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테라와다불교의 신행생활

테라와다 이야기 5- 삼귀의 삼창

담마마-마까 2016. 8. 6. 11:51

“부처님께선 귀의를 권하지 않으셨다”

삼장법사 빤냐와로 스님의 “테라와다 이야기” 9- 삼귀의 삼창
“담마(진리)와 상가(성자들)야말로 가장 안전하고 훌륭한 의지처”

 

 

5. 삼귀의 삼창

 

부처님께서는 모든 생명에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왜 괴로워하고 있는지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없애는 방법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이제 해야 할 일을 전부 다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이룹니다.
깨달음을 이루고 나니 기쁨이 솟아올라 아무것도 불만족함도 없고, 저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도 없어서, 그대로 앉은 채로 일주일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또 일주일간은 보리수 옆에 서서 선 그대로 일주일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또 일주일간 선 장소와 앉아 있던 장소와의 사이를 경행하시며 보냈습니다.

 

4주째가 되자 보리수로부터 조금 떨어진 장소에 앉아 세상의 진리라는 것은 무엇인지 관찰했습니다. 부처님이 설법할 때의 그 거대한 철학이 언어가 된 것은 그 일주일간의 관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과 법칙, 인간의 마음 상태, 존재의 상태, 물질의 기능, 무엇으로 이런 기능이 일어나는지, 마음은 어떤 기능이 있는지, 몸은 또 어떤 기능이 있는지 그것을 전부 명확하게 관찰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말하면 아비담마론을 그 때 처음으로 부처님이 생각해 냈습니다. 세상의 진리를 그 때 일단 정리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그처럼 7주간을 보내셨습니다. 7주간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49일간을 일부러 단식한 것이 아니라, 별로 그런 기분도 없었습니다. 채워져 있는 기분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힘든 단식을 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다고 야윈 것도 아니고, 아무 일도 없이, 아무튼 깨달음의 그 반응, 반동으로 7주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명상만 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발우를 하나 받았습니다. 출가자이기에 발우라고 해도 흙에서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발우를 받았으니, 그럼 이제 무얼 먹어도 괜찮다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 근처에 장사하러 가던 상인 두 사람이 부처님이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훌륭한 모습을 보고, 출가자에게 보시할 마음이 생겨 음식을 공양 올렸습니다. 음식이라고 해도 쌀을 볶은 팝콘같은 것에 벌꿀을 발라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붓다가 된 후에 최초로 받은 식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받은 보답으로 그 두 명에게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인도의 문화에서는 출가자에게 여러 가지 보시를 할 뿐이지, 그 보답으로 출가자로부터 가르침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출가한 사람이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고, 아직 수행을 한참 할 때인지도 모르고, 때로는 수행을 통해 전혀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출가자는 여러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고, 여러 가지 종교가 있기에, 자신의 수행으로 인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고 결정한 사람이면 이쪽이 여러 가지 보시를 했다고 해도, 식사를 하고 돌아갈 뿐이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보시한 대가로 설법해 주기를, 축복해 주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보시를 하고, 공양을 올립니다. 그 뿐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두 명은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대단히 도움 되는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두 명은 이 진리를 납득하고, 그 자리에서 오늘부터 당신을 스승으로 하여 당신을 의지합니다. 오늘부터 당신의 가르침을 우리들의 삶의 방법으로 하여 우리들을 이끄는 법으로 삼아서 당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부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이 가르침에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2행이 성립되었습니다.

 

그 두 명은 먼 곳에 있는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을 매일같이 생각하고, 가르쳐 주신 고귀한 가르침을 실천하고 싶기에, 부처님을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달라고 했지만, 부처님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선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머리를 손대어 보니 이전에 굉장한 고행을 했기에 머리카락이 떨어졌습니다. 그 머리카락을 조금 취해서 이것이라도 가져가라고 머리카락을 살그머니 잡아 줬습니다. 그 두 명의 상인은 그 머리카락도 소중하게 보관하여 수완나부미라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수완나는 황금이라는 의미이고, 부미는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이 황금의 나라인 수완나부미가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버마인은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태국인도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도 자신들의 나라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빨리어 경전과 주석서에 불교가 전래된 장소 중에 수완나부미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기록이 사실이라면 수완나부미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곳에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안치하여 탑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각각의 지역에서는 수완나부미라고 주장할만한 탑과 유적지가 존재합니다.

