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을 허비하지 말아라 (20150521)
큰 스님들한테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삶을 허비하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을 그냥 간과해서 넘기지 말아라" 하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빨리어 용어가 뭐냐면 "카노- 오- 마- 우빳짜가-(khaṇo vo mā upaccagā)"
'카-노-(khaṇo)' '카-나'라고 하는 것은 '순간'이라는 뜻도 되지만 '그 시간'이라는 용어입니다. 그 순간순간이 모여서 시간이 되고 그 시간이 여러분들 삶을 형성하게 됩니다.
'오-(vo)' 라고 하는 것은 2인칭 지시대명사죠.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그 순간을,
'마-mā'는 '하지 말아라', '우빠(upa)'는 '끌어당긴다' 라고 하는 것이고, '짜가(cāga)'는 뭡니까? '버린다'는 뜻이죠.
'보시'라고 할 때의 '다나'하고 비슷한 용어인데, 버린다고 할 때 뭘 버린다는 뜻입니까? 자신이 가지는 견해도 버려야 되는 거고, 자신이라고 하는 것들도 버려버려야 되는 거고, 이런 것들을 버려버리는 것. 그래서 심지어 자신의 물건까지도 줘버린다고 하는 그런 말을 할 때 '짜가'라고 합니다.
'우빳짜가-(upaccagā)'라고 하는 것은 '버리는 쪽으로 나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비해버린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원래 그대로 빨리어 그대로 할 것 같으면 "이 순간을 간과하지 말아라. 너 함부로 생각하지 말아라" 하는 그런 의미인데, 그걸 보통 의역해가지고 "너 삶을 허비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할 때 그 얘기를 합니다.
어떤 때 여러분들은 삶을 허비하게 될까?
이 게송에 나온 일화가 그런 게 있습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이 선원에 도둑이 들었다. 그럴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도둑이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으니까 이 문 열쇠를 바꾼다든지 아니면 이 문을 이중문으로 한다든지 해서 다시는 이 문을 통해서 들어오지 못하게끔 방어를 아마 해야 될 겁니다. 이 선원은 건물이 다른 데를 통해서 들어오기는 참 힘든 그런 곳입니다. 이 문이 부서지면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와야 되겠죠.
그렇게 노력들을 하게 되는데, 이 라자가하라고 하는 도시에도 도적떼들이 그렇게 많이 들어와서 사람들을 해치고 물건을 뺏어가고 그랬던 모양이라. 그러니까 나라에서 도적떼들이 못들어가게끔 사람들이 사는 곳에 성벽을 쌓도록 했어요. 그 소식을 듣고 그 라자가하의 부근에서 수행하던 스님들도 그 도둑이 여기만 가라는 법이 없으니까 내가 수행하는 곳에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자신들도 도적을 막기 위한 울타리를 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안거 때 그거로 보내면 안거 시간이 다가버립니다.
가까운 예로 여러분들 수행하러 왔는데 수행하는 시간을 빼내가지고 청소질만 할 것 같으면 그 청소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내버리고, 그 청소시간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앞에 준비하는 거, 그다음에 청소하고 나서 뒤의 일들, 그러면서 수행하는 시간들을 많이 뺏어버리게 되는 거라.
이 비구스님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안거 석달 중에 그 울타리를 친다고 시간을 많이 뺏어먹고 실제로는 공부를 못했다는 거라. 그래가지고 부처님한테 갔을 때 부처님이 이 게송을 합니다.
"삶을 허비하지 말아라!"
그 울타리 치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라? 뭐 재가자들일 거 같으면 집에 도둑 안 맞기 위해서 문단속을 잘한다고 하고 그걸 방어하기 위해서 뭔가 더 해야 될 일이 있다고 하지만, 출가한 스님이 뭐 그렇게 도둑맞을 게 있다고 그거 한다고 시간을 보냈느냐는 거라. 뭔가 부처님이 생각할 때는 잘못됐다는 거라.
세속사람들이라 라자가하 성이야 사람들이 다치기도 하고 물건 잃어버리기도 하고 해서 그 성벽 쌓는 거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치자. 그런데 너는 그거하고는 별로 의미가 없는데도 왜 그러고 있느냐는 거라. 자기 몸 다칠까 싶어서? 아니면 스님들 가진 거 해봐야 옷가지하고 바리때하고 필수품들뿐인데 그거 가져갈까 싶어서?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거라.
