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 불교사

제2차결집ㅡ근본분열/분파, 테라담마10가지, 아라한의 마음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1115-3

담마마-마까 2025. 1. 21. 16:08

https://youtu.be/VSMQuwec8Ew?si=9_gVzrdD3f-Okw1G

 

... 바뀌어버린 상태에서는 앞에 거는 이미 없어져 버렸어요. 그러니깐 1차 결집도 의미가 없어져 버리고 2차 결집 또 나중에는 3차 결집해서 또 분열할 것 같으면 의미가 없어져 버리고 이렇게 돼버리게 되는 거라.

근데 스님은 그걸 이제 무심결에 그냥 일반적으로 쓰니까 '근본분열'이라고 썼거든. 근데 그게 나중에 엄청난 오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어요. 그래서 ‘아, 이거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자’하고 생각을 했어요.

 

일반적으로 보통 그냥 "근본 분열 하고, 그다음에 18개로 부파로 분열했다" 이렇게 얘기하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일반적인 용어로 썼는데, 그래서 분열이라는 용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걸 갖다가 빨리어 경전사를 다 뒤져가지고 한번 찾아봤어요. 근데 찾아보니까 '분열'이라는 단어가 없어. 아쉽게도. 분열이라는 단어가 없어. 쉽게 말하면 거기에 쓰이는 단어는 '분파'라는 단어를 쓰고 있어요. 그러니까 분파란 단어를 한국에서는 분열로 풀이를 하게 되게 된 거라.

근데 분파는 예를 들면 딸이 시집을 간다, 그럼 딸도 집을 하나 마련하는데 아버지 집은 그냥 그대로 있는 거라. 단지 딸 집이 하나 생겨나는 것뿐이라. 그게 이제 분파의 의미고, 분가라고 얘기하는데, 이제 하나의 파를 만들 때는 분파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여기서 분열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의미하고는 완전하게 틀려져 버리게 되는 거라.

이게 대승불교의 논리인 거라, 쉽게 말하면.

 

예를 들어 봅시다. 나중에 각각의 교리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각각의 율장을 만들었다. 그러면 분열이라고 볼 것 같으면 앞에 있었던 부처님의 원음 자체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럼 뒤에 나와 있는 지금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예를 들어서 율장만 보면 빨리율 사분율 오분율 십송율 마하승기율 이런 거 가지고 대조해가지고 근본적인 율을 찾으려고 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대승불교에서 하고 있는 양상이 딱 그 양상이거든.

 

부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장부에서 장아함경을 만들고 어디에서 잡아함경을 만들고 어디서 뭐 만들고 해가지고 각각의 분파에서 만든 것들을 취합해가지고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대장경이란 말입니다. 대장경이 하나의 분파에서 만든 게 아닙니다. 각각의 것들을 취합해가지고 한 겁니다. 그래서 대반열반경도 보면 뭐 대반열반경이라는 이름도 있고 무슨 무슨 열반경이라는 게 있고 그냥 열반경이라는 이름도 있고 여러 가지 있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모아가지고 돼 있는 거.

 

그다음에 빨리율은, 그 대신에 삼장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대로 남아있는 거 요걸 대조를 해가지고 어떤 것이 근본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이 맞느냐 하고 조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지금 대승불교에서 하고 있는 논리가 딱 이 분열의 논리로서 해결을 할려고 그럽니다.

그러다 보니까 부파불교 불교사를 이렇게 얘기할 때 대승불교권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에서 양쪽으로 갈라집니다. 테라와다 다음에 상좌부, 대중부, 그다음에 상좌부에서 또 몇 개, 대중부에서 몇 개, 이런 식으로 딱 분열표 그대로입니다. 그대로 이제 표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분열을 했으면 앞에 거는 없어져 버려야 되거든. 그렇잖아?

 

그런데 부파불교에서 분열을 했지만, 대중부는 몇백 년간 존재를 했고, 또 화지부는 몇백 년간 존재했고, 그다음 설일체유부도 몇백 년간 존재를 했고, 이런 형태들 띠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만약에 대중부에서 처음 1차 분열을 할 때 2개파로 나눠지게 됩니다. 마이사사까하고 또 하나가 이름은 지금 잘 ... 하여튼 2개로 이렇게 나눠져요. 이 2개로 나눠지면 앞에 있던 대중부라는 그거는 없어져야 되는데 대중부는 또 그대로 존재를 하거든. 그러니까 분열이라고 해도 사실은 안 맞는 거라. 대승불교권에서 얘기하는 방식대로 하더라도.

 

그래서 이걸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분열이라고 봐서는 안 되고 적어도 불교사를 이해하려면 분파의 논리로써 봐야만이 이 문제가 가닥이 풀려버린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은 테라와다의 원류가 어디 있냐고 맨날 찾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러니까 분열했으니까 없어졌으니까, 쉽게 말하면 그 분별부가 테라와다의 원류다, 또는 설산에 설산부의 교리가 지금 테라와다의 교리하고 비슷하니까 설산부가 원류다, 이런 식으로 계속 찾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실제로는 그대로 한 줄기로 존재를 해 왔는데.

 

그래서 용어를 스님이 잘못 선택을 했다. 하고 결론을 내렸어요.

분열로 인해서 분파한 것은 틀림없는데, 그것을 그냥 분열로만 기록을 할 경우에는 그런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게 된다.

왜 그러냐면 테라와다 지금 여러분들 불교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테라와다 방식으로 배워야 된다는 거라. 근데 스님은 테라와다 방식인 줄 알고 그냥 썼는데 그 용어가 가만히 보니까 대승불교의 논리에 맞는 용어를 쓰고 있더라는 거라. 그래서 , 내가 참 잘못했다.’ 반성을 한 겁니다.

 

그래서 3차 결집도 물론 다 만들었는데 이걸 다시 재검토합니다. , 이거 이렇게 해가지고는 오리지널 테라와다 불교사를 알기에는 좀 힘들 수도 있다.’ 그래서 단 1주 아니면 2주겠지만, 다시 재검토해서 2차 결집부터 다시 자료를 내줄 겁니다. 그렇다고 지금 2차 결집한 강의한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강의를 다시 하는 것은 없고,

 

(내가 이걸 끈다는 걸 깜빡했어. 그래. 수마나 스님인데, <스님 강의 중이니까 나중에, 지금 서울이라요. 깜빡했지.> 아이 죄송합니다.) 요즘 수마나 스님이 자주 전화를 하네.

 

그래서 그 내용을 주석서하고 스리랑카 불교사를 한번 쭉 들여다보면서 찾아봤어요. 뭐라고 나와 있느냐 하면 17개의 이단파와 하나의 정통파가 있다. 그것들은 하나의 정통파와 아울러서 전부 18개가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원줄기 하나는 있고, 거기에서 분파된 게 17개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테라와다라고 있고 거기서 나무에 가지가 뻗어나가듯이 하나씩 하나씩 분파를 해 나갔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 분파된 것이 처음에 100년 이내에는 없었고, 그 뒤에 150년 아니면 200년 기간 내에 각각의 분파들로써 분파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거기에서는 원어를 분명하게 '빈나--'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 '비치-' 해가지고 그 용어들을 써가지고 하고 있습니다. 그 용어들을 갖다 분석을 해보니까 분열이라고 용어를 쓸 수가 없다. '분파라고 써야만이 이게 바른 용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쉽게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은 줄기는 그대로 있는데, 이 줄기에서 하나의 가지가 뻗어나가서 하나의 분파를 만들고, 또 이 가지로 뻗어나간 분파에서 또 다른 가지들이 또 뻗어나가고, 이런 형태들을 띠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원줄기에서도 또 물론 다른 또 분파들이 만들어지게 돼 있다는 거라.

