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 불교사

제1차 결집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018-3

담마마-마까 2025. 1. 19. 15:27

https://youtu.be/LCfrGcdaaoc?si=yYAedBJ8HqCFBPId

 

* 제1차 결집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018-3

 

인도에 부처님 당시 때도 장부경전을 보면 그런 게 나옵니다. 자이나교 교도 교주 마하위라라고 하는 분이 열반하셨어요. 열반하고 나니깐 밑에 자이나 교도 간에 막 분쟁이 일어나요. 그래가지고 이게 우리 교주님이 말한 거다, 이쪽은 이게 맞다. 이러면서 막 분쟁이 일어나는 걸 보고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나의 말을" 어휘, 어구, 어구라고 해야 되겠다.

"나의 말을 어구를 어구대로 그대로 전달하고, 나의 단어를 그 단어 그대로 전달을 하라." 그렇게 인제 부처님이 얘기하는 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여기서 저기로 갈 때 만약에 태국에서 한국으로 왔다, 그러면 부처님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되겠어요? 태국에서 빨리어로 쉽게 말하면 '이띠삐소 바가와' 하고 한 걸 갖다가 한국에 와서는 그걸 다 바꿔가지고 '그분 존귀하신 분' 요렇게 전달하지 말아라는 거라.

 

'이띠삐소 바가와'라고 했으면 여기서도 전달할 때 '이띠삐소 바가와'라고 전달하라는 거라. 요게 중심이 돼야만이 그다음에 번역을 그걸 갖다가 의미를 풀이할 때 '그분 존귀하신 분' 할 것 같으면은 이게 그거하고 매치가 돼버리는데, 만약에 '그분 존귀하신 분'으로 전달을 해버리면 여기서 내가 또 다른 데로 전달할 것 같으면 말이 좀 이상하거든.

'그분 존귀하신 분' 그러면 그러면 저쪽에는 '그 존귀하신 분'으로 전달을 해버리게 되고, 그러면은 또 다른 데로 또 전달할 때 '존귀하신 분'이 아니고 뭐 '세존'이라고 전달해 버리고, 그러면 원래는 '그분 존귀하신 분'인데 지금 현재 우리는 그냥 '세존이' 이렇게 간단하게 탁 돼버리게 되는 거라. 이렇게 많이 바뀌어져 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그럽니다. "단어는 단어 그대로 전달하고 어구는 어구 그대로 전달하도록 하라." 하고 이제 얘기합니다.

 

그게 그것도 어떻게 보면 그 상기띠를 염두에 두고 한 그런 부처님 말입니다. 경전 곳곳을 이렇게 뒤져보면 실제로 부처님 열반 후에 결집이 일어나지만은 결집의 형태를 갖추어지는 것은 부처님 당시 때 이미 그 형태가 그대로 갖추어지게 됩니다. 승가 생활 자체가 부처님 말씀들을 암송하는 형태들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누군가가 그렇게 암송해가지고 전달해 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형태들은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다고 봐야 됩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이 열반하셨을 때 딱 돼 가지고, 늦게 출가한 수밧다라는 분이 그렇게 말합니다. “이제 부처님이 열반하셨으니까 나는 이제 자유롭게 됐다. 이제 부처님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뭐 저거 하지 마라 하는 소리 안 들어도 된다. 나는 이제 좋다. 너희들도 이제 부처님 말씀 듣지 말고, 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이렇게 막 하거든.

그 얘기를 마하깟사빠 존자가 탁 듣고 ‘아, 이거 큰일 났다. 이거 이렇게 가다가는 나중에는 부처님이 말한 것들의 진의가 왜곡될 수가 있다’하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갖다가 딱 내게 됩니다.

 

그래서 결집의 동기를 보통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한 6개로 이렇게 나눕니다.

맨 처음에 뭐냐 하면 이 마하윙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우려하는 마음이 먼저 탁 일어난다는 거라. ‘어, 이거 이대로 뒀다가는 비법을 갖다가 법이라고 하게 되고 비율을 갖다가 율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그런 우려가 탁 먼저 생겨납니다.

바른 법이 바뀔 수 있는 우려가 탁 생겨나면 결집할 동기가 먼저 탁 만들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 이후에 결집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1차 결집한 것들이 중요한 게 뭐냐 하면 1차 결집이 딱 태동된 모태가 돼 가지고 2차 결집, 3차 결집 이렇게 내려가지만 그 태동이 바뀌질 않습니다. 그대로 전해집니다. 단지 2차 결집, 3차 결집 내려가는 거는 그 1차 결집 때 했던 내용들이 맞는가 안 맞는가, 그리고 지금 현재 실정에서 이게 지금 잘못되고 있는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작업밖에는 안 합니다.

쉽게 말하면 도장을 한번 딱 새겨놨는 걸 갖다가, 도장을 새겼단 말이라. 그럼 요 한 번 찍고, 요 한 번 찍고, 요 한 번 찍고, 한다 해가지고 이게 바뀌질 않는 거라. 도장 새긴 거하고 1차 결집은 마찬가지라. 새겼으니까 2차 결집해서 도장을 다시 찍는다 해서 이 도장 형태가 바뀌질 않는다는 거라. 3차 결집에서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마만큼 1차 결집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우려로 인해서 결집을 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면 결집 장소를 결정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 결집이 언제 생겨납니까? 부처님이 열반을 4월 보름에 했습니다. 부처님의 장례는 며칠간 치렀을까?

처음에 일주일간 그 신체를 그대로 둡니다. 예배할 수 있게끔.

일주일 뒤에 화장을 하게 됩니다. 화장해서 일주일간 그 불이 탑니다. 그래서 화장 기간이 일주일 걸립니다. 그러면 이제 사리가 생겨났을 거 아니라요.

그럼 그 사리를 갖다가 모시고 다른 사람들이 참배하게끔 하는 것이 일주일 걸립니다.

부처님의 장례 기간은 3주가 됩니다. 3·7일 21일입니다.

