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눕빠도 수캉(Anuppado sukkham) (20141104)
"아눕빠도 수캉(Anuppado sukkham)" 이라는 그것 가지고 얘기를 하겠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다시 윤회하지 않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하는 겁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이 다시 태어남이 없으면 그것 같은 행복이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다시 생성하지 않는 것,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대념처경에 보면 이 '아눕빠도'라고 하는 구절들이 많이 나옵니다. 단지 여러분들이 그냥 태어나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다 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수행 부분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한번 경전을 읽어드릴게요.
[ 혀가 있고 맛을 알아 이 양자의 만남에 의해 일어나는 속박을 안다.
일어나지 않았던 속박이 일어나면 그것을 안다.
일어난 속박을 버리고 간다면 그것을 안다.
버리고 간 속박이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을 안다. ]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게 인제 안·이·비·설·신·의 여섯 가지를 구분해서 이렇게 해놓습니다.
맛을 볼 때 음식이 있으면 음식이 있다는 것을 안단 말입니다. 그 음식은 혀로써 맛을 압니다. 혀가 맛을 안다고 하는 것이 있으면 음식이 입에 들어가서 혀에서 맛을 알면은 새로운 맛이 일어나는 것들을 아는 거라. 맛을 보면 맛본다고 분명하게 알아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밥을 다 먹고 나면 그 일어난 것들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럼 다시 맛을 볼 수가 없는 거죠. 그럼 사라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그런데 안 먹고 살 수는 없잖아. 뭔가를 분명히 먹고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는 분들도 그 몸을 완전히 버리기 전까지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그 몸을 지니고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깨달은 분들은 맛을 보고 또는 보고 듣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새로운 일어나는 것들을 만들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은 맛을 보면 그냥 씹으면 씹는다고 알고 삼키면 삼킨다는 줄 알아야 되는데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새로운 일어남이 일어난다는 거라. 맛을 보면 '음, 맛있다', '맛없다' 그러면서 새로운 일어남이 있다는 거라. 그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 없는 것이 진짜 행복이라고 그랬는데 행복을 스스로 박차버리는 형태가 돼버리는 거라.
요즘은 조금 몸이 좀 많이 약해졌는지 그리고 나이가 먹고 인제 오십 중반이 넘어가니까 감기가 들어오는 바이러스를 알아차리기가 힘이 들어져요. 알아차리기는 하는데 그걸 몰아내는 게 점점 더 시간이 좀 더 걸려. 감기가 걸리지는 않지만, 이게 힘들어지는 거라.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아, 바이러스가 들어온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면은 그리고 그걸 알아차리기 위해서 더운 기운을 내보내고 들이쉬고 하면서 내보내거든. 그러면 감기가 깊게 들지는 않고 감기가 들어오다가도 그냥 나가버리는 형태를 띠게 되는 거라. 그래서 감기에는 걸리지 않는데, 이게 힘이 없다 보니까 점점 시간이 길어지는 거라.
전에는 앉아가 있으면 보통 한 삼십분 이렇게 하고 있으면 바이러스가 쑥 빠져나가는 것을 압니다. 요즘은 삼십분이 아니라 한 시간을 앉아있어도 어떨 때는 힘들 때들이 많아요. 그래서 아, 수행도 힘이 있을 때 해야 되는구나 하는 것들을 많이 느끼기는 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밖의 외부공기를 통해서 바이러스가 있는 것이 내 몸을 통해서 들어올 때 그것을 분명하게 알면은 그 바이러스는 소멸합니다.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 내가 바이러스가 빠져나가서 감기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지를 못하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능력도 잘 안 될 뿐 아니라 알아차려도 금방 그걸 무시해버립니다.
조그맣게 감기가 걸렸을 때 빨리 내가 마른 수건을 코에 대가지고 계속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알아차려서 이슬이 맺힐 때까지 될 거 같으면 코가 흥건한 것을 푹 풀어버리면 감기를 초기에 탁 잡아버리게 되는데, 대부분 그렇게 안 하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놔둬 버리니까 각자 목으로 뭐 어디로 이렇게 계속적으로 더 퍼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럼 인제 감기로 인해서 고생을 많이 하게 되는 거라. 새롭게 일어난 것들을 내가 그걸 알지 못하면 나에게서 오는 행복도 뺏어가버립니다.
가끔씩 스님들이 불평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요즘 하도 기독교가 번성하다 보니까 스님들을 보면 되게 싫어합니다. 뭐 똑같은 물건을 하나 사러간다고 하더라도, 괜히 틱틱거리고 어떨 때는 바가지를 씌울려고 그러든지 그런 것이 있습니다. 점점 가면 갈수록 그게 더 강해지는 느낌들을 받습니다.
