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해탈하고 싶다는 의욕은 현명한 자들의 특권이다. (20150205)

담마마-마까 2021. 9. 1. 09:00

https://youtu.be/79h33gTq1EU

* 해탈하고 싶다는 의욕은 현명한 자들의 특권이다. (20150205)

 

"해탈하고 싶다는 의욕·생각은 현명한 자들의 특권이다" 하는 것으로 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해탈하고 싶은 사람 있어요? (수행자 대답 : 모두 해야지요.)

그럼 다들 현명한 자들이네.

그런데 쉬운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특히 동남아 쪽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해탈하고 싶다는 생각 별로 일으키질 않습니다. 한국에 있는 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물론 마음은 꿀떡 같겠지. 해탈하고 싶다는 생각은. 그런데 생각만 하면 뭐 하노? 그 길을 가지도 않으면서 생각만 일으키고 있다는 거라.

 

의욕을 강하게 내었을 때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는 겁니다.

그런 의욕들은 언제 낼 수가 있을까?

삼보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게 되었을 때!

그게 확고하게 되지 않으면 해탈하겠다는 의욕을 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공염불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생각하고만 있지만 그대로 가지는 못하고 있는 겁니다.

 

수행하는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언제 그러면 반드시 이 길을 가겠다 하고 마음을 먹고 그길로 가게 될까? 언제 그래요? 언제 그렇게 되든가?

경전상으로는 삼보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게 돼있을 때라고 하지만,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거라? (수행자 대답 : 예류도에)

아뇨. 그거는 이미 그 상태를 넘어선 겁니다.

(수행자 대답 : 삼법인을 체험했을 때 )

(수행자 대답 : 세상살이가 재미가 없을 때요)

그거는 도피할려고 하는 거지.

 

이렇게 보면 됩니다.

수행을 이렇게 해나가다 보면 수행이 잘될 때든 안될 때든 장애들이 일어납니다.

들뜨기도 하고 졸음에 떨어지기도 하고 망상피우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장애들이 나타나는데,

그 장애가 진짜 좋은 대상이라고 탁 알게 됐을 때.

그래서 오히려 지금 내가 주대상인 호흡을 관찰하고 있을 때 호흡을 관찰하고 있는 것 보다도 훨씬 더 용이하게 이 장애가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아차리기 진짜 좋고 오히려 더 잘된다고 느끼게 될 때.

 

그때가 되면은 인제는 장애가 장애로 여겨지지 않는 거죠.

장애는 틀림없이 다가왔지만 그것을 장애로써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장애가 크게 영향을 안 미치게 되면 아, 내가 이 길로 계속 가도 되겠다 하는 마음이 딱 서게 됩니다.

그때 보통 아, 인제 내가 해탈할려고 마음을 먹고 해탈로 향해서 나아가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게 됩니다.

그 상태들은 됐죠?

 

단순히 그 대상을 대상으로만 생각해버리고 아, 졸음에 떨어졌네 하고만 알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고, 졸음을 대상으로 했을 때 그 졸음이 오는 게 분명하게 드러나져야 되는 거라. 분명하게 졸음이 오는 길이 보이고 그걸 따라가려고 마음을 쭉 가다가보나까 어느 순간 졸음이 확 사라져버리고 마음이 깨끗해져버리는 상태가 된다는 거라.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그 대상 속에서 무상·고·무아의 성품이 드러나져야 될 거 아니라? 그럼 변하는 것이 보여야 되는 거고,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 대상 자체를 집착하는 것도 없고, 떨어뜨릴려고 하는 마음도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되는 거라.

 

그게 다섯 가지 장애들을 장애로써 받아들이지 않고 대상으로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작년에 부처님 오신 날, 붓다의 날에 '아딧타나'를 쓴 적이 있어요. '결정심'. 나는 이번에는 올해는 이거 반드시 하겠다. 인제 부처님 오신 날 다가오죠? 그때 돼서 각자들한테 나눠줄겁니다. 자기가 원했던 것들을 하고 있은 건지. 스님도 안 열어봤어요. 뭐라고 썼는지. 그중에는 해탈하고 싶다고 결정심을 내는 사람도 있을 거고, 어떤 경우는 다른 결정심들을 내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아마 모르긴 해도 반수 이상은 올해 저걸 탁 받아들고 아, 내가 쓸데없는 결정심을 냈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목적을 정해서 그 목적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더라도 그 목적이 달성되고 안 달성되고 하는 것은 둘째고, 행복한 사람이 있고 또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달려갈 때 헹복하지 않고 또 그 목적이 달성이 안되면 더 고통스러워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목적은 이미 잘못돼버린 것이죠.

