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 불교사

부처님 시대의 왕들-숫도다나왕, 빔비사라왕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004

담마마-마까 2025. 1. 14. 16:54

https://youtu.be/jyoqKCRRyQc?si=XYwF6u5BY9VAZC3L

 

* 부처님 시대의 왕들-숫도다나왕, 빔비사라왕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004

 

오늘 프린트물이 좀 많죠. 이번 주하고 다음 주는 좀 양이 좀 많습니다. 다 몰라도 됩니다. 다 알아라고 그거 적어준 거는 아니고. 상가에서, 이번 달이 지금 10월달 됐죠? 10월 26일이 까티나 찌와라 뿌자(Kathina Cīvara Pūjā)라 해서 까티나 행사 하는 날입니다.

부산에서 하는데 아마 모르긴 해도 스님이 한국에 있을 때 부산에서 아마 마지막 까티나가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해요. (수행자...) 아니 아니에요. 당장 간다는 건 아니고, 돌아가면서 스님들이 하니까 그래서 상가에 공양 올리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까티나가.

 

가끔씩 이제 공양 받으러 가면 게송하는 게 상갓사 데마(Saṅghassa dema).

이당 메 다낭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Idaṁ me dānaṁ nibbānassa paccayo hotu).

이렇게 게송하는 걸 봅니다. 근데 "상가에 공양을 올립니다. 이와 같은 보시행으로 내가 닙바나 열반에 이르는 원인 조건이 되길 바랍니다" 하면서 이렇게 공양을 올리는 거거든요.

실제적으로는 상갓사 데마는 그런 데 쓰는 것은 아닙니다. 상가가 구성돼 있는 곳, 쉽게 말하면 4명 이상의 스님이 있을 때 공양을 보시했을 때 그것이 상갓사 데마(Saṅghassa dema)가 되는 것이지, 혼자 스님이 앉아있는데, 상갓사 데마라고 해가지고 상가에 공양 올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4명 이상의 스님들이 모여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 뭔가를 한다는 데 동참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그 보시공덕하고 굉장히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그런 상갓사 데마를 할 수 있는 행사들이 그렇게 많지를 않습니다.

조금 전에 누군가가 홍삼이라고 이렇게 줬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마음은 '상가에 공양 올립니다.' 이렇게 하겠지만, 실제로는 상가에 공양 올리질 않습니다. 혼자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상가에 공양 올리는 것과 개개의 스님에게 공양 올리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납니다. 여러분들 겨우 해봐야 상가에 공양 올릴 수 있는 시기 시간이 1년 중에 몇 차례나 될 것 같아요? 아마 모르긴 해도 몇 차례 아마 안 될 겁니다.

 

그중에서 상가 스님들과 일반 대중들이 함께하는 행사가 딱 하나 있습니다.

안거도 스님들 혼자 자체적으로 해야 되고 재가자는 재가자 따로 해야 되는 거고, 포살도 마찬가지고 포살도 스님들은 스님들 대로 하고 재가자는 재가자 대로 하고, 안거 해제하는 것도 스님들은 스님들 따로 하고 다 이렇게 하는데, 딱 하나 함께하는 행사가 뭐냐면 이 까티나라고 하는 행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상갓사 데마"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기 때문에 그런 기회들을 놓치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시간에는 부처님 시대의 왕들에 대한 얘기를 할 겁니다.

저번 시간에 스님이 부처님의 탄생부터 해가 열반에 이르는 것까지 너무 이렇게 학술적으로 하다 보니까 스님이 하고 나서도 재미가 없었어요. 학술적인 거는 우리 스님들끼리 앉아서 토론 할 때나, 아니면 뭐 일반 누구와 그 부분에 대해서 논쟁을 할 때 쓰는 부분이지, 여러분들하고 그걸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사실은 아닌데, 재미가 없었어. 그래서 하고 나서 내려가면서 ‘아이, 참 내가 오늘 법을 전하는 걸 참 잘못했다.’ 재미없는 걸 왜.

물론 그게 틀린 내용을 한 건 아니고 그런 부분은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긴 하는데, 그게 여러분들하고 뭔 관계에 있다고, 부처님이 언제 태어났으면 뭐하고, 또 몇 년도에 열반했으면 뭐 할 거라? 그게 중요한 부분은 아닌데 그걸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까, ‘아, 참 내가 이번 시간에는 뭐 했노?’ 하는 그런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이번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술적으로 따지면은 아주 장황합니다. 이 부분이. 근데 그렇게 학술적으로 안 알으켜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학술적으로 할 것 같으면 재미도 없고, 그래서 프린트물을 갖다가 잔뜩 해가지고 읽어볼 사람은 읽어보고, 필요없다 싶은 사람은 안 읽어도 되고,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하고 다음 시간에는 부처님의 시대의 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일화들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면서,

승가와 재가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 것이 참 좋을까?

그리고 출가한 스님들을 일반 속가 부모들이나 아니면 그 가족이라 해서 그걸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까?

그리고 일반 재가자들도 어떻게 대하는 것이 가장 바른 것일까?

또 스님들은 일반 재가자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것들을 이 시간을 통해가지고 한 번은 조금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생각 안 하면 할 수 없는 기고.

 

그래서 먼저 부처님 시대의 왕들 중에서 첫 번째 빔비사라 왕에 대한 얘깁니다.

부처님 당시 때는 많은 강대국들이 있었는데, 결국에는 이 마가다국이 나중에는 인도를 통일하는 마우리아 왕조의 토대가 되게 됩니다. 마가다국에 처음 시작을 누가 했느냐 하면 이 빔비사라 왕이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하고 관계된 2명의 왕을 꼽아라 할 것 같으면 이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과 코살라국의 빠세나디 왕, 이 두 왕을 꼽습니다. 그 정도로 불교가 정착하는 초기 단계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왕이 빔비사라 왕입니다. 그에 못지않게 부처님의 아버지 숫도다나왕 이라고 그럽니다. 한글로는 정반왕이라고 그러죠? 정반왕과 부처님하고의 관계를 보면서 ‘아, 재가자와 특히 재가 가족들하고 출가한 스님들하고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될까?’ 하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끔 합니다.

 

여담 같지만은 처음에 스님은 대승불교권으로 출가를 했거든 해인사로. 계를 받고 나서, 그때만 해도 한참 기회가 있었지, 20대 초반이니까. 그래 가지고 계를 받고 나서 맨 먼저 간 곳이 어디냐 하면 속가 집이었어요. 속가 집에서는 출가를 굉장히 반대를 했거든.

