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pakGHmVJfHg?si=Nr9Ggg4yaqgUUDWk
* 제4차 결집_빤나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206-3
이제 오늘 하고 다음 주 하면 이제 2학기 수업은 실제적으로 끝납니다. 세 번째 주는 이제 수계식이 있는 주기 때문에 그때는 강의가 들어갈 수가 없고, 그래서 두 번 남은 것 중에 목록을 이렇게 쭉 보니까 딱 2개 할 것만 뽑아봐라고 하니까, 그래도 "제4차 결집이 중요하다" 해서 그게 하나 들어가지고, 그다음에 나머지는 전부 다 이제 뛰어넘고, 맨 마지막에 있는 거 지금 "현재 테라와다 불교는 어떠한 실정인가?" 하는 그런 것들만 살펴보는 시간으로 마련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4차 결집 부분을 하겠습니다.
저기 누구 김청! 4차 결집의 특징이 뭐라? (수행자: 4차결집의 특징이요?)
음, 다른 것하고 틀린 것, 지금 1차 2차 3차는 이제 여러분들 알고 있잖아. 4차 결집은 그 1차 2차 3차 하고 차이 나는 게 뭐 어떤 게 있어요? (수행자: 잘 모르겠는데요.)
스리랑카에서 있었으니까, 인도 밖에서 결집이 이루어지게 된 게 차이가 나는 거고,
그래서 대승불교에서 나중에 기원후 2세기 때 쿠시나가라 쪽에서 제4차 결집이 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근데 4차 결집을 했으면 거기서 뭐가 남는 근거가 있는데, 거기에는 뭐 동판에다가 경전하고 주석서를 새겼다고 그러는데, 지금 쿠시나가라 쪽 뭐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발견은 안 되고 있어. 그리고 결집이라는 건 경전결집이 주인데, 경전이 아니고 이때까지는 여러 부파의 주석서들을 모아가지고 결집을 했다고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과연 결집이라고 볼 수 있느냐 하는 그런 의문점은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빼버리고 나면,
테라와다 불교에서 말하는 제4차 결집은 기원전 1세기 때 스리랑카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인도 밖에서 이루어지는 첫 번째 결집, 그렇다고 인도 불교 다 망해버린 건 아니고. 그다음에 앞에 결집하고 제4차 결집이 또 하나 차이 나는 것이, 1차부터 3차까지는 구전으로 암송해서 이루어진 것들인데, 제4차는 그게 글로써 써지게 된 것. 문서로 써지게 됐다는 거라. 크게 보면 그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장점도 되고 단점도 돼 버립니다.
그럼 첫 번째, 인도 밖에서 결집이 이루어진 게 왜 장점이 될까?
제4차 결집은 삼장 외 주석서까지 다 결집을 하는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런데 삼장은 빨리어로 기록을 하고, 주석서는 싱할라말로 기록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외국인이 왔다, 한국말로 송알송알송알 할 것 같으면 그 사람들이 알아들어요? 못 알아듣죠. 그래서 그 사람하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언어가 하나 필요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빨리어라고 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언어라. 그렇게 보면 되고, 싱할라 말로 적어놨다는 거는 스리랑카 사람 외에는 알 방법이 없어. 그럼 주석서를 싱할라 말로 적었으니깐 적어도 오염은 안 된다는 거라. 오염은 안 되는데, 그 장점이 있는 반면에 단점이 뭐라? 다른 사람은 모른다는 거라. 지엽적으로 점점 더 세계 불교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그런 단점도 있게 되게 됩니다.
어쨌든 그것도 인도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고 스리랑카에서 이루어졌으니까 더욱더 보수성을 더 띠게끔 돼 있는 게 제4차 결집이라고 봐야 되는 거죠.
그다음에 두 번째, 두드러진 특징이 뭐라고 그랬어요?
패엽경에 쓰는 것이라고 했죠. 1학기 때 패엽경에 대해서 여러분들 공부했죠. 아마 잘 알 겁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패엽경 중에 가장 오래된 게 기원후 2세기 때, 그다음에 기원후 4세기, 5세기 때 이때 있는 것이 지금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거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은 기원전 1세기 때 패엽경에 썼으니까 이미 그것은 지금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어떻게 해서 안 남아있는지 나중에 문서를 보면 됩니다. 저 영국군 못된 놈들이 불살라버렸어.
어쨌든 패엽경에 글을 쓰다가 보니까 장점이 뭘까?
암송을 해오던 것이 암송하는 사람이 적어진다든지 아니면은 불교가 쇠퇴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그것을 그대로 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그룹이 죽어버리고 나면. 실제로 태국 같은 경우나 이럴 때도 인제 스님들은 227계를 달달달달 스님들이 외워야 되거든. 근데 어느 사찰에는 가면 그걸 배우는 스님이 없어.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거기서 보름마다 포살을 할 수가 없어. 그러면 다른 데 있는 스님들을 꾸워와가지고 거기서 해야 되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근데 꾸워 올 데도 없으면 어떻게 하냐? 할 방법이 없어요. 그거는 사라져 버리게 되는 거라. 그 경은.
그래서 그런 면에서 글자로 기록을 했으니까 적어도 사라질 위험은 없다 라는 게 장점이 될 수는 있는데, 이게 또 장점만 되는 것은 아니라.
어떤 단점이 있을까? (수행자...) 그렇지. 그전에는 이제 이 그룹으로 다 이걸 외우고 이걸 그룹으로 다 외우고 이런 식으로 집단적인 형태들을 띠게 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성이 없어져요. 개인이 뭐 쉽게 말하면 얼마든지 경전도 공부할 수 있고 뭐 개인이 뭘 할 수도 있는 그런 형태가 돼 버립니다. 집단이 됐을 경우에는 그것을 변경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은 거의 없습니다. 근데 이제 개개인이 돼버릴 것 같으면 이제 문제가 심각해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대승불교가 태동할 수 있는 근거지를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됩니다. 대승불교는 뭐로 시작이 돼요? 교단이 먼저 시작된 게 아니고 경전으로 먼저 시작이 되죠. 그게 이제 우리 같은 합송의 방식이 아니고 글로써 새겨진 것들로써 인해서 시작이 되게 됩니다.
그런 어쨌든 단점이 돼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첨삭이 될 가능성들이 점점 더 농후해진다. 경전으로 기록됐으면 그 첨삭이 안 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더 많이 첨삭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그 뒤에 논서들의 발달 사항이라든지. 경전 주석서 복주석서의 발달 상황을 볼 것 같으면은 가파르게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게 이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기원 후 5세기까지는 기하급수적으로 그렇게 주석서 복주석서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글로 써지게 되었으니까.
그러고 나서 이제 기원후 5세기 이후에는 거의 그런 일이 없어집니다. 왜 그러냐면 이미 기원후 5세기 때 붓다고사 스님이 쓴 청정도론을 복주석서 한 스님이 있어요. 그 스님의 글 이후에는 거의 이것을 논박할 거리가 없어져 버립니다. 청정도론은 사실 논박할 거리가 많거든. 근데 그것을 복주석서한 게 나와요. 그래서 그거 이후에는 거의 논박거리가 없어져 버립니다. 물론 그런 것도 있고 부파들이 분열된 부파들이 거의 소멸 단계에 들은 그런 계기들도 있고 하게 되는데, 그래서 지금 현재는 테라와다 불교권 내에서 그 이후에 새로운 논쟁의 거리가 거의 없어져 버리고, 고착화가 돼버리는 형태가 됩니다. 그 이전에는 끊임없이 주석서들은 더 늘어나고 또 복주석서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게 인제 사경, 필사해서 패엽경에 서사한 것으로 인해서 이렇게 일어납니다.
