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음식과 마음_음식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20141016)

담마마-마까 2021. 8. 20. 09:00

https://youtu.be/XNg6Kmvq4Hs

* 음식과 마음 (20141016)

 

수자따 스님이 이야기 ... 이후 10:30부터 부연설명과 함께 스님 법문이 이어집니다...

 

오늘 어쨌든 스님이 있을 동안에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보고 따끈따끈한 최신 소식들이니까.

그리고 아까 출가자가 아침저녁 예불을 하는가 하는 질문이 있었는데, 합니다.

그런데 버마의 특징이 외국 스님하고 버마 스님하고는 구분을 합니다. 참 안 좋은 습관인데, 그래서 외국인 스님에게는 그걸 안 시킵니다. 여러 가지 행사들도 참여를 잘 안 시키고, 그래서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어떤 경우든지 출가한 스님들은 아침저녁 예불을 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모두, 다른 나라들은 외국인 차별을 안 하기 때문에 똑같이 이렇게 하는데 버마만 조금 독특하게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여자도 출가가 가능하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출가는 출가인데 그걸 '빱밧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성스러운 생활로 들어가는 자'라는 뜻으로서 '빱밧자(pabbajja)'라고 얘기하고, 우리 같이 비구 생활을 하고 비구니 생활을 하고 이러는 것은 '우빠삼빠다(upasampadā)'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거는 '상가의 일원이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출가는 하는데 빱밧자이기는 빱밧자인데 우빠삼빠다는 되지 못하는 형태, 그러니까 비구 비구니라는 형태로서는 존재할 수가 없고 여자는 비구니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대신하는 것이 '청신녀'라는 형태를 띱니다. '청정한 생활을 하는 여성'이라는 뜻으로서 절에서 똑같이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고 탁발도 하고 수행도 하고 법문도 하고 이렇게 출가자하고 똑같이 하는데, 외형상으로는 그런데 차이가 분명하게 납니다.

그래서 출가한 비구 비구니들이 해야 되는 고유한 어떤 의식들은 일체 없고 그리고 가사를 입어도 우리는 이렇게 가사에 조의가 있습니다. 일장일단이라해서 7조 9조 11조 마니가사 이렇게 조의가 있는데, '조의'가 없습니다. 통가사입니다.

외형상으로 보면 색깔이 비슷하고 하니까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게 돼있고, 그대신에 다른 스리랑카에는 일반 스님들 가사색이 80가지 종류가 되거든요. 그 80가지 종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데 버마에서는 그것조차도 허용을 안 해. 80가지 색 이외의 색, 그러다 보니까 분홍색 계통을 입고 그런 형태를 띱니다.

 

그대신에 출가의 사미니 10계가 아니고, 똑같은 10계라 해도 다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받고 있는 8계 있죠? 8계 마지막에 있는 쉽게 말하면 화장하지 말아라는 거하고 그다음에 먹고 즐기는데 가지마라는 것이 한 항목으로 돼있는데 이걸 두 항목으로 쪼개어놓았습니다. 그러면 9계가 되죠!

그러면 마지막 10계는 뭐냐하면 항상 자애의 마음을 가지는 것 그렇게 10계를, 버마에서만 독특하게 그렇게 10계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전부 8계를 줍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청정한 생활을 하라는 포살일 불재일에 받는 팔계를 다들 다른 나라들에서는 받는데 버마에서만 그걸 쪼개고 또 다른 걸 첨가해가지고 10계를 받게 되는데, 똑같은 십계라고 하더라도 사미니계 하고 십계하고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착오 없기를 바랍니다. 됐죠?

아까 조금 미진한 게 있어서 이렇게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그대신에 마하시 수행센타의 특징은, 스님도 처음에는 마하시계통에서 수행을 한겁니다. 처음 저에게 스승이 됐던 분이 빤디따 스님이었거든. 빤디따 스님도 마하시 수행계통입니다. 마하시 스님 직계제자이기 때문에.

