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몸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20150210)
집중 수행하는 거 한번 의논들 해봤나?
(수행자 대답 : 아직 구체적인 얘기는 못했습니다.)
한달에 한번씩은 정해가지고 하는 게 좋을 겁니다. 1박 2일로 하더라도.
우선 처음에는 1박 2일로, 토요일 일요일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점차 시간을 늘려나가면 됩니다. 그거 없이 만날 여기 이렇게 해가지고는 안돼. 아예 상설화시켜 놔놓는 것이 좋아.
그런데 지금 문제들이 좀 생겨가지고 바로 시행하기는 힘들 거 갖고, 집착한다는 게 아무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 집착하는지 몰라. 어떨 때는 보면 “아이고, 중생들아 중생들아” 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이렇게 나온다.
두 가지 비유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에 유명한 화두 참구하는 것 중에 하나를 좋은 예로 들어놓은 게, 어느 스님에게 토굴을 하나 지어줘가지고 열심히 하도록 해서 뒷바라지를 다했어요. 그래서 공부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 싶어가지고 인제 이 분이 스님을 시험을 할려고 그럽니다.
이미 몇십년이 흘렀기 때문에 그분은 나이든 할머니가 돼있어가지고 자기 손녀딸한테 스님을 한번 유혹을 해봐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거기 가서 그렬려고 하니까 그 스님이 한마디를 합니다.
내 마음은 얼음과 같이 단단하게 굳어있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하고 그걸 뿌리칩니다. 그거를 보고 나이 드신 할머니가 보고 저거는 공부가 안됐다 하면서 쫓아내버리고 오두막을 태웠다 하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또 다른 빨리어 경전에는 보면 그와 비슷한 것이 또 하나 나오게 됩니다.
마하띳사라고 하는 스님인데 마찬가지로 누군가 예쁜 여자가 스님을 유혹할려고 하니까 웃을 때 보이는 그 치아, 치아를 보고 그 여자를 보기를 몸 전체가 뼈로 보이는 수행을 합니다.
뼈의 무더기로 보면서 아, 참 저렇게 혐오스럽고 부정한 것들이 뭐 좋다고 내가 거기 유혹에 넘어갈 것이냐 해가지고 유혹을 뿌리치고 그 부정관을 통해가지고 그 삼매에도 이르르고, 또 삼매에 이르러서 다시 또 위빳사나로 전환해가지고, 완전히 무상·고·무아를 증득하게 돼서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찬탄을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두 일화가 비슷한데 하나는 천하에 못된 스님이 되고, 하나는 아주 훌륭한 스님으로 묘사가 되어있습니다. 어떤 게 맞을까? 물론 합리화시키려면 뭔 말을 못하겠어?
첫 번째 일화는 그 스님한테 자비가 없었다느니 뭐 아직 공부가 덜 돼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마음이 백짓장 같이 차갑다느니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할 수도 있는 거고, 또 두 번째 예를 들더라도 일상적으로 사람들을 볼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맞는 것인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걸 뼈의 무더기로 보지를 잘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빨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 그건 뼈로 보이지만 이 몸 전체를 뼈의 무더기로 본다는 것은 참 힘드는 겁니다.
그런데 두 가지 경우들을 다 본다고 하더라도 그 두 스님 다 어떤 신체에 대한 집착하는 것들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신체에 대한 집착도 없을 뿐 아니라 남의 신체에 대한 집착하는 것도 없었고, 다른 것을 통해가지고 자기가 그걸 수행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고, 청정하지 않는 것 깨끗하지 않는 것은 자기 몸도 깨끗하지 않는 거고,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깨끗하지 않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동등하게 봤을 때 그거는 하나의 수행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그런 부분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몸을 봤을 때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른 것인가 하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이 몸은 어떻게 보면 돼요? 어떻게 보는 것이 맞는 법일까?
이 몸을 볼 때, 어떻게 하면 이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지겠어요?
게송에는 두 가지가 나옵니다.
첫 번째가 "까요 제굿초 사깔로 두간도(kāyo jeguccho sakalo dugandho)"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하고 혐오스러운 것이다." 하고 먼저 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몸에 대한 집착을 여읠 뿐 아니라 감각적인 욕망도 떨쳐내기 위해서는 이 몸은 항상 더러운 것들이다. 그리고 혐오스러운 것이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거라.