 

부처님 당시 때 천신들이 내려온 경우들을 쭉 추려보면, 어떨 때 천신들이 내려올 것 같애요?

여러분들 마음이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게 되어있을 때는 천신들이 내려옵니다.

쉽게 말하면 수행을 하고 있을 때는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깨끗하게 됩니다. 또는 내가 선한 일들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있을 때, 비질 하나를 하더라도 선한 마음으로 비질을 하고 있을 때, 또는 조금 전 같이 탁발을 하더라도 선한 마음으로 탁발하고 있을 때, 이럴 때 천신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천신들이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기도하고 있을 때! 기도하고 있을 때 천신들이 나타나는 경전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

기도하는 각각의 사람들이 어떤 목적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목적들이 대부분은 본인들의 이익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는 마음들을 내기 때문에 선한 마음이 아니고 원하는 마음, 집착하는 마음들 이런 마음들, 그러니까 탐진치의 마음들을 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데는 천신들이 안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런 데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하더라도 천신들이 안 나타나는데 2600년 전에 열반하신 부처님이 그자리에 나타날 이유는 더더구나 없는 겁니다.

 

위사카 부인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여기와서 “뭐 때문에 여기 선원에 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어떤 사람은 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또 뭐라고 하는데 각각 다 다르는 거라.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다 다를 거라. 왜 오는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사람들이 오는 목적은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의미가 없어. 시간과 장소와 조건이 달라지면 그 목적은 의미가 없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인 거라. 아마 여러분들도 반수 이상은 그렇게 될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예류과에 이른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참 의미 없이 앉아들 있다는 거라.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가지고.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서 부처님한테 가서 물어봅니다.

부처님 이렇는데 이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한 얘기가 뭐냐면,

"해탈하고 싶다는 진지한 의욕은 현명한 자들의 특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그분들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얘기라.

현명한 자들은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지혜는 어떻게 얻어집니까? 지혜를 얻었다 해서 해탈에 이르는 것은 아니죠?

지혜로 인해가지고 해탈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지혜는 여러분들이 지금 수행하고 있으면 열심히 수행하면서

무상한 성품을 보았을 때 지혜를 얻는 거고,

고의 성품 또는 무아의 성품을 보았을 때 지혜를 얻는 겁니다.

열심히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게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어떤 때 지혜를 얻게 됩니까?

스님 법문을 듣고 경전 공부하고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부처님의 진리에 대해서 분명하게, 확고하게 아,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구나 확고하게 섰을 때 그때 지혜를 또 얻게 됩니다.

 

이 두 개의 지혜를 얻은 사람만이 아, 인제 내가 갈 길은 이것밖에 없구나 하고 판단을 해서 해탈에 이를려고 하는 마음을 탁 일으키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 이 속에 있는 사람들은 반 이상은 그렇게 지혜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거라.

 

단편적인 예를 들어서 무슨 현상에 탁 부딪쳤을 때 그것을 무상한 성품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 보면서 내가 해야 될 것,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일들을 착착 진행을 해나가느냐는 거라.

적어도 두 가지 중에 수행이든 아니면 듣고 이해를 한 것으로 하든 두 가지 중에 하나로 지혜를 이룬 사람들은 그렇게 해나갈 거 아니라?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못한다는 거라. 멀리 할려하고 집착할려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앉아서 수행을 하더라도, 아니면 아무리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려 하더라도 자기의 카테고리를 탁 씌워가지고 하게 되는 거라. 그러니 장애가 나타나면 그걸 빨리 벗어날려고 하고 아니면 붙잡을려고 하고.

또 일상생활에서 장애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생각을 거기다 덧칠해가지고 그 장애를 보고, 나하고 관계없는 것이다 하고, 나는 잘못이 없다 하고.

적어도 여러분들이 수행을 해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다섯 가지 장애는 장애로서 보지 않고 대상으로서 분명하게 보아야 됩니다. 자꾸 그 훈련들을 해야됩니다.

 

다섯 가지 장애가 뭐뭐입니까?

(수행자 대답 : 탐진치 그다음에 졸림)

이 사람들 보게. (ㅎㅎㅎ) 저 맨 마지막에 있는 원서! 다섯 가지 장애가 뭐라?

(수행자 대답 : 감각적인욕망, 혼침, 졸림, 성냄, 그다음...)

 

! 감각적인 욕망, 왜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납니까?

(수행자 대답 : 무상을 모르기 때문에, 좋아하니까)

감각적인 욕망은 자기가 좋아하니까 일어나는 거지. 좋아하니까 일어나는 거라. 꽃을 보고 예쁘다 하고 자기가 좋아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욕망이 일어나는 거라. 좋아하지 않으면 감각적인 욕망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행 중에 뭐들이 일어납니까? 망상합니다. 망상은 왜 일어납니까?

