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잘못된 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아띠도-나 짜-리) (20150212)

담마마-마까 2021. 9. 3. 09:00

https://youtu.be/0rLeNyexQSo

* 잘못된 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아띠도-나 짜-리) (20150212)

 

오늘은 '아띠도나 짜리(atidhonacāri)'라는 빨리어 이름을 가지고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띠(ati/adhi)'라고 하는 것은 '초월한다. 뛰어넘는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통 증상심(增上心)이라고 하면 아디찟따(adhicitta) 그렇게 얘기하죠? 증상심이 좋은 겁니까? 자기가 최고다 하고 할 때, 나라고 하는 견해를 내세우고 하는 것들이 강할 때, 그때 아디찟따 그렇게 얘기합니다.

'도나(dhona)'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다나(dāna)는 들어봤죠? '다나' 한 것을 받는 것들, 그 물품들을 얘기할 때, 그러니까 보시물품들이나 이런 것들 얘기할 때 '도-나'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출가자들한테는 4가지 필수품이 될 것이고, 재가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되는 여러 가지 의복이나 집이나 이런 것들을 얘기하게 될 것이고.

'아띠도나' 라고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런 '필수품들을 자기가 누려보지 못하는 것', 그런 '필수품들로 인해서 마음이 방황하게 되는 것',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짜리(cāri)'라고 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을 얘기할 때 '짜리'라고 얘기합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이걸 얘기할 때는 '잘못된 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얘기할 때 '아띠도나짜리'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대상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방황을 하게 될 때', 또는 '마음이 기쁨이나 괴로움으로 허덕이고 있는데 그것에 빠져가지고 뱅뱅뱅뱅 맴돌고 있게 될 때', 그때를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걸 빨리어에서는 '죄가 많다'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윤회하는 자'를 뜻할 때도 이 단어를 쓰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수행대상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죠? 수행대상이 일어나면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그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겁니다. 알아차리고 있지 못하면 여러분도 똑같이 아띠도나짜리가 되는 겁니다.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마음은 방황하게 돼있습니다.

또는 대상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마음을 증장시킬려고 하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그 자리에서 맴돌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잘못된 것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면은 마음을 빨리 증장시켜놔놓으면 거기에 빠지지 않는데 증장시키지 않고 만날 그 자리 가서 거기서 머물고 있는 거라. 어떤 대상만 만나면 화를 일으키게 되고, 어떤 것만 보면 욕심을 일으키게 되고, 이런 식으로 계속적으로 맴돌게 되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이 단어를 옛날에 부처님 당시 때 처음 썼던 게, 어느 스님이 가사를 하나 선물받았는데, 띳사라는 스님인데 가사를 받은 게 너무 좋아갖고, 그걸 내일 내가 입을 것이다 해가지고 잠을 잡니다. 저녁에는 스님들이 잘 때 아랫가사만 입고 보통 잠을 잡니다. 윗가사 같은 경우에는 접어서 머리맡에 놔두든지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너무 좋으니까 그 가사를 접어갖고 품에다 딱 안고 잤어. 잤는데 그다음날 일어나지 못하게 된 거라. 그러니까 새 가사 받았는데 입어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거라. 그런데 그게 얼마나 아깝겠어. 다른 것들은 놔두고. 그런데 죽고 나서 태어나기를 이, 우리 머릿속에 기어다니는 이 있잖아. 이로 태어나가지고 그 가사속에 탁 숨어있는 거라.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그때 부처님이 처음 이 단어를 쓰게 됩니다. "아띠도나짜리다(atidhonacārinaṁ)."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그속에서 방황하고 맴돌고 있다는 겁니다.

마음은 그런 겁니다. 출가한 스님이라 하더라도 마음을 잘 이용해가지고 마음을 잘 제어하고 잘 증장시켜야만이 그것이 수행자답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출가한 스님이든 아니면 일반인이든 내 마찬가지로 그 속에서 뱅뱅뱅뱅뱅뱅 맴돌게 돼있다는 거라.