대학교 4학년 다니다가 어느 날 훌쩍 출가를 했으니, 어쨌든 출가가 됐으니, 그거 누가 좋아할 부모가 어디 있겠어. 그래가지고 집에 탁 갔는데 다들 멀뚱멀뚱하니 이리 봐. 그래서 탁 앉아가지고, 맨 먼저 한 얘기가 뭐냐면 “삼배 올리십시오.” 이랬거든.

부모들이 기겁을 하는 거지. 출가한 것도 미워 죽겠는데, 그 미워한 자식이 이상한 먹물 옷 입고 와가지고 삼배해라 하니, 뭐 어느 부모가 그걸 삼배를 할 거라. 안 하고 멀뚱하게 서 있어요. 그래서 나도 가만히 앉아가지고 삼배를 할 때까지 제가 입 한 방울 안 열고 가만히 있었어. 누가 이기나 해가지고. 밥 때가 되니까 아들한테 밥은 먹여야 되겠다 싶으니까 결국은 삼배를 하고 밥을 주더라고.
그래서 밥이 나를 살리기도 했고, 우리 부모를 살리기도 했는데.

 

여러분도 참 그러기 힘들죠? 여러분들 자식이 출가해 갔다가 왔는데 삼배 올릴 사람이 있겠어요? 근데 처음에 길을 그렇게 딱 들여놓으니까, 그 뒤에는 집에 가면 자동이야. 자동적으로 그냥 삼배 딱딱 하는 거야. 앉아서 나는 삼배 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간에, 출가했다는 것으로 무조건 삼배 받았어. 그래서 뭐 억지로 권위를 이렇게 세우기도 했는데, 사실은 그게 참 힘듭니다.

한국에서는 출가한 스님들 되도록이면 속가하고 멀어지도록 해라. 속가 있는 곳에서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 가라.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출가하고 나서는 되도록이면 속가 있는 데 갑니다. 그래서 사원을 건립 한다든지 아니면 머물고 있는 데들은 대부분은 보면 거의 90% 이상이 속가 집이 있는 곳들입니다. 그 부근에서 하게 됩니다.

 

그게 차이점이 뭐냐면, 나는 출가할 때 부모 허락을 받지 않고 출가했단 말이라요.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출가가 안 됩니다.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반드시 스폰서라는 것이 붙게끔 됩니다. 이 출가시켜 주기 위해서, 그리고 이 출가한 스님에게 그 스님이 바르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들을 해야 될 것들을 갖다가 누가 하느냐면 이 가족과 부모들이 하게끔 합니다.

처음엔 태국에 가서 계를 받을 때도 나는 거기에 뭐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깐 태국 사람들을 이렇게 스폰서로 5명을 임명을 해주더라고. 그 사람들이 이 가사도 구해주고 바리때도 구해주고 그래가지고 이제 출가를 시키고, 출가하고 나서도 때때로 와가지고 항상 공양 올려주고, 이렇게 뭐 부족한 게 뭔가 해가지고 그걸 이렇게 채워주고 이렇게 하는 거라.

 

그거는 우리가 출가한 스님들은 일절 경제적인 활동을 안 하기 때문에 누군가 그래 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거든. 그렇다고 발가벗고 살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그 부분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가족과 주변 친지들이 담당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당연히 출가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출가를 할 수가 없어. 결혼한 사람은 당연히 배우자가 하게끔 돼있습니다. 그게 원래 원칙인데, 한국에서는 뭐 허락하든 말든 간에 자기가 하고 싶다면 그냥 하는 거지. 사실은 그게 원칙에는 어긋나게 됩니다.

 

이 정반왕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정반왕이 부처님 출가하라 해가지고 뭐 출가 허락해가지고 출가했어요? 아니죠. 자기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아, 이건 도저히 내가 여기서 이 생로병사를 겪는 거 이것들 보는 것이 너무 힘들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이 아버지하고 인제 토론이 붙었어요. 나 여기서 못 살겠으니까 나 출가할란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아버지가 에이 그러지마. 내한테 그럼 뭐 줄 거요? 네가 원하면 왕도 내가 넘겨주겠다. 그리고 네가 부족할 것 같으면 집이 지금 3채가 있는데, 3채가 부족하면 더 만들어 주겠다. 이렇게 꼬시니까 나 그거 다 필요 없다는 거라.

아무리 왕위를 넘겨줘도 나는 언젠가는 그 왕위에서 내려와야 되는 거고, 아무리 집을 많이 줘도 내가 죽고 나면 그게 내 집하고 뭔 관계에 있느냐는 거라. 다른 거 주지 말고 내 안 죽도록만 해주면 나 여기 있을게. 어느 부모가 자기도 죽는데 아들 안 죽도록 만들어 줄 부모가 어디 있어? 그거는 정반왕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래가지고 이제 부처님이 출가를 하게 돼요.

출가를 하더라도 아버지가 허락해가지고 출가를 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왕이 있는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이제 찾아가게 됩니다. 물론 그 전에 아버지가 이제 그 출가한 아들이 완전하게 깨달음을 얻어가지고 붓다가 됐다 하는 소리를 듣고 그랬으니까, 한번 보고 싶을 거 아니라. 그래서 “한번 와도” 하고 이렇게 청했는데, 이놈의 청하러 보낸 사람마다 가가지고는 그 말을 못하고 다들 머리를 깎아버리네. 부처님 보고. 그러니까 이건 뭐 말도 못 꺼내고 있는 거라.

근데 그중에서 마지막에 보낸 이제 깔루다이라고 하는 부처님 어릴 때 친구가 있었어요. 그 깔루다이가, 깔루다이도 출가를 해버렸어. 출가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왕이 나를 보낼 때 뭔가 목적이 있었는데’ 하고 생각을 해보니까, ‘아들인 부처님을 한번 뵙고 싶으니까 한번 왕궁으로 오십시오. 하는 말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제 출가하고 나서 그 뒤에 이제 부처님한테 얘기를 합니다.

