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탈에 이르는 길(순서)_3가지 방법 (20141211)
벌써 12월달 들어서 가지고...
대부분 수행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보면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념을 붙잡고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은 일상생활에서 내가 뭐 하는지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는 드뭅니다. 또 알아차림이 강해지면 금방 그것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더 강하게 일어나는 것들을 방어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못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경전에도 그렇게 나와있습니다.
"사띠가 없는 경우는 세상일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거기서 세상일이라는 것은 '생각, 망상, 개념' 이런 것들입니다.
개념에 붙잡혀 있는 거는,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그 말 개념에 사로잡혀 있으면 수행에 진척이 없습니다.
생각이나 망상도 꼭 마찬가집니다. 뭐든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줄기차게 알아차려야 되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진도가 안 나가는 거라.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순서의 첫 번째가 그런 부분입니다.
맨 첫 번째가 항상 신경써야 되는 게,
어떻게 하든지 간에 마음이 선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줄기차게 만들어야 됩니다.
항상 자애수행을 하든 아니면 부처님 명호를 외우든, 뭘 하든 간에 마음이 그쪽으로 계속 기울어있도록 해야 됩니다.
알아차리는 것도 선한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에 선한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왜 그러면 그게 첫 번째 조건이 항상 되어야 되느냐 하면, 탐·진·치가 일어날 경우에는 알아차림의 힘이 강할 경우에는 금방 탐심이 일어났다 하고 아는데, 또는 진심이나 치심이 일어나는 걸 분명하게 아는데, 그러면 사라지는데, 알아차리는 힘이 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걸 조절을 못해. 그냥 일어나면 계속적으로 그것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왜 그럴까? 탐심은 일어났으면 왜 그게 멈춰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일어나지게 될까? 또 진심은? 치심은? 왜 그럴까?
그것은 독립적으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탐심과 진심 그러니까 욕심내고 성내고 하는 것들 그것은 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데, 욕심이 일어났을 땐 또 다른 것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거라. 결합이 돼있다는 거라. 성냄이 있을 때도 또 다른 것들이 결합 돼있고.
욕심이 일어났을 때 가만히 한번 여러분들 마음을 보십시오.
자기 자신이 허세부릴려고 하는 마음들이 항상 있습니다. 그리고 남에 대해서 오만한 마음들도 같이 있습니다. 왜 이게 뭘 갖고 싶다는 마음만 생겨나면 좋은데 그것들이 같이 있게 되는 걸까?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 어리석음이 근본적인 원인이라서 그런 허세들이나 오만한 마음들도 같이 있게 된다는 거라.
성냄이 있을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질투하는 것들도 있고 후회하는 것들도 있고, 또는 낙담하는 것들도 있고, 이런 것들도 같이 일어난다는 거라.
어리석음도 꼭 마찬가집니다. 어리석음도 어리석음이 지속될 경우에는 그것들을 가만히 관찰을 해보면 나의 견해를 내세울려고 하는 것들, 그리고 '나'라고 하는 것들이 딱 자리잡았을 때 어리석은 것들이 계속 됩니다.
이렇게 서로 결합작용들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탐·진·치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그거 하기 힘듭니다. 삼매에 들어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삼매에서 깨어나와서 일상생활을 할 때는 탐심이 일어납니다. 성냄도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에게는 "네가 삼매에 들었느냐, 안 들었느냐, 얼마만큼 삼매를 자유자재로 하고 있는가, 그거로 인해 신통력들을 부리는가 아닌가" 그걸 가지고 측정을 하지를 않습니다.
일상생활을 할 때 얼마만큼 "네 마음이 탐·진·치가 없느냐"를 가지고 측정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성내는 스님을 스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스님들은 가진 게 없으니까 탐심을 부릴 거는 별로 없습니다. 있어봐야 여러분들만큼 있지는 않습니다. 자잘한 것들이지.
