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 불교사

제3차 불교 결집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129-3

담마마-마까 2025. 1. 23. 16:55

https://youtu.be/Dr0hI1lUqW0?si=sftm5P_tttZ127ea

 

* 제3차 불교 결집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129-3

 

자, 시작하겠습니다.

짯따로 담마 왓단띠 아유 완노 수캉 발랑.

이게 이제 각 나라별로 스님들이 신도들이 인사하면 하는 게송이 조금씩 틀려. 스리랑카 같은 경우에는 "수키 호뚜" 그렇게 이야기하거든. "건강하게 오래도록 사십시오." 하고 축원을 해주고, 이제 태국 같은 경우는 "짯따로 담마 왓단띠 아유 완노 수캉 발랑." 이렇게 하는데 "부처님의 담마 따라서 살아가면 담마가 여러분들을 보호해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도록 살고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굉장히 길지. 그렇게 얘기를 하고, 버마 같은 경우에는 "이당 메 다낭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 이렇게 얘기하고, "이와 같은 선한 공덕으로 깨달음에 이를 조건이 되길 바랍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게 이제 각 나라별로 조금 차이가 나죠. 그 기질적인 차이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스님은 마 어떨 때는 "수키 호뚜" 했다가 말하기 싫으면 그러기도 했다가, 어떨 때는 길게 하기도 하고, 아무 때나 해.

 

그 대신에 이제 축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 대상을 향해서 하지만 그 대상에 한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하는 축원하고 테라와다의 축원하고는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한국의 축원은 그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축원이 되게 됩니다. 그걸 이제 테라와다에서는 기복적이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근데 이제 테라와다에서는 그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이들 내가 쉽게 말하면 뛰어난 능력이 있을 것 같으면 '행복하기를' 할 것 같으면 여기 있는 사람만 행복해하는 게 아니고, 이 말이 미치는 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이들이 다 행복하다는 거라.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특정 개인을 지칭해서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게 좀 차이가 납니다.

 

자, 오늘은 제3차 불교 결집 부분입니다.

그 전에 저번 주에 세미나 때문에 스님이 농땡이 치고 이제 한 주 쉬었는데 어쨌든 세미나 때 다들 고생했습니다. 세미나 때 느낀 게 ‘아, 그래도 담마스쿨 하길 참 잘했다.’ 하는 그런 마음이 들고, 또 ‘이제는 사람들이 점점 더 테라와다적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들이 보이는 구나’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제는 내가 없어도 다른 스님들이 충분히 잘 이끌어 가겠구나’ 하는 그런 마음도 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날 세미나에서 얘기된 것 중에 좀 잘못된 게 있어가지고 조금 정정을 해드릴게요. 마성 스님이 오계 지키기 힘드니까 가려갖고 하나만 지키든지 뭐 이렇게 분별하자는데, 테라와다에는 그런 건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계목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능력의 범위를 넘어섰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부터 이미 5계는 5계, 8계는 8계, 10계는 10계, 227계는 227계 하고 정해졌기 때문에 계목을 바꿀 방법이 없습니다. 오계 내용 자체를 바꿀 수 있는 방법도 없고, 5계 중에 이거는 내가 지키기 힘드니까 빼버리고 요것만 지키자는 것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테라와다의 전통적인 방식은 아닙니다.

 

그런데 계는 받으면 하루 밤낮 동안 유효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 내일 계 못 지키겠다 싶으면 오늘 안 받으면 되지. 그런데 이제 오계라고 하는 것은 일단 그 재가자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떤 경우든지 계를 스님한테서 받든 안 받든 지켜야 되는 의무를 지니는 것이 테라와다 재가자라고 하는 겁니다.

테라와다 재가자는 기본적으로 해야 되는 것이 삼보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 이것만으로 해당되기도 하지만 지금 테라와다 불교권의 형태로 봐가지고는 이것만이 해당이 되는 게 아니고 하나 더, 계를 지니는 것, 오계를 항상 지니는 것.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삼보 예찬하고 나서, 삼보에 대한 예경, 삼귀의 삼창이라고 그러죠? 삼귀의 삼창 하고 나서 그다음에 스님이 반드시 어느 나라든지 오계를 주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이제 비해 봤을 때 경전에는 이게 전체 다가 테라와다 불교 신자의 조건이다.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서는 이거는 계는 빼고 삼귀의삼창만이 조건이다. 하는 경우도 있는데, 지금의 테라와다 불교 형태를 봤을 때는 포함이 됩니다. 오계가.

그렇기 때문에 계를 안 받았다 해서 하루 밤낮 동안 어겨도 된다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 대신에 5계 이후의 것, 8계, 9계, 10계 이런 것들은 특별할 때 받을 수가 있고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계는 어떤 경우든지 항목을 바꿀 수도 없고, 그것들을 안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테라와다 불자가 아닐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래서 그 부분은 시정을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해줍니다.

 

또 하나는 "모여서 생활하지 않으면은 비구가 아니다."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게 말은 맞습니다. 그래서 항상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하죠. "토굴 생활하는 스님들은 그 출가 비구가 아니다." 하는 얘기를 저도 가끔씩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얘기는 뭐냐면 출가한 스님들은 반드시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보름에 한 번씩 포살을 해야 되고, 안거를 해야 되고, 그다음에 해제하는 자자를 해야 되고, 그다음에 까티나라고 하는 가사를 받는 의식들도 해야 되고, 그다음에 여러 가지 대소사 스님들의 대소사를 의결해서 결정을 해야 되고, 뭔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참회를 받기도 해야 되고,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결집 같은 거 이런 거 특별한 경우에 결집도 모여서 해야 되고, 스님들의 의무가 그런 것들이라.

그러니까 이것들은 쉽게 얘기하면 모여서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라. 혼자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들이라. 그렇기 때문에 출가한 스님들은 한 곳에 모여 있으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 대신에 지금도 테라와도 불교권에서 각각 떨어져서 생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떨어져서 생활을 하지만 보름에 한 번씩은 반드시 모이는 곳에 가서 공동으로, 그걸 이제 상가 깜마라고 그럽니다, 상가 깜마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떨어져 있는 것만 가지고 비구가 아니다 하는 것은 말의 어폐가 있다. 그 대신에 보름에 한 번, 적어도 한 번씩은 모여서 상가 깜마를 반드시 행해야 된다. 그걸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은 비구의 기본적인 요건을 다 벗어나게 된다.

