려고 해야 돼. 넘쳐나서 문제라. 넘쳐나서 문제지 모자라서 문제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최소화시키라는 거라. 만날 밥만 적게 먹으라는 게 아니고 최소화, 모든 의식주 부분들은 최소화하도록 하라는 거라. 그리고 나머지 생활하는 것도 최소화시키도록 자꾸 노력을 하라.

 

그 2가지만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출가자같이 그렇게 살게끔 됩니다.

이 조건들을 갖다가 채워야만이 적어도 테라와다적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여기서 아무리 위빳사나 수행하고 또 경전을 배우고 하더라도 테라와다 아니라. 알겠죠? 뭔 말인지. (예)

 

테라와다 불교를 배우는 목적이 뭐라고요?

마지막 23페이지, "우리가 배우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단순한 이해의 수준을 넘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

목적지가 뭐라고요? (수행자 대답 ...) 그렇지.

오늘은 또 시간이 오바됐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가 뭔지는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알도록 하고, 그 정체성을 벗어나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