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류과에 이르는 길 <수다원의 이익> (20150430)
그 프린트물은 읽어보십시오. 성인의 단계에 대한 프린트물을 몇차례 내줬던 기억이 있는데, 자세하게 해가지고 한 것은 아마 없을 거라. 지금 내준 프린트물은 고뜨라부(gotrabhū) 라고 하는, 불종성(佛種姓)이라고 한국에서는 그렇게 얘기하죠! 거기까지 이르는 길에 대한 겁니다.
그 방법이 "수행을 통한 길이 있고, 그다음에 믿음을 통한 길이 있다" 하는 두 가지 길로 나누어서 얘기를 하면서, 믿음을 통하든 수행을 통하든 어쨌든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해야만이 가능한 것인데, 그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게 사마타 수행으로 하는 방법과 위빳사나 수행으로 하는 방법이 있다" 하는 얘기를 이 프린트물을 통해서 이해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 프린트물은 내준 적은 없죠? (네) 그런데 찾아보니까 아라한까지 쭉 대충 적어놓은 게, 옛날에 적어놓은 것이 있었어요. 이거는 고뜨라부까지의 진행과정이니까 참조가 많이 될 겁니다. 경전을 근거로 하고 또 수행에 이런 장애들이 있다는 사실을 제시를 했고, 그래서 읽어보면 크게 무리는 아마 없을 거라고 봅니다. 여러분은 그 단계는 넘었잖아. 그렇죠?
오늘은 적어도 아라한에 이르르지는 못해도 예류과에는 이르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예류과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죠?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조금 환상이 들 수 있게끔 "예류과는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대충 설명을 좀 해주겠습니다. 그래서 수행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좀 일으킬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이 프린트물 대로 할 거 같으면 적어도 예류과 바로 앞에 고뜨라부 까지는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인제 내가 부처님 먼 가족은 됐구나 하는 그런 느낌은 들 수 있게끔 하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믿음이 계속 가지도 않고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도 않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고 나면 되는 게 저번에 쭐라소따빤나에 대해서 얘기했죠? 쭐라소따빤나에 이르러서, 쭐라소따빤나에서 다시 또 나아가면서 예류향으로 나아가고, 예류향에서 다시 예류과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고뜨라부에 이르면 그 부분은 찰나 간에 이를 수 있습니다. 찰나간에.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고뜨라부에 이르는 게 문제인 것이지, 그리고 예류과에 이르렀으면 아라한과까지 바라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익혀온 습들 때문에 이생에서 할 수 있느냐, 다음생에서 할 수 있느냐, 언제 끝나느냐 하는 문제인 것뿐이지.
그리고 문제는 뭐냐하면 고뜨라부까지 이르는 길을 꾸준히 갈 수 있는가?
그다음에 예류과에 이르는 상태에 이를 수 있느냐? 하는 두 가지 길이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전에 언제 그런 얘기를 했죠? "고뜨라부에 이르는 것은 간단하다." "삼보에 대한 확신들을 가지고, 그리고 오계 잘 지키면 된다." 하고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런데 인제 의심이 많은 사람들이나, 생각이 많은 사람들, 또 수행에 대한 열의가 많은 사람들은 이것들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또 수행을 통해서 고뜨라부까지 이를 수가 있습니다.
다섯 가지 장애들만 완전하게 극복할 수 있으면, 쉽게 말하면 수행하면서 편안하게 그냥 시간 보낼려고 안 하고, 또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그것에 안주해가지고 그것에 빠져가지고 '좋으니 나쁘니' 이런 마음이 들지도 않고, 그리고 망상부리는 이런 것들이 없어지고 이런 상태,
지속적으로 그냥 알아차림만 쭉 해나간다면, 그 알아차림의 상태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면, 때로는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알 수 있을 때도 있을 거고, 어떨 때는 그것이 아주 빠르게 변하는 대상들로서 보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느낌이 그냥 끊임없이 소멸되는 현상들만 보기도 할 것이고, 그런 과정들을 쭉 거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이러한 과정들이 쭉 계속해서 그 과정들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지금 나에게 일어난 현상들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지금 나의 능력에 따라서 알고, 지금의 나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또 다르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거는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고 그냥 집착 없이 바라보는 것만 해나가면 됩니다.
그리하더라도 그 방법은 다섯 가지 장애는 반드시 뛰어넘어야 되는 형태입니다. 앞에 삼보에 대한 확신과 오계를 지킨다고 하는 것들도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해야만이 가능한 부분입니다. 그리할 것 같으면 다섯 장애들은 제거가 돼나가집니다.