왜 그러냐면 그 상가 깜마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테라와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청정성 청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거거든. 청정성은 누가 확보해 줍니까? 자기 스스로도 확보해야 되지만, 다른 사람들도 청정하다고 증명을 해줘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름에 한 번씩은 반드시 이 상가 깜마들을 하게끔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한국에 있는 한국 테라와다 불교 스님들은 이 하나를 지금 빼먹고 있는 셈입니다. 그나마 그래도 할라고 무던하게 노력들은 합니다. 보름에 한 번씩은 못 모여도 한 달에 한 번씩은, 해가지고 한달에 한번씩은 모여가지고 그래도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그 상가 깜마들을 하고 있습니다. 근데 솔직히 그렇게 이 열악한 조건에서 그거라도 할라고 막 발버둥치고 있는데, 거기다가 내놔놓고 대못을 탁 질러버리니까 아이고, 내가 참 말도 못하겠고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까 말도 못 하겠고, 하는 생각도 들긴 했어요.

 

근데 어쨌든 앞으로 우리 테라와다 스님들이 나아갈 방향은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작년부터 그렇게 상가 깜마를 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자. 그래서 거기에다 시마 결계당을 갖다가 만들어서 상가 깜마를 할 수 있는 준비들 하자. 해가지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아마 지금 재정적으로 그게 살 땅을 확보하고 건물을 지을 형편이 못 되고 심지어 시마석 결계석을 세울 형편도 아직은 못 된 것 같아요. 몇 년 모았는데도 아직 한 4천만원 갖고 왔다리갔다리 하고 있는 실정이라. 그래도 그렇다고 해서 무리해가지고 돈을 모을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언젠가는 되겠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동안에라도 그래도 스님들은 자주 모여서 이 상가 깜마를 자꾸 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은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우리가 반성을 좀 많이 해야 되는 그런 부분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그날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걸 그래도 스님들도 아마 그렇게 느꼈을 거고, 또 참가하신 일반 대중들도 그래도 큰 행사인데 조용하게 차분하게 참 잘한다 하는 그런 마음들이 들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야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분쟁이 있지 않게끔, 그리고 항상 화합해서 어떤 경우든지 그 일을 만들어 나가도록 자꾸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3차 결집 부분에 들어가겠습니다.

1차 결집은 부처님 열반하고 나서 바로 직후에 했죠. 그래서 그거는 이제 부처님 말씀을 이게 부처님 말씀입니다. 하고 확정하기 위한 거였습니다.

2차 결집은 그 후 부처님 열반하고 나서 100년 후에 있었죠. 그것은 계율에 대한 사소한 의견들의 차이 때문에 그것들에 대한 확인 작업들을 한 것이 2차 결집이었습니다.

3차 결집은 그 뒤에 다시 한 140, 136, 2차 결집하고 나서 그렇게 되고 나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깐 부처님 열반하고 나서 236년째에 3차 결집이 있게 됩니다.

그게 아소카 왕 때 이루어지는데,

 

3차 결집은 보통 뭐라고 했냐면 "담마 결집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2차 결집은 '율의 결집이다" 하고 얘기하고,

1차 결집은 그냥 처음에 "최초의 결집이다" 하고 "확정되는 결집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담마라고 하는 부분에 뭔가 문제가 있어서 담마 결집을 했겠죠. 맞습니까? 어느 장로 스님이 발에 독이 있는 곤충에게 물렸어요. 독충 같은 거죠. 근데 이제 독충 같은 것에 물리면,

스님들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네 가지 물품들이 있습니다. 가사, 그다음에 바리때, 그다음에 스님이 수행하고 머물 수 있는 장소, 그다음에 또 하나가 스님들 의약품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일반 재가자일 것 같으면 반드시 스님들에게 그 조건들을 충족시켜줘야 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스님이 멀리 있을 뿐아니라 탁발을 나가서도 이 독충에게 물린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약품을 구하지는 못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스님이 내가 필요한 것들을 뭐가 필요하다고 얘기할 수도 없어. 계율에 어긋나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독충에 물린 거 해결할 뭐 바르면 돼요? 연고 같은 거 바르면 되겠지. 안 그렇겠어요?

그러니까 독을 이렇게 좀 완화시킬 수 있는 그런 연고 같은 거, 경전에는 유제품의 성분이 들어가 있는 그런 연고라고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유가 아마 이렇게 독을 엉겨붙게 하는 그런 성질이 있는 모양이라. 어쨌든 그걸 구해야 되는데 그걸 구할 방법이 없었거든. 결국은 못 구하고 열반에 들었어.

열반에 드는데 이 스님이 그래도 아라한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을 전부 모아놔 놓고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그럽니다.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살아라" 하는 얘기를 갖다가 딱 얘기를 하고 나서, 죽을 때 어떻게 죽느냐면 허공에 탁 떠가지고 가부좌를 탁하고 이렇게 열반에 들어버렸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멀리서 보니깐 스님이 열반했는데, 열반해가지고 불이 화라락 나가지고 탈 거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열반에 들고 나서 불을 일으켜 가지고 하는데 살하고 피나 이런 것들은 다 타버렸는데 뼈는 하나도 안 타고 그대로 있거든. 그러니까 뼈만 요렇게 허공에 요렇게 있는 모습이 있는 거라. 이게 며칠 동안 떠 있으니까 사람들이 막 웅성거리니까.

아소카왕이 뭔 일이냐? 하고 알아보니까 이제 그렇게 됐거든. 저 스님이 왜 돌아가셨느냐? 하니까 약을 못구해서 그렇다 하거든. 그러니까 아소카왕이 자기 성의 4쪽 문에다가 큰 저장고를 만들어라 해가지고, 거기다가 스님들이 언제든지 가져갈 수 있는 약품을 갖다 거기다 꽉꽉 채워주는 거라. 그러니까 다른 스님들은 얼마나 좋아. 필요한 약 그냥 그거는 기증된 거니까 가져가면 되니까.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스님이 그렇게 열반을 함으로 인해서 다른 일반 대중들이 불교 상가를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 한번 봐봐요. 우리 나이 든 스님들이 돌아가실 때 지 죽는지도 모르고 죽는 사람들이 쎄빘어. 병원에서 죽는 사람 뭐, 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하여튼 그런 경우들이 많은데. 이 스님은 열반 게송까지 탁 남겨주거든.

 

그런데다가 또 좀 있다가 누구 하나 장로 스님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돌아가셨냐면 경행대 위에서 이렇게 경행을 하다가, 경행을 하면서 발을 탁 들은 상태에서 열반에 들은 거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이게 스님 열반에 들었는지조차도 몰랐는데, 조금 있다가 그렇게 해가지고 몇 시간 동안 그래 가만히 있다가, 어느 순간 몸이 또 저번 스님같이 불이 확 나가지고 이렇게 타거든. 그러니까 뼈마디만 또 이렇게 요렇게 된 상태로 이렇게 된 거라.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불교 스님들을 보는 눈이 확 달라져 버린 거라.