 

4월 보름에 열반하였으니깐 5월 5일 날. 그러니까 부처님 열반했다는 소리 듣고 다른 데서 막 모였을 거 아니라. 그때 경전에는 뭐 1만 명의 스님들이 모였다고 그럽니다. 그 1만 명의 스님들한테 이 마하깟사빠 장로가 그렇습니다. “아, 이런 우려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을 딱 우리가 바로 설정해가지고 딱 정하자.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고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 아니다. 하는 걸 딱 정하자” 하고 그때 처음으로 마하깟사빠 존자가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만 명의 스님들한테 그렇게 얘기를 하고, 그러면은 몇 명의 스님이 모이고 어디서 할 것이냐?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걸 갖다가 그때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걸 뭐라고 그러냐면 백이갈마(白二羯磨)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경전에 분명하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율장에. "부처님이 사후 21일 후에 백이갈마를 실행했다." 하고. 쉽게 말하면 결집합시다. 하고 안건을 탁 던지면 다른 스님들이 가타부타 할 거 아니라. "그래요 결집합시다." 안 그러면 "결집하지 맙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스님들도 다 "그래 맞다. 결집해야 된다." 하고 딱 결정을 내는 거라. 그게 그래서 백이(白二)라. 한번 선언을 하면 그리고 그걸 갖다가 찬반을 물어서 딱 결정을 하는 것, 이렇게 해서 2번이죠? 그래서 백이갈마라고 그럽니다.

 

거의 대부분의 안건은, 단백갈마, 백이갈마, 백사갈마 이렇게 나옵니다.

출가자를 만들 때는 백사갈마를 합니다. 3번 물어요. 3번 물어봐 가지고 가부를 묻고,

그리고 중요한 결정할 때는 딱 한 번 물어가지고 가부를 묻고,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거는 쉽게 말하면 그냥 결정 바로 해버립니다. “내일 우리 모인다 다. 다 모여” 이렇게 하는 거라. 그걸 갖다가 단백(單白)이라고 그러고.

한번 물어보고 가부를 물어봐서 결정하는 걸 백이갈마(白二羯磨)라고 그러고,

세 번 물어보는 걸 갖다가 백사갈마(白四羯磨)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한번 명제를 던지는 걸 한 번으로 치기 때문에 단백, 백이, 백사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백이갈마가 부처님 사후 21일째에 열렸다 하고 그렇게 나옵니다.

 

그때 결정된 게 그러면은 결집을 하는데 적당한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꾸시나가라에서 가장 가까운 데가 라자가하, 그리고 스님들이 탁발을 해야 된단 말이라. 탁발을 하고 그리고 갈마를 하고 이러기에 가장 용이한 곳이 라자가하에 칠엽굴이라. 그래서 거기가 결정이 딱 됩니다. 그래서 장소가 그다음에 이제 딱 결정이 됩니다.

 

그래서 언제 할 것이냐? 그러면은 다른 곳에 있는 스님들이 와야 되니까. 조금 있으면 우리가 인제 결제다. 근데 불교에는 안거가 2개의 안거가 있습니다. 전안거, 후안거. 전안거를 보통 대안거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음력 6월 보름에 들어가는 게 전안거 대안거라고, 그러고 음력 7월 보름에 들어가는 게 후안거라고 그럽니다.

근데 전안거를 들어가려다 보니까 이미 지금 음력 5월 5일이 됐어. 1달 10일밖에 안 남았는데 사실 그러니까 다른 곳에 있는 스님들이 오기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안 돼. 그래서 올해는 후안거에 들어간다 해서 7월 보름에 들어갑니다.

7월 보름에 이 결제의 시작을 하기로 딱 결정을 합니다.

 

요즘 같으면 뭐 전화해 갖고 올 수 있지만 옛날 같은 경우에는 왔다 갔다 하는 기간이 있기 때문에 그 정도 시간을 줬다는 거라. 그러니까 다른 종파 나중에 이제 부파 불교 생기면서 “그러면 너희끼리 모여 갖고 결집한 거 아니냐” 하고 얘기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아요. 왜 그러냐면 그리할 것 같으면 부처님 열반한 거기서 그 만 명이 모였을 때 거기서 바로 결집을 하지, 왜 그 음력 7월 보름까지 기다려 가지고 장소를 옮겨 가지고 그렇게 하겠어? 그렇게 될 수가 없거든.

그렇게 해가지고 결집 날짜가 정해지고, 장소도 정해지고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그게 결정이 되고 나니까 세 번째가 뭐냐면 모일 대중들을 결정을 하게 됩니다.

칠엽굴이 결정되니까, 거기서 모일 칠엽굴에 앉을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됩니다. 그래서 500명으로 한정을 합니다. 그래서 500명을 선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부처님 열반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 중에서 아라한이 된 사람들 누가 있나 해가지고, 그럼 그 사람에게 연락해 가지고 칠엽굴로 언제까지 오라 해라. 이런 식으로 전국 각지에 있는 스님들 중에 아라한 500명을 선출하게 됩니다. 499명을 선출하고 1명, 아난다를 선출을 해야 되는데 아난다가 아라한이 아니거든. 아라한만이 이 자리에,

 

왜 아라한이 결집을 해야 되느냐 하면 아라한이 아닐 경우에는 자기에게 맞게끔 이것을 편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라한이 되면 이미 '나'라고 하는 것들을 떠나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결집을 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렇지 않고 아라한이 아닐 경우에는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집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마하가섭 존자 같으면 마하가섭 존자에게 유리하게끔 결집을 하면 됩니다. 다른 부파에서는 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라한 500명.

가끔씩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 1차 결집 때 한 것이 부처님이 한 말을 그대로 결집한 것이냐? 그것은 불교를 몰라서 하는 얘기라. 적어도 아라한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500명의 아라한, 나중에 마지막 날 결집하는 마지막 날에 아난다까지 아라한이 돼서 그 결집 장소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제 결집한 것들을 나중에는 암송할 파트를 이렇게 정하게 됩니다.

