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길을 끊어라 (20101115)
1. 잘 이은 지붕은 물이 새지 않는다.
마음에 스트레스가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 스트레스에 대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증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는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불교에선 말합니다.
사는 것 자체가 괴로움의 연속이기 때문에 당연히 스트레스는 있습니다. 사는 것은 만족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물어도 자신의 인생에서 여러 가지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괴로움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불필요한 비교를 합니다. 부유한 사람과 비교하여 그 사람은 행복한데 나는 불행하다는 둥 쓸데없는 비교를 합니다. 정작 그 사람이 행복한지 불만족한 생활을 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말입니다. 비교하면 더 큰 문제가 일어날 뿐입니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 생명은 없기에 개개인은 여러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에 공통됩니다.
더욱 안 좋은 것은 우리는 몸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육체의 고통도 느끼도록 되어 있습니다. 육체가 없는 생명은 정신적인 스트레스 밖에 없습니다. 육체는 고통으로 살아가고, 정보는 고통으로서 이해합니다. 고통 덕분에 살아가는 우리가 스트레스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통이 없으면 호흡마저도 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걷거나 앉거나 자거나 하는 일도 고통이 없으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이 우리를 살리고 있는 에너지입니다.
예를 들어 호흡을 멈추어보면 상당한 고통이 있고, 심장을 잠시라도 멈추면 참기 어려운 고통이 있는데, 그 고통을 어떻게든 하기 위해서 움직이게 됩니다. 움직이고 있는 에너지는 고통입니다. 이런 것이 육체이기에 고통을 좋아하고 즐기면 좋은데, 이 고통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로부터 도망갈 수 없습니다.
확실히 스트레스가 있다는 사실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모든 현상은 괴로움이다. Sabbe saṅkhārā dukkhāti」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없애는 방법보다는 어떻게 친해지면 좋을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 올바릅니다. 사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이므로 스트레스가 하나도 없는 고요하고 평온한 삶의 방법은 세간에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붓다의 세계, 즉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에게는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이제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스트레스와 올바르게 친해지는 방법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간단한 방법, 특효약은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스트레스를 완전히 없애는 음악도, 음식도 없습니다. 암을 닮아있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암에는 특효약이 없습니다. 완전하게 제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암을 도려낼 수 없는 상황이면 어찌할까요? 어찌하든 같이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스트레스를 완전히 제거하면 세간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와 바르게 친해지는 길을 알아야 합니다.
스트레스와 바르게 친해지는 방법
먼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단순하게 들리겠지만 인정하면 스트레스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인정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사는 것은 스트레스이고, 괴로움이며, 즐거움은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쉽게 되겠습니까?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부정할 것입니다. 아니면 그러기를 원하는 희망으로서만 인정해 버릴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봅시다.
사람은 누구라도 죽는다고 알고 있기에,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나 친한 이가 죽으면 괴로워서 슬퍼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실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정하면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누구라도 병이 든다고 인정하고, 나이를 먹으면 늙어간다고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병이 들면 곤란해하고, 나이 먹는 것에 고민합니다.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나이를 먹어도, 나는 나이를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인정하면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다가 돌연 ‘아! 알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일단 바르게 안 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안다고 하는 것은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정말로 알았다면 의심하지 않고 애매함도 없습니다.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알았다」라고 하는 시점에서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지혜가, 이해의 힘이, 번쩍임이 일어납니다. 사는 것은 괴로움, 괴로움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진지하게 생각해서 인정하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제 사는 것에 대한 괴로움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알아 인정하면 마음에 개혁이 일어납니다.
사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의 연속이고, 스트레스가 없는 삶의 방법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르게 이해해야 인정하게 됩니다. 붓다의 말씀이라고 당연하게 믿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아닙니다. 「당신은 신을 인정합니까?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이런 식의 믿음이 아닙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의 존재는 아무도 모릅니다. 로마교황마저도.
마음의 개혁이 일어나려면 스스로 알아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사는 것의 괴로움을 자기 스스로 발견해서 알면, 그것은 바른 이해이며 지혜이기도 합니다.