그게 인제 제4차 결집이라고 하는 건데, 제4차 결집 언제 일어났을까? 언제 진행됐을까?
마힌다 장로가 제3차 결집이 지나고 나서 스리랑카로 파견이 되죠. 그건 저번 시간에 얘기를 했죠. 아소카 왕 때 3차 결집 이후 마힌다 장로를 비롯한 5명의 아라한들이 파견이 됩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에 스리랑카 왕 데와남삐야 띳사 왕을 만나서 그 왕을 비롯한 대신들이 불교로 개종을 하게 되고, 불교가 그 나라에 정착을 하는 계기가 되게 됩니다. 그때 데와남삐야 띳사가 아, 그래도 아무리 마힌다 장로가 뛰어난 아라한이라 하더라도 부처님만 하겠어? 부처님이 좀 보고 싶다는 그런 얘기를 하니까, 부처님하고 관계된 성물을 갖다 가져오게 되는 게,
상가밋따 비구니 스님이 부처님이 성도한 붓다가야에서 보리수 가지를 꺾어서 가져와서 스리랑카에 이식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리수 나무를 부처님을 대신해서 보도록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어느 다른 나라보다도 보리수 숭배 신앙이 강한 나라가 이 스리랑카입니다.
그리해서 불교가 많이 퍼졌지만은, 어느 날 이제 이 데와남삐야 띳사 왕이 마힌다 장로에게 물어봅니다. “인제 이 나라에 스리랑카에 불교가 이제 정착됐지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아직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 그랬을까? 마힌다 장로가, 왜 정착이 된 게 아니라고 했을까?
마힌다 장로는 스리랑카 사람이라? 스리랑카 사람이 아니라? 스리랑카 사람 아니잖아. 인도에서 왔으니까. 그리고 다른 스님들도 인도에서 건너온 스님이지 스리랑카 사람이 아니라. 그러면 외국인이 아무리 와서 우리나라 와가지고 설법해봐야 그 사람들 떠나가면 그만이야.
그러면 지속적으로 여기에서 법을 설하고 지속적으로 상가가 형성이 되려고 할 것 같으면 교단이 형성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나라 사람이 출가해 갖고 스님이 돼 갖고 법을 설하게 되고 또 그 스님들이 모여가지고 상가를 구성하게 됐을 때 이게 인제 정착의 처음 첫발이 되게끔 되는 거라. 마힌다 장로가 그 얘기를 딱 하거든. 그때사 인제 데와남삐야 띳사 왕이 깜짝 놀래서 “어, 그럴려면 우째해야 됩니까?” 하니까, 절이 있어야 스님이 머물거 아니라.
그래서 절을 지어라 해가지고 만들어진 절이 '마하위하라(Mahā-vihāra)' 라고 하는 '대사(大寺)'라고 하는 큰 절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원래 그렇습니다. 그 나라에 그 가르침이 뿌리를 내릴려고 할 것 같으면 그 나라 사람이 출가를 하게 되고, 그 나라 사람이 재가자들의 귀의자가 되고 재가자가 되고, 그래서 그것들이 4부 대중으로서 형성되게 됐을 때, 그래서 스님들은 청정하게 계를 지키면서 수행을 하고 법을 설하게 되고, 재가자들은 그 스님들을 뒷받침하는 형태들이 이루어지고, 그게 돼야만이 계속해서 출가하려는 스님도 생겨나고, 재가자들도 그 법을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모여지게 되고, 이렇게 인제 불교가 퍼져 나가게 되게 되는 겁니다.
그 기반은 뭐가 돼야 된다고? 머물 장소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마하위하라(Mahā-vihāra)라고 하는 거라. 마하위하라가 만들어지면서 이제는 스리랑카에 불교가 정착이 됐다.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는 아직 테라와다 불교가 정착을 못 하고 있는 거지. 그렇죠? 빨리 정착이 되겠죠. 정착도 되기 전에 교단부터 만들어졌으니 이 일을 우짜꼬.
그러고 나서 이제 시간이 지나게 되는데 스리랑카라고 하는 것은 인도하고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언어도 비슷하고 문화 그다음에 여러 가지 종족 이런 것들이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그래서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기 때문에 인도에서 왕권이 바뀌면 그것이 스리랑카까지도 영향을 미치게끔 됩니다. 그러다가 마힌다 장로가 80살까지 살았어요. 근데 마힌다 장로가 열반에 드시고 나서 거의 100년 뒤에 인제 제4차 결집이 이루어지거든요.
그러니까 마힌다 장로의 적어도 제자들이 이 결집에 4차 결집에 참여하는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래서 제3차 결집에서 이루어진 방법으로 경율론 3장하고 주석서가 제4차결집에 변형됨 없이 그대로 올 수 있는 계기들을 마련하게 됩니다.
어쨌든 그 100년이라는 기간이 아주 다이나믹하게 스리랑카로 돌아갑니다.
물론 마하위하라를 비롯해 가지고 마하위하라가 생기니깐 부산에 하나 분원 만들고 경주에 하나 분을 만들고 뭐 어디에 분원 하나 만들고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다들 분원들이 있게끔 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거기도 다 마하위하라라고 여기도 마하위하라라. 그리하더라도 각 지방으로 이제 그 불교가 퍼져나가서 정착을 하는 계기가 되게 됩니다. 그래서 꼭 지금 서울에 있는 마하위하라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형태들은 아니게끔 됩니다. 꼭 부처님 당시 때 부처님이 전도사들을 파견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 전도 파견된 전도사들이 그 지역에 가서 하나의 상가들을 구성하게끔 되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게 인제 근 백 년간 스리랑카에서 이루어지는 형태입니다.
그런데 인도의 영향을 받다 보니까 인도 사람들이 스리랑카를 침입을 많이 합니다.
스리랑카의 왕 중에 왓타가마니 띳사라고 하는 왕 때인데 이 왕이 즉위한 지 5개월 지나고 나서 어떤 일이 생겼냐면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점을 칠 때 뭐로 가지고 점을 쳐요? 점 칠 때 뭐로 점 쳐요? 점 안 봐봤어? (예) 아아, 여기는 건강한 사람들만 다 있네.
대부분 달 가지고, 그게 인제 음력 가지고 하는 거기 때문에 달을 가지고 기준으로 하는데, 인도나 스리랑카나 동남아시아 같은 경우에는 별자리를 가지고 점을 칩니다. 그래서 우리하고는 조금 성질이 좀 틀리죠.
