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테라와다불교의 신행생활

테라와다 이야기 2- 테라와다 불교의 기준점

담마마-마까 2016. 8. 6. 00:09

 

“모든 것은 스스로 확인해라”

삼장법사 빤냐와로 스님의 “테라와다 이야기” 5- 테라와다 불교의 기준점
“책에 있든, 전통에 있든, 스승의 말씀이든, 그것을 진실로 한정하지 말라”

 

 

(5) 테라와다 불교의 기준점

 

① 모든 것은 스스로 확인해라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스스로 확인해라」라고 하는 제목의 「깔라마 경」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한때 부처님이 깔라마족의 마을에 들어가셨다. 거기서 깔라마족의 사람들은 부처님에게 이와 같이 물었다.」 「부처님! 어느 사문, 바라문들이 와서 그들은 자신의 설만을 올바르다고 말하고 다른 설은 비천하다고 깎아내리고 무능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문, 바라문들이 와서 그들도 자신의 설만이 올바르다고 말하고 다른 설을 매도하며 비천하고 무능하다고 깎아내렸습니다. 도대체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들을 위하여 누가 올바른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깔라마족의 사람들이여! 여러분들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혐의가 있는 곳에 의혹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의 귀로 전하는 것, 예를 들면 비전이나 주문, 신의 계시 등에 의지해선 안 되는 것이니라.
세대부터 다음 세대로 전해진 것이라고 해서 의지해선 안 되느니라.
예부터의 전언, 전설, 풍설 등에 의지해선 안 되느니라.
우리들의 성서나 경전에 써 있다고 해도 의지해선 안 되느니라.
경험에 의하지 않고 머릿속의 사변만으로 생각하는 것에 의지해선 안 되느니라.
도리나 이론에 맞는다고 해도 거기에 의지해선 안 되느니라.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견해 등에 맞기 때문에 의지해선 안 되느니라.
자신의 견해와 맞고 있기 때문이라는 일만으로 납득해선 안 되느니라.
말하는 것이 훌륭한 모습이라고 해도 의지해선 안 되느니라.
말한 사문이 고귀한 스승이라고 하는 직함 등에 속아서는 안 되느니라.
 깔라마족의 사람들이여! 만약 여러분들이 이것은 불선업을 짓고, 이것은 허물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현명한 자에 의해 비난 받는 것이고, 이러한 행위는 불이익과 근심을 부르는 것이라고 자기 스스로 안다면 여러분들은 그러한 일을 버리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니라. 」

「깔라마족의 사람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람의 마음 가운데 탐욕은 이익을 일으키는가? 그렇지 않으면 불이익을 일으키는가?」
「부처님, 불이익을 일으킵니다.」
「깔라마족의 사람들이여! 탐욕을 가지는 사람은 그 탐욕에게 패배하여 마음을 점령당하며, 탐욕의 마음은 이윽고 생명 있는 것을 손상시키고,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며, 타인의 아내와 정을 통해 남을 속이며 말하여, 타인에게도 그처럼 권한다. 대략 이것이 그 사람에게 긴 시간 동안의 불이익과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이니라.」
「부처님, 그대로입니다」
「깔라마족의 사람들이여! 여러분들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람의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분노는 이익을 일으키는가? 그렇지 않으면 불이익을 일으키는가?」
「부처님, 불이익을 일으킵니다.」
「깔라마족의 사람들이여! 분노를 가지는 사람은 그 분노에게 패배하여 마음을 점령당하며, 분노의 마음은 이윽고 생명 있는 것을 손상시키고,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며, 타인의 아내와 정을 통해 남을 속이며 말하여, 타인에게도 그처럼 권한다. 대략 이것이 그 사람에게 긴 시간 동안의 불이익과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이니라.」
「부처님, 그대로입니다」
「깔라마족의 사람들이여! 여러분들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올바른 일을 모르는 어리석은 마음은 이익을 일으키는가? 그렇지 않으면 불이익을 일으키는가?」
「부처님, 불이익을 일으킵니다.」
「깔라마족의 사람들이여! 올바른 일을 모르는 그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그 어리석음에 의해 패배하여 마음을 점령당하며, 어리석은 마음은 이윽고 생명 있는 것을 손상시키고,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며, 타인의 아내와 정을 통해 남을 속이며 말하여, 타인에게도 그처럼 권한다. 대략 이것이 그 사람에게 긴 시간 동안의 불이익과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이니라.」
「부처님, 그대로입니다」
「깔라마족의 사람들이여! 여러분들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러한 일은 선인가? 그렇지 않으면 불선인가?」
「부처님, 불선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불선이니라. 이러한 행위들은 허물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행위들은 현명한 자에 의해 비난 받는 것이고, 이러한 행위는 불이익과 근심을 부르는 것이라고 자기 스스로 안다면 여러분들은 들어서 안 것이나 전해 내려오는 것 등은 모두 버리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니라.」「또, 깔라마족의 사람들이여!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그것들에 의해 패배하여 마음을 점령당하는 일 없으며, 어리석은 마음이 없어 생명 있는 것을 손상시키는 일 없고,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으며, 타인의 아내와 정을 통하는 일 없어 남을 속여 말하는 일 없어서, 타인에게도 그처럼 권한다. 대략 이것이 그 사람에게 긴 시간 동안의 이익과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니라.」 

