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 불교사

부처님 시대의 왕들-빔비사라왕, 빠세나디왕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018-2

담마마-마까 2025. 1. 16. 18:11

https://youtu.be/PhwmM9PyZH8?si=NI8ET9-med4qVbe8

 

* 부처님 시대의 왕들-빔비사라왕, 빠세나디왕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018-2

 

오늘은 저번 주에 못해서 2시간 연강입니다.

그래도 우리 뿐냐디빠 스님의 장점 중에 하나가 뭐냐면 자기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그것을 듣고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참 출가한 스님들한테서 참 안 되는 게 그 부분들이거든요. 자기가 다 알지는 못하는 거는 자기도 알아. 그런데 남이 법을 설하고 남이 가르치는 거는 들으려고 안 해. 그게 스님들 병이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병인데, 그래도 뿐냐디빠 해피 스님은 그래도 다른 스님들 법문이나 강의를 이렇게 듣고, 물론 거기에는 자기가 알고 있는 부분도 있고 모르는 부분도 있고 또 그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걸 그냥 그대로 들을 수 있다는 거, 그게 어떻게 보면 참 큰 장점 중에 하나라는 거라. 그래서 내가 해피 스님을 좋아하는지도 몰라. 그런데 단점이 뭐냐면 자기 고집이 있어 갖고 딱 지 생각 외에는 못해. 그게 인제 단점이긴 한데 그래도 뭐 장점에 비하면 단점은 조그만 거니까. 오늘은 사탕이 두 개네요.

 

자, 지금 오늘 내준 교재까지가 「부처님 시대의 왕들」에 대한 다섯 왕들에 대한 것이 끝났고, 제1차 결집까지 프린트물이 나갔습니다. 오늘 되든 안 되든 그것까지는 다 끝내야 됩니다.

저번 시간에 숫도다나 왕까지만 하고 빔비사라 왕 부분은 못 했죠.

 

근데 저번 시간에 스님 마지막 시간에 한 얘기 중에 잘못 말한 게 있어요. 그 수정부터 할게요.

“부처님이 성도하기 이전에 빔비사라 왕을 만나지 않았다.” 하고 얘기를 했는데 해피스님이 그 부분을 지적을 하더라고. 그래서 찾아보니깐 만난 적은 있어요.

숫따니빠따에 보니까 왕 이름은 직접 나와 있지는 않지만 문맥상으로 그 뒤에 나온 그 빔비사라 왕이란 명칭으로 봐서도 성도 이전에 만난 적은 있는데, 그 주석서를 다 뒤져보더라도, 빔비사라 왕이 ‘왕국의 절반을 줄 테니까 나와 같이 왕국을 다스리자’ 하는 그런 부분은 전혀 없고, 그리고 ‘나중에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왕국을 방문하겠다’ 하는 부분도 나오지는 않습니다. 단지 만나는 부분만 존재를 합니다. 그래서 그것 부분은 그 뒤에 대승불교권에서 아마 조금 더 가필된 부분이지 않는가 하고 생각을 합니다. 자, 그 부분은 수정을 해 드리겠습니다.

 

자, 오늘은 빔비사라왕, 27페이지에 있는 겁니다.

부처님 당시 때 두 명의 왕을 들먹이라 하면 이 빔비사라 왕하고 빠세나디 왕하고 2분을 들먹입니다. 두 분 중에서 딱 한 분을 들먹이라 할 것 같으면 각자마다 사람마다 다른데 스님 입장에서는 빔비사라를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왜 그러냐면 불교의 기틀을 다지는데 빔비사라왕이 했던 역할은 굉장히 많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여러 종교가들이 새로운 사상가들이 나타났지만 지금 현재 다 없어져 버렸거든요. 딱 남아있는 게 불교하고 자이나교 두 개가 지금 남아있습니다. 이게 지금까지 남아서 이 가르침을 전할 수 있도록 밑거름의 토대가 되도록 만든 게 뭐냐면 유행 생활을 하던 것들을 안거라고 하는 것들을 만들어서 정주하는 생활과 유행하는 생활을 갖다가 절충을 시키는 역할을 했던 게 빔비사라왕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우리 교단에서는 아직 안거 중이죠. 좀 내일 되면 안거 끝나는 날입니다. 그래서 내일 머리를 깎아야 되니까 스님 머리가 요만큼 길러 있는 거라. 그러니까 보름에 한 번씩 깎으니까.

 

그래서 그 안거를 도입을 하기 시작한 게 빔비사라왕의 권유로 인해서 도입을 하게 됩니다.

얼핏 보면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안거 때 스님들은 조금 더 열심히 수행을 할 뿐 아니라 경전들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처님 말씀을 배워서 다른 데 가서 다른 스님한테 그걸 얘기를 해주고 또 그것들을 암송할 수 있는 기간이 됩니다.

