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칸띠 바라밀(khantipāramī) (20150226)

담마마-마까 2021. 9. 5. 09:00

https://youtu.be/Vtk_ckZPRaU

* 칸띠 바라밀(khantipāramī) (20150226)

 

오늘은 좀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기운이 지금 떨어져가지고 좀 힘이 들어요.

 

칸띠 바라밀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칸띠 바라밀의 처음 서두에 나오는 게 뭐냐면,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이 바라밀을 닦을 수 있겠는가? 하는 구절이 맨 처음에 나옵니다.

틀림없이 저 사람이 잘못했어. 그런데 그 잘못을 보고 네가 잘못했다 하고 얘기를 해주고, 또는 어떤 사람들은 그 잘못한 것에 대해서 화를 내면서 대응을 하기도 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 잘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 잘못만 자꾸 내 눈에 보이는 것이지, 그것이 '내가 칸띠바라밀을 쌓기 위한 좋은 대상을 만났다' 하고 생각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주위에도 한번 보십시오, 자기한테 참 잘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자식들 봐도 애물 덩어리 같고, 자식을 안 봐도 자기 배우자만 봐도 '아이고, 원수 왔다' 하고 여기는 경우들이 많을 거라.

 

칸띠(khanti)가 한국말로 뭐라고 그러죠? (수행자 대답 : 인욕)

인욕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인욕은 아닙니다, 칸띠라고 하는 것은.

인욕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냥 참는 걸 얘기를 합니다. 칸띠의 의미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 밑에 뭐라고 게송들이 나왔느냐 하면

 

추울 때, 더울 때, 또는 누가 나를 욕할 때, 또는 내가 뭔가 먹고 싶은 것이 있고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이럴 때 칸띠 바라밀을 쌓아라!그렇게 얘기합니다.

 

아이들이 맛난 별사탕이 있으면 그거 사달라고 조릅니다. 그러면 엄마들은 그거 몸에 나쁘니까 먹지마! 하고 아이들을 말렸다고 하더라도, 아이는 그거 잠시 참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아이가 칸띠바라밀을 쌓았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똑같은 것이 여기 나타나면 그거 먹고 싶은 마음이 또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그럼 떼를 쓰고 또 하게 돼있는 거고.

 

칸띠(khanti)라고 하는 것을 '참는다' 라고 경전에서는 풀이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대상이든지 그 "대상을 만났을 때 마음이 침착해있는 상태" 이걸 칸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이 평온하게 있는 상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칸띠 바라밀을 많이 쌓도록 하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뭐냐면, 마음이 침착해져 있고 평온해져 있어야만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침착하고 평온한 상태가 돼있어야만이 다른 바라밀을 쌓더라도 그것을 온전하게 쌓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보시를 하든 계를 지키든 이것도 마음이 침착해져 있고 고요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바른 보시도 되지 않고 계를 지키기도 힘이 든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가는데, 아버지가 자꾸 가다가 멈춰서고 또 가다가 멈춰서고 다른 일들을 하고 이러면서, 정작 부처님이 법을 설하는 시간에 도착을 못했어요. 아들은 빨리 갔으면 싶은데도 실제로는 그 시간에 가질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아들은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칸띠 바라밀을 쌓게 됩니다. 자기의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얼마나 많겠어. 빨리 갔으면 싶은데 빨리 안 가고, 그리고 법을 듣고 싶다는 마음들도 일어나고, 그런데도 그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법을 안 들은 것은 아버지나 아들이나 똑같은데 그 지나온 과정에서는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오히려 빈둥빈둥 하기도 하고 오히려 욕망들을 많이 키우는 일들을 해왔지만, 아들은 모든 것들을 칸띠 바라밀을 쌓는 일들을 해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도착했을 때는 비록 법문하는 것은 놓쳤지만 이미 부처님의 바른 의미를 그 아들은 이미 가지게 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이 그 아들을 칭찬한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기 선원에 올려면 멀리서, 특히 다대포에서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대포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차를 몰고 온 사람들은 차를 몰고 오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을 것이고, 대중교통을 타고 온 사람은 대중교통을 타고 오면서 그런 일들을 겪을 겁니다.

길이가 짧든 길든 관계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참 많은 바라밀을 쌓을 수 있는 일들이 있었는데 혹시 우리는 그걸 놓쳐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겁니다.