그게 인제 테라와다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근본 분열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 근본 분열로 인해서 '분열'만 된 것이 아니고, '분파'가 됐다하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원줄기에서 따로 떨어져 나가서 하나의,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종단'을 차리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한국에 가장 원줄기라고 주장하는 조계종이 있다. 그러면 조계종에 있는 스님들하고 의견이 안 맞아 갖고 내가 하나의 종단을 차렸다. 그게 인제 분열로 인해가지고 분파된 겁니다. 하나의 파를 만들게 되는. 그래서 조계종이라 안 하고 나는 뭐 근본 조계종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면 조계종하고는 분명히 틀린 거죠? 그럼 조계종에서 하는 행사들에는 이 스님들은 가서 할 수가 없습니다. 스님들이 하는 뭐 포살을 할 수가 있어? 스님이 조계종 스님들이 임명되는 사찰에 주지로 임명될 수가 있어? 전혀 할 수가 없습니다. 별개의 것이 돼버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이 나가 있는 스님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포살도 안 하고 주지 임명도 안 하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그 방식대로 하는 것뿐인 것이지, 여기하고는 별개의 것이 돼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은 이 원줄기에서 봤을 때는 이렇게 분파가 됐을 경우에는 당연히 이 원줄기에서는 "당신들은 인제는 조계종 스님이 아니다." 하고 선언을 해버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면 여기 있는 스님들은 나는 이 조계종 스님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종파의 스님으로서 등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버리게 되는 거라.

이게 인제 분파의 형식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조계종은 그대로 있는데, 거기서 일부가 떨어져 나가서 새로운 종파를 형성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은 이 원줄기는 조계종이라는 것은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는 거라. 남아있게 되는 것이 이게 없어져 버린다는 게 아니라는 거라.

분열한다 해가지고 그 조계종이 이름을 바꿔서 또 다른 이름으로써 뭘 존재를 한다는 건 아니라. 이게 분열된다 해가지고 하나의 분파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와 같은 이치와 똑같다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갖다 그대로 이어온 것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스님들끼리 이게 부처님 가르침에 맞느냐? 이게 부처님의 율에 맞느냐? 하고 싸움박질을 했을 거 아니라? 틀림없이 그게 있었으니까. 그럼 그걸 호지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있어야만이 이게 분파가 된다는 거라. 나는 그것을 따를 수 없다 싶으니까 새로운 종파를 만드는 거라. 그래서 이 테라와다 경전에서는 뭐라고 하느냐면 그렇게 분파된 것들을 '아짜리아 와다(Ācariya vāda)'라고 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전에는 '테라와다(Thera vāda)'라고 했죠? 그전에는. 그러니까 테라(Thera)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물론 좁은 의미에서는 부처님을 지칭하는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이룬 아라한들 성인들을 모두 포함을 하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 성인들도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부처님을 지칭하는 것이 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리야와다 라고 지칭한다 하고 그렇게 나옵니다. 쉽게 말하면 아리야가 아니라 아짜리야! 아짜리야(acariya)가 뭔 뜻입니까? 스님 이름이 뭡니까?

아짠 진용 그러죠? 아짠이 아짜리야에서 나온 겁니다.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게 아니고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왓지족의 그 우두머리 되는 스님이 2차 결집 때 결정 난 것에 대해서 “아, 이건 도저히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그러면 거기 있는 그 장로 스님이 “에이, 우리 여기는 도저히 뭐 안 되겠다. 따로 살림 차리자” 해가지고 그 스님이 왓지뿟따까라는 스님이다. 왓지뿟따까가 나를 따르는 무리는 모이시오 해가지고 하나의 종단을 만들게 됩니다. 그게 쉽게 말해 '대중부'라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이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이것은 틀렸다고 부정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지고 모여진 게 아니고, 이 스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모여진 무리라는 거라.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테라와다'가 아니고 아짜리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아짜리아 와다'가 돼버리는 거라.

 

대승불교는 뭐라고 얘기합니까? 조사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그래서 조계종의 종조로 여기는 분은 대각국사 의천이다. 천태종은 보조국사 지눌이다. 만약 예를 들어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종조를. 어디 종파를 따져도 종조를 부처님이라고 하는 데가 없어. 참 아이러니한 거라.

어떻게 종조가 부처님이 안 되고 지눌이 되고 천태 스님이 되고, 다른 또 스님이 되고 그 스승들이 될 수가 있느냐는 거라.

그러면 뭐 그 스승이 말한 것이 부처님이 말한 것보다 우선이 될 수밖에 더 있겠어요? 그게 만약에 부처님 말씀하고 동일하다 할 것 같으면 전혀 문제가 안 되는데 이게 동일하지 않을 경우에는 항상 문제가 생긴다는 거라. 부처님은 요렇게 설했는데 그 조사 스님은 다르게 설명을 했다. 그럴거 같으면 여기에 따르는 무리는 부처님 가르침에 배반되게끔 그걸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니 이 원줄기에서 봤을 때는 이걸 어떻게 봐야 될 거 같애? 이는 심각한 문제가 돼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단순히 소소한 계율 가지고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분파를 형성했다고 하는 것은 그것도 이제 분파를 형성한 것이 바른 가르침으로 인해서 분파가 형성됐을 것 같으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래서 17개, 테라와다를 제외한 17개 그 부파들 중에서 교리상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그런 것은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그 지역적인 것 때문에 거기에 맞게끔 이름을 지은 것들이 몇 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교리적인 문제, 율적인 문제 가지고 새로운 종파를 갖다가 형성하게 되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부처님이 말한 법과 율에 맞다고 할 것 같으면 분파를 차릴 이유가 전혀 없죠? 그런데 아니니까, 틀리니까,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들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가 분열돼 가지고 그렇게 부처님 가르침, 그래서 율이 아니고 법이 아닌 것으로 인해서, 그 스승의 가르침에 따르는 무리가 형성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가 돼버립니다.

이거는 차후에 계속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그 뒤에 1차 분열, 2차 분열, 3차 분열, 5차 분열까지 해서 다 만들어집니다. 그게 몇 년 정도 존속했을 것같아요? 그 분파들이 부파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게 있습니까? 있어요? 대중부 지금 남아 있습니까?

사람들은 대중부에서 대승불교가 태동했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원류가 대중부라고 얘기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건 나중에 불교사를 공부하면서 아마 그 부분을 들먹일 겁니다.