옛날에는 가면 “스님, 어서 오세요” 하고 어떨 때는 공짜로 주고 하는데 인제는 그거는 거의 없어져버리고 점점 더 힘들어지는 거라. 그러니까 승복을 입고 산다는 자체가 더 힘들어지는 그런 세상이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스님들도 그것 가지고 불평을 좀 많이 합니다. 에이, 그집에 갔더니 괜히 바가지 씌울려고 그러고 이상한 얘기만 자꾸 해쌌고 뭐, 그런 얘기를 한다고.
일반인들이 그렇다 하는 거는 어쩔 수가 없는 건데 스님은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되겠죠? 적어도 그사람이 불평하면 불평한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고, 나를 싫어한다면 싫어한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그 가게에서 분노가 일어날 일도 없는 거고, 분노가 일어날 일이 없으니까 나한테 와서 괜히 불평불만 늘어놓을 일도 없는 것이 당연한 건데 그걸 못한다는 거라.
담마누빳사나(Dhammānupassanā)의 부분에 보면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분노가 일어났으면 분노가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그리고 분노가 사라졌으면 사라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또는 나에게 나태함이 일어났으면 나태함이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나태하고 게으른 것들이 사라지면 사라진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대부분 사람들은 분노가 안 좋은 것, 나태하고 게으른 것이 안 좋은 것인 줄 분명하게 압니다. 또 수행에는 그게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을 더 잘 알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도 일어나는 것들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분노가 일어나고 나태한 것들이 일어나는 거라.
부처님 당시 때 아마 그분이 부처님 시자였던 모양이라. 그러니까 아난다가 시자를 하기 전에 여러명의 시자들이 부처님을 시봉을 했어요. 그래서 여러 일을 보고 부처님한테 다시 돌아가야 되는데 저녁에 늦어놓으니까 뱃사공이 배를 안 띄울려고 그러는 거라. 이 배를 타고 저쪽으로 건너가야 부처님이 계신 곳에 도착을 하는데, 그래서 그 스님이 뱃사공한테 부탁을 합니다. 오늘 중으로 내가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야 부처님 잠자리도 봐드리고 내가 시봉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뱃사공이 성질을 바락 내면서 낼 가라니까 안가고 꼭 오늘 갈라고 한다고 그러면서 그러면 타라 해가지고 태웠어요.
태웠는데 분노가 일어난 상태니까 노를 젓고 가더라도 평온하게 가지 않고 온데 출렁출렁출렁 하면서 가니까 비구들 가사자락이 다 젖고 머리도 다 젖은 상태가 됐는데, 그거까지만 했으면 괜찮은데 목적지가 여기면 여기에 내려줘야 되는데 거기에 안 내리고 엉뚱한 데다가 반대쪽 기슭 이런데에 엉뚱한 데다가 내려주고, 내려주면서 보통 그때 당시에는 뱃삯을 안 받는데, 그러니까 여기로 바로 갔으면 5분이면 갈 수 있는 건데, 출렁거리면서 가고 또 저 밑에다가 내려줬으니까 한 10분은 걸렸을 거 아니라. 그러니까 뱃삯을 또 두 배를 달라고 하네.
그래가지고 그 스님이 내렸는데 부처님이 계신 데까지 너무 머니까 한밤중까지 걸어와서 겨우 밤에 부처님 계신 곳에 도착을 했어요. 부처님이 이미 주무시고 있는 상태니까 가서 인사드리지 못하고 그다음날 새벽에 일찍 부처님한테 인사드리러 가는 거라. 부처님이 너 어제 뭘 했기에 오늘 인제야 들어오느냐 그러니까 아닙니다. 어젯밤에 들어왔는데 너무 늦어갖고 오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왜 그렇게 밤에 늦게 들어왔느냐 그러니까 그때 자초지종을 이야길 하는 거라.
그때 부처님이 얘기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분노가 없으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고, 분노가 없으면 현명한 자가 된다.
분노에 분노로써 되돌려 주지 않는 자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을 한다.
네가 촌락에 있든 숲에 있든 아니면 높은 지위에 있든 낮은 지위에 있든
어떤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분노가 없으면 그것이 행복하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 사공이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것들은 그거는 자기 일이니까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런데 너는 왜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다시 분노를 일으켜서 분노로써 되갚아주느냐는 거라. 네가 분노하지 않았을 거 같으면 설혹 네가 가사자락이 젖은 상태, 아니면 스님이라는 위치, 아니면 마을에 가서 있든 아니면 이 숲에 있든 아니면 사원에 있든 어떤 곳에 있더라도 분노를 다스려야 될 위치에 있는 것인데, 분노를 다스리지 못했다는 거라. 새롭게 일어난 것들은 만들지 말아야 될 책임을 가지고 있는데 새롭게 일어난 것들을 만들었다는 뜻이라.