숙제는 스스로 해야 합니다. 스스로 조사하고 알아야 합니다.
불교는 과학적이므로 실천적으로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인정한다」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인정한다」라는 것을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인정한다」라는 행위를 가볍게 보지 않고, 「인정한다」라는 것은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성장에 따라 점점 「인정한다」는 것이 많아져서 서서히 성장할 것입니다.
두 종류의 스트레스
1) 자연적인 스트레스
사는 것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호흡하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등도 스트레스입니다. 몸의 움직임도 스트레스입니다. 세포나 심장은 스트레스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괴로움이 필요합니다. 그 스트레스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2) 인위적인 스트레스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드는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이것으로는 부족한지 스스로 인위적으로 스트레스를 만듭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듭니다.
예를 들어 감기에 걸린다거나, 세균에 감염된다거나 하는 것은 자신의 관할 밖인데도, 이런 것들로 인해 곤란해하거나 고민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불안하게 되거나 여러 가지 불평들을 합니다. 이런 것을 일러 스스로 만든다고 합니다. 병이 들면 괴롭습니다. 편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정신적으로 고민하며 스트레스를 만든다는 것은 자작적이며 인위적입니다.
이 자작적인 스트레스로 더욱 나쁜 결과가 됩니다.
첫 번째의 스트레스는 그것을 인정하고 방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의 인위적인 스트레스는 자업자득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에 따라 완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을 배웁시다.
나이를 먹는 일, 병이 드는 일, 일거리가 없어지는 일, 이런 화살은 누구나가 받습니다. 또한 외부적인 금융 위기가 원인이 되어 중소기업이 도산하는 일, 이런 화살은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화살은 피할 수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만든 스트레스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은 일부러 자기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만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으면 스트레스 만들지 않고 즐겁고 평온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스트레스를 피하고 싶지만 우리에게는 욕구가 있습니다. 욕구를 버리고 싶지 않은 겁니다.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는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채워지지 않기에 욕구는 일어납니다.
개개인 스스로 욕구를 만들고 있습니다. 욕구를 만든 시점에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욕구는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인정하기 싫은 겁니다.
욕구가 있는 것 자체가 마음에 심한 부담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욕구를 채울 방향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기에, 자유가 없어집니다. 욕구가 중력 작용을 하므로 마음은 유연하게 기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인지 장해가 있기 때문에 인식은 기본적으로 잘못되어 갑니다. 더욱더 압력을 가해서 잡으면 더 심한 결과가 됩니다.
욕구의 감정이 인생의 열쇠를 잡으면 객관성과 이성이 없어집니다. 욕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소는 가고 싶지 않지만, 도살장에 소를 이끌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코가 고삐 매인 소는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느낌으로 욕구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욕구가 결정하는 삶의 방법을 따라가야 하므로 제어가 불가능합니다. 그것에 따라 무수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른바 자유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욕구에 이끌려 살아가는 상태가 됩니다.
욕구가 주도권을 잡으면 괴롭고 참기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에겐 갖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어느 정도 있습니까?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는가는 상관하지 말고, 단순하게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의 목록을 만들어 보십시오. 아마도 꽤 긴 목록이 될 것입니다. 욕구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번식합니다.
인생을 무사히 잘 보내기 위해는 마음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욕구의 망상은 그 에너지를 잠식합니다.
보통 우리는 바르게 살아갈 정도의 정신력조차 없습니다. 그것을 증장시키지 않았고, 그것에 구애받지 않고 망상합니다. 망상하면서 정신적인 에너지를 전부 소모해 버려, 살아갈 힘조차 없어 스트레스만 받습니다. 살아가면서 남는 것은 스트레스뿐입니다. 정신적인 힘이 있으면 스트레스는 없어집니다.
삶이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에게 욕구가 반드시 생깁니다.
욕구는 자연적입니다. 욕구는 누구라도 있습니다.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정하지 않지만 사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한 것을 생각합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좋은 옷을 입고 싶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 보석 등 장신구를 사고 싶다, 여러 가지 욕심이 일어납니다. 괴로움이 그 욕구를 만듭니다.
