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핫타까 경 - 좋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4가지 (20150416)

담마마-마까 2021. 9. 15. 09:00

https://youtu.be/izTQD1ATKvs

* 핫타까 경 - 좋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4가지 (20150416)

<핫타까 알라와까(hatthaka āḷavaka)경 -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기 위한 조건 네 가지>

 

오늘은 「핫타까 경」을 가지고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손을 빨리어로 뭐라고 그래요? 좀전에 내가 '하타까' 얘기했잖아. 손은 '하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까'가 붙었으니까 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지, 손에 대해서 건네진 사람이든지 이런 손하고 관계있는 사람이라는 그런 뜻이죠? 핫타까(hatthaka)라는 게.

알라위까 라고 하는 나라는, 지금도 인도는 그렇습니다. 재물을 바치는 것, 그러니까 살아있는 생명을 죽여가지고 재단에다가 재물을 바치는 것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닭이든 염소든 그걸 그 자리에서 죽여가지고 그 피를 재단에 그 상에 묻히도록 하면 악귀가 물러간다 이래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알라위까 나라도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다른데 하고는 다르게 거기는 워낙 야차가 강한 나라였기 때문에 사람을 재물로 바쳤습니다. 인제 태어난 애들을. 그래서 이 핫타까 라고 하는 애가 재물로 바쳐지는데, 마침 부처님이 그 나라에 가서 법문을 설하고 있는데 당시에 왕도 가서 법문을 듣고 있는데, 부처님이 법문을 다 설하고 나니까 저번에도 한번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천신들이 "싸~두" 하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야차도 그 자리에 와서 부처님 법문을 듣고 '아, 참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잘못된 거구나' 하고 생각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남을 괴롭힌 일이 있어요. 남을 괴롭히면서 살아가는 게 참 잘못된 행위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도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몰라. 남을 괴롭히는 걸 가지고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 그런데 인과법칙은 참 분명해가지고 그런 사람들은 똑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스님이 가만히 있는 차를 뒤에서 받았어요. 비가 좀 와가지고 브레이크 라이닝이 다 돼가지고 페달이 잘 안 밟혔는데, 저쪽에 차들이 신호대기 중에 쭉 서 있는데 왼쪽 발이 잘 안 밟혀. 그래서 앞에 있는 차를 쿵 박았어. 비도 좀 부슬부슬 오고 해가지고 내려가지고 물어봤거든. 괜찮으시냐고. 그러고 뒷범퍼쪽이 찌그러져 있더라고. 보험에 연락해가지고 범퍼 다 수리하고 그리하겠다고, 아픈데 있으면 병원 가자고 그리 하니까, 그분이 내리더니 나는 괜찮습니다. 범퍼 조금 찌그러진 거 어떻습니까?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가시라고. 그때가 대구에 아침에 가는 때였거든. 나도 시간이 급하지. 대구에 법문하러 가는 때였으니까. 그러고 나서 그거 끝났어요.

사실은 나도 내 차보면 온데 기스 나 있고 했어요. 옆에서 누가 쿵 박고 해도 그냥 그냥 아무 관계없이 그냥 괜찮습니다. 가세요. 안 다치고 했으니까 됐습니다 해서 좋게 보내고 했는데 이번엔 내가 바꿔놔 놓으니까 딱 그렇게 되더라고. 그래서 만약에 자기가 다쳤다 해가지고 보험청구 다하고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머리 잡고 병원가서 눕는 사람도 있다면서. 그렇게 할 거 같으면 나도 이번에 남의 차를 뒤에서 받았을 때 틀림없이 그런 사람 만났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런데 그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바꿀 수는 있습니다. 그게 나쁜 것인 줄 알고 안 할려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라. 그러니까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나면은 그걸 안할려고 하게 됩니다.