비단 부처님을 시봉하는 이 스님만 그러겠어요? 우리들이 대부분 그렇다는 거라.
가끔씩 그런 게 있어요. 스님도 되도록이면 법문을 좀 안 하고 싶어. 다른데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우리 선원은 어쩔 수 없이 뭐 정해진 거니까 그거는 해야 되긴 되는데, 다른데 청탁이 들어오면 되도록이면 거절할려고 그럽니다. 새로운 것들을 만드는 것들이 얼마나 나를 피곤하게 하는 줄 알기 때문에. 법문하는 것이 피곤한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과정들이나 또 여러 가지 소용되는 시간들이나 이런 여러 가지들을 따져봤을 때, 그리고 그 법문 했을 때 그걸 듣고 이해하고 실천하면 좋은데 대부분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거라.
부처님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법을 설한다는 것은 돼지에게 그 귀걸이를 달아주는 거와 같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라.
그렇게 소용없는 일들이 참 많아요. 그런데도 어쩌지 못하고 스님이니까 어쩔 수 없이 가서 이렇게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마음에 두는 것이 아, 참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없으면 참 행복한데, 내가 그 시간이면 내 수행하고 내가 오히려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을 지낼 수가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 가지고 분노를 일으키고 그러지는 않지만 그래도 새롭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는 좀 부담스러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거라.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은 안 올려고 그럽니다. 계속 새로운 것들을 찾는 거라. 새로운 일들, 새로운 사람들, 또는 어떤 새로운 것들을 자꾸 만들어냅니다. 그게 고통의 바다로 자꾸 몰고 있는 거를 눈치를 못 채고 그 일만 계속적으로 반복하게 되는 거라. 그거 안 해도 지금 열심히 닦아도 될동말동 할 판에 자꾸 그런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도 그렇게 알아야 합니다.
"아눕빠도 수캉"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 없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
새로운 것이 일어나면 그것은 나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라. 대상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것 같으면 새로운 것들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즉각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새로운 것들이 일어나는 거라. 성냄이 일어나든 분노가 일어나든 그렇지 않으면 나태함이 일어나든 욕심이 일어나든 새로운 것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난다는 거라. 그런데 그게 하나 일어나면 연속적으로 다른 것들이 또 일어나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이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있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은 그것들과 결합을 해버리는 거라. 결합을 해버리면 그것은 지속되고 증폭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나쁜 감정들, 나쁜 불선한 마음들은 '나'라고 하는 것들이 결합 되면 그 즉시 증폭돼버립니다. 망상을 부려본 사람들은 망상이 얼마만큼 증폭되는지를 분명하게 압니다.
망상이 일어나지 않아야 행복한 것인데, 망상을 일으켜보니까 그게 나를 불행하게 하는 거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인데도 그것이 행복하다고 자꾸 만들어내버리는 거라.
마찬가지로 경전에 "해치려는 마음이 있으면 해치려는 마음이 있다고 분명하게 알고, 해치려는 마음이 사라지면 해치려는 마음이 사라졌다고 분명하게 알아라."
그래서 만약에 해치려는 마음이 분명하게 일어나면 어, 지금까지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해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지금까지 있지 않은 해치려는 마음을 왜 일으키느냐는 거라.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새롭게 일어나는 해치려는 마음들은 일으키지 않을려고 노력하게 된다는 거라.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은 보면,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는 목적이 딱 정해져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 것. 어디가도 요즘은 돈! 돈! 입니다. 절에서도 막 그냥 돈돈. 어떤 스님들은 복권 당첨될려고 목탁치면서 자기 기도하는 스님들도 있다고 그러더라고. 어떻게 보면 참 어리석은... 음...
부(富)를 가진다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적당한 부, 필요한 부들은 유용하게 쓰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 부라고 하는 것들이 나의 마음의 향상으로 이끌어주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저 사람 아, 참 돈 많아도 좋은 일 많이 하네. 그런 마음이 들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저 사람 돈 많아지더니 사람이 갑자기 바뀌어버렸다. 이렇게 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라.
부처님은 일반 재가자들에게 세 가지를 목표로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첫 번째가 부의 획득. 그거 필요하다는 거라. 그거 없이 살 방법이 없으니까. 정당한 방법으로 정당하게 하라는 거라. 그 뱃사공 같이 엉뚱하게 해가지고 두 배를 받을려고 하지 말고 정당하게 해가지고.
가게를 할 때 요금을 먼저 받는 데가 있고, 요금을 뒤에 받는 데가 있습니다. 불교적으로는 어떤 것이 맞을까? 먼저 받는 것이 불교적입니다!