그런데 어떤 예언들이 있었느냐 하면 이렇게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목성 토성 수성 이렇게 일직선으로 쫙 이렇게 보게 되게 될 때, 이때 이 기운을 받는 도적 도둑놈이 왕이 될 것이다. 하는 그런 예언이 있었어요. 그 바라문 이름이 바라문 띳사인가 아마 그럴거라. 아마 정확하게, 나도 봐야 된다. 어쨌든 있다 치자. 그 예언을 갖다가 알고 있으니까 이제 그렇게 일직선이 될 때 자기가 그 도둑질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는 자기 딴에는 내가 이제 그 기운을 받았다고 그럽니다. 사실은 점은 믿을 거 못 되잖아요. 근데 뭐 사람들은 거기에 뿅 가거든. 그 기운이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뿅 간다고.
그러더니 이 바라문 띳사가 이제 즉위한 지 5개월 된 왕한테 가서 “내가 왕이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니 물러나라”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왕이 생각하는데 5개월이 지나도 아직 왕권이 견고하게 되기 이전이니까 황당하잖아. 그렇다고 그 예언을 갖다가 무시할 수도 없는 형태라.
그래서 절충점을 찾은 게 뭐냐면 지금 남인도에 있는 졸라 왕국에서 스리랑카를 침입해 왔으니까 저 침입자들을 물리치면 네가 왕이 되도록 해줄게. 이렇게 합니다. 그건 뭐 물리칠 수 있나? 그러니까 이 사람이 가서 싸우면서 패하니깐 여기다 항복을 하고 이 사람 스리랑카 그 바라문이 인도군의 편에 서서 활동을 하게끔 됩니다. 이 바라문 띳사가.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이제 수도가 정복당하는 형태가 된 거라. 그래서 이 왕이 도망을 가게 됩니다.
인도군이 어디로 침입해 들어오느냐 하면 지금 스리랑카 요렇게 돼 있을 것 같으면, 인도가 배를 타고 오기 때문에 보통 보면 서부 해안 쪽으로 이렇게 들어옵니다. 그러면 옛날에 고도가 아누라다뿌라라고 해서 거의 북쪽 부근에 있습니다. 왕이 도망을 가면 어디로 도망가야 되겠어요? 북쪽으로 나가 도망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서남쪽에서 치고 들어오기 때문에.
북쪽으로 도망을 가는데 그 외도 수행자가 뭐라고 하냐면, “저 쓸개 빠진 놈이 국민을 놔두고 도망간다”고 막 비난을 했어. 그러니까 왕이 생각하기에 도망가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그런 얘기까지 들으니깐 마음속에 응어리지는 게 있습니다. ‘내가 만약에 다시 이 나라 돌아오면 니 가만 안 둔다’ 이렇게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그 사원을 부숴가지고 무외산사라고 하는 절을 짓게끔 됩니다.
어쨌든 그러고 나서 도망을 갔는데, 도망을 가가지고 이 기간 동안에 인도군이 여기 정복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스리랑카에서는 잃어버립니다. 부처님의 바리때. 그때 당시에 부처님의 바리때가 스리랑카에 있었거든. 마힌다 장로를 통해서 이렇게 들어왔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부처님 바리때가 어데 있는지 조차도 이제 없어져 버렸어요. 불교 안 믿는 사람들이 가져 갔는데 그거 묻어버렸는지 어떻게 알 거야? 이 유물을 갖다가 받았으니까 7명의 지도자들 중에 두 사람은 그걸 가지고 자기 인도로 돌아가고, 5명의 지도자들이 돌아가면서 스리랑카를 다스리게 됩니다. 14년간을. 그 기간 동안 얼마나 착취를 하겠어? 그러니까 스리랑카는 핍박될 대로 핍박되는 거라.
그러니까 사람들은 먹고 살 게 없으니깐 풀뿌리 먹다가 나중에 뭐까지 먹게 생겼어요?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 거라. 이 14년간. 누가 잡아먹기 가장 좋을까? 나이 든 장로. 다른 사람은 가족이 있으니까 내가 그거 잡아먹다가는 그 가족한테 해코지를 당할 수 있는데, 출가한 스님은 잡아먹어봐야 다른 해코지를 당할 게 없다고. 그것도 힘이 없는 나이 든 장로, 근데 나이 든 장로들은 전부 경전을 암송하고 있는 바나까들이라. 경전 암송자들이라. 차례차례로 장로들이 죽게 되는 거라.
그래서 경의 주석서에는 신이 나타나가지고 그랬다고 그러는데, 신이 나타났기야 하겠어? 스님들한테 여기 있다가는 안 된다. 그러니까 우선 이 기간 동안 피해라 하면서 인도로 들어가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700명의 스님들이 인도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중에 이제 50명인가 60명인가는 “아, 나 안 들어간다. 민중들이 지금 다 굶어 죽게 생겼고 지금 이리 핍박받고 있는데, 그걸 놔놔놓고 어떻게 들어갈 거냐?” 하면서 안 갑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60명 이 사람들이 삼장을 지키게 됩니다. 그리고 인도로 간 700명도 인도 가서 다시 또 그 자기가 알고 있는 삼장들을 갖다 확인해 가지고 옵니다. 그러고 나서 14년이 지나고 나서 이 700명이 다시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들어와서 보니까,
이 두 그룹 그러니까 스리랑카에 남아있던 바나까들 경전 송경자들하고 인도로 갔던 송경자들이 만나서 대조를 해봅니다. 인도에 있는 거하고 지금 스리랑카에 있는 것이 그러니까 3차 결집이 지나고 이미 100년이 지났으니까 똑같은 거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다는 거라. 토씨 하나, 자음 모음 전부 틀린 것이 없어요. 그래서 아아, 우리가 지금 암송하고 있는 게 이렇게 정확하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끔 됩니다.
그래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해서 오랜 시간을 핍박을 받다 보니깐 스리랑카 국민들도 이미 절반 이상은 다 없어져 죽어버리는 거라. 출가한 스님도 점점 더 적어지게 되는 거고, 그러니까 이걸 계속 암송해서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안돼. 그래서 이것을 전하여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하는 것 때문에 토론이 붙게 됩니다. 그래서 스님들 간에 토론이 붙게 됩니다. 뭐라고 토론이 붙느냐면,
"빠리얏띠(pariyatti)가 우선인가 빠띠빳띠(paṭipatti)가 우선인가?"
쉽게 말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우선이 돼야 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실천하는 것이 우선이 돼야 되는 것인가? 해가지고 토론을 붙게 됩니다. 2개를 다 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돼. 지금 현재의 이 승단은. 두 개 다 하면 좋겠는데 이 2개 다 못하겠거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거라.
여러분은 어떤 걸 선택할 것 같애요? 수행하는 사람들은 수행은 수행실천이니까, "수행하는 게 우선이다" 해가지고 경전 공부는 등한시 하려고 그럴 거고, 경전 공부하는 사람들은 "뭘 알아야 뭐 수행할 거 아니냐" 하면서 뭐 경전 공부를 우선 할려고 합니다. 똑 마찬가지라.
쉽게 말하면 '빵수꿀리까'라고 해가지고 숲속에서 수행하던 그룹들 그러니까 우리말로 할 것 같으면 '분소의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떨어진 옷을 입고 그리고 걸식하면서 살면서 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그런 그룹들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스리랑카에는 이렇게 두 그룹이 있습니다.