 

그 얘기를 이제 듣고 부처님이 이 왕이 있는 그 까삘라왓투로 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가비라성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죠. 가비라성으로 가게 됩니다. 가비라 성으로 탁 왔는데 와서 보니까, 이 스님이 출가했을 때와 꼭 마찬가지라. 누구도 와서 부처님한테 와서 인사할려고 하지 않는 거라. 부처님 그때 나이는 이제 겨우 첫 안거를 지내고 나서 그 겨울 2월 달이니까. 그다음 해 2월 달이니까 두 번째 안거를 지내기 전입니다. 겨우 몇 살입니까? 36살. 그러니까 36살이 되는 거죠. 36살짜리한테 인사할라니까 인사할 사람이 없어. 다 어른들이고 자기 조카뻘 되고 이러는데 왕이 와서 인사할 거야? 그러니까 아버지가 와서 인사할 거야? 누가 와서? 아무도 인사를 안 하려고 하는 거라.

 

그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독사한테 물리면 잘못하면 죽습니다. 그게 만약에 어린 독사라고 하더라도 독이 있기 때문에 물리면 죽습니다. 그러니까 독사는 독사인 것이지, 독사 새끼라 해서 내가 그걸 물렸다 해가지고 안 죽는 것은 아니라. 그렇죠? 그렇잖아.

그와 마찬가지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내가 지금 나이가 어리다 해가지고 그 법이 수승하지 않고 아니면 가르치는 능력이 없고 여러 사람들을 인도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아무리 그렇게 해도 알아듣나, 나이 어린 사람이 내가 붓다다 하더라도 누가 인정을 해줘야 되니까. 그래서 그때 이제 부처님이 신통을 부리게 됩니다.

여러 가지 신통을 부리니까 그때 사람들이 싯닷타 왕자가 옛날의 왕자가 아니구나, 완전히 바뀌었구나, 하고 그때야 인정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인사를 하게끔 됩니다.

왕도 마찬가지로 왕이 맨 먼저 인사를 하게 되는 거죠. 왕이 인사를 하는데 그 이하는 이하동문이라. 다 인사하게끔 됩니다. 왕도 깜짝 놀래서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서 인사를 하게 됩니다.

 

왕이 살아있을 때 딱 세 번 부처님한테 인사를 하거든요. 첫 번째가 뭐냐면 태어났을 때 태어나고 나서 어린 애기한테 이름을 지어주고, 이 애가 어떤 관상을 타고났는가 하는 걸 갖다가 알기 위해서 아시타 선인을 초청했을 때, 아시타 선인의 머리 위에 애가 발을 갖다 탁 올리거든. 그래서 그 모습을 보고 얘는 보통 애기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 가지고 그때 처음 인사를 했고, 두 번째는 8살 때 농경제 나가 가지고 8살짜리가 앉아서 저쪽에서 농경제하고 뭐 빰빠라 하고 놀고 있는데도 거기 안 가고 나무 아래에 앉아가지고 명상에 잠겨있는데, 오전에 나무 그늘이 요렇게 보고 있는 데서 이렇게 앉아있는 상태면 나무 그늘이 있는데, 오후가 되면 나무 그늘이 요쪽이 되면 요쪽은 햇빛이 비치게 된단 말이라. 앉아있는 곳이. 그런데도 햇빛이 안 비치고 나무 그늘이 왕자를 이렇게 감싸고 보호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얘는 보통 애가 아니구나 해가지고 그때 두 번째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처음으로 인제 이 까삘라 성을 방문했을 때 그 여러 가지 신통을 하는 것을 보고 ‘아, 인제 완전하게 해탈하신 분이구나’ 하고 존경의 예를 올리게 됩니다.

그렇게 일생 세 번 자기 아들한테 인사를 하게 되는데,

 

어쨌든 그 인사를 한다는 것은 이제는 내 아들이라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는 스승으로서 예우를 한다는 얘기입니다. 예우를 한다는 가라. 그래서 인제 인사를 하고 그러고 나서 그다음 날 이제 부처님이 당연히 왕궁에 와서 공양을 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이제 공양 준비를 하는데, 부처님은 왕궁에 가서 공양을 안 하고 맨발바닥에 그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탁발을 하거든. 그 왕이 깜짝 놀랜 거지. 그런 모습을 다른 사문들을 통해서는 봤지만, 설마 자기 아들이 왕족이 왕족 중에서 앞으로 왕이 될 사람이 저 맨발바닥에 탁발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거라. 그래가지고 부리나케 가가지고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 내 맛있는 밥 해놨는데 와 오지 않고”

그러니까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초청을 해야만 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스님들도 어디를 가더라도 가고 싶다 해가지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집에 뭐 아무 일도 없이 “스님, 와서 공양드십시오.” 하지도 않는데도 가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초청 안 했으니까 부처님은 역대 부처님들이 해왔던 전통대로 그렇게 탁발을 하신 거라.

 

그때 이 게송을 부처님이 들려줍니다. 페이지 한번 넘겨볼까요?

25페이지, 요 우띠테 니빠마제이야 하는 부분이 있죠. 중간 아래 정도에

"웃띳테-납빠맛제이야, 담망 숫짜리땅짜레-. 담마짜-리 수캉 세-, 아스밍 로-- 빠람히짜."

"일어나라 깨어 있으라. 그리고 자만하지 말아라. 종교적인 삶을 실천하라. 덕을 쌓는 사람만이 현세와 내세에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행복한 삶을 이끈다)."

 

뭐 가슴에 와닿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들은 과연 항상 깨어 있고 항상 뭔가 바른 일을 하려고 하고 항상 그렇게 실천하고 있는가? 바른 걸, 어쨌든 그게 바른 거라 할 것 같으면 그걸 실천해야 되는 거라. 부처님도 역대 부처님들이 다 탁발했듯이 부처님도 그렇게 그래서 탁발을 한 거라.

여러분들은 재가자로 살아가면서 과연 바르고 틀리고 하는 걸 갖다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라. 아까 해피스님이 얘기할 때 뭐 불탐 얘기하고, 그다음에 성냄이 있는 거, 성냄이 있는 거 나쁜 건 분명히 알고 있고 욕심 안 가지고 살아가는 거 그거 좋은 줄 알고 있다는 거라. 그러면 이거 좋은 줄 알 것 같으면 그걸 실천하고 있느냐는 거라.

부처님은 부처님이 나아갈 길이 있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나아갈 길이 있다는 거라. 그럼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나아갈 길들을 가야 되는데 그걸 가고 있느냐는 거라. 그렇게 해야만이 바른 것들을 실천해야만이 덕을 쌓게 되는 거고, 그리고 덕을 쌓으니까 당연히 이 생을 살아가는데 편안하고 좋고 행복한 거고, 다음 생도 당연히 좋은 세상을 만나게 된다는 거라.