거기의 특징은 어떤 경우든지 수행자는 천천히 하도록 하는 것, 모든 것들을 천천히 하고 거기서 중점적으로 두는 것은 몸의 행위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두번째이고, 그다음에 세번째 알아차리기는 알아차리더라도 어떤 경우든지 명칭을 반드시 넣어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들을 하라. 그럴 것 같으면 마음은 대상으로부터 떨어지는 훈련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고요해지면은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하는 방법들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순수위빳사나라고 그렇게 하지만 경전에 근거할 것 같으면 순수 위빳사나가 될 수 없습니다. 명칭을 붙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배를 관찰하는 것도 경전에 근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비판받을려면 얼마든지 비판받기는 하더라도, 거기서 말하는 순수 위빳사나라고 하는 것은 사마타의 방법을 쓰지 않고 오로지 위빳사나 수행만 한다는 게, 그래서 그걸 순수 위빳사나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고, 뭐 다르게 그걸 해석을 하면 안 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기 수행에 맞게끔 마음이 항상 자꾸 날뛰는 사람들은 아까 얘기했지만 4가지 예비수행 방법을 통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나서 마하시 방법이나 여러 가지 다른 방법들을 쓰는 것이 이롭고, 또 그렇지 않고 항상 고요하고 이럴 것 같으면 바로 위빳사나 마하시 방법으로 해도 무방하고, 그러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거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조금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또 조건 따라서 그 상황따라서 그 방법이 맞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되도록이면 여러 가지 방법들을 다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끔 그 방법으로 수행을 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는 훨씬 이로울 겁니다.

 

그리해도 마하시 수행방법이 수행의 전통적인 맥을 다시 부활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게 없었으면 아마 지금 우리가 배우는 수행법은 참 요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하시 수행법들을 높이 사는 형태들을 띠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 부연설명을 했습니다.

 

오늘은 점심 급히 서둘러서 밥먹을 이유가 없어져버렸네. 스님 생각에는 되도록이면 목요일날 하루 동안은 그래도 해제를 했지만 팔계를 지켰으면 하는,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생각했는데, 당장 오늘부터 안 한다고 그냥, 그럼 할 수 없는 거지.

 

오늘은 제목은 음식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는 것으로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보통 우리가 음식이라고 하면 먹는 음식을 생각을 합니다. 그렇죠? 먹는 음식 안 먹으면 여러분들은 죽음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거 말고 또 어떤 음식들이 있을까?

'뭔가 할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떤 행동도 일어날 수가 없고 어떤 생각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식물인간과 마찬가집니다. 식물인간은 의도가 정지된 상태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어도 죽은 자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쉽게 말하면 그것도 음식입니다. 그걸 먹어야만이 내가 살 수가 있기 때문에.

 

또 하나는 뭔가 내 눈에 아니면 귀에, 여러 가지 감각기관에 접촉하는 것들이 없을 것 같으면, 그걸 인식할 수 없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건 죽은 자와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하기 때문에 아, 내가 살아있다. 그리고 피부로 뭔가가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지, 그것이 없으면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체와 꼭 마찬가집니다.

숨을 쉬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인식하는 것, 접촉하는 것이 없으면 그건 냉동고에 들어가 있는,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냉동인간이라 그러나? 완전히 죽은 상태는 아닌데 냉동시켜 놓은 거. 생물 중에는 그런 게 있다고 그런 얘기를 하던데, 냉동시켜 놨다가 해동을 하면 다시 탁 살아난다고 그러던데, 그리한다고 하더라도 냉동된 상태에서는 그것은 죽은 자와 마찬가집니다. 어떤 것들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접촉하는 것도 좋은 대상일 뿐아니라 좋은 음식이라는 뜻입니다.

 

또하나의 음식은 그런 접촉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죽은 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인식하는 것도 하나의 음식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네 가지의 음식물입니다.

하나만 자꾸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물만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가 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데 쓰여질까?

먹으면서 마음이 맑고 깨끗해집니까? 솔직히 얘기해봐요. 허겁지겁 먹기 바쁘고 솔직히 앞에 있는 반찬이 몇개가 있는지 뭐가 있는지 나중에 지나고 나서 기억 못하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뭘 먹었는지도 잘 모르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거 맛있고 맛없는 것만 알고 있는 상태가 되기도 쉽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더럽혀졌을까, 먹을 때.

 

출가한 스님들은 음식을 앞에 놔놓고 하는 게송이 항상 있습니다.

 

빠띠상카- 요-니소- 삔다빠-땅 빠띠세-와-미.

Paṭisaṅkhā yoniso piṇḍapātaṁ paṭisevāmi.

네-와 다와-야 나 마다-야 나 만다나-야 나 위부-사나-야,

Neva davāya na madāya na maṇḍanāya na vibhūsanāya,

이렇게 하면서...

 

너도 그거 했지? (수자따 스님 : 안 했습니다.)

잘했다. 외국인 스님들은 이게 문제인 거라.