숲속에서 거주하는 승려, 그다음에 도시에 살고 있는 승려 이렇게 두 그룹이 있는데,
그래서 '빵수꿀리까'는 밀린다 왕문경의 예를 들면서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실천되지 않는 것들은 의미가 없다. 너희가 아무리 굉장히 많이 배워봐야 그게 실천이 안 되면 뭔 의미가 있느냐?" 그렇잖아. 여러분도 그게 뭐 내가 아무리 오계를 많이 알고 있다, 부처님 말씀 많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지만 알고 있으면 그거 어따 쓸 거라? 오계를 알고 있으면 오계를 지켜 나가고 그렇게 실천이 돼나가고 부처님 말씀대로 따라나가는 실천이 돼야만이 되는 거고, 그러고나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이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실천되지 않는 게 뭔 의미가 있느냐? 하고 밀란다 왕문경의 예를 들면서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담마까띠까'라해서 우리말로 할 것 같으면 '법사' 같은 그런 형태입니다. 공부하는 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그 그룹들은 뭐라고 얘기하냐면 "아니다. 그건 아니다. 아무리 실천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배우지 않는 상태에서 뭘 가지고 근거를 해가지고 실천할 거냐?" 하는 거라. 까막눈이 뭘 알아야 뭘 실천할 것 아니냐는 거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내가 적어도 경을 갖다 완전하게 알고 있을 것 같으면 경도 아는 하나의 이점이 있는 반면에 실천할 수 있는 근거까지 된다는 거라. 2가지를 다 하게끔 된다. 그렇기 때문에 둘 중에 하나 선택하라 할 것 같으면 배우는 것이 우선이 돼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도 토론을 붙이지 않으면 아마 밤을 샐 거라. 어떤 게 맞을까? 시대적인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어요 스리랑카에? 바나까(bhāṇaka) 암송자들이 거의 죽음에 이르고 그래서 암송으로 인해서 대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변함없이 순수하게 오염시키지 않고 전할 수 있는 게 점점점 더 힘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암송하는 그룹들이 이기게끔 됩니다. 쉽게 말하면 “배우는 것이 우선이다.” 하고 결론이 딱 나게 됩니다.
경과 율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그 알고 있는 것으로 인해서 실천할 수가 있고, 또 이 가르침을 갖다가 설혹 수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지고 도와 과가 이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배우는 것들이 존재를 할 것 같으면 그것을 복원해낼 수가 있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언젠가는 그 가르침을 보고 배우는 사람이 있게 되고, 그걸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이 있게 돼서, 그 사람은 도와 과를 이룰 수 있게 된다는 거라. 근데 지금 현재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해서 수행만 하는 사람만 존재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배우는 경전들이 없을 것 같으면 이것은 그 사람들이 죽고 나면 인제는 무용지물 돼버린다 하고 인제 저렇게 결론이 나게 됩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둘 중에 하나를 지금 상가에서 선택을 해야 되는 판이니까, 뭘 우선해야 되겠어요? 부처님이나 부처님이 성스러운 제자같이 수행 실천하는 것들은 잠시 미루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고, 지금은 경을 보존하는 것이 더 우선이다. 하는 생각이 딱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경전을 갖다가 이걸 변함없이 전하기 위한 방법을 찾게 되는 거라. 우짜면 이것들을 갖다가 대대손손 유지시켜 나갈 수가 있는가? 그 방법을 찾다가 찾은 게 뭐겠어요? 새기라는 거라. 패엽경에다가 경전을 새기게끔 결정이 나게 됩니다.
근데 그렇게 해가지고 그 패엽경에 새기는 게 7년간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때까지 1차 결집부터 3차 결집까지는 전부 그 왕이 있는 곳에서 큰 대도시에서 결집을 했어요. 그렇죠? 그렇잖아. 라자가하, 그다음에 왓지국, 그다음에 빠딸리뿟따 전부 그때 왕이 있는 곳에서 했단 말이라.
근데 지금은 스리랑카 상황은 어떤 상황이냐면 도망갔던 왕이 14년 뒤에 다시 왕권에 복귀하는데 도망갔을 때 도움을 줬던 스님이 띳사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어요.
이 띳사스님에 대해서, 띳사스님 때문에 쉽게 말하면 띳사스님을 따르는 신도집에서 머물렀거든. 그러니까 이 띳사스님이 얼마나 고마울 거라. 그래서 도망칠 때 왕을 욕한 외도들의 사원을 허물어버리고 그 벽돌로 가지고 거기다가 아바야기리 위하라(Abhayagiri-vihāra)라고 하는 무외산사(無畏山寺)를 만들게 됩니다.
근데 절을 만들면 여러분들은 모르겠지만, 절을 만들면 그 스님이 머물게는 할지는 몰라도 그 절의 소유권은 상가가 가지게끔 하게 돼 있습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스님이 거기에 머무르는 주지가 될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뭐 쉽게 말하면 주지 항상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테라와다 같은 경우는 죽을 때까지 다른 일이 없을 것 같으면 그대로 주지를 하게 됩니다. 근데 그 스님은 평생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돌아가시게끔 돼 있잖아. 그럼 다른 사람이 그 절을 관리하게끔 돼 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그 절의 주인은 스님들이 되게끔 돼 있는 것이지, 개인이 될 수가 없는 거라.
그러니까 절을 지어도 상가에게 보시를 해야 되지, 이렇게 개인 스님에게 보시를 할 수가 없는데, 이 왕이 이 멍청한 왕이 이걸 상가에게 보시를 안 하고 그 띳사 스님에게 보시를 해버립니다. 고맙다고. 그 띳사 스님도 장로 스님인데 받고 나서도 황당할 거 아니라. 근데 쉽게 말하면 왕하고 가장 친한 사람이 띳사 스님이 돼놓으니까 오만 사람들이 “나 이거 좀 우째 주시오” 하면서 청탁할 것 아니라? 그러니까 스님이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색을 띠게끔 됩니다. 지금 조계종 스님들하고 딱 마찬가지 돼버린 거라.
그러니까 이 마하위하라에 있는 청정한 스님들이 봤을 때는 이 이게 아니거든. 출가한 스님이 정치적인 것들을 할 수도 없고 세간 일에 관여를 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그리고 사원을 갖다가 소유할 수도 없는 건데 개인이 소유하고 있지, 하니까 이 띳사 스님을 갖다 벌을 줍니다.
구출갈마라 해가지고 “니 이거 잘못했제” 하고 물어봅니다. 잘못된 건 잘못했잖아. “잘못했습니다.” 하니까, “그럴 것 같으면 당신은 그 절을 무외산사를 갖다가 상가에 귀속시키라. 그리고 지금 정치적인 행위들을 하고 하는 세속 일에 관여하는 것들, 그러면서 재가자들하고 뻔질나게 만나고 하는 것들 그거 하지 마라. 그거는 잘못한 거기 때문에 참회해라” 그래요. 참회를 갖다가 저쪽 어디 떨어진 데 가서 며칠 동안 참회해라. 이렇게 합니다. 사실은 띳사 스님이 그걸 했어요. 구출갈마를 실행했는데,
띳사 스님을 따르는 제자 중에 한 스님이 이거 보니까 너무하거든. 이건 자기 스승을 갖다가 이렇게까지 핍박할 수 있나? 해가지고 반항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하위하라에 있는 스님들이 이 스님까지 제재를 합니다. “니 틀린 건 틀렸다고 해야 되는 건데, 와 니 틀린 걸 맞다고 하느냐? 니도 잘못했다” 하면서 걔도 같이 이렇게 별중 생활을 하라고 가라고 그럽니다.