또는 수행해나갈 때 그냥 현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다섯 가지 장애들을 그대로 없애는 방법이 있는 반면에 지금 내가 그런 상태가 되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럼 못 일어나도록 만들어버리면 됩니다. 사마디 방법으로 집중을 통해가지고 그러한 것들이 일어날 수 없는 상태들을 만들어서 그러한 상태가 계속적으로 훈련돼나가는 상태가 될 것 같으면 다섯 가지 장애는 결국엔 떨어져나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마디의 방법으로 하더라도 다섯 가지 장애는 눌려진다고 하지만 그것이 계속적으로 지속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위빳사나로 탁 전환이 될 때 그것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자신이 알게끔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법을 통한 것이든 아니면 믿음을 통한 것이든 자기 스스로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예류과의 이익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여기에 어항이 있다고 칩시다. 햇볕이 강해가지고 어항물이 점점 줄어들어서 어항물이 전부 싹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되면 이 안에 살고있는 물고기들은 어떻게 될까? 당연히 모두 죽겠지 뭐. 물이 없는데 물고기가 어떻게 살 거라?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불선한 것이 싹 다 말라버렸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선한 마음들만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될까?
이 물고기들은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죽게 돼있습니다. 물이 다 말라버리면. 좀 강한 놈들은 좀 더 오래 지속될 것이고, 약한 얘들은 좀 일찍 죽음을 맞게 됩니다. 죽음만 맞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형체조차도 다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그게 눈에 뻔히 보이는 거라. 어항이 다 말라버리고 나면.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는 상태를 자기 자신이 알면, 그리고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탁 멈춰져버리고 불선한 마음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딱 알게 될 것 같으면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얼마나 좋을까?
그게 예류과의 특징의 하나입니다.
내가 윤회하는 사항들이 이제는 딱 말랐다는 사실을 압니다.
단지 그 물고기가 오래 살고 일찍 죽고의 차이에 따라서 아, 나는 완전하게 닙바나에 이르는 길은 정해져 있는데, 그것이 언제가 되는지 시간의 차이만 있다는 것뿐인 것이지, 반드시 이제는 윤회로부터 벗어난다는 사실을 안다는 거라.
그걸 뭘 통해서 알 수 있느냐면 나쁜 마음이 일어나지를 않는 거라.
선한 마음들만 지속적으로 쭉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완전하게 나쁜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은 싹 말라버린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쁜 마음을 일으킬려고 하더라도 일으킬 수 있는 조건 자체가 없는 거라.
대부분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나쁜 행위 나쁜 말 나쁜 생각들을 안 하려고 자꾸 노력을 합니다. 그리해도 어떨 때는 나쁜 행위들을 하기도 하고 하는데 그러고 나면 되게 자책하고 후회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아예 없습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이미 내 마음은 선한 쪽으로 쭉 기울어져버린다는 거라.
수행을 잘하는 사람들은 수행을 해나가면서 대상이 일어난 것들만 분명하게 자꾸자꾸 알아차리면 그 대상이 바뀌든 하나의 대상이 되든간에 그것만 계속적으로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어도 나쁜 마음들이 일어날 여지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안 되니까 어떻게 해요? 의도적으로라도 그냥 대상에 마음을 갖다 붙이라고 그럽니다. 갖다 붙이라는 거라. 대상에 갖다 붙이고 대상을 알아차릴 때만이 그래도 선한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불선한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그렇게 의도적으로 하더라도 불선한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데, 그 수행하려는 마음이 어느 순간에 딱 사라져버리면 불선한 마음이 탁 뒤이어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수행을 잘해나가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걸어갈 때는 걸어가는 것을 그냥 알아차리게 되고, 내가 뭔가 행위하고 있으면 행위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고, 말하고 있으면 말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알아차리는데, 자연스럽게 그걸 알아차려나가기 때문에 불선한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소지가 거의 없어져버립니다.
그런데 수행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느냐에 따라서 불선한 마음들이 일어날 수 있는 소지가 안 나타나는 경우가 있고 의도적으로라도 그렇게 하는 경우들도 있다는 거라.
수행 하나만 열심히 하라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자연스럽게 돼나갑니다. 수행이 자연스럽게 무르익어지면은 틀림없이 그것은 대해가 마른다는 것을 어느 순간에 착 알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 대상들을 지금 알아차려나가고 있기 때문에 불선한 마음들이 일어날 소지가 없어. 그걸 쭉 계속 걷다 보면 어느 순간에 '아, 인제 나는 딱 끊어졌구나!'
욕심부리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대상을 만나도 욕심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갖다 놔줘도 그것에 대해서 욕심이 일어나지 않는 거라. 그런데 욕심부리는 것들을 계속적으로 해왔던 사람들은, 안 그러면 잠재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딱 볼 거 같으면 금방 욕심이 일어나버린다는 거라.
성내는 것들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은 아무리 성내는 상황이 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성내는 일이 없어져 버리는 거라.
탐·진·치의 생활에 자꾸 젖어지면 젖어질수록 그러한 것들이 조건따라 일어날 것 같으면 금방 튀어나와 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탐진치가 없는 생활들을 쭉 해나가다 보면, 그걸 습관화되다시피 해나갈 것 같으면 그러한 조건이 일어나더라도 나에게 영향을 못 미치는 형태가 되는 거라. 아무리 나에게 '죽일 놈 살릴 놈'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성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아무리 좋은 걸 나한테 갖다줘도 내가 필요 없을 거 같으면 그거 가져갈 생각을 안 하는 거라. 그냥 그것을 대상으로서만 알아차린다는 거라.