장부 경전은 니가 책임지고 이걸 갖다가 다 암송해가지고 후대로 계속 전하라. 중부 경전은 니가 맡아가지고 너희 제자들한테 해가지고 후대로 계속 전하라. 바꾸지 말고.

이렇게 정하는데 맛지마니까야 중부 경전을 암송하는 그룹에서는 '아난다가 마지막 날에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다' 나오고, 그다음에 장부 경전을 전하는 그룹에서는 '아니다. 아난다는 신통까지 얻어가지고 땅을 뚫고 이렇게 그 결집 장소로 풍 솟아 올랐다.' 하고 이제 그렇게 얘기들을 합니다.

그거는 어쨌든 간에 그 얘기는 뭐냐면 이미 결집을 하고 나서 결집한 것들을 암송하는 수단까지 이미 다 강구를 했다는 얘기라. 그걸 전할 방법까. 그래서 그게 이제 500명의 대중들을 선별하는 작업이 세 번째 있게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결집할 때 제1차 결집에서는 경과 율만 결집이 됩니다. 아비담마는 결집이 안 됩니다. 물론 테라와다 ... 아비담마를 했다 하고 얘기를 하는데 어디를 뒤져봐도 그런 것은 없습니다.

경과 율을 했는데 가장 먼저 한 것이 율입니다. 율을 결집을 하는 방식은 어떻게 되느냐면 상수 제자를 한 사람을 정해가지고 또 그걸 대답할 사람을 한 사람을 정합니다. 그럼 내가 그 대답할 사람한테 물어봅니다. 라자가하에서 언제 부처님이 뭘 말씀하셨냐? 하고 내가 탁 질문을 합니다. 그럼 대답하는 사람은 언제 부처님이 라자가하에서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뭘 말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게 됩니다.

이게 인제 결집의 방식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다 들을 거 아니라. 그러면 이걸 갖다가 다른 모여있는 사람들이 확인을 합니다. "진짜 그때 당시에 부처님이 그런 말씀을 했냐?"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 의견을 물어봅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다 "그거 맞다." 할 것 같으면 "그러면 확정된 것이다." 하고 나서 이걸 갖다가 그 게송을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합송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 "에왕 메 숫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위하라띠" 하면서 이렇게 쫙 독송을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결정된 거라. 그럼 그다음 것도 하고, 그다음 것도 하고 이렇게 하는 거라.

 

그런 식으로 하는데 물어보는 사람은 가섭 마하깟사빠 존자가 하고, 율은 대답하는 사람은 우빨리 존자가 하고, 경은 대답하는 사람은 아난다 존자가 하도록 합니다.

왜냐면, 우빨리 존자 같은 경우에는 출가하고 나서 부처님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계속 부처님 곁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출가하는 사람들에게 뭔 역할을 맡게 하냐면 머리 깎는 일, 누가 부처님한테 와서 출가하려고 할 것 같으면, 우빨리가 원래 출가하기 전에 이발사 출신이거든. 머리를 깎는 일을 우빨리 존재가 했어요. 그리고 증명하는 스님으로서 그 자리에 참석을 한 게 우빨리 존자거든.

 

부처님은 계는 부처님 혼자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여러 스님들이 동행한 상태에서 계는 줄 수가 있습니다. 그게 불교의 규칙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은 우빨리 존자가 항상 존재했기 때문에 부처님이 계율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은 우빨리 존자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거고, 경은 경전은 부처님 시봉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고 그리고 안 들은 게 없는 아난다 존자가 가장 적임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적임을 하게 됩니다.

결집하는데 맨 먼저 율을 먼저 결집을 하게 됩니다. 율장문들, 그다음에 경을 결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집이 율을 먼저 결집을 하고 확정되고 나서, 경을 결집을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그걸 그렇게 하고 나서 경과 율이 결집이 되고 나서, 아난다에게 잘잘못을 물어봅니다. 그리고 소소계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열반하기 전에 아난다한테 “작은 계율은 너희들이 원한다고 할 것 같으면 없애도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아난다에게 물어봅니다. “아난다야, 부처님이 말한 소소한 게 뭘 얘기하는 거냐 물어봤냐?” 하니까 아난다가 안 물어봤다 하거든.

그때 이제 거기 모이는 스님들 다 ‘그럼 뭘까? 소소한 계율이 뭘까?’ 하고.

지금의 계율을 빨리율, 산스크리트 오분율 사분율 마하승기율 십송율 다 모아보면 바라이죄, 승잔죄, 중학계 이런 것까지는 거의 형태가 똑같습니다. 그런데 뒤에 부분에 세키야담마라고 세키야 빠찟띠야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그걸 갖다가 한글로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그 세키야 빠찟띠아를 그냥 빨리어로 할게요. 한글로는 모르겠고.

 

그게 빨리어에는 75계 돼 있고, 그 사분율 오분율에는 90계, 어떤 데는 뭐 100몇 계, 그렇게 해서 비구계가 227계에서 250계 뭐 300몇 계 뭐 이런 식으로 되는네, 이렇게 틀린 게 뭐냐 하면 그 세키야 빠찟띠야만 틀립니다. 다른 것은 크게 틀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그 소소한 계율은 그건 아마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거는 뭐냐면 밥 먹을 때 입 벌리고 먹어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하면 그다음에 옷 입을 때 옷이 흘러내리도록 하면 안 된다. 하는 그런 것들 소소한 것들을 적어 놓은 거거든.

 

그런 것들은 쉽게 말하면 부처님이 너희들이 원하면 바꿔도 된다. 그러면 원하지 않으면 안 바꿔도 된다는 얘기거든. 마하깟사빠가 그게 그럼 그 부분이 뭐냐고 물어보는데 아무도 몰라. 아난다도 안 물어봤고. 그러니까 의견이 다 분분한 거라. 아라한들이라 하더라도 부처님 마음을 어떻게 알 거야? 그게 소소한 건지, 아니면 뭐 바라이죄를 제외한 나머지가 소소한 건지. 그래서 그때 결정된 게 뭐냐면 "일구일언도 바꿀 수 없다." 하고 결정이 딱 나버립니다. 부처님이 말한 율과 법은 이제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났기 때문에 그걸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 바꾼다. 하면서 결정된 게 뭐냐면 딱 세 구절이 첨가가 됩니다.

