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나(dāna)-보시를 방해하는 요소들 (20141113)
다나(dāna), 보통 보시라고 하는 겁니다.
"베풂을 방해하는 요소들과 다나(dāna)만으로 만족하지 말아라" 하는 얘기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예류과에 이르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뭘까?
(수행자 대답 : 유신견이 사라집니다.)
당연히 그렇지. 그런데 그거는, 유신견이 사라지고, 의심이 사라지고, 계금취가 사라지고, 그런 것들인데 유신견이 사라지면 어떻게 드러나질까? 밖으로 드러날 때.
어떻게 드러나져요? 저 사람이 유신견이 사라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여러분들이 알아? 얘기해 보면 알아요? '나'라고 하는 견해가 있는지 없는지, 나의 견해를 고집하는지 안 하는지?
그게 보통 드러나지는 것이 뭐냐면 인색함(macchariya 맛차리야)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들로 드러나집니다. 나라고 하는 견해, 나의 견해에 집착하지 않으면 인색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거하고 충돌하지도 않고, 그리고 자꾸 베풀려고 하는 그런 성향들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누가 법을 설해달라고 하면 그걸 거절을 못해. 아직 법을 설하기를 꺼려하고 법을 안 설할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직은 수다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단적인 것들이고.
사실은 그 인색함을 사라지게 하는 게 수다원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입니다.
여러분은 수다원이 되기 전에 뭐로 가지고 인색함을 없앨까?
(수행자 대답 : 보시로)
네. 보시로 없앨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죠? 인색함이 드러나지 않게끔은 합니다. 그런데 보시를 하면 또 다른 특징이 인색함도 드러나지 않게끔 할 뿐만 아니라 자애의 마음을 키울 수가 있습니다.
보시라고 하는 걸 자꾸 다르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조금 전에도 탁발공양 하면서 보시들을 쭉 했는데, 그걸 단순히 '공덕 쌓기 위한 것이다' 하고 생각할 것 같으면 원래의 목적을 자꾸 잊어버리게 됩니다. 보시를 하는 거는, 남에게 베푸는 거는 뭐 때문에 베풀어? 자기 거 가지고 있으면서 안 줄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기 위한 거잖아! 그리고 남에 대해서 '아, 저 사람도 행복하고, 저 사람이 고통이 없기를' 하는 그런 마음을 바라는 것들이라. 저걸 베풂으로 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저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는 거고.
사실은 보시를 하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인색함을 없애고 자애의 마음을 마음에 자리 잡기 위해서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당연히 얻어지는 게 공덕행이다 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단지 내가 공덕을 행하기 위해서 보시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이미 그것은 보시를 방해하는 요인으로써 작용을 해버리는 거라.
경전에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출가한 스님이 탁발해서 뭔가를 얻었으면 요마만한 걸 얻어도 이걸 자기가 다 먹기도 모자란 데도 자기는 그중에 일부만 먹고 나머지를 전부 다 나눠줘버립니다. 작은 걸 받아도 큰 걸 받아도 그냥 모든 것들을 공평하게 다 나눌려고 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같이 출가한 스님뿐 아니라 같이 키우고 있는 개든지 고양이든지 이런 것에도 똑같이 나눕니다. 어떨 때는 자기 먹기도 모자라는 것들이 오면, 하루에 한 끼 먹어야 되는데 그것조차도 모자라는 실정인데도 다 나눠주고 자기는 조금 밖에 안 먹는다는 거라.
사실은 출가한 스님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출가하기 전에 여러 가지 인연들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전에 출가하기 전에는 뭐든지 많이 가질려고 했거든. 재산도 많이 가질려고 그랬고, 명예도 더 얻기를 바라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인색한 것이 딱 고정화 되다시피 하게 됐거든. 그래서 생일날이니까, "오늘은 생일날이니까 좀 맛있는 걸 차려가지고 다른 사람들 좀 초청했으면 좋겠다" 하고 마누라가 얘기하니까, 인색함이 딱 자리 잡고 있으니까 그거 같이 먹는 것도 아까운 거야. 그것도 자기 가족들, 특히 아내조차도 같이 먹는 것이 아까워. 내 생일인데 하는 생각 때문에, 오로지 나 혼자 먹기 위해서 생일밥을 만들어라고 할 정도로.
그때 인제 부처님이 방문해서 탁발을 와서 '그 생일 밥 나 좀 나눠주시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부처님한테 나눠주는데 부처님이 그때 그런 얘기를 하게 됩니다.