그 두 사건 때문에.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불교 승단에 재정적인 지원을 한다든지 법문을 들으러 온다든지 이렇게 해가지고 많이 이렇게 바뀌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다른 종교가들이 자기들 몫이 이제 점점 줄어들어 버리게 된 거라. 그러니까 에이 안 되겠다. 내 요기에 있다가는 내 굶어 죽게 생겼다 싶으니까 자기도 출가를 하게 된 거라. 근데 출가하는 데는 제약 조건이 없습니다.

아니면 뭐 몇 살 이상 되면 출가를 못 한다든지 그런 것도 없고, 20가지 조건이 맞지 않는 경우가 아니면 다 출가를 받아줍니다. 20가지가 일반적인 사람들은 해당이 안 됩니다. 쉽게 말하면 빚이 있는가 없는가? 죄를 지은 놈인가 아닌가? 그다음에 아주 다른 사람이 접촉하지 못할 정도의 병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면 비구로 출가할 것 같으면 남자가 아니고 여자가 아닌가? 뭐 이런 그 정도니까, 크게 일반적인 사람들은 문제가 안 되거든.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출가자라 하더라도.

단지 인제 그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출가자들은 4개월의 기간 동안 수행하고 공부를 하고 나서 비구계를 주도록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 기간만 채우면 비구계를 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많이 사람들이 출가를 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봅시다 한국 스님이 출가한 지 한 30년 정도 지난 스님이 테라와다 국가에 가서 비구계를 받았다. 그럼 거기서부터는 1년 차가 되거든. 30년 인정을 안 해줘요. 한국 비구계 받은 30년을. 그러니까 1년 된 스님하고 똑같은데, 이 30년 된 스님은 거기 가서 비구계를 받았지만 같이 생활하기가 참 껄끄러워. 쉽게 말하면 내가 여기 있는 스님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고 이렇다고 생각을 하게 돼 있으니까. 그러니깐 독자적인 견해들을 자꾸 내세우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예 정신 똑바로 박힌 스님이면 그거 무시해버리고 내가 배운 거 이때까지 잘못됐다 하고 탁 판단하고 새로 배워버리면 되는데 그리 안 한다는 거라.

대부분 자기 견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가지고 여기서 조금 더 보태려고 이제 생각들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깐 원래 부처님 가르침하고 틀리게 알고, 틀리게 견해를 세우는 경우들이 많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다른 종교 출가자들도 와서 비구계를 받았지만 그렇다는 거라.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뭐 부처님은 요렇게 가르쳤는데,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쳤다” 하고 자기는 다른 사람한테 얘기를 하게끔 되는 거라. 그러니까 다른 스님들이 봤을 때 이거는 틀렸다는 거라.

법을 법이라고 반드시 해야 되는데 비법을 가지고 법이라고 얘기를 하고, 율을 율이라고 해야 되는데 비율을 율이라고 자꾸 얘기를 하거든. 이렇게 되면 문제가 자꾸 생겨버립니다.

그것만 있으면 괜찮아 견해가 틀린 것들은 얼마든지 그것은 수용을 합니다. 교단 내에서. 그래서 견해 틀린 것 가지고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출가하지 않고 살짜기 들어와 가지고 지가 머리 깎아 버려가지고 “나는 비구다” 하고 하는 사람들, 이걸 증명할 방법이 없는 거라. 요즘같이 계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어디서 누구에게 누구를 은사로해서 출가했다는 그런 것을 뭐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나 출가했다.” 할 것 같으면 뭐 그런갑다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그때 당시에는. 그러니깐 진짜 가서 출가를 한 게 아니고 그냥 먹고 살라고 머리 홀라당 깎고 가사를 입고 그냥 들어온 거라.

 

근데 그런 사람들은 표가 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도 모르고 자기가 하고 있던 방식대로 그대로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들어와서는 뭐 쉽게 말하면 고행하는 그런 형태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가르칠 때 고행을 하기도 하고, 쉽게 말하면 예를 들어서 오늘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모래밭에 데굴떼굴 굴러야 되겠다, 그 수행하겠다 할 것 같으면 옷을 입고 떼굴떼굴 구르기도 하고, 뭐 불을 모시는 그런 제사를 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런 거 가르친 적이 없는데 그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자꾸 얘기를 하게 되니까 이게 문제가 커지게 되는 거라.

이교도들이 들어와서 출가한 것은 그나마 용인이 되는데, 출가하지 않는 자가 자꾸 출가자라고 속이고 들어오게 되니까 이게 문제가 돼버립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견해가 틀린 것은 용서를 해줘도, 출가자가 아닌 자들과 출가자들이 한자리에 모여가지고 뭔가 회의를 하지 못합니다.

우리 집안일 집안 식구들끼리 의논을 해야 되는데 누가 낯선 사람이 왔다, 그럼 집안 식구들이 의논하는 걸 중단해야 됩니다. 나중에 얘기해야 돼. 이 사사로운 것들이 그 사람이 알 경우를, 알고 싶지 않을 경우에는 중단해야 됩니다. “나중에 그럼 우리 가족 회의하자” 하고 하든지, 안 그러면 새로 누군가 왔을 거 같으면 “조금만 기다려라. 우리 가족회의하고 나서 할게.” 이렇게 해야 되는 게 정확한 겁니다.

 

그러니까 출가한 스님들이 봤을 때는 보름에 한 번씩 모여서 포살도 하고 여러 가지 상가 회의를 해야 되는데 이 출가하지 않은 사람이 지도 출가자라고 하는데, 이거는 출가자가 아닌 건 분명하기 때문에 같이 뭘 하지를 못하는 거라. 그게 기간이 6년이라는 기간이 흘러가 버립니다.

쉽게 얘기하면 견해가 틀린 경우는 상가내에서 용납을 하고 받아들입니다. 그 견해를 고치려고 부단하게 노력을 하면 되니까. 그런데 같은 무리에 속하지 않는 자들끼리 뭐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게 인제 상가의 특징입니다. 그게 6년이라는 기간이 흘렀어.

 

아소카 왕이 보니까 스님들이 보름마다 모여서 포살도 안 하고, 상가에 상가 깜마도 안 하거든. 그래서 대신을 시켜가지고, “너 가가지고 스님들 논쟁하지 말고, 니가 비구니 아니니 뭐 이런 싸움 하지 말고, 서로 그냥 다 받아들이고, 거기서 포살을 해라고 해라.” 이렇게 시켰어.

