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자기 관리의 요점 4가지 <모임과 모임장소의 관리> (20150409)

담마마-마까 2021. 9. 11. 09:00

https://youtu.be/3bRFJ3snhVY

* 자기 관리의 요점 4가지 <모임과 모임장소의 관리> (20150409)

 

오늘은 「자기 관리의 요점 4가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하고 같이 상가를 이루어서 살고 있었는데 그 스님들 간에 다툼이 있으면 부처님은 어떻게 했을까? 당연히 "싸우지마라" 하고 중재를 했겠죠. 그런데 중재를 해도 안 될 때는 어떻게 해요?

당연히 부처님이 그 자리를 떠나버립니다.

적어도 노력을 했지만 노력을 해도 안 될 때는 그것으로 인해서 번잡해지고 마음이 더럽혀지는 일은 없도록 하기 위해서 스스로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는 경우들을 굉장히 많이 보고, 부처님이 되고 나서 뿐 아니라 그전에 과거 전생에서도 그런 일들이 숱하게 일어났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의견 차이든지 뭐든지 다툼이 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피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게 문제가 뭐냐면 다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잘 조절이 될 때와 안 될 때의 차이가 있습니다. 일견 문제없이 덮어진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에 대해서 용서하는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언제가 되더라도 다른 때 그게 표출되게 돼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문제를 해결한 상태에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상태가 될 거 같으면 나중에 가면 또 똑같은 걸 가지고 문제 제기를 또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모임들을 운영한다는 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무리들, 여러분들 친구들 간의 모임들도 아마 비슷비슷할 겁니다.

그런데 혼자서 할 수 없는 게 여러 사람들이 모였을 때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모였을 때 기준점을 삼는 것이 불교에서는 4가지가 있습니다.

그걸 뭐라고 그러느냐면 붓다 사사니까 위하라(Buddha sāsanika vhihāra)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의 무리로써 있는 형태들을 띨 때 4가지 조건 하고 얘기한 것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조건이 뭐냐면 '렐라딴짜(leḷatañca)'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선원도 어쨌든 비 오고 이럴 때 밖에서 명상할 수 없으니까 비 피할려고 건물에 들어오는 겁니다. 추위와 더위로부터 피하고 여러 가지 곤충들이나 여러 가지 조건들로부터 피하기 위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렐라딴짜'의 구성 조건 중에 하나가 뭐냐면, 더위와 추위로부터 피하는 것뿐 아니라 좋은 조건이 되어야 한다 하는 얘기들을 합니다.

 

그러니까 현대사회에서 볼 것 같으면 차량 소리라든지 이런 소리들이 덜 들리는 곳, 공기가 조금 더 깨끗한 곳, 그러면서 마을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 그래서 접근성도 어느 정도 쉬워야 되고, 그러다 보니까 그런 자리를 구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리해도 그 조건들을 자꾸 잊어버릴 것 같으면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자기관리의 요점 4가지가 항상 이런 모임이라든지 이런 모임을 이루기 위해서 마련한 장소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게 모임을 이루기 위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는 장소로써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면 '수카딴짜(sukhatthañc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뭔가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고 하면서 안락하고 행복한 것이 없을 거 같으면 그건 의미가 없다는 거라. 아무리 좋은 조건에 자리를 잡았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내가 수행하는데 방해가 된다, 또는 내가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그리 하는데 방해가 된다 이럴 것 같으면 그건 의미가 없어져버린다는 겁니다.