 

어쨌든 전설적인 이야기같이 들리겠지만, 부처님이 두 명의 상인으로부터 공양을 받아 드시고 그 보답으로 머리카락을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들 나라에서는 그 이후로 부처님을 각별하게 친족같이 여기게 됩니다. 부처님께 처음으로 보시를 한 것은 자신들의 선조이기에 친근감을 가지고 불교를 몹시 소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버마 사람들도, 태국 사람들도, 스리랑카 사람들도 불교라는 것을 소중하게 생명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스리랑카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서 어째서 그렇게 지키려고 노력했는가하면,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제석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의 가르침이 번성하게 될 곳은 단바빤니라는 섬입니다. 그러기에 당신은 그 섬을 분명히 잘 지켜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리랑카 사람들은 부처님께서도 자신들에게 기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불교를 잘 지키려고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어느 나라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버마 사람들도, 태국 사람들도, 스리랑카 사람들도 자신들이 부처님과 제일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의 감정이기에 그대로 놓아두어야겠습니다.

 

 

다음으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할 결심을 하시고, 바라나시로 가서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설법했습니다. 많은 날이 지나서 그 다섯 명도 깨달음을 이루었기에, 부처님도 즐거워졌습니다. 쭉 함께 지내온 이 다섯 명도 깨달았기에 밤에 잠을 자지 않고도 밖에서 이슬을 맞으며 앉아 수행하셨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은 당분간 편안한 삶의 방법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큰 일이다라든지, 그러한 소소한 스트레스도 압박감도 없습니다. 있으면 먹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루벨라라는 지방의 큰 부잣집 외아들이 가출을 해 버렸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구나! 이 형무소와 같은 삶의 방법으로는!」무서운 말입니다.
그에게는 굉장히 큰 집이 3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출가 전 부처님과 같이 계절에 맞추어 하나의 성에서 지내다가 계절이 바뀌면 그 계절에 맞는 다음의 성으로 가서 지내는 것인데, 여름용과 겨울용과 우기용으로 나누어 거기서 놀면서 생활합니다. 그런 생활에 이제는 완전히 질려 버린 것입니다. 물질은 불안정한 것이기에 아무리 사치를 부려도 질려 버립니다.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은 돈이 많아도, 영화를 누려도 행복하질 않습니다. 그 젊은이도 똑같이 질려 버렸습니다. 이런 삶의 방법은 아무 의미도 없어서 밤에 모두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살그머니 집을 나왔습니다.

한 밤중에 외아들이 없어진 사실에 큰 소란이 일어났고, 부친도 아들은 찾아다니다가 아들이 신던 짚신과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아침이 되면 볼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부친은 그 발자국을 따라 나아갔습니다.

 

밤에 가출한 아들은 정처 없이 걸으며 「내가 살던 저 집이 불타고 있다. 나의 집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집이라고 하는 것, 가족이라고 하는 것이 산불과 같이 불타고 있는 곳에서 이제 도망칠 수밖에 없구나!」라고 읊조립니다. 그렇게 밤새 걸어 부처님이 계신 곳까지 갔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청년을 불렀습니다.「젊은이! 여기로 오시오」「이쪽에 오면 평온함이 있다오!」
그 이야기를 들은 청년은 부처님에게 갔습니다. 그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어준 후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는 그 말씀을 듣고 첫 번째 예류과 상태에 이릅니다. 진리를 발견했기에 마음의 불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일어난 마음의 불이 사라지지 않은 부친도 아들의 발자국을 쫓아 부처님께서 계신 곳까지 옵니다. 아들이 사라져서 불타고 있는 부친의 눈에는 부처님 뒤에서 명상하고 있는 아들이 보일 리 없었습니다. 「이 근처에 젊은 사내 녀석이 오지 않았습니까? 그 녀석이 저의 아들입니다. 왔는지요?」그렇게 말하자 부처님께서는 「예! 그쪽에 앉으세요. 만나도록 해드릴 테니 침착하세요.」그렇게 말하자, 아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앉았습니다. 앉아서 부처님과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버님이 너무 엄격한 것은 아닌지, 너무 호사스럽게 키운 것은 아닌지, 너무 귀하게만 여긴 것은 아닌지, 애정도 지나치면 지옥과 같고, 나라는 것이 없는데 나의 자식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 집착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고 이야기하며 부친에게 설법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부친도 삶의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 부친도 깨달아 버립니다. 예류과에 이릅니다.

 

그동안 부처님 뒤쪽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던 아들은 최종적인 깨달음까지 얻게 됩니다. 아라한이 되어 버립니다. 그제야 부처님이 아들을 불러 아버님과 대면시킵니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부친의 말에 미소만 짓고 있는 아들을 보면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은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진리를 완전하게 이해하여 번뇌가 없는 훌륭한 성자가 되었습니다.」「당신 아들은 이제 재가 생활에 어울리지가 않습니다.」그렇게 말하자 부친도 깨달은 바가 있어서 「나도 이제 나의 아들로 인해 받는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알았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저만 돌아가겠습니다.」라고.