 

야차도 마찬가지로 피 보고 좋아하고 남을 괴롭히는 거 보고 좋아하고 하는 것들, 살아온 것이 부처님 말씀 듣고 나니까 되게 안 좋거든.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사람 간의 관계에서 살아가는데 맨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애어(愛語)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애어라고 하는 것은 사랑스런 말이라는 뜻인데, 그냥 사랑스러운 말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해칠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말들이 애어(愛語)의 영역에 속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그 말을 했을 때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된다고 했을 때는 그것은 바른말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야차가 재물로 삼으려던 아이에 대한 생각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부처님한테 아, 내가 다음부터는 그런 짓은 안 하겠다. 남들 인간들 잘하고 하는 사람들 도와주겠다 하는 얘기를 하고 떠나갑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이 알라위까 왕이 이 아이를, 부처님, 이 아이는 부처님이 살렸습니다. 부처님이 데리고 시봉으로 하든지 뭘 하든지 하십시오 하면서 아이를 부처님한테 맡겨버립니다. 부처님이 우짤끼라? 그 아이를. 부처님한테 온 아이를. 그런데 부처님도 어떻게 하지 못하거든.

지금 동남아시아에 가면 아이들을 절에 의탁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의탁하더라도 출가시켜 가지고, 그래서 공부도 시키고 승려 생활도 하게끔 하고 하는데,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재가로 돌아가게 됩니다.

부처님 당시 이때만 하더라도 재가자 어린아이 그리고 7세가 안 되었으면 출가조차도 안되는 때였기 때문에 데려와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아니요. 이 아이는 내가 데리고 있을 상황이 안된다. 그러니까 왕이 데리고 키우시오 하면서 그 왕에게 다시 또 건네주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몇 번 손을 거쳤죠? 야차한테 갔다가 부처님한테 갔다가 왕한테 왔다가, 이렇게 '손을 거쳐서 살아난 아이다'라는 뜻으로써 이름이 핫타까(hatthaka) 라는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아이도 마찬가집니다. 어쨌든 자신이 나중에 커서 살아가는 이유가 부처님이 나를 살려줬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중에 부처님한테 출가를 하게끔 됩니다.

 

출가를 하면서 탁 마음을 먹는 게 뭐냐하면 내가 이 네 가지는 반드시 성취를 하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걸 보통 우리가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사섭법(四攝法)'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까 '애어(愛語)' 하나 나왔죠? 남을 해칠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남만 해치지 않는 게 아니고 자신을 괴롭히는 말도 해서는 안됩니다. 후회하는 거는 자신을 괴롭히는 겁니까? 괴롭히는 거죠. 그럼 후회해서도 안되고, 또 내가 뭘 잘못하고 나서 '아, 참 나는 바보다' 하고 하는 것도 자신을 괴롭히는 말입니다. 잘못했으면 '아, 참 내가 잘못했다' 하고 참회를 해야 되는 것이지 그걸 자책해서는 안됩니다.

그게 뭐냐면 '뻬이야왓자(peyyavajja)' 라고 해서 '애어'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냥 사랑스러운 말 상냥한 말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남을 괴롭히지 않는 말을 하는 것.

 

여러분도 꼭 마찬가집니다. 적어도 그것이 나에게 불행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면 안 할려고 한다는 거라. 그것이 나에게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할려고 한다는 거라. 그걸 빨리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만날 여러분들은 인과법칙 인과법칙 하고 얘기를 하지만 그걸 받아들일려고 안 한다는 거라. 실천을 안 하기 때문에!

자기가 선한 일 했으면 선한 결과가 돌아오는 거라. 악한 일을 했으면 악한 결과가 돌아오는 거고. 그래서 악한 결과가 돌아왔을 때 자신은 그 무서움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아, 다시는 이래선 안되겠구나' 마음을 더 먹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냥 자기가 나쁜 말을 하든 나쁜 행동을 하든 그냥 무심결에 그렇게 하게 됩니다. 가족 간에도 그러고 자기 자신에게도 그러고.