 

부처님의 법과 율은 일구일언도 변경할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의미를 다르게 바꾸어서 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그 일구일언에서 한 자라도 더 더할 수도 없다. 만약에 뭐 '해'까지 얘기했다 하더라도 뒤에 그거는 의미상으로 '했네' 라고 적어야 되는데, '네'도 붙일 수가 없다는 거라. 더할 수도 없다는 거라.

그리고 그중에 한자라도 뺄 수도 없다.

요 딱 세 가지가 첨가돼 버립니다. 변경도 못하고 더 하지도 못하고 덜 하지도 못하게.

그런데 소소한 계율에 대해서 안 물어본 아난다한테는 잘못이 있지만은 그걸 바꿀 방법이 없어져 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딱 결정이 됩니다. 그래서 아난다한테 “니 잘못했다이. 니 참회해라.” 하고 아난다에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아난다가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이제 참회하고, 참회하고 나서는 이제 그거는 허물을 덮어버리게 되는 거고.

그렇게 해서 아난다의 다섯 가지 허물을 갖다가 참회를 시킵니다.

 

왜 마하깟사빠가 아난다에게 이렇게 엄하게 했느냐면 앞으로 불교를 이끌어갈 사람은 아난다입니다. 아난다가 120살까지 살게 돼요. 근데 부처님을 가장 가까이 시봉을 했을 뿐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난다가 적임이다 생각했기 때문에 그 허물들을 갖다 여기서 다 가려내 가지고 덮어버리려고 하는 거라. 안 그러면 그렇지 않으면은 다른 사람들이 아난다의 허물을 잡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걸 갖다 다른 사람들은 아난다 하고 마하깟사빠 하고 사이가 안 좋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런 게 아니고, 아라한들이 사이가 안 좋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그건 절대 그런 것은 아니라.

 

그래서 그 5가지의 허물, 그것뿐 아니라 여러 가지 있습니다.

부처님 옷을 기울 때 발로 밟고 부처님 옷을 기웠다. 니가 어린 놈이 부처님 옷을 갖다가 기울 때 그냥 깁지 그걸 발로 밟고 했냐? 이런 것들 쉽게 말하면.

그다음에 그 부처님이 열반할 때 여자가 가가지고 부처님한테 “아이고, 우리 부처님 살아나시오.” 하고 울면서 눈물 뚝뚝 흘려가지고, 그 부처님 가사가 다 젖게 만드는 거, 그걸 니가 제재를 하지 니가 그걸 갖다가 그렇게 했냐? 이런 것들.

그다음에 비구니 스님을 갖다가 굳이 꼭 니가 그렇게 세 번이나 간청해 가면서 출가를 시켰어야 되느냐? 그냥 자연스럽게 때가 되면 비구니 스님들이 출가하게 되면 출가를 하도록 하지 그걸 일찍 교단에 출가를 시켜가지고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이런 것들.

또 하나가 뭐지? 다섯 가지인데 테라와다에서는. 지금 4가지 얘기했죠.

(수행자: 더 살아달라고 말씀을)

아 맞다. 부처님이 1겁을 더 살 수 있다 했는데, 그걸 갖다가 마라한테 마음이 다른 데 뺏겨가지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부처님 이 세상에 더 오래도록 살아 주십시오 하고 얘기를 하지 않은 것. 그래서 그 5가지.

 

다른 계율에서는 그것보다 더 많습니다. 어떤 경우는 6가지, 8가지 이렇게 부르는데 빨리 율에서는 이 다섯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 5가지 소소한 것에 대해서 분명히 가려가지고 그걸 갖다 허물을 딱 덮어버리게 됩니다. 그게 있고,

그렇게 하고 나서 결집이 다 끝나게 됩니다. 그게 몇 개월 걸리냐면 7개월 딱 걸리게 됩니다.

7개월 딱 걸리니까 음력 2월 보름날 마치게끔 됩니다.

그게 이제 1차 결집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라한이 오백명만 있었겠어? 더 많이 있을 수가 있지.

그러니까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게 뿌라나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어요. 마침 뿌라나 스님이 그 결집하는 장소에 이동해 왔어. 그래서 마하깟사빠 존자가 뿌라나 스님한테 우리 결집 요렇게 요렇게 했습니다. 스님 동의하십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뿌라나 스님은 거기에 대해서 동의한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소리는 안 하고 나는 부처님한테 들은 것만 나는 믿을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너 결집하든 말든 나하고는 관계없다 하는 얘기라.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근데 이걸 갖다가 잘못 해석을 해버리면 결집한 것들을 갖다가 부정했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석서에는 뭐라고 되어 있냐면 뿌라나 스님하고 마하깟사빠 스님하고 논쟁을 벌였던 8가지 부분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뿌라나 스님이 그럽니다.

“그래 결집한 것은 내가 인정을 한다. 그 대신에 이것은 허용해도” 하고 얘기합니다.

뭐냐면 방 안에 실내에 쉽게 말하면 음식물을 놓는 것들은 허용해줘라 하고 얘기합니다. 오늘 내가 먹는 건 아니라도 나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에는 매일 탁발을 갈 수가 없으니까 내일 그거 먹으면 되니까 실내에 있는 것들은 허용해도.

그다음에 탁발을 나갈 형편이 못 돼서 탁발을 못하는 상황일 것 같으면 내가 남들이 만들어 놓은 걸 끓여 먹는 것들은 허용해줘.