 

그 얘기를 듣고 이 정반은 땡 머리를 치게 됩니다. 아, 그 전에는 ‘내 새끼’ 하는 생각만 딱 가지고 있었는데, ‘내 아들’이라는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는 쉽게 말하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 많은 수행자가 있어도 밥 해 먹이지 않았는데, 아들에게는 당연히 먹일 생각을 합니다. 내 자식에 대한 집착들 요걸 가지고 있는 거라. 이제 그거 이제 놓아버려야 된다는 거라. 놓아버리고 선한 일이다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아니라 부처님 말고 다른 수행자 다른 비구들이라고 하더라도 공양을 올리라는 거라. 그래서 탁발을 하고 있는 부처님이나 아니면 부처님 말고 다른 수행자들이라 하더라도 공양 올리라는 거라. 탁발 올리라는 거라. 그게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인데 당신 일을 왜 안 하고 있느냐는 거라. 이 행복하게 되는 일을 왜 안 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때 머리를 딱 치고 , 이게 진리구나하는 걸 갖다가 딱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길로부터 벗어나질 않게 됩니다. 그걸 뭐라고 그럽니까?

수다원이라고 그럽니다. 처음으로 부처님한테 이 얘기를 딱 듣고 인제는 내 나쁜 짓 안 해. 나 이제 항상 좋은 일 해. 좋은 일 하면서 공덕 쌓는 일 많이 하고 그래서 내 행복한 일을 할란다 하는 거라.

이제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절대 화 안 내고 절대 욕심 안 부리고 남한테 해코지 안 하고, 해코지 할라 하면 ‘어, 아닌데. 내가 왜 불행해지는 일을 내가 왜 해?’ 하면서 탁 그만둔다는 거라.

수다원에 이른 사람 있어요? 탁 그 얘기 듣고 수다원에 이르러야 될 거 아니라.

 

그러고 나서 그다음 게송을 또 하게 됩니다.

"도덕적인 생활은 뭐 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함을 가지고 실천되어야 한다.

담마를 진지하게 실천하는 사람만이 현세와 내세에서 행복을 얻는다."

여기도 뭐 하는 척하는 사람 많죠? 괜히 있는 척, 잘 아는 척, 그런 것들 되게 많이 할 거라. 특히 여자들끼리 만나 얘기나누면 더하지. 시샘하고 뭐 그냥 난리가 나. 뭐 하는 척하는 것들, 사회생활하는 데 가끔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이 행복하게 되고 평온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차라리 뭐 하는 척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진지해지라는 거라. 조금 더 진지해지라.

그래서 그전에는 수다원이 돼도 그래도 아 남한테 조금 잘 보이고 싶고, 그래도 내가 뭘 보면 이렇게 맛있는 거 보면 ‘아, 이거 저거 먹고 싶다’ 하는 생각이 일어났는데, 이제는 그것 조차도 하지 마라는 거라. 부처님이.

 

스님들도 가끔 그런 게 있습니다. 법문을 이렇게 다니다 보면 스님들 스타일이 있어요. 어떤 스님들은 법문을 하면서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곳에 대한 자랑을 길게 합니다. 그러면서 거기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있는 곳에 와주길 바랍니다. 테라와다 스님들을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대승불교 스님들 얘기합니다. 다른 거기에 있는 신도들을 자기 절로 빼가려고 무진하게 노력합니다. 말은 안 해도 “안 와도 돼” 뭐 하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는 거 보면 “여기 와봐. 오면 좋은 거 많아”하고 자기 절로 빼가려고 하는 것들을 많이 봅니다.

물론 가면 뭐 좋은 거 얻을지는 몰라도 이미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스님이 바르게 부처님 법을 전해주는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지. 적어도 부처님 법을 전해줄려고 할 것 같으면 법만 전해주면 돼. 내 선원이 어떻고 저떻고, 요 뭐 좋다, 이 수행하면 뭐 어떻게 좋은 일이 있고 다른 수행 다 틀렸다, 뭐 하러 그리하느냐는 거라. 넘 수행 잘못할 것 같으면 잘못한 걸 탓하지 말고, 그 사람을 갖다가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줘야 되는 것이지, 맨날 탓만 합니다. 그러면서 “여기는 그거 아니다” 하고 익은 척합니다. 좋은 척합니다. 실제로는 거기 가봐야 뭐 별 거 없어. 내나 비슷비슷해. 똑같애.

 

재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재가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생활들을 영위하면 안 됩니다. 어떠한 경우도 살아가는 것은 진지해야 됩니다. 그럴 시간이 어딨어요? 여러분들이.

지금 당장 부처님 말씀대로 바른 생각가지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하는 것도 모자랄 판에 왜 자기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들을 왜 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런다고 해가지고 지금 생활이 감춰지고 나아지는 것도 아닌데도 왜 그러냐는 거라.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느냐는 거라.

 

수다원에 들어갔으면 이제 법에 대해서 눈을 떴으면 그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어딨어? 더 계속 나아가야 되지. 삼매를 경험했으면 삼매 경험한 것에 대해서 왜 좋아라 하고 거기서 머물고 있느냐는 거라. 그거가 끝이 아닌데. 더 나아갈 게 있으면은 그냥 무조건 그 길로 쭉 나아가야 되는 거라. 그것 또 줄기차게 진지하게. 그게 아니다 싶으면 놓아버리고 나아가야 되는 것들이라. 뭐 인척해가지고 뭘 가리려고 하고, 그걸 감추려고 해가지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싶으면 그건 놓아버리라는 거라. 놓아버리고 그걸 바꾸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라는 거라.

 

이 얘기를 듣고 정반왕은 사다함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가식적인 생활들을 안 한다는 거라. 참 아들 잘 둬가지고 단방에 그냥 두 방만에 그냥 착착착 올라갔네. 근데 똑같은 법문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수다원에 이르고 어떤 사람은 사다함에 이르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스님의 법문 듣고 선근이 무르익은 사람은 탁 그 법문 듣고 수다원에 탁 이르는데, 아직은 그게 다들 안 되는가? 요놈의 거 뭔가 세속에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 가지고 탁 내려놓고 들으면 돼버리는데, 그걸 못하니깐 사량분별을 해버리니까, 수다원이 아니라 이런 삼매도 체험 못하네. 기쁨도 안 일어나네. 그러니까 스님이 법문하면 법문한 이익이 이만큼 많아야 되는데 맨날 요마만큼만 가져요. 이래가 되겠나?

