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산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 (20150108)
얼마 전에 신문에, 물론 연말 때라고 그런 게 나왔긴 했겠지만, 최고의 기부를 많이 하는 나라에 대한 것이 나왔습니다. 어느 나라가 일등 했을 거 같애요? 미얀마가 일등 했습니다. 한국이 50등인가, 60등인가 했을 겁니다.
그 안에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니까 미국하고 미얀마하고 공동으로 일등 했는데, 미국이 기부는 미얀마보다 금액이 더 많고, 그런데 봉사하는 거는 미얀마가 훨씬 뛰어났더라고. 그래가지고 공동 일등이 됐더라고. 그런데 경제적인 수준에서는 미국하고 미얀마하고는 비교가 안 되죠? 기부 액수로 치면 미국이 더 많을 거고, 봉사하는 부분에서는 미국이 아직은 미얀마의 상대가 안 되는 그런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가진 것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나눌려고 하는 것들은 필요한 부분이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재산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경전에 보면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재산은 무지한 사람을 파괴한다. 해탈을 목표로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재산은 있든지 없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산이라고 하는 욕구에 얽매이는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거와 같이 자기 자신을 파멸에 빠뜨린다." 그렇게 나옵니다.
재산이 있고 없고 그거는 문제가 되지 않는 건데. 뭐가 문제가 돼요? 그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를 가지고 문제가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인지, 현명한 사람인지,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이지 재산이 무슨 죄가 있어? 재산은 아무 죄가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한해 동안 얼마만한 보시들을 하고 얼마만한 봉사활동들을 하고 사는가? 뭐 미얀마보다는 못한 60위이니까 그것보다는 훨씬 못하겠지. 그런데 미얀마는 왜 그런 것들이 일상화돼있을까? 그게 부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들입니다.
어느 날 빠세나디 왕이 부처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보통 부처님이 아무 때나 사람을 만나주기는 하는데 딱 안 만나는 시간이 있습니다. 점심 공양이 끝나고 나서 한 한시간 정도는 부처님이 사람들을 안 만나요. 그때는 부처님이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오침을 하면서 삼매에 드는 그런 시간들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거의 잘 안 만납니다. 그리고 한밤중에 또 한 시간 정도는 그렇게 삼매에 드는 시간, 우리가 말하는 잠을 자는 시간들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빠세나디 왕이 급작스럽게 부처님을 찾아왔어요. 어쩔 수 없이 부처님을 만나러 왔는데 부처님이 이 시간에 웬일이냐? 다른 시간에 오면 될 걸 뭐하러 급하게 이 시간에 오느냐? 물어보니까 부처님께 이걸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는지 묻고 싶어서 왔다는 거라.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재산이 있는데 아들도 아무도 상속받을 사람이 없는 거라. 자식이 없었으니까. 대부분 이 재산은 그렇게 될 경우에는 옛날 인도에서는 그 재산은 국가에 귀속돼버립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니까 재산이 그렇게 있었는데도 굉장히 검소하게 산 거라. 아주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먹고 누더기옷을 입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마차를 타고 다녔는데 이 사람은 소를 타고 다니는 그런 형태들로 아주 검소하게 살아간 거라. 그래서 부처님께 이거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하고 여쭈어보는 거라. 부처님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건 당연히 법대로 처리해야 되는 거라. 그 재산은 법대로 할 것 같으면 당연히 국가에 귀속 되는 거라. 그대신에 국가에 귀속하더라도 그것을 바르게 쓸 수 있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국가에 귀속한다 해가지고 국가에서 홀라당 먹어버리면 그거는 의미가 없는 거고, 그것을 바르게 쓸 수 있도록 하라는 거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든지 아니면 여러 가지 복지를 위해 쓰든지 바르게 쓰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대신에 그 사람에 대해서는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된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죽고 나서 그 재산 가져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나누어주지도 안 했으니까 지은 복도 없이 그냥 죽음을 맞게 된 거라. 이 얼마나 참 비참한 일이냐 하는 얘기들을 합니다.
자기가 쌓은 공덕들은 자기가 가져가서 그것으로 인해서 좋은 결과들이 있게 되는데, 쌓아놓은 공덕이 없으니까 가져갈 것이 없는 거라. 재산은 당연히 못 가져가는 거고. 그렇다고 해서 살아있을 동안에 그걸 풍요롭게 누린 것도 아니고, 그걸 누리지도 못했고 또 그렇다고 해서 그걸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지도 못했고, 당연히 자기만 못 누린 것이 아니고 주변에 친척들이나 주변에 아는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는 그런 행위들도 못했다는 거라.