또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도, 공동 생활을 스님들은 상가라고 하는 것들로 운영하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들을 그렇게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킬려고 하는 생각들도 어느 정도 좀 적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판단하는 게 이 스님이 성냄이 있는가 없는가 하고 판단들을 합니다.
성냄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또는 욕심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일어나더라도 빨리 그것을 알아차리고 밖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하고, 그것들이 지속되지 않도록 하는 상태가 있을 때가 그래도 너는 출가한 스님답구나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꼭 마찬가지겠죠. 여러분들이 수행자라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탐·진·치가 일어난 것들을 놓칠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탐·진·치가 일어났을 때 그것이 지속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지속되도록 놔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 내가 한참 더 수행해야 되겠구나' 또 '수행자답지 못하게 행동했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해탈에 이르는 순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마음을 선하고 맑고 깨끗하게 유지하라.
대상을 알아차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대상을 알아차릴 땐 멀찍이 떨어뜨려야 됩니다.
그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선한 마음이 일어나야만이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있는 그대로. 그게 첫 번째입니다.
자! 이렇게 봅시다. 그러면 그 세 번째 것까지 오늘 다 얘기를 할게요.
첫 번째 것을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먼저 해야 되는 것,
마음을 선하고 맑고 깨끗하게 가볍게 하기 위해서,
최고 하기 어려운 것들, 그거 먼저 딱 자를려고 한번 해보십시요.
자신에게 성냄이 많다, 아니면 자신이 남에게 내세울려고 하는 것이 많다, 아니면 자신이 게을러지는 습성이 많다, 아니면 내가 욕심부리는 것이 많다, 그럴 것 같으면 가장 큰 것 먼저 딱 자른다고 생각을 한번 해보십시오. 다른 건 다 놔두고.
하나가 잘려버리면 나머지들은 다 약해져버립니다. 연쇄적으로.
이게 하나만 일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경우든지 어리석음이 연결돼있고, 또 어떠한 경우든지 다른 비슷한 작용들이 연결돼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장 안되는 것, 이것만은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이것만은 내가 탁 일어나자마자 바로 잘라버린다 하는 생각을 가져보십시오.
가장 큰 것들 가장 나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들은 자른다고 먼저 마음을 먹어보십시오. 그게 첫 번째 먼저 마음을 먹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그 선한 마음과 맑고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 가신은 가장 큰 것들을 먼저 자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만약에 자를 수 없으면, 설혹 자를 수 없으면 피해버리라는 거라. 그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질 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항상 마음을 온화한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사람이 탐·진·치가 일어났든 아니면 나에게 나쁜 행위를 했든 어쨌든 간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항상 온화한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아, 참 저사람이 저런 행위로 인해서 괴로움이 없기를, 괴로움을 받지 않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고.
아, 참 저사람에 대해서 저사람 마음이 항상 고요해지기를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에 대해서는 항상 그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상대방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면은 더불어서 자기 자신의 마음도 온화해져버립니다.
그다음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또 한번 더 생각해야 되는 것이,
그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자꾸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저 사람 보면 아, 내가 뭐 도와줄 것이 없나, 저 사람이 뭐 하는 걸 보면 아, 내가 뭔가 도와줄 일이 있는가 하는 걸 한번 찾아보라는 거라.
그사람에 대해서 온화한 마음을 가져야만이 도와줄 일들을 찾게끔 됩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자비의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은 자비로운 행위들을 하지를 못하게 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항상 그렇게 해야 됩니다. 온화한 마음을 유지할려고 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자꾸 찾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생각은 끊을 수가 없기 때문에 탐·진·치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은 그걸 최소화시켜야 됩니다.
그리고 탐·진·치가 일어나는 것들을 바른 방향으로 전환시켜줘야 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은 가장 먼저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고 안 되는 것들을 반드시 끊겠다 하는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은 반드시 오늘은 오계를 지킨다 하는 것.
