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 (20140925)
「죽음」은 가장 흥미로운 일입니다.
사람마다 흥미의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활, 환경, 생각에 따라 흥미로운 것을 받아들이므로, 각각 흥미 있는 일이 차이가 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상인에게 제일 흥미로운 것이라도, 의사에게는 흥미 없는 것일지 모릅니다. 의사에게 제일 흥미로운 치료법이라도, 학생에게는 흥미 없는 것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상인에게 제일 흥미로운 대상이라도 의사에게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고, 의사에게 제일 흥미로운 대상이라도 학생에게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관계가 없는 것에는 흥미를 가지지 않고, 가졌다고 해도 첫 번째 흥미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관계가 있습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지혜의 있고 없음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관계가 있습니다.
노인뿐만 아니라, 젊은이 아이에게도 관계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연령을 선택하지 않고, 지위를 선택하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관계하기 때문에,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입니다.
세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죽기 전에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출세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죽은 후에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혹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을 기준으로 사람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큼 경사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가치 있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상기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가장 해야 할 일,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효율적으로 행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 「죽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스스로 향상됨이 있고 싶은 사람은 이 질문을 주의 깊게 고찰하며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질문을 무서워하면 진일보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올바르게 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죽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2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죽기 전에」, 다른 하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요소입니다.
「죽기 전에」라는 부분은 (1) 죽음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 (2) 자신에게 틀림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하는 것. (3) 자신의 인생은 윤회의 시간에서 그저 일순간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부분은 죽기 전의 짧은 인생을 소중히 생각하고, (1) 잡다한 일과 중요한 일을 나누어 알아서, 잡다한 일을 되도록 피할 것. (2) 중요한 일은 힘껏 실천해서, 해야 할 일과 할 가치가 있는 일만을 완벽하게 성취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고찰하면 자신이 정말로 이루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서 실천할 수 있게 합니다.
스스로 선택한 일을 최선을 다해 실천할 수 있게 합니다.
적극적인 마음으로, 적극적인 일을, 힘 좋게 전력을 다하여
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죽기 전에만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은 죽기 전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명심해야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신속하게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따뽀다강 옆에 지은 따뽀다 사원(Tapodārāma)에 부처님이 계셨을 때입니다.
사밋디(Samiddhi)라는 젊은 비구가 아침 일찍 일어나 강 옆을 경행하고 있었습니다. 30m정도의 경행장소를 보행하면서 수행하다가 날이 밝아오자 따뽀다강에 목욕하러 갔습니다.
목욕을 끝내고 언덕에 올라 아래가사만을 몸에 걸치고 웃가사는 한쪽 손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서 똑바로 서 있었습니다. 젖은 채로 몸에 가사를 걸치면 냄새도 나고 가사가 바닥에 끌리면 더러워지기 쉬워서 웃가사는 몸에 걸치지 않고 손에 쥐고 서있었습니다.
수행의 영향으로 몸에서는 빛이 나고, 목욕 후의 청결한 모습은 특히 맑고 깨끗했습니다. 상반신에 웃가사를 걸치지 않았기에 남성다운 아름다움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균형 잡히고 용모도 수려한 사밋디의 모습을 본 천녀의 모습을 한 마라가 그 기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하늘에서 말을 걸었습니다.
「아, 사랑스러운 스님!」
「당신은 젊고 용모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왜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을 누리지 않고, 출가자가 되어 수행에 힘쓰고 있습니까? 지금과 같이 젊고 건강할 때는 오욕의 행복을 누려야 하는 것이기에, 출가비구로서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그처럼 출가하여 수행을 하는 동안 오욕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좋은 시기, 좋을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좋을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젊을 때는 오욕의 행복을 마음껏 충분히 누리고, 나이 들고 나서 출가하여 수행하세요.」
그처럼 천녀가 말하자 사밋디 존자는 이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kālaṁ vohaṁ na jānami. 깔-랑 오-항 나 자-나미.”
“channo kālo na dissati. 찬노- 깔-로- 나 딧사띠.”
“tasmā abhūtvā bhikkhami. 따스마- 아부-뜨와- 빅카미.”
“mā maṁ kālo upaccagā. 마- 망 깔-로- 우빳짜가-.”
「천녀여! 당신은 내가 젊기 때문에, 출가하여 수행하지 마세요,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을 누리세요, 나이 들고 나서 출가하여 수행하세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이 죽는 시기를 미리 알지 못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죽고, 젊을 때는 죽지 않는다고 추측할 수 없습니다.」
「나이 들고 나면 수행하고, 젊을 때는 오욕의 행복을 누리라고 말하지만, 나이 먹을 때까지 살지 않고 젊었을 때 죽어 버리면, 출가하여 수행하는 좋은 시기, 좋을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좋은 시기, 좋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좋은 시기, 좋을 기회를 쓸데없는 데 낭비하지 않는 생활을 하려는 결의로 나는 출가하여 수행하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을 누릴 필요 없어, 출가하여 수행하고 있습니다.」
사밋디 존자의 대답을 이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사밋디 존자는 죽음을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때를 선택하지 않기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사밋디 존자는 마음에 단단하게 붙잡고 있습니다.
(2)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출가자가 수행에 힘쓰는 것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자는 정작 중요한 일은 잊어버리고, 잡다한 일에 시간을 쓸데없이 허비합니다.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을 누리며, 악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분명하게 잡다한 일입니다. 잡다한 일은 비록 선한 일을 행한다고 해도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나, 바라는 것을 위해서이므로 시간을 낭비해 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잡다한 일을 행하지 않고 올바르고 중요한 일인 수행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해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그 수행은 한가롭고 가벼운 마음으로 행해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수행을 힘차게, 힘껏, 전심전력으로 실천합니다. 보시, 지계, 선정도 확실히, 신속하게, 제대로 실천합니다. 그래서 잡다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올바르고 중요한 일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항상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라는 생각
(2) 「언제 죽을지 모른다.」라는 생각
이것을 항상 가슴 속 깊이 새기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을 만났을 때 인내력이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을 반드시 체험하게 됩니다.
“labho(이익)”, “alabho(불이익)”-어떤 때는 재산을 얻지만, 어떤 때는 재산을 잃습니다.
“yaso(명예)”, “ayaso(불명예)”-어떤 때는 명예롭게 되지만, 어떤 때는 불명예스럽게 됩니다.
“pasaṁsa(칭찬)”, “ninda(비난)”-어떤 때는 칭찬받지만, 어떤 때는 비난받습니다.
“sukhaṁ(즐거움)”, “dukkhaṁ(괴로움)”-어떤 때는 몸과 마음이 즐겁지만, 어떤 때는 몸과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처럼 인간은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 8가지 가운데 어떤 때는 한 가지만, 어떤 때는 여러 가지를 체험합니다.