그래서 안거 기간이 되면 부처님 당시 때는 되도록이면 다른 곳에 있는 스님들 중에서라도 한두 사람은 꼭 부처님이 있는 곳에 가서 안거를 지내도록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했던 말들을 그대로 이렇게 기억해 가지고 있다가 자기 지역으로 가서 그 부분을 다시 거기 있는 스님들께 나눠줍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으면은 부처님 말씀이 뭘 말했고 뭘 계율을 제정했는지를 갖다가 다른 스님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형태로써 통일되게끔 만들어준 게 이 안거라고 하는 제도를 통해서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출가한 스님들에게 그마만큼 중요한 역할들을 했고, 재가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각의 스님들이 각각의 무리를 지어서 일정한 장소에서 안거를 하니까 사람들은 가까운 데 가서 부처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설법을 들을 수 있고 또 경전을 공부할 수 있고 또 수행을 할 수 있으니까 재가자들은 서로 자기 지역에 와서 안거를 지내 달라고 간청을 할 사정까지 생겨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재가자들에게도 굉장히 유용하게 안거가 쓰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이제 제정하게 된 게 이 빔비사라왕인데 처음에 빔비사라왕은 그냥 단순하게 생각을 했어요. 그냥 안거철이니까,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돌아다니면 뭐 자라나는 그 생명체를 죽일 염려가 있으니까 그 때문에 안거를 하라고 했겠지만, 부처님은 이미 그것보다 더 뛰어난 생각들을 하고, 이런 이익들이 있기 때문에 안거를 했던 거라.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사람이 모여 있든 아니면 모여 있지 않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그 속에서 뭔가 이익됨이 있어야 되고 무언가 행복한 것들이 만들어져야만이 그것이 바른 것이지, 그렇지 않고 그냥 우르르 모여 있다 해가지고 이익이 있고 한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빔비사라왕이 안거 제도를 도입하게 된 것이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거라.

 

두 번째가 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절을 만드는 기초를 다지게 된 게 이 빔비사라왕입니다. 빔비사라 왕이 어느 사원을 기증을 했죠? (수행자: 죽림정사) 예. 죽림정사, 죽림정사 말고도 여러 개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죽림정사인데, 지금도 그 기준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절을 만든다 하면 뭐부터 만들어요?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보통 보면 두 가지 패턴이 있습니다. 부처님을 먼저 모셔 와가지고 부처님이 앉을 자리를 먼저 닦아가지고 부처님을 딱 모시고 거기에다가 법당을 이렇게 만드는 방식, 그렇지 않으면 법당을 만들고 나서 부처님을 안치하는 방식,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이든 항상 법당 부처님을 모실 장소가 먼저 만들어지게 됩니다. 만들어지고 나서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이제 대중들이 머물 방사, 요사체라고 그럽니다. 요사체가 지어지고, 요사체가 지어지고 나면 그다음에 하는 게 범종각, 그다음에 저쪽에 앞에 일주문, 이런 식으로 해서 가람의 형태를 만듭니다.

 

테라와다 사원에서는 어떤 형태를 지을까? 사원을 지으면.

우선순위가 법당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스님들이 머물 방부터 먼저 짓습니다. 그러니까 스님들이 먼저 머물러야 부처님이 뭐 동상이 내려와서 여러분들한테 법문을 설해 줄 것도 아니고 수행 지도해 줄 것도 아니기 때문에, 스님들이 머물러야 뭔가 일이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스님들이 머물 방부터 먼저 짓습니다. 근데 그 방을 만드는 데 조건이 딱 뭐냐면 만약에 머물 스님이 두 스님이 있다. 방 2개만 짓는다 해가지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방 2개 말고 여분의 방은 항상 같이 지어야 돼요. 다른 스님들이 와서 머물 공간을 지어야만이 그걸 '방사(kuṭi)'라고 얘기를 합니다.

지금 대중들이 머물 방을 먼저 짓고, 그리고 새로운 객 스님이든 아니면 새로 출가할 스님들이 머물 방을 같이 더불어 이렇게 짓습니다. 그래서 그 방사를 먼저 짓는 것들이 첫 번째입니다. 그걸 갖다가 보통 빨리 경전에서는 뭐라고 하느냐면 '꾸띠까'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 방을 먼저 짓는 걸.

 

그래서 죽림정사 하룻밤에 그 꾸띠를, 경전에는 위하라라고 이렇게 나옵니다. 처음에 위하라의 개념이 이 '꾸띠(kuṭi)'의 개념이었어요. 그걸 60개를 지었다고 그러거든. 그러니까 얼렁뚱땅 지었겠어? 근데 기준이 딱 뭐냐 하면 그걸 지을 때 부처님 한테 가서 그 “스님들 방사를 짓는데 어떤 식으로 지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들어가는 문이 있어야 될 것, 그다음에 지붕이 있어야 될 것, 그다음에 사방을 가리는데 한쪽 면은 밖에서 들여다볼 수 있도록 지을 것, 요거 딱 얘기를 합니다.