욕구의 제어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욕구를 제어하고 싶지 않기에 스트레스는 인위적으로 스스로 만듭니다.
망상은 무제한적인 욕구를 일으키기 때문에 우리의 욕구 중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하루 동안 어느 정도의 욕구가 일어나는지, 그 욕구가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는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갖고 싶은 것의 망상의 종류도 스트레스, 망상이 아닌 구체적으로 갖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사회와 관계하는 것도 또한 스트레스가 됩니다. 마음에 욕구가 있는 한 연쇄적인 스트레스가 계속 증가합니다. 증가하는 것만 있고 줄어들지 않습니다.
욕구의 제어 방법
욕구의 종류를 1) 갖고 싶은 것 2) 필요한 것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정합니다.
예를 들어 음식, 약, 거주처 등은 없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것은 빠뜨릴 수 없습니다. 돈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붓다는 「최소한」이라고 하는 한계를 가르쳤습니다. 이 정도는 꼭 필요하다는 최소한을 말하는데, 없어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 최소한도 출가자와 재가자는 다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붓다께서 말씀하신 최소한은 의·식·주·약이라는 빠뜨릴 수 없는 4가지 항목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최소한입니다.
옷은 다만 추위와 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며, 파리와 모기, 비바람과 태양열, 여러 곤충들로부터 몸을 보호하여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수행하기 위해서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음식은 맛을 즐기기 위해서나, 배부르게 먹기 위해서나, 몸을 살찌우기 위해서나, 보기 좋게 가꾸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해치지 않고 이 몸을 유지하여 청정수행을 돕기 위해서 먹는 것이며, 바른 관찰로서 배고픔의 오래된 느낌만 제거하고, 배부름의 새로운 느낌은 일으키지 말아서, 이와 같은 모든 문제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져 계속 평온하게 머물며 수행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거주처는 추위와 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며, 파리와 모기, 비바람과 태양열, 여러 곤충들로부터 몸을 보호하여, 계절의 변화로부터 일어나는 위험을 막아, 한적한 곳에서 수행하기 위해서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의약품은 병들었을 때 고통스런 느낌에서 일어나는 성냄의 해로움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며, 질병에서 오는 진심 등으로부터 벗어난 수행으로 최상의 자유를 이루기 위해서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유명상표의 옷이나 신발이 아니어도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부족하지 않습니다. 호화로운 프랑스 요리를 먹지 않아도 사람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큰 집에 살지 않아도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난 여유로 더 나은 삶의 방법에 도전해야 합니다.
사치스런 것들, 호화롭게 치장한 집은 필요 없다고 최소한의 기준을 정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결정해 둡니다. 그러면 지금 생활이 그 기준보다는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알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스트레스가 되지 않습니다.
길상경에 산뚯티 짜 까딴뉴따(santuṭṭhi ca kataññutā)라는 2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행복하게 되기 위해 필요한 2가지입니다.
까딴뉴따는 분노 부분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산뚯티는 기쁨, 행복이라는 것인데, 여기서의 의미는 얻은 것만으로도 기쁨, 충실감, 만족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지족」이라는 한자가 있는데, 지족이라는 것보다도 기쁨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욕구가 많이 있으면 기뻐할 수 없습니다. 한량없는 욕구, 제한이 없는 욕망을 가지면 행복하게 될 가능성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최소한을 만들어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인정하면 즐거워집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보다 많이 있으면, 욕구의 병은 관리할 수 있는 범위에서 멈춥니다.
그렇게 욕구를 제어해야만 스트레스 없는 밝은 삶의 방법이 됩니다.