아마 테라와다 사원들, 선원들 같은 경우는 대부분 이 조건들을 충족을 시켜줄 겁니다. 그래서 편안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테라와다만 할 경우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저쪽에서 나는 명상수행 할려고 하는데 요쪽에서는 기도한다고 목탁 치고 하면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런 조건들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명상하는 곳이면 명상하는 곳으로만 쓰여져야 되는 것이고, 법을 전하는 곳이면 법을 전하는 곳으로만 쓰여져야 되는 것이지, 여러 가지 조건들이 같이 겸해진 상태가 돼서는 안 되고, 또 그런 사람들이 같이 모여있어도 안됩니다. 한쪽에서는 수행하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염불하고 있을 거 같으면 그것도 안락한 조건은 되지 못한다 하는 얘깁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두 번째 조건을 충족시켜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자히뚠짜(jhāhituñca)'라고 합니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집중하는 데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고요하게 집중을 하고 있는 상태인데 한쪽에서는 떠든다든지 이럴 것 같으면 집중하는데 방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항상 선원에 오면 대부분은 말을 하지 말아라 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입니다. 앉아 좌선할 때 뿐아니라 밥을 먹을 때든지 모든 행위들에 대해서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내가 조심해서 알아차려야 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집중하고 알아차리고 있는 것들을 방해하지 말아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선정에 들고 집중력이 커져서 뭔가 성취들을 얻고, 또 그런 집중력으로 인해서 알아차림들이 더 커지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그 조건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안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면 '위빳시뚱(vipassituṁ)'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위빳사나 수행처이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되어야 합니다. 수행하러 왔는데 위빳사나 수행 안 하고 다른 수행을 하고 있다. 뭐 복식호흡을 하고 있다, 그럴 것 같으면 그것도 방해를 가져오게 되는 거고. 또 위빳사나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방식대로 위빳사나 수행을 할 거 같으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여기서는 여기의 방식으로 똑같은 방식으로 해야 되는 것이고, 또 다른 곳에 가면 다른 곳의 방식으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가 모임을 형성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될 장소, 장소가 갖추어야 될 것들이고,

또 그것들이 갖추어지게 됐을 때 그 수행처는 오래도록 유지된다 하고 얘기를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임이 장애를 만났을 때 부분입니다.

정신적인 장애와, 물질적인 장애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정신적인 장애들은 사람들이 모이면 더욱 모이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그 선원이 더욱더 커지고 영향력이 커지게 되기를 바라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그런 영향력이 커지면 소속되는 것보다는 자기가 따로 뭔가를 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물질적인 장애가 있습니다. 여기도 어쩔 수 없이 선원을 운영하기 위해서 회원들한테 회비를 받게 됩니다. 우리 선원 같은 경우에는 겨우겨우 운영할 정도로 세주고 뭐 그 정도로, 그렇게 풍족하게 쓸 수 있는 형편도 못됩니다.

그런데 물질적인 것들의 장애를 만나게 되면 물질적인 것을 얻는데 목적을 두게 됩니다. 목요탁발법회 나올 때 회비 얼마, 1박 2일 집중수행 할 때 회비 얼마, 뭐 할 때 얼마, 거기서 하는 회원이면 그냥 평등하게 누구든지 와서 수행하고 법문을 듣게끔 해야 되는데 그 조건을 차단을 해버립니다. 왜? 인원이 되기 때문에.

인원의 조건이 찰 거 같으면 물질적인 제약을 딱 자꾸 두게 되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물질적인 것들을 얻기 위해서 법회가 유지되는 형태를 띠게 되는 거라. 어떤 집중수행이든 아니면 어떤 강의든.

 

그런데 이 두 가지 조건은 그 두 가지 조건이 장애를 만날 거 같으면 그 장애만 깨져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 선원 자체가 문을 닫을 상태가 돼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모임을 가지는 장소에 대해서는 물질적인 조건들이나 정신적인 조건들의 장애를 만나지 않게끔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설혹 우리 선원 같은 경우에도 자율적으로 회비 내는 것들이 없어가지고 세를 줄 형편이 못된다, 그럼 문을 닫을 형편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면 어떻느냐는 거라.

또는 정신적인 문제, 회원이 적어서 법회를 할 상황이 못된다, 안 하면 어떻느냐는 거라. 그것들이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일정한 조건, 일정한 인원수가 되면 법회를 하고 수행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고, 또 일정한 물질적인 것들이 되면 그것을 계속 유지해 나간다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 두 개를 목적으로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장소가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 하는 뜻입니다.

운영하시는 분들은 항상 명심을 해야 되는 부분들입니다.

 

어쨌든 개인이 혼자 있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들하고 같이 모여서 화합되게 하는 것들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관리가 되지 않을 거 같으면 이 뒤에 것들은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 모임이 어떻든, 그 모임을 유지하기 위한 장소가 어떻든, 그것은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개개인이 항상 명심을 해야 되는 것은,

자기 관리를 하는 4가지를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첫 번째, 찬다(chanda)

기호에 따라 판단하는 것, 판단을 할 때 참 위험한 부분입니다.