지금도 스님들 방을 지을 때는 사방이 꽉 막혀서 안에서 뭐 하는지 모른다, 그거는 방의 기준에서 어긋나 버리게 됩니다. 저 안에서 뭐 하는 거 다 볼 수가 있어야 돼. 밖에서. 그렇다고 유리를 해놨는데 못 보게 한다고 무슨 선텐을 해가지고 안에 안 보이면 그건 마찬가지라.

일단은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한 곳이 있어야 된다. 그리고 지붕과 문과 벽이 있어야 되는 것, 요것만 조건을 갖추면 된다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그거 할려니까 얼마나 쉬워? 지붕 만드는데 옛날에 기와가지고 하는 것도 아니고 갈대갖고 뚝딱뚝딱 하면 되고, 나무 하나 베가지고 기둥 하나 세우면 되는 거고.

 

그래서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만약에 스님들이 머물려고 할 것 같으면 좋게 잘 지으려고 하지 말고 이 조건만 맞춰주면 됩니다. 추우면은 그때 밑에 방에 전기장판 하나 깔면 되는 거고, 스님도 그렇게 삽니다. 스님도 무슨 뭐, 보일러 만날 틀어놓고 사는 줄 알아요? 전기장판 가지고 살아요. 요즘은 이제 물장판이가 뭐고? 온수 매트인가 누가 보시를 해가지고 온수 매트를 쓰고 있지만, 추우면 그거면 되는 거라.

그 대신에 그 스님이 머물 공간은 반드시 한 스님이 누웠을 때 딱 적당한 공간이면 돼. 크게 지을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깐 내 방도 마찬가지로 둘이 누우면 비좁아. 둘이 누워서 잘 형편이 못 돼. 요쪽에 책상이 하나 있고 하기 때문에 더 좁아. 그래서 보통 보면 3m x 2m 이 규격을 보통 합니다. 가로 세로가. 3m 2m니까 굉장히 작은 규격입니다.

그렇게 이제 60개를 먼저 짓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이제 갖춰지는 게 거기에다가 이제 수행하는 공간 수행홀이 지어지고, 거기에다 나중에 부처님이 열반하고 나서 세월이 한참 지나서 부처님을 모시는 장소가 되고,

 

쉽게 말하면 스님들이 거주할 공간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다음에 수행할 홀이 만들어지고, 그다음에 세 번째 해야 되는 것이 그때까지 지금까지도 법당이 없습니다.

세 번째가 해야 되는 게 뭐냐면 스님들이 갈마를 할 장소가 만들어지는 거라. '시마홀'이라고 이렇게 얘기하는데 스님들이 모였으면 4명 이상이 모였으면 반드시 보름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포살하고 자자하고 그다음에 여러 가지 스님들의 일을 갖다가 계획하고 하는 것들을 해야 됩니다. 결집도 그중에 하나에 들어갑니다. 그런 일들을 해야 될 장소를 만들어주는 거라. 그걸 이제 '결계당'이라고 그럽니다. 우리 통도사 금강계단 같은 걸 얘기합니다. 그렇게 좋은 거 말고.

그러니까 결계당은 스님들이 모여 있는 장소이면 대부분 설치하도록 이렇게 하는 겁니다. 20km 범위를 겹치지 않을 경우에는. 반경 20km 보다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으면 그 사이에는 반드시 그 결계당을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게 규정 조건이라.

 

그러니까 먼저 스님들 방사, 그다음에 수행 홀, 그다음에 결계당, 그다음에 지어지는 게 뭐냐면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 순서가 이렇게 됩니다.

그게 형태가 만들어진 게 뭐냐면 빔비사라 왕 때 그 형태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우리 불교사에서 빔비사라 왕이 했던 게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빔비사라 왕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게 뭐냐면,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은데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출가한 스님들은 그 사람이 출가를 하고 나면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그것을 죄를 벌할 수가 없게 돼 있습니다. 사회법으로

살인죄를 저질러 가지고 만약에 출가를 해버렸다, 물론 그전에 스님들이 니 살인 저질렀냐? 어쨌냐? 하긴 하겠지만, 안 했다 할 것 같으면 어쩔 수 없이 출가를 시킨단 말입니다. 출가를 하고 나면 그 사람이 살인죄를 저질러도 사회법으로 이걸 건드리지는 못하게 돼. 지금도 그렇게 돼 있어요. 그리고 출가한 스님이 만약에 살인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이 승복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는 이걸 사회법으로 다스리지를 못해. 그 승단에 요청을 해가지고 이런 의심이 있고 그리고 물증을 딱 제시를 해가지고 저 스님이 살인죄를 저질렀으니까 환속을 시켜 주십시오. 하고 요청을 해가지고 승단에서 그 스님을 환속을 시켜줘야만 그걸 재판할 수가 있는 거라. 그게 지금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불문율로 돼 있습니다.