 

옛날에 어린 스님들이 부처님 당시 때 출가를 하면 대부분 부처님은 사라뿟따 존자에게 이 어린 스님들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라훌라 부터 시작해서 어린 스님들은 대부분 이 사리불 존자가 맡았거든. 목련 존자도 있었지만 사리불 존자에게 맡겼던 이유가 사리불 존자는 굉장히 인자합니다. 그리고 뭘 가르칠 때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성인이 된 사람들은 목갈라나 존자 목련 존자가 어울릴 수가 있는데, 어린 사람들에게는 목갈라나 존자가 안 맞는 거야.

그러니까 어린 사미들이 출가를 하면 사리불 존자한테 거의 대부분 맡겼어요.

여러분들도 아마 그럴 겁니다. 어린애들이 올 거 같으면 어린애들한테 위빳사나 수행해라 할 거 같으면 거 수행이 안 되거든. 그러면은 "사탕줄게" 해가지고 사탕주고 얼러가면서 우리들 수행하는 모습들이나 부모들 수행하는 모습들이 보기 좋아야만이 얘가 그다음부터는 '어, 나 거기 가니까 사탕도 얻어먹고 편안하게 잠도 잘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 보니까 보기도 좋더라.' 그래서 거기 자꾸 갈려고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어, 나도 그러면 공부를 해봐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내게끔 돼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순차적으로 잘하는 게 사리뿟따 존자이기 때문에 대부분 그렇게 했던 거 같습니다.

 

이 날도 이 사미스님하고 탁발을 나가는데 사미스님이 쫑알쫑알쫑알 자꾸 물어봅니다.

"이게 뭐에요?" "요게 뭐에요?" 하면서 자꾸 물어봅니다. 그런데 사리뿟따 존자가 귀찮아하지 않고 내 그걸 차근차근차근하게 얘기를 합니다.

"저기 논에 물은 왜 저렇게 대고 있어요?" 하니까,

"물 안 대면 벼가 말라 죽잖아. 그러면 벼도 물이 필요한 것이고, 물이라고 하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기 때문에 둑을 만들어가지고 이렇게 터주지 않으면 밑에까지 내려가지 않아. 그러니까 위에서 둑을 만들어서 물이 잘 빠지게끔 해서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적셔서 마지막까지 가도록 그렇게 하는 거야."

"음, 그렇구나." 하고.

또 저쪽 가니까 나무에다가 구멍을 파고 있으니까 "이거 뭐하는 거에요?" 이렇게 물어보니다.

"이 나무는 가만히 놔두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거야. 그런데 저 목수가 잘 다듬어 갖고 저렇게 평상도 만들고, 또 여러 가지 무늬들도 넣고 그러는 거야. 보기 좋지? 그냥 나무로 있는 거보다는 저렇게 잘 닦아가지고 쓰임새 있게끔 해놓으니까 좋지?"

"음, 그렇다" 하는 거라.

이런 식으로 해서 설명들을 하는 거라.

그러면서 거기서만 그칠 거 같으면 그냥 일반인과 마찬가지가 되는데, 사리뿟따 존자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 뒤에 얘기하는 것이 "네 마음도 똑같은 거야!"

 

"네 마음도 저와 같이 물길을 잡아주고 나무를 다듬듯이 다듬어주지를 않으면 쓸모가 없는 거야.

물길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그 물이 벼에 아무런 이익도 없는 것이고, 그 나무 아무리 놔둬봐야 썩는 역할밖에 불쏘시개밖에 할 일이 없다는 거라. 네 마음도 가만히 그냥 네가 마음가는 대로 다하도록 놔둘 거 같으면 마음도 그와 같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도 그와 같이 너도 잘 닦아야 돼."

어떻게 닦으면 될까? 아이는 당연히 그렇게 묻습니다.

"그럼 어떻게 닦아요?"

어떻게 닦아요? 마음을 어떻게 닦습니까? 여러분들 수행하는 그대로입니다. 대상을 대상으로서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

그런데 애들한테 대상을 대상으로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그러면 그 아이가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못하는 거라.

