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테라와다불교의 신행생활

테라와다 이야기 6- 재가불자 기본 5계

담마마-마까 2016. 8. 6. 11:53

 

“불교입문의 첫 관문이자 재가불교도의 지표”

삼장법사 빤냐와로 스님의 “테라와다 이야기” 10- 재가불자 기본 5계
“몸과 말의 행위에서 실수를 일으키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목적”

 

6. 오계(Pañca sīla)

-재가 불자의 기본적인 계

 

먼저 계와 율의 의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율(Vinaya)은 「반대 방향으로 이끈다」라는 의미입니다.
(vi 「반대 방향으로」+nayati 「이끄는, 인도한다」).
율은 세상의 일반적인 삶의 방법을 다른 방향으로 이끕니다.
세상에서는 「욕구나 분노도 때론 필요하다. 욕구가 있어야만 성공하고, 분노는 나쁜 놈이나 상대를 넘어 서기 위해서 필요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익을 위해서 약간의 거짓말은 괜찮고, 라이벌과 경쟁해야만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율은 그 정반대의 길인, 욕구나 분노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길입니다.

 

반면 계(Sīla)는 율(vinaya)을 실천하기 위한 항목입니다.
율(vinaya)을 항목으로서 받으면 계(sīla)가 됩니다. 계(sīla)는 마음이 번뇌로 더러워지지 않기 위한 행동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계는 실천하다, 봉사하다, 실행하다라는 의미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습관성, 경향성, 생활 등의 의미를 가져, 「좋은 습관성, 좋은 행위, 도덕적 행위」등의 의미에 이용됩니다.
그래서 계(sīla)는 자발적인 선한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기에 위반해도 벌칙이 없지만 행해야할 준수사항(caritta)입니다. 하지만 율(vinaya)은 위반했을 때는 벌칙이 가해지기에 삼가야 할 금지사항(varitta)입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지 않는 것」, 「오후에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계(sīla)이고, 거짓말하지 않는 것, 오후에 음식을 먹지 않는 것에 따라 자신을 도덕적으로 방어하는 것은 율(vinaya)입니다.
그래서 오계(pañcasīla), 팔계(dasasīla) 등에는 계(sīla)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지만, 출가자는 율(vinaya)에 의해 계목을 지키고, 율(vinaya)에 바탕을 둔 규칙에 의해 교단을 운영하는 것이기에 개개의 출가자는 보름마다 포살을 해야 하고, 우기에는 안거를 해야 하고, 규범에 따라 적당하게 식사를 해야 하고, 규정에 맞게 가사를 수하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pāṭimokkha(계목, 해탈하기 위해 올바르게 지키는 것)에 의한 방호(saṁvara)」를 하면 「안락의 경험」을 얻고, 그렇지 못하면 벌칙을 통한 참회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계(sīla)는 율(vinaya)의 항목이지만, 아무리 상황에 따라 항목을 달리해도 인간의 삶의 방법을 모두 항목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항목은 개인차나 시대에 의해서도 좌우됩니다.
그래서 계(sīla)는 상대적으로 세세한 항목은 시대나 장소, 개인차등의 여러 조건에 의해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vinaya)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율(vinaya)은 시대나 장소를 넘은 보편적인 것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사람은 「어떤 행위에 의해 마음이 더러워질까」라는 지혜가 있으므로 항목에 의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은 자신의 번뇌에 따라 판단해 버리거나, 다양한 핑계에 의해서나, 자신의 좋고 싫음에 따라 율을 바꾸어 버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율의 항목은 결코 바꾸어서는 안 된다」라고 결정하고 있습니다.

계율은 사람을 구속하고 불편하게 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입니다. 도덕적인 삶의 방법이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곤란하지 않고 침착하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도덕을 지키고 있으면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따라 행하라」고 말하며, 그런 것이 그야말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자신의 마음에 「사실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통제되지 않은 마음은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 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욕심 부리고 싶고, 술 마시고 싶고, 험담하고 싶고, 게으름 피우고 싶은 등 마음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부자유스럽게 되는 길입니다.
자유롭게 되고 싶다면 마음의 소리에 거역해 살아야 합니다.