그게 만들어진 게 이 빔비사라왕 때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스님들의 운송 수단을 돈을 받지 않고 해주는 것, 이것도 빔비사라왕 때 그렇게 해줍니다.

지금도 태국이나 버마나 이런 데 가면 스님들이 앉는 버스가 이리 있으면 스님들이 앉는 지정석이 딱 정해져 있습니다. 그 자리는 아무리 붐벼도 사람들이 안 앉아요. 스님이 버스를 타면 공짜로 타거든. 버스를 타면 스님은 그 자리에 딱 앉게 된다는 거라. 다른 데 돌아볼 필요도 없고. 그리고 스님들은 여성하고 접촉을 못 하게 돼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물질적인 부분하고 스님들하고는 연관을 안 시킵니다. 지금은 경제적인 부분 정치적인 부분으로부터 완전히 손을 떼게끔 만들어 줍니다.

근데 그중에 하나가 요즘은 조금 흔들리고 있어요. 정치적인 부분, 스리랑카나 버마 같은 경우에는 스님들이 정치적인 부분에 굉장히 강하게 색을 드러냅니다. 물론 사회인보다는 덜하겠지만, 그래서 조금 무너지는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경제적인 부분이나 정치적인 부분은 출가했으면 금기시 하는 것이 테라와다 불문율이었습니다.

그 부분을 철저하게 지켜주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이 빔비사라왕 때 하게끔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한 게, 빔비사라왕이 포살을 한 것. 스님들이 보름에 한 번씩 모여서 참회하는 것을 실시하게끔 하고 재가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이죠. 불재일을 지키도록 만드는 것.

여러분들은 아직 그 개념을 잘 모를 겁니다. 한국에서도 초하루법회 보름법회 지장재일 관음재일 뭐 이렇게 치면 거의 1달에 4번이니깐 일주일에 1번 꼴이 됩니다. 실제로 테라와다 불교권에는 그 반을 반달에 한 번씩 절에 가서 불재일을 지킵니다. 그래서 그날은 팔계를 지키도록 돼있습니다.

그게 만들어진 게 뭐냐면 이 빔비사라 왕 때 그것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지금도 적어도 불자다 할 것 같으면은 불재일을 지키지 않는 불자는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꼭 그 선원이나 그 절에 가지 않더라도 그날은 자기가 스스로 팔계를 지키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5계를 지키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특정한 날은 반드시 팔계를 지키도록 하는 것, 그리고 스님들은 보름에 한 번씩 자기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혼자일 때는, 또 여러 스님들이 모였을 때는 또 거기에 맞는 게송들을 독송하면서 계율에 대해서 다시 정립을 해서 스스로 청정성을 만들어 주는 것.

테라와다는 이게 무너져 버리면, 테라와다가 무너져버립니다.

 

테라와다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뭔데? 그래도 욕심 안 가지고 청정하게 사는 것 때문에 테라와다를 좋아하는 거라. 무슨 테라와다 스님들이 무슨 뭐 다른 스님보다 잘생기길 했어, 뭘 해? 돈을 많이 가지기를 했어? 전혀 그거하고는 관계없거든. 우리가 못하는 청정한 것들을 지켜나가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들이라. 그래서 스님들은 반드시 보름에 한 번씩은 이 포살을 하게끔 돼요.

그게 만들어진 게 이 빔비사라왕 때.

 

그리고 부처님의 주치의인 지와까, 부처님의 주치의뿐 아니라 승단의 주치의입니다.

그 지와까를 보내서 부처님뿐 아니라 출가한 스님들이 아픈 것들을 돌봐주도록 하는 것, 그것을 처음 만든 게 이 빔비사라왕 때 만들어진 거라.

그 뒤로 지금도 각각의 사원에는 그 임무를 맡은 사람이 재가자가 반드시 임명이 돼요. 재가자 중에 임명되는 게 딱 세 사람 있습니다. 단사인 2, 그다음에 주치의 1. 아무리 작은 사찰이라도 신도가 만약에 3명 이상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이것 먼저 임명을 한다는 거라. 신도회장 먼저 임명하는 것이 아니고.

'단사인'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중재 역할을 하는 사람들. 스님들 간에 만약에 분쟁이 있을 때도 그 중재 역할을 하고, 스님과 재가자가 분쟁이 있어도 중재 역할을 하고, 하는 그 중재인 역할을 하는 사람을 두 사람을 정하고, 한 사람은 그중에 의학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 한 사람은 반드시 주치의를 정하라. 이 3사람은 반드시 정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게 빔비사라 왕 때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 오게 된 거라.

 

빔비사라가 이 교단을 뿌리내리게끔 하는 기틀을 만드는 일들을 해왔기 때문에, 불교사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게 인제 빔비사라 왕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쭉 적어놨습니다.

한번 읽어보면 빔비사라 왕이 교단에 얼마만큼의 일들을 했고 하는 것들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오늘 여러분들에게 나눠준 게 꼬살라 왕국의 빠세나디부터 해가지고, 왕사 우데나왕 이런 식으로 쭉 연결돼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나중에 9년 차가 되면 꼬삼비에서 스님들이 분쟁이 있게 됩니다.

