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테라와다불교의 신행생활

테라와다 이야기 3- 빠릿따와 불교 의례

담마마-마까 2016. 8. 6. 11:46

 

“빠릿따, 일체중생을 보호하는 게송”

삼장법사 빤냐와로 스님의
“뜻도 알 수 없고 신비스런 일들이 일어나길 바라는 다라니와는 달라”

 

 

3. 빠릿따와 불교 의례

 

빠릿따(Paritta:보호경 혹은 보호게송)는 옛부터 동남아시아 불교국가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는데, 버마에서는 빠레이(Pareit)·빠레이지(Pareitkyi), 태국에서는 빠릿(Paarit), 라오스에서는 프라빠릿(Phraparit), 스리랑카에서는 삐릿(Pirit)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사람들이 위험이나 불안을 느꼈을 때, 그것을 가져오는 여러 현상에 대해서 방어하고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빠릿따」본래의 의미이기에 「보호」혹은 「방호」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테라와다 불교도들은 일반적으로 일상 독송되는 경전류를 가리켜 말하며, 우리나라에서는 「호주」혹은 「호경」이라는 역어가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빠릿따는 경전의 성구집인 담마빠다(법구경) 제40게송의 인연 이야기에서도 소개되고 있습니다.(Dhp-U.p50 참고).


이러한 것들로부터의 보호는 빠릿따를 암송하거나 듣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 빠릿따 중에서 소리 내어 읽는 경전이나 게송의 종류, 가짓수는 그 시대, 나라, 지역, 각각의 사원, 요일 등에 따라서 다릅니다. 보통 버마에서는 11가지의 경을, 태국에서는 24가지 경을, 스리랑카에서는 20가지 경을 각 요일별로 나누어 독송합니다. 대표적인 보호경과 보호게송은 길상경, 보배경, 자애경, 전법륜경 등과 승리의 길상게송, 네 가지 보호 게송, 분소의 게송 등입니다. 이들 경과 게송들은 빨리어로 전해져 온 경장의 일부를 발췌해서 구성된 것으로 비교적 짧은 것뿐입니다.

 

또한 비구들만의 경우에는 「상가의 9가지 덕」게송의 끝에 「계율독송」이 있어서 227계를 각 요일별로 나누어 독송하기도 합니다.

 

빠릿따를 독송하는 시간은 아침 식사 전과 취침 전, 약 30분간 독송합니다.


소리 내어 읽을 때 주의할 점은 주로 다음의 4가지입니다.

 

①장음과 단음 등을 잘못되지 않게 독송한다.
②경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독송한다.
③경을 듣는 사람들에 대하서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독송한다.
④흥에 겨워 노래하듯이 독송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기쁨과 행복이 일어나게 독송한다.

 

빨리어의 발음에 대해서는 같은 테라와다 불교국들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기에, 그것보다 중요한 점은 경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들 빠릿따는 알 수 없고 신비스런 고대문자가 아닙니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 신비한 힘이 나오는 신령스런 주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용을 알지 못하고 외우기만 하여 독송하면 효력이 적습니다.


아미타경 염불도 원래는 붓다 완다나(Buddha vandanā, 붓다 예경)로 붓다의 덕을 떠올리는 것이 점점 변화해 간 것입니다.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청청하게 되기에, 대승불교의 염불이나 진언에 의미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에는 소리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침착하게 하는 효과는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소리뿐만 아니라, 더하여 훌륭한 의미가 있는 게송이면 더욱 좋고, 그 의미를 알면서 독송하면 더 더욱 좋고, 독송하는 분의 마음에 자비심이 충만하여 일체 중생들에게 자애와 연민심을 일으키면서 독송하면 최상이라는 것이 테라와다 불교의 입장입니다.

 

이러한 빠릿따는 독송하기 전에 (먼저) 귀경게송 및 삼귀의 삼창문등의 귀의문을 독송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들 빠릿따를 테라와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 혹은 요행을 바라지 않는 부처님의 말씀 그 자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빠릿따로 독송되는 것의 내용은 진실하고, 그 독송하는 게송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말과 완전히 같기에, 부처님의 육성 그 자체이기에, 더욱 더 강력한 공덕을 갖춘다고 여겨져, 이것을 독송하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이익과 가호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원전 2세기 중순경 인도 북서부에 침입한 그리스 왕 Menandros(메난드로스)와 불교승려 Nāgasena(나가세나)와의 대화를 전하는 Milindapañha(밀린다빤하, 나선비구경)라는 경전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커다란 공덕이 있는 빠릿따의 이름 여러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Ratana sutta(보배경), Metta sutta(자애경), Khandha paritta(오온 보호경), Mora paritta(공작새 보호경), Dhajagga paritta(뛰어난 깃발 보호경), Āṭānāṭiya paritta(과거칠불 보호경), Aṅgulimāla paritta(앙굴리말라 보호경)이 그것입니다.


