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길 (20141209)
··· 왕자를 본 아시타 선인이 울었어요.
왜 싯달타 왕자를 보고 아시타 선인이 울었을까? 뭐라고 설명돼있어요? (수행자 대답) 그렇죠. 돌아가시고 없기 때문에, 그 법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서러워서 울었는데.
가끔씩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 내가 이 법을 만난 게 참 다행이다. 참 행복하다. 내가 이 법을 못 들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생각이 강해지면 아시타 선인 같이 법을 들을 수 없다는 것만 하더라도 굉장히 불행한 거라. 그마만큼 복을 못 쌓은 거지. 부처님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자기가 돌아갈 운명이니까.
만약에 법을 들을 수 없는 조건이면 어떻게 해야 될까?
다른 얘기로 하면 여러분이 이생에서 아, 나는 도저히 깨달음에 이르기는 틀렸다. 열반에 이르기는 도저히 힘들 것 같다. 그럼 여러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어요? 뭐 해야 돼?
이생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 없어요? 그럼 아예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야? 해볼 때까지는 열심히 해보자는 건가? 그리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생에서 아라한이 되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이때까지 역사를 봐가지고.
그래서 동남아시아에서는 그럴 때 차선으로 선택하는 게 물론 해탈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깨달음을 향해서. 그거는 어떤 경우든 놓칠 수가 없는 거고.
그리하더라도 설혹 이생에서 내가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내가 나에게 남는 것들은 있도록 한다는 거라. 그래서 공덕 쌓는 일들을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거고, 여러 가지 바라밀들 열 가지 바라밀들, 조금 전에 오계를 지키는 것, 보시하는 것, 아니면 내가 남에게 자비의 마음을 가지는 것, 이런 것들을 지속적으로 계속 한다는 거라.
그것들을 놓쳐버리는 상태에서 해탈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해탈을 향해서 나아갈려면 자기 혼자 해야 됩니다.
베풀고 또는 남에게 자애를 베푼다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그런데 계속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면 참 좋은데 그럴 조건이 안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두 가지를 그래서 동시에 행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이생에서는!
아시타 선인 같으면 아, 내가 깨달은 분 성자의 법문을 들을 수 없는 조건이다. 그럼 아시타 선인 같으면 뭘 해야 될까?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공덕행을 쌓는 일일 거고, 그럼 그분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딱 정해집니다.
나하고 관계있는 사람들이 그 부처님 법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아시타 스님 입장일 거 같으면, 주변의 가족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매일 한토막씩이라도 들려주는 거라. 내가 아직 부처님이 아니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이들이나 아니면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들려주는 것들이라.
사실은 아시타 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자기의 여동생의 아들의 이름이 꼰단냐죠? 그 꼰단냐에게 너는 반드시 다음에 수행자로 살아가다가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 부처님이 법의 수래바퀴를 굴린다 하는 소리를 들을 거 같으면 얼른 그 밑에 쫒아가서 법을 듣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꼰단냐는.
그래서 부처님 제자 중에 맨처음 깨달은 분이 꼰단냐죠? 다섯 명의 수행자 중에.
꼰단냐가 부처님인 걸 알아보는 게송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뭐로 유지돼나갑니까 하고 얘기합니다. 이 세상이 유지되고 지탱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지탱하느냐는 거라. 이 세상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뭐로 가지고 살아가요? 안이비설신의 입니다. 그 육근이 없으면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것들입니다. 볼 때 제대로 보고 냄새 맡을 때 제대로 냄새 맡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거 안 좋은 냄새 맡는다는지 안 좋은 맛을 느끼다든지 이럴 거 같으면 그건 부처님 법하고는 거리가 멀어져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제대로 된 성자들은 제대로 보고 제대로 맛보고 한다는 거라. 제대로 말하고.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제대로 맛보고 제대로 말하고 제대로 느끼고 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해야 되요? 보면 '본다' 하고 알아차리고 냄새 맡으면 '냄새 맡는다' 하고 알아차리고 맛보면 '맛본다' 하고 알아차리면 되겠죠!