분노의 함정
인간은 걸핏하면 화를 냅니다. 그것도 스스로 말입니다. 사는 것은 본래 괴로운 것으로 모든 생명은 항상 불만을 느끼고 있습니다. 살아 있다면 싫은 기분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싫은 기분은 분노의 시원이 됩니다. 그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정하지 않는다고 화냅니다. 이것은 싫다, 저것은 어떻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예를 들어 계단이 있다, 피곤하다, 괴롭다. 그런데 에스컬레이터가 있다고 알면 멀어도 거기까지 걷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노약자 전용이라서 탈 수 없습니다. 싫은 기분이 일어납니다. 저것을 다리가 약한 사람, 힘든 사람, 여성용으로도 사용하게 하면 좋을 건데, 라는 불만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언제라도 싫은 기분이 됩니다. 사는 것은 괴로움, 괴로움이라고 인정하면 아무 일도 없습니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 그것으로 인해 화냄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분노의 시원은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일어나면 어떤 것에라도 화내는 인간이 됩니다. 마치 옆에서 보면 언제라도 불만으로 가득한 귀신 같습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귀신이 되었는지 본인은 모릅니다. 이런 것은 사는 것의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것은 싫다, 저것은 귀찮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점점 더 굳어져서 유연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넓어지는 분노
조심하지 않으면 사람은 간단하게 분노의 함정에 걸립니다. 인간이나 동물 등 살아가는 생명체 각각을 헤아려 보면 마음에 들고, 좋아하고, 우호적이고, 협력적이며, 서로 돕는 것보다 반대의 성질을 가진 비율이 높습니다. 비록 가족이라 해도 하루 종일 좋아하는 환경은 아닐 것입니다. 가족 간에도 싸움을 합니다. 내 주위가 모두 협력할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협력적이지 않을 비율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협조적인 사람이 적기 때문에 쉽게 화낼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런 조건을 보면 더 화내게 되고, 좋은 조건이 되기를 바라는 욕구가 있으면 또 분노가 일어납니다.
욕구의 정도가 분노의 정도를 결정합니다. 욕구가 있으면 있을수록 분노도 큽니다.
후회, 질투, 낙담, 원망, 미움, 부정적, 비판적, 배타적인 분노, 이런 것이 분노임을 바르게 이해하십시오.
분노의 제어
자신의 희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이 세상에서 어떤 경우라도 있을 수 있다고 이해하여 침착해집니다. 어떤 경우라도 있을 수 있는 세상에 적합한 유연성을 키웁니다. 유연하면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협조적이 않은 환경에 거역하면 유연성이 없어서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생명에 대해서 자애를 실천하자
다른 생명들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그 생명들을 원망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애를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싫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신경 쓰이지 않게 되어 스트레스가 없어집니다.
웃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 않다면 연습하는 것이 좋습니다. 웃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편안하기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위기일 때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것은 당연한 삶의 방식입니다.
앞에서 산뚯티를 알아보았으니, 이번에는 길상경의 까딴뉴따(kataññutā)를 봅시다.
까딴뉴따는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빨리어로〔까딴〕은 「갔다」라는 과거분사입니다. 행한 것, 자신에 대해서 「행해진 것」이고, 〔뉴〕는 아는 것, 〔따〕는 성향, 성질입니다. 자신에게 (누군가가) 해 준 일은 잘 알고 있는 성격입니다. 일반적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갑니다. 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알아 지녀야 합니다.
모든 생명은 무수한 생명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부모님의 은혜는 평생을 다해도 다 갚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 것이 의무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은 특별한 도덕심이 아닌 당연한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당연한 삶의 방식을 잊어버리면 원망하고, 분노하며,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원망할 권리는 없습니다. 원망하는 것은 중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평을 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스트레스라는 방사성 폐기물 덩어리를 지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기에 꽁꽁 봉하지 않으면 안 되듯이 불평불만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여 외롭게 됩니다.
붓다께서 【은혜를 잊지 않고 의무를 다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드물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이 드문 자, 감사를 알고,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분노에 관련된 스트레스는 사라집니다.
말해질 때까지, 부탁받을 때까지, 명령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자신의 의무, 해야 할 일을 먼저 실천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닌 자이어야 합니다.
스트레스가 없는 삶을 붓다는 가르쳤습니다.