담마빠다에 그 주석서에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어느 스님이 화장실 가서 용변을 보고 물을 비우는데 다 비우질 않고 비운다고 자신은 비웠는데 물이 남아 있었어요.

지금도 스님은 화장실 들어가서 대변을 볼 때 휴지를 쓰질 않고 물을 사용을 합니다. 그게 오히려 더 청결합니다. 요즘은 여러분들은 비데를 쓰시겠지만, 그래서 바가지에 물을 떠가지고 왼손으로 이렇게 뒷물을 쳐요. 깨끗하게 하고 나서 싹 닦고 이렇게 나오는데, 그러고 나면 이제 그 바가지에 있는 물은 아무래도 똥 찌끄레기가 묻어 있을 거 아니라? 그럼 이걸 싹 비워야 되거든.

 

그래서 작은 통 그 바가지는 반드시 비워야 되고, 목욕하기 위해서 그리고 스님들이 여러 가지 쓰기 위해서 물이 있는 것들 그 물은 반드시 채워야 되고 하는 게 율에 규정이 돼 있는데, 이 스님이 조금 남아 있었던 모양이라. 그 뒤에 또 다른 스님이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그 물이 남아 있으니까 그 스님 보고 “스님 계율 위반이다. 그러니까 참회하시오.” 이랬거든. 그 스님이 계율위반 했으니까 참회를 했어. 참회를 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성질이 나는 거라.

내가 고의로 그런 게 아니고 버린다고 버렸는데 그게 조금 남아 있은 건데, 내가 의도를 남길라는 의도 없이 한 건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 있는 데서 내가 그래도 큰 스님인데 참회라고 하니까 성질이 났다고, 그걸 갖다 자기 제자들한테 얘기를 했어.

 

그러니깐 이 제자들은 스승이 참회 안 해도 되는 부분인데, 의도가 없었으니까, 의도가 없었으면 죄가 되질 않는 거거든. 그런데 실제로 의도가 없이 뭐 할 수 있어요? 할 수 없죠.

사실은 의도가 없는 게 아니고 정신줄을 놓아버렸지. 조금 남아있으면 정신줄을 놓았으니까 남아있지. 어쨌든 간에 나는 의도가 없다고 얘기를 하고, 저쪽 벌을 준 쪽에 제자들은 그 의도 없이 그럴 수 있냐? 남긴 건 남긴 거지, 그 의도 없이 그렇게 될 수가 있냐? 하고 서로 싸움이 붙었어.

그래가지고 꼬삼비 비구들이 두 파로 나눠 가지고 싸움이 붙었어요. 스님들이 싸우면 겁납니다. 이게 붙질 안 해요. 2년 갔어요. 꼬삼비 스님들이. 또 금방 화해된 게 아니고 부처님 성도하고 나서 9년 차에 시작했다가 10년 차 결제할 때 끝났으니까 2년 간 거지.

 

부처님이 가서 그걸 중재를 할라고 그럽니다. 싸우지 마라. 너희들 이래가 되나? 하면서 인제 화합하라고 합니다. 화합하는 6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싸움이 있을 경우에 내가 만약에 누구하고 다툼이 있다. 그러면 이 사람하고 안 싸우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냐면 여섯 가지 방법이 있어요.

마음에 자애를 가져라. 괴로움이 없기를 저 사람도 괴롭지않기를 하는 그런 행복하기를 하는 그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할 때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라. 또 행동을 할 때도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행동을 하라. 자비롭게 행동을 하라. 그게 인제 3가지 있고,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면 베풀어 주라는 거라. 양보하라는 얘기라. 뭐든 자꾸 주려고 하고 베풀어주는 것이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다섯 번째가 지금 생각이 안 나는데,

여섯 번째가 모든 일을 지혜에 비춰봐가지고 행동하라. 무상 고 무아의 성품에 비춰봐가지고 ‘아, 이렇게 화난 것도 항상 하는 것이 아니고 무상한 것이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래서 화나는 걸 다스리는데, 지혜의 성품을 가지고 대하라.

다섯 번째는 뭐지? 누구 아는 사람 없나? 스님도 다 아는 게 아닙니다. 여섯 개는 아는데 다섯 번째가 뭔가 하나 있어요.

<아, 생각났습니다. 아까 다툼이 있을 때 하는 것 다섯 번째가 계 지계, 계를 잘 지키도록 하는 것. 그것이 다툼을 해결하도록 한다. >

 

하여튼 그렇게 해가지고 다툼이 있을 때는 그 다툼을 해결하라 하고 부처님이 그 사람들한테 일러줍니다. 그런데도 이 스님들이 귀가 먹어놔 놓으니까 그 소리가 안 들려요.