실제로 몸은 굉장히 부정하고 더럽습니다. 그리고 그 몸은 혐오스럽습니다. 이 몸만 딱 봤을 때 죽은 시체와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죽은 시체를 가지고 몇날 며칠을 뒹굴어라 할 것 같으면 아마 진저리를 칠 거라. 혐오스럽기 때문에. 그리고 하루라도 몸을 씻어주지 않으면 더러운 물들이 구석구석에서 빠져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이 몸에 대해선 항상 부정하고 혐오스럽다 하는 생각을 먼저 일으키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두 번째 부처님이 얘기를 한 것이 뭐냐면, "갓찬띠 삽베 마라낭 아한짜(gacchanti sabbe maraṇaṁ ahañca.)"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생명은 죽음에 이르른다. 나도 이와 같이 죽는다" 하는 겁니다.
죽지 않는 생명은 없다는 거라. 나도 거기엔 예외가 될 수 없고, 나도 그와 같이 죽음에 이르른다 하는 것입니다.
이게 두 가지 이 몸에 대해서 항상 생각해야 되는 부분들인데, 그런데 보통 우리는 수행을 할 때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자신의 신체를 보면은 자신의 신체를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그럼 여기서 일어나는 감각들, 느낌들을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이 느낌들을 그렇게 보지 않고, 이 감각들 아니면 이 몸이라고 손바닥이라고 하는 것들을 부정하고 혐오스럽다고 알아차리느냐는 거라. 그리고 이 손바닥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이 몸이라고 하는 것도 죽음에 이르른다 하고 생각을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이 몸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는 항상 두 가지에 염두를 둬야 됩니다.
감각기관으로써 알아차릴 것인가? 그리고 신체로써 알아차릴 것인가?
하는 걸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감각기관으로 알아차릴 거 같으면 감각기관에 접한 정보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노력해야 되는 것이고, 신체로써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조금 전과 같이 이 몸은 부정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서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 두 가지를 다 보더라도 두 가지다 몸에 대한 집착, 아니면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은 없다는 거라.
자!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신체를 있는 그대로 한 번 관찰해보십시오.
머리털부터 해서 피부 이빨 이런 것들을 전체를 한번 관찰해보라는 거라. 그렇게 관찰했을 때는 그 관찰하는 대상들은 그것만 존재했을 때는 그것에서 집착하는 것들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자체는 부정한 것으로서 알아차려야 됩니다. 혐오스러운 것으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낱낱이 분해해가지고 알아차릴 경우에는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수행을 할 때, 경행을 하다가 탁 멈춰서고 나면, 딱 서있는 자신의 몸을 쭉 관찰합니다. 머리끝에서부터 해서 발끝까지.
그때는 어떻게 알아차립니까? 머리가 있고 손이 있고 그 형태들을 그대로 쭉 알아차리면서 거기서 오는 느낌들을 알아차립니다. 손이 맞닿아져 있으면 손이 맞닿아진 데서 오는 느낌들, 발바닥이 땅에 닿아있으면 닿아있는 데서 오는 느낌들, 느낌들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아, 딱딱하구나 또는 부드럽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리고 몸이 긴장돼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들도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몸 전체를 관찰할 때는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 마땅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 몸에 대해서 관찰할 때는 있는 그대로 자꾸 관찰할려고 해야 됩니다.
낱낱의 것들에는 그 어떤 것들에도 내가 집착할만한 좋은 것들은 하나도 없다는 거라. 내가 손을 써서 뭔가를 먹을려고 하더라도 그거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없을 거 같으면 그 손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만 먹지는 않습니다.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하게 돼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간 음식물도 깨끗한 것이 아니고 부정한 것으로 바뀌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바뀌게 돼있습니다. 그럼 그 음식물에 대해서도 집착하는 마음들을 가지지 말아야 됩니다.
그런데 손을 뻗을 경우에는 뻗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음식물을 먹었을 때에는 먹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렇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혐오스러운 것, 부정한 것으로만 알아차릴 것 같으면 그것들을 자꾸 멀리 할려고 하게 됩니다.
동작들을 취할 때는 그 동작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손을 뻗었으면 뻗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씹었으면 씹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삼켰으면 삼켰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어떤 방법을 하더라도 거기에는 나의 손, 아니면은 내가 먹은 음식이라고 하는 집착할만한 대상은 생기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자신의 몸이 청정하다고 생각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의 몸도 청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내 것은 소중하고 또 이 몸은 청정하다고 하면, 동일하게 똑같이 다른 사람 몸도 소중하고 다른 사람 몸도 청정한 겁니다. 똑같이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에 대해서는 굉장히 애지중지하면서 남이 아프다든가 남이 힘들어 할 때는 그것을 또 본체 만체 합니다. 똑같은 대상입니다.
마하 띳사 스님이나 처음에 예를 든 스님도 다른 대상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것으로서 만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의 것들을 가지고 자기가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야 됩니다. 자신이 자신의 몸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없고 자신이 행하는 행동들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나갈 거 같으면 다른 사람이 행하고 있는 것들도 똑같이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플 경우에는 아프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 아픔을 해소해주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을 것 같으면 나와 동일하게 행동을 취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나의 몸과 다른 사람의 몸은 동일하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감각기관,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감각기관들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릴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가 보고 듣고 할 때는, 볼 때는 본다고 알아차리고 들을 때는 듣는다고 자꾸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걸 먼저 해야만이 그다음 단계를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밖에서 오는 정보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게 됩니다.