재가자들이 누려야 되는 재산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네 가지 락(樂)이 있는데, 그 4가지 즐거움을 하나도 하지도 못하고 그냥 죽음을 맞은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또 하나를 비유를 들어서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 과거 전생에 얘긴데 조상 대대로 쭉 부를 축적하다 보니까 많이 쌓였어. 집에 보니까 재산이 많이 있어서 그 부처님 전생의 보살이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재산을 쌓아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이로운 것은 아니다. 이것은 현명하게 써야 된다 하고 생각을 해가지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쭉 나누어줍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자기는 가진 것이 없는 상태가 돼서 출가를 하다가 죽음을 맞게 됩니다.
전자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는 것은 누구든지 살아있는 사람이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게 되는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죽음을 맞기까지 어떻게 살았나 하는 것도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남에게 칭찬받으면서 "아, 참 저 사람 잘 산다!"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 건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거 내가 누린다고 생각하고 맘껏 누리다가 남들이 뭐라 하든 간에 그렇게 살다가 죽을 건지, 또 죽고 나서 내가 가져갈 것들이 하나도 없게 죽음을 맞을 건지, 아니면 다음생의 원인이 되는 공덕들을 쌓은 상태에서 그것으로 인해서 죽음을 맞을 건지, 하는 차이도 분명하게 난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그 두 가지를 얘기를 하면서 한 게송이 있습니다.
"재산도 기타 소유물도 또는 가족들도 친척들도 무엇하나 이 세상에서 가지고 다음 세상으로 갈 수는 없다. 모두 여기에 버려두고 가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이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뭔가를 행위를 하면 그 행위의 과보는 그림자가 그 사람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듯이 그 사람을 따라 다음 세상으로 따라간다. 그러므로 다음 세상에서 행복을 가져오는 선행을 하는 것이 훨씬 낫다.
다음 세상에서 그 사람에게 의지가 되는 것은 이 공덕만이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행위의 과보는 자기가 상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따라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있는 것들에 대해서 바르게 사용하는 것도 부처님은 분명하게 얘기를 합니다.
"재산은 있고 없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용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집착하지 않는지, 아니면 현명한 사람인지 어리석은 사람인지에 따라서 그 재산은 다르게 쓰여진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가끔씩 그런 생각들을 해봅니다. 과연 여러분들에게 많은 재산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그럴 것 같으면 그거 집착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거라. 자기 몫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부모님 유산을 상속했다, 사실 그거는 부모님 거지 여러분들 것은 아니죠? 그런데 그 상속된 재산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남의 것이라고 생각들을 안 한다는 거라. 그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된다는 거라. 상속된 것들에 대해서 누군가가 조금 나누어주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거 나누어 줄려고 하는 사람 없다는 거라.
또는 상속된 것에 대해서 바르게 쓰기 위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든지 아니면 여러 가지 공덕행을 짓는 일들에 쓴다든지 이렇게 생각들을 안 한다는 거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착하고 살게 돼있다는 거라. 그것들에 대해서.
그런데 집착을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그 재산의 노예가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을 나누어 주어야 될 때도 있고,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을 자기가 유용하게 쓸 때도 있고 그렇게 되는 건데, 그것들을 아예 할 줄을 모르게 된다는 거라.
또 경전에 그런 게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자기 마을 앞에 매일 탁발 나오는 스님을 보니까, 맨발로 탁발 나오고 하니까, 아침에 풀에 이슬이 묻어있으니까 가사가 만날 젖어있거든.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 스님이 지나는 길에 풀들을 싹 베어줍니다. 그러니까 이슬이 안 묻어. 이슬은 안 묻는데 날이 좀 비가 오고 한 그 다음날에는 진흙탕이 돼있는 거라. 그래서 저것도 좀 보수해야 되겠다 싶어갖고 자갈하고 모래 같은 걸 가지고 깨끗하게 다져놓습니다. 그런데 비가 올 때는 한정없이 비가 옵니다.
어떨 때는 그 스님이 탁발 할려고 서 있는데 비를 홈빡 맞거든. 그래서 적어도 탁발하려고 서 있는 장소에서는 비를 안 맞고 그 스님이 서 있고, 또 탁발할려고 하는 사람도 비를 안 맞고 편안하게 했으면 좋겠다 싶어가지고 여기에 천막식으로 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스님이 편안하게 비를 안 맞고 탁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천막 보수할 곳이 곳곳에 생기고 하니까 조금 더 뼈대가 있는 것들로 채우고 하다 보니까 어느새 그냥 알맞은 곳, 사방으로 뚫려있지만 편안한 휴식처가 됩니다.
