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선인(Sabbhi, 善人)이란 누구인가 (20150423)

담마마-마까 2021. 9. 17. 09:00

https://youtu.be/19flKKBVylU

* 선인(Sabbhi, 善人)이란 누구인가 (20150423)

 

오늘은 삽비(Sabbhi) 선인(善人), 「선인이란 누구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선한 사람,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삽비(Sabbhi)' 라는 것은.

 

그 사람은 누구인가? 결론은 부처님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해버리면 안되는데 이.

왜 그러냐면 "저 사람 참 좋다" 하는 사람도 평생 그렇게 계속 나한테 좋은 사람일 수는 없죠? 어느 스님이든 "그 스님 참 좋다" 이렇게 하더라도 결점 없이 "아, 참 그 스님은 진짜 훌륭한 스님이다" 하고 얘기할 수 있는 스님이 과연 있을까? 거의 없다고 봐야 될 겁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그런 결점을 찾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결점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분을 보면 선인이라고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선한 일만 했고, 악한 일은 일절 하지 않았고, 그다음에 선인의 조건에서 세 번째가 중요한 건데 영향력, 영향력이 끊임없이 미치는 것. 2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부처님의 영향력이 미친다는 얘깁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을 「선인」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그럴만한 조건이 충족하기 쉬운 사람들은 아마 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친구나 스승 아니면 스님들 아니면 어떤 뛰어난 분들을 기준점으로 삼아야 되는 게 아니고, 부처님을 기준점으로 삼아야 된다 하는 것이 그런 이유들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점으로 삼는 것은 뭐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이 선인이 되기 위한 거죠? 여러분이 선인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괜찮습니다. 아무거나 기준으로 삼아도.

그런데 선인은 둘째치고 쭐라소따빤나라도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겁니다. 수다원과는 더 힘들다고 보면은 수다원에 이르기 위한 바로 직전이 '소수다원'이라고 그러고 '쭐라소따빤나'라고 그럽니다. 그거라도 돼야만이 그래도 확신을 가지고 자기 갈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쭐라소따빤나는 간단합니다. 4가지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들 게율 지키는 계율 잘 지키면 되고, 그리고 마음이 나쁜 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자꾸 잘 제어해가지고 살아가면 되고, 그다음에 자신이 세운 견해들 바르고 바르지 않은 것들 그리고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들 이런 견해들을 분명하게 세우면 되는 거고, 그다음에 네 번째는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의심들이 없어야 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간단하잖아요. 네 가지 하는 것은. 그거는 할 수 있죠?

 

그런데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아니다 싶으면 안 하면 되는 거고, 그것은 해야 될 것이다 하는 것은 하면 되는 겁니다.

단지 실행력의 문제인 것이지 여러분들의 능력이 모자라서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쭐라소따빤나도 적어도 이 4가지 조건을 충족을 해야 되는데 삽비라고 하는, 선인이라고 하는 부처님, 부처님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이고, 너무 멀다' 하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뭐 한발짝씩 한발짝씩 해서 따라가야지 어떻게 하겠어.

 

「삽비 경(Sabbhisutta)」에 보면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천상에 천인으로 태어난 분들이 자신들이 어떻게 이 천상에 태어났을까 하고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실컷 나쁜 짓 많이 하고 살다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삼귀의 오계'를 하고, 삼귀의 오계들에 대해서 그래도 확신들이 들고 이러면서,

배가 난파되는 지경에 도달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우왕좌왕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편안하게 앉아가지고 있거든. 그러니 그 사람한테 가서 물어봅니다.

"지금 곧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편안하게 앉아가지고 있을 수 있느냐?" 하고 물어보니까 "나는 걱정 없다. 나는 죽어도 천상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 하는 거라. 그거 확신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느 경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부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천상에 태어난다. 하는 그런 경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천상에 태어나는 숫자들이 자꾸 불어나기에 천인들이 이게 어떻게 해서 천상이 포화상태가 되도록 계속 늘어나는가 하고 조사를 해보니까,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반드시 천상에 태어난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은 적어도 악처 나쁜 곳에는 태어나지 않고 천상에 태어난다 하는 경도 있습니다.

적어도 이 사람은 그런 확신은 있다는 거지. 확신은 있으니까 "나는 죽어도 괜찮다. 죽어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어."

 

죽음의 순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죽음의 순간이 다음에 태어나는 마음을 결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의식이 재생연결식을 결정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죽을 때 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거 같으면 다음 세상은 편한 마음으로 인해가지고 편한 세계에 태어나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마만큼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일으키는 의식이 참 중요한 것인데, 적어도 자신이 행해온 것들에 대해서 '아, 부처님 가르침이 이렇게 좋구나' 하는 확신만 들어도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을 때 돼가지고.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불교를 믿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이 탁 닥쳐오면 먼저 겁부터 내게 됩니다. 죽음이 아니라도 누가 앞에 와서 '훅' 하고 얼굴만 맞대도 편안하게 보는 게 아니라 “엄마야” 그럽니다. 그때 탁 일으키는 것이 그게 마지막 죽음의 순간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이미 두려움의 마음을 가지고 죽기 때문에 좋은 재생을 말할 수는 없는 상태입니다.