"인색함을 가지고 있으면 이생에서도 괴롭고, 다음 생에도 괴로운 것이다." 이생에서도 당연히 내 주위에 나를 옹호해 주고 나에게 친구가 돼주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인색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음 생에 태어나는 것도 단지 어려운 상태로써 빠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각각의 현상들이 보여집니다. 남에게 쫓기는 현상, 그리고 개들이 쫓아와서 나의 다리를 무는 것, 여러 가지들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아, 이렇게 해가지고는 안되겠다' 싶어가지고 출가를 하겠다고 그러는 거라. 그러다가 수다원에 이르르게 되니까 출가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인색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무조건 같이 나눌려고 하는 거라. 그런 현상들로 바뀌게 됩니다.
다나(보시)를 방해하는 요소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게,
그래서 인색함(macchariya)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색함이 있으면은 보시를 해도 그게 큰 공덕으로 돌아가질 않는 거라.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보시를 해도 뭐 그런 이익도 없습니다.
그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한테 맨날 공양 올리고 보시를 했는데도 꿈속에서 자꾸 안 좋은 현상들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왜 이런 현상들이 자꾸 보입니까?" 그러니까 "네가 보시를 하고 나서 다른 사람과 나눌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다."
여러분은 조금 전에 탁발해서 스님에게 공양물을 올렸지만, 올리고 나서 그냥 헤벌레 하고 기분 좋아서 그냥 들어가죠? 그때 마음에서 '아, 내가 이런 보시행을 행한 이런 공덕을 모든 이들과 같이 나누겠다.' 모든 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내 가족에게도 이런 공덕이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있느냐는 거라.
보시를 행했는데도, 특히 부처님한테 행했는데도 그런 악한 일들이 자꾸 꿈에 보이고, 안 좋은 것들이 보이고 하는 것은 나눌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렇다 하는 거라. 자기가 쌓은 것들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 해버리면 안됩니다. 그거는 어떤 면에서는 탐욕심입니다.
그래서 보시를 방해하는 두 번째 요인은 이 탐욕심들입니다. 자기 것만으로 삼을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어째서 자기 것인가? 오늘 음식물 만들었지만 음식물 만들 때 다른 사람들의 희생 없이 되는 경우가 있나? 그런 법은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물을 만들었지만 그 시간에는 가족을 위해서 뭔가 해야 될 일도 못하게 되는 거고, 또 그러한 보시물들이 들어오도록 만들어주는 거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것으로 만들었지 뭐 자기가 만든 거라? 가족들도 마찬가지라. 그런 것들을 용인하기 때문에 음식물 만드는 걸 지켜보고 하는 것이지 자기 혼자서 만든 것은 아니라는 거라. 하물며 가족들도 그러는데 다른 이들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보시를 할 때 '아, 나에게 내 혼자 이걸 독차지 할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잘 살펴봐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성냄의 마음. 이거는 어떤 면에서는 '잔인함'과 관계가 됩니다. 맛있게 뭔가를 하기 위해서 그것을 희생을 해가면서 맛있게 공양물을 만드는 것은 그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언제 뭐 맛있는 거 갖다주라고 그랬어? 그런데 자기들 생각에 '아, 스님한테 맛있는 거 해드려야 되겠다' 싶어 갖고 생고기, 그냥 생선 이런 거 벌떡이는 걸 잡아 갖고 가져왔다, 그걸 만들 때 죽이려고 하는 의도가 그 사람에게 없어? 그리고 죽이는 행위들도 있었고, 오히려 잔인함이 있는 상태에서 그 음식들을 만들게 됩니다.
보시를 하고 나면 모든 대상들, 모든 중생들에 대해서 측은한 마음이 항상 들어야 됩니다. 까루나(karuṇā)의 마음! '아, 저 사람이 고통이 없기를, 이것으로 인해서 행복하기를' 그런 마음이 들어야 되는 것이지, 그런 마음이 들지 않고 그냥 보시를 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도 나의 보시행을 방해하는 요인이 돼버리게 됩니다.
남을 해칠려고 하는 마음, 남이 고통스럽게 되는 상태를 만들지 않을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만이 온당한 보시가 됩니다. 보시를 하는데 방해를 하는 요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잔인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해칠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지는 것.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그런 잔인함이나 해칠려고 하는 마음들, 남이 잘되는 것들을 못보고 하는 그런 경향들은 자꾸 없어져야 되는 것들이라.