 

그래서 먼저 얘기했던 것이 뭐냐면, "마음을 선하게 내라!"

선한 마음을 내라. 누굴 보더라도 '아, 참 저사람 훌륭한 사람이다.' '아, 참 저사람한테 내가 해줄 것이 뭐가 없는가?' 이런 마음을 먼저 내라는 거라. 요기 보니까 청소할 게 있다, 그럼 내가 청소하면 되겠네.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하라는 거라.

마음이 선하고 바르게 일어나도록 먼저 하라는 거라. 그러면 자기 마음은 기쁘다는 거라. 그전에는 저사람을 보더라도 아, 참 저사람 좋은 사람이다 하는 생각은 일으키지 않았는데, 그리고 저사람을 보고 아, 내가 저사람한테 뭔가 해줄 것이 없는가 하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다음부터는 그렇게 하게 되는 거라.

 

"그것이 먼저 되도록 하라. 마음은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은 언제든지 나쁜 짓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거라. 그래서 언제든지 너는 나쁜 일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가만히 놔둬봐봐. 언제든지 나쁜일 할려고 합니다. 여기 수행하러 온 사람들도 그럽니다. 수행 열심히 잘하다가도 시간만나면 어디 놀 데가 없는가? 어디 즐길 거리 없는가? 찾는 거라.

수행하는 사람들도 그러는데 일반인들은 수행 안 하면 그냥 그게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고 그냥 휩쓸려 들어갑니다.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들 생기고 나중에 세월이 지나고 나면 아. 내가 어떻게 살았나 하고 되돌아보게 되고, 마음은 방치하면 어떤 경우든지 나쁜 방향으로 흐르고, 나쁜 일들을 저지르게 돼있다는 겁니다.

 

어떤 경우든지 마음을 방치하지 말아라는 거라. 마음을 방치하는 것은 물이 독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치하는 거와 마찬가지고, 나무토막을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그냥 놔두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자! 그렇게 마음을 하고 나서는, "인제 너는 선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지?"

"예! 나는 저사람 보면 인제는 좋은 마음 일으키게 되고, 그리고 뭐든지 보면은 내가 뭐 할 것이 없는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 그러면은 이제는 마음을 밖으로 향하도록 하지 말고 네 안으로 돌려놔 봐라."

너 자신이 행복하고 너 자신이 선한 마음을 일으키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느냐?는 거라. 밖에 대상들 말고 여러분들 몸과 마음들을 봤을 때 선한 마음들을 일으키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것도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겁니다.

또는 내가 호흡을 하고 있으면 호흡을 '일어남' '사라짐' 하고 알아차리는 것도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뭔가 생각이 일어날 거 같으면 '생각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도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마음이 맑고 깨끗한 상태를 계속 유지할려고 할 것 같으면 몸과 마음의 대상을 관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수카사미에게 그렇게 얘기합니다.

 

"네 몸과 마음을 봐봐라. 몸과 마음에 뭔가 일어나지? 뭔가 움직이고 있지? 그거 그냥 그대로 관찰해. 그러면은 선한 마음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발을 움직이고 있으면 발을 움직이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호흡을 하고 있으면 호흡을 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사리뿟따 스님, 나 수행할래요." 그러면서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수행을 합니다.

"음, 그래 수행해." 하고 사리뿟따 존자는 가서 마저 탁발을 하고 돌아와서 그 수카 사미에게 저놈 밥먹여야 되는데 하고 생각하고 밥을 먹일려고 하니까 부처님이 못가게 합니다. 막 사리뿟따 존자를 불러가지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라. 사리뿟따 존자는 이해를 못해. 왜? 부처님은 지금 저 아이가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놔주라는 거라.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있는데 아직 훈련이 안된 상태에 있는데 밥 먹어라 할 거 같으면 훈련이 안 됐는데 어떻게 돼? 뭐 맛있는 거 먹을려고 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리고 거기에 톡 빠져버린다는 거라. 일정한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 냅두라는 거라. 그리고 다른 스님들에게도 "조용히 해."

 

그래가지고 이 수카 사미가 그자리에서 아라한에 이르게 됩니다.