핫타까는 맨 처음에 이걸 완성할려고 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남에게 이롭게 하지 않는 것, 자신에게 이롭게 하지 않는 말 이런 것은 안 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다나(dāna)'라고 이렇게 얘기하는데, 여기사 말하는 다나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베푼다고 하는 다나 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아바야 다나(abhaya dān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두려움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베풂'

애가 무서워갖고 울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괜찮아, 울지마 하면서 평온하게 만들어주고 하는 그게 '아바야 다나' 입니다. 남들이 갈팡질팡 해가지고 이 절에 갔다가 저 절에 갔다가 막 이렇게 하고 있다.

그러면 가장 바른 부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면서 이게 네가 따라야 되는 것이고, 이것이 네가 배워야 되는 것이다 하면서 가르쳐 주는 것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방향의 지침만 탁 알려주게 될 때 그것도 '아바야 다나'라고 합니다. 두려움 없이 평온한 마음을 가지게끔 만들어주는 행위들 이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는 스님들도 다른 스님들한테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그냥 받아들이고 평온하게 해라. 그리고 이것이 네가 해야 될 일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설혹 그것이 네가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일이고 그것이 두렵다고 하더라도 그거 신경쓰지 말아라.

스님 같은 경우에는 내 절하나 없이 아무것도 내 소유 하나 없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두려워 안 하는 거라. 이제 오십 중반인데, 다른 스님 같으면 뭔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조그만한 방이라도 하나 만들려고 이렇게 합니다. 왜? 나중에 노후가 두렵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늙는 게 두려우면 뭔가 보험이라도 들어서 그것을 해결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은 그런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소유하지 않으면 어떻고 또는 병이 들면 어떻느냐는 거라. 그거 그냥 받아들이고, 그리고 출가생활을 할 동안에 내가 열심히 자기 할 일만 다 하면 되는 거라.

그렇게 하다 보면 노후도 걱정 안 하게 되는 거고, 병들어도 걱정 안 하게 되는 거고. 이번에도 그랬거든. 부산에서도 치료해준다고 그러고 대구에서도 치료해준다고 그러고 서울에서도 치료해준다고 그러고, 아프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 걱정을 하는 거라.

출가한 분만 해당이 되는 게 아니고 일반인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자기 자신이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최상의 보시입니다. 남들에게 뭔가를 나눠주고 베풀어주는 것만이 보시에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경우든지 평온함을 가지고 두려워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만드는 것, 그건 자기 자신에게 최상의 보시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집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그런 마음을 일으키게 해주는 것이 최상의 보시라는 거라.

 

빨리어 용어에 '지위따 다나(jīvita dāna)'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경전에는 보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물건 같은 것 가지고 있는 것들을 주고, 그다음에 자기의 친족 아내나 자식까지도 다 남들에게 주는 마음을 가지고, 나중에는 자기 자신조차도 베푸는 것들이 최상의 보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경전에는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지위따 다나'를 아무리 완성했다고 하더라도 '아바야 다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자기 생명마저도 버려버리면서 베푸는 것은 두려움 없이 평온한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어 주는 것에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거라.

 

핫타까는 이 두 번째를 완성할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완성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자꾸 그런 것을 만들려고 해야 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없고, 또 내가 해야 될 일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그 일을 완성하지 않고 죽는다는 대해서 두려움을 가져야 되는 것이지 소소한 것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앗타 짜리야(attha cariy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로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가치가 있는 일.

여러분은 여러분들에게 가치가 있는 일들을 하고 있는가? 하루를 한번 다 돌아봐봐요. 얼마나 가치있는 일들을 하고 있어요? 아마 스케줄에 매여서 뺑뺑이 돌다가 하루를 그냥 가기 바쁠 거라. 나중에 가서 아,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 하고 또 돌아보게 되는 거라. 이롭고 가치있는 일들을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그것을 완성할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여덟 가지가 이롭고 가치있는 일들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첫 번째 '확신(saddhā)'을 가지는 것. 아, 내가 이 가르침 듣고 이 수행법 따라가는 것 이것이 내가 가야 될 것이다. 부처님이 행해왔던 일들 내가 그대로 따라가야 되는 길이다.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확신만 들어도 적어도 내가 지금 이롭고 가치있는 일들을 할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롭고 가치 있는 일들을 하도록 자꾸 종용을 하게 됩니다.