 

어떠한 상태에서도 마음은 침착하고 평온하게 만들어야 되는데, 그 바라밀들의 힘으로 인해서 내가 수행해서 한 단계 넘길 수 있는 힘들을 가질 수 있는데, 오히려 여기와서 한두 시간 수행하는 것만 생각을 하지, 오는 동안에 쌓을 수 있는 바라밀들 또 여기 와서 쌓을 수 있는 바라밀들은 자꾸 등한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들을 조금 돌아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빔비사라 왕하고 친했던 왕이 딱까실라에 있는 뿍꾸사띠라고 하는 왕입니다.

이 뿍꾸사띠 왕이 빔비사라 왕에게 아주 좋은 비단을 선물합니다. 그래서 그 비단 중에 반은 부처님한테 공양 올려가지고 부처님이 다른 스님들 가사 지을 수 있게끔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그게 고마워가지고 빔비사라 왕이 이 뿍꾸사띠 왕에게 내가 저 왕에게 뭘 선물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나무에다가 글을 씁니다.

 

"이띠삐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삼붓도 윗자 짜라나삼빤노..." 하면서 삼보에 대한 예찬을 쭉 적어줍니다.

부처님은 이런 분이고, 부처님이 가르치신 담마는 이런 것이고, 담마를 따라 실천하는 제자들은 이런 것이다. 그래서 담마를 실천하면 어떤 결과가 오고 어떤 이익이 있다 하는 걸 삼보예찬을 적어서 보내줍니다.

뿍꾸사띠왕이 그걸 보고 굉장히 환희심을 일으킵니다.

'아! 이 좋은 것들을 내가 왜 모르고 살았을까?'

 

사실은 여러분들이 자꾸 잊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가장 좋은 선물은 담마에 대한 선물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좋은 가르침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전달한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것에 대한 체험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전달한다 할 것 같으면 그건 말 껍데기 밖에 취하지 않는 거고, 자기가 그것을 완전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그것을 전달할 거 같으면 그 전달받은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참 고마워하고 감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따라하게끔 되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보면 담마를 전하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담마에 대한 체험들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어쨌든 자기가 먼저 체험하고 수행하는 것이 먼저 되어서 그다음에 담마를 전한다는 것이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선물이 담마에 대한 선물이다 하는 얘기들을 하는 겁니다.

 

어쨌든 빔비사라 왕은 삼보에 대한 확신들이 들고 했기 때문에 삼보에 대한 글귀들을 적어주게 된 거죠. 마찬가지로 뿍꾸사띠 왕도 그것을 보고 '아, 내가 이런 부처님을 뵙고 싶다. 그 담마를 듣고 싶다. 나도 그 길을 따라서 가고 싶다' 하는 마음이 들어서 부처님을 만나러 옵니다.

왕의 신분으로서 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옵니다.

 

딱까실라라고 하는 곳은 지금의 인도로 치면 북서부 인도 옆에 파키스탄이 있는 그쪽 부근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있었던 곳은 기원정사이기 때문에 기원정사까지는 굉장히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일반인의 신분으로써 그까지 오려고 할 것 같으면 참 많은 고난들을 겪으면서 와야 될 겁니다. 그런데도 올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그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올 수 있었던 것은 마음에 아, 내가 법을 듣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부처님을 뵙고 싶다는 그런 생각 때문에, 그래서 내가 그 길을 가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오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참 많은 고난들을 겪으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몰랐지만은 자신은 칸띠 바라밀을 쌓고 있는 겁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 같으면 조그만한 일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동요하지는 않습니다. 그거보다 더 좋은 걸 자기가 가지고 있는데 동요할 이유가 뭐 있어. 누가 자기한테 뭐라하든 아니면 맛있는걸 준다고 하든 나는 부처님을 뵙고 그 법을 듣고 싶다는 그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맛있는 것도 오래도록 먹고 머물러있지도 못하는 거고 남이 뭐라고 하더라도 그것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러면서 모든 것들을 인내하면서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갈 수 있게끔 되는 거라.

 

실제로 부처님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부처님이 보고 뿍꾸사띠 왕이 이제 법을 들을 상태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 뿍꾸사띠가 있는 곳에 부처님이 직접 갑니다. 그 왕에게 가서 하룻밤 묵을려고 하면서 물어봅니다.

"내가 여기 하룻밤 같이 묵어도 되겠습니까?"

남의 집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하룻밤 자고 뿍꾸사띠 왕도 부처님을 만나뵈러 가는 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뿍꾸사띠 왕이 "예. 좋습니다. 여기 같이 하룻밤 자고 가지요."