 

그걸 지금 버마에서는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라면, 라면은 허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오전 중에서서 얘기합니다. 오후는 아닙니다이. 착각하면 안 돼이. 오전 중이라도 스님들은 조리를 못해 먹게끔 돼 있는데, 라면은 이미 그게 만들어져 가지고 있는 조리된 거라고 그러네. 그렇기 때문에 그거는 끓이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거는 조리하는 것에 안 들어간다 해서 라면 끓여 먹는 건 허용해. 그래서 내가 가만 생각하니까 좀 이상해. 그래서 그 스님한테 물어봤어요. 그럼 햇반도 되겠네요? 햇반도 다 만들어 놓은 거잖아. 데워 먹으면 되니까. 그러니까 아무 소리를 안 하는 거라.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그 뿌라나 스님이 그걸 허용을 하도록 해달라는 거라. 남들이 와서 다 조리해 놓고 놔놨으면 그거 내가 데워 먹는 그거는 허용해도. 지금은 테라와다에서는 그건 허용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조리하는 게 아니고 데워만 먹는 경우에는, 그건 조리하는 것의 범주에 속하지를 않습니다.

근데 사실 8가지를 얘기했는데 그때 당시에는 이 마하깟사빠 존자는 이걸 거부를 하게 됩니다. 어쨌든 간에 그걸 얘기를 해요. 그다음에 또 뭘 얘기했더라? 생각이 안 난다. 하여튼 8가지 얘기했는데, 그게 전부 율에 관계된 것들입니다.

 

그런 식으로 그런 것들을 허용해 주면은 그것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다 너희들이 결집한 것들은 내가 인정한다. 하고 이제 주석서에는 나옵니다.

근데 결국에는 마하깟사빠 존자가 “그 8가지조차도 안 된다.” 하고 선언을 딱 하게 됩니다. 그 선언을 하니까 뿌라나 스님이 “결집한 것은 내가 인정한다. 그렇지만 나 이 8개는 나는 내 식대로 하겠다.” 하면서 가버립니다.

그래서 나중에 부파 분열을 하게 될 때 화지부라고 하는 부파가 있습니다. 화지부가 테라와다 불교에서 떨어져 나올 때 명목으로 삼았던 게 이 뿌라나 존자의 8가지,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뿌라나 스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화지부 무리들하고 일맥상통한다고 봐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그렇게 해왔다는 거라.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이거는 위법이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근데 이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큰 항목에서는 금지를 딱 해 놓습니다.

"그건 안 된다" 하고 금지를 딱 해두는데, 테라와다의 융통성이란 게 뭐냐면 쉽게 말하면 용인해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까 같이 조리하는 것은 안 되지만 라면 같은 경우에는 끓여 먹어도 된다. 하고 그걸 인제 용인을 해주는 거라. 실제적으로는 보면 그것조차도 하면 안 돼. 마하깟사빠의 논리대로 할 것 같으면.

근데 그것은 용인은 해주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맞다고도 얘기를 안 하는 거라. 그렇다고 틀렸다고도 얘기를 안 하는 거고. 사실은 틀리지도 않고 맞지도 않는 거라. 그런데 엄밀하게 따질 것 같으면은 계율 항목에서는 조금 문제가 될 소지는 있다는 거라.

 

그런데 현대 사회가 돼가면서 바뀌어 나가더라도 그렇게 용인하는 것들이 점점 더 늘어나게 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예를 들어서 사회 살아가는 데 스님들이라고 그 돈을 만지지 못하게 돼 있는데, 돈 없이 어떻게 살 거야?

그러니까 태국에서는 뭐라고 하느냐면 그거는 그 경전에는 분명히 금화 은화라고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동전만 안 만지면 된다. 지폐는 만져도 된다. 또 어떤 스님들은 봉투에 들어있는 돈은 괜찮다. 그래서 봉투 안에 있는 거는 안에 있는 걸 만지지 않고 봉투 채로 건네줘라. 그러면 그 사람이 빼갈 것이 아니냐? 그럴 것 같으면 계율 위반 아니다. 하고 그런 것들을 용인을 해줘요.

이런 식으로 용인해 주는 부분은 점점 더 늘어나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계율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거라. 돈을 만지지마. 할 것 같으면 만지지 않는 거라. 그걸 갖다가 임의적으로 바꾸어 버리질 않는다는 거라. 그게 뭐냐 하면 1차 결집 때 딱 결정된 것들이기 때문에 사회가 바뀐다 해서 그걸 바꾸질 않는 거라.

 

근데 실제로는 가끔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사회가 바뀌고 현대사회가 됐으니까 계율도 현대적으로 뜯어고쳐야 된다. 아니면 부처님 말씀도 현대적으로 바꿔야 된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실제로는 바꿀 수 있는 것은 몇 개 없습니다.

진짜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스님들이 도둑질하는 걸 바꿀 거야, 아니면 뭐 남을 죽이는 걸 바꿀 거야, 큰 줄기는 바꿀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쉽게 말해 지금 같은 그런 소소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그건 바꿀 필요가 없이 그것은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부분으로서 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변형됨이 없이 그대로 유지가 돼 나가게 된다는 거라. 근데 왜 자꾸 지가 나쁜짓 할라고 그걸 자꾸 바꾸려고 하느냐는 거라. 만약에 스님들이 돈 만지는 거 허용한다 해봐? 안 그래도 지금도 다 만지고 하고 있는데, 그거 허용해 놔 놓으면 이거는 마 엉망진창이 돼버립니다. 그나마 그래도 못 만지게끔 하니까 계속 조심할라고 하고 그러는 거라. 그리고 그중에는 또 이 테라와다 스님들은 더욱더 조심하려고 하고 일정 부분 이상은 안 가지려고 하고, 이렇게 자꾸 스스로 조정하는 역할들이 되는 거라. 그게 확립이 됐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그래서 현대적으로라고 해도 바꿀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것은 규칙이나 용인의 부분으로서 허용 여부는 개개인에게 맡겨야 되는 부분으로 넘어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그다음에 뿌라나 존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그다음에 인제 한 것이 뭐냐면 찬나 스님에 대해서 징벌을 가하게 됩니다.