 

도덕적 규율이라는 의미의 빨리어,「실라(계)」에는 3개의 단계가 있습니다.
① 내면적인 덕, 즉 상냥함, 만족을 아는 것, 순수, 성실, 인내력 등의 특징을 갖추고 있는 것
② 내면적인 덕을 밖으로 향해 나타내는 몸과 말에 의한 덕이 있는 행위
③ 도덕적 이상과 일치하도록 몸과 말에 의한 행동을 제어하는 행위 규칙

 

3개의 단계는 서로 서로 관련되어 있어 반드시 별개의 단계로서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굳이 구별한다면 각각의 계의 단계는 다음과 같은 역할을 이루고 있습니다.
① 「내면적인 덕」으로서의 계는 도덕적 규율을 지키는 훈련이 목표로 해야 할 「목표」
② 「몸과 말에 의한 청정한 행위」로서의 계는 「내면적인 덕」이라고 하는 목표를 밖으로 향해 「명시하는 것」
③ 「행위 규칙」으로서의 계는 「내면적인 덕」이라고 하는 목표를 실현하는 체계적 「방법」

 

그래서 「내면적인 덕」으로서의 계는 「몸과 말에 의한 행위」를 도덕적 이상과 일치시키는 것에 의해 유지됩니다. 게다가 「몸과 말에 의한 행위」라는 도덕적 이상과의 일치는 그러한 이상을 구체화하기 위한 「행위 규칙」에 따르는 것에 의해 실현됩니다. 경전에서 계에는 몸과 말에 의한 행위가 조화를 가져오는 특징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는 우리의 다양한 행위로 우리 자신의 진정한 이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을 가져오고, 보편적인 도덕과 일치시켜서 그러한 행위로 조화를 가져옵니다. 계에 반하는 행위는 죄악감, 불안, 후회 등을 특징으로 하는 자기 분열 상태를 일으키게 합니다. 그러나 계를 지키는 것으로 이러한 분열은 치유되어 우리의 내면의 기능은 균형 잡힌 통일 있는 상태로 이끕니다.

 

계는 인간관계에도 조화를 가져옵니다. 도덕적 원칙을 무시하면 경쟁, 착취, 공격 등에 의해 인간관계가 손상되지만, 계의 원칙을 구체화하려고 하는 행동은 평화, 협력, 상호 존중 등 사람과 사람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낳습니다. 계를 지키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조화는 사회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감각을 가지는 존재의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업의 법칙」, 즉 행위가 있으면 결과가 생긴다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고차원의 법칙과도 부합하기에 우리의 행동은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길을 걸으려면 그 기초로서 계를 몸에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침에서 보여 주신 가장 기본적인 계가 「오계」입니다.

 

재가자에게 일반적으로 추천하고 있는 계는 단 5가지입니다.
이 5가지는 부처님께서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할 도덕적 행위를 지혜의 눈으로 보고 나타낸 것입니다.
계는 반드시 스스로 자율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스스로 분명하게 마음으로 결정해서,
1. 나는 살생을 하지 않겠습니다.

2. 훔치지 않겠습니다.

3. 성적인 부도덕한 행위를 하지 않겠습니다.

4.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5. 술·마약 등을 취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지키며 살아보십시오.
그 정도만으로도 상당히 자유롭고, 마음 편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계를 지켜 올바른 생활을 하고 있으면 주위로부터도 「정직한 사람이다」라고 신뢰받게 됩니다.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러한 5가지의 계율을 기본으로 해서, 하나씩 항목을 늘려나가며, 자신의 마음의 약점을 관찰하고, 경고하도록 노력하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먹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식탐을 경고해 지키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잡담을 조심하는 등, 자신에게 맞은 계를 오계에 덧붙여 지켜 나가면 번뇌가 적게 일어나게 됩니다.

 

계는 몸과 말의 행위에서 실수를 일으키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마음은 위빳사나와 자애 명상 등의 수행에 의해 맑고 깨끗하게 해 나갑니다.
지혜가 생기기 위해서는 욕구에 휩싸인 생활을 경고해 번뇌를 약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에서는 계를 지키는 것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수행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계를 지키려는 마음이 일어나고, 계를 지키고 있으면 수행도 확실히 잘 진행되어 상호 상승관계가 형성되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살아가면서 마음의 성장이든 퇴보이든 반드시 어느 쪽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계는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기 위한 행동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계율만큼 사람에게 친절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먼저 기본이 되는 오계는 불교 입문의 첫 관문이며, 오랫동안 재가 불교도의 지표로 여겨져 왔습니다. 담마빠다(법구경)에 오계에 관한 표현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거짓을 말하고, 세상에서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고,
   다른 사람의 아내를 범하고, 곡물주·과실주에 탐닉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뿌리를 파헤쳐서 무너뜨리는 사람이다<246, 247게송>.」