다른 거 없이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고, 선한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고 나서, 그러고 나서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돌려서 몸과 마음을 관찰해서 그냥 그대로 따라간 것뿐이라는 거라. 깨끗하게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는 거라.

 

정오가 지나면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사미 스님들이라도 마찬가집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안달이 난 거야. 저 아이 12시 넘으면 밥 못먹는데 우짜노? 그런데 부처님 생각은 차라리 밥 안 먹어도 그거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그거 방해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냥 놔두라는 거라.

아마 여러분도 하루종일 먹지 말라 할 거 같으면 난리가 날 겁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중요한 일이 있는데도 밥 먹는데 정신이 팔려가지고 그냥 놔두고 밥부터 먹는다는 거라.

 

수행 잘하고 있으면서 뭔가 하나에 탁 걸려놓으면 고마 그것 때문에 수행이 탁 깨져버리는 거라. 수행하다가 무슨 니밋따들이 나타난다. 그거에 탁 걸려가지고 수행이 깨져버린다는 거라.

수행 또 열심히 잘하고 있다가도 괜한 생각을 하나 일으켜가지고 마 수행하기가 탁 싫어져버리는 거라. 그런 것들은 수행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이 자리에서 조금 더 한단계 넘어갈 수 있다고 확신이 들 거 같으면 그냥 하라는 거라. 그냥 니밋따에 관계하지 말고 '어, 일어났네' 하고 놔두고, 수행해서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설혹 내가 수행하다가 밥 한끼 놓치는 한이 있어도, 그것이 중요하고 내가 마음을 향상시킬 수 있는 지점까지 오면 그냥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까 얘기했지만 어떤 것이든 그 잘못된 길에서 계속 뱅뱅뱅뱅뱅뱅 맴돌게 된다는 거라.

 

적어도 여러분들은 수행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잘못된 길에서 방황하는 일은 없도록 하라는 거라. 수행대상을 만났으면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여러분들 할 일입니다. 대상 잘 알아차리고 있다가도 그냥 놔버리고, 그렇지 않으면 대상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거라. 뱅뱅 쳇바퀴 돌듯이 그냥. 윤회하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윤회하는 거는 이생 저생만 윤회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는 항상 방황하고 윤회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한번 보도록 하십시요.

자극이 있는 것, 어떤 경우든지 여러분들에게는 자극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듣고 맛보고 하기 때문에.

자극이 있는 것들을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 자극을 피할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그거 피한다고 해가지고 삼매에 든다? 삼매에 들 때는 그 자극이 없겠지. 그런데 삼매에서 깨고 나면 그 자극 다시 또 그대로 고스란히 받는 겁니다. 내가 어떤 문제에 부딛쳤다, 그럼 그 문제를 피하고 싶겠지. 피하고 싶다고 해가지고 그게 피해지고 그게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거라. 연기될 뿐이라는 거라.

그 자극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그대로 대상으로 자꾸 받아들일려고 해야 되는 거라.

 

마음이 고요하고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일으키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자극들은 대상이 될 뿐입니다.

보면 본다고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게 되고 맛보면 맛본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릴 것뿐인 것이지, 보는 것으로 인해서 좋고 싫고 하는 마음들이나 맛보는 것으로 인해서 좋고 싫고 하는 마음들을 일으키지는 않는다는 거라.

이미 좋고 싫고의 마음을 일으켰을 때는 마음이 고요하고 선한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거라. 그럼 그 즉시 중단하라는 거라.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지 않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가 없는 건데, 그럼 중단하고 밥 먹는 것도 중단하고 보는 것도 중단하고 '음, 내가 싫은 마음을 일으켰네' 하고 분명하게 또 알아차리라는 거라.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 집착하고 있네' 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그러고 나서 다시 보고 맛보고 하라는 거라.