그런데 그건 어떻게 보면 좀 막연하죠?
그래서 게송에 뭐라고 돼있느냐면, "베푸는 것 중에 최상의 베푸는 것은 법을 베푸는 것이다. 법을 말하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베풀 때 두 가지를 기준점으로 합니다.
대가를 기대하는 것 또는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것!
대부분 세상에는 이 두 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뭘 하나 남에게 뭘 준다. 하더라도 돌아오지 않으면 뭔가 섭섭해하는 것은 뭔가 대가를 기대하고 준 것이라는 거라. 만약에 자식들이 학원간다 할 거 같으면 학원가도록 만들어주는 것도 베푸는 겁니다. 그것도 어찌 보면 저놈이 학원 가가지고 성적이 올라야 되는데 성적이 안 오르면 성질이 나는 것은 그것도 대가를 기대하고 베푸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 없이 학원을 보내준다고 칩시다. 그럼 그건 또 과연 맞을까? 그렇게 해가지고 성적이 안 오르면 어떡할 건데? 그냥 내버려둬야 돼? 그렇지는 않죠? 그렇게 될 때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학원을 바꾸든지 이렇게 해나갈 겁니다. 아니면 뭐가 문제인지 문제점을 찾아가지고 문제점을 해결할려고 할 겁니다. 애들하고 관계가 안 좋으면 관계가 좋도록 만들든지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다른 베풀거리들을 해나가게 됩니다.
기대하는 것이 없는 것은 세상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나타나야만이 그것들을 우리는 바르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이치로 볼 거 같으면 뭐든지 나누어주고 베풀고 한다는 것은 이 두 가지에 다 들어갑니다. 대가를 기대하는 것과,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 범주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될까?
경전에 있는 구절을 하나 읽어드릴게요.
「지금 마음이 온화하고 맑고 깨끗해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다시 타락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한번 좋은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멈추지 말고
그것을 유지하고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해서는
선한 마음을 증장시키는 것은 빠뜨릴 수가 없는 것이고,
그 증장시킨 선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도록 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라.
그렇게 된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맑고 선한 마음은
무상을 보는 지혜를 기르는 기반이 된다.
이 지혜에 의해서 욕구와 무지를 끊을 수 있어서 해탈·열반으로 향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살아가는 데는 안이비설신의가 있어야만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먹고 맛보고, 또 보고 듣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먹고 보고 듣고 할 동안에 선한 마음을 유지시켜 줄려면 보면 보는 줄을 분명히 알아야 되는 거고 들리면 들리는 줄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우리는 갈애가 일어나고 원하는 것들 싫어하는 것들이 생겨난다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보면 본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들으면 들린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일시적으로 선한 마음이 일어났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그걸 유지시켜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라.
그래서 끊임없이 유지시켜 주기 위해서는 보고 있으면 본다고 알아차려야 된다는 거라. 뭘 보고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하는 걸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찰나 간에 다시 나쁜 마음이 일어나든지 아니면 갈애가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마음들을 끊임없이 유지시켜 나가줘야 된다는 거라.
그렇게 유지시켜주는 것이 수행에서는 되게 중요하다는 거라.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해서는 이런 선한 마음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거라.
보면 본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면 선한 마음을 유지시켜나갈 수가 없다는 거라.
맛보면 맛본다고 분명히 알아차려야 되는거고,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호흡하고 있으면 호흡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것들을 갖다가 끊임없이 유지해나가라는 거라.
유지해나갈 때만이 선한 마음이 끊임없이 유지된다는 거라.
생명을 지탱해나가는 것은 안이비설신의라는 거라. 그 안이비설신의를 선한 쪽으로 유지해나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거라. 안이비설신의에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들이 선한 쪽으로. 그렇게 하다 보면은 마음은 계속 선한 방향으로 일어나게끔 되고, 그런 선한 마음이 일어나다 보면 그렇게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인해서 무상을 보는 지혜를 이룰 수가 있다는 거라.