대신이 가기 전에 다른 대신 누구한테 물어보는데 “왕이 이렇게 시키는데 우찌하면 좋노?” 하니까, 이 무식한 대신이 뭐라고 하느냐면 “내가 천하를 정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어떻게 해야 돼요? 가서 전쟁을 치러 가지고 죽일 놈을 죽여버리고 그리고 뺏을 거는 뺏고 해야만이 그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 방식을 가르쳐 준 거라. “그 사원에 가가지고 너 포살해. 해가지고 포살을 안 한다 할 것 같으면 죽여버려라.” 이렇게 얘기를 한 거라. 그런데 진짜로 가서 그렇게 죽여버렸어요.

 

그런데 목깔리뿟따띳사라고 하는 장로 스님이 있었어요. 이 스님은 누구냐면 아소카왕의 이복 동생입니다. 아소카왕하고 같은 이복동생이라. 가만히 다른 데 있다 보니까, 스님들을 포살을 안 한다고 죽여버리는 거라. 아마 여러분들 같으면 지금 있는 스님들도 마찬가지라. “너 포살할래 죽을래?” 할 것 같으면 다 포살한다고 할 거라. 죽기 싫어서. 그런데 그때 당시만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 왜? 포살을 같이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같은 무리가 모여야 되는데, 같지 않은 무리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같이 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죽었으면 죽었지 나 못 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죽여버린 거라.

계속 죽이다 보니까, 목깔리뿟따띳사 스님이 그 자리에 탁 가서 앉아 있습니다. 탁 죽일라고 보니까 왕의 동생이거든. 죽이질 못하고 왕한테 가서 “우짜면 좋습니까?” 물어보는 거라. “당신 동생이 있는데, 동생을 죽여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그러니까 왕이 노발대발합니다. “이놈의 자식아, 내가 언제 그 스님들을 죽이라 했노? 가서 화합되게 해가지고 포살을 하라고 시켰지, 내가 언제 죽이라고 했냐?” 해가지고 이 대신을 쫓아내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그 절에 가서 스님들한테 얘기합니다.

“아이고 내가 잘못했다. 그런데 나는 죽일 의도가 없었다. 단지 그냥 같이 모여가지고 상가 회의하고 포살해라고 시킨 건데 대신이 그랬다. 그러니까 나 죄가 없지요?”하니깐 스님들이 각각 의견을 달리합니다.

“어쨌든 간에 니가 그 말을 하는 바람에 대신이 와서 죽였으니까 너도 죄가 있다.” 하는 스님이 있고, 어떤 스님은 “니가 죽일라는 의도를 안 냈으니까 뭐 대신이 죽였다 하더라도 그 죄는 니하고는 관계없는 거다.” 하고 얘기하는 스님도 있고, 각각 틀리거든. 어떤 게 맞아? 어떤 게 맞아요? 예? (수행자...) 죄가 있어요? 야, 이 순 엉터리들을 배웠네.

 

업은 의도에 인해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해지는 것들입니다.

죽일 의도를 가지지 않았으면 쉽게 말하면 죽였다는 결과에 대한 과보는 받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게 정확한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일 의도가 없었으면 그 죽인 행위에 대한 결과는 내가 받을 필요는 없다는 거라. 누가 나를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왔다. 왔는데 뭣도 모르고 지나가는 차가 와서 거길 쾅 받아갖고 모여있던 사람들이 죽어버렸다. 그럼 내가 죄가 있어? 나 이 사람들 죽일 의도 없었어. 그렇게 되면 나에게는 그 죄는 없다는 거라. 그 대신에 다른 죄는 있겠지. 당연히, 그걸 미리 사고 날 수 있는 상황이 되는가 아닌가를 갖다 판단을 못한 그런 잘못들도 있고, 그리고 그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모이도록 만드는데 명예를 높이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 이런 것들은 죄가 될 수 있어도, 살인에 대한 죄는 없어.

이걸 갖다가 딱 결정을 분명하게 내려준 분이 누구냐 하면 목깔리뿟따 띳사스님이 그렇게 딱 결정을 내려줍니다. 그러고 나서 목깔리뿟따 띳사스님은 ... 산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왕이 돌아와서 보니까 똑같은 문제가 아니고 스님들이 각각 의견이 틀리거든. 그러니까 이게 어떤 게 바른 거고, 어떤 것이 틀린지 이제 분간을 못할 정도가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이거 이래가 안 되겠다. 바르게 부처님 말씀을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 하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어떤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어떤 것이 부처님이 말한 율이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정립시켜 줄 사람이 누군가 하고 물어보니까 조금 전에 그 답을 했던 그 자기 이복동생인 목깔리뿟따띳사 스님이라고 그러거든.

 

“그럼 스님 불러 온나” 이리하니까 안 와. 스님이 왕이 부른다 해서 쪼로록 쫓아가면 그거는 권력승이야. 그거는. 그런 법이 없어. 이유가 분명하게 있어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왕이 3번 불렀는데도 안 가니까, 이게 뭔 일이고 싶어가지고 대신들한테 물어보니까, “스님을 부를 때는 그렇게 부르는 거 아니다. 스님 부를 때는 와야 되는 이유가 있도록 불러야 된다.”

“스님 지금 법이 퇴락돼 있습니다. 그러니깐 이 법을 바로 세워줄 사람 바로 세워주고 이것을 갖다가 바르게 붙잡아 줘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그것 좀 해주시오.” 하고 불러라는 거라. 그러니깐 그때서야 인제 스님이 오게 되는 거라.

 

'목깔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스님'은 그 명칭은 테라와다 불교권의 여러 주석서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다음에 이제 북전 대승불교권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주석서에는 '우빠굽다'라고 이렇게 나옵니다.

두 사람은 동일인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일까? 그래서 그걸 이제 보통 학자들이 뭐라고 하냐면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고 그럽니다.

목깔리뿟따띳사는 목갈라나 존자와 그다음에 사리불 존자의 원래 이름이 우빠띳사죠? 그래서 목갈라나하고 목련하고 사리불 존자를 갖다가 두 개를 합해놔가지고 두 사람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분이라는 존칭으로 쓴 게 목깔리뿟따띳사 거든. 근데 원래 이름은 '우빠띳사'라.

 

지금도 스님을 부를 때는 태국에 가면 그 존칭을 써가지고 불러줍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지금 여러분들은 그냥 '빤냐와로 스님' 이렇게 하고 알고 있단 말이라. 근데 태국에 가면 '아짠 진용' 그렇게 부르거든. 아짠 진용하고 빤냐와로가 동일인이야? 틀린 사람이야? 아니까 동일인이라고 그러지. 근데 후대에 가면 이게 동일인인지 몰라. 그와 마찬가지라.