 

두 번째, '실라와(sīlava)' 그렇게 얘기합니다. 계율, 선한 일들, 선한 행위들, 선한 말들을 자꾸 할려고 하지, 선하지 않은 말과 행위들은 하지 않을려고 하는 거라. 그렇게 하다 보면 아, 이게 참 나한테 이롭구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게 도움이 되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거라.

 

세 번째 하고 네 번째는 여러분들이 잘 아는 '히리(hiri)와 옷땁빠(ottappa)' 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알고(hirima, 히리마) 두려워할 줄 아는 것(옷따삐ottāpī)'

참 내가 이렇게 살아가지고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 부끄러워하는 것.

잘못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것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한 마음의 영역에 속하는 겁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 두렵고 부끄러워 하는 것은 후회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그것은 일으키지 말아야 되는 마음인 것이지, 히리와 옷땁빠라고 하는 것은 그런 영역이 아닙니다. 저번에도 한번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남들이 아라한에 이르렀다. 그럼 내 자신을 부끄러워 해야 되는 거라. 아, 나는 왜 이것밖에 못했을까? 농땡이 쳐서 그렇구나 하고 퍼뜩 정신을 차리고 부끄러워 해야만이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거라. 아, 저 사람이 나쁜 짓을 하니까 옥살이를 하는구나. 어, 나도 나쁜 짓 할 거 같으면 옥살이를 하겠구나 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되는 거라. 그래야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내가 가야 될 길을 끝까지 가게 된다는 거라. 그걸 히리와 옷땁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여러분들은 이거는 잘 알 겁니다. '바훗수또(Bahussuto)' 부처님 가르침을 많이 듣는 것. 많이 들어야만이 다른 것들을 받아들일 마음이 생겨버립니다.

그런데 듣는 것도 바른 가르침을 들어야 되는 것이지, 분쟁을 자꾸 일으키는 가르침이라든지, 자신을 내세우는 가르침이라든지,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들을 가르치는 거라든지, 이러한 것들은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이 사성제와 팔정도와 삼법인을 포함해서 그것들로 인해서 내가 실천해서 도움이 되고 실천해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일 때는 그것은 자꾸 들을려고 해야 되는 것인데, 듣고 나도 뭐 아무런 내가 바꿀 것도 없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남들하고 자꾸 다툼이 생기는 견해만 자꾸 생겨나고 이럴 것 같으면 그거는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다음에 '짜가와(cāgav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집착하는 것들을 버려버리는 것. 이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뿐나야(puṇṇaya)' 부처님의 담마를 이해할려고 자꾸 노력하는 것. 이해돼서 그것들이 자기 것이 되지 않으면 지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 삶은 어떤 경우든지 어리석은 삶이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여덟 번째가 '아삣초(apiccho)'라 해서 욕심부리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이롭고 가치 있는 일들이고, 다른 사람과 자기에게 이롭고 가치 있는 일들을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네 번째, '사마낫따따(samanattatā)'라 해가지고 평등심.

어떠한 경우든지 똑같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 깨달음에 이른 성자들도 일반인을 봤을 때 나와 똑같은 중생이다 하고 생각을 하는 것, 똑같은 사람이다 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하물며 일반 범부중생들이 내가 조금 더 가지고 조금 더 많이 안다? 허세 부릴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똑같다 생각을 해야 됩니다.

나이가 많고 나이가 적다고 해가지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그만한 뱀이라고 하더라도 독이 있는 것은 훨씬 더 강합니다. 어린아이라 해가지고 그것을 지혜롭게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받아들일 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평등한 마음을 가지게 될 때 그 사회는 조화롭게 돌아간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이 네 가지가 좋은 사회,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기 위한 조건들이다 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들입니다.