호흡을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걸 관찰하다 보니까 어, 호흡이 변화하고 있네 하고 알아차린다는 거라. 걸어가는 발걸음을 알아차리다 보니까 발을 들어올리는데 보니까 그냥 들어올림 하나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그 느낌들이 변하고 있다 하는 걸 알아차린다는 거라.
그렇게 변화를 알아차려야만이 이게 지혜의 기반이 된다는 거라,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혜가 없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그다음에 여러 가지 공덕들을 쌓고 하는 것은 지혜를 기반으로 하기 위한 겁니다.
지혜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그거는 별 의미가 없어. 1회성으로 끝나버리든지 마음은 언제든지 나쁜 방향으로 기울어져버립니다.
무상한 성품을 보아야만이 지혜를 기반하는, 지혜를 바탕으로 둘 수 있는 조건이 돼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단순히 호흡을 관찰할 때도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만 알아차리려고 하지 말고,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일어나는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려라는 거라.
무상한 것을 알기 위해서.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할 때도 발을 들어올릴 때 일어나는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발을 내려놓고 할 때의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거라.
그 지혜가 바로 욕구와 무지를 끊을 수가 있다는 거라.
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이 법을 듣고 법을 실천하는 것은 해탈·열반에 이르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이 생사윤회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다시는 더이상 윤회하지 않기 위한 것들이라는 거라. 그 법 어디에 대가를 기대한다든지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다든지 이런 조건은 아예 없습니다.
세상의 조건하고 법의 조건은 그래서 다른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가장 뛰어난 보시, 베풂이라는 것은 법을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든 아니면 자기 자신이든 아니면 자신의 가족이나 주변이든 그 주변에 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베푸는 것은 법을 베푸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러면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아, 오늘은 법구경 하나 한번 읽어보자 해서 법구경 게송 하나 읽어주고, 그래서 그 들은 사람이 맑고 깨끗한 마음이 일어나서 무상한 성품을 보고 지혜가 일어나도록 해서 해탈·열반을 향하도록 실천할 수 있는 마음들을 가지도록 해주는 것.
또는 나하고 관계없는 사람일 것 같으면 내가 법을 실천해봤으니까, 그 법의 맛을 알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에 대해서 항상 자애의 마음을 가지는 것, 그래서 당신이 항상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마음을 가져 주는 거라.
내가 법을 실천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걸 베풀어주는 거라. 나누어주는 거라. 베풀어주는 것은 그거 이상 가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런데 자꾸 사람들은 잊어버립니다. 이걸 잊어버리고 끊임없이 뭔가 물질적인 것을 베푸는 것만 자꾸 생각한다는 거라. 물질적인 것들을 베푸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앞에 얘기한 세속적인 두 가지 조건에 다 해당이 된다는 거라. 대가를 기대하든 대가를 기대하지 않든.
대가를 기대하든 대가를 기대하지 않든 그것은 윤회의 카테고리에 있는 것이지, 윤회를 벗어나는 카테고리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경전에 그래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법을 베풀 수 있는 법사의 자격을 갖추는 시험들을 치루고 할 때 항상 중요시 여기는 것들이 뭐냐면 사람이 있든 적게 있든 많이 있든 끊임없이 법을 베풀 수 있는 능력들을 가지도록 만들어 주어야 됩니다.
그게 안 되면 법을 베풀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많으면 법을 베풀고 사람들이 적으면 법을 베풀지 않는 것은 세속적인 일에 해당이 됩니다. 법을 베풀면서도.
뭔가 조건이 맞아야만이 법을 베풀 수 있고 그 조건이 사람의 인원수에 달렸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바른 법의 조건은 아니라는 거라. 또는 내가 법을 베푸는데 뭔가 많은 보시를 줘야만이 법을 베풀어 줄 있다 그거는 세속적인 조건이지 법의 조건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도 법을 동일하게 똑같은 조건으로서 베풀 수 있을 때 아, 인제 쟤는 법을 베풀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해서 법을 베풀어라 하고 그럽니다. 법문할 자격을 준다는 거라.