 

근데 동일인임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들이 몇 개들이 있습니다. 그게 보통 뭐냐면,

이 두 스님이 머무는 장소가 동일하다. 그러니까 북전에서 말하는 장소하고 그다음에 테라와다 불교에서 말하는 장소하고가 동일의 사원을 뜻한다 하는 게 있고,

설마 동일한 곳에 있는 스님인데 그것도 두 분 다 아소카 왕이 스승으로서 모시는 스님인데 동일인이 아닐 수도 없고,

그다음에 스님을 불렀을 때 두 분 다 안 갔어. 3번 다, 3번이나 청했을 때도,

그리고 청하고 나서 스님이 이동하는 수단도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비행기 타고 온 것도 아니고 그리고 자동차 타고 온 것도 아니고, 배를 타고 그 지역으로 왔습니다. 근데 그렇게 배를 타고 오기가 힘든 오히려 더 험한 지역인데도 두 스님 다 그렇게 해가지고 배를 타고 와요.

그리고 배에서 내렸을 때 왕의 오른쪽 손을 잡았다는 것도 동일하고, 그래서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두 스님이 동일인이다. 하고 지금 추정을 하는 겁니다.

 

어쨌든 스님이 오니까 이제 아소카왕이 물어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 정립을 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찌하면 좋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그때 이제 이 목깔리뿟따 띳사스님이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조금 전에 우리 누구야, 뿐냐디빠 해피스님 동일인입니다.

해피 스님이 그 위밧자와다(vibhajjavāda)에 대한 분별설자, 그 부분을 아까 얘기를 하던데, 그걸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른 법은 바른 법이라고 얘기하고, 바르지 않는 법은 바르지 않는 법이라고 얘기하고, 바른 율은 바른 율이라고 얘기를 하는 거고, 바르지 않는 율은 바르지 않는 율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바르고 바르지 않는 것을 분별한다는 거라. 분명하게 구분해서 나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그게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아는 사람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부처님이 삼세 업에 대한 걸 얘기하니까, 내가 예를 들어서 과거 세상에서 내가 뭐 나쁜 일을 저질렀단 말이라. 그럼 이 업이 어디까지 미치는가? 하고 인제 물어봤다. 그러면 인제 그걸 답을 해야 될 거 아니라. 지금 현재 그 업의 영향을 받는다. 만약에 과거에 지은 업이 뭐 과거 세상이든 아니면 지금 현재 세상이든 간에 그 업의 과보를 받았다 할 것 같으면 이미 소멸됐다 할 것 같으면 그건 지금 영향을 받지 못한다. 만약에 아직 그 과보를 받지 못했으면 지금 현재 세상에서 난 또 그 영향을 받을 수가 있다. 하고 분명하게 구별해서 얘기를 할 줄 알아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과거에 지은 잘못 죄에 대해서 업을 쌓은 것에 대해서 과거 현재 미래에 다 영향을 미친다, 뭉뚱그려갖고 얘기를 해버린다, 그럼 이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는 거라.

쉽게 예를 들면 내가 나쁜 짓을 했으면 너는 징역 10년 해가지고 징역 10년을 갖다 받고 나왔다 할 것 같으면 이미 그 나쁜 짓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는 업은 이미 유효기간이 끝나버린 겁니다. 근데 징역 10년 했는데 아직 징역 10년을 갖다가 끝내지 못했다 할 것 같으면 아직 그게 남아있는 거고, 이렇게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되는 거라. 그게 인제 분별설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렇게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부처님의 제자인 것이고, 그렇지 않고 엉토당토 안 하고 "업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항상 상주하는 것이다. 엉뚱한 소리 하는 사람들은 전부 가짜다" 하고 판단을 해라 그럽니다.

 

그럼 가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거라. 가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경전하고 주석 시에는 "그 가짜들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단을 파괴한 자들이"다라고만 나와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조치했다는 것은 안 나옵니다.

그런데 아소카 왕의 비문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산치, 바라나시 그다음에 꼬삼비 이런 데, 그 아소카 왕이 자기가 한 거 자랑한다고 막 거기다가 기록을 해놨어요.

거기에 뭐라고 돼 있냐면, "그렇게 부처님 가르침하고 어긋나게 알고 있고 그렇게 실행한 사람들은 전부 다 옷을 벗겨버리고 흰 옷 입혀가 다 쫓아 보내버렸다." 이렇게 기록이 돼 있어요. 쉽게 말하면 환속을 시켜버린 형태가 됩니다.

 

환속을 시켜버리니까, 예를 들면 중 생활한 지 한 3~40년 된 사람이 환속시키 놓으면 뭐 할 일이 있겠어? 뭐 먹고 살아야 될까?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불교 관계된 것 가지고 먹고 살아야 됩니다. 그렇다고 사회생활한다고 뭐, 뭐 불교 관계된 점빵을 하나 열었다 할 것 같으면 홀라당 말아먹어버려. 그것 가지고는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럼 뭐로 해야 돼? 옷을 벗고 나갔지만 다른 데 가가지고 “나는 중이다.” 하고 얘기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지금 상황도 똑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옷 벗겨져 나간 사람들은 저 멀리 가가지고 거기에 경전에는 뭐라 하냐면 그렇게 옷이 벗겨져 나간 사람들은 마투라 지역으로 그다음에 지금 힌두쿠시, 지금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쪽, 이쪽으로 벗어나서 거기서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고 해요.

테라와다 입장에서는 옷을 벗고 환속시킨 사람이기 때문에 이걸 승단으로 인정해야 돼, 말아야 돼? 인정할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종파와 분리돼가지고 부처님 법과 규율을 파괴한 -스님이라고도 안 해- 파괴한 자들이 17분파가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이게 인제 기본적인 바탕인데,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2차 결집이 끝나고 나서 분파가 이루어져서, 3차 결집 전에 이미 17개 분파가 만들어졌다"하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근데 이제 북전에서 얘기하는 것은 3차 결집, 그러니까 "2차 결집 때 두 개의 파로 나눠졌다가, 3차 결집 이후에 각각의 부파로 만들어졌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어떤 게 맞을까? 남전이 맞아? 북전이 맞아?

북전이 맞으려고 할 것 같으면은 적어도 3차 결집 때 카타왓투를 쓸 이유가 없습니다.

까타왓투(Kathāvatthu)에는 삼세실유설에 대해서 설일체유부에서 주장하는 거, 이건 니가 틀렸다 하고 반박하는 거, 그다음에 뭐 쉽게 말하면 뿍깔라라 해가지고 한국말로 할 거 같으면 진아, 진아가 있다. 그래서 이 진아를 찾으면 해탈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이 진아가 어딨느냐 하고 반박하는 거, 이렇게 해가지고 까타왓투에는 여러 부파들에서 주장하는 것들을 전부 논박하는 걸 적어놨습니다.

 

근데 북전에서도 3차 결집 때 그 카타왓투가 만들어졌다고는 얘기를 하거든.