 

어떤 경우든지 여기 있는 스님뿐만 아니라 다른 스님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법을 설할 때는 그 법만 듣도록 자꾸 노력을 해보십시오.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게 어렵고 쉽고 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냥 다 내려놓고 그냥 듣기만 해봐요. 그냥 듣기만 하면 수행하는 자는 그걸 듣는 것으로써 수행을 하게 될 것이고, 또 이해할려고 하는 자는 그것들에 대한 이해, 그중에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쏙쏙쏙 받아들여서 삶의 지표로 삼게 되는 거라.

그러고 나서 때가 무르익은 사람은 그것으로 인해서 환희심이 일어나게 되는 거고, 더 무르익은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도와 과에 이르게 되고, 그런 것들이라.

그거는 법을 설하는 사람이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듣는 사람의 차이 때문에 그러는 거라. 알겠죠? (예)

여기 우리 테라와다 담마스쿨에도 지금 현재 계속 세 스님들이 번갈아 가면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취사분별 하지마요.

저번 시간에 얘기했잖아. 저번 시간에 스님이 참 법문 하는 거 강의하는 거 참 재미없게 했다고. 재미없게 할 수도 있다는 거라. 근데 그걸 그냥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으면 여러분들은 그래도 조금 더 나은 사람들이 됩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빠졌냐.

 

그러고 나서 이제 쉽게 말하면은 속가의 아버지와 출가한 아들의 관계가 이런 것들입니다.

출가한 아들은 자기가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깨달음을 속가 아버지에게 전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법을 바르게 알고 들었고 수행해서 체험한 사람이 그걸 자기 아버지에게 전해주지 않으면 누가 전해줄 거라?

그러니 당연히 내가 수행 열심히 해가지고 어느 정도 과위에 오르면 선원을 만들고 그리고 머물 곳이 속가 아버지 속가 부모가 있는 곳 가까이 있어야 되는 거라. 어느 누구보다도 인연이 더 깊었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에게 법을 안 전해주고 누구에게 전해준다는 거라?

부처님도 처음 법을 설한 상대가 5명이 6년을 같이 수행했던 수행자들이라. 그 사람들이 부처님을 버리고 떠났든 어쨌든 간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라. 출가하는 걸 허락하지 않아 가지고 내 혼자 가서 출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깨달음을 이루고 뭔가를 얻었으면 법을 전해줘야 되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가장 먼저 부모들 가족들이 있는 곳들이라.

 

여러분들이 법을 이마만큼 알았다 할 것 같으면 가장 먼저 그 법을 전해줘야 되는 것들은 가족들이라는 거라. 가족조차도 전해가지고 그 법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데 애나콩콩 친구가 따라오고 멀리 있는 사람이 방송한다 해가지고 애나콩콩 그 법을 들을 것 같아요? 천만의 말씀이라. 안 그렇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하나를 배우고 하나를 이해했을 것 같으면 그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인해서 가족들은 그것을 보고 ‘아, 저 사람이 저것에 대해서 알고 있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는 거라. 그럼 그 사람도 그것들에 대해서 따르게 되는 거라. “엄마 법문들으러 가야 돼” 하면서 “밥 있는 거 챙겨 먹어” 하면서 나와놓고 뭘 가르쳐 줄 거라?

 

그러고 나서 이 숫도다나 왕이 불환과에 이르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뒤에 이제 석가족의 종족들이 많이 출가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데려가버렸든 아니면 지가 원해서 출가를 하게 됐든 많은 사람들이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근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인 부처님을 공양청을 했어요. 공양청을 하고 나서 이제 법문을 듣고 나서, 부처님한테 여담으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옛날에 부처님 육년 고행할 때 사람들이 당신 아들은 죽었다 하고 나한테 전해주더라. 여러 사람이 그 얘기를 하더라. 근데 나는 안 믿었다. 내 아들은 절대 죽을 리가 없다. 왜 그랬어요? 왜 그렇게 믿지 않았느냐는 거라. 내 아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거라.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그 확신이 있었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자식들이 절대 죽지 않는다. 확신할 수 있어요? 왜 그런 확신이 들을까? 딱 두 가지만 하면 그런 확신이 듭니다.

내 아들은 절대 오계를 어긴 적이 없다. 여러분들 불교신자면 당연히 오계를 지켜야 됩니다. 매일 평생 오계 안 어기고 이때까지 산 사람 손 들어봐? 아무도 없지. 앞으로 오계 어길 사람, 어기고 살 사람 손 들어 봐? 그럼 앞으로는 계속 오계 지킬 거네? (예)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절대 여러분들은 불의의 사고로 죽지를 않습니다. 여러분들 아들이 자식이 그렇게 지키도록 할 것 같으면 그 아들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누리는 수명을 그대로 누리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거라.

 

두 번째 법에 따라 살아갈 것, 바르지 않는 것은 하지 않고 바른 것들만 따라가는 것들입니다. 그게 나쁜 것이고, 나쁜 일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고, 나쁜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 할 것 같으면 절대 그걸 따라가지 않고, 바른 것들만 따라가라는 거라. 행복을 주고 이익을 주고 그래서 나에게 큰 공덕을 쌓게끔 하는 일이면 그거 따라가라는 거라. 법에 따라서 살아가야지.

짯따로 담마 왓단띠 그럽니다. 스님들이 대부분 축원할 때 그 게송을 합니다. 담마 따라서 살아가라. 진리 따라서 살아가라는 거라. 모든 사람들은 그 진리 따라 살아가라 라고 얘기를 합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계 지키고 진리 따라 살아가면 됩니다. 그 두 개만 하면 절대 급작스럽게 죽고 자기 수명을 누리지 않고 죽는 법이 없다는 거라.

 

내 아들은 이 2가지는 했다는 거라. 이 2가지는 했으니까 당연히 누군가 당신 아들 수행하다가 죽었다 해도 안 믿는다. 절대 그럴 수가 없거든. 실제로 자기들 가문은 대대손손 내려오면서 장수했지 단명한 사람이 없어. 급작스럽게 무슨 일이 있어가지고 죽은 사람도 없어. 자기 수명 다 누리고 죽어. 실제로 정반왕도 그 자기 수명 다 누리고 아라한이 돼서 죽고, 부처님도 자기 수명 다 누리고 80세 되어서 돌아가시고, 다 그렇다는 거라. 자기 일가족들은 거의 대부분 그렇다는 거라. 마하빠자빠띠 부인도 마찬가지로 93인가에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아난다는 120살에 돌아가셨어요.