하물며 그런데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이 목숨을 놓아야 되는 순간에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참 어려운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그 죽음의 순간에도 아주 평온하게 그냥 고요하게 앉아서 있는 거라. 어차피 죽을 거 같으면 왜 저렇게 편안하게 있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서 그 두려움은 없어야 되겠다 싶어서 물어봅니다.

"어째서 그렇게 두려움이 없이 편안할 수 있는가?"

"나는 매일 삼귀의와 오계를 받아지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나는 죽고 나서 나쁜데 태어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반드시 천상세계에 태어난다."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삼귀의 오계독송하고, 그리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 오계 지키고 그리고 삼귀의에 대해서 자꾸 염송하고 삼귀의에 대해서 확신이 자꾸 들도록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내가 의지하고 나아가야 될 대상은 삼보 이외에는 없구나. 그리고 내가 평상시 생활할 때 꼭 지켜야 되는 것은 이 오계는 반드시 지켜야되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그대로 따라갈 것 같으면 어느 순간에 딱 그런 확신이 듭니다.

아, 나는 죽음이 갑작스럽게 오든 아니면 천천히 제 명을 다해서 죽든지 간에 적어도 나는 나쁜 곳에는 태어나지 않는구나 하고 딱 확신이 듭니다.

거짓말 같이 들리죠? 그런데 사실입니다.

진짜 그런 확신들이 딱 든다는 겁니다. 적어도 그정도는 돼야 됩니다. 그래도 부처님 가르침 배우고 수행한다고 하는 사람들이면. 수행해서 과위를 얻은 것은 그것보다 더 좋겠지만, 과위는 못 얻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런 정도의 확신들은 들어야 안 되겠어요?

 

이거는 꼭 수행으로만 다 되는 것은 아니고 삼귀의와 오계를 지켜도 그런 확신들은 든다는 거라.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적어도 쭐라소따빤나에 이르기 위한 조건들은 충족하게 됩니다. 확신들이 들고, 견해를 바로 세우게 되는 거고,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깨끗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고, 또 계를 지키고, 이게 끝이라.

그래서 내가 죽고 나서는 나쁜 곳에는 절대 태어나지 않는다는 확신들은 가지고 있지. 그러면 그게 딱 확립이 되면 그 사람은 쭐라소따빤나가 되는 거라. 수다원에 이르기 위한 조건들이 딱 갖추어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 사람에게 배워서 아, 이왕 나도 죽을 거 같으면 이 풍랑에서 살아날 방법이 없다고 알 거 같으면, 적어도 나도 저 사람 같이 두려움 없이 죽어야 되겠다 해서 그 사람으로부터 백명 단위로 해서 삼귀의 오계를 받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들은 전부 죽었어요. 배가 난파됐으니까.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은 죽고 나서 전부 다 천상에 태어납니다.

천상에 태어나서 자기들의 과거들을 보고 '아, 참 삼귀의와 오계를 받아 지닌다는 게 이마만큼 좋은 거구나. 그리고 나를 저렇게 인도해주는 사람 저 사람이 나에게는 참 고맙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부처님한테 오게 됩니다.

"부처님 나는 그 사람이 참 고맙습니다. 그 사람은 삼귀의 오계를 지키면서 나쁜 일을 하지 않을려고 했고, 선한 일들은 자꾸 할려고 했고, 그리고 세 번째 영향력이 굉장히 컸다는 거라. 지금 당장 죽음에 이르른 사람도 그 영향력으로 인해서 좋은 데로 태어나게 됐다는 거라. 그 영향력으로 인해서 우리들은 천상에 태어났다는 거라.

그 사람이 참 선인입니다. 삽비입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만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을까?

자식들한테 말빨도 안 먹히지? 자식에게 뭔 얘기하면 그냥 웃고 말 수도 있습니다. 왜 영향력이 미치지 못할까? 적어도 나는 나쁜짓 안 하고 살려고 했고, 또 선한 일 자꾸 할려고 했고, 그런데도 왜 영향력이 그렇게 미미할까?

 

「영향력」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영향력은 생기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하고 확신을 가지는 것.

그래서 그 확신으로 인해서 그 길을 쭉 가니까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어, 저사람 참 잘 살아가네!' 하고 생각이 들면은 그것을 따라하게 되는 거라. '어, 저사람 불교 배우고 하더니 더 잘살아가네! 마음을 더 곱게 쓰네! 어, 나도 한번 따라 해볼까' 그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미친다는 거라.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확신이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거라. 영향력은 내가 미칠려해서 미쳐지는 게 아니라. 내가 유명해져가지고, 아니면 내가 돈이 많아가지고, 아니면 내가 권력이 많아가지고 영향력을 미칠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 영향력은 끝까지 가지는 못해. 언제든지 그 영향력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자신이 돈을 많이 모은 사람도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해.