자기의 호불호에 따라서 판단을 해버리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따라오도록 만들어버릴 거 같으면 어떤 경우는 잘못된 방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도 이렇게 자기의 기호에 따라서 그것을 판단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모임 자체가 엉뚱한 방향으로 갈 뿐아니라 그게 지속되다 보면 그 모임 자체가 와해되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런데 그걸 자꾸 잊어버리게 됩니다.

 

얼마전에도 스님들 간에 결정을 한 게 하나 있었는데, 재정적인 부분에 대한 것을 결정을 했더라고. 바른 판단을 한 것은 맞는데 아무리 바른 판단이라 하더라도 하지 말아야 되는 것들은 틀림없이 있는데, 출가한 스님들은 재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관여를 해서도 안 될 뿐아니라 그런 걸 결정해가지고 재가자들한테 알려줘서도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게 아무리 맞는 것이라도.

설혹 재가자들이 그런 부분에 대해서 문외한이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건 놔둬야 되는 것이지 스님들이 그걸 알려줘야 될 이유는 없다는 거라. 그것이 바른 것들인데도.

그래서 스님이 얘기를 했어요. "이건 아니다. 이것은 스님들이 건드려서는 될 부분이 아니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맞는 건데도 왜 스님들은 그렇게 했을까? 그게 "호불호"입니다.

 

아무리 맞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을 구분하지 못할 경우에는 호불호에 따라서 그것들을 결정을 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살아있는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만족한다고 하는 것은 죽는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러면 어떠한 경우든지 뭔가 하고자 하는 것들 그리고 기호들을 가지는 것, 그런 찬다는 항상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판단할 때 항상 명심해야 되는 것이

이 찬다가 일어나기는 나는데 이것들이 과연 선한 것인가?

그리고 이것을 일으켜야 될 것인가? 하는 것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선한 것이 아닐 경우에는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고, 또한 아무리 내가 이익이 있는 걸 한다고 하더라도 선하지 않는 것들로 인해서 이익을 구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또한 자신의 입장에서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됩니다. 의사면 의사가 해야 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재가자면 재가자가 해야 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또 출가한 스님이면 스님이 해야 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될 것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과 같은 수행경력과 스님과 같은 교학적인 걸 갖추면은 스님이 해야 되는 영역까지도 할려고 합니다. 존경을 바란다든지, 아니면 어떤 이익을 바란다든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스님들에 대해서 터부시한다든지 이런 것들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이익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아무리 선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은 분명하게 그만두어야 됩니다.

승려 복지 부분은 틀림없이 좋은 일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다 이익이 되고 또 그것들로 인해서 이익을 가져오는 사람들도 많아집니다. 그런데도 그러기 위해 재정적인 부분에 대한 것들을 스님들이 계획을 세운다? 그것은 하지 말아야 되는 부분입니다.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가끔씩 학부모들이 학교 다니는 선생님들한테 따지는 경우들이 있다고 그럽니다. 선생님의 영역에 대해서 잘잘못을 지적을 하는 겁니다. 설혹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선생님의 고유한 영역으로서 존중하는 마음으로써 해야 되는 것이지, 그런 존중할려고 하는 마음이 없이 그 잘잘못을 따지게 되면 그건 다툼밖에는 안된다는 겁니다.

아이가 다 똑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또는 자기하고 관계된 사람들이 항상 선한 일들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에 대한 배려들이나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항상 그 문제를 대하다 보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버리게 됩니다.

 

부처님도 다툼이 있을 때 다툼을 해결할려고 하다가 그 해결이 안 되면, 그것을 강제적으로 다툼을 해결시키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조용하게 떠납니다.

그래서 자기관리 할 때 이 찬다는 항상 조심해서 운용을 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일어나는 것이 찬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자기관리 하는데 요점은 이 찬다를 굉장히 잘 사용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자기 관리의 두 번째 요점이 분노 부분입니다. 도사(dos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성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일어나는 성냄도 있고, 말로 해서 성냄이 일어나는 것도 있고, 또는 행위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도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우선 여러분들은 항상 명심해야 되는 것은 말하는 것! 말하는 것으로 인해서 성냄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경전에는 보면 "말에 인해서 모든 악이 퍼져 나간다" 그렇게 돼있습니다.

악한 일들, 악한 행위들, 악한 생각들 이런 것들도 말에 인해서 퍼져나간다는 것입니다.