분열이 안 됐을 것 같으면 그걸 반박할 이유가 어딨어? 이미 분열이 돼 있었다는 거라. 단지 인제 그게 하나의 분파로서 확정돼가지고 확립돼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각각의 주장들을 하면서 그래도 쉽게 말하면 견해가 틀리더라도 와서 갈마는 같이 하고 있었는가? 하는 그 차이가 나는 것뿐인 것이지. 어쨌든 분열돼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는 거라. 그래서 테라와다에서는 뭐냐면 "이미 3차 결집 이전에 하나의 테라와다와 17개의 분파들로서 분열이 이미 이루어졌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또 그렇게 얘기하는 이유가 또 뭐냐면 아소카왕이 그러고 나서 쓴 각문들에 보면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은 전부 다 옷을 벗겨가지고 쫓아내라" 하는 포고령이 있어.

그리고 "각각의 분열을 일으켜서 파괴하는 그런 자들은 출가 사문이 아니다." 하고 규정을 딱 해놓은 그 각문들이 여러 곳에 있어. 쉽게 말하면 많은 분파들이 있었다고 봐야 된다는 거라. 그게 17개가 있었는지 아니면 11개가 있었는지 그거는 지금 현재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간에 대승불교에서 얘기하는, 북전에서 얘기하듯이 '분열되지 않고 테라와다와 대중부 2개만 있었다'고 얘기하기에는 조금 어설픈 점들이 많다.

그래서 테라와다에서는 3차 결집까지 이미 분열이 됐다. 그런데 3차 결집하면서 나머지 틀린 사람들은 다 환속시켜가지고, 하나로 통합해버렸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부처님 입멸하고 나서 100년 이후부터 분열해서 236년까지 거의 136년이죠. 막 쪼가리가 됐다가 136년이 지나고 나서, 쫓아낼 놈은 쫓아내고 남을 놈은 남고 해가지고 하나로서 다시 부처님 당시 때의 가르침을 그대로 존속하면서 하나로 딱 존재를 해버려요.

이게 뭐냐면 제3차 결집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확정을 지어버리는 거라.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게 부처님이 말한 율이다.' 그러면서 논장이 그때 처음으로 인제 등장을 하게끔 됩니다. 각각의 논리들을 갖다가 반박하고 그리고 그걸 갖다 경전들을 해석한 것들이 등장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8개월 동안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는 불멸 후 235년이라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전에는 불멸 후 236년이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작점으로부터 비롯하면 235년이라. 왜냐하면, 235년 12월에 시작이 됐으니까 우리 식 음력으로 치면. 그러고 나서 불멸 후 236년 자자날 음력 8월 보름에 끝났다고 분명히 기록이 돼있으니까, 그 전날 쉽게 말하면 12월 보름에 시작해가지고 그다음 해 8월 보름에 끝났으니까, 그럼 몇 개월입니까? 8개월이죠.

 

정확하게 8개월 동안 결집을 했으니까, 그래서 시작점으로 볼 것 같으면 불멸 후 235년이 될 거고, 근데 그거는 딱 보름밖에 없어. 그러고 나서 7개월 보름 동안은 236년이 돼. 그러니까 조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불멸 후 236년이라 하는 것이 그래도 포괄적으로 맞다 하는 거죠. (수행자...) , 9개월! 정월부터 시작했으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산수가 좀 약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자자날 끝나게 됩니다. 근데 그 9개월 동안, '이것이 경이고 이것이 율이고 이것이 논이다' 하는 것까지 확정이 딱 돼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교단도 하나로 통합이 돼버렸죠 이제. 전부다 통합이 돼버립니다.

 

통합이 되면 뭐하노? 이미 쫓겨난 사람들은 온데 사방에 흩어져 갖고 “이게 이게 맞는 거다” 하고 얘기하니까. 그럼 우찌해야 되겠어요? 포교사단을 파견하게 됩니다. "니는 저기 가서 그건 틀렸다. 이것이 이번에 결집된 새로운 거다." 또 "너는 저기 가서 이것이 새로운 것이다 하고 확정을 지어라." 그래서 각각의 지역으로 포교사단을 보냅니다.

근데 재밌는 게 포교사단으로 나간 지역에 사리탑들이 있어요.

그 스님이 거기서 열반을 했겠지. 그렇게 해가지고 사리탑에다가 쉽게 말하면 이거는 '사리불 존자의 사리' 이렇게 해가지고 사리함을 만들어가지고, 이렇게 명문으로 브라흐미 글자를 이렇게 적어놨거든. 그런데 거의 일치하네. 경전에 어느 지역으로는 누가 갔고, 어느 지역은 누가 갔고 돼있는데, 그 진짜 그 지역에서 그 사리가 발견됐는데 그 이름이 그냥 그대로 있어. 참 희한하잖아.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테라와다의 역사서들이 신빙성이 없다 그렇게 얘기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거의 신빙성이, 없는 것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고 단지 조금 뻥튀기 해놘 것들은 있다.

지금 역사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 사실을 갖다가 뻥을 좀 튀겨가지고 기록해 놓은 것은 있어도, 없는 사실을 기록해 놓은 적은 없다는 거라.

이 제3차 결집은 테라와다 관계 빨리어의 주석서에만 등장을 합니다.

다른 북전 어디에도 이게 없습니다. 이 기록이 아예 없습니다.

1차 결집, 2차 결집 이런 거는 있는데, 제4차 결집도 있는데, 3차 결집만 홀라당 빠졌어. 왜일까? 왜 빠졌을까? 환속 당한 사람들이 뭐 좋다고 이걸 기록을 해 놓겠노? 당신 같으면 나 언제 환속 당했다. 그래서 난 환속 당한 것에 대해서 쉽게 말하면 부정하고 나는 여기서 난 중 생활했다. 하고 기록해놓겠어? 북전 어떤 기록에도 이 부분이 없습니다. 아예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가끔씩 그럽니다. 3차 결집도 이거 허구 아니냐? 테라와다에서 너희가 만들어낸 거 아니냐? 만들어냈을 것 같으면 왜 아소카 비문에 그런 것들을 기록을 해놔 놓고, 각각의 지역에 유골들 그 사리함에 왜 그 스님들 이름이 왜 존재를 하느냐는 거라.

그렇게 보는 것이 정확한 것이지 쉽게 말하면, 지 부끄러운 걸 갖다 적기 싫어가지고 안 적어 놓은 걸 가지고, 그게 맞다고 우길 수는 없는 거 아니냐는 거라. 그렇죠?

그게 이제 제3차 결집입니다.

 

그러고 나서 교단은 3차 결집 이후로는 분리되질 않습니다.

하나로 딱 통합돼버립니다.