그러면서 부처님이 봤을 때는 그 스님들이 그 안거 기간을 헛되이 보내버리고 왔다는 거라. 시간을 괜히 쓸데없는 데다가 시간을 다 보내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 울타리를 친다고 하더라도 그 울타리를 치는 것을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했을 거 같으면 그 비구 스님들은 그것을 쓸데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럼 부처님한테 와서도 "부처님, 우리 안거 기간 동안에 그냥 엉뚱한 일 한다고 시간 다보냈습니다." 하고 얘기하진 않는다는 거라. 설혹 울타리를 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리면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했습니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이게 보통 그렇게 안 하니까 그게 문제가 되는 거라.
라자가하의 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성벽도 쌓아야 되고, 문도 만들어서 문을 더 튼튼하게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수행을 하면서 어떤 문(門)들을 튼튼히 쌓게 될까?
육근(六根)이라는 문(門)입니다. 잘 보고, 잘 듣고, 잘 맛보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보는 걸 튼튼하게 하지 못할 거 같으면, 보면 욕심내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들이 생겨납니다. 도둑이 그냥 그 문을 통해서 들어와버리게 된다는 거라. 맛보는 것도 튼튼하게 하지 못할 거 같으면 맛보는 것에 대해서 좋고 싫은 것들을 일으키게 된다는 거라. 적어도 수행하는 사람일 거 같으면 그 문을 튼튼하게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감각기관에 조종당해가지고 좋고 싫어하는데 싹 빠져버리면 그거는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삶을 허비하게 돼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수행이 여러분들 생각대로 앉아서 그냥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거, 경행할 때 왼발 오른발 하는 이것만일 거 같으면 세상 편하겠지. 그것만 하고 살 거 같으면 그렇게 해도 돼. 그런데 그렇게 하고만 살 수가 없다는 거라.
일상생활을 하면서 보고 듣고 냄새맡고 다 해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그거는 튼튼하게 할 생각을 안 한다는 거라. 그러면서 그 시간을 그냥 허비해버립니다. 그 삶을, 그 시간들을 그냥 지나쳐버린다는 거라. 간과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이 게송에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순간을 간과해버리지 말아라. 그렇게 하는 것은 곧 삶을 허비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들을 잘 지키라고 하는 걸까?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탐·진·치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탐·진·치 중에 하나만 일어나면 크게 문제 될 거 없어요. 그 번뇌는 그냥 자기 혼자 활동하다가 사라져버리면 돼버리는데, 대부분 그 탐·진·치는 자기 혼자서 활동하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다른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게 됩니다.
탐심(貪心)에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 안 되는 법이 있든가? 없습니다. 딱 그게 접착제로써 붙어버리면 그것은 탐심이 떨어지질 않는다는 거라.
'예쁘다! 내가 가져야지!' 하게 된다는 거라. 그냥 예쁘다 하는 탐심만 일어날 거 같으면 이건 크게 문제 될 거 없어. 그런데 예쁘니까 내가 가질려고 하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이 딱 개입돼버리니까 이 예쁘다는 것이 집착하는 것으로 바뀌어버리게 되는 거라. 그런데 그 집착하는 것들로 인해서 그것을 메꾸고 충족시키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는 거라.
탐·진·치도 이렇게 서로 결합들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만 결합할 거 같으면 또 조금 덜하다는 거라. 그 결합하는 것들만 탁 끊어줘버리면 되는 거라. 그래서 그걸 끊어주기 위해서 탐심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냥 예쁘다고 알 것 같으면, '예쁘다' 하는 것만 알아차릴 거 같으면 거기에,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을 안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 접착제를 탁 끊어줄 거 같으면 '나'라고 하는 것이 없어져버리면 예쁘다고 하는 것은 '조금 예쁘다' 하고 생각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건 언젠가는, 조금 있으면 사라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탐심(貪心)에는 반드시 오만함, 그리고 나를 내세울려고 하는 허세부리는 것들, 이런 것들이 같이 결합을 해버린다는 거라.
진심(瞋心)에는 똑같이 질투하는 것, 낙담하는 것, 후회하는 것, 이런 것들이 같이 결합한다는 거라.