찬나가 누구냐 하면 부처님의 마부였습니다. 그러니깐 얼마나 기고만장할 거야. 다른 스님들을 무시하고 하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했거든. “내가 열반하고 나면 찬나를 상가에서 내치지 말고 쟤를 벌을 줘가지고 잘 다스리라” 하고 얘기합니다. 찬나가 아라한이 되기 전이라. 그래서 찬나에 대해서 뭘 명하냐면 별중을 명합니다.

 

별중이라는 게 뭐냐면 그 여러분들 안 당해봐서 모를 겁니다. 태국이나 버마 같은 경우는 몇 년에 한 번씩은 이 별중을 마낫따(mānatta) 라고 그럽니다. 마낫따를 의무적으로 행해야 돼 스님들이. 비구로서는 살아있는데, 남들이 말을 걸어도 투명인간 취급해버리는 거라. 그리고 내가 말을 걸어도 저 사람은 그 소리를 못 들은 것처럼 해버리는 거고, 저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도 않고, 없는데 어떻게 말을 걸 거야. 그러니까 완전히 그냥 무리 속에 있지만은 그냥 그 섬같이 돼버리게 되는 거라. 그걸 명해버리게 되는 거라.

 

그거 얼마나 답답한지 알아요? 아마 여러분들 하루만 해놔 놓으면 돌아버릴 거야. 그걸 명한 거라. 그걸 날짜는 명시가 안 돼 있는데, 지금의 상황으로 이렇게 보면 별중은 대부분이 15일 이상입니다. 그걸 이제 한국에서는 별중을 갖다가 부동주라고 이렇게 풀이를 해놨더라고. 근데 엄밀하게 얘기하면 빨리어 그대로 마낫따를 풀이하면 별중이 됩니다. 별도의 중이라는 뜻이라. 별도의 무리, 별도의 한 사람으로서 떨어져 있도록 만드는 거라.

그래서 이 기간 동안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도 걸어도 소용없고 말도 해주지도 않고 혼자 살아야 되는데, 자기가 해야 될 일은 다 해야 돼. 쉽게 말하면. 청소 소임을 맡았다고 그럴 것 같으면 청소 다 해야 되고, 그다음에 별중에 들어간다고 할 것 같으면 임무들을 이렇게 딱 정해줍니다. 그럼 그 임무들을 또 완벽하게 해야 돼요. 그걸 하지 않을 것 같으면 별중 기간이 길어져요. 만약에 안 했다. 그러면 별중을 만약에 15일 결정을 했는데 그걸 안 했으면 하루 또 더 길어지는 거라. 그래서 별중 기간은 안 한 만큼 더 길어지는 거라 자꾸.

 

그래서 대부분 우리도 별중을 이렇게 해보면 통상적으로 한 달입니다. 1달 정도 걸려요. 그러니까 15일이라고 해놔놔도 워낙 부여해준 임무가 많기 때문에 그걸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은 기간이 자꾸 늘어나요.

그럼 다 끝나고 나면 20인의 스님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이제 “나 이제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제는 스님들하고 화합되게 하겠습니다. 내 잘난 체 안 하겠습니다.” 하고 용서를 빌고, 그 스님들한테 구제해주기를 바라는 거라. 그러면 20인의 스님이 “그래. 니가 잘못했으니까 인제 다시는 그러지 마라” 하면서 구제를 해줍니다. 그럼 구제를 해주면 그때서야 이제 복권이 되는 거라.

그게 인제 마낫따(mānatta)라고 하는 별중이라고 합니다.

 

그걸 갖다가 이 찬나에게 명하게 됩니다. 찬나가 그걸 받고 나서 정신이 번쩍 듭니다. 아마 그걸 안 해줬으면 찬나가 아라한이 못 됐을 거야. 그때서야 자기를 돌아보고 나중에 이제 찬나가 그 별중이 끝남과 동시에 끝나자마자 아라한에 이르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들을 벌 주기 위한 것보다는 그 잘잘못에 대해서 반드시 반성하고 그것을 다시는 하지 않게끔 만드는 그런 역할들이라.

요까지 한 것이 제1차 결집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1차 결집이 얼마나 소중한 거라. 이런 것들을 하는 것들이 결집이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단순히 부처님의 말씀을 암송하고 그걸 확정 짓는 것들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일들을 같이 합니다.

 

, 그런데 가끔 사람들이 그럽니다. 그럼 거기에 왜 비구 스님들만 모였습니까? 비구니하고 재가자들은 여기 참석할 조건이 안 돼. 이런 것들을 의논할 때는 반드시 아까 얘기했지만 갈마를 행해야 돼. 갈마를. 단백갈마 백이갈마 백사갈마를 행하는데 그 갈마를 할 때는 비구 스림들만 하게끔 돼 있는 거라.

그러니 다른 비구니 스님들이 있어도 거기에 참석할 조건이 안 되는 거라. 마하깟사빠 존자가 비구 우월주의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결제를 할 경우에는 어떤 경우든지 '한 무리'만 하게끔 돼 있습니다.

 

근데 이게 깨지는 게 다른 대중부가 결집할 때 이 방식이 깨집니다. 출가한 스님과 재가자가 같이 결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집을 했다는 건 나오는데, 결집을 할 때 어떻게 했다는 내용이 없어. 그 얘기는 뭐냐 하면 포살이나 갈마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얘기라. 할 수가 없으니까, 다른 무리가 섞여 있는데 어떻게 할 거야.

회사에서 삼성 임직원들끼리 회의하는데 현대 사람들을 거기다 데려놓을 수가 없잖아. 삼성의 기밀들을 하고 그걸 갖다가 결정해야 되는데 어떻게 현대 사람들을 데려놓을 거라. 그와 마찬가지인 거라.

 

이게 다른 결집들이 인정을 못 받는 게 뭐냐면 그 무리에는 비구 비구니 그다음에 일반 재가자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이거는 결집으로서 형성될 수가 없다. 하고 판단들을 합니다. 이때까지 전 세계에서 결집이 18번 어떤 경전은 12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테라와다에서는 6번 있습니다.