부처님한테 뭐라고 하느냐면 이거는 우리 일입니다. 부처님이 나설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나가시오. 간섭하지 마시오. 감히 부처님한테.

여러분들 상상이 안 되죠? (예) 근데 그게 가능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상가라는 조직체 자체가 프랜차이즈와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세븐일레븐이다. 세븐일레븐이라는 본사가 있지만 세븐일레븐에서는 이름만 빌려주는 것이지. 각 가게 세븐일레븐의 디스플레이하고 물건을 어떻게 팔고 하는 것까지 간섭하지를 않습니다. 그거는 그 점방에서 지가 알아서 자체적으로 해야 돼. 단지 세븐일레븐이란 브랜드 이름만 빌려주는 거라. 그 대신에 세븐일레븐이란 브랜드를 달았으면 공통적으로 24시간 해야 된다, 아니면 이 물품은 너가 반드시 받아야 된다, 뭐 이런 공통적인 것은 어느 점방에든 똑같이 적용되겠지.

 

그와 꼭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이라고 있지만은 그 상가가 구성되어 있는 거기서는 자율적으로 운영이 돼 나가. 그 안에서 자기들이 포살도 하고 자기들끼리 잘잘못도 따지고 거기서 수계식도 하고 뭐도 하고 하는 거라. 자신들이 하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이 아무리 이거 세븐일레븐을 만들었지만은 이걸 강제할 수가 없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이 싸우지 마라 해도 그 사람들이 부처님 말 안 듣겠다. 부처님 간섭하지 마시오 할 것 같으면 부처님도 할 말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부처님이 에잇 더러운 놈들 하면서 숲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그 9년 차에는 부처님이 홀로 빠레이아 숲이라는 곳에 가서 지내게 됩니다. 중재하러 갔다가 3번이나 말했는데도 말을 안 들으니까, 내 말 안 듣는 놈들 너희들 이제 알아서 해라 하고 가버립니다. 1년을 딱 끌었어요. 1년을 끌었는데, 결국에는 중재를 하게 된 게 1년이 가도 평행선을 계속 달렸거든.

근데 딱 중재를 한 게 뭐냐면 신도들이 “어? 부처님이 왜 저 숲에 가서 혼자 저렇게 계시냐? 원숭이하고 코끼리 시봉 받아가면서” 그 이 꼬삼비 비구들 때문에 그렇거든.

그럼 저런 나쁜 놈의 자식들, 부처님 말도 안 듣는 저들한테 탁발 오더라도 밥을 안 주는 거라. 경제적인 지원을 딱 끊어버리는 거라. 딱 끊어버리니까 별 수 있나? 아무리 다툼이 있어도 이제 더 이상 다툴 명분이 아니고, 굶어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다툴 거야? 그렇게 결국 다툼을 그치면서 부처님한테 와서 인제 그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다툼이 그쳤을 때 부처님이 그 사람들에게 인제 “서로 잘잘못을 참회하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잘못한 게 있어도 “스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저지른 바라이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면, “스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럴 것 같으면 여기서는 그게 마음에 안 들어도 덮어줘야 되는 거라.

 

그래서 땅에 풀이 나서 땅을 덮어버리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 잘못을 덮어버려라. 그러면 저 스님이 잘못했으면 저 스님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참회를 한단 말이라. 그럼 나는 그것을 잘못을 받아줘야 돼. 그러고 나서 나도 저 스님한테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참회를 해서 저 스님이 받아주고 해서, 그래서 그 문제는 전혀 없는 것으로 딱 덮어버리는 거라.

그게 이제 상가의 규율입니다. 그게.

그런데 이게 자꾸 문제 되는 게 뭐냐면 덮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안 덮고 꿍해있다가 언젠가 또 그걸 끄집어내는 거라. 이미 그렇게 돼버리면 이거는 그렇게 될 것 같으면 파상가의 형태가 돼버립니다. 상가를 부수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나중에는 쫓겨나는 형태가 돼버립니다. 나중에 1차 결집하고 할 때 그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를 해드릴게요.

 

그래서 부처님이 그렇게 해라 해가지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왜 이렇게 제정을 하게 되냐면, 사리뿟따 존자가 그러면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 아무리 그래도 이 꼬삼비 저 스님들 부처님 말도 안 듣고 했는데 저 잘못을 참회한다 해가지고 그냥 받아줄 겁니까?” 그렇게 하니까“ 그래도 뭔가 질책을 하고 벌을 좀 주고 나서 받아줘야 안 됩니까?” 하는 식으로 얘기를 하거든. 그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건 그리해서는 안 된다. 다툼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바른 법으로 인도를 해야 된다.” 바른 계율로서 인도를 해야 되고 바른 법으로 인도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내가 이만큼 손해를 봤다 해서 그 부분에 대한 보상을 받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딱 부처님이 선언을 하면서 끝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나하고 다툼이 있었든 다른 사람들하고 다툼이 있었든 그 다툼에 대해서 잘못했다 할 것 같으면 그 부분에 대해서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는 내가 받아줄 때는 완전하게 덮어버리면서 받아줘야 되는 거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문제는 또 불거지게 돼 있다는 거라. 마음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 완전하게 용서를 하고 이해를 해줘 버리게 되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것이 부처님이 말한 정법이라는 거라.