두 사람은 항목이 틀립니다.
한 사람은 별중 생활을 해야 되는 것이고, 별중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기간 또 누구도 그 스님한테 말도 걸어서도 안 되고 이 스님은 다른 스님들에게 말도 걸어서도 안 돼. 그래서 모든 권리가 다 정지돼 버립니다. 정지돼 버린다는 거는 비구인데도 비구가 아닌 상태가 돼버린 거라. 비구가 정지된 상태가 돼버리게 돼. 이걸 풀어놓기 전까지는.
그런데 띳사 스님은 그런 상태는 아니고, 잘못된 일수만큼 참회하는 거거든. 저쪽에 머무르면서. 이 스님은 비구 상태는 그대로 유지를 하게끔 되는 거라.
그러니까 괜히 자기 스승 편들다가 얘는 더 큰 벌을 받게 된 거라. 그러면 이 스님 입장에서는 성질이 나니까 “에이, 나 여기 안 산다” 하면서 가버립니다. 가가지고 자기 스승에게 준 무외산사 가서 머무르면서 많은 사람들을 규합을 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마하위하라라고 하는 정통 테라와다에서 분파의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머물면서 뭔 일이 생겼느냐 하면, 2차 결집 때 왓지국에서 십사(十事) 논쟁 들었죠? 십사 논쟁을 이건 비법이다 해가지고 물리친 사람들이 만든 분파가 있습니다.
'왓지뿟따까(Vajjiputtaka')라 해가지고 우리말로 왓지뿟따까가 뭐지? 나도 몰라. 왓지뿟따까가 있어. 그 왓지뿟따까의 사람들을 갖다가 그 사람들이 이름을 바꿔서 '담마루찌까(Dhammarucika)'라고 이렇게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그러니까 담마루찌까를 거기에 머물게끔 합니다. 이 무외산사에.
근데 쉽게 말하면 이것은 정법이 아니다 해서 탁 물리쳐진 사람들이라. 그러니까 마하위하라 쪽에서 봤을 때는 이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거든. 비법을 행한 사람들을 갖다가 거기에 머물게 했으니까 더욱더 멀어지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 더욱 더 멀어지니까 이거는 이제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 못 돼.
그런데 인제 그 무외산사 쪽에도 “아이고, 왜 우린 그래도 큰 문제 있어서 저기서 분리된 게 아닌데, 왜 그 비법을 행하는 사람들까지 받아들이느냐” 해가지고 그게 마음에 안 들어가지고, 또 하나의 파가 생겨납니다. 그걸 이제 '제따와나파'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마하위하라(Mahā-vihāra)에서 분리된 두 개파가 거의 1200년간 존속하게 됩니다. 스리랑카에서.
그런데 이게 문제가 뭐냐 하면, 왜 마하위하라(대사파)는 그대로 이렇게 가는데, 나머지 두 개 파, 제따와나파 그걸 갖다가 기다림파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기타림파', 그다음에 '무외산사파', 이 두 개파는 그 뒤에 새로운 것들을 자꾸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고가 이미 기본적인 거 바꿀 거는 바꾸겠다 이거지. 그러니까 조금씩 더 바꾸게 되는 거라. 그래서 '방광부'라고 하는 것들도 받아들이고 대승불교를 따르는 비승비속들도 머물게 되고 이렇게 바뀌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미 테라와다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써, 그러고 나서 한 1200년이 흐르고 나서 이 두 개파가 전부 다 멸망을 하게 됩니다.
마하위하라는 그대로 유지가 되나가고. 그래서 그 마하위하라가 나중에 그게 언제까지냐면 기원 후 11세기까지 그렇게 유지가 됩니다. 그래서 기원 후 11세기 때 스리랑카에 있던 스님들이 많이 세가 위축됐기 때문에 새로운 스님들을 갖다가 만들기 위해서 버마에서 스님들이 와 가지고 계를 다시 주게끔 되고 이런 형태들을 띠게끔 됩니다.
어쨌든 간에 가만있어 봐. 뭐하다 이리 새버렸노? 뭐 하다가 이렇게 됐어요?
(해피스님: 저기 패엽경 되는 얘기..)
어쨌든 그렇게 해가지고 무외산사가 그 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이렇게 만들어지게 되니까,
(수행자: 왜 왕이 없는 도시에서 하게 됐는지..)
왕이 나중에 돌아오고 나서, 왕이 돌아오고 나서 이 무외산사가 만들어준 왕이 거기 전폭적인 지원을 하게 되니까, 마하위하라 쪽에서는 안 그래도 지금 경전을 전승할 수 있는 사람이 적은데 더더욱 어렵게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왕이 머무는 큰 도시에서 결집을 하질 않고, 아까 얘기했죠.
마하위하라는 한 곳에 있는 게 아니고 각각의 분원이 있다는 것. 그중에 분원이 하나 있는 곳이 알로까 위하라라고 하는 마탈레 부근에 있는 그러니까 아누라다뿌라라는 도시에서, 서울에서 거의 100km 넘어 남쪽으로 남동쪽이네, 남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알루위하라입니다. 알루위하라에서 결집을 하게 됩니다.
거기는 지방 행정관들이 마하위하라 스님들을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굴 14개를 파가지고 인제 거기서 경전 결집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왕도가 아닌 곳에서 제 4차 결집은 이루어지게끔 됩니다.
근데 왜 굳이 왕이 아무리 자기들 싫어한다 하더라도, 결집하려고 하는데 그건 왕 후원이 그렇게 필요 없거든.
근데 왜 거기서 아누라다뿌라에서 안 하고 이 알루위하라로 갔을까?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아까 뭐라고 그랬죠? 3차 결집 때 경하고 삼장하고 주석서하고가 전해져 왔습니다. 주석서는 싱할라어로 돼 있습니다. 근데 무외산사는 새로운 신흥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주석서가 자꾸 변경이 되게 됩니다. 테라와다 원래의 의미들을 퇴색하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만약에 그 왕도가 있는 곳 아누라다뿌라에서 결집을 하게 되면 경하고 주석서 쓸 때 이 영향을 받게 되는 거라. 왕이 쉽게 말하면 저 무외산사의 견해를 받아들여서 그거 집어넣어라 할 것 같으면 우짤꺼라? 삼장은 바꿀 수가 없는 건데, 주석서는 계속 첨가되고 변경되는 거기 때문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순수하게 부처님 당시 때부터 해가지고 그 성스러운 제자들이 그 부처님 말씀을 주석한 것들을 가져온 게 마힌다 장로까지 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이 새로운 것들을 또 받아들이게 생기는 거라. 그래서 이 안 된다 해가지고 이 알루위하라로 옮기게 됩니다.