테라와다에서는 이 6번을 제외한 나머지 결집들은 인정을 하질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결집 대중 성원들이 안 맞다는 거라. 결집 대중 성원들이.

그리고 결집은 반드시 3개월 이상 해야 되는데 3개월이 안 되는 경우들도 많다.

그리고 결집을 했을 것 같으면 결집한 것이 뭔지가 나와야 되는데 그 내용을 전혀 알 방법이 없다는 거라. 뭘 결집을 했는지가 안 나와. 우리 결집했다. 뭐 만 명이 아니면 10만 명이 모여서 결집했다. 인원수만 잔뜩 부풀려놨는데 뭘 결집했느냐는 거라.

그래서 "그 결집은 오히려 파승에 해당이 된다" 하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이 결집한 것들을 가지고, 아 여기 있네요.

그 뿌라나 존자가 말한 8가지, 실내에서 식품을 보관하도록 하는 것, 그다음에 실내에서 조리하는 것, 그다음에 스스로 조리된 것들을 갖다가 끓여 먹는 것, 그다음에 그렇게 조리한 것들을 먹을 수 있는 것, 그다음에 새벽녘이라도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

왜 그러냐하면 그 탁발할 수 있는 시간 먹을 수 있는 시간은 분명하게 손금이 보이는 시간부터 정오까지입니다. 그런데 손금이 보이기 전이라도 누군가 갖다 줬으면 그거 먹을 수 있도록 해주라는 거라. 그게 다섯 번째고,

여섯 번째가 주는 사람이 간절하게 원해서 가져온 음식들 소원이 있어서 가져온 것들 그것을 그러면 그 소원을 내가 축원을 해주고 먹을 수 있는 것, 쉽게 말해 한국에서 지금 무슨 무슨 기도 무슨 기도 하는 그거 다 해당이 되는 것들입니다. 뭐 삼재 기도 아니면 뭐 요즘 입시기도 해가지고 이름을 이렇게 다 읽어주는 것들 있잖아. 그게 인제 여기에 해당이 돼. 그걸 허용하게 해달라는 거라.

그다음에 일곱 번째가 과일도 오후에 먹는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있고 먹을 수 없는 과일이 있습니다. 저번 테라와다 불교의범 할 때 얘기했습니다. 근데 이 과일은 내가 그 훔친 게 아니고 누가 갖다 주는 거면 그 과일은 그냥 허용하게 해줘라. 쉽게 말하면 모든 과일을 허용하게 해도.

그다음에 여덟 번째가 키운 것들은 누군가가 뜯어가지고 해주면 그거 먹을 수 있게 해도. 쉽게 말하면 경에서는 연못에다가 기르는 것들은 먹을 수 있게끔 해도. 그럽니다. 쉽게 말하면 생선 같은 것도 그 연못에 기르던 게 죽었다, 그럴 것 같으면 그것을 조리해서 먹을 수 있게끔 해달라는 거라. 그리고 한국에서 많이 하는 거, 남새밭 해가지고 거기서 경작해가지고 누군가 그걸 갖다 조리해주면 그걸 먹을 수 있게끔 하는 거.

 

근데 테라와다에서는 이거 8가지를 전부 다 금지하게 됩니다. 전부 다 못한다. 안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 8가지를 얘기합니다. 사실은 소소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소소계가 부처님 당시 그 부처님이 얘기한 것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고 딱 결정돼 버리고 나서, 그러고 나서는 나중에 2차 결집이 지나고 나서는 각각의 분파로 분열을 하게 되는 그런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청정한 상가 하나는 쭉 맥을 이어 오게끔 되는 계기도 마련하게 됩니다.

테라와다에서는 뭐냐면 18개 부파라고 얘기 안 합니다.

17개의 부파와 1개의 본줄기가 존재를 한다. 다른 17개는 그 가지에서 가시가 솟듯이 부파 분열을 했지만, 이 하나는 어떤 것도 분열하지 않고 그대로 내려왔다. 그래서 이것은 청정한 교단이다. 하고 못을 딱 박아버립니다.

 

그래서 부파 불교뿐 아니라 불교사를 이렇게 할 때 다른 사람들은 요 부처님 말씀에서 상좌부 대중부 이렇게 갈리고, 여기서 또 부파분열하는 것으로 요렇게 분류를 하는데,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그렇게 그 도표를 그리지 않습니다. 요 하나에서 그냥 쭉 내려옵니다. 테라와다가. 거기서 이 가지들이 뻗어나가는 것들이 나오지, 이렇게 지금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얘기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변하지 않는 부처님 말씀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지켜 나가는 하나의 테라와다가 있고, 나머지 17개 부파가 있다"라고 인제 얘기를 하게 됩니다.

 

자, 1차 결집의 차이점에 대해서만 조금만 얘기를 할게요.

결집의 원인은 아까 얘기했지만은 누군가가, 수밧다죠. 수밧다가 “인제는 해방됐다.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하는 말을 듣고 결집을 한 것은 다 각각의 부파에서 다 동일합니다. 쉽게 말하면 테라와다뿐 아니라 다른 데 사분율, 오분율, 십승률 이런 걸 쭉 봐도 거의 동일합니다.
단지, 이제 법장부에서는 법장부에서 만든 게 사분율입니다. 법장부에서는 누가 이교도들이 이제 부처님이 열반했으니까 이제 뿔뿔이 다 흩어져 버릴 것이다. 하는 얘기를 듣고 인제 결집을 했다는 그 부분만 다르고, 결집의 동기는 다 동의를 합니다. 그리고 결집 장소가 라자가하이고, 시간이 부처님 열반 직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있었다는 것은 다 동일합니다.

 

그래서 어떤 율장이나 어떤 경을 보더라도 제1차 결집이 있었다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단지, 하나 만이 결집한 것들을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1차 결집이 아니고 2차 결집을 1차 결집으로, 그러니까 십사(十事) 논쟁한 게 2차 결집인데, 십사 논쟁한 2차 결집을 1차 결집으로 잘못 기록을 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전부 다 동일하게 1차 결집이 있었다 하고.