그러면은 이제는 환속 당해가지고 저 다른 지역에 가서 멀리 가가지고 이제 자기 나름대로 이제 부파들을 형성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어떻게 살아갔을 것 같아요? 그게 역사가 얼마나 됐을 것 같아요? 가장 긴 설일체유부 역사가 가장 긴 설일체유부 같은 경우에는 3차 결집 이전부터 있었죠? 설일체유부 같은 경우에는 700년, 가장 깁니다. 나머지는 200년 아니면 300년이내에 전부 다 없어져버립니다. 처음에가 솔깃하지만은 우리 부처님 가르침하고는 점점 틀리다고 드러날 것 같으면 존재를 오래 못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부파 불교가 아예 없습니다.

 

그래서 간혹 사람들이 그럽니다.

‘테라와다도 부파니까’ 딱 대승적으로 생각합니다. 테라와다도 부파니까, 쉽게 말하면 인제는 이 지구상에 쉽게 말하면 초기 불교는 없다. 그 초기 불교를 어디로 한정해 놓냐면 3차 결집 이전, 아니면 2차 결집 이전, 어떤 경우에는 부처님 당시, 이렇게 합니다. 참 무식해도 진짜 무식한 사람들이라.

이걸 왜 테라와다 불교를 부파로써 자꾸 보느냐는 거라.

1차 결집 2차 결집 3차 결집하면서 그 맥을 그대로 이어왔는데 왜 부파로 보느냐는 거라. 똑같은 다른 그 부파로, 쫓겨난 사람들 같이.

 

그럼 부파로 볼 것 같으면 지금 그 맥을 이어와 가지고 삼장이 남아있는 거는 뭐로 가지고 설명을 할 것이고, 그리고 그 교단들이 지금도 어느 곳에 그 맥이 끊어지면 다른 데 다른 스님들이 와서 그 맥을 잇도록 하는, 그 치열하게 싸우고, 그리고 그 정통성을 갖다가 유지할려고 하고 그걸 변형 없이 청정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그걸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는 거라.

그래서 정법시대는 부처님 열반 후 몇 년에 이미 끝났다 얘기하고, 지금은 말법 시대다 뭐 이렇게 얘기하고, 참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부처님 당시 때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온 순수한 혈통들은 반드시 있게끔 돼 있습니다. 그래서 저번에 저번 시간에 그런 얘기를 했죠.

분열이 아니다. 이것은 분파다. 분열일 것 같으면 당연히 쉽게 말하면 지금의 불교는 부파의 불교니까 테라와다고, 그 부파 이전에 거는 초기 불교라고 얘기를 해야 되겠지.

그럼 그 사람들에게 물어볼게요. 지금 테라와다 불교하고 초기 불교하고 어떤 차이점이 있는데? 교리적인 차이점 아니면 교단적인 차이점 어떤 차이점이 있는데?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이걸 자꾸 분리할려고 그래. 왜 그러냐는 거라.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단지 내려오면서 처음부터 테라와다라는 용어를 썼던 것은 아니라는 거라.

테라와다란 용어를 쓸 이유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하나의 상가로서 존재를 해왔기 때문에, 그걸 테라와다라고 쓸 이유가 없습니다. 근데 문제가 생길 때 쉽게 말하면 거기서 두드러진 것들로 인해서 이름들을 쓰게끔 됩니다.

그래서 3차 결집 때는 부처님 가르침을 분명하게 구분해가지고 이것은 법이고 이것은 아니다. 하는 거를 갖다가 분명하게 가르친 스님들만 남고 나머지는 다 쫓겨났으니까, 그걸 갖다가 쉽게 말하면 위밧자와다 분별설을 했다. 해가지고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구분해가지고 쉽게 말하면 남을 사람, 떠날 사람을 갖다 구분했다는 것이지. 분별설자만 남고 나머지는 다 쉽게 말하면 쫓겨났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거라.

 

그걸 왜 자꾸 부파로써 그래서 분별설부로 이렇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테라와다로서 분별설부 이후 3차 이후에 테라와다이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상좌부, 그것도 부로 얘기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 얘기로 해서 분별설부하고 그다음에 상좌부하고 틀린 거가 돼야 될 거 아니라. 그렇잖아? 지금의 대승의 논리대로 할 것 같으면.

그리고 분별설부라고 쓰기 이전에도 또 다른 용어를 썼습니다. 그러면 그거하고 그럼 분별설부하고 또 틀린 것이 돼야 됩니다. 단절이 돼야 되는데,

그럼 지금 테라와다에서는 분별해서 여러 가지 가르침들을 갖다가 합니다. 맞는 것은 맞는 거고, 틀리면 틀리다고 분명히 얘기를 한단 말이라. 그러면 테라와다는 분별설자가 아니어야 된단 말이라?

이게 말이 논리가 안 맞는 거라.

 

그런 것이 아니고 부처님 가르침으로부터 인해서 쭉 전해져 오면서 순수한 혈통은 그대로 1차 결집, 2차 결집, 3차 결집을 지나면서 유지되어 오고, 순수한 부처님의 가르침과 율이 아닐 것 같으면 떼어내 버렸다.

그것은 떼어내버리고 그 떼어내버린 사람들은 부파가 돼버리는 형태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만 부처님이 가르침을 한 자도 변경 없이 그대로 유지돼 온 것은 지금까지 유지돼 왔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정확한 불교사다 하는 거라.

 

마지막에 이 한 장 해놓은 게 있습니다.

내가 이거 기록하려고, 나 참 그러고 보면 실력 없어요. 이걸 결국 어제 아침까지도 못 만들었어요. 설마 이렇게 한 번 해보니까 지워질 방법도 없고.

그런데 내 그 시자 하나, 수한이가 어제 법회 보러 왔어. 내가 “이 그림을 그려줘. 너 이거 하나 만들어 봐라.” 하니까 10분 만에 뚝딱 하고 만들어놨습니다. 나는 이걸 이틀 동안 쌔가빠지게 해도 안 됐는데, 참.

 

이게 정확한 부파 계통도입니다. 이것이 맞는 것이지. 지금의 각각의 서적들이나 아니면 다른 데서 얘기하듯이 이렇게 그렇게 분열되는 표들을 가지고 배우는 것은 바른 방법은 아니다.

그래서 정통적인 맥은 하나가 있다.

거기서 분열된 것이 쉽게 말해서 첫 번째 분열된 게 대중부가 분열되는 거고, 그게 쉽게 말하면 2차 결집 불멸 후 100년,

그리고 밑에 하나씩 하나씩 돼있는 것은 그 연대가 점점 내려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분열이 되는 것까지 경량부까지 분열되는 것이, 3차 결집 이전에 전부 다 분열이 되는 형태를 띱니다.