가만히 한 번 보십시오. 성냄이 있다, 성냄이 왜 성을 내고 있는 거라? 뭔가에 대해서 질투를 하든지, 뭔가에 대해서 후회하는 마음이 들든지, 낙담해가지고 남에게 그걸 퍼부을려고 하든지, 그런 것들이 개입이 되면 그냥 성냄만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거라.
어리석음(癡心)에 대한 것들도 그냥 게으름에 빠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것들에 매달려버립니다. 자신의 견해에 딱 묶여버립니다. 그런 거하고 결합이 돼버리면 그냥 거기에 헤매고 있는 거라. 수행하다가 게으름이 일어나는 것들을 평온하다고 착각을 해버립니다. 그럼 거기에 매여버리면, 그렇게 착각을 해버리면, 그냥 그 상태를 좋다고, 아무런 변하는 성품들을 알지 못하는데도 그냥 거기에 묶여져 있는 거라.
그래서 "탐·진·치가 서로 결합을 할 뿐 아니라, 탐·진·치 각각에는 또 다른 것들이 결합들을 하기 때문"에 "육문을 잘 지켜라"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여섯 가지 문을 잘 방어하는 것! 그것이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 (수행자 대답 :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렇지. 알아차림 해야 되는데,
먼저 그 여섯 가지 문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의존하는 것부터 끊어버려야 됩니다. 그것에 의존해버리면 답이 없습니다. 계속 그것에 의존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 한번 보십시오. '아름답다', 아니면 '오늘은 행복하다', '기분이 좋다', 감각 아닌 것이 있어요? 전부 그 감각입니다. 그런데 감각에 그냥 의존해버립니다. 그래서 '오늘은 날씨가 좋다' 그 감각에 의존해버릴 것 같으면 날씨가 좋은 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좋으니까 나가서 나들이 해야 된다'는 거라.
감각은 의존할 대상이 되지는 못합니다.
의존해가지고 여러분들한테 좋은 것들을 가져올 거 같으면 문제가 없지만, 어떠한 경우든지 바른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것이 되지를 못합니다.
감각은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날씨도 오늘 맑다가도 조금 있으면 흐려지게 돼 있는 거고, 그러다가 비도 오게 되는 거고, 그렇게 변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감각에서 일어나는 마음들도 변하게 돼 있는 겁니다. 그렇게 변하는 것들은 의존할 것들이 못됩니다. 그런데 왜 자꾸 그렇게 의존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감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들, 그 느낌들은 의존할 대상이 아니다" 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날씨가 맑다', 그냥 맑다고만 알면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어! 오늘 나들이 갈까?' 이래버리면 거기에 의존을 해서 더 발전을 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의존하다 보면 정작 해야 될 것들을 하지 못합니다.
느낌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딱 세 가지로 분류를 하면 됩니다.
해야 될 것,
그다음에 하고 싶은 것,
그다음에 하고 싶지 않은 것!
그렇게 분류가 됩니다.
날씨가 맑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이 생겨납니다.
날씨가 흐려졌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는 것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날씨가 맑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해야 될 일이라는 거라.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으면 하고 싶고, 하고 싶지 않는 느낌들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여섯 가지 문을 통해서 일어나는 감각은 알아차릴 대상이라고 알아야 됩니다.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해야 할 일들을 하게끔 됩니다.
울타리를 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울타리를 칠 때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는 느낌들이 있습니다. 그 느낌들을 알면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이지, 울타리를 치는 일이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울타리를 치는 일이 해탈로 이끌어 줍니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해탈로 이끌어 줍니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해탈로 이끌어 주는 것들을 해야 되는 것이지, 해탈로 이끌어 주지 못하는 것들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일들과 해야 할 일의 대상들을 분명하게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반드시 정립을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단지 울타리를 치는 것들이 내가 울타리를 치면서 알아차림이 있을 경우에는 그것은해야 할 일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단지 울타리만 치는 것으로는 해야 할 일이 되지 못한다 하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그와 같이 "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삶들은 알아차릴 대상이지, 알아차리지 않아야 될 대상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알아차림이 있을 때 순간을 간과하지 않고, 삶을 허비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감각기관은 어떠한 경우든지 살아있을 때는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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