 

그런 후「 나는 오늘부터 나의 지도자로서 선생님으로서 부처님에 귀의합니다.」「오늘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아 보겠습니다.」「부처님의 제자들도 훌륭한 성자들이기에 그들로부터도 지도를 받겠습니다. 그러한 상가에도 귀의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삼보에 귀의했습니다. 그래서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라는 삼귀의에 의해 재가자가 되었습니다.

 

 

삼귀의가 성립된 것은 불교의 역사에서 이처럼 오래되었습니다. 부처님이 강제적으로 따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재가자 스스로 자신의 의지에 의해 삼귀의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식 자유입니다. 명령하는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신이 명령합니다. 「내가 유일한 신이다. 나만 섬겨야 하고, 다른 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부처님은 나에게 귀의하라고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낭패를 당할 것이라든지, 질투할 것이라든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에게 있어서는 믿고 싶어서 믿어도 좋고,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않아도 좋은 것, 아무래도 좋은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것이 인간의 길이다」 「이 가르침이 진리다」 「이 사람들은 진리를 정말로 체험하고 있다」라고 이해해서 그러한 삼보에 귀의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자신의 의지로 삼귀의를 합니다. 삼귀의를 스님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나중에 생겨난 습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과 괴로움이 생기면
산이나 나무들이 우거진 숲 
교원이나 무당집 등을 찾아
그곳을 의지처로 삼으려고 한다.
 
그런 곳은 안전한 의지처가 아니며
가장 훌륭한 의지처도 아니고 
설사 그런 곳을 의지처로 삼더라도
우리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든지 붓다(부처님)와
담마(진리)와 상가(성자들)를 의지처로 삼으면
그는 올바른 지혜와 통찰력으로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깨달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의지처이며
가장 훌륭한 의지처이다.
비로소 이런 곳을 의지처로 삼을 때
우리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붓다 담마 상가는 그 비할 수 없는 청정함 때문에, 그리고 불교도들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대상이기 때문에 ‘세 가지 의지처’라고 불립니다. 불교도들이 삼보를 자신의 삶과 수행의 안내자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을 공인하고 다시금 확인하는 말을 통해서, 이 세 가지 보배는 불교도들의 ‘세 가지 의지처’가 됩니다.
이런 세 가지 보배에 의지처를 구함으로부터 불교도로서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모든 불교도는 마땅히 삼귀의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삼귀의는 출발점이며 동시에 귀결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빨리어로 된 삼귀의는 부처님 당시나 지금 이 시대나 여전히 똑같은 형식으로 암송되고 있습니다.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붓다(부처님)를 의지처로 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담마(가르침)를 의지처로 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상가(성스러운 제자들)를 의지처로 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이 삼귀의를 세 번 암송하는 간단한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 불교도임을 천명합니다.

 

붓다, 담마, 상가의 삼보에 대해 귀의의 뜻을 표명하는 일, 즉 삼귀의가 불교교단의 의식으로서 채택된 것은 이와 같이 부처님이 법을 설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이제 저는 부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담마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상가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를 재가신자로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시작하여 이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삼보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이것이 처음으로 삼귀의를 표명한 재가 신자의 게송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불교인의 가장 엄숙한 종교적 심성은 부처님 재세 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해 진심으로 우러나 삼귀의를 부를 때처럼 잘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볼 때, 불교의 가장 종교적인 한 면은 이 삼귀의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런 삼귀의를 할 때는 엎드려 절을 하며 예경합니다.
그래서 절은 예경을 나타내는 도구입니다.
또한 절은 수행의 도구입니다. 경행 수행으로 마음에 활기를 불어 넣어줘야 할 시간이 없거나, 바로 좌선 수행으로 들어갈 때 이와 같은 절을 먼저 합니다.

절하는 법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합장  
 무릎을 꿇고 양손을 합장한 상태라고 가정, 
  ① (합장한 두 손을 머리로) 올림. 올림. 올림
  ② (이마에) 닿음. 닿음. 닿음 (합장한 엄지손가락이 이마에 닿음)
  ③ (두 손을 아래로) 내림. 내림. 내림
  ④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2) 공경
  합장한 상태에서 붓다에 공경의 예를 표하는 절을 시작합니다.
   ① (몸을) 구부림, 구부림, 구부림
   ② (오른손을) 내림. 내림. 내림
   ③ (오른손이 바닥에) 닿음. 닿음. 닿음
   ④ (오른손바닥을 바닥에) 덮음. 덮음. 덮음
   ⑤ (왼손을) 내림. 내림. 내림
   ⑥ (왼손이 바닥에) 닿음. 닿음. 닿음
   ⑦ (왼손손바닥을 바닥에) 덮음. 덮음. 덮음 (오른손과 왼손사이 바닥에 머리가 닿게끔 간격을 잘 유지합니다)
   ⑧ (몸을) 구부림. 구부림. 구부림
   ⑨ (바닥에 머리가) 닿음. 닿음. 닿음

