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것들 4가지 (20150312)
요즘 몇군데 선원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하도 죽는 소리를 해싸서 가서 그래도 얘기나 들어본다고 간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가서 얘기 들어주는 것 뿐이기는 한데, '저렇게 고민 안 해도 될 걸 왜 저렇게 고민하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자기들 딴에는 꽤 심각한데,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거냐 하면, 누구 수행자가 왔다 하면 어떤 경우에는 좀 마음에 안 드는 경우도 있겠지. 수행자들이 다 똑같을 수가 없으니까. 그럼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봐주면 좋을 건데, 자기 방식대로만 수행하기를 바라고 하니까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라.
또 어떤 데에는 가면 출가한 스님들이 직접 공양을 해먹지 못하기 때문에, 공양하는 것 때문에 고민들을 많이 합니다. 물론 그것은 맞습니다. 공양하는 것이 힘들면 그럴 수가 있는데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나가서 사먹으면 되지. 안 그러면 조리되어 있는 것들을 사와가지고 그냥 데워먹기만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거 같으면 한 끼 먹는 거 그렇게 힘드는 것도 아닌데 하는 그런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또 그 스님들 입장을 생각하면 자신에게 맞는 수행자들이 와서 수행만 열심히 하면 되는데 어찌보면 수행 물을 흐리는 것 같으니까 좀 안 좋은 부분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출가한 스님이 한 끼 먹는 거 편안하게 먹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되니까 그런 마음이 드는 것들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어떤 것들로 인해서 괴로움들을 많이 당합니까?
아마 괴로워하고 있는 것들도 세월이 좀 지나고 나면 별것도 아닌데, 또는 한번 생각만 착 바꿔버리면 그거 뭐 별 대수롭지도 않는 건데 하는 그런 것들도 있을 겁니다.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번뇌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것들」을 경전에서 설한 것들이 있습니다.
원문을 좀 읽어드릴게요.
자신의 신체를 청정하고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 그게 첫 번째고,
감각기관을 자기의 생각대로 하여 사용하는 것, 그게 두 번째고.
음식에 대해서 적당량을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세 번째고.
게으름 피우는 것을 좋아해서 노력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이것이 네 번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번뇌에 지게 되어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번뇌들은 참 많은데 대부분은 보면 그 번뇌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관계돼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몸과 관계되는 것이고, 음식을 먹는 것도 몸과 관계되는 것이고, 그런데 감각기관을 즐겁게 사용할려고 하는 것, 또는 노력하는 걸 싫어하는 것 이런 것은 또 마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은 아니고, 다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으로 인해서 관계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에 져버리면 번뇌는 자꾸 일어나게 돼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자신의 몸을 깨끗하다고, 자신의 몸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먼저 버려버려라 하는 뜻입니다.
우리 여기 수행처에 오면 수행방법이 이러이러하다 하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떨 때 스님이 방안에서 이렇게 듣고 있으면 조금 뭐랄까 웃음이 날 때도 있긴 있어요. 초심자들이 오고 할 때 경험자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조금 핀트가 어긋났다' 하고 그렇게 느낄 때도 있어요. 형태들에 너무 치우친다는 거라.
그러니까 "수행은 이렇게 해야 된다" 하는 기본적인 포맷이 있습니다. 그 형태들에 너무 치우치다 보니까 중요한 부분을 자꾸 놓쳐버린다 하는 그런 느낌들을 받습니다.
"수행은 마음이 고요해질 때 그 고요해진 마음이 대상을 찾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고요해진 마음은 대상이 뭐가 있는지를 다가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알아차리다 보면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지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보게 될 것이고, 또는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지면 삼매에 쑥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게 가장 기본적인 것들인데, 그것들은 자꾸 놓쳐버리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들은 무시해버리고,
자꾸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하라. 아니면 경행을 '왼발' '오른발' 하면서 하라. 그리고 자세는 이렇게 하라" 그렇게 하는 것들을 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포인트를 자꾸 놓쳐버린다는 거라.
수행하러 오는 사람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해봤을 겁니다.
그리고 자기 방식이 어느 정도 굳어져 있는 상태에서 오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방식대로 해오던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들을 안 받아들일려고 그러고, 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 방식으로 해라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양쪽 다 자신의 형태들에 너무 치우쳐있는 것은 아닌가? 그게 그렇게 소중한 것인가?
그런데 이걸 자꾸 놓쳐버린다는 거라. 습관되어져 와서 그것들로 인해서 그렇게 수행하다 보니까 편안하고, 좋은 경험들이 있기 때문에 그 방식대로만 할려고 그러는 거라.