 

대부분 사람들은 특히 수행하는 사람들은 고요함들을 즐기기 때문에, 아마 수행처에 가더라도 한 방에 한 사람씩 머물도록 할 것 같으면 참 좋아하는데 한 방에 둘이 머물라 할 것 같으면 불편해합니다. 자기의 수행하는 패턴이나 아니면 그 고요함을 깰까봐 가지고.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깰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잊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같이 머무르는 시간 동안에 내가 쌓을 수 있는 바라밀은 수행하는 힘보다도 훨씬 크다는 생각을 자꾸 잊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칸띠바라밀을 쌓을 수 있는 얼마나 좋은 조건들을 만났냐는 겁니다.

 

그래서 경의 처음에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칸띠 바라밀을 쌓을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같이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 것은 나에게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거라. 그것이 보기 싫다는 거라. 조용하게 수행하고 싶은데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한다든지, 아니면 뭔가를 따다닥 거리면서 한다든지, 하는 행동들이 수행하고는 관계없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보면서 싫은 마음들을 일으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잘못하는 것들이 없으면 칸띠 바라밀들을 쌓을 수 있는 조건이 안되는 겁니다. 그 어떤 것들을 보더라도 내가 마음을 침착하게 할 수 있으면 그마만큼 바라밀을 쌓을 수 있는 좋은 조건도 없을 뿐아니라, 그 침착한 마음으로 인해서도 어떤 조건에서도 나는 수행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고요한 데서만 수행을 할 줄 알고 그렇지 않은 조건에서는 수행을 못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건 절름발이 수행밖에 안 되는 겁니다.

 

수행은 알아차리는 대상은 언제든지 일어나게 돼있는 거고, 어떤 대상이든지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야 됩니다. 좋은 조건이든 싫은 조건이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가 있게끔 돼야 되는데, 좋은 조건만 찾을 거 같으면, 그럼 싫은 조건을 만나면 수행을 못한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알아차림이 끊어지는 순간 그 수행은 일정한 수준이 되지 않았으면 다시 퇴보해버립니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며칠 지나지 않아서 똑 마찬가지 상황이 돼버립니다. 좋은 조건을 만났는데 그 조건을 바라밀을 쌓을 기회도 놓쳐버리고, 수행할 기회도 또 놓쳐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뿍꾸사띠왕은 쭉 바라밀을 쌓아왔기 때문에 싫은 마음이 없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인 줄도 모르고 있으면서, 부처님이 얘기하면 그대로 알아듣고, 또는 내가 밥 먹을 시간이 아닌데 부처님이 공양을 하면 나도 같이 따라 먹고. 대부분 사람들은 점심을 12시 넘어서 먹습니다.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은 12시 전에 끝내야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부처님은 일찍 공양을 하시겠죠. 그러면 나는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 그런데도 같이 먹습니다.

칸띠 바라밀을 쌓아왔기 때문에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요한 마음을 가지는 상태에서는 그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먹는 것들은 몸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고, 그 몸을 유지하는 것은 수행하기 위한 도구라는 생각을 자꾸 가지는 것입니다.

 

공양을 하고 나서 조용해질 때 부처님이 보니까, 이 뿍꾸사띠가 법을 들을 상태가 됩니다. 그 뿍꾸사띠에게 부처님이 물어봅니다.

"어디 가십니까?"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 법을 들으러 갑니다."

"부처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습니까?"

"예. 내일 되면 그리로 갈겁니다."

"부처님한테 어떤 법을 듣고 싶습니까?"

"어떤 법을 설하더라도 나는 그 법을 그냥 있는 그대로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와서 부처님 법 중에 어떤 법을 듣고 싶어요? 그럼 각각 얘기를 할 수 없는 거라는 거라. 그런데 뿍꾸사띠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거라. "어떤 법을 설하더라도 나는 그 법을 그냥 있는 그대로 들을 것입니다."

듣는 것을 있는 그대로 듣기만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온전하게 그대로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 들으면서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에 수행이 무르익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하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 어떤 진리를 설하더라도 그것은 닙바나라고 하는 열반에 이르른다. 듣고 싶은 법, 듣고 싶지 않는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때사 부처님이 이 뿍꾸사띠에게 법을 설합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상태에서 법을 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법을 들을 조건이 안되면 그 법을 아무리 설해도 자기 것이 안 됩니다. 듣고 싶지 않는데, 그리고 들을 상태가 되지 않았을 때는 그것은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호흡을 관찰하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합니다.

배가 불러올 때 딱딱한 느낌들, 또 배가 꺼질 때 시원한 느낌들, 또는 차가운 느낌 더운 느낌 각각의 느낌들이 있습니다.