 

각각의 부파들은 전부 다 소멸됐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최고로 오래 남은 게 700년, 만들어지고 나서 700년, 그렇지 않으면 전부 2~300년 이내에 다 소멸돼 버리고, 남아있는 것은 그 종파가 남아있는 게 아니고 그 종파에서 기록한 경들 그리고 율장들 요것만 지금 남아있는 형태입니다. 그것도 완전하게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테라바다 불교같이 종파도 그대로 남아있고 경율론 삼장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는 거라. 지금 현실적으로 봐도 이러는데 이걸 어떻게 분열로 볼 수 있느냐는 거라.

분열은 절대 될 수가 없다. 그래서 그거는 분파로서 봐야 된다 하는 것들입니다.

인제 이해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분열된 각각의 파들은 원줄기에서 봤을 때는 어떻게 취급했을까? 어떻게 취급했을 것 같아요? 당신들은 3차 결집 이후에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3차 결집 이후에는 이미 파승을 해버릴 것 같으면 그 옷을 벗겨가지고 보내버립니다. 3차 결집 이후에는.

쉽게 말하면 내가 하나 따로 종단을 차린다 예를 들면, 그래가지고 자기들 나름대로 인제 스님들끼리 회의도 하고 주지도 임명하고 이렇게 한다 할 것 같으면 그렇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아예 이 무리들은 쉽게 말하면 '재가자의 신분'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다 천명을 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들 나름대로는 뭐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적으로는 종단의 역할을 못 하게끔 됩니다. 그게 이제 3차 결집 이후에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같이 스님들이 갈마를 하지 않는 상태가 될 것 같으면 아는 그런 무리들이 있으면 옷을 벗겨서 그 뒤로부터는 백의로서 쫓아보내게 됩니다.

 

태국에도 그런 교단이 있었죠. 산티아속이라고 하는 교단. 굉장히 신도들도 많고 그 출가한 스님들도 거기에 많이 몸담고 있었어요. 근데 이게 인제 이단으로서 딱 규정되자마자 그 뒤에 거기에 있는 스님들 전부 다 옷을 이 황의가 아니고 백의(白衣)를 다 입혔어요.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백의를 입은 머리 깎은 출가자, 출가자라고 봐야 되겠지, 출가자들이나 재가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렇지만은 그 백의를 입은 그 출가자들을 향해서 '빅쿠'라고는 얘기를 안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명칭을 쓰게 되는 거죠. 어쨌든 전통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출가한 사람으로서는 인정하지 않게끔 된 형태들이, 그게 현재도 존재를 합니다.

 

3차 결집 이후에는 "같이 갈마를 하지 않는 무리는 출가 비구가 아니다." 하고 딱 못을 박아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스님이 누누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스님들끼리 공동적인 것들을 행하지 않고 혼자서 독살이를 하고 있고, 혼자서 수행을 하고 있고, 그것은 비구가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거는 어쩔 수 없습니다. 3차 결집 이후에 그렇게 결정된 거기 때문에. 자기는 물론 계율도 어기지 않고 청정하게 수행하고 열심히 다 하고 있지만, 혼자 사는 것은 비구로서 존재를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거와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외국에 있는 스님들이 한국에 오면 마음에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 뭐냐면, 스님들이 보름에 한 번씩 모여서 포살이나 여러 가지 회의들을 할 조건이 안 된다는 것. 그러니까 거기서 오는, 그렇다고 내가 비구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빨리 갈라고 그럽니다. 빨리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고들. 쉽게 말해서 제정신이 박힌 스님이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라. 제정신이 안 박힌 스님이면 한국같이 좋은 데가 어디 있어? 마음 편하게 그냥 지낼 수 있으니까. 그냥 지내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빨리 갈려고 한다는 거라. 그게 뭐냐면 상가가 상가로서의 제 역할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말이 옆으로 샜는데,

 

그런데 3차 결집 이후에는, 그런데 여기는 3차 결집 이전입니다.

3차 결집 이전에는 그러면은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하고 어긋난 교리, 어긋난 율로 인해서, 종파를 형성할 경우에 이걸 갖다가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떻게 해야 될 것 같애요? 승단에서 제재할 방법이 없습니다. 승단에서. 그러니까 지금 테라와다에서 만약에 그렇게 떨어져 나갔다, 그럼 이 사람들을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무엇을 같이 갈마를 해야 뭔가 제재를 할 거 아니라. 그런데 갈마 안 하고 자기들끼리 아예 떨어져 나가버리면, 이걸 어떻게 제재할 방법 없습니다. 제재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습니다. 뭐일까? 뭐가 있을까요? 여기서 선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법을 따르지 않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율을 따르지 않는 비법자 비율자들이다. 그러니 저 사람들은 출가 비구들이 아니다." 여기서 딱 선언하는 갈마를 하는 수밖엔 없습니다.

그리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여기에서는 저 사람들이 봤을 때는 출가 비구가 아니야. 근데 여기서는 실제적으로는 비구 생활을 하게 돼. 그렇게 되죠? 그럼 이 문제는 또 어떻게 할까? 그래서 율장에 규정이 돼 있기를 뭐냐면 그렇게 해가 떨어져 나와서 선언을 할 경우에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권한들이 정지가 되게끔 돼 있습니다. 갈마를 해가지고 별도로 떨어져 나간 것들을 제재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들은 별주의 역할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별도로 떨어져 나가서 참회하고 하는, 나중에 복권을 할 걸 갖다 전제해 두고 이렇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뭐 그것조차도 안 하고 아예 떨어져 나가버리는 경우에는 별주가 아니고 부동주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권한을 전부 정지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출가 비구는 비구인데 그 스님이 있을 동안에는 비구라. 근데 이 스님의 권한이 정지가 돼버리면 내 밑으로 제자도 둘 수도 없고, 비구의 권한이 정지되니까 포살도 할 수가 없고,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모든 권한이 정지가 돼버리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출가 비구니까 나가 탁발할 것 같으면 밥은 먹고 살겠지만은 그 스님이 있을 동안에는 떨어져 나간 무리가 비구의 무리로서 존재를 하게 되는데 그 스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이미 이것은 출가 교단에서 맥이 끊어져 버리게 되는 거라. 재가자들로 인해서 출가자 제자들이 왔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는 거라.

 

왜 그러냐면, 권한이 정지된 상태에서 제자를 두고 여러 가지 행사들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서 의결된 것들 여기에서 출가자들이 생겨난 것은 인정을 하지 못하게끔 되는 거라.

만약에 대승불교가 여기 대중부에서 원류가 됐다 할 것 같으면 이미 출가자 집단이 아닌 상태에서 맥을 잇게 되는 것이고. 또는 아예 새로운 무리들 탑에 모여 있던 재가자들로 인해서 새로운 종단이 생겨났다 할 것 같으면 출가를 어디서 한 거라?

그러면 쉽게 예를 들면 이쪽 테라와다 불교에서 봤을 때는 대승불교권 스님들을 인정할 근거가 전혀 없어져 버리는 거라. 어디에서 출발을 했다 하더라도. 그래서 지금도 대승불교권 스님들을 테라와다 불교에 가면 출가 비구로써 인정을 안 해줍니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는 거라.