자신의 수행방법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되면은 하나의 견해에 딱 매여버리게 됩니다. 또는 자신의 몸이 소중하다고 여기게 되면은 다른 사람의 몸도 소중하다고 여기질 않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손을 씻는데 좋은 비누 안 갖다 놨다고 어떤 경우는 뭐라 하는 경우들도 있어요. 좀 좋은 비누를 갖다 놓으면 깨끗하게 손을 씻을 건데 좀 지저분하다 하는 거라. 씻는 데는 그렇게 별로 큰 차이는 없는데도 자신은 그것에 탁 매여져 있는 거라. 그래서 갖다 오면은 반드시 손을 씻어야 되는 것은 틀림없는데 손을 씻는 그 형식조차도 매여버리게 된다는 얘깁니다.
매여있는 것은 좋아. 자기는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리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든지 아니면 자기의 견해를 내세운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나쁜 방식으로 바뀌어버린 것들입니다. 자신의 방식에 딱 매여버리면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번뇌는 자꾸 일어납니다.
꼭 여자분들 아름답게 하는 것에 매여버려 놔버리면 계속적으로 보톡스니 뭐든지 하는 쪽으로 가게 되는 거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에게 보이는 모습들이 싫다고 느껴지는 거라. 그런데 그거 탁 버려버리고 나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주름살이 생기게 돼있는 거고, 늙어가게 돼있는 겁니다. 자기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슬리고 자신은 아름답게 보일려고 자꾸 하다보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몸, 자신의 견해, 자신의 생각에 자꾸 매여버리면은 번뇌는 자꾸 일어납니다.
어떤 수행처에 가더라도 그 수행처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줘야 됩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수행을 하러 왔으면은 그냥 그대로 수행하도록 하면 됩니다. 또는 수행하러 오는 사람들이 수행 안 하고 산책을 할 경우에는 그냥 놔두면 됩니다. 그 사람 일입니다. 뭐 그리 신경 쓸 게 있어? 그 사람이 행한 것에 따라서 그 사람이 받는 거기 때문에 크게 그렇게 신경을 안 써도 됩니다.
단지, 얼마만큼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를 만들어 주느냐? 그거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은 수행을 하게끔 됩니다.
대상을 찾지 않고 고요해지게 되면은 수행은 자동적으로 됩니다.
여러분들이 뭔가 할 일이 없어졌을 때, 그래서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가 돼있을 때는 수행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뭔가에 자꾸 얽매이고 붙잡히게 되면은 수행하고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버립니다. 여러분들 몸이 청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여러분들이 몸과 얽힌 일들을 만들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몸과 얽힌 일들이 만들어지면 만들어질수록 그것에 끄달려들어가 버린다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입니다. 자신의 몸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할 때 번뇌는 기승을 부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과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관찰할려고 해야 됩니다.
또한 자신의 견해, 자신의 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의 견해나 다른 사람의 몸도 자신과 똑같다고 자꾸 생각할 줄 알아야 됩니다.
내 견해 내 의견만 맞는 것이고 다른 사람 것은 틀렸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견해라고 하는 것은 바르게 세워야 되는 것이지, 자신의 것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견해가 확립된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몸에 대해서 바르게 아는 사람들은 자신만 이뻐질려고 하고 자신만 소중하다고 여기질 않습니다. 똑같이 생로병사를 겪는 몸이라고 알게 되고, 그 몸들도 나와 동일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과 자신의 견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바꾸어 보십시요.
자신의 몸은 늙고 병들고 부정한 것이다 라고, 자신의 견해는 올바른 견해를 확립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여겨보십시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견해와 부딪쳤을 때, 몸과 부딪쳤을 때 그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도록, 몸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 번뇌를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경전에서 얘기하는 것이 감각기관입니다.
감각기관은 각각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눈은 형태와 색깔을 구분하는 역할 외에는 못합니다. 귀는 듣는 역할밖에는 못합니다. 귀 보고 보라고 해봐야 볼 수 있는 조건이 안됩니다. 각각의 기관은 그 역할밖에는 못합니다. 또한 그 역할을 할 동안에는 다른 역할들은 일어나지 않게 돼있는 겁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은 동시에 감각기관을 통해서 하는 것들을 자꾸 제어할려고 해야 됩니다. 보고 듣고 하는 것을 동시에 할려고 하고, 맛보면서 말하고 하는 것들을 동시에 할려고 하고 이런 것들을 자꾸 제어를 해야 됩니다.