그래서 경전에는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까루나가 이런 잔인함과 성냄을 제압할 수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는 어리석은 마음인데, 이거는 원인·결과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할 때 일어나게 됩니다.
바른 견해를 가진다는 것은 업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를 가진다는 얘깁니다. 내가 선한 마음으로 보시를 했을 때 선한 결과가 온다는 사실! 그런데 가끔씩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부정을 하고 그냥 단순히 스님 맛있는 음식 드시게 할려고 탁발을 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각을!
그런데 내가 맛있게 먹을 거 같으면 내가 뭐하러 이렇게 식은 것들을 받아가지고 먹어? 그냥 여기서 다 만들어가지고 먹지. 따뜻하게! 그리고 내가 먹고 싶은 거, 내가 원하는 거 이거 해줘, 저거 해줘 해가지고 먹지. 뭐가 들어올지도 모르고, 아침에 만든 거 점심때 먹을 때 싸늘하게 식어있는 건데, 왜 그거 먹을려고 그래?
따뜻한 밥을 먹고 또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기 위해서 탁발을 받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선한 일을 했으면 선한 결과를 낳게 하기 위한 것들이 주목적입니다. 그럼 본인은 탁발을 할 때 '아, 내가 이런 선한 마음으로 선한 일들을 했기 때문에 선한 결과가 온다'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게 바른 것이지, 그냥 단순하게 따뜻한 밥 맛있는 거 잡숫게 한다? 그럴 거 같으면 그 사람은 보시를 하면서도 오히려 어리석은 마음을 자꾸 만들게 된다는 거라.
며칠 전에 어느 보살님을 만났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공덕, 공덕 하는데 나는 아직도 공덕이 뭔지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선원이나 절에 무슨 행사가 있으면 보시를 하고 뭘 하고 그리하는데 나는 그게 공덕이 되는지 전혀 감을 못 잡겠습니다." 그렇게 얘길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자신에게 직접 돌아오는 게 당장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봅시다. 범어사에 요즘 입시기도 하는데, 입시기도비를 냈다면. 뭐 떨어지고 붙고 하는 거는 그 입시기도비 가지고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라.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보시를 할 때, 그것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할 거 같으면 다행인데 그렇게 하질 못합니다. 오히려 정당한 방법으로 그것이 보시가 돼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이것을 보시할 거 같으면 나에게 이러한 이익들이 즉시 나타나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탁발을 해서 공양을 올렸으니까 법을 전해 받는 그런 즉각적인 이익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야만이 탁발보시를 한 사람들이 '아, 내가 한 행위에 대해서 결과가 나타나는구나' 하는 것이 눈에 드러나지게 되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나는 보시를 해도 그게 공덕이 되는지를 모른다고 그러는 거라.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은 그렇다고 해가지고 보시한 것이 공덕이 안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것이 선한 쪽으로써 쓰여지게 될 때 선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거고, 선한 쪽으로 쓰이지 않을 때는 그런 선한 결과가 일어나질 않는 것일 뿐입니다. 원인·결과는 분명한 겁니다. 도둑놈한테 돈 줘 봐야, 아니면 술주정뱅이한테 돈 줘 봐야 그 사람은 다른 목적으로 써버린다는 거라. 그럼 나에게는 그 결과는 없어! 배고픈 아이에게 돈을 주면은 그것 가지고 아이는 빵을 사 먹는 거라. 빵을 사 먹는 좋은 결과가 있게 되는 거라. 그러면은 똑같은 돈을 냈지만 배고픈 아이에게 준 돈은 나에게는 좋은 결과가 일어나는 거라.
원인·결과는 그것이 선한 결과든 악한 결과든 그것은 본인이 어떠한 데에다가 보시를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원인·결과가 분명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런데 중요한 거는 가끔씩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보시를 받을 때 그 보시의 무게가 '좀 무겁다' 하고 느껴야 되는데 스님조차도 그럴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저 저울추에 맞춰가지고 내가 뭔가를 해야 되겠다'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되는데 어떤 때는 그런 마음이 전혀 안 일어나는 거라. 뭔가를 많이 받았는데도. 거 왜 그럴까?