그래서 일단 대중부가 생겼지만은 그 대중부가 무리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 무리가 교단을 이루어서 후대에 전수되는 역사들을 가지질 못하게끔 되는 거라.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 무리들이 이 원래 원줄기에서 인정을 받든 아니면 사회적으로 그걸 인정을 받든 안 받든 자기들끼리 막 좋아가지고, 그렇게 하면 돼. 자기들끼리는 적어도 인정은 되니까.

문제는 뭐냐면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렇게 나가 있는 무리들이 법과 율을 바꾸어서 나간 무리이기 때문에 그 뒤에는 끊임없이 법과 율을 바꾸는 것들이 자꾸 생겨난다는 거라. 그래서 대중부의 그 뒤의 역사들을 보면 엄청난 일들이 벌어집니다.

쉽게 말하면 무아논쟁, 부처님은 무아라고 그랬는데 무아냐 진아냐? 쉽게 말하면 실재하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 무아논쟁, 그것 가지고 몇십 년간을 끕니다.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중에서 또 일부는 윤회가 없다. 쉽게 말하면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윤회 부정하는 것, 업은 존재하지만 업과 윤회를 연결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거, 그거 가지고 또 수십 년간 또 논쟁을 합니다.

그래가지고 또 구미에 안 맞으면 또 분파를 차리는 거라. 나가가지고.

 

그것만 한 것 같아요? 그 뒤에 여러 가지 논쟁들이 계속적으로 벌어집니다. 지금은 어떤 것까지 있어요? 부처님이 말한 육식 외에 7식이 있고 8식이 있고 그것까지 전개가 된 거라. 그러니까 9식까지는 아직 전개가 안 된 것 같아. 몇 식까지 될는지는 모르겠어.

부처님은 분명히 6식 이외에는 없다고 얘기했는데.

그렇게 되니까 부처님 가르침하고는 점점 더 멀어지고, 멀어지다 보니까 이게 더 형이상학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거라. 그게 인제 여러분들이 배우는 교리라.

그러니까 원래 원줄기하고는 얼마나 멀어져 버리게 되는 거라?

 

처음에 떨어져 나갈 때 가장 이슈가 됐던 것이 10가지 비법 행하는 겁니다.

그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우리는 따로 떨어져서 별도로 갈마를 해도 된다." 하는 겁니다. 그거는 단호하게 거절됐거든. 그거는 뭡니까? 귀찮으니까 쉽게 말하면.

만약에 예를 들어서 각각의 지역에 이렇게 있는데, 이번에는 어디 전주에서 스님들이 모인다 그럴 것 같으면, 아, 그 전주에까지 부산에서 갈라면 귀찮단 말이라. 멀단 말이라. 부산 지역에만 해도 4명 이상 스님이 있으니까 우리는 우리끼리 할게. 하는 겁니다. 저기하고는 별도로 그렇게 하는 거라. 근데 뭐 이렇게 떨어져 가지고 각각의 의논들을 하면 이걸 어떻게 의견 일치를 할 거라? 그러면 예를 들어가지고 그렇게 했다 치자. 그럼 저 전주에서 의결된 것들 하고 여기 부산에서 의결된 거 하고 이게 의견 상충이 일어나면 어떤 걸 상가의결이라고 할 거라? 이걸 인정하자는 얘기거든.

따로 갈마를 해도, 따로 무리를 지어가지고 모여가지고 회의를 해도 이것은 인정하자. 그거는 부처님 가르침하고는 전혀 딴판이 되게 되는 형태를 띠게 되는 거라.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이 뭐냐면 그 뒤에 이제 전개된 것이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이제 얘기를 합니다. 아라한이 완전하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뭐가 완전할까? 그럼 자기들은, 예를 들어봅시다. 그 주장대로 아라한도 완전하지 않다고 인정한다 칩시다. 그러면 자기들은 아라한보다도 더 뛰어나야만이 적어도 완전히 해탈한 분이라고 얘기를 할 수 있을 거 아니라.

그런데 그 아라한보다 더 뛰어난 분은 부처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자기들이 부처님이라고는 얘기를 안 하거든. 나는 붓다다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아라한보다 적어도 동격이거나 못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아라한보다도 못한 사람들이 아라한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 있을 수가 있을까?

 

예를 들어 봅시다. 나는 국민학교 3학년인데 3학년 산수를 알고 있는데, 국민학교 2학년짜리가 3학년짜리 산수를 모르고 있으면서도 3학년짜리 산수 한 것이 틀렸다고 얘기할 것 같으면 이게 말이 돼? 지는 모르고 있는데? 말이 안 되는 얘기라. 그러니까 아라한을 부정한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은 아라한이 아니다는 얘기와 마찬가지고, 아라한보다도 못한 사람인데 어떻게 아라한을 부정할 수가 있어? 논리적으로도 안 맞아. 그렇다고 칩시다. 어쨌든.

 

그런데 논리적으로 전개한 아라한에 대한 부정들이 지금 현대에서, 그때 당시에는 치열하게 그게 맞다고 싸웠는데 지금 현대에 와서 딱 보니까 참 가당치도 않은 얘기들이란 말이라. 아라한에 대해서 요만큼이라도 이해하고 있을 것 같으면 적어도 요런 얘기는 할 수가 없을 것인데.

 

그 아라한에 대해서 비판한 것이 "아라한도 유혹당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질병 등의 원인으로 인해서 아라한보다 더 못한 것으로 퇴위할 수도 있고, 또는 내가 아라한 과위에서 더 밑으로 아래로 떨어질까 봐서 그런 두려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고 그렇다는 얘기라. 이게 언어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아라한이 가능할 수 있는 경지인가?

아라한이 될 경우에는 마음이 해탈을 하고 해탈했다는 걸 ‘아, 내가 해탈했다’ 하는 걸 갖다 분명하게 압니다. 물론 그걸 학자들은 뭐 마음의 해탈 그다음에 지혜의 해탈 해가지고, 심해탈, 혜해탈하고 분리하는데 사실은 분리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태국에 있는 내 스승에게 그런 걸 물어본 적이 있어요.

“스님, 완전하게 깨달음 이루고 나서 어떤 마음이든가요?” 하고 물어봤어. 쉽게 말하면 당신 아라한이오, 아니오? 하는 얘기야. 아라한일 거 같으면 내가 따라갈끼고 안 그러면 내가 뭐 시켜도 안 한다는 얘기라. 어떤 마음이든가요? 하고 물어보니까 스님이 씨익 웃으면서 뭐라는지 알아? 내가 참 강을 건너고 나니까 딱 강 건너고 나서 ‘아, 내가 건넜다’ 하고 안도감이 확 든다는 거라. 급류들이 흐르고 뭐 이런 강이 있는데, 강을 어떻게 다 건너고 나니까 너무 다행인 거야. 너무 좋더라는 거라.

근데 그것에서 딱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러고 나서 돌아보니깐 저쪽에 강을 건너려고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있는 거야. 우짤끼라? 이거. 나는 강을 건넜는데. 그러면 건너주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저 사람들을 보고 ‘아, 저 사람들을 강을 건너게 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딱 생기더라는 거라. 그 얘기를 해요.