설법사의 자격에는 열 가지 조건을 갖춥니다.
테라담모 해가지고, 그 '담마를 베풀 수 있는 조건 열 가지(Theradhamma)를 갖춘 자'가 됐을 때 그 법을 베풀도록 그렇게 합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다고 하는 거라.
조건을 따지지를 않고, 또는 기대하는 것들을 가지지 않고, 끊임없이 베풀 수 있는 것이 법이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왜? 그 법은 나와 베푸는 상대방이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 베푸는 법들이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면 그건 부처님 가르침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는 거라.
아, 그 사람의 마음이 고요하게 되고 아, 내가 이 공부해서 참 좋다 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더 공부하게끔 만들고, 그거로 인해서 아, 내가 바라밀을 좀 더 행해야 되겠다, 아니면 수행을 더 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자꾸 일으키도록 만들어준다는 거라.
해탈·열반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법이지 해탈·열반과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법이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듣는 법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윤회를 끊는 해탈·열반의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좋은 것은 세속적인 좋고 싫음에 끄달려들어버린다는 거라.
이마만큼 좋은 게 어디 있는데. 그럼 여러분들이 하루라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법을 듣는 것, 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들입니다.
그다음 법을 베푼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법의 맛을 알지 못하면 정확하게 베풀지를 못합니다.
수행에서 아, 이렇게 해보니까 아, 진짜 마음이 대상에 몰입이 되고 그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고 했을 때 우리는 더욱더 수행할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수행해도 맨날 맹숭맹숭하고 아무런 변화도 없으면, 그 사람은 수행할려면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법의 맛을 본 사람들은 더욱 더 그 맛을 볼려고 열심히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 맛이 나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주고 향상되게 해주고 선한 마음을 줄기차게 일으켜주고, 그리고 나에게도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그래서 그것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도록 해주기 때문에 그 맛을 더욱 더 볼려고 한다는 거라.
그런데 세상에 있는 것은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거 두끼 먹고 세끼 먹고 계속 먹으면 맛이 없습니다. 조건 따라서 그 맛은 달라지게 돼있다는 거라. 고양이가 먹는 맛있는 것은 우리가 먹으면 맛이 없는 것이고, 똑같은 것이라도.
또는 혀라고 하는 조건에 따라서도 각각 달라집니다. 몸 상태 안 좋을 땐 아무리 맛있는 거 먹어도 맛있는 걸 몰라.
세상의 맛이라고 하는 것은 조건에 따라 달라지지만, 법의 맛은 그와 관계없이 그것을 맛보면 맛볼수록 더욱더 해탈·열반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만날 맛있는 거 먹을라고 하고, 가족들한테 맛있는 거 만날 먹일려고만 하지 말고, 법의 맛을 느끼도록 만들어줘야 되는 거라.
법의 맛은 그것을 맛본 자는 더욱 더 맛을 볼려고 합니다.
왜? 그 법의 맛으로 인해서 나에게 그거보다 더한 기쁨이나 행복이 없기 때문에.
법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자들은, 그 법이 여러분들을 보호하게 됩니다.
기쁨과 행복이 주변에 있을 거 같으면, 여러분들이 그 법의 소중함을 알아서 그 법을 보호하게끔 됩니다. 그것이 얼마만큼 소중한지를 알기 때문에.
그래서 법의 맛을 볼려고도 해야 될 뿐 아니라 법의 기쁨과 법의 행복을 알려고도 해야 됩니다. 아무리 기쁜 일이 있고. 아무리 행복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건을 가리지 않는 법의 기쁨과 법의 행복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은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살아가면서 갈애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뭔가 쾌락을 즐길려고 하는 갈애들,
또 여러분들 보고 죽어라 할 것 같으면 죽고 싶지 않다는 것,
또는 살아가면서 뭔가 할 때 포기해버릴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들,
그런 갈애들은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런 갈애들이 사실은 여러분을 괴로움으로 인도하는 건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게 괴로운 줄을 모릅니다.