 

자극을 대상으로써 자꾸 볼려고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수행은 밖에서 오는 자극으로 인해서 마음을 증장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밖에서 오는 자극으로 인해서 마음의 상태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아, 저사람 참 수행자답네' 하는 사람은 밖에서 오는 자극에 대해서도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유지하지 못하면 그사람 마음은 들뜨게 되고 그것에 인해서 반응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

럼 밖에서 오는 자극은 자극으로써 받아들일 게 아니고 대상으로서 받아들여버리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반응을 할 일은 없는 거라.

 

'호흡을 알아차린다' 그것도 대상입니다.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고 알아차리는데 그 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밖에서 오는 자극만큼 반응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것도 대상이고, 밖에서 오는 것도 대상인데, 똑같은 대상으로 봐야 됩니다. 자기 몸에 대해서는 편안하게 느껴지고, 밖에서 오는 것들은 반응에 대해서 자극을 금방 일으킨다고 할 것 같으면 안과 밖이 달라져버립니다.

 

"밖에서 오는 대상이든 안에서 일어나는 대상이든 하나의 대상으로써 보아라."

대상으로써 보고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대상들을 자꾸 관찰할려고 해야 됩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은 어떠한 자극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되지 않는 마음이어야만이 수행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 부분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일으키는 번뇌는 사소한 것들로부터 일어납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 조그만한 맛있는 음식, 뭔가 조그만한 대상들 이런 것들로 인해서 번뇌들은 항상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어떠한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번뇌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려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소소한 것들 작은 것들이라 하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알아차리는 것이 놓치지 않아져야 만이 수행은 성숙돼나갑니다.

소소한 것이라도 자꾸 놓치는 버릇을 해놔놓으면 수행은 진척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1시간 동안 수행하면서 59분은 분명하게 알아차렸는데 1분 동안 놓쳤다. 그럼 별거 아닌 거 같지만 그 놓친 거 그게 암덩어리가 돼버립니다.

여러분들 몸에 있는 세포들 다 암덩어리가 아닙니다. 다 암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중에 일부가 암덩어리가 돼서 그것의 영향으로 해서 여러분들 죽게 되는 겁니다.

놓친 번뇌는 어떠한 경우든지 암덩어리가 돼버립니다. 그 번뇌는 잠재해 있다가 또 다른 번뇌들을 반드시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잠재돼있는 번뇌가 무섭다고 그럽니다. 한순간 놓친 것으로 인해서 내 자신을 죽이는 결과가 돼버립니다.

 

그다음에, 어차피 59분은 알아차리고 1분은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놓친 1분이 암덩어리가 되지 않을려고 할 거 같으면 딱 해야 되는 것이, 집착하는 것들을 없애는 것.

대상을 알아차리고 나면은 집착하는 것들을 거기에서 딱 놔버려야 됩니다.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도 놔버려야 되는 거고, 가족에 대한 집착, 물건에 대한 집착, 집착하는 것들도 반드시 놓아버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암덩어리가 돼버립니다.

'아, 놓쳤네' 하면서 그 번뇌가 또 다른 번뇌들을 일으킵니다.

'아, 이렇게 해야 되는데 잘못했네' 계속 암덩어리를 키우게 되는 거라.

집착하지 않으면 놓쳤을 그때 그것뿐입니다.

 

평상시에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생각, 그리고 여러분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 여러 가지 가족들, 그것들에 대한 집착하는 것들은 버리도록 자꾸 훈련을 해야 됩니다.

그것을 쓰지마라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지 마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집착하는 것들을 버리도록 해야 됩니다.

집착을 하는 순간에 번뇌는 급속히 늘어나버립니다.

 

그래서 "밖의 대상과 안의 대상은 집착할 것이 아니라 수행대상일 뿐이다"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안과 밖의 대상도 수행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듯이, 밖의 사람과 나라고 하는 이 몸도 집착할 대상이 아니라 자애의 대상일 뿐입니다.

밖에 사람들에게는 집착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자애의 마음을 내야 되는 것이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집착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자애의 마음을 내야 되는 대상일 뿐입니다.

 

안과 밖의 대상은 수행의 대상이고, 안과 밖의 사람은 자애의 대상이라고 항상 생각을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그렇게 해나가면 여러분들은 잘못된 길에서 방황하는 사람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