 

그래서 과위에 이르게 됐을 때 사람들이 그 과위에 이르고 나서 가지는 마음들이 바로 저런 것이다. 자신이 그 과위에 이르렀다는 걸 분명하게 안다. 그리고 그 과위에 이르고 나서는 나는 다시는 저 물살 흐르고 하는 데를 왜 건너갈 거라? 그리고 건너가야 될 이유도 없기 때문에 그 건너갈까 봐서 하는 두려움이 생길 이유가 없어. 건너왔어 이미. 이미 그것들에 대해서 다시는 건너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걸 아는데 왜 건너갈까, 다시 내가 그쪽으로 갈까 봐서 두려움이 생길 거라? 이 말이 되는 거에요 이게? 그럴 수가 없는 거야. 과위에 이르고 나면.

그것만 생기는 게 아니고, 그러고 나서 저쪽에 있는 사람들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놈들을 빨리 건너게 해주려는 그런 자비스러운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딱 확인이 돼버리는 거라. 움직이지 않게끔 내가 할 일이 정해져 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런 상태인데 이게 뭐 과위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긴다? 아니면 뭐 내가 여기에 가만히 아 나 과위에 이르렀다 하면서 허허덕거리고 안주하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퇴보하기도 한다? 과위에 이른 사람 아라한에 이른 사람들은 안주하는 법이 없어요.

어디 부처님이든 무슨 깨달음을 이룬 분들이 가만히 지가 과위에 이르렀다고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어딨어? 자기들의 역량에 맞게끔 저 한사람이라도 더 건질려고 노력을 하지. 그런 법이 없다는 거라.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 이걸 조목별로 분석을 해보면 말이 안 되는 얘기라. 그러니까 아라한에 대해서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런 얘기들을 하게 되는 거라.

오늘은 이 적어도 여러분들이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아라한이 된다니까 왜? 적어도 이것만큼은 해라. 아라한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요거는 해야만이 적어도 내가 ‘아, 내가 한 물길은 건넜다’ 하고 스스로 안도감을 가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저쪽으로는 다시 안 가려고 해. 아라한이 아니라 예류과가 아니라 적어도 요것만 돼도 다시는 저쪽으로 안 가. 다시는 저쪽으로 안 가. 적어도 이생에서는.

 

그게 뒤에 나와 있는 테라담마(Theradhamma) 열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 랏딴뉴-(Thero rattaññū) 그럽니다. 오랜 경험이 있는 자.

오래도록 그와 같은 것들을 경험하는 것, 수행도 오래도록 하고 경전 배우는 것도 법문 듣는 것도, 그리고 테라와다 불교에 맞게끔 테라와다 신자로서 살아가는 것도 오래도록 해야 된다. 그걸 단번에 무슨 뭐 하듯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야. 그거는 책에서나 가능한 얘기지. 그래서 뭐 며칠 지나고 나서 나 깨달았다, 나 예류과에 이르렀다, 인가해 주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마라는 거라. 그런 법은 없다는 거라. 오랜 경험이 쌓여야 된다.

 

두 번째가 실-라와-(sīlavā) 그럽니다. 덕행을 갖춘 자, 계행을 잘 지키는 자.

과위에 이르는 사람이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계행은 자연스럽게 지킨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과위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단언코. 그러면 재가자로서 쉽게 말하면 과위에는 이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내가 법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려고 할 것 같으면 계를 안 지키고 이걸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런 법이 있으면 가져와 봐. 그런 법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계행을 지키는 자를 갖다가 덕의 향기가 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덕행을 갖춘 자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바훗수또-(bahussuto) 많이 들어서 그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풍부하게 아는 자.

뭐든지 많이 법문도 많이 듣고, 이 바훗수또라고 하는 것은 가르침을 많이 듣기도 해야 되고, 가르침을 많이 외우기도 해야 되고, 그리고 수행으로 인해서 그 가르침을 확인하기도 할 줄 알아야 되고 그럽니다. 경전하고 수행하고 자꾸 분리가 돼버리면은 이게 안 돼버려. 경전 따로 수행 따로 돼버리는 거라. 사실은 이게 한 덩어리거든. 한 덩어리인데 그걸 가르칠 때 그렇게 분리해서 가르치는 것뿐이라.

근데 바훗수또가 아닌 사람들은 이게 자꾸 분리돼 버리는 거라. 듣는 것은 풍부한데 내가 행하는 것은 들은 것에 반대되는 형태들, 그런 사람은 바훗수또라고 얘기 안 합니다. 들은 것만큼 실행되는 사람. 수행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풍부하게 접하고 아는 사람들. 수행만 하는 사람이 수행만 하고 있다, 그것은 거의 가짜라고 보면 됩니다. 거짓말 같죠? 실제 그렇습니다. 불교사가 그렇게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사가.

 

남을 지도하는 스님들 중에서 경전을 모르고 그것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이 없는 스님이 있든가? 단언코 없습니다. 경전에 대한 지식도 풍부해야만이 수행에 대한 지식도 풍부해지고, 수행에 대해서 경험이 풍부해야만이 경에 대한 지식들도 풍부해지게 되는 거라. 이건 불가분의 관계라는 거라. 그래서 조금 공부하다 의문 나는 것은 경을 뒷받침해가지고 그걸 갖다 반조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돼 나간다는 거라.

 

수행만 쭉 해가지고 부처님 당시 때 같은 아라한에 툭 이르른다? 세상에 그런 법은 지금 없어. 그렇게 될 수도 없고. 같은 절에 살아도 스님한테 매번 경험한 것들을 가서 보고할 수도 없어. 그러면 자기가 어떻게 해야 돼? 그것이 바른가 안 바른가를 경을 뒤져봐가지고, 아니면 부처님 가르침이나 아니면 스님 법문을 통해가지고 그걸 확인하는 수밖에는 없는 거라. 그리고 자연스럽게 경에 대한 것들이 풍부해질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러니까 역대 스승들을 보면 경전에 대해서 모르는 분들이 거의 없다는 거라. 그래서 많이 들어 지식이 풍부하다라는 것은 수행도 아울러 갖추고 경전에 대해서도 풍부하게 알고 있고 그것을 독송할 수도 있고 그런 분들을 얘기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스와-가따 빠-띠목코-(Svāgata pāṭimokkho) 라고 하는 것은 계율에 대해서 익숙하게 아는 자.

‘아, 이게 지금 계율에 어긋나는가 아닌가?’ 어느 절에 간 적이 있는데 이건 여담입니다이.