 

 (3) 예배
  몸을 바닥에 구부린 상태에서 알아차리면서 서서히 꿇어앉은 자세로 돌아옵니다.
   ① (몸을) 일으킴. 일으킴. 일으킴
   ② (오른손) 돌림. 돌림. 돌림
   ③ (오른손을 가슴으로) 올림. 올림. 올림
   ④ (오른손엄지가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⑤ (왼손) 돌림. 돌림. 돌림
   ⑥ (왼손을 가슴으로) 올림. 올림. 올림 
   ⑦ (왼손엄지가 가슴에) 닿음. (양손바닥이) 닿음. 닿음 
  
(4) 합장  
  ① (합장한 두 손을 머리로) 올림. 올림. 올림
  ② (이마에) 닿음. 닿음. 닿음 (합장한 엄지손가락이 이마에 닿음)
  ③ (두 손을 아래로) 내림. 내림. 내림
  ④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5) 공경
  합장한 상태에서 담마에 공경의 예를 표하는 절을 시작합니다.
   ① (몸을) 구부림, 구부림, 구부림
   ② (오른손을) 내림. 내림. 내림
   ③ (오른손이 바닥에) 닿음. 닿음. 닿음
   ④ (오른손바닥을 바닥에) 덮음. 덮음. 덮음
   ⑤ (왼손을) 내림. 내림. 내림
   ⑥ (왼손이 바닥에) 닿음. 닿음. 닿음
   ⑦ (왼손손바닥을 바닥에) 덮음. 덮음. 덮음 (오른손과 왼손사이 바닥에 머리가 닿게끔 간격을 잘 유지합니다)
   ⑧ (몸을) 구부림. 구부림. 구부림
   ⑨ (바닥에 머리가) 닿음. 닿음. 닿음

 

(6) 예배
  몸을 바닥에 구부린 상태에서 알아차리면서 서서히 꿇어앉은 자세로 돌아옵니다.
   ① (몸을) 일으킴. 일으킴. 일으킴
   ② (오른손) 돌림. 돌림. 돌림
   ③ (오른손을 가슴으로) 올림. 올림. 올림
   ④ (오른손엄지가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⑤ (왼손) 돌림. 돌림. 돌림
   ⑥ (왼손을 가슴으로) 올림. 올림. 올림 
   ⑦ (왼손엄지가 가슴에) 닿음. (양손바닥이) 닿음. 닿음 
  

(7) 합장   
  ① (합장한 두 손을 머리로) 올림. 올림. 올림
  ② (이마에) 닿음. 닿음. 닿음 (합장한 엄지손가락이 이마에 닿음)
  ③ (두 손을 아래로) 내림. 내림. 내림
  ④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8) 공경
  합장한 상태에서 상가에 공경의 예를 표하는 절을 시작합니다.
   ① (몸을) 구부림, 구부림, 구부림
   ② (오른손을) 내림. 내림. 내림
   ③ (오른손이 바닥에) 닿음. 닿음. 닿음
   ④ (오른손바닥을 바닥에) 덮음. 덮음. 덮음
   ⑤ (왼손을) 내림. 내림. 내림
   ⑥ (왼손이 바닥에) 닿음. 닿음. 닿음
   ⑦ (왼손손바닥을 바닥에) 덮음. 덮음. 덮음 (오른손과 왼손사이 바닥에 머리가 닿게끔 간격을 잘 유지합니다)
   ⑧ (몸을) 구부림. 구부림. 구부림
   ⑨ (바닥에 머리가) 닿음. 닿음. 닿음

 

(9) 예배
  몸을 바닥에 구부린 상태에서 알아차리면서 서서히 꿇어앉은 자세로 돌아옵니다.
   ① (몸을) 일으킴. 일으킴. 일으킴
   ② (오른손) 돌림. 돌림. 돌림
   ③ (오른손을 가슴으로) 올림. 올림. 올림
   ④ (오른손엄지가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⑤ (왼손) 돌림. 돌림. 돌림
   ⑥ (왼손을 가슴으로) 올림. 올림. 올림 
   ⑦ (왼손엄지가 가슴에) 닿음. (양손바닥이) 닿음. 닿음
   ⑧ (합장한 두 손을 머리로) 올림. 올림. 올림
   ⑨ (이마에) 닿음. 닿음. 닿음 (합장한 엄지손가락이 이마에 닿음)
   ⑩ (두 손을 아래로) 내림. 내림. 내림
   ⑪ (가슴에) 닿음. 닿음. 닿음
   ⑫ (합장한 채 몸을 앞으로) 구부림. 구부림. 구부림
   ⑬ (합장한 채 몸을 똑바로) 세움. 세움. 세움

 

(1.~5. 복습 및 시험문제)

 

(1). Vandanā(귀경게)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3번)
「그 분, 존귀하신 분,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께 예배드립니다.」

 

 

붓다에의 믿음 표명
Vandanā(완다나-)란 「인사」혹은 「경의」·「경의의 표명」·「충성을 맹세하는 것」 등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여기에서는 붓다를 예배할 때에 가지는 귀경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한 Buddhābhivādanā(붓-다-비와-다나-, 붓다 예경)라고도 말합니다.