아,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내 삶이 행복해지고 내가 죽고 나서 천상에 태어나고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거라. 국회의원이 되고 영향력이 많이 미치는 어떤 명예를 가지고 있다고 해가지고 그사람이 자기 자신이 갈 길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거라. 자기자신이 확신을 가지지도 못하는데 그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쳐서 그것이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거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부처님이지만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거라.

"아, 내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 길 외에는 없다!"

자기 스스로 확신하고 그래서 이 길을 다른 사람들한테도 널리 가르쳐야 되겠다. 그랬으니까 가르치게 되는 거라. 똑같이 그렇게 제자들을 거느리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부처님은 2600년이 지나도 지금도 계속 영향력이 미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미칠거라는 거라.

그런데 다른 부류들은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완전하게 탁 들어서 그것이 확립됐을 때 영향력이 있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봤을 때 선인의 조건에서 선한 일을 하고 나쁜 일을 하지 않을려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지만, 영향력이 있어질려고 하고 영향력 그것이 계속되는 조건을 채울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만한 분은 없다는 거라.

여러분도 그런 영향력 아래에 자꾸 있을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나의 모델은, 나의 표본은 부처님으로 잡아야 됩니다. 부처님이 표본으로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영향력은 끝까지 가지 못하고, 또 내 삶의 질이 바른 방향으로 바뀌어나가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천인들이 몇 가지를 얘기합니다.

 

그런 선인들과 가까이 지낼려고 하라.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부처님 옆에 있을 수가 없으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자꾸 접할려고 해야 됩니다. 법문을 통해서든 책을 통해서든 아니면 어떤 경우든지 부처님 가르침을 가까이 자꾸 하라는 거라.

 

두 번째 부처님과 자주 얘기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살아있을 때니까. 그럼 여러분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가지고 같은 도반들 간에 자꾸 얘기를 하라는 거라.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은 이런 말씀을 했다, 부처님은 저런 말씀을 했다" 하고 서로 얘기할 수 있는 상황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담마의 방식에 대해서 알려고 해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방식을 자꾸 알려고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참 잘못 아는 부분들 중에 하나인데, 담마의 방식은 어떤 걸까?

수행의 예를 들어봅시다. 대부분 사람들은 수행한다 할 것 같으면 좌선하고 경행하는것만 자꾸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담마의 방식입니까? 그게 담마의 방식일 거 같으면 다른 데는 담마가 없어야 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담마가 없는 거라.

그런데 담마는 어디든지 있게 되는 거라. 내가 말을 할 때, 내가 밥을 먹을 때, 내가 뭔가 행위를 하고 있을 때, 그 속에서 담마의 방식대로 살아가야 되는 거라.

 

그런데 그거는 자꾸 놓쳐버리고 수행한다 할 거 같으면 좌선하는 것만 자꾸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거는 그냥 또 놓쳐버립니다. 담마의 방식을 알아서 그것에 따라서 살아가야 되는데 그렇게 자꾸 못하는 거라.

담마의 방식을 알고 그 담마의 방식을 자꾸 실천할려고 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기 자신의 행위,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이 점점 더 명확해져야 됩니다. 분명해져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좌선을 하더라도 좌선에서 대상들이 분명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좌선만 자꾸 고집하다 보면 좌선은 대상이 단순해져 버리게 됩니다.

힘들이 생기지 않으면 대상 자체가 자꾸 희미해져 버립니다.

 

담마의 방식은 좌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좌선에도 있고, 생활하는 것에도 있고, 나의 마음에도 있고, 나의 말에도 있고, 나의 행위에도 있게 됩니다.

그게 담마의 방식입니다. 담마의 방식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선인이 가고 있는 길을 걸어가게 되기 때문에,

선인이 가는 길을 걸어가게 되면은 나빠질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 길을 따라가게 되면은 화를 내는 나쁜 길을 멈추게 되든지, 그것을 적게 내든지 해가지고, 더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거라. 남들에 대해서 만나면 다툼이 자꾸 있는 것도, 그 선인의 길을 가다 보니까 다툼이 점점 더 적어지고, 오히려 공존하고 화합되게 살아가게 된다는 거라.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거라.

 

그다음에 밖에서 얻을 수 없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아, 모든 생겨나는 것들은 무상한 것이고, 불만족스럽고 집착할만한 것이 어떤 것에도 없다 하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그것들은 놓아버리게 된다는 거라. 밖에서는 그런 지혜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내가 선인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할 것이 없어져버린다는 겁니다. 당연히 다음 세상도 고민하고 괴로워할 것이 없는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천상에 태어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거고.