오후에 스님이 가니까 대접할 게 없으니까 과일을 이렇게 내놔. 그래서 “과일 우리 못 먹어.” 그러니까 옆에 있는 테라와다 스님이 “그냥 삼키면 되지요” 이래. 과일을 그냥 삼키면 된대. 그러면서 한다는 얘기가 그거 갈아가지고 먹는 거나 그냥 그거 씹어 먹든 삼켜 먹든 먹는 거나 사실 먹는 건 똑같애. 먹는 거는 똑같다고. “똑같은데 뭐 그냥 먹으면 되죠.” 이렇게 얘기하는 거라. 그래서 ‘야, 이거 참 위험하구나. 굉장히 위험하구나’ 하는, 거기서 대놔 놓고 이놈의 새끼 죽일 놈 살릴 놈 하지는 못하는 것이고 ‘위험하구나’ 하면서 단호하게 얘기했습니다. “안 됩니다. 먹으려고 할 것 같으면 갈아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물리시오.” 이렇게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근데 그 얘기는 뭐냐면 사실은 갈아먹든 그냥 그거를 삼켜 먹든 씹어 먹든 배 종류였는데, 별 차이는 없거든. 안에 들어가는 건 마찬가지인데. 근데 이걸 계율에 대해서 완전하게 숙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발생하는 거라. 결과만을 볼 것 같으면 그걸 어떻게 불교라고 얘기할 수 있나? 불교는 어떤 경우든지 결과를 보질 않습니다. 과정,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근데 결과만 볼려고 그러는 거라. 똑같다고, 똑같은 결과를 나타낸다고.

오후에 그걸 씹어 먹지 마라고 한 이유를 갖다 까먹어버리는 거라. 까먹어버리고 뭐 결과적으로는 똑같으니까 갈아먹으나, 뭐 즙을 쭉 빼가지고 물만 마시는 거나, 그거 먹는 거나 뭔 차이가 나느냐 해가지고 그거 그냥 씹어 먹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거기에 있는 재가자가 우리 스님은 이렇게 먹는데요 하면서 갖다준 거야 쉽게 말하면. 이제 스님도 먹어봐라 이거야. 이게 뭐냐면 계율에 대해서 익숙하게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여러분들은 안 그럴 것 같아요?

 

우리 선원에서도 그런 적이 있어요. “스님, 오계 지키려고 하는데 딱 하나가 걸리는데요” “뭔데?” 하니까 “취하지 않게끔만 먹으면 안 될까요?”

그건 자기가 술 먹었다 생각 안 하는 거야. 그러니까 취하지 않게끔만 먹으면 안 될까요? 그러는 거라. 계율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 항목이 딱 걸리는 거라. 이 항목 자체가 한방울도 먹지 마라고 하니까 ‘아, 이걸 안 먹고 어찌 사느냐’는 이 계율이란 항목에 딱 걸려버리는 거라. 아니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살아가면 돼. 술이란 게 애초부터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가 버리면 전혀 문제가 없는데, 항목에 걸리지 않는데, 자기는 먹어야 되겠는데 취하지 않게끔만 먹으면 문제가 전혀 없는데, 이걸 한 방울도 먹지 못하게 하니까 이 딱 항목에 걸려버리는 거라.

계율을 숙지하려면 반드시 그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분명하게 알고 하라는 거라.

 

다섯 번째가 아디까라나 사뭅빠-다 우-빠사마 꾸살로(adhikaraṇa samuppāda ūpasama kusalo) 이럽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잘 가라앉히는 자.

서로 싸움박질을 했다. 그러면 두 사람이 팽팽하게 의견 대립했을 때 요 두 사람 다 기분 나쁘지 않게끔 잘 중재해가지고 수긍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것. 가족 간에도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런 노력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견해들을 자꾸 내세우고 그리고 어느 쪽 편을 자꾸 들려고 하다 보면 그게 안 돼버립니다.

그래서 쟁사인을 갖다가 둘 경우에는 어떤 경우든지 이쪽에서 뽑고 저쪽에서 뽑고 하더라도 법과 율에 맞게끔 그것들에 대해서 확실하게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을 뽑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뽑을 경우에는 그 사람은 적어도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는 거라. 어느 편을 들기 이전에 이게 부처님 가르침에 맞는가? 이게 부처님이 말한 율에 맞는가? 하는 것만 먼저 비추어본다는 거라. 거기에 따라서 판단을 한다는 거라.

내 편 니 편이 있는 게 아니고. 내 편 니 편은 마음속에 있는 겁니다. 그냥 항상 내 편이 항상 죽을 때까지 내 편이 되는 건 아닙니다. 남의 편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그건 왜 그러냐면 마음속에 있는 거기 때문에. 그럴 것 같으면은 쟁사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이 사람 마음, 이 사람 마음을 갖다가 헤아려가지고 잘 조정할 줄 알아야 되는 거라. 그래서 두 사람 다 수긍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돼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담마까--(Dhammakāmo)

법을 가르치는 데도 열정이 있어야 되고 제자를 가르키는 데도 애정이 있게끔.

꼭 아라한에 이르지 않아도 적어도 법에 대해서 확신이 들면은 당연히 법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됩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고 이게 얼마나 소중하다는 걸 안다는 거라. 그럼 당연히 이 법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하고 얘기할 때 잘 이끌어주려고 하게 돼 있는 거라. 법을 설할 때도 마찬가지고 또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만약에 그게 갖춰지지 않을 경우에는 인원이 100명이 모였으면 열심히 가르칩니다. 근데 인원이 5명밖에 안 모였다 할 것 같으면 열심히 가르치는 동력이 떨어져 버린다는 거라. 담미꼬가 안 돼서 그러는 거라.

 

법에 대한 확신들이나 법에 대한 고마움들을 갖다가 체험을 못 하니까 당연히 그렇게 되는 거라. 인원에 무슨 관계가 있어? 그리고 가르치는데 무슨 제약 조건이 있다고 그걸 가지고 법을 논하느냐는 거라. 법을 그거는 모욕하는 거라. 적어도 여러분들은 법의 소중함을 알 것 같으면 법에 대해서 나눌려고 하는 열정들이 있어야 되는 거고,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법으로 자꾸 인도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에 대해서 진짜 애정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고 인도할 수 있는 자가 돼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일곱 번째 산뚯토-(santuṭṭho) 만족할 줄 아는 자.

만족할 줄 아는 것은 있는 그대로에 대해서 만족한다는 얘기도 되지만 욕심 안 부리면 됩니다. 욕심 안 부리는 걸 만족하는 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욕심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많아서.

 

그다음에 빠--디꼬-(pāsādiko) 항상 편안하고 보기 좋은 자.

경전에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아!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해도, 그 부처님을 보는 것만 해도 이게 나 얼마나 좋으냐? " 하는 구절들이 자주 옵니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법에 대한 이해를 하고 법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할 것 같으면 저 사람이 있는 것만 해도 집안 사람들은 다 평온한 거라. 좋은 거야. 그래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딱 저 사람만 보면 ‘아이고, 그래도 내가 누그러뜨려야지’ 하는 그런 마음이 드는 겁니다.

그걸 이 빠-사-디꼬-(pāsādiko) 라고 그럽니다. 그게 집에 있을 때나 밖에 있을 때는 어떤 경우든지 항상 이 상태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자-나 라--(jhāna lābhī) 해가지고, 4가지 선정, 초선정부터 4선정까지 그 즐거움을 알고 그것을 경험해서 증득해서 그것을 소유한 자.