세상에서 얘기하는 여러 가지 규칙들이나 규율들을 설혹 위반하는 한이 있어도, 내가 부처님이 말한 오계는 반드시 오늘은 지킨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계를 지키게 되면은 그다음에는 자신의 마음이 대상을 향해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훔치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삿된 행위들을 하지 않을려는 마음들을 굳건하게 가질 것 같으면 그다음에는 그 마음은 반드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찾게끔 됩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끔 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자기 스스로는 말과 행위와 생활하는 것들이 항상 바르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말하는 것도 바른말을 자꾸 할 수 있도록 하고, 행위하는 것도 바른 행위가 될 수 있도록 하고, 먹고 살기 위한 생활하는 것도 바른 방법으로 생활하는 것들이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말과 행위와 생활들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앞에 것들이 아무리 잘되어 있더라도 그건 헛고생입니다.
적어도 여기까지 해나가면은 해탈에 이르기 위한 첫 단계는 끼우게 됩니다.
마음은 맑고 고요하고 선한 방향으로 자꾸 움직이게 됩니다.
그다음에 해탈에 이르기 위한 두 번째 길입니다.
망상은 반드시 정지를 해야 되는 것인데,
정지를 하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지금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이게 수행의 시작점입니다.
움직이고 있으면 움직이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말하고 있으면 말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손을 뻗고 있으면 손을 뻗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것들입니다.
수행대상은 어떻게 보라고 그랬어요? 객관적으로 보라고 했습니다.
제삼자의 입장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그냥 객관적으로 볼려고 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것들, 모든 것들을 자꾸 객관적으로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 하는 두 번째가, 내가 직접 확인하고 그리고 입증된 이야기가 아니면 하지마십시오.
누구에게 들은 것, 아니면은 내가 생각한 것 이런 것들로서 얘기할려고 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내가 확인한 것들만 가지고 말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여기 의사들이 있기 때문에, 의사들이 그럴 겁니다. 맥을 짚으면 맥에 대해서 분명하게 내가 확인한 걸 가지고 얘기를 해야 되는 것이지, 짚은 걸 내가 확신이 안 들면 자기 생각가지고 얘기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 맞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되는 것이고, 아는 만큼만 얘기를 해야 되는 것이고.
여러분들이 말을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확인된 것, 내가 직접 보고 한 것, 들은 것도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것만 유효하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제삼자를 통해서 들은 것? 어떤 경우든지 왜곡되게 돼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그 같은 사실을 얘기할 때는 반드시 확인된 것들만 가지고 얘기하는 버릇들을 들여야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소문이라든지 아니면 내가 하는 여러 가지 추측이나 이런 얘기들은 다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경계해야 되는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누가 뭐가 어떻드라 저떻드라. 수행 안 하겠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설혹 심정적으로는 이게 의심이 되고 그럴 것이라 하고 판단이 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직접 그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그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속에 담아두면 안됩니다.
마음속에 담아두는 순간에 그것은 딱 왜곡되어버립니다.
왜곡돼서 설혹 그 당사자가 직접 내 앞에서 어떤 얘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미 왜곡된 상태에서 그 말을 듣게끔 됩니다. 그래서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말하는 것들은 내가 직접 확인된 거 외에는 말하지 않으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그 문제에 대해서 납득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물어보든지 탐구를 하든지 해야 됩니다.
발을 들어올리면 가벼운 느낌이 있다. 가벼운 느낌이 진짜 실재하도록 될 때까지 자꾸 해봐야 되는 거라.
그냥 다른 사람들이 가벼운 느낌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아, 가볍구나' 하고 생각하고 발을 들어올리면 진짜 가벼운 느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수행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을 내가 스스로 납득이 될 때까지 확인해야 됩니다. 그래야 자기 것이 됩니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납득이 안가면 납득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그것을 해보십시오.