첫 번째는 먼저 실천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적어도 도와준 것을 기억해 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을 기른다면 스트레스 없는 삶의 방법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은혜를 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선인의 영역이며, 관할이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선인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선인이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감사를 아는 자가 되면 됩니다.
욕구의 스트레스는 마음의 성장을 멈추지만, 분노의 스트레스는 파괴로 이끕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표출하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파괴하려 합니다. 분노가 있는 것을 감추려고 하면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 합니다. 작은 분노의 불씨도 자신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더욱 화내는 무서운 악순환이 됩니다. 분노의 불씨가 생겨나면 불타게 되어 있기 때문에 곧바로 그 불씨를 끄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분노는 방치할 수 없습니다. 욕구의 경우는 완전하게 끊어 주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분노의 경우는 불씨조차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음의 수렁
일반적인 사람은 감정에 지배되고, 남의 말에 현혹되면서, 요리나 청소, 직장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자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인생을 허비해 버립니다.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조차 생각할 여유 없이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체에서 일어나는 감각은 괴로움이지만 괴로움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조사하고 확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각이 경험한 것을 자신이 실재한다고, 확실히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인지 장해가 여기서 또 방해를 합니다. 감각은 순간마다 조건과 원인에 의해 바뀌는 것이고,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흐름인 것을 깨닫지 않습니다. 감각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 곧 바뀐다는 사실조차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가 있다」라는 자아의식은 어리석음이라는 감정이 일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에고라고 하는 착각, 에고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려고 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모두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른 존재를 공격합니다. 또한 다른 존재에 비해서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비참하고 보잘것없다는 것에 화가 일어납니다.
어리석음이 있으면 욕구도 분노도 일어납니다.
지식과 사고는 「나」라는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입증하려고 하는 쓸데없는 노력만큼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입증하려고 하면 할수록 스트레스가 됩니다.
각각의 사람은 에고 덩어리이기에 인간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도 스트레스가 됩니다.
동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불쌍하게도 인간은 여러 존재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에고가 있으면 자신과의 대립이 생기고, 타인과도 대립이 생깁니다. 이것이 스트레스의 샘입니다.
무상, 연기법을 모르는 것도 불교에서는 어리석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어리석음의 제어
감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나」는 감각으로 일어납니다. 감각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일어나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라고 이해하여 알아차립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감각에 대해서 자기 자신, 나, 나의 것, 나의 영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은 흔적도 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감각을 관찰하면 「나」라는 에고가 사라져버립니다. 에고가 없어지면 분노도 욕구도 없어집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수 없는 사람은 자격을 갖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이해력을 키우기 위해 자주 담마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판단 능력을 몸에 지니는 것입니다. 지금은 인지 장해이므로 판단 능력은 없습니다. 지금의 판단 능력은 주관적이며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노력해서 객관적으로 판단을 하고, 주관적 감정 없는 판단 능력을 기릅니다. 붓다가 말한 담마는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스스로 조사하고 관찰합니다. 이렇게 불교를 배우는 것은 일상의 사건을 따라 원인을 찾아내는 습관을 몸에 익히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무리하지 않는 삶의 방법
싫은 일,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게 되면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처음에 설명했습니다.
좋아하는 일만을 할 때도 지루해지고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집착하는 것을 삼가고, 싫은 일로 우울해하거나 배척하려는 것도 삼갑니다.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좋고 싫음 없이 객관적으로 보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면 자신이나 다른 사람도 곤란하게 된다고 이해합니다. 조화를 유지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행복함을 준다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사물을 따라 좋아하고 싫어할 것이 아니라,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행위의 판단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방법은 타인에게 구속될 것도 없고, 나라고 내세울 것도 없고, 낙담할 것도 없고, 의지가 없어질 것도 없고, 죄를 범할 것도 없고, 게으름 피울 것도 없고, 무리를 하지 않고, 충실감을 느끼기에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무리하지 않는 삶의 방법은 적당하게 게으름 피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삶의 방법입니다. 게으름 피우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고, 가치가 있는지, 무의미한지, 유해한지를 판단하여 가치 있는 일만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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