"정법으로써 대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꼬삼비 비구의 분쟁이 끝을 내게 됩니다.

그게 인제 이 빠세나디 왕하고 인연을 맺게 되면서 뒤에 앙가국이 꼬삼비국 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빠세나디 왕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두 명의 그 부처님 당시 때 큰 왕 중에 하나입니다.

불교사에서 빠세나디 왕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것이 뭐냐 하면, 부처님이 이 꼬살라국에서 지낸 게 안거로 치면 25안거인가가, 45년 중에서 25년을 이 꼬살라국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절반 이상을 안거를 여기서 지내게 됩니다. 중기부터 후기까지는 거의 대부분은 이 꼬살라 왕국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마만큼 이제 큰 비중을 차지했던 그런 왕국입니다.

밥을 먹고 나서 배가 불러 있으면 수행하기 굉장히 힘이 듭니다.

빠세나디 왕도 꼭 마찬가지로 대식가였기 때문에 잔뜩 밥을 먹고 부처님한테 가서 헐떡거리니까 부처님이 그때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많이 먹는 것은 개돼지와 같다. 지금 먹는 양의 반을 줄여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또 그중에 또 반을 줄여라 하고 얘기합니다. 지금 먹는 양의 나중에 결국은 4분의 1을 먹게끔 됩니다.

 

여러분들도 먹는 것들이 적정선을 어디로 잡아야 될 것인가?

더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을 때가 적정한 겁니다. 이미 먹고 배가 부르다는 느낌이라든지, 아니면은 ‘아, 맛있게 먹었다’ 하는 생각이 나면 이미 그런 적정선을 훨씬 지나버리게 됩니다. 게송에는 보면 "배고픈 느낌만 제거하라. 배부르다는 새로운 느낌은 일으키지 말아라." 밥을 먹을 때 명심해야 될 것이 딱 그겁니다. 배고프기 때문에 먹었는데 왜 내가 배부르다는 느낌까지 일으켜야 되느냐는 거라. 먹는 것의 이로움은 있지만 먹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는 거라.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는 겁니다.

몸을 유지해야만이 부처님 가르침도 들어올 수 있고 수행도 할 수 있고, 내가 이 생에서 조금 더 나은 생활들 나은 일들을 할 수가 있는 것들이라.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내가 오욕락을 채우기 위해서 밥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거라.

밥을 먹을 때 딱 명심해야 되는 것은 배고픈 느낌만 제거하고 배부르다는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지 말자 하고 머릿속에 딱 새겨 두라는 거라. 그걸 맨 처음 말한 왕이 누구냐면 이 빠세나디 왕이라. 부처님이.

 

아, 생각났습니다. 아까 다툼이 있을 때 하는 것 다섯 번째가 계 지계, 계를 잘 지키도록 하는 것. 그것이 다툼을 해결하도록 한다.

 

그걸 쭉 한번 읽어보면 왓지 공화국도 마찬가지고, 왕사도 마찬가지고, 그러고 나서 71페이지를 펴보시기 바랍니다.

 

1차 결집부터 봐봐요. 부처님 당시 때의 상황들을 이렇게 이해를 함으로 인해서,

이 글은 스님이 태국에 있을 때 부처님 시대의 왕들이라는 책을 가지고 그걸 갖다가 번역해서 약간 가필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용어 자체가 산스크리트 용어들을 써놨어요. 그걸 갖다 빨리어로 다 바꾸고 한 것만 있습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번역을 한 거기 때문에, 현재 지금 이 세상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 부처님 시대의 왕들이라는 제목으로 그것만 차트로 해가지고 나온 것 중에 이렇게 상세하게 나온 것은, 그러니까 빨리 경전을 전부 근거를 해가지고 상세하게 나온 것은 아직껏 못 봤어요. 이게 지금 나온 지가 벌써 거의 한 30~40년 된 책인데,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도 필요하다 싶어서 그걸 그대로 번역을 한 겁니다.

요것만 그렇게 번역을 한 겁니다.

 

그다음에 제1차 결집 들어가겠습니다.

1차 결집에 상이한 부분들도 많고 또 공통된 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결집이라는 걸 빨리어의 용어로 상기띠(saṅgīti) 라고 그럽니다. 상이라고 하는 것은 함께라는 뜻이고, 기띠는, 혹시 여러분들 가띠라고 들어봤어요? 가띠라고 안 들어봤어요?