보시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원인·결과에 대해서 마음을 가지지 않고 보시를 하게 되고, 또 보시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 보시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않고 보시를 하게 될 때는, 내가 이 균형추를 맞춰야 될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는 거라. 뭔가를 재물보시를 받았으면 내가 법으로써 보시를 하게 돼있는데, 그래서 저울추의 균형을 맞춰줄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데, 균형 잡을 게 없어져버립니다.
보시한 것들은 어떤 경우든지 원인·결과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보시를 할 때는 이런 어리석은 마음들을 제거시켜줄려고 자꾸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보시를 하는 자는 하면 할수록 어리석은 마음이 점점 없어져야 되는 거라. 원인·결과에 대해서,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는 잇사(issā)라 해서 '시기·질투'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되는 걸 못마땅해하는 그런 것들을 말합니다. 내가 탁발 올린 걸 다른 사람들이 탁발 올린 것보다 적게 먹으면 기분 나빠합니다. '내 거 좀 많이 드시지' 보시하면서 오히려 시기 질투하는 마음들이 더 생겨나버린다는 겁니다. 보시자는 보시를 한 것으로 이미 자기 할 일을 끝낸 겁니다.
얼마 전에도 까티나 법회를 했는데, 대체로 다른 사람들 십만원 하면 나는 이십만원 해야지, 이십만원 보시합니다. 그럴 필요가 뭐 있어? 능력이 될 거 같으면 이십만원 하게 되는 거고, 능력이 안 되면 오만원 하면 돼! 그게 바른 것들이라.
그런데 남과 왜 비교를 하고, 남이 잘하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필요 없는 것이다’ 하고 시기·질투하느냐는 거라. 남이 행한 선한 행위들에 대해서 ‘그거 뭐 별거 아니라’고 하는 생각을 왜 가지느냐는 거라.
보시를 방해하는 것은 이런 시기·질투가 있을 때 방해를 하게 됩니다. 시기·질투가 점점 사라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든 똑같은 것들, 똑같은 마음으로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어떠한 것들도 평등하다는 생각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내가 한 것들이 최고다. 또는 내가 행한 것들이 옳다.' 이렇게 생각할 거 같으면 그것은 시기·질투를 더욱더 부채질하는 경우가 돼버립니다.
보시를 할 경우에는 어떤 경우든지 똑같습니다. 현금을 보시를 하든, 아니면 물품으로 보시를 하든, 아니면 마음으로 보시를 하든 그것은 똑같습니다.
그다음에 아까 인색한 부분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인색함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장소에 대한 인색함(아와사 맛차리야, āvāsa-macchariya)입니다.
우리 선원도 보면 딱 자기 자리 정해져 있어요. 거의 대부분이! 거기 누가 앉을려고 그러면 겁이 나서 앉지도 못해. 인색함이 있어서 그렇게 정해진 건 아니죠? 법을 좀 오래 들었다 싶은 사람은 앞에 앉고, 처음 온 사람들은 앞사람들 따라가야 되니까 뒤에 앉고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반대죠. 오히려!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어떤 경우든지 스님이나 부처님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법을 오래도록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마만큼 뒷사람들은 그냥 그거 보고 따라 하면 돼. 그게 맞는 겁니다.
또는 이번 결제할 때 스님이 안거 게송 받고 할 때, 전부 다 같이 해버렸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보니까 그게 탁 드러나져요. 자리에 대해서 인색한 것들이. '아, 내가 몇 년 더 일찍 안거했으니까 내가 선배다.' 하는 생각. 선배라 하는 것은 그렇게 드러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더 친절하게 대하고, 더욱더 모범이 되는 사람이 돼야 되는 것이지 앞자리에 앉는다고 해서 선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게 눈에 보이기에 아, 이게 사람들에게 오히려 자리에 대한 인색함들을 더욱 길러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이번에 싹 없애버렸어요. 아마 눈치 챈 사람은 챘고 못 챈 사람은 못 챘을 건데, 여러분들은 그런 자리에 대한 인색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설혹 내 자리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다른 사람이 앉으면 “아, 잘했다” 하고 나는 뒷자리, 설혹 스님이 안 보이는 자리에 있더라도 전혀 불평불만이 없어야 되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꿀라 맛차리야(kula-macchariya)' 라고 하는 것.
여러분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스님', '우리 선원', 소속에 대한 인색함!