그래서 알루위하라에서 패엽경을 쓰게끔 됩니다. 그게 7년간에 걸쳐서 씁니다.
그런데 500명의 아라한들이 거기에 참가를 했다고 그럽니다.
이게 제3차 결집 때 했던 경 삼장하고 주석서를 그대로 그러면 제4차 결집에 그대로 기록을 하게 됐을까? 어쨌을 것 같아요? 변경이 있었을까? 꿀먹은 벙어리라? 아무 말을 안 하노?
변경이 없었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청정도론 그리고 각각의 주석서, 쉽게 말하면 디가니까야의 주석서 뭔 주석서 이렇게 해가지고 주석서들, 율장의 주석서, 그걸 뒤져보니까 그 주석서에 나오는 사람들을 조사를 해보니까 부처님 당시 때부터 해가지고 마힌다 장로 때까지 사람밖에 없어. 이제 불교가 처음 스리랑카에 전해지고 나서 그 이후에 여러 가지 주석서를 남긴 사람들은 아예 여기에 지금 존재를 하지 않는 거라. 쉽게 말하면 3차 결집하고 나서 바로 마힌다 장로가 왔는데 그 내용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얘기인 거라. 기록 자체가 그렇게 돼 있으니까.
그리고 또 중요한 게 뭐냐 하면 나중에 후대에 가면서 각각의 주석서, 주석서는 싱할라로 써지니까 쉽게 말해서 싱할라로 써진 걸 갖다가 나중에 어쨌든 만국의 사람들이 다 할 수 있는 빨리어로 바꿔야 될 거 아니라?
빨리어를 바꾸는데 어디 사람들이 그걸 빨리어로 바꾸느냐 하면 인도에 있는 사람을 불러가지고 이 주석서를 바꾸게끔 됩니다.
붓다고사도 오게 되고 담마빨라도 오게 되고 아난다도 오게 되고 이런 식으로 되게 됩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그 사람들이 쉽게 말하면 빨리어로 이 주석서를 빨리어로 다시 변경할 거 아니냐 싱할라 말로 써진 걸. 그러면 삼장은 원래부터 빨리어로 써져 있었단 말이야. 그럼 이게 부처님 당시 때 해서 나중에 기원후 5세기 때 이 바뀌어지게 되고 하니까, 아 기원후 5세기 때, 그러니까 이게 몇백 년간이야? 거의 한 뭐 600년, 500년, 천 년이 넘는 시간이 되는 거죠. 그러면은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천 년이 넘으면 우리나라 말도 아마 많이 바뀔 거라. 그런데 이게 똑같은 거야 이게. 어순이나 문장의 형태나 자음 모음이나 희한하게 똑같은 거라.
쉽게 말하면 삼장을 그대로 발음을 적어 놓은 거기 때문에, 그게 후대에 가더라도 바뀔 수가 없었다는 거라. 그래서 테라와다에서는 그것을 보고 “야 이 삼장은 주석서를 빼고, 삼장은 1차 결집 때 거다.”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바뀌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걸 갖다가 어떤 사람은 이게 마가다 언어니, 이게 뭐 서부 지역의 언어니, 뭐 어쩌고 하지만은 헛소리 하지 마라고 그래. 부처님이 썼던 "붓다와짜나(Buddhavacana)다" 하고 확정을 짓게끔 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그렇게 해가지고 삼장은 빨리어로 쓰고 주석서는 싱할라 언어로 싱할라 말로 기록을 하게끔 됩니다.
그게 제4차 결집이다.
그게 가능했던 게 바나까(bhāṇaka)들이 자꾸 생겨났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암송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 같으면 이게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디가니까야 암송자, 그 다음에 경전 암송자, 율장 암송자, 1차 결집 때 처음부터 아예 그렇게 지정됐다고. “야, 아난다 니는 앞으로 니 제자들한테 전부 장부 경전을 암송해가지고 전해라.” “누구는 뭘 해라,” 하고 1차 결집 때 딱 정해졌거든.
근데 안 정해진 게 뭐가 있어요? 지금 경전에서 쿳다까라고 하는 거.
쿳다까를 우리말로 뭐라 그래? 소부경전 소부경전은 안 정해져 있는데, 뒤에 문헌의 바나까들 기록을 이렇게 보니까 '담마빠다 바나까', '자타까 바나까',라고 하는 것이 기록에 나옵니다. 그것도 1~2차례가 아니고 여러 차례. 쉽게 말하면 이것은 특정하게 1차 결집 때 정해지진 않았는데 이미 이것들의 바나까들은 존재를 하고 있었다는 얘기라.
소부 경전은 전부 몇 부입니까? 나라마다 조금 틀리죠. 12. 13. 뭐 15. 이렇게 조금씩 나라마다 틀립니다. 어쨌든 지금 확정되는 게 15부로 돼 있죠? 15부로 이렇게 확정돼 있습니다.
그중에 적어도 쉽게 말하면 법구경 그다음에 본생경 이 두 개는 대대손손 전해 왔던 거다. 나머지는 이게 아직 기록이 없어. 소부 경전에 바나까가.
그래서 이게 어디에 속하느냐? 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록에 이 쿳다까의 항목들이 나옵니다. 12개다 뭐 15개다 하는 그런 기록들이 존재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미 여시여경이나 아니면 그 장로게송 장로경이나 뭐 장로니경이나 이런 것들은 부처님 당시에부터 존재를 했는데 이게 특정하게 어디에 그 장부에 속하고 뭐 중부에 속하고 이런 것은 정해지진 않았다 하더라도 그 존재를 했다고 봐야 됩니다.
왜 그러냐면 이미 '12개가 그런 경이 존재를 한다' 이런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들에 대해서 바나까들은 존재를 해왔다고 봐야 됩니다. 그리고 이 쿳다까가 소부가 뭐 어떤 때는 이게 아비담마에 속해야 된다, 아니면 이것은 경전에 속해야 된다, 하는 그런 기록들이 많이 존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 쿳다까 소부가 경의 그룹에 속하게 되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게 확정되는 게 언제 확정된다고? 4차 결집!
4차 결집 때가 지금의 빨리 삼장의 원형을 만드는 계기가 되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공부하고 있는 것은 전부 4차 결집, 저기 2000년 훨씬 전에 기원전 1세기 때 패엽경으로 쓰여진 것들을 지금 모본으로 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5차결집, 6차결집 넘어가는 것은 이걸 갖다가 패엽경도 어쨌든 없어지잖아. 아까도 얘기했지만, 2천년 넘어 지난 것들을 같은 영국 놈들이 홀라당 불태워버리듯이, 불태우지 않아도 나무잎에 쓴 게 그게 오래 가면 얼마나 오래 갈 거라? 오래 갈 수가 없으니까, 담마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요거보다는 좀 더 튼튼한 것에 써야 되는 거니까 대리석판에다가 쓰고 또는 청동에다가 쓰고 그게 5차 결집, 6차 결집이라. 쉽게 말하면.