어쨌든 출가한 스님들은 항상 밥을 앞에 놔놓고 혼자 있어도 그걸 하고 먹고, 여러 스님들하고 함께 있을 거 같으면 항상 그 게송을 독송을 하고 밥을 먹습니다.

 

여기 있는 이 음식은 내가 배고프다는 느낌이 왔다는 거라. 그래서 그 배고픈 느낌을 제거하기 위해서 먹는 것이지 밥을 먹고 나서 아, 내가 배부르다 하는 느낌, 그 배부르다는 느낌을 일으키기 위해서 밥을 먹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식사 때라고 하는 것은 배고픈 느낌이 있을 때 먹는 것이지 배고프지도 않는데 때 됐다고 해가지고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리고 먹은 것들도 먹고 나서 조금 아쉽다는 마음이 들어야 되는 것이지 배가 부르다고 할 뿐아니라 아예 배가 너무 불러갖고 “아, 움직이기도 힘들어” 이렇게 할 거 같으면 그거는 이미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도구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그런 느낌을 제거하고 그런 느낌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것이고, 단지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음식을 먹어야 되니까 음식을 먹고 이 몸을 유지해가지고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써 쓰겠습니다.

그걸 잘 먹어서 남에게 내가 뭔 음식 먹었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아니면 얼마나 값어치 있는 음식을 먹었다고 남한테 폼잡기 위해서, 아니면 이 몸을 번지르르 하게 기름지게 해가지고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먹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그 게송을 딱 하고 밥을 먹습니다.

 

실제로는 그 게송을 할 때와 안 할 때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그 게송을 하면 음식을 먹을 때가 돼도 조금 자제하게 됩니다.

처음에 제가 이 교단 일을 보면서 식사 때마다 스님들에게 지적을 했습니다. 적게 먹으라고. 그런데 하루에 한끼만 먹으니까 다들 산만큼 쌓아놓고 먹어. 이만큼. 저녁을 못 먹으니까 그거 보충한다고. 사실은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그때마다 지적을 합니다. 적게 먹어! 반 덜어내! 만날 그렇게 하니까 요즘은 나하고 똑같지는 않아도 나하고 비슷하게 됐어요.

그리해도 충분히 살아가고 필요한 건데도, 우선 몸을 유지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필요 이상의 양들을 더 먹게 되는 거라. 그거 먹으면 어떻게 돼? 다른 일로 써야 되는 거라. 다른 활동들을 해야 되는 거고. 빨빨거리고 돌아다녀야 되는 것이지, 그걸 쓰기 위해서. 가만히 있을 거 같으면 그게 필요 없는 거라.

그래서 이 게송을 스님들 만나면 항상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밥 먹을 때면 내 눈치봐요. 스님이 숟가락 딱 놓으면 더 먹다가도 숟가락을 딱 놔버립니다. 그거는 뭐냐면 음식물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을 조금조금씩 떨쳐나가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먹을 때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먹을 거 같으면 먹는 동안에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깨끗하게 돼있습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면서 분명하게 먹을 거 같으면 속도도 빠르지도 않고, 그리고 꼭꼭 씹어먹고 오래도록 씹어먹고 몸에도 훨씬 유익하게 될 뿐 아니라 먹는 양도 자유롭게 조절되게 됩니다.

먹는 것이 좋은 도구인데 그 좋은 도구를 활용을 안 할려고 한다는 거라.

우리 몸은 네 가지 영양분이 들어가지 않으면 죽어버립니다. 다른 거는 인식하는 것이 없을 거 같으면 죽을 거 같아도 왜 먹는 거는 그렇게 소중한 줄 모르냐는 거라. 먹는 음식은. 그 먹는 음식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더럽혀지고 깨끗해지고 하는 건데 왜 활용을 자꾸 안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아하라(āhāra)라고 그럽니다. 영양소입니다.

음식은 여러분들이 살아있게 하는 영양소입니다. 그 영양소는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 생각을 항상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게송에 뭐라고 돼있느냐면 "게으르고 많이 먹고 그러고 나서 졸고 싶어 하고 데굴거리며 사는 사람은 입태하는 윤회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것은 마치 먹이를 다투는 돼지와 같다." 우리에 음식 하나 넣어줘 봐. 그거 먹을려고 다투는 거라. 윤회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한다는 거라. 윤회를. 많이 먹고, 많이 먹으면 졸리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게으르게 돼있습니다. 그거 매일 반복한다는 거라. 윤회를 반복하는 일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거라.