행복과 불행을 체험할 때,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일어납니다.
체험할 때에 갑자기 생각하려고 하면, 쉽게 마음이 침착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체험하기 전에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라고 미리미리 생각해 두면, 침착할 수가 있습니다.
「체험하기 전」이라고 말했지만, 정확히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은 매시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뚜렷한 행복한 사건, 분명히 경험하는 불행한 사건을 사람들은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라고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뚜렷한 행복과 불행을 체험하지 않는 동안에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라고 반복해서 거듭거듭 강력하게 생각하면, 실제로 체험했을 때에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행복한 사건도, 불행한 사건도,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좋은 일의 뒤에는 나쁜 일이 일어나듯이, 나쁜 일의 뒤에는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태양은 항상 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사라지고 어둠이 방문합니다. 달도 언제까지나 둥그런 상태로 있을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빠져 사라집니다. 보름달의 날이 있으면 초생달의 날이 있듯이, 인생의 행복과 불행도 그와 같습니다.
「해와 달의 모습을 보아라.
올라오면 가라앉아, 나타나면 사라진다.
가득 차 있다가도 빠져나가 말라버린다.
그와 같이 사람도 예외 없이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불행도 없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에 의해 생기는 용기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행복과 불행을 받아들이는 힘은 죽음에의 끊임없는 관찰을 낳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생에 대해 과도한 소망을 갖지 않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사람은 대체적으로 인생에 대해 소망을 많이 안고 있습니다.
아, 저렇게 되고 싶고, 이렇게 되고 싶다! 저것도 갖고 싶고, 이것도 갖고 싶다!
저것도 손에 넣고 싶고, 이것도 손에 넣고 싶다고 대부분 바랍니다. 또한 자기 자신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과도한 소망을 안고 있습니다. 자신 주위의 사람들이 아,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것을 성취하면 좋겠다! 이것도 시키고 싶고, 저것도 시키고 싶다!
이러한 소망이 인생의 행복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인생의 행복을 파괴해 버리는 소망(예를 들어 명예나 명성 등)이기에, 그 소망이 실현되었을 때에는 탐욕의 마음, 탐욕의 열로 인해 지쳐서 불행하게 됩니다. 자신이 바란 명예나 명성을 손에 넣어도, 슬픔의 마음, 슬픔의 열로 인해 지쳐서 불행하게 됩니다. 지위가 높아지는 것에 따라 고민도 커지고, 유명하게 되는 것에 따라 스트레스도 많아집니다.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소망도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온화합니다. 자신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이 바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소망을 실현해 주지 않을 때에도 스트레스로 괴로워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안온할 수 있습니다. 이 짧은 인생에서 마음을 온화하게 지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당장이라도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생각입니다. 언제 죽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쁜 마음, 게으른 마음, 하등한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좋은 마음, 고상한 마음, 맑고 깨끗한 마음만을 가지고 증장시키려고 합니다.
나쁜 마음, 게으른 마음, 하등한 마음은 번뇌를 말합니다.
번뇌란 마음을 괴롭히고 약해지게 하는 나쁜 마음, 게으른 마음, 하등한 마음입니다.
어떤 번뇌도 좋은 것, 고귀한 것, 맑고 깨끗한 것은 없습니다.
탐욕, 분노, 자만심과 같은 모든 번뇌는 나쁜 것, 썩은 것, 뒤떨어진 것입니다.
수행의 영역, 출세간의 영역에서는 미세한 작은 번뇌조차도 나쁜 것, 썩은 것, 뒤떨어진 것이라고 결정해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몸의 건강함과 아름다움을 마음에 들어 만족할 때도 「이것은 탐욕의 번뇌다. 나쁜 마음, 뒤떨어진 마음, 썩은 마음, 하등한 마음이다」라고 가슴속 깊이 새겨서, 그 마음에 들어 만족한 마음을 알아차려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덥고 추운 불만이 생겼을 때에도 「이것은 분노의 번뇌다. 나쁜 마음, 뒤떨어진 마음, 썩은 마음, 하등한 마음이다」라고 가슴속 깊이 새겨서, 그 불만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수행의 영역, 출세간의 영역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재산을 부당하게 갖고 싶어 하는 탐심, 분명한 이유 없이 폭발해 버리는 분노, 자신의 행복함에 오만하게 되는 자만심, 이러한 것은 나쁜 마음, 뒤떨어진 마음, 썩은 마음, 하등한 마음으로 알아야 합니다.
바르지 않은 말을 하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다른 사람의 이익을 해치려는 번뇌라고 알아야 합니다.
제일 나쁜 것은 악의(issa) 와 인색함(macchariya)이라고 부르는 번뇌입니다.
악의와 인색함이라는 번뇌는 그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나쁜 마음, 뒤떨어진 마음, 썩은 마음, 하등한 마음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악의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충족감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한 모습, 밝고 행복한 상태를 보면 참지 못하고, 부러워하고 샘을 내기에 무의미하게 불타는 번뇌의 불입니다.
인색함이라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과 같이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되고, 밝고 행복하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구두쇠적인 성향이기에 이것도 무의미하게 불타는 번뇌의 불입니다.
악의와 인색함, 이 2개의 번뇌는 자신에게도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쁜 결과를 주고, 다만 무의미하게 마음을 태우는 투박한 불입니다.
이러한 악의와 인색함 등의 나쁜 마음, 뒤떨어진 마음, 썩은 마음, 하등한 마음이 생길 기회를 만드는 것은 죽음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죽지 않고, 다른 사람도 죽지 않는다고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나쁜 마음, 뒤떨어진 마음, 썩은 마음, 하등한 마음을 계속 가져 버립니다.
자신은 언제 죽을지 모르고, 다른 사람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으면 나쁜 마음, 뒤떨어진 마음, 썩은 마음, 하등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없어집니다. 알아차림을 잊어버려서 그러한 나쁜 마음이 생겨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라는 생각이 미치면 곧바로 사라져 버립니다.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이 1분 후에 죽는다는 것이 뚜렷하다면, 그 사람에게 미움이 일어날까요? 1분 후에 자신이 죽는다는 것이 뚜렷하다면, 얄미운 상대를 미움의 마음으로 생각할까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수행하려는 마음이 끊임없이 계속해 생기도록 노력합니다.
수행하려는 마음을 끊임없이 생기게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얻고 바라는 닙바나는 도의 마음이 생겨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도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도의 마음에 앞서 수행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안 됩니다.
열심히 집중한 수행하려는 마음을 없애지 않게 해야만, 강력하고 성숙한 마음이 생깁니다.