그 대신에 그 뒤에 나온 주석서들이 더 많을 거니까 그 주석서들을 거기다 더 보태는 것뿐이라. 그러니까 삼장의 원형은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 의문 나는 게, 아까 1800년대에 영국군이 빨리 삼장을 비롯한 주석서들 붓다고사가 쓴 주석서들 뭐 이런 것들을 홀라당 태워버렸다고 그랬는데, 그러면 뭐 삼장은 없어져 버렸겠네? 그렇죠? 그럼 여러분들이 지금 알고 있는 삼장은 어디서 나온 거라?
이미 그 전에 다른 나라에 넘어갔지. 안 그렇겠어? 그리고 패엽경을 처음 그 알루위하라에서 썼다는 것뿐이지, 뭐 1번 썼으면 다른 데서는 그것을 또 안 쓰겠어? 똑같은 거 베끼게 돼 있는 거지. 단지 인제 최초로 썼던 것이 영국 놈들이 홀라당 불태웠다는 것 뿐이지, 경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라.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버마로, 태국으로도, 스리랑카로도 이미 그 기원전 1세기 때 했던 것들이 넘어갔다는 거라.
넘어가서, 그래서 지금은 그게 넘어갔으니까 그 나라에서도 패엽경에다 기록을 남길 거 아니라. 그래서 싱할라 빨리, 란나타이 빨리, 버마 빨리, 캄보자 빨리,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캄보디아 언어로 쓰고, 싱할라 언어로 쓰고, 버마 언어로 쓰고, 태국 언어로 썼으니까.
그래서 나중에 후대에 가서 1800년 초에 그 이 삼장을 불태웠던 영국에서 웬일로 PTS라는 걸 만들어 갖고 요걸 이제 조사를 합니다. 패엽경들 다 가져와 봐. 해갖고 싹 가져와서 조사를 해가지고 그걸 로마나로 이렇게 기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나 빨리 PTS본에 보면 모본은 스리랑카에서 나온 것들을 모본으로 하고, 밑에다가 B 해가지고 그건 버마를 얘기하고, T 된 건 태국을 얘기하고, 그다음에 K 된 것은 캄보디아를 얘기합니다.
K에서는 쉽게 말하면 아라항이다. 만약에 예를 들면 그러면 araham인데 m에다 점이 탕 있는 건데, 버마에서는 이 m에다가 점이 없다. 그래서 아라함이라고 발음을 한다. 그래서 B에는 그냥 m이다.
안 그러면 또 태국에는 아라항의 ra의 a가 장음이 아니고 단음인데 태국에서는 그 기록한 걸 갖다가 해서 적어보니까 장음이 되더라. 그래서 태국에서는 요게 장음이다. 하고 밑에다 기록을 하게 됩니다.
각 나라에 있는 걸 전부 취합을 해보니까 얼마나 틀릴 것 같아요? 이미 단절돼가지고 뭐 천 년 이상 그렇게 살았는데 얼마나 틀릴 것 같아요? 안 틀릴 것 같아요? 하나도? 하나도 안 틀리면 밑에 그걸 기록했다는 게 있을 수가 없고, 거의 없다는 거라. 거의 책 하나를 아니 한 페이지를 보면 한 페이지에 4 나라를 다 대조했는데 장음 단음 틀린 게 하나 나올동 말동 할 정도라는 거라. 그마만큼 암송으로 전해져 온 것들이 정확성이 있었다는 얘기라.
그걸 패엽경으로 썼던 것들이.
테라와다가 얼마나 이걸 순수하게 전하려고 했을 거 같으면 이렇게까지 했을까?
그 모티브가 됐던 게 이 제4차 결집 이라는 겁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런데 기록(교재)에 잘못된 게 있어서 교정을 합니다.
107페이지에 보면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처님의 순수한 말씀인 경전을 잘 지킬 필요가 명백하게 있었으므로 빅쿠들은 교법 학습이 실천 수행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빅쿠들은" 해가지고 쭉쭉쭉 나가서 "논쟁해, 전자가 승리를 거두어" 까지는 맞습니다.
그런데 "경이 율보다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이게 잘못됐습니다. 그래서 수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경과 율이 손상되지 않으면 실천은 손상되지 않기에, 교법 학습이 수행실천을 능가한다는 것이 인정됩니다."
그래서 "또한"이라고 돼 있죠. 그걸 "그래서"라고 하십시오. 그래서 그 뒤에는 똑같습니다.
"수행실천보다 경전의 전승을 더 중시하게 됩니다." 그래야만이 문장이 맞습니다.
(수행자: 손상되지 않기에... )
"손상되지 않으면 실천은 손상되지 않기에, 교법 학습이 수행 실천을 능가한다는 것이 인정됩니다." 그렇게 바꾸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 수정된 교재 내용]
【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처님의 순수한 말씀인 경전을 잘 지킬 필요가 명백하게 있었으므로 빅쿠들은 교법학습(Pariyatti)이 수행실천(Patipatti)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빅쿠들은 「불교의 근본은 빠리얏띠(pariyatti)인가 빠띠빳띠(patipatti)인가」라고 논쟁해, 전자가 승리를 거두어 경(Sutta)과 율(Vinaya)이 손상되지 않으면 실천은 손상되지 않기에, 교법학습이 수행실천을 능가한다는 것이 인정됩니다. 그래서 수행실천(Patipatti)보다 경전의 전승(suttante rakkhite)을 더 중시하게 됩니다. 】
나도 적고 나서 보니까 잘못했어요.
뭐 모르는 거 있으면 여기 우리 사무장에게 준 usb에는 고쳐가지고 줬으니까 나중에 참고해 가지고 바꿔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경을 율보다도 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막행막식해도 괜찮다. 경전만 잘 공부하면 된다. 이렇게 오해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이 얘기는 뭐냐 하면, "바른 견해를 가진 자라고 하더라도 배움이 없으면 도과에 이르지 못한다." 그렇게까지 발전이 됩니다. 그러니까 "수행만 열심히 하면 되지, 그건 사실은 불가능하다"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게 스리랑카가 좀 두드러진게 그게 이런 역사적인 계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수행이 뒤처지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 배웠으면 하나 실천해야 되는 것이지, 두 개 배우고 이거는 실천을 미루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 당시에는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두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될 경우에는 그렇다는 것이지, 지금은 여러분들은 2개를 다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한 걸 책에서 접한 적이 있어요.
내가 죽을 때 돼서 다른 것은 내가 전혀 후회 안 할 것이다. 진짜 후회 안 한다는 거라. 내가 뭐 나쁜 짓도 하고 뭐 남한테 몹쓸 짓도 하고 뭐 나쁜 말도 해서 가슴 아파하기도 했고 그것은 내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데, 딱 하나 후회할 것이 있을 것 같다 그럽니다. 뭘까? 뭘까?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데 안 한 것!" 그거 하나는 내가 후회할 것 같다 그럽니다. 그래서 내가 그 글귀를 보고 ‘아, 참 저사람 참 언제까지 살라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참 잘 산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 그렇습니다.
지금 아니면 이걸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언제 할 거라? 언제 하려고 그래?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정확하고 바르게 배우고 그것들을 실천하려고 하는 것들, 이거는 지금 해야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두 개 중에 하나를 빼먹어야 되는 게 아니고! 지금은 여러분들 이때 당시의 스리랑카 상황은 아닙니다. 알겠죠?