한번 작정을 해보십시오. '이 먹는 음식으로 인해서 내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안 먹을 것이다.' 그러면서 한번 음식을 먹어 보십시오. 진짜 음식이 '아, 참 고맙다.'

 

그다음에 두 번째, 팟사(phassa)라고 합니다. 접촉.

며칠 전에 갑자기 스님이 오른쪽 눈이 완전히 탁 안 보이게 되더라고, 원래 스님이 오른쪽 눈이 거의 안 보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안경을 벗고 왼쪽 눈을 감고 여러분을 보면 여러분이 안 보입니다.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도 없을 뿐아니라 색깔조차도 없습니다. 그냥 흐릿한 화면에 조금 더 흐릿한 게 뚜렷한 뭔가가 있다는 것, 그것도 뿌연 상태로써 돼있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안경을 안 쓰면 여러분들 사실은 잘 볼 수 없는 상태이고, 왼쪽은 괜찮은데 왼쪽도 더불어서 조금조금씩 나빠집니다.

그런데 그렇게라도 오른쪽 눈이 보이기 때문에 이게 볼 수가 있는데, 한쪽 눈이 이렇게 완전히 안 보여버리면 몸이 비틀어져버립니다. 항상 한쪽으로만 이렇게 보여지게 되니까. 이게 안 보이는 순간에 이상이 탁 오게 됩니다. 어! 안 보인다는 게 탁 드러납니다. 한쪽 눈이라 해도 그런데, 그러고 나서 이게 신경 쪽에 이상이 있는가 뭐가 있는가 차분하게 살펴보자 해가지고, 고요하게 눈을 감고 이 눈의 압을 관찰하다 보니까 압이 차 있더라고. 그것을 쭈욱 내리고 나니까 다시 또 예전의 상태로 돌아오게 되더라고.

 

그래서 그거는 해결하기는 했는데 어쨌든 눈이 안 보이게 되면 얼마나 답답할까? 살아있는 사람이 눈이 안 보인다? 굉장히 답답할 겁니다. 요즘 그런 체험들도 가끔씩 한다고 그러대. 또 귀가 안 들리면 또 얼마나 답답할까? 뭘 만져도 뭘 만졌는지 전혀 모르고 접촉이 없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 얼마나 답답할 거라?

음식물보다도 이 접촉하는 것이 더 훨씬 여러분들에게 소중한 겁니다.

밥은 한끼 안 먹어도 안 죽습니다. 그런데 하루동안 그 접촉이 없다고 하면 오히려 더 힘들어. 마음이 오히려 더 콩당거리고 마음이 금방 요동치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런데 만날 보고 듣고 하고 있으니까 그 소중함을 모르는 거라. 그리고 이게 진짜 마음을 요동치게 하고 마음을 깨끗하고 고요하게 만드는 도구라는 생각을 못 하는 거라. 음식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건데,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인데 그걸 왜 자꾸 간과를 하느냐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접촉하는 것은 분명하게 인식을 하도록 하십시오.

 

마하시에서 즐겨 하는 방법, 보면 '보인다'하고 명칭을 붙이고, 들리면 '들린다'하고 명칭을 붙이고, 만지면 '만진다' 하고 명칭을 붙이고 만지는 것. 그렇게 한번 일단 해봐라는 거라.

모든 감각기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그렇게 명칭을 붙이면서 분명하게 인식을 해보라는 거라. 걸어갈 때는 왼발이 닿아있으면 '왼발', 오른발이 닿아있으면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면서 걸어가 보라는 거라.

명칭을 붙여서 그렇게 하다가 보면 어느 순간에 마음은 딱 그 행위하고 일치가 돼있습니다. 그전에는 뭐 잡생각도 일어나기도 할 거고, 마음이 도망가기도 하고 할 거라. 그리하더라도 명칭을 붙이면 마음을 일단 거기 잡아두는 역할을 하게 되는 거라.

 

딱 대상과 마음이 일치가 되면 마음은 참 가볍고 깨끗해집니다. 그래서 명칭을 붙이더라도 재미가 나. 명칭을 붙임과 동시에 마음으로는 분명하게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럼 더욱더 하고 싶어 하는 거라. 그러다 보면 이 대상이 빨리 또 바뀌어버릴 것 같으면 그때는 명칭을 안 붙여도 분명하게 따라가게 되는 거라. 마음이 그 대상을 따라갈 힘들을 분명하게 가지게 된다는 거라.