이것이 금액이 얼마나 하고 분명하게 예시를 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그것을 선택했을 때 그 돈을 받고 그 물건을 지불해 주게 되는 그런 형태들을 띠는 게 불교적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만약에 옷을 사러 갔다. 그런데 가격이 다 여기에 적혀져 있단 말이라. 그럼 내가 이것을 살 형편인가 하고 판단하고 아니면 저걸 사야 되는 거고, 자기에게 맞는 것들을 사야 되는 거고, 그래서 그것을 고르고 비교해보고 하면서 오는 행복들이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그래서 자기한테 맞는 것들을 분명하게 사고 고르게 된다는 거라. 그랬을 경우에는 적어도 그 값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만약에 그렇지 않고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고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가 막 골랐는데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비싸다든지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분노를 일으킨다는 거라. 또는 값이 적으면 어, 내가 더 살 걸 하는 집착을 또 일으킨다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불교적으로 볼 것 같으면 먼저 값을 제시를 하고 받는 것이 불교적이라는 거라. 새로운 것들을 일으키게는 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 뱃사공 같은 경우에는 뱃삯을 먼저 얘기한 것이 아니고 내리고 나서 뱃삯을 책정을 한 거라. 부를 획득한다고 하더라도 불교적인 방법으로 획득을 해야 되는 것이고, 또 그것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것들이 돼야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두 번째는 "마음의 향상으로 나아가라" 그렇게 합니다.
간단하게 마음의 향상에 대한 것들을 얘기를 할게요.
경전에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세속적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행복이라는 향기보다도 마음의 향상의 향기가 더 우수하다."
여러분이 아직 마음이 완전한 향상에 이르지 않았다고 할 거 같으면, 그럼 본인은 아직은 멀었다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게 맞는 것이지, 조그만 것에 도취돼가지고 길길이 날뛸 일은 아니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도 아라한에 이르기 전에는 난 아직 마음의 완전한 향상에 이르르지 않았다고 알아야 됩니다.
하물며 그런 마음의 향상으로 나아가는 사람들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아, 내가 어리석고 내가 무지하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설혹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지적한다고 하더라도 ‘아, 내가 참 어리석기 때문에 그렇구나’ 하고 자기가 반성을 하고 그렇지 않을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질 수 있어야 되는데, 반대가 돼버릴 것 같으면 항상 나쁜 불선업들을 쌓게 된다는 거라.
그리고 좋고 나쁘고 하는 판단은 어떠한 경우든지 억제하도록 노력하라는 거라. 좋고 싫고 그리고 뭔가 하기 싫어하는 것들, 노력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들, 이런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억제하고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그래서 그것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더욱 더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야 마음의 향상으로 나아가진다는 거라.
그리고 항상 마음에서 해탈이 최종적인 목표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걸림이 되는 것이면, 설혹 그게 부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중단하라는 거라. 설혹 그것이 나의 목숨을 빨리 빼앗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해탈을 향한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주저없이 행하라는 거라.
그래야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음의 향상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도덕입니다. 기본적인 밑바탕을 갖추어야 됩니다.
화내지 않고 남을 비난하지 않고 항상 정직하고 그리고 만족할 줄 알고, 이런 마음들을 항상 기본적인 베이스로써 가지고 있어야 만이 바르게 살아가게 된다는 거라.
설혹 이생에서 해탈에 이르지 못하고 또는 이생에서 마음의 향상이 많이 되지를 않고 또 부를 많이 획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조금 전에 얘기한 그런 도덕적인 것들을 갖출 거 같으면 적어도 이생에서도 행복하고 또 다음생에서도 행복한 조건들을 갖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재가자들은 이 세 가지는 항상 잊어버리지 말고 갖추도록 하고 이것이 서로 맞물리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부의 획득만을 바랄 것 같으면 나머지를 죽여버릴 가능성도 있고, 마음의 향상만 생각하다 보면 베풀고 하는 것들을 등한시할 수가 있고, 도덕적인 것들을 등한시하다 보면 자기 자신의 것만 옳다고 자꾸 얘기를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서로 물고 물리는, 서로 상승 관계가 되도록 그렇게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어쨌든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새롭게 일어나는 것들을 만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눕빠도 수캉, 일어나는 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일어나는 것이 없으면 그것같이 행복한 것이 없다 하는 걸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속에 나태와 게으름, 분노, 남을 해칠려고 하는 마음, 의심들, 이런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새롭게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반드시 수행에서 제거해야 될 것들입니다. 뛰어넘어야 될 장애물입니다. 그 장애물들을 만들지도 말아야 되는 거고, 그 장애물을 만나면 분명하게 그것들을 알아차려서 그것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 > 2014~2015 일상수행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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