열심히 집중한 수행하려는 마음을 없애지 않게 하려면, 앉고 걷고 할 때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사소한 동작을 행할 때도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반복하여야만 강력하고 성숙한 마음이 항상 생기고, 계속하여 도의 마음이 생겨 자신이 바라는 닙바나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수행하는 사람의 최대의 책임은 수행하는 마음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생기게 노력하는 것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매순간 수행하려는 마음이 생기도록 노력합니다. 알아차림이 따르게 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면, 그것과 동시에 현재의 뚜렷한 감각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아, 몸이 뚜렷하면 몸, 마음이 뚜렷하면 마음에 곧바로 알아차림이 따르게 됩니다. 적어도 호흡이 접촉하는 장소인 콧구멍이나 배의 한곳에 알아차림이 따르는 것은 확실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도, 현재 걸어가고 있거나, 현재 행하는 것을 알기에 알아차림은 따를 것입니다.
1분 후에 죽어 버린다고 송곳과 같이 알고 있는 사람이 만약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려고 할까요? 오욕의 감각에 집중해서 그러한 욕구의 마음으로 행할까요? 악한 행위, 나쁜 마음에 집중할까요? 현재의 대상으로 일어나는 감각에 집중해서 수행하는 마음으로 있을까요? 대답은 뚜렷합니다. 수행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유지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라는 죽음의 진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죽음을 항상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정말로 실천해야 할 일을 잊지 않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이야기해야 할 말도 잊지 않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생각해야 할 사유도 잊지 않습니다.
잊지 않는 것을 불방일(압빠마-다, appamāda)이라고 부릅니다.
불방일을 갖춘 사람은 인생의 행복과 불행에 인내하는 힘이 있습니다.
인생을 파괴하는 것을 억제할 수가 있습니다.
나쁜 마음, 뒤떨어진 마음을 피하고, 좋은 마음, 고귀한 마음만을 증장시킬 수가 있습니다.
수행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생기도록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죽음을 항상 생각하면 생에 대해서도 항상 주의 깊어집니다.
죽음을 잊지 않으면 생도 잊지 않습니다.
“maraṇasatiṁ anuyutto samaṇo. 마라나사띵 아누윳또- 사마노.”
“sātataṁ appamātto hoti. 사-따땅 압빠맛-또- 호-띠.”
“죽음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수행자는 언제나 실천 수행한다.”
"결코 방일하지 않아 알아차림을 잊지 않는다.”
죽음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을 마라나사띠(maraṇasati, 死隨念)라고 부릅니다.
알아차림을 잊지 않고 수행하는 것을 불방일(appamāda)이라고 부릅니다.
닙바나는 죽음이 없으므로 불사(amata, 不死)라고 부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불방일로 채워집니다.
불방일로 채워진 사람은 불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불방일은 불사를 얻기 위한 하나의 요인입니다.
불사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은 사람은 불방일합니다.
불방일로 채워지기 위해서는 죽음을 반복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kālaṁ vohaṁ na jānami. 깔-랑 오-항 나 자-나미.”
「언제 죽을지 모른다.」
죽는 시기를 모른다는 것은 분명히 모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대체로 추측하여 그 나름대로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건강 상태나, 영양분 등의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는지 판단하여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는 모릅니다.
아직 죽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고 해도, 생각하지 못한 이유로 죽는 일도 있습니다. 아직 죽을 시기가 아닌 줄 알았는데, 사고나 화재 등으로 돌연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음은 그 사람의 연령도 고려하지 않고, 모습이나 아름다움도 배려하지 않습니다. 잔혹해서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의욕이 있는 동안에 수행한다면, 사는 일도 죽는 일도 좋은 일이 됩니다. 늙어서 수행하려고 젊었을 때 수행하지 않고 세상 오종 욕구의 행복으로 살든 사람이 나이를 먹을 때까지 살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면 손해겠지요.
실제로 수행은 젊었을 때 하는 편이 좋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체력, 지력, 기력이 다해 가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한 만큼 수행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의지도 약해지고, 몸도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수행에 힘을 낼 수 없습니다.
젊었을 때에 수행하면 체력, 지력, 기력도 날카롭기 때문에 나이를 먹고 나서의 수행보다 진보가 훨씬 빠릅니다. 그래서 특별한 법, 고귀한 법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20세부터 40세까지의 사이가 최상입니다. 조금 더 넓힌다면 10세부터 50세의 사이까지가 좋은 조건입니다. 50이 넘으면 너무 늦습니다.
수행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대상에 강력하게 집중할 힘이 있을 때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만나기 어려운 불교를 만났는데, 세속적인 오욕락을 바라면서 수행은 뒷전으로 한다면 지혜가 적은 세계에 계속 머물지도 모릅니다. 미리 준비해 두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죽기 전에 생기는 후회는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수행법을 알았을 때 세속의 일도 행하면서 동시에 수행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수행법을 알았으면 지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죽는 시기는 미리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진실합니다.
알 수 없는 것은 시기만이 아닙니다.
죽음에 관련하여 파악할 수 없는 5가지가 있습니다.
(1) “jīvita. 지-위따.”
몇 살에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살아가는 생명체는 몇 살까지 살지, 몇 살이 되면 죽는다고 결정된 것은 없습니다.
태내에서도 죽을 수 있고, 배아기, 해면기, 골격이 생기는 시기 등 여러 시기에 죽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태어나도, 1시간, 2시간, 며칠 만에, 1년, 몇십 년 등 어떤 연령에서도 죽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람을 포함한 중생들은 자신이 몇 살에 죽는지 미리 알 수 없습니다.
(2) “byādhi. 브야-디.”
어떤 병으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생명은 어떤 병으로 죽는다고 결정된 것은 없습니다. 눈병으로 죽는 일도 있고, 몸에 관한 병, 마음에 관한 병 등 여러 병으로 죽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의 병뿐만 아니라, 복수의 병으로 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각각 죽음에 이르는 병은 같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병으로 죽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사람을 포함한 중생들은 자신이 어느 병으로 죽을지, 자신이 죽을 때는 어느 병에 걸릴지 미리 알 수 없습니다.
(3) “kāla. 깔-라”
죽는 시기를 알 수 없습니다.
생명은 오전 중에 죽을지, 다른 시간에는 죽지 않는다고 결정된 것은 없습니다. 오전 중에도 죽고, 오후, 저녁, 한밤중에도 죽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죽는 일도 있고, 물을 마시면서, 예배하면서, 신문을 읽으면서 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도 죽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포함한 중생들은 자신이 어느 시기에 죽는지 미리 알 수 없습니다.
(4) “dehanikkhepana. 데-하닉케-빠나.”