각각의 감각기관은 하나가 일을 할 때는 다른 것들은 일을 하질 않습니다.
그러면은 볼 때는 볼려고만 해야 되는 거고, 맛볼 때는 맛볼려고만 해야 되는 겁니다. 맛보다가 얘기를 해야 될 때는 맛보는 것을 중단하고 얘기를 해야 되는 겁니다. 들을 때는 들을려고만 해야 되는 것이지 보면서 들을려고 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그게 감각기관이 각각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그 감각기관을 제멋대로 놔둘 것 같으면 감각기관을 자꾸 활용을 할려고 그럽니다. 더욱 더 발달시킬려고 그럽니다. 맛있는 걸 먹는 습관이 들어놓으면 더욱더 맛있는걸 먹을려고 그러고, 보는 것들을 발달시켜놓으면 더욱더 좋고 아름다운 것들만 볼려고 하고, 소리 듣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감각기관은 발달시켜야 되는 것이 아니고 제어해야 되는 도구입니다.
그 감각기관은 이 몸을 유지해주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이 몸을 유지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감각기관은 반드시 제어를 할려고 해야 됩니다. 단지 그 감각기관은 제대로 일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보면서도 멍한 상태로 보고, 들으면서도 멍한 상태로서 듣게 되면은, 아무런 이익이 없어져버립니다. 볼 때는 확실하게 볼려고 해야 되는 거고, 들을 때는 확실하게 듣고, 맛볼 때는 확실하게 맛보도록 자꾸 능력을 키워줘야 되는 겁니다.
감각기관은 제어를 통해서 그 능력들을 극대화시켜야 됩니다.
있는 감각기관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맛보지 못하면 감각기관은 통제불능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살아있다는 것은 감각기관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뭘 해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감각기관들 중에 어떤 것 하나는.
그러면 반드시 그 어떤 것 하나는 알아차려야 됩니다.
생각하고 있다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보고 있으면 보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듣고 있으면 듣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렇게 자꾸 알려고 했을 때 보면서 들을려고 하지 않고 맛보면서 말할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감각기관은 각각의 역할이 따로 정해져있습니다.
그 감각기관은 하나의 순간에 두 가지 기능이 동시에 작용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감각기관을 흐리멍텅하게 두는 것 자체는 살아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적어도 지금 살아있다고 할 것 같으면 감각기관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은 나쁜 방향으로 자꾸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자신의 좋고 싫음에 따라서 감각기관이 바뀌어서는 안됩니다. 감각기관은 그 어떤 것에도 좋고 싫음은 없습니다. 마음이 '좋고 싫고'를 아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감각기관은 좋고 싫음 없이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얘기하는 것이 음식에 대한 적당량을 알지 못하면 번뇌가 자꾸 일어난다 하는 것입니다.
이 몸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음식과 느낌과 생각하는 것과 인식하는 것, 이런 4가지가 이 몸을 유지시켜 주는 영양소입니다.
느끼는 것도 이 몸을 유지시켜 주는 거고, 경험하고 아는 것도 이 몸을 유지시켜 주는 것들입니다. 음식만이 이 몸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느끼는 것도 바르게 느낄 줄 알아야 되는 거고, 인식하고 경험하고 하는 것들도 바르게 알려고 자꾸 노력해야 되듯이, 음식도 바르게 알아야 됩니다.
음식의 적당량을 알지 못하면 먹는 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제는 수행들을 어느 정도 해봤기 때문에 음식의 적당량을 알 거라고 봅니다. 자신에게 맞는 음식의 적당량을 반드시 알아야 됩니다. 그 양을 넘었을 때는 마음이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이 좋고 싫음을 자꾸 쫓다 보면 음식의 적당량을 자꾸 넘겨버리게 됩니다.
또한 음식에 대해서 좋고 싫은 마음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해야만이 음식의 적당량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반드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려고 하십시오. 먹고 있는 상태, 씹고 있는 상태, 넘기는 상태, 모든 것들을 자꾸 알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 음식의 소중함도 알게 되는 거고, 또 음식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또 음식이 몸에 미치는 영향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몸에 미치는 영향이 꼭 음식만이 아니다 하는 사실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음식의 적당량을 반드시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음식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번뇌를 자꾸 일어나게 할 뿐아니라 다른 번뇌들을 자꾸 더불어서 일으키게끔 합니다.