다 그렇게 장수를 한다는 거라. 왜? 이 두 가지를 했기 때문에.

이 얘기를 듣고 정반왕은 불환과에 이르르게 됩니다. 불환과 얻기 참 쉽죠이.

 

아라한이 된 것은 경전마다 조금 차이가 납니다.

버마 주석서 같은 경우에는 뭐라고 하느냐면 아라한에 이르고 나서 죽음을 맞았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재가자가 아라한이 되면 그 주석서에 의할 것 같으면, 그다음날 새벽이 오기 전까지 바리때 하고 가사를 구해가 출가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등지어야 돼.

그러고 나서 인제 정반왕이 부처님 말씀대로 계속 수행하고 닦았는데 아라한이 탁 됐는데, 되고 나니까 재가자였단 말이라. 출가하지도 못하고 하니까 열반에 드셨다, 그렇게 이제 얘기를 하게 되고,

또 다른 주석서에는 보면 그거하고는 조금 차이가 나게끔 얘기합니다.

 

나이가 먹어가지고 인제 쇠약해지고, 병이 들어가지고 죽음을 맞게 됐을 때, 그러고 나서 이제 마지막으로 아들인 부처님 한번 보고 싶다 하고 마음을 먹고, 부처님을 부르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다른 곳에 있다가 아버지를 보러 이렇게 오게 됩니다. 그래가지고 아버지가 죽음을 맞는 상태에서, 부처님이 아버지한테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나눠줍니다. 그러고 나서 아라한이 되고 그러고 나서 열반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어떤 것이 맞는지는 스님도 모릅니다. 그런데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하면 설혹 나는 그렇게 믿고 싶어. 설혹 정반왕이 아라한이 안 됐다 하더라도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는 아들인 부처님이 가서 그래도 아버지 얼굴 한번 보고 “잘 가시오. 잘 살았소” 하고 손 한번 잡아준 것이, 그게 그게 아무리 부처님이라도 아들의 도리가 아니었나 하고 나는 이걸 믿고 싶어.

 

스님도 제 모친이 돌아가실 때 그렇게 했거든.

부산에 있을 때, 암이 들어가지고 이제 위중하고 할 때 시시때때로 가서 저녁에 가서 시봉도 하고 이렇게 하다가, 인제 그 전날에, 그 전날이 백중 앞날이라. 백중 앞날인데 모친이 그렇게 ‘아, 내가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것 같아’ 이러거든. 그날 이제 부산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모친은 진주에 계셨거든. 그래서 그렇게 얘기했어요. “내일 내가 올 테니까” 그전 같으면 내가 저녁 때 되면 갔거든. 왜냐하면, 절에 있기 때문에 절 일 다 보고 나서 인제 부산에서 신나게 인제 진주까지 가가지고 이렇게 했는데, 그날 그다음 날이 이제 백중이라. 백중 행사를 해야 되기 때문에 법문도 하고 해야 되니까.

“내가 백중 보고 올 것 같으면 아무리 빨리 와도 여기 오면 1시나 2시나 된다. 그때까지 죽지 마” 이래 하니까 버텨보겠다고 그는 거라. 그래가지고 진주로 갔어요. 마지막 숨 거두기 직전이었거든. 가서 마지막에 손 딱 잡으니까 엄마가 눈만 깜빡하더니, 힘이 쫙 떨어지더라고. 아들은 적어도 출가한 아들이지만 그 정도는 해야 될 거 아니라. 자기 부모인데.

여러분들 부모한테는 당연히 그리 해야 되겠지. 원수가 됐든 어쨌든 간에 부모는 부모일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당연히 그 임종 순간을 지켜줘야 되는 거라.

 

특히 불교를 배운 사람들이면 임종의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누누히 경에 설해져 있습니다. 그때 일으키는 마음이 다음 순간 다음 생을 좌우한다는 건 여러분들이 더 잘 압니다. 왜 배운 사람들이 그걸 해주질 못하느냐는 거라. 이거를 죽고 나서 사십구재 하면서 ‘어이 어이’ 하면 뭐 할 거라? 그거. 반드시 가까운 친구든 아니면 여러분을 가족이든 임종의 순간에는 그 사람이 좋은 생각을 일으키도록, 그리고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자꾸 해줘야 됩니다.

 

아버지와 출가한 아들의 관계는 그래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출가한 아들인 부처님이 정반왕 정사 잘못 한다고 야단친 적도 없고, 그 나라 일들에 대해서 신경 쓰는 건 아닙니다.

단지 법을 전하는 부분, 그리고 자기의 가족 친지들이 아플 때는 아무리 부처님이라고 하더라도 가서 그것을 시봉한다는 거라. 그게 출가와 재가자의 관계입니다.

 

이게 이제 그 부처님의 나라 까삘라왓투 가빌라성에서의 일인데, 그리고 가장 또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뭐냐면 로히니 강이라고 하는 강이 있습니다.

그 강에 분쟁이 있게 됐을 때 부처님이 한 얘기가 참 감동적입니다. 석가종족하고 이 꼴리야 종족이 서로 결혼 동맹으로 인해서 이렇게 살아가는데, 그래서 부처님 출가하기 전에 부인 야소다라도 꼴리야 종족이고 그렇습니다. 근데 이 두 종족이 로히니 강을 경계를 두고 요쪽은 석가종족 요쪽은 꼴리야 종족 이랬거든.

이걸 사이에 두고 있는데, 물이 많을 때는 문제가 아닌데 물이 적게 되니까, 서로 이걸 끌어가려고 하다가 분쟁이 붙게 됩니다. 싸움이. 그래가지고 서로 전쟁을 하게끔 됩니다. 부처님이 깜짝 놀래가지고 이 자리에 가봅니다. 사실 여러분들도 싸움이 있는 것은 보면 사소한 일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렇죠?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물을 이렇게 만약에 예를 들어서 한 사람이 물꼬를 터가지고 물을 대고 그러고 나서 물을 막으려고 했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이걸 볼 것 같으면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강물을 다 빼간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소한 오해 때문에, 이 물을 갖다가 저들이 다 독차지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라. 그냥 그 사람한테 물어봐서 “물 언제까지 쓸 거냐?” 하고 물어봤으면 “나 이 잠깐만 대고, 완전히 해갈이 안 되더라도 물이 부족하니까 내가 물 닫아 줄게. 그럼 너가 써” 이렇게 했을 것 같으면 서로 사이좋게 적은 거라도 할 건데, 이놈의 대화가 없으니까 그렇게 오해를 해버리네.