테라와다에서는 붓다를 예배할 때나, 경과 게송을 독송할 때나, 삼장을 공부할 때나, 상가의 의식을 실행할 때 등에는 반드시 이 귀경게와 삼귀의문이 모두 독송됩니다. 또한 불교에 관한 서적을 저술할 때에도 모두 이 귀경게가 먼저 기록됩니다.

 

문장을 풀어보면
namo : (불변어) 「경배드림」또는 「귀의」의 주격. 
tassa : ta(so)의 여격 「그 분」
bhagavato : bhagavant의 여격 「세존(존귀하신 분)에게」
arahato : arahant의 여격 「아라한에게」
sammā : 「올바르고·완전한」(부사)
sambuddhassa : sa [sāmaṁ]「스스로」(+ṁ의 삽입)+ buddha 「깨달은 사람·붓다가 된 사람」의 여격:「정자각자에게」

먼저 「namo(나모)」라는 것은 한자의 「南無, 나무」이며 「숭배·예배하다」이른바 「귀의하다」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나무 석가모니불」은 그 원문이 「나모 사끄야무니붓다」로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는 「아라한이며 정자각자인 그 분 세존을 예배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아라한과 정자각자란 대상이 무엇인지 예배하는 이상 먼저 알아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아라한(Arahaṁ<아라항>, Arahatta<아라핫따> 혹은 Arahant<아라한뜨>)이란 「(존경 받기에, 공양 받기에) 적당한 경지 혹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한역에서는 「응공<応供>」이라는 역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본래의 의미에 더하여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선 아라한이란 「여래 10호」혹은 「부처님 10대 명호」라고 말해지는 부처님의 10가지 별칭 가운데 하나로 붓다의 수많은 위대한 덕을 형용하는 말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아라한이란 테라와다 불교에 있어서 수행자의 최고 단계, 또는 그 단계에 이른 사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테라와다에서는 사람은 붓다는 될 수 없지만 아라한은 될 수 있기에  아라한이 수행의 최종 목적이 됩니다.

실제 테라와다의 교학에서는 붓다와 붓다 이외의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로서의 아라한과는 동일하지만,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과 기간은 현저하게 다르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에서는 사람이 붓다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라한에도 그 지혜의 깊이나 덕의 높이에 의해 3가지의 구별이 있어서, 현재의 사람들이 도달 수 있는 것은 그 중의 가장 낮은 것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테라와다 수행자의 이상으로서의 아라한은 붓다나 여러 가지 대보살에 비하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자가 아닌 불완전한 낮은 깨달음에 머무르는 자다고 비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아라한이라고 칭하신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자재해야할 부분입니다. 어쨌든 아라한이란 번뇌를 완전하게 여의신 분이기에「존경·공양하는 것에 적합한 분」이며 불교에 있어서의 성자입니다.

 

다음 정자각자(Sammāsambuddha<삼마삼붓다>)란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라는 의미이고, 세존(Bhagavant<바가완뜨>)이란 「훌륭하신 분, 가치 있는 분」이라는 의미로 아라한과는 달리 모두 붓다에 대한 존칭으로서만 사용되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공덕(Buddha guṇā)에서는 이러한 아라한, 정자각자 등 여래의 10가지 명호를 열거하며 붓다를 찬탄합니다.
자세한 풀이는 「삼보에 대한 찬탄」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이와 같이 귀경게란 「그분, 존귀하신 분인 부처님」은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났기에 공경 올리기에 적합한,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라고 존경의 마음을 지니고 예배하기 위한 게송입니다.