 

이 깔라마 경은 믿는 근거를 모두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믿는 경우에 권위 있는 것을 근거로 그 증거라고 하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이 경전은 역사가 있고 오래된 것이니까 올바르다고 하는 편견이나, 이 경전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공덕이 있다고까지 믿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부처님은 경전에 쓰여져 있다고 해도 즉 올바르다고 하는 것은 없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분명히 지금은 부처님이 말씀했다고 하는 것이 많이 있어 어떤 것이 진정한 것인가 모르고 있으니 확실히 경전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대로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또, 원래 가지고 있는 견해에 의지하지 말라고도 말하고 계십니다. 한국에는 한국적인 생각이 있고, 미국에는 미국 독자적인 풍습이나 논리의 방법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지금까지 경험한 것이나 옛부터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견해에 사로잡히기 쉽고 그 때문에 진실이라는 것을 찾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또 훌륭한 사람이나 직함이 훌륭한 사람이 말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믿어 버리는 경향이 있지만 외관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가르칩니다. 비유하면 그리스도이든, 마호맷이든, 부처님 자신이든, 우리들의 스승에 의지해선 안 된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평소 아무렇지도 않게 가지고 있는 과신이라고 하는 함정을 보기 좋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신용하고 있다면, 경전에 써져 있기 때문이라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곧 그러한 것을 믿어 의지해 버리기 십상입니다. 부처님은 인간이 욕망에 의해 생각했던 것은 모두 잘못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여 어디까지나 '스스로 확인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선, 불선은 스스로가 아는 것이어야 하고, 스스로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고 깔라마 경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책에 쓰여져 있다든가, 전통이 있다든가, 훌륭한 선생님의 가르침이라고 해도, 그것이 진실하다고 한정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스스로 확인해 실증을 얻은 다음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고 불교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불교에 신앙은 없습니다. 신앙이 아니라 들은 것, 본 것, 배웠던 것은 스스로 그것을 실천하여 거기에 따라 자신의 진심으로 탐욕이나 분노의 마음이 사라져 없어져 가는 것을 체험하고 그것을 실증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처님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일절 없다고 하십니다. 스스로 모든 일을 실천하는 것에 의해 그것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결과 반드시 신앙과 같은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라 지혜에 의해 확신으로 바꾸어 가시기 바랍니다.

 

②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가라

 

「Sabba pāpassa akaranaṁ kusalassa upasampadā
  Sacitta pariyodapanaṁ etaṁ buddhānu sāsanaṁ」 
 삽바 빠-빳-사 아까라낭- 꾸살랏-사 우빠삼빠다-
 사찟-따 빠리요-다빠낭- 에-땅- 붓-다-누 사-사낭-.
Sabba(모든) pāpassa(나쁜 일을) akaranaṁ(하지 말고)
kusalassa(좋은 것에(을))  upasampadā(도달하라. 행하라.)
Sacitta(자신의 마음을)  pariyodapanaṁ(씻어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
etaṁ(이것이)  buddhānu(모든 부처님의)  sāsanaṁ(가르침입니다.)
「나쁜 일을 그만두는 것. 좋은 것에 도달하는 것.
 자신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 이것이 제불의 가르침입니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선악을 가리키는 말은 불교에서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꾸살라(kusala)·아꾸살라(akusala), 또 하나는 뿐-냐(puñña)·빠-빠(pāpa)입니다. 꾸살라와 뿐-냐는 선(善), 아꾸살라와 빠-빠는 악(惡)입니다.

 

뿐-냐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좋은 행위로 「덕, 공덕」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불교에서 공덕을 쌓은 사람은 확실히 좋은 결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반대의 빠-빠라는 말은 원래 「버려지다, 부정된다.」라는 의미로 해선 안 된다고 결정되어 있는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하는 빠-빠를 행하면 확실히 나쁜 결과가 됩니다. 불교에서는 살생, 도둑질, 삿된 행위, 속임수, 잡담, 욕설, 일구이언, 탐욕, 분노, 사악한 견해의 십악이 빠-빠라고 자주 경전에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3가지인 탐욕과 분노와 사악한 견해가 가장 무거운 빠-빠라고 합니다.