밖에 보이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내 눈을 통해서 보여지는 겁니다. 그럼 내가 마음을 내가지고 밖에 보는 때 하고, 밖의 대상들이 있음으로 인해서 내가 눈을 통해서 보여지는 거 하고 동일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마음이 안에서 밖으로 향할 때나 밖에서 안으로 향할 때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동일해야 됩니다. 보고 보여지는 것들은 항상 동일해야 됩니다. 듣고 들리는 것들도 항상 동일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외부의 정보들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들, 내가 마음으로 일으켜서 밖으로 마음이 향하는 것들, 이것들도 항상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주지 않으면은, 밖으로 향하는 것이든 아니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든, 어떤 것에도 걸려서 거기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것들은 이 몸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다는 거라.
이 몸은 언제 죽을지 모르고, 이 몸은 부정하고 혐오스러운 것이지만,
이 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마음은 항상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밖으로 향하는 대상이든 아니면 안으로 들어오는 대상이든, 그 대상을 만날 때는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안정돼 있어야 됩니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나 감각기관을 아는 것들을 통해가지고, 마음이 분노나 욕망에 휩쓸리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밖에 대상들은 분노의 대상이 되고 욕망의 대상이 돼버립니다. 안으로 들어온 대상도 분노나 욕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돼있지 않으면 감각기관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한 것들은 항상 분노나 욕망 없이 고요한 마음으로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게 안 될 때는 그 대상들을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됩니다.
무언가를 봤을 때 아름답다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미 욕망이 일어난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그것을 대상으로 삼지 말고 다른 것을 대상으로 삼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 몸을 통해서 감각적인 욕망이나 분노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에 영향을 주는 것들이 먹는 것들입니다.
먹는 것들을 조절할 줄 모르면 감각적인 욕망은 계속적으로 일어나집니다.
이 몸에 필요한 양만큼만 먹을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특히 우리 한의사님 같은 경우에는, 스님 먹는 게 양이 작아서 몸이 자꾸 빨리 회복이 안된다고 합니다. 그건 맞습니다.
그런데 차라리 회복이 늦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길을 택하게 된다는 거라. 먹는 것으로 인해서 감각적인 욕망을 키울 일은 없다는 거라.
자신이 먹는 양을 조절할 줄 알아야만이 감정의 노예가 되질 않습니다.
먹는 것들은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써만 자꾸 쓸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 몸이 부정하고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알 것 같으면 먹는 양을 분명하게 조절해야 됩니다. 혐오스러운 이 몸에, 부정한 이 몸에 뭐하러 그렇게 많이 먹을려고 그러는데.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어야 됩니다.
물론 출가한 스님들과 일반 재가자들이 몸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의 양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또 사람마다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자기에게 맞는 양을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한끼를 먹든 아니면 세끼를 먹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제외한 나머지 의근에서 아, 내가 배부르다는 느낌이라든지 아니면 잘 먹었다는 느낌이라든지 그런 것들은 일으키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이 몸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면 음식을 먹을 때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있는 그대로 씹고 삼키고 그것을 집고 손을 뻗고 하는 모든 것들을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음식을 먹는 모든 것들을 관찰을 하게 되고, 음식을 먹는 적당량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 이 몸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고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맛 뿐아니라 향기 냄새 맡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꼭 마찬가집니다. 하루에 TV양 나는 이 정도 적당하다 할 것 같으면 그거 이상 하지 말아라는 거라. 계속 있으면서 연속극 보고 뭐보고 뭐보고 끝이 없어집니다. 또 그걸 보면서도 또 그거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감각에 빠져가지고 깔깔거리고 슬피 울고 그럽니다. 듣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 대한 것들은 분명하게 절제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들리면 들린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냄새 맡으면 냄새 맡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그래서 그것들에 대해서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감각기관에 대해서 만족할 줄 알게 됩니다.
설혹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TV뉴스를 많이 못 봐서 사회생활에 대해서는 어둡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것도 모르냐고 하더라도 나는 좋다!
맛있는 거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가서 먹고 하더라도, 나는 식어빠진 밥을 먹더라도 내 마음은 더 평온하다는 거라.
이 몸을 관찰할 때는 그와 같이 관찰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 몸은 부정하고 혐오스러운 것이고, 언제 죽음에 이를지 모릅니다.
또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들을 알아차릴 대상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이 두 가지를 겸하게 될 때 바르게 수행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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