적어도 초선정 문턱까지는 가봐야 될 거 아냐. 안 그래? 열심히 알아차리고 있으면 초선정 문턱에는 가는 겁니다. 그래서 적어도 그 수행하고 있을 동안에는 그렇게 가볍고 그렇게 평온하고 고요할 수가 없어야 된다는 거라. 수행하니 힘들어 죽겠다 할 것 같으면 마 이거는 틀려버린 거고, 적어도 그렇게 되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내가 보고 있는 것이든 듣는 것이든 선정의 상태와 마찬가지의 마음들이 일어나야 된다는 거라. 아, 저건 나쁜 소리 하다가, 저 소리가 얼마나 좋느냐 듣기 좋으냐는 거라. 그 즐거움을, 그럴 수 있어요? 남이 나를 욕하고 때려도 ‘아이고, 난 얼마나 좋느냐’ 이럴 정도가 돼야 된다는 거라.

순간순간에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순간순간에 머물러 있을 것 같으면 적어도 그렇게 됩니다. 수행은 그겁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그다음에 위뭇또-(vimutto) 자유롭게 된 자.

여기서는 이제 해탈이라는 의미인데 꼭 해탈이라고 보지 말고 어떤 경우든지 자유롭게 된 자. 가진 게 없으면 자유롭습니다. 가진 게 없으면. 여러분들은 집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가정의 집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얽매여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어도 자기 스스로 그거에 매여 있습니다. 자기 없어도 잘 그거 그 집들은 잘 돌아가고 갑니다. 세상 안 망하고. 근데 지 혼자 매여 있는 거라 거기에다가. 자기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게 해야 되지만 그것들에 대해서는 자유로워져야 됩니다. 마음에서는.

 

적어도 이 10개를 갖추면 법에 대한 확신들은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10개를 갖췄다고 판단됐을 때 그 사람한테 “너 인제는 법을 설해도 좋다. 너는 보살행을 해도 좋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섣불리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쨌든 법에 대한 확신이 들어서 이게 너무 좋다는 마음이 있어야 뭘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거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아라한에 대해서 쭉 조사를 한 게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아라한이라고 칭하는 분들, 그리고 부처님인 경우, 경전에 나오는 아라한들을 조사해서 그 사람들의 행위들을 다 조사해 보니까 딱 특징들이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보통 '아라한의 마음'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라한의 마음은 어떤 마음들이 있을까?

첫 번째 속박되는 연결고리가 없다.

나는 이 시간 되면 집에 가야 돼. 그럼 집에 가는 것은 맞긴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집하고 나하고 속박되는 연결고리는 전혀 없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집에 안 가고 내가 또 다른 법을 설할 것이 있을 것 같으면 거기 가는 거라. 집에 안 가는 것에 대해서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 거라. 왜?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 문제가 뭐냐면 여러분들은 번뇌가 하나 일어나면 문제가 안 돼. 근데 이게 번뇌가 한 2~3개 일어나가 이게 서로 연결되어 버리고나면 이게 문제가 돼버립니다. 안 그럴 것 같아요? 성질이 확 났다, 그럼 ‘어, 성질났네’ 하고 탁 알아차리면서 싹 가라앉아 버리면 크게 문제가 안 돼. 근데 이 성질이 탁 났는데 “나한테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런 성질을 부려?” 하고 '나'라고 하는 거 하고 '화'하고 탁 연결이 돼버리면 이게 문제가 돼버리는 거라. 이 연결고리만 없으면 전혀 문제없어. 나라고 하는 거는 지 혼자 있을 때는 지가 아무리 뭐 나가 최고다 한들 그게 뭔 관계가 있어? 항상 문제가 되는 게 이 연결고리라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 연결고리는 안 만들어라는 거라. 만들지 마라는 거라.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저번에 마음의 세탁 10가지 부분 있죠?

크게 화내고 크게 욕심 부리고 하는 10가지, 그것이 없어야만 연결고리가 끊어져. 그 연결고리가 없이 자유롭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그런 연결고리가 있으면은 새장에 갇힌 새와 같다. 하고 이 경전에서는 비유를 합니다.

 

두 번째 아라한의 마음의 두 번째는, 근거, 대상들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는다.

맛있는 거 보면 ‘맛있다’ 하지 않는다는 거야. 쉽게 말하면. 맛있는 대상, 그리고 예쁘면 예쁜 대상으로써 ‘예쁘다’ 하고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거라. 대상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아야 된다는 거라. 그렇다고 해서 대상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도 일으켜서는 안 되겠지. 당연히 즐기지 않는다는 것은 즐거워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것을 즐기지 않는다는 거라. 밥은 먹어야 되지. 그러니까 밥을 먹을 때 맛있는 것도 먹기도 하고 맛없는 것도 먹기도 하는데 즐기지 않으면 ‘맛있다, 맛없다’하고 먹는 게 아니고 필요한 양만큼만 먹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걸 즐기지 않기 위해서 출가한 스님들이 만날 바리때에 밥 먹으라고 한 거라. 바리때에다 밥이고 국이고 반찬이고 다 몰아가지고 먹으면 이게 뭔 맛인지 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떠나기 위해서 훈련시키는 거라 그 바리때가. 실제 그렇습니다. 그렇게 훈련되고 나면 적어도 먹는 것에 대해서 탐착하는 것이 딱 끊어져 버립니다. 적어도 그걸 5년간만 해봐. 왜 얼굴을 찡그려? 진짜 먹는 것에 대해서 딱 끊어져 버립니다. 일부러 수행할 필요 없이 딱 끊어집니다. 자기가 적절한 양도 알게 되고.

 

그다음에 세 번째 쓰레기를 모으지 않는다.

여러분들은 아마 필요 없는 것들을 엄청 집에, 내가 뭐 어디 머문다 할 것 같으면 하루만 지나고 나면 뭐가 쌓여. 이틀 지나면 더 쌓이고. 그러니 물건만 쌓여? 돈도 더 쌓을라고 그러고, 명예를 더 쌓으려고 자꾸 쌓으려고 그래요. 근데 그걸 갖다 부처님이 뭐라 그러냐면 그걸 갖다 '쓰레기'라고 해요. 왜 이거는 무상한 것이고. 변해가는 것들이라는 거라.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들이고. 그러니까 이거 이거 안 모은다는 거라 적어도. 깨달음에 이른 분들은 모으는 게 없다는 거라.

 

우리 태국에 있는 스승을 좋아했던 계기가 뭐냐면, 내가 한창 공부할 때 외국에 아소카왕 각문 같은 거 조사한다고 학교에서 조사하러 가라고 할 것 같으면 뽀로로 쫓아가. “스님 나 며칠 날 인도 며칠 갔다 와야 됩니다.” 할 것 같으면 “음 그래?” 그러면서, 가방에서 봉투채로 있어요. 그 스님은 이렇게 지갑이란 게 없어. 누가 주면 그걸 봉투를 받아가지고, 뭐 얼마나 들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안에 넣어놔요. 그래갖고 그 속에서 이거 집어내갖고 요렇게 줘. “세 봐.” 그래요. 그럼 이걸 내가 세보고 얼마 필요하다 할 것 같으면 “요거면 됩니다” 하면서 나머지는 이렇게 돌려주고 이럽니다.