※ 참고 : 아라한을 둘러싼 오해

 

아라한의 의미
1) ari, ara+ha=번뇌라는 적은 소멸되었다. 윤회의 바퀴를 부수었다.
2) a+raha=악행을 행하거나 악행을 감출 비밀스런 장소가 없다.
3) buddhānubuddha=부처님이 깨달으신 사성제를 그대로 깨달은 제자

‘테라와다 불교에서 석가모니는 현세에 있어서의 유일한 붓다입니다. 따라서 수행자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아라한의 경지로 붓다는 될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은 대승 불교 사상의 연구자가 빠지기 쉬운 오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테라와다의 전승에서 붓다의 명호 첫 번째가 「아라한」(여래10호 중의 하나)이므로, 수행자가 아라한이 되면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붓다와 동격으로 간주되어집니다. 그러나 가르침의 창시자에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경전이 전승되는 동안 고따마 붓다만을 붓다라고 불러, 붓다의 교법에 따라 깨달은 성자를 아라한이라고 부르도록 용어가 정리되었습니다. 

경전은 그 자체가 고따마 붓다라고 하는 탁월한 지도자의 말씀을 후대에게 전할 목적으로 편찬 되었으니까, 이 말의 사용을 구분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것입니다.

 

후대에 붓다에게 유일한 능력이라는 항목이 주석서 등으로 논해지지만, 그것은 붓다와 아라한의 보살로서의 기간과 공덕의 차이 등의 문제이며 깨달음의 경지의 높낮이에서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깨달은 성자를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에는 아무런 비하도 없습니다.

「부파의 수행을 아무리 실천해도 아라한의 경지로 붓다가 되는 것(성불)은 할 수 없다」라는 말은 대승 불교가 부파 시대의 불교를 비판한 말꼬리 잡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여래의 교법에 따라 수행을 완성한 아라한을 비방하는 것은 붓다의 교법 그 자체를 비방하는 것이어서 그를 불교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많은 불자들은 대승 불교적인 발상을 전제로 해서 사고하므로 단순한 용어의 정리에 지나지 않는 붓다와 아라한의 구분 사용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해 버립니다.

 

한국의 대승불교도, 테라와다 불교도 서로 붓다의 제자라고 하는 신뢰 관계를 가지고 서로 경책하거나 장점을 살려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법화경에 “성문(석가모니의 제자)인 아라한의 깨달음은 통과점이며 방편의 경지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하나의 국토에 유일한 정각자가 되어 나타나 붓다의 32상을 갖추고 그 국토의 중생을 구제하는 큰 구제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구제 능력의 차이를 부각하기 위한 것이면 문제될 것 같지 않지만, 깨달음의 경지의 높낮이에 차이가 있다고 한 것이라면···.
이 법화경 구절에서는 수행을 완성했음이 분명한 아라한의 성자가 한층 더 구제자를 목표로 해서 보살의 수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법화경에서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붓다의 숙원이다···.
석가모니의 요청에 응해 허공(혹은 니르바나)에 거주하고 있던 무수한 성자들이 말법구제를 위해서 사바세계에 출현한다···”
대단히 이상적인 것을 말합니다. 만약 이것이 경전이 아니라 문학이라면 장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비현실적입니다. 전통적인 테라와다 교단에 대해서 대승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이러한 구제자를 목표로 하는 사상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보살로서의 수행을 하며 구제자를 목표로 하고 있는 스님도 있습니다. 다만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선택사항으로서 보살의 청원을 일으키는 길도 있습니다.

 