그때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 저기 우리한테 와서, 법을 설하는 장소가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법을 설해주십시오. 그러니까 부처님이 이거 어떻게 마련했느냐? 하나씩 하다가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풀 베는 것부터 시작해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하다 보니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어느 순간 세월이 지나다 보니까 아, 이제는 법을 설할 수 있는 장소가 하나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상가에 공양 올립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을 것 같으면 아무리 적은 재산이 있고 아무리 적은 소유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뭔가를 점진적으로 하나씩 하다 보면 이루어나간다는 거라. 공덕이라고 하는 것들을 한꺼번에 뭔가를 팍 한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미얀마 사람들이 기부하는 것을 많이 한다고 하는 것은 뭐냐면 하다 보니까 그렇게 많아지게 되는 거라.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은 벼이삭 베고나면 미얀마뿐 아니라 태국, 스리랑카도 마찬가집니다. 벼 일부는 거기다가 반드시 놔두고 거기 놔두는 것뿐 아니라 골목사이에 처마 끝에다가 벼이삭을 달아놓습니다. 한겨울에는 노지에 있는 벼는 썩어버리기 때문에 한겨울에 새들이 먹을 수 있게끔 처마 밑에다 달아놔버리는 거라. 자기들 먹을려고 하는 게 아니고. 나는 그거 없어도 충분히 먹는다는 거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배고플 때 먹을 수 있게끔 점심때가 되면 밥 한끼라도 해가지고 앞에다가 놔놓는다는 거라. 물 한잔이라도 떠가지고 항상 거기다가 그 자리에 놔줍니다. 사람이 먹든 안 먹든. 또 그것이 설혹 들짐승이 와서 먹든 누가 먹든 그것에 개의치 않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누군가 내가 도와줘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면 그런 사람이 생기면 도움을 주는 거라. 기꺼이! 집착하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아끼면서 이렇게 하지도 않습니다. 또 써야 될 때는 얼마든지 씁니다. 크리스마스 때 되면 크리스마스츄리 장식하는 것은 한국보다 더 많이 할 거라. 기독교 안 믿는데도.
그래서 소유하는 것이 적고 많고를 떠나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해야 되는 네 가지 행위가 있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첫 번째 「수용의 낙(樂)을 즐길 줄 알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피땀 흘려가지고 노력해가지고 모은 것들은 자기가 자기에게 쓸 줄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또는 자기 가족들에게 쓸 줄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키워준 부모님에 대해서 쓸 줄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또한 자기 자신과 관계되는 동료들에게 쓸 줄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처음에 「수용의 낙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 적절하게 쓸 것 같으면 즐겁습니다. 또는 가족들에게 적절하게 쓸 것 같으면 그것도 즐거움을 가져옵니다. 그러면 적어도 그 즐거움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도 즐거움을 누릴 뿐아니라 가족들도 즐거움을 누리고 동료들이나 주변 사람들이나 아니면 부모님들도 즐거움을 누릴 줄 안다는 거라.
단, 그 수용의 낙을 즐길려고 할 것 같으면 가진 것에 한해서 수용의 낙을 즐길 줄 알아야 되는 것이지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부모님에게 100원을 준다고 하더라도 200원을 가진 상태에서 100원을 주는 것하고, 또는 100원도 없는 상태에서 100원을 주는 것은 부모님에게 똑같은 즐거움을 줄지는 몰라도 자기 자신은 즐겁지는 않다는 거라. 그리고 부모님도 그 100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압니다. 그럼 받은 부모님도 그것이 꼭 즐거운 것은 아니라는 거라.
주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주느냐에 따라서 받는 사람은 그 수용의 낙을 즐기게 된다는 겁니다. 진짜 위하는 마음으로 부모님에게 100원을 줄 거 같으면 아주 보잘것없는 거지만 받는 사람은 기쁘다는 거라. 살아가면서 그런 즐거움을 누릴 줄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살아있으면서 거렁뱅이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소유물을 확보하는 즐거움」이라고 그렇게 나옵니다.
정당하게 모은 것들은 그것을 도둑맞을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정당하게 모으지 못할 거 같으면 그것이 발각되면 당연히 그것을 뺏겨버리게 됩니다.
부의 축적이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방법으로 축적을 해야 되는 것이지 정당하지 않을 거 같으면 언제 뺏길지 모르는 두려움들 또는 그것을 뺏기고 나서 오는 슬픔들 이런 것들이 뒤따라 오게 됩니다. 괴로움을 낳는 원인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그것을 축적할 때도 힘들고 축적하고 나서도 괴로움을 가져오는 원인을 항상 가지고 있게 되는 거고, 차라리 정당한 방법으로 10원을 모으면 10원을 모았을 때 기쁨이 있는 거고, 20원을 모으면 20원을 모았을 때 기쁨이 있는 겁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소유물을 확보하는 즐거움을 누릴 줄 알아라."
그다음에 세 번째 「의무를 행하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이라고 그렇게 나옵니다.