참 사람들이 안 없어지는 게 그런 것들입니다. 소속에 대한 것! 나는 어디 선원 다닌다 하면 그거에 좀 자부심을 가지고, 어디 이름 없는 데에 다닌다 할 거 같으면 괜히 얕보고. 그것이 그 사람을 높여주는 것이 아닌데도 하여튼 그런다는 거라.
예를 들어서 나 범어서 다닌다고 할 거 같으면 사람들이 아니까 으쓱해지는데, 붓다의 길따라 다닌다고 하니까 "거 어딨는데?" 하니까 말도 못하고. 그걸 꿀라 맛차리야 라고 그럽니다.
자기가 소속된 곳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 것.
하나 더 나아가서 그런 조직에 대해서도 얽매여 있지 않는 것.
법이 맞는 곳이면 그 조직이 어떤 조직이든 크든 작든 유명하든 안 하든 간에 가서 들으면 돼! 법을 바르게 설하지 않는 곳이라면 그곳이 아무리 크고 유명하다 그러더라도 그것은 갈 자리가 아닌 것이고. 스승이 그렇지 못하다 하면 거기도 가서는 안 돼야 되는 것이고.
그런데 그런데에 집착을 가지고 그런데에 얽매여버리면 인색함만 더욱더 강해져 버리는 거라. 남에 대해서 배척하게 되고.
그런 사람들은 경전 주석서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마음에 동요함이 많다' 하고 얘기합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평정돼있는 상태, 어떠한 것에도 평온함을 유지를 해야 되는데, 조금만 자극이 가도 동요하기 쉽다는 거라. 우르르 갔다 우르르르 오고 이렇게.
그다음에 세 번째가 '라바 맛차리야(lābha-macchariya)' 라고 합니다.
소유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마음은 분주해집니다. 우리 선원도 가끔씩 보면 소유물이 많아요. 많으니까 청소할 때도 청소할 데가 더 많아져. 구석구석이! 마음이 분주해지지 않을려고 할 거 같으면 그런 소유물들에 대해서 줄여야 됩니다. 필요한 것만 가지고 있도록 하고. 마음이 분주해져가지고는 어떠한 경우든지 바른 마음으로 보시를 하기가 힘들어져 버립니다. 당연히 수행하는 것들도 더욱더 늦어지게 되는 거고.
그다음에 네 번째가 완나 맛차리야(vaṇṇa-macchariya)라고 합니다. 공에 대해서 인색한 것.
'내가 꼭 있어야 돼. 내가 없으면 안 돼' 하는 그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내가 한 것에 대해서는 남들에게 내세워야 되는 거고. 선한 일들을 더욱더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러한 것들이 중요한 것들은 아닙니다.
자신이 얻게 될 여러 가지 이익들이나 명예 이런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지 말고 그러한 조직에도 집착하지 말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아까 얘기했죠.
다섯 번째 담마, 법에 대해서 인색한 것. 담마 맛차리야(dhamma-macchariya)
법을 펼치는데, 또 법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려고 하는데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 인제 맛차리야 라고 하는 부분들이고.
그다음에 몇 번째죠? (수행자 대답 : 여섯 번째입니다.)
여섯 번째죠. 마나(māna)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만심! 자만심이 강해서는 안 됩니다.
나눠준다는 건 뭡니까? 내 것을 남들에게 필요하게끔 베풀어준다는 의미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그것에 대해서 번뇌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나를 내세울 거 같으면 그거를 뭐 하러 해? 그것이 설혹 보시라고 하더라도! 나를 내세우지 않도록 자꾸 해야만이 됩니다.
수행에서도 나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뿐입니다. 관찰할 대상일 뿐입니다. 보시하는 자가 마음에서 이런 '마나'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은 그 보시를 방해하는 요인이 돼버립니다.
시간이 좀 많이 흘러버렸는데, 어쨌든 이 보시라고 하는 것들은 방해하는 요인이 없도록 만들어야 되고, 보시는 무엇 때문에 보시를 하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보시하는 것만으로 가장 중요한 인색함을 다 없앨 수는 없습니다.
또는 자애의 마음을 항상 충족되게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자애를 키울려면 자애수행을 해야 되는 거고, 인색함을 없앨려면 수행을 해야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 없이 인색함과 자애의 마음을 완전하게 가지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보시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일어난 대상은 반드시 알아차릴려고 하라는 거라.