수행에서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이 자연스럽게 될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지금은 의도적으로 조금 조금씩 대상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하지만 그것이 자꾸 익숙해져야 됩니다. 익숙해져야만이 대상이 자연스러워버립니다. 그냥 대상이 드러나버립니다. 마음이 저절로 그 대상을 자꾸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그게 예류과의 이익 중에 첫 번째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하겠어요? 완전히 지금 할 일을 다 마친 것은 아니지만,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그래서 내가 지금 윤회하는 현상들이 반드시 끊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상태가 될 거 같으면, 그냥 자신이 해야 할 일들만 계속하게 되는 거라.
두 번째, 당연히 예류과에서 없어지는 번뇌들은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그것은 이 프린트물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확인을 해주면 됩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것들이 뭐냐면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특징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걸 "성자들의 일곱 가지 특징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믿음, 지계, 히리(hiri), 옷땁빠(ottappa), 그다음에 수행에 대해서 자연스러워지는 것 익숙해지는 것, 그다음에 짜가(cāga) 번뇌든 뭔가를 가진 것이든 버리고 줄 줄 아는 것들, 그다음에 지혜가 일어나는 것들, 이런 것들이 딱 갖추어지게 됩니다.
내가 대상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고 있더라도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들이 어떨 경우에는 그냥 알아차리고만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서 어떤 마음이 일어나느냐면 '어, 이러다가 이생에서 내가 못 끝낼 수도 있겠구나.' 또 몇번 윤회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탁 일어난다는 거라. 그러면은 더욱더 다른 일들을 줄이더라도 수행하는 시간들을 늘리려고 하게 됩니다.
만약에 다음생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고 천신으로 태어났다. 그럼 천신의 삶의 기간은 인간보다도 훨씬 깁니다. 그럼 그 긴 시간 아무리 내가 행복하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수행할 조건이 안 될 거 같으면 다시 또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거라. 괜한 허비 시간을 보낸다는 거라.
악한 마음은 일어나지 않아가지고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걸 끝낸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어, 이러다가 내가 한정없이, 한정없는 시간 뒤에 내가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게 히리 옷땁빠 들입니다.
성자의 특징의 히리 옷땁빠하고, 일반 범부중생의 히리 옷땁빠하고는 경우가 다릅니다. 악행을 저지른 것은 악한 마음이고 히리 옷땁빠 부분에는 들어가지 않는데, 악행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 '어, 내가 저거 했다가는 큰일난다' 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그러면 남들이 잘못된 행위를 한다, 그러면 '어, 저거 저러다가는 감옥에 가는데' 하는 두려움이 일어난다, 그럴 것 같으면 그건 범부중생들에게 일어나는 히리 옷땁빠입니다.
그런데 성인의 단계에 이르면 아예 내가 악한 것들을 할 수 없는 상황들을 자신은 알아. 단지 게으름의 상태, 이때까지 익혀온 습성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꾸준하게는 해나가는데 그것들을 더욱더 박차는 힘들은 일어나지 않을 때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럴 때 일어나는 게 이 히리 옷땁빠 들입니다.
나머지 부분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그것은 예류과에 이르르면 끊임없이 이런 것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예류과는 아라한과는 다르지만은 아라한과에 다름이 없다 하는 이유들이 그와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수행에서 더욱더 노력해서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완전하게 탁 이해해가지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상태에 이르를려고 하는 마음들을 자꾸 일으키야 됩니다.
지금 현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냥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일부러 그 대상을 알려고 자꾸 노력을 할 필요도 없고, 그 대상을 벗어날려고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자기의 상태에 맞게끔. 그런데 마음은 항상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아야 된다는 것이 밑바탕에 딱 깔려져있습니다.
그다음에 예류과의 이익 세 번째는 '오라사 뿟따(puttā orasā)'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피를 나눈 사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피를 나눈 아들 딸'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고뜨라부는 부처님의 가족은 되었지만 전혀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닙니다. 내가 그 가족에 편입이 된 겁니다. 쉽게 말하면 양자로서 들어가는 형태가 됩니다.
그런데 '오라사 뿟따'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로 할 거 같으면 부모에게서 태어난 친자와 같은 겁니다. 그 친자는 법적으로 네가 친자가 아니다 하고 내치기 전에는 그 친자의 지위가 바뀔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또는 법적으로 그걸 내친다 하더라도 그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거는 바뀔 수 없는 사실이라는 거라.
내가 부처님의 아들이다. 부처님의 딸이다. 그런 마음이 일어나면 얼마나 기쁠까?
이게 인제 수다원들의 이익들이고, 그래서 수다원을 바라는 사람들은 항상 이 상태들을 염두에 두라 하고 얘기합니다.
고뜨라부에 이르르고 나면 반드시 회상해야 되는 것이 이 세 가지이기도 합니다. 또는 고뜨라부에 이르지 않은 범부중생이라고 하더라도 이 수다원들의 이익들을 자꾸 생각할 거 같으면, 더욱더 내가 노력하려는 마음들을 내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일차적으로 수다원이 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수다원에 이르고 나면 그 뒤부터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단지 더욱더 노력하는 일만 남은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을 성인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성인과 범부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이 수다원의 이익들을 기억해서 그 상태에 이를려고 더욱더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수다원의 이익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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