죽은 후 자신의 시체가 어디에 버려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생명은 죽은 후의 시체를 어느 특정한 장소에 버릴 것이라고 결정된 것은 없습니다. 수상에서 태어난 사람의 시체를 언덕 위에 버릴지, 언덕 위에서 태어난 사람의 시체를 물속에 버릴지,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의 시체를 마을에 버릴지,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의 시체를 숲에 버릴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죽은 몸을 죽고 나서 어느 장소에 버릴지 모릅니다. 어떤 장소, 어떤 묘지에도 시체는 버릴 수 있기에 사람을 포함한 중생들은 자신이 죽으면 시체를 어디에 버릴지 미리 알 수 없습니다.
(5) “gati. 가띠.”
죽은 후 어느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지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생명은 죽은 후에 태어날 장소를 미리 한정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도 있고, 천상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지옥이나 아귀, 축생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천인이 죽으면 또 다시 천인으로 태어난다고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아라한 이외의 중생들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이라는 6종류의 어딘가에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사람을 포함한 중생들은 죽은 후에 자신이 어느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지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죽음에 관련하여 파악할 수 없는 5가지가 있습니다.
(1) 몇 살에 죽는가?
(2) 무슨 병으로 죽는가?
(3) 언제 죽는가?
(4) 죽은 후 시체를 어디에 버리는가?
(5) 죽은 후 어디에 태어나는가?
이 5가지는 인간을 포함한 중생들은 알 수 없습니다.
이 5종류의 무지가 중생들을 들볶고 있습니다.
「중생들」이라는 것은 일반적 대다수를 일괄해 부르는 것이지만, 소수의 신통력을 가진 사람들, 강한 법력을 지닌 자들은 이 5종류의 무지에 대해서 미리 알 수도 있습니다. 특히 수행을 완성시킨 수행자는 자신이 죽는 시기를 미리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4가지 항목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압니다.
적어도 예류자가 된 사람은 「내가 죽으면 악업의 업보로 사후에 4악처로 가는 일은 이제 없다. 인간, 천상, 범천의 3선처로 갈 것이다」라고 확실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3선처라고 해도 수없이 있기 때문에 어느 선처의 생으로 태어나는지 분명하게 아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5종류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기 때문에 예외로서 생략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중생들은 이 5가지 항목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이렇게 5개의 무지를 지닌 채 살아가는 생이라고 이해했다면, 쉽게 자만심을 일으키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jīvitaṁ byādhi kālo ca. 지-위땅 브야-디 깔-로- 짜”
“dehanikkhepanaṁ gati. 데-하닉케-빠낭 가띠.”
“pañce jīvalokasmiṁ. 빤쩨- 지-왈로-까스밍.”
“animitta na ñāyare. 아니밋따 나 냐-야레-.”
사밋디 존자는 「나는 죽는 시기를 미리 모르기 때문에,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을 누리지 않고, 출가하여 수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죽는 시기를 모르는 사람 전부가 출가하여 수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조건에 근거한 견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아는 것은 같지만, 개인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사고방식은 다릅니다.
사고방식이 다르면, 견해도 다릅니다.
견해가 다르면, 목표도 다릅니다.
목표가 다르면, 행위도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천녀와 사밋디 존자의 견해를 비교해 보면 압니다.
천녀의 견해는 「죽기 전에 행해야 할 일, 실천할 가치 있는 일이란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밋디 존자의 견해는 「죽기 전에 행해야 할 일, 실천할 가치 있는 일이란 수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일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같이 알고 있지만, 각각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사고방식이나 견해도 다릅니다.
사고방식이나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목표나 행동도 다릅니다.
욕애(慾愛)의 조건, 번뇌의 조건이 강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 인생이다. 오욕을 누리기 위한 일이 인생의 본래 일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출리(出離)의 조건, 바라밀의 조건이 강한 사람은 「죽기 전에 법의 행복, 닙바나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 인생이다. 법의 행복, 닙바나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보시, 지계, 선정, 수행이라는 선행을 하는데 힘쓰는 것이 인생의 본래 일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천녀와 같은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여럿이라고 하는 것보다, 최대수라고 말하면 보다 정확하겠지요.
이전에 한사람에게 수행하도록 권했던 적이 있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수행 센터에 가거나, 특별히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걸으면서, 일을 하면서, 앉아서, 이야기하면서도, 알아차림을 일어나게 하여 실천하면 수행이 됩니다. 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아도 수행할 수 있습니다.」라면서 수행의 방식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스님, 저에게 수행을 권하지 마세요. 수행하면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나는 아직 젊어서 수행할 때가 아닙니다. 오욕의 행복을 누리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손에 넣기 어려운 인간의 생을 살고 있기에 오욕락을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처럼 천녀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은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사밋디 존자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 그리고 그 견해대로 실제로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천녀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은 「출가하여 수행을 하는 것, 위빳사나를 행하는 것, 선행을 실천하는 것은 다음 세상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 곧바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을 사밋디 존자의 대답에 근거해서 생각해 봅시다.
“kālika kāma bahudukkha bahupāyāsa. 깔-리까 까-마 바후둑카 바후빠-야-사.”
“ādīnavo ettha bhiyyo. 아-디-나오- 엣-타 비이요-.”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은 시간을 들여 준비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이익을 얻을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깔리까의 행복입니다.
괴로워하고, 피곤함이 막대합니다.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에는 결점이 매우 많습니다.
“akāliko ayaṁ dhammo. 아깔-리꼬- 아양 담모-.”
출세간의 법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 곧바로 누릴 수가 있기 때문에 아깔리까의 행복입니다.
오욕의 행복은 깔리까의 행복이고, 출세간의 법은 아깔리까의 행복입니다.
법의 6덕 가운데 “akāliko”라는 덕이 있습니다.
“akāliko”는 시간을 들이지 않고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출세간의 법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곧바로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로 닙바나에 이르는 길을 가리킵니다.
도의 마음이 생겼다면, 사이를 두지 않고 곧바로 과의 마음이 생깁니다.
도의 마음과 과의 마음의 사이에 다른 마음이 생기는, 간격이 있는, 다른 마음이 생겨날 시간이 지나는 등의 사이를 두지 않습니다.
도의 마음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곧바로 과의 마음이 생깁니다.
도의 마음은 과의 마음이라는 결과를 곧바로 줍니다.
과의 마음이라는 이익을 얻으면 어떻게 될까요?
결코 망가지지 않는 행복, 비교할 수 없는 행복, 최상의 행복, 닙바나의 행복을 누립니다.