이 경은 지금부터 약 2200년 전의 당시부터 부처님의 말씀이 「빠릿따」로서 이용되고 있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동남아시아의 불교도들에게는 스님이 아니라도 어릴 때부터 가정이나 지역 등에서 친밀하게 접하여서 소리 내어 읽고 있기 때문에 그 빠릿따의 대부분을 암송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만 빠릿따는 빨리어라는 고대어로 전해져 온 것들에서 선별한 것이기에 특별히 공부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의미들을 알아 이해하는 것을 장려하고는 있지만, 그러한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는 지역차이나 개인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공덕을 얻기 위해 경전을 날마다 열심히 암송하고는 있지만 그 의미는 모른다, 다만 전통이나 관습으로 하고는 있지만 어느 때 독송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모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여야 하며, 나쁜 일없이 길상이 있음·원하는 것을 이룸·병의 쾌유 등 그 사람이나 단체의 바라는 마음과 목적에 따라서 알맞은 빠릿따를 독송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테라와다 불교도마다 각각 관습이나 형식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여러 가지 통과의례, 예를 들어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갓난아기의 축복, 자신의 생일, 결혼식, 장례식, 혹은 집이나 가게의 신축·개축에 따르는 의례 등에서 빠릿따를 독송하는 것은 불교도에게 있어 빠뜨릴 수 없는 행위가 되고 있습니다.

 

재가자들에게 있어서 빠릿따를 독송하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을 가지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선한 공덕을 쌓기 위한 행위, 종교적 수행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보다 좋은 다음 세상이나, 스스로의 마음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만 이 빠릿따가 행해진다고 볼 수 없고, 자신의 세간적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이른바 현세 이익을 바라는 부분도 있습니다. 아니 이것들이 혼연 일체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족, 친지들, 지역의 불교도와 함께 독송되는 빠릿따는 재가자에게 있어서 불교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불교라고 하는 종교가 신앙이 되어 세대를 넘어 전해지는데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불가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재가자들은 보호게송의 목적뿐만 아니라 소원을 실현하기 위한 게송으로도 독송하고 있지만, 출가 수행자에게 있어서 빠릿따는 율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위험을 피하기 위한 보호게송과 같은 것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또 빠릿따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편한 형태로 기억해서, 확인하는데도 유용한 것이며, 불교의 포교 수단이나 승려의 개인적 수단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되어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를 신앙해 온 여러 나라에서는 빠릿따를 행할 때 여러 가지 의례를 실시합니다.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그리고 스리랑카에서는 성수(聖水) 의례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빠릿따를 독송할 때나 끝난 후에 발우에 담겨진 물을 푸른 잎이 붙어있는 가지를 이용하여 신도들에게 흩뿌려 주는 것입니다.

 

또한 스리랑카에서는 이것에 더해 Pilitt-Pan(삐릿 빵)이라는 성수 의례(聖水儀礼)와 Pilitt-Nula(삐릿 누라)라는 성실 의례(聖糸儀礼)를 행하고 있습니다. 삐릿(빠릿따)을 소리내어 읽음에 의해 「특별히 성스러움을 더했다」라는 물(삐릿 빵)을 조금 입에 넣게 하거나 몸에 뿌리거나 하고, 성스러워진 흰 실(피릿트·누라)을 신도의 오른손목에 감아 메어줍니다. 정식적 빠릿따 의례의 뒤에 삐릿 누라가 그 오른손에 휘감겨지지 않으면 신도들이 납득하지 않을 정도로 스리랑카에서는 일반적인 관습이 되어 있습니다.


간혹 그 실을 어린 학생들(때로는 사미승)의 맨몸 왼쪽 어깨로부터 어깨띠를 두르듯이 걸치게 하는 일도 행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어깨띠는 바라문교에서 규정하는 4주기의 맨 처음 주기인 학생기에 접어드는 입문식이라고 할 수 있는 Upanayana(우빠나야나)라는 종교 의례에서 바라문 카스트에 속하는 8~16세 정도의 아이에게 정식으로 바라문이 된 것을 인정하는 표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신이 바라문인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가 되는데, 그것을 하사받는 것도 하사할 수 있는 것도 바라문에게만 허용되는 행위입니다.