자기가 피우고 좋아하니까 망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망상을 좋아하지 않으면 망상이 일어날 재간이 없습니다.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감각적인 욕망들이 강하기 때문에 자꾸 일어나는 겁니다.

 

자꾸 생각들이 일어나고 해서 수행을 못하겠다. 그러면 '아, 나는 좋아하는 것들에 너무 끄달려 들어가는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럼 그거 없애기 위해서 아수바바와나를 하든지, 아, 참 이 몸은 부정한 것이고 참 더러운 것이고, 빨리 이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먹어야만이 몸과 마음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탁 끊어질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그것을 봤을 때 아, 참 의미없는 것이다 하고 자꾸 알아야만이, 망상이라고 하는 좋아하는 것들도 의미없는 것이라고 알게 됩니다.

이거 예쁘다 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를 가져? 이거 예쁘다 한다고 해가지고 그게 내 것이 돼? 아니면 예쁘다 한다고 해가지고 이것이 나를 편안하게 해줘, 행복하게 해줘? 그냥 욕망만 계속해서 일으키고 있는 거라.

 

망상이 일어날 때는 망상을 내가 피우게 됩니다.

망상을 끊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그 망상을 즐기고 있기 때문에 망상은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빨리 ', 내가 감각적인 욕망들을 계속 일으키고 있구나' 하고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망상이 일어났다고 칩시다. 무슨 원인이 있어서 망상이 일어났겠지?

그러니까 꽃이 예쁘다 하면서 봤는데 수행하다 보니까 그 꽃에 대해서 생각이 일어나면 망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은 그 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지금 수행하고 있으면서.

 

그럼 지금 해야 될 거는 뭡니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되는 겁니다.

망상을 있는 그대로 보든지, 그렇지 않으면 호흡을 있는 그대로 보든지,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아까 처음에 서두에 얘기했습니다.

다섯 가지 장애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면 현명한 자, 지혜로운 자가 될 수가 없다. 그래서 해탈에 대한 의욕들을 일으킬 수가 없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해야 될 거는 망상이 일어나면 호흡을 관찰하고 앉아있는 것보다는 망상을 관찰하는 쪽을 택해야 된다는 거라.

 

망상 한번 관찰해봐요. 망상의 흐름이 분명히 보일 겁니다.

망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거기서 첨가제를 넣어주지 않으면 망상은 더 이상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 첨가되는 게 뭔가 하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내가 좋아서 끄달려 들어가는 것이 분명하게 거기서 보입니다. 망상은.

그걸 보라는 거라.

그러면 자기 자신에게 싫어하는 마음이 탁 일어납니다.

'어, 의미 없는 이걸 내가 왜 하고 있지' 하는 마음이 탁 듭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탁 일어나면 탁 벗어날려고 합니다.

벗어날려는 마음이 일어남과 동시에 망상은 탁 사라집니다.

망상의 진행 과정들을 분명하게 볼려고 해야 됩니다.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럼 그 생각의 흐름을 자꾸 보라는 거라.

대상은 대상일 뿐입니다. 그 대상에 내가 일으키는 마음을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일어난 대상들은 전속적으로 진행이 되질 않습니다.

또한 망상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망상은 망상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야만이 망상이 증폭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상은 더욱 더 증폭됩니다.

망상이라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탁 한번 알아차려 보라는 거라.

그러면 그 망상도 망상이라는 것과 망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가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 여기 시계를 보고 있다. 시계를 보고 있지만 눈에 의식이 가있어야만이 시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시계가 존재하고 눈이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눈이라고 하는 의식이 일어나야만이 이 시계가 보여집니다.

그런데 시계가 있고 내 눈도 있지만 내가 볼려는 의식이 코에 가 있다. 그럼 코 냄새맡을 땐 이게 안 보입니다. 분명하게 이것은 끊어져보입니다. 보이는 것은.

 

망상도 그와 같습니다.

망상이라는 대상이 있고, 망상이라고 하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어가지고 그 마음을 분명하게 인식할 때 망상이 인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망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관찰하고 있을 때는 이 망상은 순식간에 탁 끊어져버립니다.

그래서 망상이 일어나면 뭐라고 관찰하라고요? '망상이 일어났음' '망상이 일어났음' 하고 관찰하라는 거라. 망상이 일어났다는 마음에다 알아차림을 두고 있으면 망상은 순식간에 탁 떨어지는 게 보입니다.