도의 마음은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아깔리까의 법이지만, 그 도의 마음은 보통으로 살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생기고 나야 얻을 수 있습니다. 수행하는 마음 없이는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도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정말로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수행입니다. 때를 기다리지 않고 이익을 주는 도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실천하는 수행도 아깔리까의 법입니다.
수행하는 것은 아깔리까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은 비록 알아차림을 잊고 있다가도, 수행의 행복을 누리고 싶어지면 자신의 마음을 몸(대상)으로 향하게 되어 곧바로 수행의 행복은 뚜렷해집니다. 수행하는 것도 행복의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만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도 행복의 하나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행복을 요약해 보면 7종류가 있습니다.
(1) 사람의 오욕의 행복
(2) 천인의 오욕의 행복
(3) 선정의 행복
(4) 위빳사나 수행의 행복
(5) 도의 행복
(6) 과의 행복
(7) 닙바나의 행복, 이 7종류입니다.
이 7종류의 행복 중에서 사람의 오욕의 행복보다 천인의 오욕의 행복이 보다 높고 행복합니다. 천인의 오욕의 행복보다 선정의 행복이, 선정의 행복보다 위빳사나 수행의 행복이, 위빳사나의 행복보다 도의 행복이, 도의 행복보다 과의 행복이, 과의 행복보다 닙바나의 행복이 보다 높고 행복합니다.
이 7종류의 행복 중에서 위빳사나 수행의 행복은 선정의 행복보다, 천인의 오욕의 행복보다 고귀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정말로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은 위빳사나의 마음이나 위빳사나의 지혜가 자신에게 생겼을 때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깊을지 자각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의 행복을 손에 넣을 기회를 만났으면서, 천인의 오욕의 행복, 사람의 오욕의 행복만을 바라고 강렬하게 집착해서 꽉 쥐고 있다면 지혜롭지 못합니다.
수행과 결합한 보시, 지계, 선정의 일도 또한 아깔리까의 일입니다.
보시의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보시할 때마다 마음의 행복, 마음의 평안을 곧바로 얻을 수 있습니다. 기쁨이 늘어나기에 보시의 이익도 이 세상에서 곧바로 누릴 수가 있습니다.
지계의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의 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마음의 행복, 마음의 평안을 곧바로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계를 유지할 때마다 기쁨은 증대하여 지계의 이익도 이 세상에서 곧바로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팔계를 지키는 사람이 오후에 배가 고파 계를 파하고 식사한다면 배는 부를지 모르지만 기쁨은 얻을 수 없습니다. 배가 고픈 일, 식사하고 싶은 것을 참고 계를 어기지 않는 사람은 배는 차지 않겠지만 그 기쁨은 크고 가득하게 됩니다.
자신이 계를 지키는 것에 만족하기에 기쁨의 힘이 늘어나서 공복감도 없어집니다. 선정의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수행의 대상을 오롯이 생각하여 마음의 행복, 마음의 평안을 곧바로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붓다의 덕을 떠올리는 사람은 일상적인 일로 피곤해도 「아라한, 번뇌를 완전하게 없애버린 부처님」이라는데 생각이 미치면 몸도 마음도 편해집니다. 온화하고 행복하게 됩니다.
자비의 수행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고민이 있어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이라는데 생각이 미치면 동시에 고민하던 일도 사라지고 곧바로 몸도 마음도 편해집니다.
그래서 보시의 일, 지계의 일, 선정의 일, 수행의 일, 이 4가지 일은 때를 두지 않고 곧바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아깔리까의 일입니다.
어느 일도 바라밀을 성취하기 위해서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재산에 대한 소망, 다음 세상에서의 이익에 대한 소망을 놓아두고, 닙바나의 행복에 대한 소망과 이익을 바라는 마음을 우선시킨다면, 실천하는 일 모두가 바라밀을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밀을 성취하는 일도 현재의 행복이 되는 아깔리까의 일입니다.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은 깔리까의 행복입니다. 아깔리까의 행복은 시간을 두지 않고 얻을 수 있는데 반해, 깔리까의 행복은 시간을 들여야 하고 시간을 기다려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속의 오욕이라고 하는 것은(1) 색 (2) 성 (3) 향 (4) 미 (5) 촉의 5종류입니다.
예를 들어 밥맛이라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긴 시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은 시간을 두어야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깔리까의 법입니다. 충분히 준비하지 않으면 얻지 못합니다. 이익을 얻을 수 있어도 그로 인해 매우 지치게 됩니다.
깔리까, 아깔리까의 구별에 대해 다르게 말하면 「죽음을 넘을 수 있는 행복은 아깔리까의 행복, 죽음을 넘을 수 없는 행복은 깔리까의 행복」이 됩니다.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은 죽음을 넘을 수 없는 행복입니다.
죽음을 넘는다는 것은 닙바나를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오욕의 향락에서는 죽음을 넘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욕의 감각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죽는다면 악업의 업보로 사후에 4악처 밖에 갈 곳이 없습니다. 오욕의 감각을 구하려고 악행을 하거나 불법 행위로 생계를 영위한다면 악업의 업력으로 사후에 가는 4악처에서 그 행동에 대한 괴로움의 의무를 변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욕의 행복은 죽음을 넘을 수 없는 행복합니다. 그 때문에 죽음을 넘을 수 없는 일,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일이라고 합니다.
위빳사나의 행복, 도와 과의 행복은 죽음을 넘을 수 있는 행복입니다.
아라한도, 아라한과를 성취하여 아라한자가 되었다면, 이생에서 밖에 죽을 일은 없습니다. 다음 세상으로 다음의 육체가 새롭게 생길 일은 없기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됩니다. 이제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생존과 육체가 있기 때문에 죽습니다.
생존과 육체라고 하는 싹은 선행의 업, 악행의 업이라고 하는 의도(cetana)라는 종자에 갈애라는 습기나 양분이 있기 때문에 싹이 틉니다.
의도라는 종자에 들러붙고 있는 갈애의 습기를 아라한도의 불로 건조시키고 태우기 때문에 의도의 종자에 갈애가 붙지 않아 이제 더이상 생존과 육체라는 싹이 틀 수 없습니다. 싹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는 죽을 일이 없게 됩니다.
예류자를 비롯한 아라한보다 아래의 성인들은 성인이지만 새로운 생을 일정기간 반복하므로 그들도 아직 죽음을 완전하게 넘어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에는 단락 지어지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들을 「이제 죽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도의 마음이 생기면 죽음을 넘을 수가 있습니다.
도의 마음은 위빳사나의 마음이 생겨 무르익으면 생깁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은 죽음을 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도 또한 아깔리까의 행복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이 죽음을 넘는 일이듯이, 위빳사나와 함께하는 보시, 지계, 사마타도 닙바나를 목표로 한다면 죽음을 넘는 일이 됩니다.