 

여기서 덧붙여 가지고, 여기는 경전하고는 관계없는 것들입니다.

네 가지를 더 여러분들한테 주문을 좀 하겠습니다.

첫 번째, 일상생활에서 무의미한 일은 생각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라. 정신없이 그냥 막 행하고 하는 거 하지 말아라는 거라. 의미 없는 것들을 왜 해? 그렇게 행동하면서 거기에서 내가 알아차림이 깊어지든지, 알아차림이 계속 연속되든지, 뭔가 행할 때는 의미가 있어야 될 거 아니라? 설혹 내가 그 알아차림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행하는 것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든지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 되어야 될 거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어떤 경우든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은 하면 안 돼. 빨리 정신을 차리고 '어, 내가 또 아무 의미없이 하고 있구나' 하고 빨리 돌아와야 돼.

 

그다음에 두 번째, 수행을 지속해나가려고 할 것 같으면 수행의 과위에 대해서 욕심부리면 안됩니다. 수행의 진척상황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든지 욕심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알아차림은 자기의 상태만큼 알게 돼있습니다. 그걸 꾸준하게 해나가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절대 욕심부려서는 안됩니다.

내가 선정에 다다르고 싶다. 아니면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싶다. 거 왜 쓸데없는 욕심을 부려? 욕심부린다 해가지고 그게 되는 것도 아닌데.

수행의 정도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욕심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그냥 평온하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뿐이다 하고 자꾸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망상하는 것은 당장 그만두라. 망상은 수행의 최대의 적입니다. 졸음 오는 것 아니면 통증 있는 것, 이런 것은 얼마든지 극복해 나갑니다. 그런데 망상부리는 습관을 들여놔놓으면 망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대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지를 못하게 되는 거라. 망상이 끼여들면서 자꾸 변화를 주고 자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나가게 되는 거라. 한 시간 동안 내내 앉아서, 꼿꼿하게 앉아있어도 망상이 들어오면은 그거는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렇게 꿋꿋하게 남들이 봤을 때는 잘한다고 하지만은 습관이 자꾸 망상부리는 습관들로만 만들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차라리 하지 말아라는 거라. 가장 큰 적입니다. 망상이!

어떠한 경우든지 생각하고 망상부린다? 딱 그냥 그 자리에서 중지를 해야 됩니다.

다른 것들은 수행의 진척에 따라서 바꾸어져 나갈 수 있고 그걸 끊어나갈 수가 있는데 망상은 굉장히 힘듭니다. 처음부터 아예 안 할려고 해서 탁 끊어버려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을 놔둬야 될 부분은 아닙니다.

 

네 번째, 괴로움을 좇으려고 하지 말고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하십시오. 대부분은 괴로움을 쫓아갑니다. 밥도 맛있는 밥 많이 먹으면 나중에 괴롭습니다. 먹을 때는 즐거운데 그 괴로움 쫓아가고 있는 거라.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할 생각을 할 거 같으면 딱 자기가 '아, 이거면 내가 충분하다. 이거면은 오늘도 오후에 아비담마 공부할 거 아니라. 공부할 때 조불지 않고 나중에 수행할 때 평온하게 하겠다' 그만 두어라는 거라. 여러분도 저녁까지 먹잖아. 저녁에 또 먹으면 되잖아. 그런데 왜 자꾸 그 괴로움을 쫓아갈려고 하느냐는 거라. 맛있게 먹고 많이 먹을려고 하고, 그러면 그렇게 안 하면 체력이 그렇게 바닥이 나? 그거 아니라는 거라.

괴로움은 쫓아가야 될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은 어떤 경우든지 그것으로부터 탈출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를 더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적어도 그리할 것 같으면 살아가면서 더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지고, 또 다른 사람들하고 관계에 있어서도 평온하고 평등한 관계로서 자꾸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게 핫타까 알라와까 경의 주요 내용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