 

이게 인제 천상세계에 살던 천인들이 그런 얘기를 한 겁니다.

 

부처님이 여기에 하나를 더 첨가합니다.

너희들 말도 맞다. 선인의 길을 따르고, 선인은 이런 것이다 하는 것들이 확립이 돼서 그 길을 알고 할 것 같으면 그와 같은 일들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는 거라. 그런데 하나 더 있다는 거라.

왜 선인의 길을 따를려고 하는데? (수행자 대답 : 해탈하기 위해서)

그렇지. 괴로움을 종식시키고 해탈한다는 거라!

 

"선인의 길을 따르고 부처님을 선인으로 확신을 가지면 해탈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의 가장 친한 친구로, 나의 가장 좋은 벗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해탈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선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는 거라. 나쁜 행위들을 하지 않게 되고 선한 행위들을 더욱 하게 되고, 자신이 지닌 영향력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점점 더 미치게 되는 거라.

영향력이 미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들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물에 빠져 죽어야 되는 운명에 처한 배에 탄 그 사람도 자기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들이 있다는 거라.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고.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런 영향력은 생기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삼보와 오계 만큼 그런 확신들을 가지기 좋은 대상도 없습니다.

그것을 다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딱 하나만 해보십시오.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확립만 분명하게 하라는 거라. 그것을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그 확신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은 나쁜 길로 가지 않을려고 하고, 바른길로 갈려고 하게 되는 거고. 그것으로 인해서 영향력은 점점 더 미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들도록 더욱 더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담마를 알기 위해서 해야 되는 10가지, 「테라담마」라고 그럽니다.

더욱 더 노력해서 법문을 자주 듣고, 법문을 자주자주 암송하고, 그리고 그 가르침들을 자꾸 따를려고 하고, 그러한 사람들과 어울려서 자꾸 담론을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내가 일주일에 한번씩 해야 되는 포살-우뽀삿타라고 그럽니다. 삼귀의 오계, 그리고 그 포살일에는 팔계를 지킬려고 하는 것 그것을 계속 지켜나갈려고 하게 되는 것.

그리고 내가 존경의 대상들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자꾸 가지게 되는 거고, 실천해야 될 것들은 더욱 더 실천해야 되고, 열 가지 바라밀과 수행해야 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자꾸 점점 더 갖추어나가게 되는 거고, 그래서 내가 가는 방향들이 해탈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그래서 그 닙바나를 향해서 나아갈려고 하고, 이런 것들을 좀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그걸 테라와다 불교의 테라담마 열 가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적어도 그러한 방법들을 알고 있고, 그러한 길들을 또한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그걸 빨리 확립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영향력이 확대되는 사람! 더 나아가서 삽비라고 하는 선인의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자꾸 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질의응답 >

수행자 질문 : 스님, 그러면 천상에 태어나는 생명들도 마찬가지로 전생, 전전생의 업의 과보는 받아야 될 거 아닙니까?

스님 : 받죠.

 

수행자 질문 : 그런데 보통 천상의 생명들의 수명은 정해져 있는 거 아닙니까?

스님 답변 : 예. 수명은 우리보다는 훨씬 길죠. 훨씬 길다고 하더라도, 쉽게 말하면 천상 세계에서 수명이 끝나야만이 다음 생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하면 과보가 드러나는 것이 있고, 과보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천상이라 하더라도 아수라도 천상세계의 영역에 속합니다. 과보가 드러나는 것은 낮은 천상세계에 태어났을 경우에는, 그 천상 수명이 끝나고 나면 자신이 받아야 되는 과보가 드러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높은 천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그 수명이 길 뿐 아니라 그 과보가 드러날 수 있는 조건들이 엷어져버립니다. 그러면 천상에서 죽음을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 과보를 받아서 악처에 태어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겁니다.

그래서 "과보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고.

 

그런데 만약에 내가 선한 일을 지었는데 내가 지금 악한 곳에 태어났다. 그러면 그거는 과보가 드러나기가 쉽습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한 것은 언제든지 다시 드러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거는 그 악한 세계에 태어나서 생명을 마칠 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수명은 인간보다 훨씬 짧습니다. 그래서 그 생명이 다하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그 전 전생의 과보에 인해서 그 악처에서 빨리 벗어나서 천상세계에 태어나든지 인간세계에 태어나든지 그 과보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선한 과보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거의 미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악한 과보들은 안 드러나는 것들이 많다는 겁니다.

 

그마만큼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맞을 때, 임종의 순간에 일으키는 마음이 그다음 생을 좌우하기 때문에, 사실은 그것이 과보 보다는 더 중한 영역으로 차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선인선과 악인악과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일으키는 생각(마음)이라는 겁니다. 됐습니까?