아까 미얀마나 동남아시아 이야기를 들었지만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목마를까 봐서 앞에다가 물 한잔을 항상 놔줍니다. 깨끗한 물로 아침마다 갈아줍니다. 밥 한그릇이라도 놔줍니다. 지나가는 사람들뿐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먹을 것들을 항상 남겨주는 거라.
그것은 내가 가진 것에 대한 의무라는 거라. 집에 찾아온 손님이나 또는 모든 생명들에 대해서 자녀야 될 의무라고 하는 거라. 그것을 의무로 행하면서 얻어지는 행복 그것도 무시를 못합니다. 처마 끝에 달아놓은 이삭을 새가 먹고 있는 거를 보면 얼마나 기뻐?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가면서 물을 떠먹고 갔다는 것을 알게 되면은 '아, 참 저 사람이 먹으면서 얼마나 달콤하게 먹었을까?' 먹는 사람도 즐겁고 나도 즐겁다는 거라.
그다음에 또 의무가, 의무를 행하면서 오는 낙은 그런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사회를 유지시켜 주는 것, 그리고 내가 살아갈 땅을 만들어 주는 것들에 대한 의무들을 행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 의무를 행하고 있습니다. 세금 꼬박꼬박 내고 있지, 그것은 의무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는 거라. 당연한 거니까. 당연히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걸 안 할려고 하다 보면 부정한 방법을 쓰게 된다는 거라.
뒤에 따라올 불행의 원인은 만들지 말아라는 거라. 그것은 의무조항이라는 거라. 이사회에 대해서 내가 해야 될 것이 있으면 반드시 행해야 되는 것들은 의무라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가 「보시를 할 수 있는 즐거움」이라고 나옵니다.
땀 흘려 이룬 재산들을 바른데 쓰여지기 위해서 보시한다는 것은 굉장한 즐거움을 가져옵니다. 까티나 가사 불사한다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보시를 합니다. 또는 어디 선원에 무슨 일이 있다 할 것 같으면 또 보시를 합니다. 아니면 새로 선원을 건립한다 할 것 같으면 또 보시를 합니다. 할 수 있는 상태일 때 할 수 있을 때 오는 즐거움을 얘기하는 겁니다.
지금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은 풀을 벨 정도의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풀만 베면 됩니다. 자갈을 깔 정도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자갈을 깔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엿한 집이 만들어집니다.
태국에 있을 때 그 게송을 스님이 굉장히 감명 깊게 들은 적이 있어요.
시골에 어느 가난한 곳에 마을 사람들이 전부 합동해가지고 절을 하나 만들었어요. 아주 보잘것 없는 시골인데. 그때 사람들이 우리말로 하면 낙성식인데, 낙성식을 하는데 사람들을 전부 초청해가지고 펑펑 우는 거라. 그러면서 어떤 사람이 나와서 얘기를 하는데, 나는 돈이 없어서 매일같이 집에서 일을 하다가 시간을 내가지고 와서 벽돌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진흙 개는 일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길 닦는 일을 했습니다. 각각 그런 얘기들을 하는 거라.
그러면서 그 사람들은 내가 할 수 있는 상태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내가 할 일을 했다는 거라.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 절을 만드는데 얼마나 즐거웠겠느냐는 거라. 또 우리는 일할 때 그리고 그 절을 만드는 동안에도 굉장한 즐거움을 맛봤고 이것이 만들어지고 나서 이것이 쓰여질 것에 대해서 생각하니까 그것 또한 즐겁다는 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은 100원 내는데 나는 10원 낼 거 같으면 즐거워하지를 않습니다.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는 것들에 대해서 즐거움을 누릴 줄 알아야되는 것이지 즐거움을 누릴 줄 모를 것 같으면 그거는 소유하는 즐거움 중에 하나를 없애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이렇게 네 가지 방법으로 즐거움을 누릴 것 같으면 그것들은 공덕이 되는 것이고, 살아있는 동안에도 그것을 행할 동안에도 즐거움을 누리게 되고, 또한 죽음 이후에도 그 공덕들을 그대로 자기가 누리게 된다는 거라.
그게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들을 누리는 네 가지 즐거움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것들로 인해서 즐거움을 누리고 그것이 내가 가져가는 공덕이 되는 밑거름이 되게 됩니다. 바르게 사용할 줄 알고 또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들을 가지지 않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나도 죽음을 맞이하듯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도 변해가는 무상한 성품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무상한 것들은 무상한 것으로 볼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그것들을 사용하는 자들이 무상한 성품으로 봐서 집착하지 않는지, 그것들을 사용할 때 지혜롭고 현명하게 사용할지, 그것들은 각자의 판단에 달린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길을 따르다 보면 조그만한 것들도 나에게는 즐거움을 가져옵니다. 그것들은 또한 나에게 더 큰 공덕으로써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오늘은 재산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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