인색한 마음이 일어났으면 인색한 마음이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기쁨의 마음이 일어났으면 기쁨의 마음이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지금 현재 하고 있는 것들이 손을 뻗고 있으면 손을 뻗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은 어떠한 경우도 그렇게 하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장소, 시간, 동작, 위의(威儀)를 가리지 않고 해야 됩니다.
손을 뻗은 동작이면 손을 뻗은 동작으로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밥을 먹으면 밥을 먹는다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수행은 좌선, 경행만으로써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탁발하는 장소면 탁발하는 장소가 여러분들의 수행처입니다.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설거지하는 장소가 여러분들의 수행처입니다. 그 장소를 가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또는 누워있을 때는 누워있는 대로 수행할 상태입니다. 또는 앉아있으면, 걸어가면 어떠한 경우든지 행주좌와 그 위의(威儀)가 다 수행하는 대상이 되어야 되는 거고,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 형태도 가려서는 안됩니다. '나는 좌선, 경행만 할 때 수행을 한다.' 그건 어불성설입니다. 자기 전에 하는 수행이 있고, 또 똑같이 누워서라도 누워서 하는 수행이 있습니다. 분명하게 구분해서 그리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시간을 선택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하는 시간이 어딨어요? 집중수행하는 시간은 있을 수가 있을지 몰라도 일상적으로 하는 수행은 시간을 선택하지를 않습니다.
이 네 가지는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다!
단지 대상이 생기는 순간 그 일어나는 채로 순간순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
그러다 보면 자애수행을 할 경우에는 자애의 마음이 충족될 것이고, 위빳사나 수행을 하다 보면 유신견을 제거해 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보시하는 것으로 인해서 생겨난 일시적이고 억눌러졌던 인색함과 자애의 마음들을 완전하게 획득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보시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을 수행의 수단으로 삼아서 수행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지시길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질의응답 >
수행자 질문 : 스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보통 보면 보시나 특히 교회 같은데 가면 연보를 하는데 자리에 돈 넣을 때 보면 작게 내는 사람은 남이 보지 못하게 살짝 감추어서 넣는 경우들이 있기도 한데, 그러면 그때의 마음은 무지로 봐야 됩니까, 안 그러면 마나(māna)로 봐야 됩니까?
스님 답변 : 그것은 부끄러워함이지. 수다원에 이르면 두 번째 일어나는 게 뭐냐면 '히리 옷땁빠(hiri-ottappa)'입니다. 부끄러워하고 그리고 악한 일들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들은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행위들은 나의 형편에서 정당한 겁니다. 그걸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에서 보시를 하게 되는 거라. 부끄러워하는 것은 악한 마음에는 해당이 되지는 않습니다. 악한 마음에는 해당이 되지는 않지만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마음들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내가 하는 것들은 보시할 때는 보시하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겁니다. 첫 번째가!
그다음에 두 번째가 보시할 때 보시하는 것들이 생겨난 것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생겨났는가 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세 번째는 이 보시를 했을 때 이 보시를 받는 자가 합당한가 하는 것이 세 번째입니다.
이 세 가지가 다 갖춰지면 가장 좋은 것이고, 설혹 다 갖춰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처음에 보시하는 사람은 보시할 때의 마음을 분명하게 내어야 됩니다. 그런데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내버리면 첫 번째부터가 틀려져 버리게 됩니다. 설혹 불전함에 백 원짜리를 넣으면 어떻고 오백 원짜리를 넣으면 어때? 나는 바른 보시를 하고 있는데! 그게 첫 번째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워하는 것들은 악한 행위에는 들지는 않지만 그것도 우리가 키워가야 될 부분입니다. 부끄러워하는 것은 그걸 부끄러워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오백원을 안 넣은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해야 되는 것이지 오백원을 넣은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해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워함도 키워가야 되는 겁니다. 내가 설혹 오백원을 안 넣었을 때 아, 내가 오백원을 안 넣었다 해서 부끄러워해야 되는 것이지 오백원을 냈는데 왜 부끄러워 해야 돼?
수행자 질문 : 제 질문의 의도는 오백원을 넣으면서 부끄러워가지고 감추어가면서 보시를 하게 될 때에 그 마음 상태를, 어떠한 마음의 심성인가 그것을 여쭤본 것입니다.
스님 답변 : 조금 전에 얘기했듯이 그 부끄러워하는 것들입니다. 마나(māna)는 그 뒤에 생기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들에 대해서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이 생겨나면 마나가 생겨나는 것이고. 보시를 할 때 처음에 감출려고 하는 것들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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