12세기에 밀란다왕문경의 주석서를 쓰신 스리랑카 아누라다뿌라 마하위하라에 거주하던 Maha Tipitaka Culabhaya라는 스님은 책의 말미에 Buddho Bhaveyyaṁ(May I become a Buddha! 성불하기를!)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현재 테라와다 불교국 중 버마의 파욱센타에서는 saṅkhārupekkhāñāṇa(行捨智)에 도달한 수행자들에게 보살행과 계속 정진할 것 중 택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보살행을, 어떤 이는 수행을 지속해 나갑니다.
또한 테라와다 불교국 중 태국은 앙굿따라 니까야 5권 201p에 나오는 Theradhamma 10가지 조건을 충족했다고 장로들이 판단하면 보살행을 실천해도 좋다고 승낙합니다.
이와 같이 테라와다 불교국에서도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한 자가 원할 경우에 보살도를 걸어서 구제자를 목표로 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이들이 아라한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돌아가신 라훌라 스님도 이에 대해 이렇게 견해를 밝혔습니다.
Although the Theravada holds that anybody can be a Bodhisattva, it does not stipulate or insist that all must be Bodhisattva which is considered not practical.  The decision is left to the individual whether to take the Path of the Sāvaka or of the Paccekabuddha or of the Sammāsambuddha.  But it is always clearly explained that the state of a Sammāsambuddha is superior and that the other two are inferior.  Yet they are not disregarded.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성문, 연각, 부처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①성문 Sāvaka는 붓다의 제자(anubuddha 아누붓다 :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사성제를 깨달은 제자)로, 그 가르침에 근거해 수행하여 해탈, 열반을 실현하지만 그것을 밖에 전하는 능력(구제력)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제자가 보리를 실현하면 Sāvakabuddha로 불립니다.
②벽지불(연각·독각) Paccekabuddha는 붓다가 세계에 출현하지 않을 때에 스스로의 힘으로 해탈, 열반을 실현하지만, 그것을 밖에 전하는 능력(구제력)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③보살은 성문(Sāvaka)으로서 혹은 연각(Paccekabuddha)으로서 열반에 도달할 수가 있는 입장에 있지만, 세계에 대한 대자비(maha karuna)로 열반을 포기하고 다른 중생들을 위해서 윤회에 머물며 6(혹은 10)바라밀을 쌓고 완성하여 마지막에 해탈을 실현해서 붓다(Sammāsambuddha)가 됩니다. 해탈을 밖에 전하는 능력(구제력)은 무제한입니다.
④상기의 삼자는 번뇌를 여의었다는 의미에서 동일한 열반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경지의 열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아라한입니다.
⑤그러나 Sammāsambuddha만이 「모든 장애로부터 완전한 해방」(일체지)을 달성해서 구제 능력에 대해 성문, 벽지불(연각)을 훨씬 뛰어 넘는 능력을 지닙니다.
⑥상기의 정의는 대승불교도 테라와다 불교도 똑같이 수용하고 있습니다. 모두 菩薩이 고귀하다고 말합니다.
⑦대승불교는 보살 수행에 전심전력하며 이러한 삼종의 도는 같은 길 위의 3가지 과위라고 평가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테라와다 불교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에 의해 다른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⑧테라와다의 나라에서도 옛부터 보살의 청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이상론을 말하고 있지만, 지나칠 때는 현실적인 테라와다 불교나 성자인 아라한을 비방하는 것이 되기에,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실천으로서 「보살」이라고 하는 말은 좋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보살과 같다」든지, 「보살의 삶의 방법을 산다」라고 하는 것은 훌륭하고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아라한과 보살을 대비시키는 것 자체는 무리가 있습니다. 「완성자」와「완성할지 어떨지도 모르는 수행자」를 비교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설혹 미래에 붓다가 될지 모른다고 해도 현세에서의 보살은, 사문과를 얻은 성자 특히 아라한에 예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진짜 보살이라면 아라한을 비판한다고 하는 발상조차 마음 내지 않습니다.

 

(2). Tisaraṇataya(삼귀의 삼창)
Buddhaṁ saraṇaṁ gacchāmi.
Dhammaṁ saraṇaṁ gacchāmi.
Saṅghaṁ saraṇaṁ gacchāmi.
Dutiyampi buddhaṁ saraṇaṁ gacchāmi.
Dutiyampi dhammaṁ saraṇaṁ gacchāmi.
Dutiyampi saṅghaṁ saraṇaṁ gacchāmi.
Tatiyampi buddhaṁ saraṇaṁ gacchāmi.
Tatiyampi dhammaṁ saraṇaṁ gacchāmi.
Tatiyampi saṅghaṁ saraṇaṁ gacchāmi.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두띠얌-삐 붓-당- 사라낭- 갓-차-미.
  두띠얌-삐 담-망- 사라낭- 갓-차-미.
  두띠얌-삐 상-강- 사라낭- 갓-차-미.」
「따띠얌-삐 붓-당- 사라낭- 갓-차-미.
  따띠얌-삐 담-망- 사라낭- 갓-차-미.
  따띠얌-삐 상-강- 사라낭- 갓-차-미.」


「부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담마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상가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두 번째도 부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두 번째도 담마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두 번째도 상가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세 번째도 부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세 번째도 담마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세 번째도 상가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불교신자의 필수조건
Tisaraṇataya(띠사라나따야)란 「삼귀의 삼창」의 뜻인데, 즉 삼보에 귀의하는 것을 표명하는 게송인 세 가지 귀의문을 세 번 독송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한 Tisaraṇa gamana(띠사라나 가마나, 삼귀의를 향해 나아감)라고도 말합니다.

문장을 풀어보면
buddhaṁ : buddha의 대격(목적격) 「붓다에, 붓다를」
saraṇaṁ : saraṇa 「의지처」의 대격 「의지하는 것에」
gacchāmi : gacchati의 현재 1인칭 단수 「( 나)는 (나아)간다」
dhammaṁ : dhamma의 대격(목적격) 「담마에, 담마를」
saṅghaṁ : saṅgha의 대격(목적격) 「상가에, 상가를」
dutiyampi : dutiyaṁ 「다시」+ pi(api) 접속사「또, ~도」
tatiyampi : tatiyaṁ 「세번」+ pi(api) 접속사「또, ~도」

삼귀의 게송은 모두 gacchāmi(갓-차-미)라는 말로 끝나 있습니다.