 

꾸살라라고 하는 것은 선행이라고 하는 것으로 「능숙함」 「재주있음」이라고 하는 의미인데 반해, 아꾸살라라고 하는 것은 「거칠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가벼운 의미인 것입니다. 재주있다라는 것은 대단한 의미는 아니며 넓은 의미에서의 선행입니다. 즉 행복을 가져오는 행위는 꾸살라, 불행을 가져오는 행위는 아꾸살라, 삶의 방법이 서투르면 불행하다라고 할 정도로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뿐-냐(공덕)는 꾸살라(잘한 행위)에 포함되지만, 모든 꾸살라가 뿐-냐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공부를 잘하는 것은 꾸살라이지만, 거기에 따라 세상도 행복하게 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즉 뿐-냐는 업이 되고 결과를 얻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행위입니다.

 

경전에서는 보통 뿐-냐보다 꾸살라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뿐-냐에 대해 말하면 종교적으로 치우쳐 버립니다. 불교에서는 종교적인 이야기는 가능한 한 삼가고 있습니다. 덕을 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이야기하면 굉장히 엄격해져 버립니다. 원리주의와 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될 때야만 뿐-냐·빠-빠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해탈에 이를 때까지의 행위는 꾸살라입니다. 인생을 정말로 능숙하게 사는 사람은 해탈까지 가 버립니다. 꾸살랏-사 우빠삼빠다-(kusalassa upasampadā)라고 하는 것은 「꾸살라로 살아가라, 꾸살라로 해탈에 들어가라」라는 것입니다.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지 말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라」라는 것입니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라」라는 것은 이상한 것은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으로 「선한 공덕을 행하라」라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행위를 하여 「능숙한 삶의 방법을 살아가라. 잘 설해진 시스템에 따라 실천하라」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 가르침은 명령형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라, ~하지 마라」라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 좋을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자신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 그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개인이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의 책임으로 올바른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뿐이었습니다.

 

③ 실천 수행하라 

 

「Khantī paramaṁ tapo titikkhā  Nibbānaṁ paramaṁ vadanti Buddhā」
  칸띠- 빠라망- 따뽀- 띠띡-카- 닙-바-낭- 빠라망- 와단띠 붓-다-
 Khantī(침착과)  titikkhā(인내는)
 paramaṁ(최고의)  tapo(수행이다.)
 Nibbānaṁ(열반(도 또한))  paramaṁ(최고라고)
 Buddhā(부처님들이)  vadanti(말씀하셨다.)
「침착한 마음과 인내는 최고의 수행입니다. 열반이야말로 최고라고 여러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칸띠-(khantī)에는 인내라고 하는 의미도 있지만, 「침착」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침착하게 하는 것」「평온하게 하는 것」입니다. 좋은 말을 들었다고 해서 들뜰 것도 없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끙끙거리며 걱정할 것도 없고, 냉정하게 침착하게 하는 것. 이것은 매우 조심해서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좋은 일이 있으면 들떠 버리고, 나쁜 일이 있자마자 낙담해 버립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혼란스럽지 않고, 조용한 마음 상태를 지키는 것은 좀처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titikkhā(띠띡-카-)라고 하는 것은 「인내」입니다. 사람은 다양한 괴로움을 맛봅니다. 아무래도 인생에는 좋은 일보다 나쁜 것이 많습니다. 아무리 나쁜 것에 부딪혀도 인내를 가지는 것이 띠띡-카-입니다. 괴로운 것은 예고 없이 돌연 찾아옵니다. 자신은 굳이 나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밖으로부터 다양한 재난이 덮쳐 옵니다. 곧바로 「왜 자신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라고 불평불만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거기서 인내하는 것이 띠띡-카-입니다.