 

집에서도 화목한 가정들은 보면 대부분 사소한 문제로 다투는 법이 별로 없습니다.

사소한 것으로 해가지고 자꾸 다투는 것들을 보면 서로 간에 말이 없습니다. 서로 간의 생각들을 가지고 오해들을 하게끔 됩니다. 사소한 시비로 이 두 종족이 다 목숨을 잃을 상황에 오게 된 거라.

여러분들은 안 그럴 것 같아요? 좀 대범해 봐. 그 쪼맨 거 갖고 싸울라 하지 말고.

뭐 그거 대단하다고 물 좀 빼가면 뭐 얘기해서 “물도 좀 써야 되니까 좀 나눠 줘” 할 것 같으면 서로 얘기해서 중재해갖고 물도 쓰기도 하고 하면 좋을 거 아니라. 왜 말도 안 하고들 있다가, 서로 지가 이 강물을 다 차지할려고 하느니, 니가 다 차지하려고 하느니, 하면서 싸우고 있느냐는 거라.

여러분이 일상사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남의 말을 믿지 말아라. 대부분 사람들은 남이 하는 말을 믿습니다. 근데 그 말이라는 게 있는 그대로를 갖다가 전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이게 몇 걸음 이렇게 걸러서 올 것 같으면 뻥튀기 되고 곡해되고 합니다. 그러면 실제 사실하고는 많이 틀리게 와 있습니다. 그럼 그걸 갖다 믿어버리면 실제 일어났던 사람은 그 얘기를 만약에 들을 것 같으면 기가 찬 거야. 그럼 싸우는 거야 둘이서. 왜 남의 말을 갖다가 그냥 있는 그대로 들어갖고 그 사람한테 그랬다고 단정을 짓느냐는 거라. 그 사람한테 물어봐 가지고 “니 이랬나 저랬나?” 하고 물어봤을 것 같으면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하고, 그러면 자기가 거기에 맞춰서 판단하면 되는 건데, 남의 말만 믿어놔 놓고 딱 단정을 지어버린 거라.

 

해피 스님은 윤회를 부정한다고 딱 판정을 지어버렸다 하는 거라. 내가 물어봤거든. 전혀 그런 적이 없었대. 근데 이게 곡해 되는 거라. 그래 놔놓고 어떤 사람이 해피 스님은 윤회를 부정했다. 자기 은사 스님과 마찬가지로 자기 은사 스님이 그랬으니까, 이러면서 고정화시켜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해피스님이 법문하는 데는 안 간다, 그런 적이 없는데.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든지 남의 말을 그대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대로 듣고 믿어버리면 안 됩니다. 확인하기 전에는 어떤 것이든 그것을 사실로써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로히니 강에서 주는 교훈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또 하나는 화합하라. 어떠한 경우도 화합이 우선입니다. 차라리 물이 다 말라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비 오면 또 채워지게 돼 있는 거라. 그런데 지금 당장 그것이 목마르다 해가지고 화합을 깨어버린다는 건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화합이 우선입니다. 어떠한 경우도 모여서 무언가를 한다, 아니면 다른 사람과 무언가를 한다, 그러면 서로 불편하고 서로 말을 안 하고 또 서로 적대시하는 것은 안 된다는 거라.

차라리 서로 적대시 할 것 같으면 안 만나. 만나지 마. 또 그런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말을 하지마. 내가 말을 함으로 인해서 서로 불편해지고 적대시되고 화합을 깨버릴 것 같으면 왜 그러고 있느냐는 거라. 자기 딴엔 바른말 한다고 하지만은 그게 화합을 깨는 일인데 그걸 왜 하느냐는 거라. 그때가 아니라도 다른 때 그 사람이 그 부분에 대해서 들먹일 때라든지 아니면 서로 좋을 때 그 얘기를 할 것 같으면 충분히 풀어갈 수 있는 건데 꼭 그때 해야 될 이유가 뭐 있어요? 화합이 우선이다.

화합이 우선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어떤 것도 전제 조건으로 성립이 안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힘을 합하면은 어떤 경우도 이겨나간다. 혼자보다는 여러 사람의 힘이 낫습니다. 그럼 힘을 합하면 반드시 그 문제는 해결해 나갑니다. 혼자 끙끙 앓지 말고 그 문제를 같이 풀려고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마지막은 파멸에 이르는 길은 내분으로 일어납니다. 밖에서 쳐들어와서 파멸에 이르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서로 쪼가리가 돼버리는 내분이 일어나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망해. 내분을 일으킬 만한 일들은 하면 안 된다는 거라.

 

살아가면서 이 로히니 강에서 여러분들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은 그런 것들입니다.

 

부처님이 이 문제를 중재를 해줬지만 실제로는 가뭄은 계속됐고 그런데도 문제 해결은 안 됐어, 물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데도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갈라 나누면서 그걸 견뎌나가는 거라. 그러고 나서 다른 데서 물을 끌어와 가지고 조금 더 보충을 하고, 그러고 나서 한참 뒤에 비가 오니까 이제는 그런 문제가 없어져버리는 거라. 목숨을 잃을 일도 없었고 서로 화합을 깰 일도 없었고 서로 오해할 일도 없었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짱이에요. 짱!

여러분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운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문제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바른 길인가?

까삘라왓투 숫도다나 왕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게 빔비사라 왕에 대한 건데, 빔비사라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불교사에서 봤을 때. 아마 빔비사라 왕이 없었을 것 같으면 과연 불교가 지금 이 형태로서 유지가 돼 나갔을까? 하고 생각이 될 정도입니다.

부처님하고 빔비사라 왕하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만났을까? 안 만났을까? 만난 적이 있을까? 없을까?

(해피스님: 만났습니다.) 언제?

(해피스님: 해탈하신 뒤에 ...)

어디 경전에 어디 그런 부분이 나와요? 나는 빨리어 경전을 아무리 뒤다봐도 그런 부분이 안 나오던데. 빨리어 경전에는 그런 부분이 없습니다. 한역 4분율 5분율이나 이런 데에서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부처님하고 빔비사라 왕은 만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뭐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수행하고 있는 부처님한테 가서 “왕국 반을 줄 테니까 나하고 같이 이 왕국 운영하자” 그 말 안 들으니까 “그럼 완전히 깨달음을 이루고 나면 나한테 와서 법을 전해 주시오.” 뭐 이랬다고 그렇게 하는데, 그거는 한역 경전에만 있는 겁니다. 빨리어 경전에는 그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빔비사라와 만난 적이 있다, 없다? 없습니다! 단언을 내려도 됩니다.