그래서 그 부분만 교정하면 뭐 잘 됩니다. 됐습니다.
아, 그리고 이 제4차 결집이 언제 있었느냐? 하는 것은 서적들, 그러니까 옛날 서적들마다 다 틀립니다. 디빠왕사, 마하왕사 그리고 뒤에 나온 사만타빠사디까, 그리고 나중에 다른 또 역사서들, 그다음에 삼장의 주석서들에 따라서 연대가 다 틀립니다. 그런데 스님은 여기 몇 년도라고 적어놨어요? "기원전 84년에 시작해서 7년간 했다." 이것은 누구를 따랐냐면 담마난다 스님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제4차결집은 그래서 연도를 안 하고 기원전 1세기라고 대부분 그렇게 합니다.
대부분 공통된 것이 뭐냐면 "기원전 94년부터 기원전 80년 사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 대신에 스리랑카 왕통사들이나 이런 것들을 보더라도 아마 모르긴 해도 기원전 84년이 거의 맞지 않을까? 하고 스님은 개인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뒤에 이 결집을 하게 되는 이유를 갖다가 적어놓은 것들이 뭐라고 적어놨습니까?
"이전에는 지혜로운 빅쿠들이 삼장과 주석서들 모두 암송으로 전했는데, 지금은 신심 있는 사람이 줄어들고 인구도 줄어들어 가지고 그것들로 인해서 이 스님들이 모여가지고 삼장하고 주석서를 패엽경에 쓴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추정을 해보면 그 이전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왓따가마니 띳사 왕이 복귀를 하기 전에는 인도에 갔던 700명의 스님, 그다음에 스리랑카에 남아있던 했던 60명의 스님이 나중에 12년간의 기근이 끝나고 나서 다시 와서 암송을 다시 해보니까 그게 다 똑같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때까지도 아직 이전에 속하게 됩니다. 암송으로 전해져 왔으니까, 그게 유지가 돼 왔으니까.
그러고 나서 이 뒤에 왓따가마니 띳사 왕이 다시 왕이 되고 나서, 그걸 '그 이전'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이미 그때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다 죽어버리고 스님들도 많은 인원이 없어져 버린 상태라. 그래서 법이 쇠퇴했다는 거라
그렇게 봤을 때는 뒤에 이 왕이 복권하는 시점으로부터 이 왕이 왕위에 올라 있던 기간이 14년인가 아까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 기간 동안에 경전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거라.
그걸 추정을 해보니까 왕이 처음 왕위에 들어서고 나서 그래도 아바야기리 무외산사를 만들고 그것이 조금 융성하게 되고 하는 기간을 조금 빼고 나니까 몇 년을 빼고 나니까, 그게 기원전 84년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하고 추정을 할 뿐입니다. 그것은 스님의 견해입니다. 정확한 것은 나도 모릅니다. 그때 안 살아봐가지고.
이게 제4차 결집이라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것은 6차 결집본들을 보고 있습니다.
4차 결집본과 6차 결집본은 틀린 것이 없습니다. 주석서만 조금 더 늘어나고, 경전 중에서 4차 결집에서 추가되는 것이 경이 2개인가가 더 추가가 됩니다. 그 외에는 나머지는 변경사항이 없습니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어쨌든 패엽경이 써지는 바람에 여러분들이 지금은 불교를 수월하게 배울 수가 있습니다. 이 좋은 때에 태어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알았죠?
오늘은 여기서 끝!
(수행자: 질문이요.) 예. 한 사람씩 한 사람씩.
Q수행자 질문: 자타까가 저희 나라에서는... ... 전 동화책이랑 다르게 번역된 걸로 봤는데 그거에 대해서는 경이 아니다라는 얘기도 있고 불설 아니다 이렇게 하고 그다음에 이제 타박하는 말들이 많은 이유 중의 하나가 좀 동화책같이 그 동물들 의인화하고 그런 거를 좀 불교식 폄하다라고 얘기하는 게 많은데 정확하게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요?
A스님 답변: 불설입니다. 그리 받아들이면 됩니다.
Q수행자: 그게 그 안에 내용도 다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요?
A스님: 그럼요. 그 부처님 과거생 이야기를 하나의 책으로써 묶어 놓은 것뿐입니다. 부처님은 그 제자들에게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누누이 얘기하면서 너는 과거생에 뭐였기 때문에 이랬다 하는 것들이 굉장히 곳곳에 나옵니다.
그래서 그걸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Q수행자: 그러니까 저희 나라에 나와 있는 게 이제 그 안에 뭐 사슴도 뭐 의인화돼 있고 여러 동물 뭐 코끼리도 의인화돼 있고 그런 식이 많잖아요. 그렇게 돼 있는 사실들도 저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나요?
A스님: 예. 받아들이십시요.
수행자: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저도 그런 적이 있어요. 부처님 태어나고 나서 7걸음 걸으면서 내가 최고다 어쩌고저쩌고 했다고 하기에 나 처음에 안 믿었거든요. 나중에 믿는 계기가 생겨요. 직접 그것들을 봅니다. 보면, 있을 수가 없는데 애가 진짜 말을 해요. 태어나서 우는 게 아니고 웃으면서. 본 적 있어요? 안 봤으면 말을 하지 마. 믿어! 됐어요? (예)
Q수행자 질문: 그 아까 끝에 요새 태어난 걸 복으로 알아야 된다 그러셨는데 부처님 법은 세월이 흐를수록 쇠퇴가 되어 가는데 앞에 태어났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요?
A스님 답변: 뭐 부처님 때 태어났으면 좋았겠지. 뭐 그게 안 좋았다는 게 아니고. 그렇지만은 지금은 부처님 시대입니다. 테라와다적으로 할 것 같으면 부처님 살아있는 거와 별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테라와다의 주석서에 의할 것 같으면 정법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있는 것과 진배 없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안 태어났다 해가지고, 물론 그때가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은 안 듭니다. 오히려 더 경을 많이 접할 수 있게 되고 쉽게, 그리고 더 수행을 많이 할 수 있는 계기들이 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꼭 그때 보다 못하다고는 얘기를 못할 거 같습니다.
Q수행자 질문: 제일 끝에 이제 기원전 84년부터 시작해서 7년이 됐는데, 요거는 어떻게 스님 견해가 기록된 겁니까?
A스님 답변: 예. 아까 내가 얘기했잖아요. 그건 내 견해가 아니고 그것들을 아까 그 추정해 보니까 그 정도 됐을 것이다 하고 했는데 담마난다 스님은 이것을 고집을 합니다. 그래서 담마난다 스님의 견해를 그대로 적은 겁니다. 스리 담마난다 스님입니다. 아직 살아계십니다.
https://alfl6843.tistory.com/1385
'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 > 테라와다 불교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라와다 불자들의 특징_빤나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213-3 (0) | 2025.01.26 |
---|---|
제3차 불교 결집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129-3 (0) | 2025.01.23 |
제2차결집ㅡ근본분열/분파, 테라담마10가지, 아라한의 마음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115-3 (0) | 2025.01.21 |
제1차 결집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018-3 (0) | 2025.01.19 |
부처님 시대의 왕들-빔비사라왕, 빠세나디왕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018-2 (0) | 2025.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