대상은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그 대상은 사라져버립니다.

특히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대상들은 육체에서 일어나는 대상들보다도 빨리 변합니다. 빨리 사라지고 빨리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망상이 진행되는 것들을 분명하게 볼려고 해야 됩니다.

 

좋아하는 대상이 자꾸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망상은 더욱더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좋아하는 대상들에 끄달려들어가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걸 빨리어어 에서는 뭐라 하냐면 '수바 니밋따(subha-nimitta)' 라고 그럽니다.

좋아하는 것들에 딱 가서 달라붙어서 머문다는 것입니다.

니밋따가 수행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좋아하는 것에도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 거기 탁 붙잡아놔놓으면 거기서 끊임없이 자기가 만듭니다.

삼매에 들기 전에 니밋따가 일어나는 것도 나중에 보면 그 수바니밋따가 결합하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럼 그걸 자기가 그걸 또 만들고 있어요, 니밋따를.

 

그다음에 두 번째 분노. 욱하는 것.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통증들이 많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금방 내 다리는 아프고 뜨거워. 금방 허리는 아파죽겠고 어디든 자꾸 쑤시는 것 같고 자꾸 통증들이 일어납니다.

분노가 많은 사람들은 그 통증들이 수행할 때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통증들이 일어날 때 ', 내가 분노하는 성향들이 강하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아까 망상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일어나면 호흡을 관찰하고 있든, 경행을 하고 있든, 딱 중단하고 그 분노가 관찰대상이 되어야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거 재미없고 그러면 통증들이 금방 일어납니다. 아마 그런 경험들 많을 겁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 관찰할 때 대상이 바뀌는 것도 모르겠고 뭐 그냥 맹숭맹숭 하고 하면 어디가 가렵고 어디가 또 아프고 합니다.

 

대상을 싫어하게 되면 분노는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상대방 한번 보십시오, 저사람한테 왜 내가 화를 내고 있는가?

저것이 싫은 거야. 생각이 싫든 저사람의 생김새가 싫든지 아니면 뭐가 싫든지 싫으니까 분노가 일어나는 거라.

대상을 싫어하면 대상을 멀리하게 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면 호흡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되는데 호흡을 관찰하는 게 싫어. 그럼 이걸 자꾸 멀리하게 되면은 통증이라는 것들이 자꾸 일어나게 됩니다.

 

통증은 어떻게 일어나든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했을 때.

다리 예를 들어봅시다. 처음에 다리가 어떻게 아파요?

(수행자 대답 : 시작할 때는 약하다가 관찰이 강해지고 면밀히 보게 되면 점점 강해져가지고 숨이 가쁠 정도로 극한으로 치달려 갔다가 어느 순간 푹 꺼지는 그러한 형태로써)

통증이 있다가도 또 통증이 강해지고, 그거 구분 할 수는 있죠.

그럼 통증이 강해지고 나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바뀌든가요? 거지서 막 꼼지락거렸지? 꼼지락거리지 말고 그대로 한번 관찰해봐요. 있는 그대로.

 

그러면 그게 쑤시는 것으로 바꼈다가, 통증하고 쑤시는 것하고는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쑤시는 것에서 나중에 송곳으로 후벼파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송곳으로 팍팍팍 찌르는 것처럼. 그러다가 보면 나중에는 전기가 오듯이 찌르르륵 하게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 감각조차도 없어져버립니다. 완전히 통증에 잡아먹혀버리면 감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분노가 강해지면 제정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통증도 통증이 오는 길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럼 그것을 알아차릴 때 '통증' '통증' '통증' 하고 알아차리다가, 쑤시면 쑤신다고 '쑤심' '쑤심' '쑤심' 하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저리면 '저림' '저림' '저림' 하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런데 왜 이 통증들이 그렇게 계속 진행이 될까?

조그만한 통증이 있을 때 '통증' '통증' 하고 알아차리면 금방 사라져버리야 되는데, 요놈이 '통증' '통증' 하는 것에서 자꾸 더 쑤시고 뭐 어쩌고 하면서 자꾸 발전이 되나가는 것은 왜 그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꾸 밀어내버리니까, 자꾸 싫으니까 통증이 일어나는 것이. 나는 지금 호흡을 해야 되는데 호흡관찰 못하고 이거 하고 있다는 생각이나 아니면 통증 이거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일어나니까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니까 이걸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거라.

 

대상은 대상일 뿐입니다. 통증이 일어났으면 ‘통증이 일어났음’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가볍고 편안하게.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한가 분명히 알고 나서 통증에 한번 다가가보십시오,

그러면 통증이 '톡' '톡' 하고 통증이 일어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 그거 그냥 그대로 보라는 거라.