 

그 바쁜 왕이 일개 무슨 무리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혼자 고행하는 고행자한테 뭔 일이 있다고 거기 가서 그걸 만나고 여기 앉아있겠어?

그것도 이 마가다 왕국이 얼마나 큰 왕국이냐면 지금의 방글라데시 그다음에 남인도 앞에 남 위하라주라고 합니다. 위하라주가 굉장히 큽니다. 지금 부처님 유적지가 있는 곳들이 거의 대부분이 위하라주입니다. 그중에 남위하라, 위쪽으로는 북쪽으로는 꼬살라국이고 아래로는 이 마가다국인데, 왼쪽으로는 델리 쪽이 있는 곳 그쪽이 됩니다. 나중에는 그쪽에 있는 나라들 그다음에 서쪽에 있는 지금 웃제인이라고 하는데 웃제인까지도 다 병합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큰 나라야? 경전에는 뭐라고 나와있느냐면, 인구가 수도에 있는 인구만 1억 몇천이라고 나와 있어요. 수도라고 하는 그 라자가하라고 하는 도시에만. 그게 얼마나 큰 나라예요? 쉽게 말하면 그 나라가 나중에 결국 인도를 통일하는 나라인데, 인도 지금 인구가 얼마라요? 몇 억이고? (해피스님: 13억이라고 이런 얘기를 하죠. 자세히 파악이 안 되고)

하여튼 그래도 옛날에도 굉장히 많았다고. 많았는데 그중에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나라가 그 인제 겨우 고행해갖고 삼매 조금 들락 말락하는 사람한테 가서 그거 했겠어? 있을 수가 없는 거라. 실제적으로.

 

그리고 빔비사라 왕이 그렇게 될 수 없는 게 어릴 때 왕이 됩니다. 13살인가에 왕이 돼가지고 52년인가 53년인가 통치를 하게 되는데, 어린 사람이 왕이 돼 가지고 한참 다른 나라를 정복해가지고 그거 병합하기 바쁜 때라. 인제 가문을 이뤄가지고 제자들을 거느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사람들한테 공양을 올리고 하는 것도 빠듯하고 힘들 판이라. 그렇기 때문에 이거는 실제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이 깨닫기 전에 빔비사라 왕을 만나갖고 그런 언약을 줬다? 그거는 왜 그런 얘기가 나왔냐면 처음 빔비사라 왕과 부처님이 만났을 때 빔비사라 왕이 “내가 어릴 때 5가지 서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5가지 소원을 갖다가 빈 적이 있습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게 뭐냐면 첫 번째 소원이 자기가 왕이 되는 거라. 두 번째 소원은 깨달은 자 완전히 정각자를 만나는 거, 쉽게 말하면 부처님을 만나는 것. 그다음에 세 번째 소원이, 그 정각자를 만나서 법을 듣는 것은 네 번째인데, 세 번째가 뭐지? (해피스님: 우리 국토에 나오고, 우리나라에 오는 거) 아아, 부처님이 우리나라에 오는 거, 자기의 나라에 오는 거 그게 세 번째고, 네 번째가 부처님의 법을 듣는 거 부처님한테 법을 듣는 거, 그다음 다섯 번째가 그 부처님 법을 듣고 내가 그것을 이해하는 것. 요렇게 5가지를 얘기합니다.

거기에 연유돼가지고 이런 사상들이 발전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빔비사라 왕이 어릴 때 그런 얘기를 했기 때문에 부처님이 깨달음 이루기 전에 부처님을 만날 것이다 하고 추정하는 것뿐이라. 거기에 연유됐다고 보면 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빔비사라 왕을 만난 적은 단언코 없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빔비사라 왕과 여러 가지 관계를 가지면서 교단의 틀을 만드는 부분에 대한 얘기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이 교단의 틀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 그리고 승단은 요러요러해야 된다, 재가자들은 이러이러해야 된다,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들 기틀이 다져지게 됩니다. 그 부분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 법문에서 수정된 부분>

근데 저번 시간에 스님 마지막 시간에 한 얘기 중에 잘못 말한 게 있어요. 그 수정부터 할게요.

“부처님이 성도하기 이전에 빔비사라 왕을 만나지 않았다” 하고 얘기를 했는데 해피스님이 그 부분을 지적을 하더라고. 그래서 찾아보니깐 만난 적은 있어요.

숫따니빠따에 보니까 왕 이름은 직접 나와 있지는 않지만 문맥상으로 그 뒤에 나온 그 빔비사라 왕이란 명칭으로 봐서도 성도 이전에 만난 적은 있는데, 그 주석서를 다 뒤져보더라도, 빔비사라 왕이 ‘왕국의 절반을 줄 테니까 나와 같이 왕국을 다스리자’ 하는 그런 부분은 전혀 없고, 그리고 ‘나중에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왕국을 방문하겠다’ 하는 부분도 나오지는 않습니다. 단지 만나는 부분만 존재를 합니다. 그래서 그것 부분은 그 뒤에 대승불교권에서 아마 조금 더 가필된 부분이지 않는가 하고 생각을 합니다. 자, 그 부분은 수정을 해 드리겠습니다.

 

 

https://cafe.naver.com/buddhayana1/1207

 

【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 부처님 시대의 왕들 (1) 까삘라왓뚜의 숫도다나 왕

4. 부처님 시대의 왕들 (1) 까삘라왓뚜의 숫도다나 왕 (2) 앙가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 왕 (3) 꼬살라 왕국의 빠세나디 왕 (4) 마할리 릿차위 (5) 왕사의 우데...

cafe.naver.com

https://cafe.naver.com/buddhayana1/1208

 

【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 부처님 시대의 왕들 (2) 앙가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 왕

(2) 앙가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 왕 서문 마하왕사의 복주석서에 의하면 빔비사라 왕의 아버지 이름은 바띠이고 어머니 이름은 빔비였습니다. 티벳 구전에서는 빔비사라 왕의 아버...

cafe.naver.com

https://cafe.naver.com/buddhayana1/1209

 

【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 부처님 시대의 왕들 (3) 꼬살라 왕국의 빠세나디 왕

(3) 꼬살라 왕국의 빠세나디 왕 서 문 꼬살라 왕국은 앙가 마가다 왕국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부처님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16대국 가운데서 네 번째였습니다. 이...

caf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