접촉하는 것은 먹는 것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될, 여러분을 살리고 여러분의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해주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어떤 동작을 하든지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아, 내가 뭘 하고 있다’ 하는 것은 알아야 될 거 아니라. 눈 하나 없으면 그거 모른다고 해서 갑갑해 죽을라고 하면서 다른 건 멀쩡하게 뜨고 있으면서 왜 그거 하는 걸 모르느냐는 거라. 갑갑해 할 때는 또 언제고.

 

그다음에 세 번째, '마노 상 제따나(māno sañ cetanā)' 그렇게 얘기합니다.

'하고자 하는 의욕'입니다.

가끔 사람들이 기질에 따라서 이 쩨따나가 많은 사람들과 없는 사람이 분명하게 보여집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뭔가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기 싫어해. 수행하고 있어도 내가 대상을 알려고 하는 사람이 전혀 없고, 또 쩨따나가 많은 사람들은 수행하고 있어도 그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오만 거 다합니다.

 

이게 너무 강해도 안 좋고 너무 약해도 안 좋은 거지만, 쩨따나는 여러분들의 다음의 결과를 좌우하는 역할을 합니다. 내가 나쁜 마음을 먹을 거 같으면 나쁜 말이나 나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좋은 마음을 먹으면 좋은 말이나 좋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뭔가 할려고 하는 이 의도가 다음을 결정해버립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가 나쁜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이게 결정을 해버립니다. 마음에서 시키는 대로 해버린다는 거라.

왜? 몸이라고 하는 것은 그속에서 자기가 자유로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마음에서 시키는 대로 그냥 나오는 현상일 뿐입니다. 몸 지가 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딨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 것이지.

 

나쁜 행위를 하고 좋은 행위를 하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의욕과 의도'들이 좌우를 해버리는 겁니다. 나쁜 업을 짓는 것도 좋은 업을 짓는 것도 이게 결정을 해버립니다. 여러분들 다음의 결과를 기대하는 것, 다음의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은 이게 결정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설혹 내가 한끼 밥을 안 먹고 또 못 보는 것이 있어도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업을 쌓아서 윤회하는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의도라고 하는 것들은 그 업()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수행을 하고 나면 자꾸 이 의도를 알아차리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걸어가면 걸어가고자 한다는 의도가 있고 나서 걸어가는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고 하고, 숨을 들이쉬고 나면 들이쉬고 나서 탁 멈추고 나서는 다시 내쉴려고 하는 의도가 있어서 다시 내쉬는구나 하고 알게 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 그렇게 알아차려야만이 분명하게 그 현상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런데 수행해보면 알겠지만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알아차리는 것은 쉬운데 걸어가고자 한다는 의도가 있다는 사실이, 이로 인해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 힘들죠. 그마만큼 관리하기 힘들다는 거라. 여러분 마음이 그것으로 인해서 선한 마음이 되기도 하고 악한 마음이 되기도 하는데 결과를 좌우하는 의도를 힘들다고 해가지고 내팽겨쳐 둘 수는 없지 않느냐는 거라.

 

가만히 있을 때, 가만히 있을 때 가만히 자기의 마음을 한번 보십시오.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있는데, 뭔가 하고 싶은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생각을 하기도 하고, 안 그러면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족쇄로 이 몸을 가두듯이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을 한번 보라는 거라.

얼마나 빠르게 일어나고 있고, 얼마나 빨리 또 사라지고 있는가? 찰나 간에 일어났다가 찰나 간에 사라집니다. 그게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마 그거 들여다보고 있으면 진절머리가 나요. 진절머리가.

'아! 내가 이렇게 천방지축으로 마음이 날뛰고 있구나' 하는 거라. 자꾸 훈련을 하라는 거라.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마음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도들이 선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자꾸 만들어라는 거라.

여러분들의 깜마(kamma)를 결정짓는, 업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들은 반드시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윈냐나(viññāṇ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인식하는 것'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식하는 것이 없으면 죽은 자입니다.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오온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적어도 식물하고 구분되고 또 여러분들이 다른 동물들하고 차이가 나는 것은 인식한다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개발시키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나쁜짓 하면 아, 나쁜 짓이다 하고 분명하게 아는 거고, 그래서 저거는 내가 하면 안된다 하는 것을 아는 거고.

그런데 인식하는 것들을 개발시키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게 나쁜 짓인지 좋은 짓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그것을 인식했지만 자기가 그대로 또 따라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식물 같은 경우는 인식하는 것조차도 없습니다. 그냥 반응하는 것뿐입니다.