인도의 운율 시인들 노래 부르는 걸 가타 가띠 가타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우리 우리 그 뭐 장로게송 장로니게송 할 때도 테라가타(Theragāthā) 테리가타(Therīgāthā) 그렇게 됩니다. 그 가타(gāthā)에서 나온 게 그 가티입니다. 쉽게 말하면 '송출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말한다', 이렇게 '합창하듯이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앞에 상(saṅ)이 있으니까 함께 입을 맞춰가지고 그걸 같이 독송한다는 그런 얘깁니다. 그게 이제 상기띠라는 거라. 그러니까 스님들이 앉아가지고, "이띠삐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삼붓도 윗자 짜라나 삼빤노" 이렇게 하잖아. 그걸 같이 이렇게 쭉 할 것 같으면 그게 인제 상기띠라는 거라. 원래의 의미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게 결제라고 하는 것들을 하면서 상기띠의 의미가 조금씩 바뀝니다. 쉽게 말하면 같이 합송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갖다가 편집하고 교정하고 그리고 나서 기억하고 그러고 나서 그걸 다음 대에까지 전하는 일까지 하는 것들이 이 상기띠의 의미에 포함이 되게 됩니다. 지금 빨리어 사전을 보면 그 의미까지도 전부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합송하는 것만 해당이 되는 게 아니고, 그 그걸 갖다 변함없이 있는 그대로 맞는지 안 맞는지 맞춰보는 것,

 

쉽게 말하면 “아라항(Arahaṁ)” 이렇게 해야 되는데 누군가가 “아-라항” 이렇게 했다. 아-를 길게 했다. 그러면 맞춰보니까 안 맞거든. 그러면 “아 니가 틀렸다. 내가 틀렸다.” 하는 걸 맞춰봐 가지고 “아라항 하고 해라” 하고 이렇게 맞춰보는 거라.

그러고 나서 그걸 갖다가 다른 데 가서 또 해야 되니까, 내가 그걸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다가 기억을 했다가 다른 데 가서 “아라항” 하면서 또 얘기를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걸 다 전해주는 역할까지 하게 되는 거라. 있는 그대로를 갖다가 기억해서 그것을 다른 곳 다른 데에 전해주는 역할까지 하는 것, 이걸 갖다가 통틀어 가지고 상기띠(saṅgīti)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근데 왜 상기띠(saṅgīti)를 해야 될까? 왜 결집을 해야 될까? 부처님 당시 때는 그런 결집이 없었을까?

결집은 분명히 부처님 열반하고 나서 입멸하고 나서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근데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결집이라는 형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에 상기띠경이란 것들이 있고 또 다른 경들이 있습니다. 그 내용들을 보면 사리불 존자가 수를 갖다가 이렇게 쭉 나열을 해 가지고 만약에 3에 해당되는 것은 뭐가 있어요? 우리 3귀의가 있고 또 3법인이 있고 3보가 있다. 그러면 3에는 삼귀의가 있는데, 삼귀의는 불법승이다. 뭐 이런 식으로,

4가 있다. 4에는 뭐 4가지 힘이 있고 뭐 그다음에 4성제가 있고 뭐가 있고 이렇다, 그러면 사성제는 뭐 뭐 뭐다 이런 식으로, 이렇게 1부터 30까지 이렇게 쭉 나열해 가지고 부처님 한테 가서 자랑을 합니다. 부처님, 부처님이 말한 것 중에 내가 1부터 30까지 딱 정렬해가지고 이렇게 했는데 이게 맞습니까? 하니까

“그래 맞다. 니 참 잘했다.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할 때는 그 방식으로 전해주면 기억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니 참 잘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결집의 원형이 됩니다.

그것뿐 아니라 다른 몇 개의 경들이 있습니다. 그 유사한 경들이.

 

왜 그러냐면 지금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 봅시다.

이거 녹음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스님 말을 듣고 여러분들은 그 얘기를 듣고 뭐 기억을 할런지 몰라도 여기에 없는 사람들은 스님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돼요? 여기 녹음한 걸 누군가가 줬을 때 그걸 듣고 기억을 하게끔 되는 겁니다. 다른 곳에 있는 부처님 제자들 같은 경우에는 부처님 한 얘기를 갖다가 어떻게 기억할 거라? 누군가 여기에 걸 갖다가 머릿속에 기록을 했다가 거기 가서 전해줘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아마 중구난방이 될 거라 중구난방이. 왜냐하면, 부처님 가르침은 이렇게 분명히 얘기를 했는데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가지고 이렇게가 아니고 저렇게 부처님이 말한 것으로 할 수도 있다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만 그러겠어요? 계율 부분에도 그렇게 되고, 그러니까 수행법에 대한 것도 그렇고, 나름대로의 그 독특한 방식으로 자꾸 고착화돼 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은 부처님 가르침하고는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결집이라는 것들.

부처님의 가르침이 변함없이 이어질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결집을 통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사에서는 이 테라와다 불교뿐 아니라 어느 부파 그리고 대승불교를 포함한 어느 곳이든 다 결집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은 그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변함없이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잠깐만 좀 쉬고 한 5분만 쉬고 1차 결집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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