또한 숫따니빠따(결집)의 담미까경에서도 오계나 팔계의 원초적인 형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394) 산 것을 (스스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 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죽이는 것을 용인해서도 안 된다. 세상의 식물이건 동물이건 폭력을 두려워하는 모든 존재에 대해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
  (395)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또 어디에 있든지, 그것을 취하지 말라. ···(생략)
  (396) 지혜로운 자는 음행을 삼가하라. ···(생략)
  (397) 모이는 장소에 있든, 무리가운데 있든, 어떤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된다. ···(생략)
  (398) 또한 술을 마시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생략)」

 

경전에 따라 그 순서가 일정하지 않는 것은 아직 계나 율의 이념이 확립하기 이전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계는 언제쯤 어떻게 정착한 것일까요? 자이나교 등의 비교를 통하여 보면,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어 간 불교 교단의 통일과 목적의식의 확인을 위한 방법으로서 결의의 고백이나 확인, 일상 행위의 반성을 위한 의식인 포살의 원형이 먼저 정해져 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것은 이윽고 출가자의 여러 가지 수계나 참회의 의식으로 정형화 되어 가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재가자를 위한 간소한 오계가 정해져 그것이 확정되어 나갔을 것입니다. 즉, 교단의 급격한 팽창에 따라 출가자 계율의 항목 정비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거기에 상응하여 오계는 상대적으로 재가자의 기본적인 계로서 정착해 갔을 것입니다.

 

Pañca sīla(빤-짜 실-라)란 오계를 말하는데, 불교도의 기본적인 계입니다.
이것을 왜 기본적인 계라고 말하는가 하면, 먼저 삼보에 귀의하는 삼귀의 삼창을 한 후에는 이 오계를 받는 것으로 실질적인 불교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찰에 정기적으로 보시를 한다든지 혹은 어떤 종교단체의 회원이 되었다고 해도 불교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이해한 다음」스스로 삼보에 귀의하여, 삼귀의문을 세 번 독송하고 오계를 받았다면 그 사람은 불교도입니다.

 

오계는 불교도이면 모름지기 받아 지녀서 항상 지켜야 할 것이기에 오계를 상계(Nicca sīla, 常戒)라고 말하기도 하고, 존중하고 공경하며 주의 깊게 지켜야 할 것이기에 경법계(Garudhamma sīla, 敬法戒)라고도 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오계는 재가 불교도로서의 근본적 행동 지침이며 덕목입니다.

 

누군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의 고귀한 가치를 안다면 존경하는 스님께 나아가 삼귀의와 오계를 받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러한 스님과의 인연이 없다면 불상이나 불탑 앞에서 스스로 삼귀의를 삼창하고 스스로 오계를 받으면 좋을 것입니다. 물론 스님으로부터 직접 받고 그리고 설법을 듣고, 질문이 있으면 묻는 것이 가장 좋지만, 오계를 반드시 스님으로부터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계는 그것을 어떻게 받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 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해 나가느냐하는 것이 요점입니다.

 

이 사바세계를 살면서 단 5가지의 계를 지키는 것도 의외로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은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을 때도 있고, 본의 아니게 잘못을 범해 버릴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한 다음, 계를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계를 지키느냐 아니냐는 단적으로 말하면 노력하는 사람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노력이 올바르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지만, 이 오계는 지키려고 노력한 만큼의 좋은 결과를 그 사람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뜻밖에 얻어지는 요행이란 없습니다.

 

사람은 좋게도 나쁘게도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시시각각 변화해서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어떻게 바뀌어 왔습니까? 흐름을 바꾸는 것은 대단한 의지와 실천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업의 폭풍에 등 떠밀려 혼탁한 흐름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청정수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흐름은 갑자기 간단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저항할 수는 있습니다. 「자신을 바꾸자」 「행복하게 되고 싶다」고 강하게 바란다면, 그 폭풍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록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악한 일을 많이 했다고 해도 좋은 방향으로 좋게 바뀌는 것은 가능합니다.
계를 받아 그것을 지키려고 날마다 노력하고 힘쓰는 첫 관문이 오계입니다.
그처럼 사는 사람이 불교도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