맛있는 거 먹으면 그것에 그냥 끄달려들어가 버리게 되는 거고.
지금 내가 열심히 사는 것이 살고자 하는 욕구를 더 키운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못하는 거고.
또는 뭔가를 하기 싫어가지고 나태한 상태에 빠져있고 할 때도 그것이 내 갈애를 키우고 있다는 생각을 못 일으키고 있다는 거라.
아, 이게 갈애구나 하는 걸 알면은 그걸 더 할려고 하질 않는데, 그걸 대부분 모르고 산다는 거라.
그래서 그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이다 하는 겁니다.
죽음에 이른 사람도, 얼마 전에 누가 돌아가신 분이 있어요. 음식을 아무것도 못 먹고 보름 이상 사시더라고. 거의 숨이 할딱할딱 하면서도 그 생명을 놓지를 못해. 의식은 거의 없는 상태인데도. 그러니까 나이 드신 분들이 아, 내가 빨리 죽어야지 하는 소리는 전부 거짓말이라.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딨어?
그런데 그거 탁 놓는 순간에 그 사람 표정이 굉장히 평온해집니다.
그마만큼 평온해질 수가 없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놔버렸기 때문에 나에게는 더 이상 괴로움이 없는 거라. 그러면 표정부터가 금방 바뀌어버립니다.
여러분들도 혹시 그런 거 본 적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괴로워하다가도 마지막 죽음 몇초 아니면 몇분 사이에 갑자기 사람이 아주 평온해지는 겁니다.
붙잡고 있던 갈애라고 하는 것, 살고 싶다는 갈애를 탁 놔버리는 순간에 싹 평온해집니다. 평상시에 그리 좀 하고 살지. 평상시엔 못하다가 꼭 죽기 직전에 왜 그걸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여러분들도 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갈애의 조건들을 버려버리면은 아주 평온합니다.
그 갈애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윤회하게 됩니다. 붙잡고 있기 때문에 다음생을 또 붙잡게 되는 거라. 윤회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면은 붙잡는 것은 없어져버립니다.
괴로움을 끊는 길은 갈애라고 하는 것들을 딱 끊어버리면 괴로움은 끊어져 버립니다.
마음에 긴장돼있는 것이 있으면 수행대상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몸이 긴장돼 있어도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원활하게 되지를 못합니다. 실제 여러분들은 많이 경험해봅니다. 그래서 몸이 긴장돼있지 않고 호흡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때 호흡을 알아차리기가 쉬울 거고,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가 돼 있을 때 호흡을 알아차리기가 훨씬 더 수월해집니다.
붙잡고 있으면 긴장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되고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붙잡는 것들은 없어집니다.
세상에서 붙잡는 것들이 없을 거 같으면 그 사람은 이미 성자입니다.
내가 죽음이 와도 아니면 나의 것이 없어져도, 아니면 누가 나를 욕해도, 아니면 누가 나를 칭찬해도, 그것에 붙잡히지 않고 항상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나가는 거라.
그것이 성인의 길이고 성자라고 일컫는 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을 할 때 대상을 붙잡을려고 하지도 말고, 대상을 밀쳐낼려고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있는 그대로 그냥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를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이런 갈애들을 끊어버렸을 때 괴로움을 넘어서는 길이 되는 겁니다.
아시타 선인도 법의 소중함을 알고, 또 그 법이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법을 들을 수 없다는 것으로 인해서 슬픔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래서 자기는 그런 조건이 안될 때 다른 사람이 그런 조건이 되도록 만들어줄려고 부단하게 노력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지금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해서 그것을 놓쳐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끊임없이 해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바라밀들을 쌓는 것들을 등한시 해서도 안되는 겁니다.
또한 내 주변에 있는 분들에게, 나와 관계되는 사람들에게 법을 전해준다는 것도 잊어서도 안되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법을 소중하게 할 줄 알고, 그 맛을 보고 그 기쁨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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