세속적인 오욕의 행복은 망가져 버리는 행복입니다.
출세간의 행복은 결코 망가지지 않는 행복입니다.
한 번 맛본 오욕의 감각이 망가지지 않고 쭉 안정되게 계속되는 법은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누릴 뿐 반드시 소멸됩니다. 소멸하게 되므로 다시 찾아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돈을 한 번 벌고 나면 일생 없어지지 않으므로 이제 일할 필요가 없어 한가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 구해서 손에 넣고, 손에 넣어 사용하고, 사용하면 없어지고, 없어지므로 다시 찾아 구하고, 이 윤회는 끝나지 않습니다. 찾아 손에 넣은 것의 모든 것들은 없어지므로 다시 찾고 또 찾는 상태가 됩니다.
소멸하게 되어있는 오욕의 행복을 위해 행하고 있는 일도 또한 소멸하는 일입니다.
소멸하는 행복을 위해서 소멸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의 마음은 한 번 생겼다면 소멸하지 않습니다. 예류자가 된 사람이 퇴보해 버려서, 예류도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 다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스러운 도와 과, 닙바나는 결코 소멸하지 않습니다.
성스러운 도와 과, 닙바나의 행복은 절대로 소멸하지 않는 행복입니다.
성스러운 도와 과를 얻은 사람도 소멸하는 명색행(nāmarūpasaṅkhāra, 名色行)의 성질대로 생기거나 멸하거나 합니다.
도와 과를 얻은 사람이 죽을 때는 소멸합니다.
그러나 선정을 얻은 사람은 선정에서 나오면 퇴보할 수 있지만, 성스러운 도와 과를 얻은 사람의 도과의 진행 정도가 퇴보하는 일은 없습니다. 결코 소멸할 수가 없는 닙바나의 행복을 깨달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도와 과의 법, 도와 과의 행복을 아깔리까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결코 소멸할 수가 없는 행복은 닙바나의 행복입니다.
닙바나의 행복은 무엇으로도 절대로 망가질 수가 없습니다. 영구히 계속된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깊게 생각해 보면, 닙바나의 행복만큼 바라는 것에 적합한 행복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닙바나의 행복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코 소멸할 수가 없는 닙바나의 행복을 위해서 실천하고 있는 위빳사나 수행은 아깔리까의 일입니다. 위빳사나와 함께 행하는 보시, 지계, 선정의 일도 닙바나를 목표로 한다면 아깔리까의 일입니다.
소멸하는 행복을 위해서 하는 일은 우리의 본업이 아닙니다.
소멸하지 않는 행복을 위해서 하는 일이 본업입니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죽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이 나옵니다.
자기 자신이 죽는 성질, 소멸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죽는 성질의 것, 소멸하는 성질의 것만을 찾아 구한다면, 그것은 비천하고 낮은 단계의 것만을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넘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죽는 성질, 소멸하는 성질이 있어도,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는 성질, 소멸로부터 멀어지는 성질을 찾아 구한다면, 그것은 고귀하고 높은 단계의 것을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넘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죽어 버리고 싶다」 「빨리 죽을 수 있다면 편할 것이다」 등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정말로 죽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하는 이익이 있다면, 모두 그것을 갖고 싶어 할 것입니다.
죽는 것이 무서운 사람들을 위해서 결코 죽지 않는 방법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죽고 싶지 않으면 호흡하십시오!」 입니다.
「죽고 싶지 않으면 호흡하십시오!」라는 말은 이 육체를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호흡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생명, 이 육체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습니다.
결코 죽지 않기 위해, 죽는 성질의 것을 손에 넣지 않기 위해, 죽음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되도록 하기 위해 호흡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코 죽지 않는 경지는 닙바나입니다.
완전하게 깨달아 닙바나에 이르면, 이제 결코 죽지 않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생명과 육체가 있기 때문에 죽습니다. 닙바나에는 생명도 육체도 결코 없습니다. 다만 이생에서의 육체적인 소멸만이 있을 뿐입니다. 더 이상의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는 행복만큼 행복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부터 멀어진 닙바나는 세상을 뛰어넘은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닙바나 인간을 초월한 법입니다(uttarimanussa dhamma).
모든 행복의 정점, 비교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지혜가 아직 부족한 사람들은 「생명과 육체가 없으면 행복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지만, 육체가 있는 행복보다 육체가 없는 행복 쪽이 몇십 배 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상하고 강력합니다.
몸과 마음이란 5온은 괴로움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 모든 몸과 마음이란 5온의 끝은 죽음인 것을 깊게 이해하고 있다면 닙바나란 불사의 행복을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닙바나라고 하는 불사의 행복을 얻고 싶다면, 죽고 싶지 않다면, 호흡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호흡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것은 호흡하는 줄을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집중해서, 알아차림을 가지고, 분명하게 알면서 하는 호흡, 노력을 동반한 호흡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호흡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은 「알아차림과 지혜를 지니고 호흡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알아차리며 호흡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심해서 주의 깊게 호흡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주의 깊게 알아차리며 호흡한다는 것은,
호흡할 때 콧구멍의 앞, 혹은 윗입술의 인중부분 숨이 닿는 곳에 알아차림을 두고, 들이쉬면 「들이쉼」, 내쉬면 「내~쉼」이라고 분명히 알아차리며 호흡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숨이 들어올 때는 코끝을 접촉하며 들어옵니다.
접촉하는 장소에 마음을 두고, 「들이쉼」이라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안에 들어온 숨의 뒤를 쫓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가면 마음은 헤매어 버립니다.
숨이 나올 때는 코끝을 접촉하며 나옵니다.
접촉하는 장소에 마음을 두고, 「내~쉼」이라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밖에 나온 숨의 뒤를 쫓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가면 마음은 헤매어 버립니다.
숨이 들어올 때도, 나올 때도, 숨이 닿는 한 장소에만 마음을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숨을 따라 뱃속이나 허공으로 마음을 따라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콧구멍 앞의 인중 한 지점에만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올바르게 주시하며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들이쉬는 숨은 들어오는 대로 코끝에 접촉하기에 이를 주의 깊게 알아차리며 들이쉰다고 분명하게 안다. 내쉬는 숨은 나오는 대로 코끝에 접촉하기에 이를 주의 깊게 알아차리며 내쉰다고 분명하게 안다.」
이것이 수행법의 요점입니다.
사띠(알아차림)를 가지고 호흡하는 것이 아-나-빠-나·사띠빳타-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나」는 들이쉬는 숨, 「아빠-나」는 내쉬는 숨, 이런 들숨과 날숨을 「사띠(알아차림)」를 가지고 호흡하는 수행을 아나빠나사띠 수행이라고 부릅니다.