 

여러분들은 통증이 일어났으면 '통증' '통증' '통증'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실제로는 그렇게 안 느껴집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물방울 톡 톡 치듯이 이렇게 톡 톡 다가와집니다. 그러면 그냥 그대로 관찰하면은 그 물방울은 어떻게 되요? 톡 하면 톡 하고 흩어지면서 사라져버립니다. 통증도 순식간에 삭 사라져버립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는, 처음부터 그렇게 해가지고 더이상 발전을 안 해나갑니다. 그런데 이걸 자꾸 밀어낼려고 하다보니까 통증도 강해지게 되고 쑤시기도 하고 각각의 단계로써 발전을 해나가게 되는 거라.

 

각각의 단계에서는 각각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파도치듯이 다가와지기도하고, 물방울 튀듯이 다가와지기도 하고, 각각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거 그냥 있는 그대로 보라는 거라.

그럴 힘들은 그것을 대상으로 받아들일 때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통증은 나에게는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좋은 대상일 뿐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무상한 성품을 보기 위한 좋은 대상일 뿐이라는 거라.

 

그렇게 알아야만이 '아, 내가 이 통증을 잡았다' 하는 생각이 분명하게 듭니다.

그다음에는 통증이 일어나더라도 나에게는 크게 영향을 안 미칩니다. 바로 그냥 '통증' 하고 알아차리면 '톡' 사라져버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야만이 아, 내가 이 길을 계속적으로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분명하게 듭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그럼 좌선 때의 통증하고 관절이라든가 병적인 통증 하고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육체적인 상처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내부적인 장기의 문제로 인해서 병으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다리관절이 굽어져가지고 일어난 통증이든, 동일합니다. 알아차리는 것은 동일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다리가 찢어졌을 때 통증을 관찰할 때는 통증 관찰을 못하게 됩니다. 또는 몸에 병이 있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지 못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 관찰하게 되면 몸에 있는 병들도 영향을 못 미치게 되고, 어느 정도 그것을 치료하는 능력들이 생겨나가는 겁니다. 다리에 있는 상처들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그대로 해나가게 됩니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거 자꾸 구분할려고 할 것 같으면 몸에 병이 생기고 아니면 다리 찢어지면 어떡할 건데? 그거 통증으로써 관찰을 못하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수행자 질문 : 망상 때문에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제가 예를 들어서 콜라를 먹었는데, 망상을 좋아해서 콜라를 먹은 건지, 아니면 콜라를 먹고 싶어서 망상이 일어난 건지 궁금해가지고)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콜라가 먹고 싶어서 콜라를 먹었겠지.

(수행자 : 망상하고 다른 게 어떤 건지)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좋아하는 것으로 인해서 망상이 일어난 거잖아.

(수행자 : 제가 전혀 망상이 없어서)

그게 망상이지.

(순수행자 : 수하게 콜라를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순수하게 콜라를 좋아하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콜라를 먹고 싶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콜라를 먹을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 그럼 망상하고 관계가 없는 거네요?)

망상입니다, 그게.

(수행자 : 아, 망상입니까?)

예. 똑같은 겁니다.

 

두 번째까지 했죠? 그걸 빨리어 용어로 '빠띠가 니밋따(paṭigha-nimitt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거절하려고 하는 것, 배척하려는 마음들이 강하게 일어나면 분노는 일어납니다.

그 분노들이 많은 성향들을 가지고 있다 보면 수행할 때 장애들이 통증이라는 것으로서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통증도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하고 받아들이십시오.

 

뒤에 세 가지는 다음 시간에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쨌든 여러분들은 그 생각을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내가 지혜로운 자가 먼저 되어야 된다.'

지혜가 열리지 않을 거 같으면 해탈하고 싶다는 생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삼보에 대한 확신들도 일어나지 않고.

끊임없이 수행을 통해서 지혜를 개발해야 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끊임없이 부처님 가르침이나 법문들을 듣고 그것에 대한 확신들이 서서 딱 기둥이 정립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경우든지 바람 앞에 촛불입니다. 흔들려버리고 꺼져버리게 됩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아까 기도에는 천신들이 나타나지 않고, 수행이라든가 마음이 청정해질 때 천신들이 나타난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천신들은 그러한 수행자의 청정한 마음을 공감하기 위해서 나타난 겁니까?)

 

스님 답변 : 공덕을 얻기 위해서!

(수행자 : 공덕을 쌓기 위해서)

천신도 좋은 곳에 갈려고 그럽니다. 거기 가서 뭔가 얻어먹을게 있어야만이 갈 거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됐습니까? (예)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