얼마나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인식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인식하는 것들로 인해서 내가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할 수 있는 도구로 삼을 수 있다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여러분들의 축복입니다. 그거 하지 못하면 동물하고 다를 거 하나도 없고, 또는 식물하고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 인식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는 의무입니다.

그래서 숨을 들이쉬었으면 숨을 들이쉬었다고 분명하게 인식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안 되면 정 안 되면 '내가 숨을 들이쉬었다' 하고 한번 더 되뇌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인식할 줄 알아야 됩니다. 나쁜짓 했으면 '아, 내가 나쁜짓 했다' 하고 분명하게 인식할 줄 알아야만이 그걸 안 하게 된다는 거라. '아, 이거 하니까 참 좋다' 하는 걸 분명하게 인식할 줄 알아야만이 그걸 더 하게 된다는 거라.

살아있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인식하는 것들로 인해서 내가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분명하게 구분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인식을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맑고 가볍게 만들 줄 알아야 됩니다.

 

이게 여러분들의 음식입니다. 그런데 이 음식은 변화합니까? 안 합니까?

우리가 먹는 음식도 가만히 놔두면 썩고 부패하고 변화됩니다.

의도라고 하는 것도 변화하게 됩니다.

접촉하고 있는 것도 가만히 접촉해있는 법이 없습니다.

사라져버리고 또 다른 것들이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인식하는 것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생멸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인식한 것이 항상 인식되는 것이 아니고 인식한다고 분명히 알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사라져버립니다.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인식이 자리를 해서 일어나서 또 그것이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이 모든 음식물들, 나에게 영양분이 되는 것들은 끊임없이 생멸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우리는 밥 한끼 먹고 평생 살아야 되는 거고, 보는 거 한번만 보더라도 그거 평생 안 봐도 그냥 그게 그대로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라. 끊임없이 생멸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생멸하는 것들은 내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변해가는 음식을 그걸 어떻게 내가 좌지우지 할 거라? 물론 냉장고에 넣는다 아니면 뭐 어떤 다른 식으로 그걸 늦출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거 변하는 것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내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인식하는 걸 내가 인식했다고 그걸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라? 어떤 것에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생멸을 되풀이하는 것들은 어떤 경우든지 내가 좌지우지 할 수 있고 내가 콘트롤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말아야 되는 거라.

음식에 대해서 집착하지도 말아야 되는 거고, 인식한 것에 대해서도, 의도가 일어난 것에 대해서도, 접촉한 것들에 대해서도 그것들에 집착하지 말아야 되는 거라.

집착하지 말아야 만이 수행이 바로 되고, 무르익어가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은 집착하는 순간에 여러분들은 쾌락주의자로 빠져버립니다.

음식에 대해서 집착할 거 같으면 맛있는 거 찾아다니는 식도락가가 돼버립니다. 접촉하는 것들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되면은 그것만 계속 보고 그것만 찾아다니게 됩니다. 예쁜 꽃 보면 예쁜 꽃만 계속 볼려고 하고 싫은 것들은 안 볼려고 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도가 나쁜 것들이 일어나면 그것도 싫어하는 마음이 금방 또 일어나게 됩니다. 인식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변화되는 것들이고, 생멸을 거듭하는 것이고, 내가 좌지우지 할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지 말아라는 거라.

 

여러분들은 그런 탐미주의자나 식도락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만이 이 영양분들이 여러분들에게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해주는 영양분들이 되는 겁니다. 이것들을 그렇게 알아차려야만이 이 음식들이, 이 영양분들이 여러분들을 해탈에 이르게 하는 겁니다. 식사도 해탈에 이르게 하는 것이고, 인식하는 것도 해탈에 이르게 하는 것들입니다. 이 모든 네 가지 영양분들은 여러분들을 해탈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로부터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걸 떠나버려서는 안 됩니다.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문답 >

수행자 질문 : 스님, 음식 네 가지에 있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에 마음의 음식으로써 팟사와 저가 알기로는 웨다나 윈냐나 이렇게 세 가지인 줄 알았는데, 의도가 들어갑니까?

스님 답변 : 예. 웨다나라고 누가 얘기했습니까?

수행자 : 어디 공책에서 보니까

스님 답변 : 잘못봤습니다. 웨다나가 아니고 쩨따나일 겁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마노 상 쩨따나' 입니다. 아마 용어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