호흡은 앉아 있을 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걷거나 서거나 누워 있거나 할 경우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나빠나 수행은 앉아있으면서 실천하는 것과 같이, 걸으면서, 서있으면서, 누워있으면서도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수행시간을 만들어 수행한다면, 고요히 앉아 들이쉬면 「들이쉼」, 내쉬면 「내~쉼」이라고 분명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걸으면서, 일하면서, 말하면서, 먹고 마시면서 수행할 때는, 그 행위를 대상으로 「왼발」「오른발」, 또는「구부림」「폄」, 또는「말함」「먹음」이라고 알아차려야 하기에, 「들이쉼」「내~쉼」 등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숨이 들어오고 나갈 때 코끝에 닿는 느낌만을 알아차리고 있다면 충분합니다.
항상 하고 있는 호흡을 항상 알아차리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호흡하고 있기에 숨을 쉴 때마다 알아차림을 유지하면서 호흡한다면, 호흡을 하고 있는 동안 마음의 행복과 고요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호흡의 알아차림을 지속해나가면 특별하고 고귀한 법을 손에 넣게 되어 죽음을 완전하게 넘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죽고 싶지 않으면 호흡하십시오.
행복하게 되고 싶으면 호흡하십시오.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고 싶으면 호흡하십시오.
세상의 행복을 완벽하게 누리고 싶으면 호흡하십시오.
닙바나라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이 세상에서 빠른 시간에 깨닫고 싶으면 호흡하십시오.
아나빠나 수행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양면을 가지는 수행법입니다.
들고나는 호흡만을 알아차리면 사마타 수행이 되고, 들고나는 호흡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리면 위빳사나 수행이 됩니다.
호흡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여 니밋타라는 모양·형태를 알아차리면 사마타가 됩니다.
호흡을 끝까지 따라가지 않고, 호흡이 접촉하는 코끝의 한 지점에 마음을 두고, 접촉하며 일어나는 느낌들인 흔들림, 반발력, 움직임이라는 여러 느낌들에서 무상·고·무아의 특상을 분명히 알아차리면 위빳사나가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닦고 익히면 사념처가 원만해지고, 사념처 수행을 닦고 익히면 칠각지가 원만해지고, 칠각지가 원만해지면 아라한과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아라한까지 이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선인들은 호흡수행은 닙바나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스승님은 호흡수행을 「절대왕정적인 수행」이라고까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아나빠나 호흡수행은 정자각자의 붓다들이 항상 좋아한 수행법입니다.
어떤 붓다들도 호흡수행을 주요한 수행법으로서 힘써서 붓다가 되었습니다.
다른 수행법으로 깨달은 붓다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현대에도 없고, 미래에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호흡수행이 얼마나 고귀하고 우수한가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들이쉰 숨이 다시 나오지 않을 때, 내쉰 숨이 다시 들어오지 않을 때라고 하는 것은 죽어 있을 때입니다.
몸과 마음인 5온이 생존, 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호흡은 중요합니다.
숨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므로, 그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수행자에게는 「대동맥과 같은 불가결의 수행법」입니다.
호흡에서 몸과 마음의 성질을 파악할 수 있다면, 모든 몸과 마음의 성질도 알게 되므로, 호흡수행을 「고찰이 가능한 수행법」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호흡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언제든지 존재하기 때문에 알아차림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수행법은 이것이다」라고 결정해 수행하는 것으로 최선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콧구멍의 전면이나 배의 한 지점, 즉 호흡이 접촉하는 장소에 알아차림을 두고 위빳사나 수행방법으로 수행해서 아라한과를 얻었다면 죽음을 완전하게 넘습니다.
호흡수행은 가장 빠른 속도로 아라한이 되게 해 주는 진정한 위빳사나 수행법이라고 완전하게 믿고 노력해 수행하는 것을 강하게 추천합니다.
계속적으로 호흡을 수행한다면 일에 대해서도 지치지 않고, 마음은 행복하며, 삼매를 경험하여, 지혜가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도 걸리지 않고, 사람도 지치지 않고, 돈도 들이지 않는, 매우 이익이 있는 수행법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 소원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전의 1시간보다 지금의 1시간이 보다 행복하게 되는 인생을 모두 가지고 싶어 합니다. 모든 불행과 고민을 완전하게 피해서, 마음이 행복하고, 마음이 온화한 인생을 존속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알아차릴 대상을 알아차리며 사는 방법입니다.
알아차릴 대상은 지금 일어난 대상입니다.
마음이 일어났으면 그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마음)이 일어났는데 그 생각(마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호흡(몸)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알아차림을 두어야 할 대상을 바르게 알아차리는 방법으로 사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완전한 마음의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띠빳타나(念處, 念住)의 방법으로 얻은 마음의 행복은 완전한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사띠빳타나의 법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마음의 행복은 「나, 나의 것」이라는 집착으로부터 일어나는 괴로움으로부터 멀어져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위빳사나 수행방법은 사띠(알아차림)를 두어야 할 대상에, 사띠를 확립시켜, 사띠를 선두에 세워서 실천하는 수행이므로 사띠빳타나 수행법이라고 부릅니다.
사띠빳타나 수행법은 동작을 선택하지 않고, 장소를 선택하지 않고, 자세를 선택하지 않고,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을 가장 짧고 가장 완벽하게 가리키는 게송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생겨난 순간,
생겨난 그대로를 반드시 안다.
동작, 장소, 자세,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립니다.
몸과 마음, 즉 몸과 마음의 행위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이 뚜렷하면 마음, 몸이 뚜렷하면 몸, 가장 분명한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부러 몸의 현상인 호흡만을 알아차리려고 하고, 다른 마음의 현상이 일어났는데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마음만을 알아차린다고 결정해서 마음만을 알아차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부러 몸만을, 마음만을 알아차리려고 하면 바른 법을 얻지 못하고, 도와 과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몸의 2가지 혹은 3가지 현상을 동시에 함께 알아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뚜렷한 한 가지만을 알아차렸다면,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 아는 일도 스스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알아차릴 몸과 마음도 이미 생겨난 과거의 몸과 마음이나 아직 생기지 않은 미래의 몸과 마음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생겨난 순간」이라는 말대로 지금 확실히 일어난 현재의 몸과 마음만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거의 몸과 마음은 이미 끝나버려 현재 있지도 않습니다.
미래의 몸과 마음도 아직 생기지 않은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는 올바른 위빳사나의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bhūtaṁ bhūtato passati(부-땅 부-따또- 빳사띠)” 라고 하듯이, 현재 분명히 생겨난 몸과 마음을, 그 생겨난 순간에 알아차려야만 올바른 위빳사나의 지혜가 생깁니다.