스스로 안되면 도반들에게, 도반들도 안되면 스승에게 끊임없이 반문을 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에 대해서 완전하게 확신이 탁 들 때까지는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고 있다. 들이쉴 때 어떤 느낌들이 일어나는지, 내쉴 때 어떤 느낌이 일어나는지, 그것을 스스로 자기가 아, 나는 진짜 이런 느낌이 있구나 하는 것들이 딱 확신이 들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을 해나가야 됩니다.
안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 어떻게 됐는가.
수행하는 것들에 대해서 자꾸 부끄러워하고 물어볼려고 하지 않을 거 같으면,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착각을 해버리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다른 사람들의 경험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건 남의 소를 세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남의 소 아무리 잘 세어봐야 그거 자기 거 안됩니다.
그다음에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 또 해야 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도록 하라.
수행하기 위해서 수행만, 무조건 대상만 알아차리면 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수행만 할 수 있습니까?
모든 일상생활이 수행이지만 일상생활을 탐·진·치 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느냐는 거라. 그게 안 되면 부처님 가르침을 자꾸 배울려고 해야 됩니다.
가르침으로 인해가지고 마음은 더욱 더 대상으로 향하도록 해줍니다.
쓸데없는 가르침을 자꾸 배울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진짜 설했던 것, 부처님의 진짜 가르쳤던 것들, 그것이 여러분들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주고 여러분들을 해탈로 이끌어주는 그런 가르침들을 자꾸 접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접하는 대상,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접하는 대상은 그냥 두십시오. 접했다고만 분명하게 아십시오.
들리면 들렸다고 알고, 보이면 보였다고 알고, 접하는 대로 그대로 두어야 됩니다.
들리면 '어, 들렸다! 무슨 소리지?'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거라.
보이면 '어, 뭐가 보이지?'
그 순간에 이미 탁 생각은 끼어들고, 망상은 끼어들어가게 됩니다.
접하는 대로 그대로 두십시오.
그래서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보이면 보인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발이 들어올려지면 들어올려진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들어올려질 때 내가 '이게 어떻게 들려지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에 들어올리는 것조차도 모르게 됩니다.
적어도 들어올리는 것들은 알도록 해야 되는 거고, 들리는 것들은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접해지는 정보들은 있는 그대로 둬야 됩니다.
그다음에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 또 해야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두어야 될 뿐아니라, 집중력을 키우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집중력이 없으면 그 들리는 것도 한번 들리고 말아버립니다. 한번 들리고 말아버릴 것 같으면 그다음에는 생각이나 망상이 끼어들게 됩니다. 하나의 대상에 줄기차게 집중하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가끔씩 사람들은 그럽니다. 나는 좌선이 잘되니까 좌선만 하겠다. 또는 나는 경행이 잘되니까 경행만 하겠다. 아니면 앉고 걷고 하는 것보다는 일상 생활을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기 쉬우니까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냥 알아차리겠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거는 정보를 접하는 대로 두는데, 그거는 일회성으로만 계속해나가겠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집중하는 힘을 키우지 않겠다는 겁니다.
마음이 대상에 집중해있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이 계속적으로 변해가고 계속적으로 대상이 일어나는 것들을 어떻게 알아차릴 거라?
좌선과 경행은 반드시 균형을 맞추십시오.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서만 모든 것들을 다 알려고 하지말고,
반드시 하루 중에 특정한 시간은 집중수행하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스스로 마음이 그렇게 결정해가지고 하는 훈련들을 하지 않으면 집중하는 것들을 키우기가 힘이 듭니다.
그다음에 집중하기 위해서 두 번째 해야 되는 것들은 하나의 대상을 끝까지 볼려고 해야 됩니다.
처음에는 잘 안될 겁니다. 그리해도 놓쳤으면 놓쳤다는 것만 알고 놔버리고, 사라졌으면 사라졌다는 것만 알고 또 다른 대상을 알아차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대상은 끝까지 볼려고 한번 해보십시오.