(수행자...) 경량, 제가 경상도 촌놈이라서 그렇습니다.

 

이게 3차 결집인데, 간혹 사람들이 빨리어에 대해서 오역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빨리어 글자들이 마가다 언어하고도 조금 틀리고, 또는 인도 서부 데칸 그거 하고도 좀 비슷한데, 조금 틀린 부분도 있고 뭐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 인도 남부하고 조금 틀린 것도 있고, 이렇게 얘기들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원래 처음에는 우리가 처음에 공부를 할 때는 "빨리어는 마가다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근데 그 뒤에 이게 자꾸 바뀌어. 그래서 빨리어는 마가다어가 아니다. 남인도 언어다, 아니면 서부 데칸 언어다, 아니면 스리랑카에서 만든 새로운 언어다, 나중에는 짬뽕 된 거다, 각각의 지역으로 이렇게 오면서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테라와다가 빠딸리뿌뜨라에서 점점 더 남하를 합니다. 그래서 서부 데칸 쪽 지금의 산치 있는 쪽에서 크게 또 융성을 하고 또 남부 쪽으로 오고, 그러고 나서 스리랑카를 가고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각각을 지나면서 그 언어들을 갖다가 짬뽕을 시킨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은 만약에 그게 맞다고 할 것 같으면은 그렇게 주류 세력들은 남하를 해가 스리랑카까지 갔는데 주류가 아닌 테라와다들이 그럼 인도에서는 하나도 없어져 버렸나? 다 죽어버리고 아예 다른 부파들까지 없어져 버렸어요? 그렇지는 않을 거 아니라. “나 안 간다” 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그 사람들이 만든 경전들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밀란다 왕문경 그런 것들, 이런 것들은 그 인도 대륙에 남아있는 테라와다들이 남긴 쉽게 말하면 기록물입니다. 그럼 거기에 언어하고 쉽게 말하면 지금 스리랑카의 삼장의 기록 빨리어 남아있는 그거 하고는 틀려야 될 거 아니라. 이 사람들은 남하 안 하고 거기 있었으니까. 근데 왜 이게 또 똑같애. 이거는 뭐로 증명할 거라?

 

차라리 그것보다는 빨리어는 문자가 아니고 말입니다.

그럼 말을 문자로 기록할 때는 그냥 말로써 기록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기록해 놓으면 무슨 의미인지는 모릅니다 나는. 우리말로서 그 기록을 해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담마스쿨 그러면은 영어로 dhamma school 이렇게 기록을 해놨단 말이라. 그럼 영어로 이렇게 기록을 했다. 그러면 영어를 아는 사람은 이게 뭔 뜻인지 모릅니다. 스쿨은 또 영어네. 에이 또. 어찌 또 그렇게 됐냐.

그러면 영어 쓰는 알파벳을 쓰는 사람은 그러니까 만약에 스님 이름을 적어 놨다 치자. 만약에 진용 스님 그러면 sunim, sunim이 뭔 뜻인데? 스님이라고는 읽긴 하는데 이게 뭔 뜻인지 몰라. 빨리어는 그렇게 기록해 놓은 거라. 4차 결집 때.

오죽했으면 그렇게 기록해 놨겠어? 스님을 갖다가 영어로 적을 때 그냥 monk(몽크)라고 안 적고, 왜 sunim(스님)이라고 적어놨겠느냐는 거라. 그게 붓다와짜나(Buddhavacana)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말한 말씀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말한 걸 갖다 그냥 그대로 적어 놓은 것뿐이라.

 

근데 지금 현재 그걸 갖다가 증명하려고 하니까 증명할 방법이 없어. 왜? 문자가 기록될 때는 이미 부처님 당시 때보다도 몇백 년이 흐른 거라.

그럼 몇백 년 전에 걸 갖다가 그렇게 문자로 기록을 해놨는데, 몇백 년 흐르고 나서 지금 요 본토 바닥은 그게 언어가 안 변했겠어? 이걸 하고 요거하고 비교를 하니 이게 맞아? 안 맞지. 바보들이 아닌가 싶어.

그리고 경전에 남아있는 다른 3권의 경전들하고 지금 현재 빨리어 스리랑카에 남아 있는 거 하고 문법이나 아니면 여러 가지 그 주어나 아니면 명사나 복수형이나 이런 것들이 왜 다 동일하느냐는 거라. 학자들이 세월이 많이 남아도는 모양이라. 그런 거는 증명할 생각 안 하고, '이게 아니다'라는 것만 가지고 자꾸 끼워맞추려고 그럽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빨리어는 어떤 경우든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기록해 놓은 겁니다.

왜 그렇겠어요? 순수 혈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부처님이 한 말씀을 순수하게 지켜나가고, 그것을 그대로 유지해 나갈려고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라. 만약에 다른 부파 같이 이걸 개변한다든지 아니면 바꿔버렸다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 지금은 빨리어 볼 수가 없습니다. 다른 가르침으로써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그게 테라와다라고 하는 겁니다. 자, 이게 제3차 결집 부분입니다.

 

더 자세한 것은 이(프린트물) 속에 있습니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이 과목의 3분의 1밖에 아직 못한 것 같애. 근데 다음 달이 12월 달이죠. 12월 달도 두 주밖에 시간이 없어. 첫째 주, 둘째 주. 그렇죠. 사무장님? (예) 마지막 셋째 주는 수계식이 있기 때문에 셋째 주는 못합니다. 그래서 2주밖에 못해. 그래서 이걸 지금 다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없어도, 그리고 스님이 쉽게 약속은 못 하는데 어쨌든 되도록이면 처음에 계획했던 그 분량은 다 기록을 해가지고 교단 홈페이지에다가 올려놓도록 그렇게 해놔 놓을게요.

그리 해도 기본적인 거, 3차 결집 이후에 스리랑카로 넘어간 거, 그다음에 스리랑카의 여러 가지 불교 발달사, 그리고 제4차 결집하고, 그다음에 동남아시아가 왜 그 빨리어 불교권으로 묶이게 됐는가 하는 거, 그다음에 각각의 불교 나라의 불교들에 대한 거, 그리고 지금 현재까지 오고, 왜 인도에서는 불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왜 인도에서는 불교가 사라졌을까? 이걸 지금 다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중에 가장 요점되는 거 한 두 가지만 더 추려가지고 12월 달에 해드리도록 할게요. 나머지는 교단 홈페이지 참고해. 그 수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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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_ 결집

【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5. 제1차 결집6. 제2차 결집7. 제3차 결집10. 제 4차 결집 - 불교 경전의 문자화16. 현재의 테라와다 불교(테라와다 불교의 원칙과 특징들)  5. 제1차 결집  부처님께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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