그마만큼 불교사에서 결집이라고 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게 없었을 것 같으면 지금의 불교는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다.

 

그다음에 결집한 내용들은 경과 율은 결집됐다는 것은 다 동일합니다.

단지 경에서 4부니까야가 결집됐느냐 5부니까야가 결집됐느냐? 하는 것은 틀립니다.

4부니까야가 뭡니까? 장부 중부 상응부 증지부 이 4개는 다 동일합니다.

그다음에 하나가 뭐 있습니까? 쿳다까를 뭐라고 그러죠? 소부.

소부는 테라와다에서는 결집된 기록이 없습니다. 다른 부파에서는 이 결집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비담마와 소부가 결합돼가지고 결집에 넣어 놓은 게 있고, 또는 소부라고 이름을 안 하고 이띠윳따까 담마빠다 숫따니빠따 그다음에 아비담마하고 결집한 것인데 소부하고 아비담마를 결집한 것들이 있고, 아니면 아비담마는 아예 없이 소부를 결집한 것이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테라와다에서는 4부만 결집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기록상에는 5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주석서에도 그런 게 안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갖다가 다음 대로 전하는 것도, 그래서 아난다는 만약에 장부 경전을 전하는 것을 임무를 맡았다, 이런 식으로 각각의 것을 정하는 것이, 율장은 우빨리 존자 이런 식으로 정해지는데, 소부는 누가 전해라 하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거라.

그렇게 봤을 때 테라와다 불교에서 율과 법이 결집됐는데 법은 아마 사부로 해서 결집이 됐다고 봐야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경·율은 1차 결집 때 이미 확정돼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그 뒤에 가더라도 이걸 변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져 버립니다. 단지 아비담마가 나중에 문제가 됩니다.

왜 해피 스님이 죽어라 하고 아비담마를 싫어하는지,

(해피스님: 아, 싫어하는 건 아니구요,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뿐입니다.)

기준으로 삼지 않는 건 있는데, 그래도 사실은 어느 정도 일가견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을 담마라고 그럽니다. 율을 갖다가 위나야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담마를 풀어 쓴 게 아비담마입니다. 위나야를 풀어 쓰면 아비위나야가 됩니다. 대법대율이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아비위나야 대율자라고 하는 것이 나중에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저 후대에 가서 아비담마의 송출자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당시 때 그러니까 아비담마가 결집되게 된 게 3차 결집 때 하게 되는데, 3차 결집이 훨씬 지나서 기원후 5세기까지는 경전 어디를 보더라도 그걸 송출자를 '바나까(bhāṇaka)'라고 그럽니다. 아니면 '두라'라고 얘기를 하고, 그다음 '바니'라고도 얘기하고 용어들이 몇 개 있는데, 아비담마 바나까, 아비담마 바니, 아비담마 두라, 이런 용어들은 안 보인다는 거라. 차라리 아비담마가 아니고 아비위나야 바나까는 등장을 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계율을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풀어 쓴 것 가지고 그것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의 무리는 존재를 했는데, 아비담마 부분은 그 후대에 물론 기록상에는 3차 결집 때 했지만은 실제적으로는 그것이 일반인에게 유통된 것은 붓다고사 이후든지 아니면 4차 결집 이후든지 이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들을 해봅니다.

그렇게 봤을 때는 기준으로 잡아야 되는 것은 담마와 위나야가 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니까 법과 율을 기준점으로 잡아야 됩니다. 그 대신에 이 기준점에서 보충적으로 참고해야 되는 것이 아비담마, 아비위나야 이런 것과 그다음에 주석서 그다음에 복주석서 이런 것들이 되어야 되는 것은 틀림없이 맞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이 해피 스님의 입장이 맞아. 근데 한편으로는 참고는 해야 되는데, 참고조차도 안 하려고 하니까 어떨 때는 좀 답답하고, 또 하나가 뭐냐면 아직 율 부분은 부족하다는 거라. 담마 부분은 어느 정도 확립이 됐는데 율 부분을 또 모르는 게 이게 또 충돌할 것 같으면, 이게 인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 딱 만들어가지고 계통도를 쫙 만들어. 그런 것들이 좀 아직은 미숙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에서 그래도 저렇게 해서 정립을 시켜놔야만이 그게 설혹 조금 틀리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래 놔야만이 이게 바르게 확립이 돼나간다 하는 게 스님 개인적인 입장입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아비담마의 중요성이 떨어진다든지 아니면 그것들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준점은 항상 담마와 위나야다. 부처님도 열반할 때 열반하고 나서 의지해야 되는 것이 담마와 위나야다. 법과 율이지 다른 것들을 기준점으로 잡아서는 안 된다 하는 거라.

 

어쨌든 그렇게 해가지고 1차 결집이 마무리를 짓게 됩니다.

결집은 굉장히 중요성을 지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기준점을 잡을 때 항상 부처님 말씀을 기준점으로 잡아야 됩니다. 그것을 기준점으로 잡지 않고 다른 것을 잡을 경우에는 항상 빗나가게 됩니다.

어려운 게 닥치고 하더라도 자꾸 경전을 뒤다봐 가지고 법문을 통해서 그 기준점을 자꾸 잡도록 그렇게 하는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수행만 열심히 한다, 또는 공덕을 쌓는 일에 열심히 한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근데 그리하더라도 기준점은 경전입니다. 경전에 기준점을 두지 않고 다른 데 기준점을 두면 그것은 한쪽으로 쏠려져 버리게 됩니다. 그 부분은 항상 주의를 해주기 바랍니다.

 

다음 주는 한 주 쉽니다. 다음 주 토요일이 까티나 주간입니다. 그래서 부산에서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주는 스님들이 올라오질 못합니다.

그래서 다음 주는 한 주 쉬고 11월달 돼서 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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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_ 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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