먹는 양을 조절하지 못하면 망상은 더욱더 일어납니다. 적으면 적은 대로 망상이 많이 일어나고, 많으면 많은 대로 망상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하나의 번뇌로 인해서 다른 번뇌를 일으키는 연쇄작용을 하는 것이 이 음식입니다. 먹는 것들에 대해서 주체하지 못해서 그런 망상들이 더욱더 일어나게 하는 것들을 자꾸 막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먹는 음식은 자신에게 필요한 양만 딱 정해서 먹어보십시오.
맛보고 향기를 맡고 하는 것들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해보십시오.
그래서 씹는 상태에서는 완전히 다 씹어서 더 이상 씹는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또 다른 음식을 먹도록 자꾸 해보십시오. 입안에 음식물이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음식물을 취하게 되면 좋고 싫은 것들에 자꾸 끄달려들어가게 됩니다.
음식에 대해서 유혹당하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그 음식물을 반드시 다 먹고 그다음 음식물을 먹는 습관들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또한 음식물에 대해서 만족할 줄 알아야 됩니다. 맛있는 것 또는 영양가가 없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말고 어떠한 음식물이든 이 몸을 유지시켜주는 데는 충분한 조건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음식에 대해서 만족할 줄을 알게 될 때 설혹 다른 조건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음식으로 인해서 번뇌들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설혹 출가한 스님이라 하더라도 나에게 누군가가 음식을 공양을 해서 올려주지 않는다고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번뇌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설혹 부인이 맛없는 음식을 해준다고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번뇌를 일으키지는 않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얘기하는 것이 게으름 피우고 노력하지 않는 것.
세상에 살아가면서 각각의 장애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장애들은 반드시 그 장애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그 장애를 넘어서야 됩니다. 수행을 하더라도 졸음이 오면 졸음을 넘어서야 되는 것이고,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을 이겨내야 되는 것이고, 여러 가지 장애들이 일어나면 그 장애들을 분명하게 이해했을 때 그 장애에 다시는 걸리지를 않게끔 됩니다.
그럴려면 부단하게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방법으로 해봤다가 안 되면 또 다른 방법으로 해보고, 다른 방법으로 안 되면 또 스승에게 가서 물어보고,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했을 때 그 장애들을 극복해나갈 수가 있는 겁니다. 여러번 실패를 하고 또 좌절을 하지만 또 일어서고 그래야만이 그 장애들을 극복해나가게 됩니다.
게으름 피우고 그냥 그 장애에 져가지고 만날 앉으면 그냥 졸고, 만날 앉으면 망상하고, 습관되어 가지고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노력해야 됩니다.
장애는 반드시 극복을 해야 됩니다.
수행에서는 수행대상이 명료해야 됩니다. 대상 자체를 잃어버리고 뭐 하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을 거 같으면 그거는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도 마찬가집니다. 각각의 장애들이 있을 거 같으면 그 장애들을 반드시 극복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부단하게 노력해야 되는 것이지 게으름 피우고 있어서는 안되는 것들입니다. 게으름 피운다 해가지고 그 장애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번뇌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더욱 더 번뇌는 기승을 부리게 됩니다.
졸음에 빠지는 습관이 들어놓으면 졸음에만 함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졸고 있으면서도 또 망상을 부립니다. 망상을 부리면서도 수행하기 싫다는 생각을 더욱 더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한 시간 동안 편안한 상태 이 상태에서 그냥 지낼려고 합니다. 번뇌는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에 일어났을 때 '아, 내가 졸음이 온다' 하고 알고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졸음에 떨어져버리는 상태가 이미 돼버리고나면 그것은 번뇌를 더욱 증가시키는 것뿐입니다. 빨리 장애는 극복을 해야 됩니다.
처음에 왔을 때 극복하지 않으면은 그 장애에 푹 떨어져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한번 두번 하다보면 습관처럼 돼버리고 그 습관은 다시 바꾸기 힘들어져 버리게 됩니다.
지금 내가 게으름 피우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대상에 대해서 명료하냐 안 하냐로서 판별을 하는 겁니다.
대상에 대해서 분명해야 됩니다. 뭔가 생활하고 있으면 그 생활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이고, 문을 닫을 때 열 때 그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되는 것이고, 배를 관찰하고 있으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아, 내가 또 게으름 피우고 있다' 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우리는 번뇌에 지게 됩니다.
또는 그것들을 극복해나갈 때 번뇌에 이기게 됩니다.
크게 4가지입니다.
자신의 몸과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
감각기관을 제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두는 것
음식의 적당량을 알지 못하는 것
게으름 피우고 노력하기를 싫어하는 것
이 4가지는 반드시 극복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야만이 번뇌를 극복하는 자가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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