숨을 들이쉴 때 숨이 들이쉬는 순간부터 해서 들이쉬는 숨의 마지막까지 그걸 끝까지 볼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중간에 물론 마음이 벗어나기도 하고 망상이 들어오기도 하고 그리하더라도 아, 이번에 놓쳤네 하고 놔두고 나서 또 다음에는 또 그걸 끝까지 볼려고 해야 됩니다.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하나의 대상을 완전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드시 완전하게 그것들을 알았을 때 그때야 집중력은 단번에 탁 커져버립니다.
집중력은 마음이 이리가고 저리가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집중력이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들이쉬는 숨을 완전하게 알게 됐을 때 집중력은 커지는 거고, 내쉬는 숨을 완전하게 알았을 때 집중력은 커지게 됩니다. 손을 뻗는 것을 완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알게 됐을 때 집중력은 확 배가되는 겁니다.
그래서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 시간날 때마다 자꾸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가끔씩 스님들은 이렇게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이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무슨 팔운동 하고 있나? 이거 집중력을 키우기 위한 겁니다. 힘이 떨어졌을 때는 그렇게 합니다.
천천히 한번 했다가 그리해도 그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마음이 여기 가있지 못하고 자꾸 벗어나면 더욱더 천천히 했다가, 그래도 안 되면 또 더 천천히 하고.
천천히 하는 게 되면은 그다음부터는 자꾸 빨라집니다. 그래서 아주 빠르게 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따라가게 됩니다.
단순한 거 같지만 집중력은 그렇게 키워지는 겁니다.
집중력이 키워졌을 때 정보가 접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두 단계는 해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망상하는 것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물론 마음이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악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들도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다음에 해탈에 이르기 위한 세 번째, 최고 안되는 게 뭔지 알아요?
「나」라고 하는 것! 진아든 범아든 '나'라고 하는 착각, 참 안 떨어집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집중력이 키워지고 나면 그다음에 해야 하는 것이,
'나'라고 하는 착각을 끊어버리기 위한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세번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고 해야 됩니다.
한번 보십시오,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 뭐가 있는지. 하나의 대상을 집중해서 한번보십시오. 그것이 안 변하고 있는가? 설혹 이것이 백 년이 가도 안 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알아차릴 때의 내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변하고 있을 거 같으면 이 대상도 변하고 있는 겁니다. 대상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대상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렇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해야 되는 것, 무상한 것, 무상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무상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무상한 겁니다. 변하는 것들을 보고 내가 뼈져리게 느껴야 됩니다. 참 무상한 것이구나!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들, 그 생멸을 보면 그 생멸 자체가 그냥 무상하게 다가와집니다. 또는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볼 거 같으면, 그것이 끊임없이 생멸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고 가치없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럼 그것에 대해 집착 안 합니다.
무상한 성품을 봐야만이 '나'라고 하는 환상들을 깰 수가 있는 겁니다.
그다음에 그렇게 알아차릴 때, 나에게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변하고 있기에 무상한 것이고, 무상한 성품을 보고 나면 그 무상한 성품들은 참으로 불만족스럽고 괴로운 것이라는 거라. 괴로움으로만 계속 다가와집니다.
그래서 그 괴로운 것들 내가 그만둘려고 하더라도 내가 그만둘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 순간에 아, 나라고 하는 것이 진짜 없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대상들을 알게 됐을 때 나라고 하는 착각들을 벗어버릴 수가 있는 겁니다.
쉽게 정리하면 해탈에 이르는 길은
첫 번째가 마음이 항상 평온하고 고요하고 선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할 것!
두 번째가 마음이 수행대상을 향하도록 할 수 있도록 할 것!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하는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럴 때는 사마타 수행들을 병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고 나서 세 번째 하는 것이 모든 대상들을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위빳사나의 방법으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해탈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바른 방법으로 대상을 알아차리도록 하고, 바른 방법으로 수행해서 올바르게 해탈에 이르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사람들은 지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각각의 방법으로 바르게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게끔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이해의 폭이 열릴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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