용도가 요런 용도로 쓰여지는 거라. 큰 스님이니까 얼마나 뭐 누가 뭐 스님한테 보시를 많이 할 거라. 그런데 이 스님은 한 번도 요걸 갖다가 자기 스스로 모아놨다고 생각을 안 하는 거라. 필요한데 꼬박꼬박 쓰는 거라. 그러니까 어디 가면 뭐 한다 할 것 같으면 그거 내고, 뭐 한다 할 것 같으면 내고, 맨날 이러는 거라. 그러니까 나는 만날 갈 때 되면 기분이 좋은 거야. 돈은 스님한테 얘기하면 나오니까. 그게 뭐냐 하면 모아두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라.

 

필요할 때 쓰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으면은 모아두지 않는 거라. 여러분들이 돈을 모으고 인간관계를 갖고 그다음에 뭐 명예가 높아지고 하는 것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고 모아두는 습성을 가지지 않으면 더 좋은 데 쓸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쓰레기를 모으지 말아라. 쓰레기를 모으지 말아라. 그게 안 되면 아예 모으지 마. 진짜! 실제로 모으지 마! 안 되면 모으지 마. 안 모으는 게 더 번뇌를 안 일으키는 거야.

 

그다음에 조건 짓는 것이 없다.

깨달은 분들은 조건 짓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하고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깨달은 분이 뭐 악한 행위를 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선한 행위를 합니다. 꾸살라를 행하지만은 그렇다고 해가지고 조건을 짓지 않으니까 공덕도 받질 안 해. 여기서 아라한은 공덕 쌓는 일은 하지만 공덕을 받지는 안 해. 왜 그럴까?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 매달 보니까 뭐 금전 출납부가 이렇게 있더라고. 누가 얼마 내고 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얼마 얼마 나왔다, 그러면은 어떤 사람은 무기명으로 돈을 5만 원 내고 어떤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돈을 5만 원 냈다. 예를 들어가지고. 자기 이름으로 돈 5만 원 낸 사람은 선한 행위를 하고 그 행위로 인해서 공덕을 받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냈으니까. 근데 무기명으로 5만 원을 낸 사람은 선한 행위는 했지만은 꾸살라는 행했지만 그 뿐냐는 어디로 간 거라? 무기명인데? 어디로 가야 될 곳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꾸살라가 꼭 뿐냐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선한 행위가 공덕으로 다 연결되는 건 똑같은 것은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아라한은 선한 행위를 했는데 받을 것이 없어. 무기명으로 했기 때문에. 그 얘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래서 여러분들은 적어도 조건 짓지 않는 행위들을 자꾸 해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공덕을 짓지 마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적어도 깨달음에 이르지 않는 사람들은 조건 짓지 않는 것들을 해라는 거는 뭐냐면, 주고 나서 받을 거 생각하지 마라는 겁니다. 그래버리면 공덕도 안 돌아와. 한 것으로 끝내라는 거라. 당연히 내가 했으면 내가 했다고 알면 그 공덕은 나에게 돌아오는 거라. 내가 돌아오길 바라지 않아도. 그런 조건을 안 지어도 괜찮다 하는 거라.

그래서 불교는 뭐라고? 기브 앤 리시브라는 거라.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고.

 

그다음에 깨달은 분들의 공통적인 특성이 침착함입니다. 침착성.

어떤 경우든 침착하라.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이기 때문에 침착하게 그것을 대응한다. 뭐든지 빨리빨리 할려고 하고 또는 게을러지고 하는 사람들이 특성들은 보면 그 시간 동안에 마음은 딴짓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재에 머물러 있지 못하면은 침착성은 없습니다. 현재에 자꾸 머물러 있을 것 같으면 언제든지 침착하게 돼 있습니다. 안 되면 일부러라도 해. 일부러라도. 그래서 수행할 때 처음에 누구든지 가면 천천히 해라 합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뭘 가라앉혀야 뭘 하든지 할 거 아니라. 근데 뭐 평상시에 하던 대로 빨리빨리 할 것 같으면 안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그리고 행동하는 것들이 침착할 수 있도록. 침착성이, 아이고...

 

그다음에 비교해 보는 것들이 없다.

나라고 하는 마나가 없기 때문에 비교하는 습관들이 전혀 없습니다. 비교하는 것들이 없다는 것. 그런 것들이 있고.

 

또 특성들이 뭐냐면 확고한 결심.

내가 뭔가를 한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반드시 한다.

 

그다음에 진정성이 있어요.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들이 진짜 모든 걸 내가 다 끄집어내 갖고 하듯이 진정으로 한다는 거라.

 

그다음에 참을성 인내하는 것.

어떠한 경우도 인내하는 것들이 있다는 거라.

 

그리고 관대하다.

또는 자비, 이런 것들하고 지혜, 이런 것들이 공통적으로 갖춰져 있다는 거라.

이게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이런 것들이 다 이리 갖추어져 있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뭐 남들한테 친절할 줄도 모르고 그러면서 지는 뭐 깨달았다 할 것 같으면 가짜다 하는 거라.

 

공통적인 특성이라는 거라.

이게 언제 발표됐냐면 미국에서 어느 정신과 학자가 이걸 갖다가 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테라와다뿐 아니라 대승불교 그다음에 티벳 모든 경전들하고 그리고 그 선각자들, 그 스승들을 조사해 보니까 적어도 그분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특징들이 있더라 하는 거라.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런 것들을 적어도 따라가려고 할 것 같으면 아라한에는 이르지 않아도 아라한에 이르기 위한 초입에는 적어도 이를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은 아라한에, 단언을 하는데 수다원에 이르고 나면 빨리 도달하게 됩니다. 수다원에 이르고 나면 여러분들은 일래과 불환과 한참 시간이 걸릴 거라고 하는데, 한참 시간이 걸립니다. 근데 일래과 불환과는 사실은 한 묶음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세 묶음이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맨 밑에 예류과에 못 이르러가지고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지, 예류과에 이르고 나면 두 번째 세 번째는 한 묶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거짓말 같죠?

그다음에 네 번째 아라한은 또 한 묶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쉽게 말하면 세 묶음이라고 보면 거의 맞을 겁니다. 대부분 경전들을 다 뒤지고 그리고 깨달음에 이른 분들을 갖다가 조사를 해보니까 그런 특성들이 나타납니다.

 

자, 어쨌든 그렇게는 안 돼도 여러분들은 법에 대한 확신들은 가질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적어도 부처님으로 인해서 가르친 가르침에 대해서 뚱뚱하게 해석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그 가르침 따라 잘 수행해서 깨달음이 이른 아라한들에 대해서 모욕하지 말아라. 그 두 가지를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로 불교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깁니다. 그런 얘기를 드리면서 마치겠습니다.

 

짯따로 담마 왓단띠 아유 완노 수캉 발랑.

항상 부처님과 가르침 따라서 살아가면서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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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_ 결집

【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5. 제1차 결집6. 제2차 결집7. 제3차 결집10. 제 4차 결집 - 불교 경전의 문자화16. 현재의 테라와다 불교(테라와다 불교의 원칙과 특징들)  5. 제1차 결집  부처님께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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