「생겨난 그대로」라는 말은 위빳사나 수행의 방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이라는 것은 경전이나 아비담마의 경구들, 불탑이나 불상의 모습을 특별히 기억하며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처럼 기억하고 알아차렸다면 suta maya ñāṇa(聞所成, 들어서 안 지혜), diṭṭha maya ñāṇa(思所成, 생각해서 안 지혜)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bhāvanā maya ñāṇa(修所成, 실천해서 깨달은 지혜)는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 일어난 몸의 행위(색), 마음의 행위(명)를 생겨난 그대로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걷고 있으면 「걸음」, 멈춰 서면 「멈춤」, 앉으면 「앉음」, 가로막히면 「가로막힘」, 굽히면 「굽힘」, 늘리면 「늘림」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gacchanto vā “gacchāmī”ti pajānāti” 「걸어가면서는 “걸어감”이라고 분명하게 안다」, “ṭhito vā “ṭhitomhī”ti pajānāti” 「서있을 때는 “서있음”이라고 분명하게 안다」, “nisinno vā “nisinnomhī”ti pajānāti” 「앉아있을 때는 “앉아있음”이라고 분명하게 안다」, “sayāno vā “sayānomhī”ti pajānāti” 「누우면서는 “눕고있음”이라고 분명하게 안다」라고, 몸이 향하고 있는 상태에 따라 그것을 분명하게 알라고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수행법입니다.
마음의 행위에서 무엇인가를 갖고 싶다면 「갖고 싶어함」, 바라고 있으면 「바라고 있음」, 화나 있으면 「화나 있음」, 생각하고 있으면 「생각하고 있음」, 질리고 있으면 「질리고 있음」이라고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도 “saragaṁ va cittaṁ “saragaṁ cittaṁ”ti pajanāti”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하게 안다」라고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수행법입니다.
말을 할 때도 법의 이치에 맞게 말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은 「동작」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동작을 하고 있어도 수행으로 알아차릴 수 없는 행위는 없습니다.
요리를 하든, 식사를 하든, 세탁을 하든, 옷을 갈아입든, 말을 하든, 말을 듣든, 쇼핑을 하든, 차를 운전하든, 자판기를 두드리든, 어떤 동작을 하고 있어도, 알아차림을 가지면 그것은 수행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방법도 어렵지는 않습니다.
「생겨난 그대로」 자신이 하고 있는 동작을, 하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밥을 씹고 있다면 「씹음」, 물을 마시고 있다면 「마심」, 옷을 입고 있다면 「입음」이라고 알아차립니다.
「장소」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장소에 있어도 수행으로 알아차릴 수 없는 자리는 없습니다.
버스 안에서, 길가에서, 직장에서, 시장에서, 어떤 장소에 있어도 알아차림을 가지면 그것은 수행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선원과 같이 고요하고 깨끗한 장소에서 밖에 할 수 없는 수행법이 아닙니다. 화장실과 같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 장소에서 조차도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uccārapassāvakamme sampajānakārī hoti” 「대소변을 볼 때에 분명한 앎으로 행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장실에 가서도 공덕을 쌓을 수가 있습니다. 일을 보고 싶으면 「일을 보고 싶음」, 일을 보고 있을 때는 「일을 보고 있음」, 냄새가 난다면 「냄새나고 있음」, 배가 아프면 「배가 아픔」 등 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간단하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수행입니다.
실천한다면 어떤 장소라도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화장실에 가서조차 수행의 공덕을 쌓을 수 있기에, 다른 장소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세」를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자세라도 수행으로 알아차릴 수 없는 자세는 없습니다. 행주좌와 4가지 자세가 있는데, 걷고 있으면 「걸어감」, 멈춰 서면 「멈춰 섬」, 앉아 있으면 「앉아있음」, 가로막혀 서있으면 「서있음」이라고 알아차릴 뿐입니다.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입속에 넣은 밥을 씹는 정도로 간단한 일입니다.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리라는 것은 의미가 뚜렷합니다.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밤에 침대에 들어가 잘 때까지 언제든지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깨어났을 때에는 「깨었음」이라고 알아차리며 하루를 시작해 주십시오.
그 후로도 하루 종일, 보일 때는 「보임」, 들릴 때는 「들림」, 구수할 때에는 「구수함」, 먹고 있을 때는 「먹고 있음」, 알고 있을 때는 「알고 있음」이라고 알아차리며 하루를 보내십시오.
밤에 침대에 들어갔을 때에도 「잠이 옴」이라고 알아차리면서 하루를 끝내십시오.
하루의 생활 속에서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알아차림을 실천한다면 마음은 굉장히 행복합니다.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알아차리는 일도,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일도 포함합니다. 알아차리지 않고서 있다면, 움직인다면, 마음은 과거나 미래로 가서 헤매어 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거의 일,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서 행하는 것은 마음이 지치는 일입니다. 일도 제대로 정리 정돈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알아차리지 않고서 행한다면, 행하는 사람 자신도 「나」라고 하는 집착이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고 있는 일, 일에 관련되는 느낌, 일을 하면서 접촉하며 변하는 느낌조차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나의 것」이라는 집착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고민하고 괴로워하게 합니다. 마음의 평안으로부터 멀어져 버립니다.
무슨 일이든 알아차리면서 실천한다면 마음은 현재에 머물러 「나」라고 하는 집착도, 「나의 것」이라고 하는 집착도 일어나지 않고 없어집니다.
「다만 성질만이 있구나. 행하고 싶은 마음과 행하고 있는 동작만이 있구나.
아는 대상과 알아차린 성질만이 있구나.」라고 알아야 마음은 행복합니다.
그러면 지치는 일, 고민하는 일이 사라집니다.
일부 사람들은 「분명히 알아차릴 필요가 없다.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게으름뱅이의 변명입니다.
알아차리지 않고서 알고만 있겠다는 것은 수행하는 사람의 알아차리는 방법이 아닙니다.
만약 수행이 성숙했다면 알아차리는 것을 그만두어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씩 간헐적으로 단락 지어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알아차리는 것으로 제어하기 때문에 알고만 있는 것이 강고한 것입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매순간 마음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매순간 알아차리십시오.
알아차림의 맛을 경험해 알았다면 이제 알아차리지 않고서 행하지 않습니다.
알아차리지 않고서는 동작을 실행할 수가 없습니다.
「알아차리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다」라는 상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알아차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고 살아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까지 사띠(알아차림)의 맛을 맛보았다면, 그 사람의 삶은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는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알아차리지 않고서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항상 사띠(알아차림)를 지니고 살아가십시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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