 

부처님은 「이 2가지가 최고의 수행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인 수행의 이미지와는 다를지 모르겠지만, 최고의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며칠씩 단식을 하거나 겨울에 폭포수를 맞는 행위 등을 하여 일부러 괴롭히며 인내의 정신을 기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보통의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침착한 마음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장면과 인내를 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수행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불교의 답입니다. 불교에서는 신앙이라든지 기도 등, 종교적인 일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말합니다. 「어떤 것에도 물결치지 않는 침착한 마음」과 「괴로운 것에 대해서 인내를 만드는 것」. 어느 시대라도, 어디에 있더라도, 사람이 수행한다고 하면 이 2가지만 하면 됩니다. ‘만약 수행을 하고 싶으면 이 2가지만 해 보세요’ 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해 보면 알겠지만 힘들고 어렵습니다. 거기에 비해 빌거나 절하거나 다라니를 암송하는 것은 간단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결국 단순한 속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칸띠-와 띠띡-카-라고 하는 2가지 실천에 의해 얻을 수 있는 마음의 최고 상태가 「닙-바-나(열반)」인 것입니다. 열반이란 모든 현상으로부터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로 어떠한 현상에 부딪혀도 마음이 조금도 물결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으로부터 멀어져있는 마음, 그 열반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경지라고 부처님들은 말씀하십니다. 이 2가지를 노력하여 수행하면 최고의 경지인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마음의 침착과 인내야말로 무엇보다도 소중한 사람간의 길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이라도, 종교를 전혀 믿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것은 잘못이다」고 말할 수 없고 어떤 인간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시대의, 어떤 사람에게도 들어맞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인 것입니다.

 

④ 출가자(수행자)처럼 살아라

 

「Na hi pabbajito parūpaghāti samano hoti paraṁ vihethayanto.
 Anūpavādo anūpaghāto Pātimokkhe ca saṁvaro,
 Mattaññutā ca bhattasmiṁ pantañ ca sayanāsanaṁ,
 Adhicitte ca āyogo etaṁ Buddhānu sāsanaṁ. 」
 나 히 빱-바지또- 빠루-빠가-띠 사마노- 호-띠 빠랑- 위헤-타얀-또-.
 아누-빠와-도- 아누-빠가-또- 빠-띠목-케- 짜 상-와로-,
 맛-딴-뉴따- 짜 밧-따스밍- 빤-딴 짜 사야나-사낭-,
 아디찟-떼- 짜 아-요-고- 에-땅- 붓다-누 사-사낭-.
pabbajito(출가자(수행자)는) parūpaghāti(다른 이를 죽이는 것은) Na hi(결코 없다.) 
samano(사문은)  paraṁ(남을)   vihethayanto(해치는 사람, 곤란하게 하는 사람)  hoti + Na(안 된다.)
Anūpavādo(비난하지 않는다.) anūpaghāto(해를 주지 않는다.)
Pātimokkhe(출가자의 계율을)  saṁvaro(지킨다.)
Mattaññutā ca bhattasmiṁ(적당한 식사로,)
pantañ ca(고요한 곳에)  sayanāsanaṁ(자리를 펴서 머문다.)
Adhicitte(초월한 마음으로)  āyogo (정진하는 것.)
etaṁ(이것이)  Buddhānu(모든 부처님의)  sāsanaṁ(가르침입니다.)
「출가자(수행자)는 결코 다른 생명을 죽일 수 없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은 출가자(수행자)가 아니다.
 비난하지 않고 피해주지 않으며
 출가자(수행자)의 계율을 지키고, 음식을 절제하고, 고요한 곳에 머문다.
 초월한 마음을 목표로 하여 노력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게송은 출가자에 대한 말입니다. 부처님은 우선 「출가자는 생명에 대해서 한없는 자애의 마음을 가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상냥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상한 일 같지만, 계율이라고 하는 것은 무수히 많은데 이것만 지켜도 계를 전부 지키게 되어 버립니다. 모든 생명에 친절하고 온유하여, 조금의 폐도 끼치지 않게 한다고 하는 것만으로 태산같이 많은 계율을 포함해 버립니다.

 

예를 들어 「출가자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해선 안 된다」라고 하는 계율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결국 사람에게 폐를 끼치게 됩니다. 출가지가 무엇인가를 부탁하면 누구라도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종교가라고 하는 것은 어떤 나라에서도 존경받는 입장에 있습니다. 비록 안 보이는 곳에서 욕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출가자가 부탁하면 대부분 말하는 것을 들어 줍니다. 그래서 출가자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해선 안 된다고 하는 계율이 있지만, 그런 모든 것을 「생명에 폐를 끼쳐선 안 된다」라는 한마디 말로 정리해 버렸습니다. 부처님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adhicitta(아디찟따)는 선정입니다. 우리는 다섯 감각기관(눈·귀·코·입·몸)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만을 의지하는 세계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좁은 범위의 정보로 생각이나 망상, 철학, 과학도 모두 그러한 정보에 의해 머리로 조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것을 초월한 높은 경지의 지혜가 생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경전의 내용은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과거 여섯 명의 부처님들도 모두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매우 짧은 게송 가운데에 방대한 지혜가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진리에 눈뜬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말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