그 느낌들은 지수화풍이라는 4개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이것은 땅의 요소고 이것은 물의 요소고, 이것은 바람의 요소고 이것은 불의 요소다. 그래서 불의 요소가 강해질 때는 나는 뜨겁다고 아는 것이고, 이렇게 순차적으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불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고 그거 하나만 좋아하고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습니다. 뜨거우면 뜨겁다고 아는 것이고, 차가우면 차갑다고 아는 것뿐입니다. 단지 그 뜨거운 것도 변해가고 있으니까, 그 어떤 것도 내가 붙잡고 있을 만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몸도 그와 같이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나라고 고집할 것도 없고, 나의 것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물며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대상이 또한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몸뿐 아니라 느낌도 꼭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느낌 어디에도 나와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순차적으로 얘기해줍니다.

 

뿍꾸사띠가 '나하고 같이 하룻밤을 지내는 분이 바로 부처님이구나' 하는 것을 그때사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집착하는 것들을 완전히 끊어내 버릴 것 같으면 불환과에 이르르게 됩니다. '나'라고 하는 집착.

그래서 이 뿍꾸사띠는 불환과에 이르르게 됩니다.

 

부처님의 말씀 그리고 수행을 있는 그대로 해나간다고 하는 것은 먼저 기본 조건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대상에 대해서 침착해져 있는 것,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들이 먼저 전제조건이 돼야 됩니다.

뿍꾸사띠도 오면서 여러 가지 역경을 만나면서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 바라밀이 성숙돼 있는 상태에서 부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빨리어를 공부를 하다 보면 빨리어 단어를 4가지로 보통 분석해가지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칸띠(khati)를 지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칸띠의 맨 첫 번째 락카나(lakkhan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칸띠의 특징이 무엇인가?

뭡니까? 칸띠 바라밀을 행하면 어떤 특징들이 있습니까? 조금 전에 얘기했듯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어떤 조건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다음에 칸띠를 설명하는 두 번째가 라사(ras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어떤 이 나느냐?

칸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떤 맛이 납니까? 바라밀을 쌓는 것뿐 아니라 내 마음은 고요해지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또는 내가 다른 바라밀을 행할 때도 그 다른 바라밀들도 같이 성숙되게 됩니다. 바라밀은 분리돼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 가지 바라밀은 하나의 바라밀을 쌓으면 나머지 바라밀들도 동시에 같이 성숙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보시바라밀을 쌓을 거 같으면 계를 지키는 바라밀, 지혜 바라밀들도 같이 성숙해지는 거고, 칸띠 바라밀이 성숙돼나가면 우뻭카 바라밀 뿐 아니라 멧따 바라밀, 빤냐-지혜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도 같이 성숙해나간다는 겁니다. 거기서 오는 기쁨들, 거기서 오는 맛들은 강하게 일어난다는 겁니다. 칸띠의 맛들을 볼 수 있도록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하는 것이 뭐냐면, 빳쭈빳타나(Paccupatthāna)라고 해가지고, 칸띠 바라밀을 행할 때 나에게는 어떤 영향들이 있는가?

나에게는 많은 영향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다른 바라밀들도 성숙해지고 알아차리는 것들도 있는 그대로 돼나가면 당연히 나에게는 평온한 마음들을 끝까지 유지해나가게 되고, 마음은 성장하고 닙바나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빠닷타나(Padatthān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칸띠라고 하는 인내, 평온함이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인가?

원인이 뭐가 있겠어요? 담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들, 이런 것들이 원인이 됩니다.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으면 칸띠 바라밀은 일어나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칸띠에 의해서 수행은 진척돼나간다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결국 칸띠라고 하는 것은 다른 바라밀을 성숙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담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들이 되는 겁니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알아차리는 것!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이 고요해지고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인내하게 되고, 그리고 그 대상을 끝까지 알아차릴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칸띠바라밀 입니다.

 

담마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 담마가 성숙하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을 괴롭히고 마음에 안 들고 하는 것, 또는 여러분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려고 하는 것들, 그것들은 다들 대상일 뿐입니다. 칸띠 바라밀을 쌓을 수 있는 대상일 뿐 아니라 수행의 대상이기도 하는 겁니다.

좋은 조건이든 나쁜 조건이든 그 조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하는 것!

그래서 칸띠는 인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욕을 할 때는 탐·진이라고 하는 2가지 악한 마음들이 항상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칸띠라고 하는 것은 탐·진이 없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밀어내고 붙잡고 하는 것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얘기하는 겁니다. 싫어하는 마음, 좋아하는 마음들이 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칸띠 바라밀 입니다.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것은 나에게 바라밀을 쌓게 하는 좋은 대상이 됩니다.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지 말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꾸 받아들이고 볼 수 있도록 하는 힘들을 키우길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