gacchāmi는 √gam(간다, 안다)라는 동사 gacchati의 현재 일인칭 단수 형태입니다. 일인칭 단수란 구체적으로「나」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gacchāmi는 「(나는) 간다, (나는) 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영어에서 「나는 간다」는 보통 「I go」라고 말하지, 「go」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Go」만으로는 명령형이 되어서 「가!」라는 의미가 되어 버립니다. 영어는 이와 같이 기본적으로 주어를 생략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빨리어에서는 주어가 없는 문장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Buddhaṁ saraṇaṁ gacchāmi.는 「붓다에게 귀의하겠습니다」라는 의미이지만, 다른 단어에서 「 나」를 나타내는 말이 존재하기에  「 나는 붓다에게 귀의하겠습니다. 나는 붓다를 의지하여 나아가겠습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왜 빨리어는 영어와 달리 주어를 생략해도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가 하면, 빨리어의 동사가 주어의 인칭, 수에 맞추어 어미가 변화해 주기 때문입니다.

 

먼저 삼귀의란 붓다(붓다)와 붓다의 가르침(담마)과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출가한 성스러운 상가들(상가)의 세 가지를 의지처로 하여 살아간다는 것인데, 그 세가지는 불교도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고귀한 것,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기에 「세 가지 보물, 삼보」라고 합니다.

삼귀의 게송은 그가 대승불자이든 테라와다불자이든, 혹은 어떤 종파에 속하여 있든지, 누구든지 불교신자라면 반드시 독송하는 게송입니다. 어떤 사람이 불교도가 될 것을 결의했을 때, 이 의미를 이해한 다음에는 불전이나 스님 앞에서 이 삼귀의를 독송하면 그 사람은 불교도가 됩니다. 삼귀의를 독송하지 않고 불교도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비록 전통적이든 새로운 종파이든 불교계 종교 단체의 신자나 회원으로 등록하고 있다고 해도, 어느 사찰에 정기적으로 보시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불교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불교도로서 인정되지 않습니다.
또 최근에는 부처님께 예경 드리는 것은 우상 숭배 같다고 여겨 사찰에 가도 법당에서 부처님께 예배드리지 않는다든지, 스님들을 신뢰할 수 없기에 삼배 드리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여 자신이 이해한 법만을 존경하고 귀의한다고 말하는 자칭 불교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불교도가 되고 싶다면 반드시 이 삼귀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형식적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이 삼귀의를 한 다음에는 정식적인 비구, 비구니로부터 오계 혹은 8계 혹은 10계 등을 받아 이것을 가능한 한 유지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이것에 의해 그 사람은 「좋은 불교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불교도인 사람도 날마다 삼귀의문을 독송해서 삼보에의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삼귀의문은 승려를 포함한 불교도에게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삼귀의는 그것이 한문이건 한글이건 빨리어이건 삼보에 대해서 믿음을 표명하는 문장이면 좋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영어로 삼귀의를 행하는 일부 백인 불교도도 있기 때문에 언어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어떤 방식이라도 반드시 삼귀의를 독송하는 것이 인도 이래의 불교의 전통이며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문화권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이용되어 온 것이 있다면 일부러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거나 다른 문화권의 것을 이용하거나 하지 않고 역사적·문화적· 전통적인 것에 따라 독송하면 좋을 것입니다.

 

(3). 시험문제

① 불교를 배우고 실천하는 날에 해야 할 일들은 무엇입니까? (3가지 이상)
② etena saccena(이 진리에 의해)를 장음, 단음 구별하여 독송하고 적어보십시오.
③ 경전과 게송을 독송할 때 주의해야할 점 4가지를 적어보십시오.
④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때 주의할 점 5가지를 기억해 적어보십시오.
⑤ 불교신자가 되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⑥ 테라와다 불교에서 공덕을 쌓은 후 행하는 회향하는 서원문을 적어보십시오.
⑦ 삼귀의 삼창의 중요성에 대해 적어보십시오.
⑧ 부처님에게 최초로 귀의한 재가자의 이름은?
⑨ 「최상의 존경 예배법」이란 어떠한 것인가?
⑩ attā  hi attano nāthō (실로 자기 자신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수호자이다.)   상기의 어구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⑪ 무엇을 해도 실수가 많은 사람은 무슨 「법」이 빠져 있는가?
⑫ 무상·고·무아가 표면에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무엇에 의해서일까?
⑬ 사람이 수행하는 이유는?
⑭ 경·율·론의 「삼장」에 대해 그 내용의 요점을 하나의 「말(빨리어)」로 나타내면?  또 그 말(빨리어)이 들어가는 문장은?
⑮ 경전만을 학습하는 사람, 경전을 학습해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 이 두 명에 대해 부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