말이 없으면 성냄도 증폭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냄이 일어나더라도 말을 안 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꾹 참고 있을 거 같으면 그 성냄도 크게 퍼져나가고 증폭되고 하는 것은 없어집니다.

 

그럼 내가 말을 바르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말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할 수 있는 상태, 그리고 그 사람의 이익됨을 위해서 항상 말을 할 수 있는 자세, 이런 자세가 되기 전에는 분노가 일어났을 때는 말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말을 할 때는 항상 명심을 해야 됩니다.

그 사람에게 이것이 지금 현재 도움이 될 것인가?

그리고 이런 말로 인해서 그 사람이 행복해질 것인가?

그리고 이런 말로 인해서 그 사람에게 선한 마음이 일어날 것인가?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을 때는 설혹 성냄이 없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의미 없는 말들이 되게 됩니다. 그럼 그것도 하지 말아야 될 것인데, 성냄이 일어났을 때는 더더구나 조심을 해야 됩니다.

그것 말고 행위로써 마음으로써 하는 분노들도 반드시 다스려나가야 됩니다.

분노를 자기 스스로 관리해서 다스리지 못할 거 같으면 그 사람은 하나의 무리에 있고 하나의 선원에 속해 있는다고 하더라도 그 분노로 인해서 그 선원을 좌지우지 하고 이끌어나가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 파괴일 뿐아니라 그 무리들을 파괴하는 역할들을 한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공포입니다. 바야(bhay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공포감이 있으면 자기 판단을 제대로 할 수도 없을 뿐아니라 해야 될 것들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죽는데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데, 병드는데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즉, 살아있는 동안에는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공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잘못되면 어떻게 할까? 이번 달에 들어와야 될 돈이 적게 벌리면 어떻게 할까? 내가 가지고 있는 명예들이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이런 공포들은 항상 가지고 있으면서 살아가게끔 돼있습니다.

그런데 공포감을 가진다고 해가지고 해결이 됩니까? 죽는 게 두렵다고 해가지고 죽음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거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받아들이고 더욱더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회사에서 안 짤리기 위해서는 두려워할 것이 아니고 더욱더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달 벌어야 될 돈을 못 벌었으면 더욱더 열심히 벌어야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공포는 자기 관리를 할 때, 그것은 내가 넘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겁니다.

받아들이고 내가 지금 해야 될 것은 열심히 하는 겁니다.

열심히 지금 내가 알아차려나가는 것! 그 길밖에 없습니다.

무언가를 행할 때 행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무언가를 생각할 때 생각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무언가를 말할 때 말하는 것을 분명하게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마음에 평온함이 찾아옵니다. 마음에 평온함이 찾아오면 공포감은 일시에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나타나지 않게끔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두려우면 알아차리십시오. 밤에 새끼줄을 보고 뱀이라고 두려워할 거 같으면 가까이 가서 보면 됩니다. 자세하게 보면 '아, 새끼줄이구나' 하고 알면은 그 공포감은, 두려움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는 마음이 평온해져버리게 됩니다.

특히 수행 중에서 공포감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는 '아, 공포감이 있구나' 하고 분명히 그걸 받아들이고 나서 알아차림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면 그 공포감들은 일시에 사라져버립니다.

 

네 번째 자기관리는 무지입니다. 모하(moha)라고 합니다.

어리석음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완전하게 몰아내기는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항상 내가 지금 어리석은가, 아닌가? 하는 판단 기준은 있습니다.

탐·진·치가 있는가, 없는가?

그다음에 무상한 성품으로 보고 있는가, 아닌가?

그다음에 괴로움의 성품, 불만족한 성품으로 보고 있는가, 아닌가?

그다음에 무아의 성품으로 보고 있는가, 아닌가?

그다음에 부정한 것으로 보고 있는가, 아닌가?

이것이 지금 내가 어리석게 행동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현명하게 행동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의 판단 기준이 됩니다.

 

이 네 가지가 자기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자기 판단의 기준들이 올바르게 성립되어야만, 그 모임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가게 되고, 그러한 모임의 장소도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항상 이 점을 잊지 않도록 해서 「붓다 사사니까 위하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장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스스로가 바른 판단 기준 바른 장소로써 항상 사용될 수 있도록 스스로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