스리랑카에서도 카스트제(자띠)가 인도와 같이 강하게 남아 있지만, 인도와 달리 바라문 카스트는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 교단에서는 있을 수 없는 카스트에 의한 출가 차별이 근대(약 250년 전)에도 이루어져 교단이 형성되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스리랑카의 삐릿 누라는 현재의 인도에서 힌두교 시바파의 바라문이나 사두(고행자)가 행하고 있는데, 신도의 오른손목에 실을 휘감는 것은 같습니다. 스리랑카에서는 승려를 사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실을 불교에서는 흰색만 사용하고 힌두교에서는 오렌지색이나 붉은색의 실이 이용됩니다.

 

덧붙여서 스리랑카에서는 힌두교에서 이용되는 만다라나 다라니와는 달리 부처님의 상호가 그려진 그림이나 빠릿따에서 사용된 성유 등을 놋쇠나 동으로 만든 작은 원통에 넣어 이것에 흰색 끈을 묶어 목에 걸치거나 발목, 팔목 등에 감는 일도 일반적입니다. 이것도 삐릿 누라와 같이 재난을 없애고, 악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병으로부터 자유로워 평화롭기를 바라는 부적과 같습니다.

 

밤새도록 빠릿따 의례를 행하는 특별한 때에 빠릿따를 독송하는 경우는 특별한 간이 시설을 만들어, 그곳에 여러 가지 장식을 하고 그 안에서 독송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대형 돔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Maṇḍapa(만다빠, 천막)라고 말하는데 삐릿에 사용하므로 Piritt Maṇḍapa(삐릿 만다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 남인도 힌두사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정자형태의 건축물인데 스리랑카에서 영향을 받아 의례에 수용한 듯합니다. 삐릿 의례를 진행하는 작법은 결정되어 있어서 이것에 어긋나면 스리랑카 장로에게 야단을 맞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스리랑카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스리랑카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삐릿 의례 중에는 등불공양, 향공양, 꽃공양, 청수공양, 음식물공양, 공물이라는 6종류의 공양(육법공양) 올리는 게송도 있습니다.

 

그러나 버마에서는 빠릿따를 소리 내어 독송하는 것에 따르는 특별한 의례인 성수 의례나 성실의례는 특별히 행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덧붙여 회향에 관련되어 실행하는 의례 행위는 동남아시아 모든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상가에 보시를 행한 후, 비구들이 경문을 독송하는 동안, 이 공덕이 자신 만의 것이 아니라 가족·친지·돌아가신 분·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 두루 가득 차고 흘러넘치기를 바라면서, 보시자는 작은 병에 넣어진 물을 작은 그릇에 끊이지 않게끔 따릅니다. 이것은 또한 라오스에서는 스님이 탁발을 나가면 재가자들이 도로가에서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장례식에서는 모든 나라에서 돌아가신 분을 위한 공덕회향 의식으로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례를 실행하는 것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비불교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험이나 재난 등을 피하기 위해서 비구가 어떤 보호게송을 이용하는 것은 부처님께서도 허용하셨습니다. (율장에 있어서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보호게송의 독송을 허락한 일화에 관해서는 ”Khandha sutta”를 참조하십시오.)

 

또한 만약에 이런 의식이나 의례적인 행위 없이 불교가 2600년이란 시간을 흘러 현재에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도 생각해봅니다. 각 지역의 풍습이나 문화를 어느 정도 수용했다고 해도 불교의 본질은 바뀔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런 의례에 치우쳐서 결과적으로 무늬만 남은 불교가 되었다거나, 완전하게 변형해 버린 경우는 생각해 볼 부분입니다.

 

살펴본 것처럼 빠릿따는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비의 힘으로 독송하게 되면 자신을 보호하고, 모든 중생을 보호하는 보호게송이 됩니다. 업장을 소멸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가려 뽑은 빠릿따는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스스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지, 뜻도 알 수 없고 신비스런 일들이 일어나길 바라는 다라니가 아닙니다. 내용을 알고 외우고 독송하고 실천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가진 것에 만족하고, 바르게 노력하고, 수행하기를 즐기고, 늘 지금 현재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알아차리면 그것이 최상의 빠릿따입니다. 항상 알아차림하면 자신과 이웃을 보호하는 빠릿따가 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